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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57호] <명량>의 사회에서 <어벤져스>의 사회로

배 상 민 서강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강사

 

 출처: http://www.cine21.com/movie/info/?movie_id=39921  출처: http://www.cine21.com/movie/info/?movie_id=30742

 

  외계인이 침공해 온다. 퓨리 국장은 지구 어디엔가 흩어져 있는 히어로들을 모아 어벤져스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 히어로들은 외계인의 침공에 맞서 싸운다. 중간에 히어로들끼리 의견이 맞지 않아 티격태격하기는 하지만 어찌 됐건 침공해 온 외계인들은 다시는 지구를 넘보지 못할 만큼 처참하게 깨진 후 물러난다.

 

  이는 한국에서 유난히 흥행했던 히어로물, 영화 <어벤져스> 시리즈의 공통적인 플롯이다. 그런데 여기서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히어로들을 모아서 굳이 쉴드라는 국가 조직에 편입시켜 싸우게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히어로들은 공무원으로 재취업할 필요가 없을 만큼 생활이 안정적이다. 아이언맨 수트의 주인인 토니 스타크는 재벌이고, 헐크는 잘나가는 과학자이고, 캡틴 아메리카는 직업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 그 뿐인가 토르는 무려 신이다. 그런데 영화는 이런 이들을 모아서 굳이 국가조직에 편입시켜 외계인과 싸우게 한다. 사실 자기들끼리 모여서, ‘우리 지구 한 번 구해 볼까?’ 하고 의견을 맞추면 그만인 일인데 말이다. 

 

  대체 이들은 왜 이러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조금 다른 장르의 영화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거의 제작되지 않지만, 미국 건국 설화의 지위를 갖는 서부극을 보자. 어떤 카운티가 무법자들에게 유린을 당한다. 때마침 광야에서 총잡이가 카운티로 들어온다. 마을 사람들은 이 총잡이를 보안관에 임명한다. 그리고 보안관이 된 총잡이는 마을 사람들을 대신해서 무법자들을 물리친다. 여기서도 <어벤져스>와 비슷한 장면이 발견된다. 프리랜서인 총잡이를 굳이 보안관이라는 공적 지위에 임명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할리우드 영화에서 공동체의 구원자에게 공적 지위를 맡기는 설정은 굉장히 오래된 일이며, 너무나 자연스러운 설정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다. 공동체를 구원하고자 하는 자에게 공적 지위를 부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공동체의 위기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혹은 공동체를 대리하는 자가 구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쯤해서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국가가 나서듯, 공동체가 위기에 처하면 공동체가 나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반문할 수 있다. 그런데 글쎄, 그게 아니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명량>이라는 영화가 있다. 모두 알다시피 이 작품은 200척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일본군 침입에 맞서,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맞선 명량해전을 재해석하고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이순신은 군인으로서 말할 것도 없이 국가 소속의 공무원이다. 그런데 당시의 국가인 조선은 이순신의 해군을 해체해서 육군에 편입시키라는 압력을 넣는다. 하지만 이순신이 이에 굴복하지 않자, 지원을 거의 끊어 버린다. 결국 이순신은 자신이 가진 병력으로는 일본군과 맞설 수 없어 백성들과 힘을 합쳐 외적을 물리친다. 

 

  그런데 이 플롯을 살펴보면 <명량>에서는 <어벤져스> 시리즈와 명백히 반대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둘 다 외적의 침입을 받았고, 공동체를 구원하고자 하는 히어로가 이에 맞선다는 기본 구도는 같으나, <명량>에서는 오히려 국가 소속의 영웅이 백성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공동체의 위기에서 공동체는 공동체의 일원에게 사적인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명량>은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다. 이때 조선의 국왕인 선조가 맨 먼저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신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국가는 부재했고, 이 국가의 부재를 대신한 것이 조선의 의병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국가 소속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구성한 군사조직이다. <명량>은 임진왜란이 사실상 국가 부재를 대신한 의병들의 전쟁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국가 부재는 임진왜란, 단 한 번에 그치는 장면이 아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제일 먼저 남쪽으로 피신했다. 그것도 국군이 반격을 하고 있다는 방송으로 국민들을 기만한 채 말이다. 이때도 외적의 침입을 맞았음에도 국가는 부재했다. 뿐만 아니라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는 금 모으기 운동도 있었다. 정부의 경제 운영 실패로 인해 IMF라는 외부의 경제 세력이 거의 내정 간섭에 준하는 구조조정을 지시했던 위기 상황을 맞아, 전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장롱에 있던 금을 모아 국고를 채우고자 했던 것이다. 이 역시 일종의 경제적 의병 활동으로 보인다. 

