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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56호] <제인> : 당연함을 바라고 오롯하게 산 여인

<제인> : 당연함을 바라고 오롯하게 산 여인

고 재 혁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당연함. 절대성과 상대성을 동시에 가진 말이 아닌가 싶다. 너무 뻔해서 말을 꺼내는 것이 어색한 일에 대해서 쉽게 쓰는 말이기에 당연하다는 말은 내재적으로 절대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당연하다는 말은 상대적이다. 누군가에게 당연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 당연한 일에 포함되지 않아서 당연하지 않다고 느껴진다. 그렇기에 당연함 혹은 당연하다는 말은 외재적으로 상대적이다. 이런 당연함의 내재적 절대성과 외재적 상대성은 서로 충돌하기 마련이다. 당연하다는 말이 아무 문제없이 사용되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갈등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당연함의 절대성만 발휘되는 세계는 있을 수 없다. 개인에 따라 당연함의 정도가 다르기에 갈등은 항상 발생한다.

 

  항상 갈등이 존재하는 현실은 답답하고 불편하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기에 당연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 상대방과 만나다 보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다. 아니, 때로는 서운하다는 감정이 모자랄 정도로 답답함, 괴로움, 외로움, 혐오 등 온갖 감정들이 솟구친다. 솟구치는 감정에 휩쓸리며 서로 갈등하고 서로를 혐오하는 시대. 서로가 자신의 당연함만을 주장하는 시대에 모두가 길을 잃고 헤매는 혼란의 시대. 당연하게 옳다는 것 자체를 더 이상 믿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분명하게 옳은 것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여전히 존재하는 듯하다. 인간을 혐오하고 세계에 희망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기대 쉬어가며 자기 자신이 누군지 생각해 타인과 소통한다. 타인과 소통하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깨달으며 온전히 당연한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연극 <제인>은 영국의 소설가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각색해 총 110분의 시간 동안 2명의 배우가 8명의 인물을 연기하는 1인 다역의 젠더 프리 연극이다. 이런 딱딱한 소개는 다 치우고 가볍게만 말하자면 근대 유럽의 고풍스럽지
만 어딘가 우중충한 저택과 학교를 배경으로 제인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너도나도 함께 흐뭇해지는 연극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흐뭇한 감정만이 아니라 제인에게 동경과 존경의 마음도 갖게 되었다. 왜일까? 어쩌면 제인이라는 여성이 오롯하게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타인과 소통하며 당연한 삶을 추구하는 모습이 어른으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갈등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며 타인과 계속해서 소통하고자 하는 사람. 극중 제인의 모습은 오롯이 자신으로 살아가는 어른이었다.


  이 연극에서 제인이 굉장히 이상적으로 그려졌다는 생각은 든다. 상상력이 풍부하면서도 상대방과는 이성적으로 대화하려고 하며 자신의 말을 먼저 하기보다는 상대의 말을 경청한다.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추면서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똑바로 하며 불의한 일에 대해서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는다.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연극에서 제인은 시종일관 어른의 모습이다. 물론 이런 제인에게도 인간적인 면모는 있다. 처음으로 느끼는 열정적인 사랑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당황하고 서로 사랑한다고 표현할 때는 자신의 사랑을 열렬히 드러낸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제인은 자신의 모습을 잊지 않는다. 감정에 휩쓸려 자신을 잊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모습을 지키면서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한다. 중용이다. 물론 중용의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제인이 이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다. 제인의 모습이 가장 이상적으로 드러날 때는 이중 결혼(?)을 하려고 한 로체스터와 파혼한 뒤 늦은 밤 로체스터의 부인인 베르타를 찾아갈 때이다. 로체스터가 결혼한 사실을 몰랐기에 자신 역시도 피해자인 상황에서 제인은 베르타를 찾아가 미안하다고 말한다. 다른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위로하며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사죄하는 모습. 타인을 자기 스스로만큼이나 사랑하고 궁금해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관용이다.


  끝없는 갈등과 무한한 혐오의 고리가 연쇄되는 현대 사회에서 중용과 관용을 모두 지키는 것은 어렵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끝없이 성찰해야 하며 그만큼 타인을 바라보고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제인은 완벽해 보인다. 하지만 제인은 완벽하지 않다. 감정에 휩쓸리기도 하며 좌절할 때는 한없이 약해지고 작아진다. 작은 인형을 안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싫어하는 이에게는 저주를 퍼붓기도 하고 외면하기도 한다. “저 사람도 사람이구나.” 싶은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제인은 그런 모습을 계속 안고 가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일어서고 자신의 좌절을 열정으로 연결하며 세상에 도전하고 선(善)과 도덕을 행동으로 옮기며 절대적인 당연함을 추구한다. 회의적인 상대성에 머무르며 타인과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존재자이기에 당연히 옳은 삶을 추구한다. 완벽해지려는 것이 아니라 완벽을 향해 끝없이 나아간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면서도 타인과 소통하며 그를 사랑하고 인정하는 인간을 향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완벽해지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계속해서 자기 자신만을 강조하고 강요할 것이며 누군가는 세태에 지쳐서 자기에게만 집중하고 세상을 등질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 우리 각자는 혼자가 되었다고 느낄 것이며 결국 아무도 ‘나’를 바라봐주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상대적인 당연함이 충돌하는 가운데 점점 더 외롭고 지쳐 좌절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나에게도 나만의 ‘제인’이 있을 것이다.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자신을 보여주고 당당한 제인. 어디로 가야 볼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절대적인 당연함을 추구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제인. 


  어디서 나만의 제인을 만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제인의 모습이 있다는 것 말이다. 인간이기에 누릴 수 있고 추구할 수 있는 당연함을 우리 모두는 원한다. 어떻게 발현시켜야 할지 모르는 것도 아니다. 어린 시절 배웠던 아주 간단한 선과 도덕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이미 절대적인 당연함을 기억하고 있다. 이상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외면하고 낡았다고 생각하며 무시한 것들이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한다. 살아가는 와중에 완벽을 보지 못해 좌절할 수 있다. 불합리에 지쳐 쓰러질 수 있다. 다만 잊지는 말자. 나는 이미 제인을 알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당신 안의 제인을 느끼며 다시 일어설 수 있길 바란다. “제인, 그 베일을 쓰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