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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2호] 가난해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양 아 라 전 서강대학원신문 편집장

 

“어떤 가난은 사람을 쓰러뜨리고 어떤 가난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 우린 다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잖아. 난 자랑스러운데? 그 시간을 단돈 20억에 넘길 순 없어.” tvN 드라마 ‘작은 아씨들’ 극중인물 둘째(오인경) 가 첫째 언니(오인주)에게 하는 말. 이제 더는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은 첫째는 가난해도 가치를 지키고 싶은 둘째에게 “허세가 쩐다”고 화를 냈다. 이 장면을 보며 내게 가난이란 무엇일까 생각했다. 

 

가난이란 무엇일까?

가난을 겪으면서 느끼는 감각이 있었다. 내게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잃었다는 상실감과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나를 짓눌렀다. 그 러나 모두에게 그 고통은 같지 않았다. 가난의 크기, 무게, 고통은 사람들 이 느끼기에 모두 다르다. 그래서 가난을 단지 숫자로만 정의할 순 없을 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모두가 가난을 겪는다고 생각한다. 그게 물질적 가난이든, 마 음의 가난이든. 나 역시 가난과 함께 자랐다. 재래식 화장실과 연탄보일 러가 있는 집에서 살았고, 중학교 내내 옷은 딱 두 벌뿐이었다. 빚이 있었 고, 압류 딱지가 집에 붙기도 했다. 가난에 서글퍼지기는 했지만, 부끄럽 지는 않았다. 물론, 이 가난에서 더 미끄러지면 우리 가족은 끝이라는 생 각은 있었지만. 이 가난이 우리 집을 풍비박산 냈지만, 언젠가 지나갈 ‘태 풍’이라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했다.

 

일상의 재난이 반복되면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다 
가난하다는 건 불안과 불편함의 연속이라는 것. 폐허에 홀로 서 있는 것 처럼, 일상의 재난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중학교 때부터 대학교를 졸 업할 때까지 반지하에서 살았다. 방 두 칸에 네 식구가 함께 옹기종기 모 여 살았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 반지하에 도둑이 들었다는 거다. 학교 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창살이 뜯겨 나가고 집안의 가재도구가 모 두 흩어져 있는 모습을 한참을 멍하니 바라본 적이 있다. 우리 가족에겐 안전하게 살 수 있고 공간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영화 <기생충(2019)>을 보면서, 특히 반지하 집이 침수되는 장면에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위에서 아래로 밀려 내려오는 폭우는 어떤 가족에겐 피할 수 없는 재난이었으니까. 지난 9월 8일 서울에 집중호우가 발생했 고, 침수된 지하 주택에서 가족 3명이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다운증후군 이 있는 언니와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던 동생과 동생의 딸이 집안에 들 이닥친 빗물에 고립돼 참변을 당했다. 가장 편안해야 할 집이 가장 위험 한 공간으로 변한 순간이었다. 

 

어느 한 가족의 죽음이 우리에게 말하는 건 무엇일까?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서 가난의 고통이 세상에 알려지곤 했다. 지난 8월 21일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의 한 다세대 주택에서 ‘세 모녀’가 숨진 채 발 견됐다. 암과 희소병으로 투병 중이었던 어머니와 딸 둘이 살던 집이었 다. 세 모녀는 월 1만 원대 건강보험료를 16개월째 못 내는 상황이었다. 생활고를 겪었던 세 모녀는 기초생활수급 가구가 아니었다. 복지의 사각 지대에 놓인 사람들이었다. 2014년 송파 세 모녀 죽음이 떠오르는 사건 이었다. 큰딸의 만성 질환과 어머니의 실직으로 생활고에 시달린 세 모 녀는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메모와 함께 전 재산인 현금 70만 원을 집세 와 공과금으로 남기고 죽음을 맞이했다. 빈곤 가족의 비극은 뉴스가 됐 다. 납작한 뉴스의 한 단면만으로 세 모녀의 고통스러운 삶을 그려낼 수 는 없었다. 


이 잔혹한 생존 게임에서 우리는 무엇을 걸었는가? 
로또가 당첨되거나 주식으로 떼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 싶은 꿈은 누구나 한 번쯤 그려보는 미래다. 그리고 빚에 허덕이고 인생의 절벽 끝에 서 있 는 사람이라면, <오징어 게임>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 해 볼 법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징어 게임>. 그 시작은 황동혁 감독의 '생 존을 위한' 상상이었다.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황 감독은 나라도 이런 게 임에 참가하고 싶다는 생각에 오징어 게임의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고 말 했다. 
<오징어 게임> 속 인물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단 한 번의 기회로 생사가 결정되는 생존 게임. 하나뿐인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456명의 게임 참가자 모두 456억 원의 상금을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이 상금은 부자들에겐 위 험한 놀이를 구경하는 입장료 혹은 게임머니였을 뿐이었다. 

 

“미안해요, 우리가 당신을 놓쳐서”

위험하고 헛된 꿈에서 벗어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자. 대학원을 졸업하 고, 정글 같은 사회로 들어갔다. 나는 오늘도 먹고 살기 위해 일한다. 회 사에서는 내 성과가 모두 측정되고 기록되고 있다. “여기는 회사니까” “회사는 당신의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회사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내가 성과가 나온다는 것을 숫자로 증명해 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난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인력이니까. 
반복되는 야근에 지쳐 출근길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을 때, 영화 < 미안해요, 리키>를 떠올리곤 한다. 택배기사 리키는 부러진 손가락, 보이 지 않는 한쪽 눈으로 핸들을 잡았다. 리키의 가족은 리키에게 일하지 말 라고 말리지만, 리키는 울며 일터로 향한다. 자신의 일자리는 일회용품처 럼 언제든 대체될 수 있으니까. 리키는 쉴 새 없이 일하지만, 일이 오히려 한 인간을 위험한 삶의 늪에 빠트렸다. 
<미안해요, 리키>의 원제는 ‘미안해요, 우리가 당신을 놓쳐서(Sorry, We Missed You)’다. 이는 리키가 부재중인 집 앞에 택배를 두고 갈 때 고 객을 위해 메모지에 적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오히려 노동의 시스템 속에서 보호받지 못한 리키와 같은 사람들에게 돌려줘야 할 사과다. 
 감정 없는 복지 시스템과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대화를 단절하고 숨어 들어간다. 그러나 우리가 촘촘한 인간 그물망과 공 동체를 형성하려고 노력하기보다, 가난한 이들이 보이지 않는 분리 사회 를 만든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다. 숨지 말고 가난의 고통을 이야기하자고, 대화를 멈추지 말고 함께 살아보자고 말이다. 그래서 가난 해도 죽지 않고 어떻게든 살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세상이 아직 살만한 곳이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