 

  이처럼 한국 역사에서 국가적 위기 상황마다 국가의 공적 책무를 개인 혹은 가족이 떠맡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를 두고 이득재는 가국체제(家國體制)라고 칭했다. 가국체제란 문자 그대로 가가 곧 국이 되는 체제, 즉 국가가 수행해야 하는 공적인 책임을 가족에게 완전히 전가시키는 국가체체를 일컫는데, 한 마디로 사회라는 공적인 영역이 부재한 체제를 가리킨다.1) 아울러 빅터 터너는 사회극을 논하면서 사회에서 현재화된 극은 암시적인 사회과정을 거쳐 무대극으로 상연되고, 다시 무대극은 암시적인 수사구조를 거쳐 사회극이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2) 한 마디로 무대극이 사회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사회 역시 무대극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사회극 이론에 따르면, 위기 때마다 한국 사회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가국체제는 현재화된 극이라 볼 수 있고, 이는 일종의 무대극이라 할 수 있는 한국 영화에 반영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리고 한국 영화에 반영된 가국체제는 또다시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 <명량>처럼 말이다.

 

  <명량>외에도 가국체제를 담고 있는 한국 영화의 사례는 여럿이다. 대표적으로는 <국제시장>이 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한 후, 전쟁의 폐허에서 가족을 건사한 것은 오로지 덕수라는 장남의 힘이었다. 그는 남동생의 대학등록금과 가족들이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광부가 되어 독일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갱도가 무너져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그가 떠올린 것은 또 다른 가장인 아버지였으며, 그를 구원해준 이는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되는 파독 간호사 영자였다. 덕수의 위기 상황에서, 외화를 벌기 위해 그를 독일로 파견한 국가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후 덕수는 여동생의 결혼자금과 고모의 유산인 잡화점 꽃분이네를 지키기 위해 베트남으로 간다. 베트남에서 덕수는 총에 맞아 다리를 저는 불구가 되지만, 이번에도 그를 베트남으로 파견한 국가는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교육, 주거, 결혼이라는 사적인 부분과 공적인 부분이 겹치는 영역에서 그 책임은 오롯이 개인인 덕수의 몫이다. 심지어 전쟁이라는 국가적 재난으로 헤어진 동생을 찾는 일조차 장남인 덕수의 책임이다. 

 

  최근에는 넷플릭스에 방영된 영화 <승리호>에서도 가국체제의 일면이 엿보인다. 이 영화의 주인공 태호는 우주 쓰레기 충돌이라는 사고로 인해, 입양한 딸 순이를 잃는다. 그런데 우주를 떠도는 순이의 시신을 찾는 일은 오로지 태호의 몫이다. 그가 합당한 비용을 치러야만 국가는 순이의 시신을 인도해 준다. 물론 영화에서 이 사건은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의 비정한 면을 꼬집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주 쓰레기의 충돌이라는 사고는, 개인이 책임지기 어려운, 공적인 영역의 재난이며, 따라서 이 재난에서 희생된 이의 수습 역시 공적 책임임에도 불구하고, 가족이 그 비용을 댄다는 설정은 다분히 가국체제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설정을 한국 관객들은 무리 없이 받아들인다.

 

  물론 공동체의 위기 상황에서 사적 영역의 구성원이 공적 영역의 책무를 떠맡는 일은 숭고할 수 있다. 그러나 공적 영역의 책무를 떠맡아야 하는 국가가 부재한 상태에서 개인이나 가족이 이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위기 상황에서 공동체의 구성원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책무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에서 국가는 이 책무를 번번이 방기해 왔다. 그 때문에 개인과 가족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공적 영역의 책무를 떠맡아왔다는 점을 간과하기 어렵다. 

 

  작년 COVID-19 상황에서 뜻밖에 K방역 붐이 일었던 사실이 있다. 가국체제의 틀에서 이 일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한국인은 국가적 재난의 상황을 맞아 가국체제가 아니라 국가체제에서 위기를 극복해 나간 경험을 최초로 목격했기 때문에 환호를 보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이는, 다시 해석하면, 21세기의 한국인은 위기가 닥쳤을 때 가국체제를 폐기하고 공적 영역에서 이 위기를 극복하는 것을 강렬하게 희망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지표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은 <명량>의 사회가 아니라 <어벤져스>의 사회로 이행할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1) 이득재, 2001,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서울: 소나무), 17.
2) Turner, Victor, 1996, 『제의에서 연극으로』, 이기우·김익두 옮김, (서울: 현대미학사),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