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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2호] 전세 사기 문제가 현 정치의 우선순위가 될 수 있을까?

전 민주당 비상대책위원 권 지 웅 

 

전세 사기, 깡통 전세라는 말을 들어보셨는가? 자세한 내용은 모르더라도 대게 들어봤을 단어이다. 본인이 세입자이건 아니건 뉴스에서 피해자 이야기를 전해 듣거나 혹은 수백 명에게 전세 사기를 치고도 처벌받지 않은 사건을 들어본 사람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종부세, 재산세라는 말도 전세 사기 못지않게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지난 몇 년간 주택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재산
세, 종부세라는 말이 많이 회자되었다. 집값이 오르면서 함께 오르는 게 재산세이지만, 재산이 늘어났다고 수입이 늘어난 것은 아니니 가파른 재산세 인상은 가계에 부담이 된다.


이 두 사안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경제적으로 부담을 주고 주거와 관련되어 있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하지만, 사안의 주요
관심층이나 해당 사안이 권리를 침해하는가 아닌가 하는 측면에서 다르다. 전세 사기는 주로 세입자의 관심 사안이고 전세 사기는 주거권을 직접 침해한다. 반면에 재산세 증가는 도심에 주택을 소유한 사람에게 관심 사안이며 특정 권리가 침해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여튼 관심 대상층이 다르긴 하지만 두 사안 모두 현 사회의 주요 이슈이다.


하지만 이 두 사안이 정치권에서 다뤄지는 모습은 전혀 다르다. 종부세, 재산세 조정을 위한 의원 총회 혹은 고위 정당-정부-대통령실 회의 소식을 들어봤어도, 전세 사기 문제 해결을 위한 00당의 의원 총회 혹은 당-정-대 회의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필자가 못 들어봤을 수도 있겠으나 지난 10년간 필자가 주거 문제를 다루었던 것을 생각하면 ‘전세 사기’ 문제 해결을 전면에 걸고 열린 정치권의 고위직 회의는 없었다고 보는 게 맞다. 모두 중요한 이슈이지만 하나는 정치의 중심에서 다루어지고 나머지 하나는 주변부에 놓여있다. 왜 그럴까?


집을 가진 사람들이 힘이 센 사람들이고 집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힘이 약하니 그런 것 아니겠냐?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뭔가 의아하다. 최소한 정치에서만큼은 모든 시민이 동등한 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전체 국민의 45% 가까이가 세입자로 사는 국가에서 전세 사기 문제가 우선순위에 계속 밀려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과 충돌하는 지점이다.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에서야 돈 많은 사람의 영향력이 큰 것을 인정할 수 있지만 민주주의 체제의 정치에서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최소한 원칙적으로는 그렇지 않은가. 이 문제를 조금 더 살펴보자. 한 지역에서 정치적 요구가 수합되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좀 더 분명하게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필자가 사는 동에는 11개의 ‘직능단체’라는 것이 있다. 이 직능단체는 동 홈페이지에 게시되어 있고 매월 동장과 정례회의
를 한다고 알고 있다. 각 단체는 자신들의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를 동장에게 전하고 그에 대한 답변을 받는다. 회의를 마치면 식사도 종종 한다. 그 속에서 나온 이야기가 동의 공식적인 주민 의견이 된다. 이 의견들은 구청장과 국회의원에게 전해진다. 11개의 직능단체는 주민자치회, 통장단협의회, 새마을지도자협의회, 바르게살기위원회, 자율방재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당 모임의 대표자와 구성원들이 자기가 소유한 집에 살고 있는지, 세입자로 살고 있는지 일일이 수합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어느 쪽 비율이 높은지는 짐작할 수 있다. 직능 단체의 대표 혹은 구성원은 대체로 집을 소유하고  오랫동안 해당 지역에 사신 분들이 많다. 그 중엔 본인의 집만이 아니라 몇 채의 집을 소유해서 임대업을 하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물론 구성원 중에 세입자도 계시겠지만 그 비율은 적다고 확신한다. 필자가 직접 모임에 참석해보기도 했고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가진 확신이다.


필자가 거주하는 곳 외에도 다른 동 직능단체의 구성도 비슷하다. 주민자치회, 통장단협의회, 새마을지도자협의회, 자율방재단 등을 대개 포함하고 추가로 지역별 특성을 반영해서 교회모임, 복지협의체 등이 추가되는 식이다. 해당 지역 사람들의자가·임차 비율이 어떻든 세입자로 사는 사람보다 집을 소유한 사람들의 입장이 더 깊이 정치권에 전달된다. 이 같은 방식의 의견 수렴은 매월, 거의 모든 행정동에서 이뤄지는 일이다. 


광역 단위의 행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2019년 서울시에는 4,264명의 외부 자문위원이 있었다. 외부 자문위원이란 △△정책 위원회, □□자문 위원회 등의 서울시 정책을 결정하는 위원회에 포함된 공무원이 아닌 위원들을 말한다. 외부 자문위원들은 시 정책을 결정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외부 위원 4,264명 중 39세 이하는 219명, 전체의  5% 정도였다. 나머지 95%에 해당하는 4,045명은 모두 40대 이상이었다. 당시 서울시에 거주하는 19세~39세 이하 시민은 전체의 30%에 가까웠다. 젊은 시민은 ‘나이를 먹은 후에나’ 서울시에 자문위원 형태로 의견을 낼 수 있는 상태였다. 최소한 통계적으로는 그랬다.


만 35세 이하의 청년 중 약 80%가 세입자로 살고 있음을 고려하면 세입자의 이야기가 서울시에 전해지는 것도 확률적으로
적었을 것이다. 서울시의 세입자 비율이 지난 35년이 넘도록 한 번도 절반 이하인 적이 없더라도 말이다. 연령이나 주택 점유 형태에 의해 시민참여가 제한된다는 법은 당연히 없다. 만약 있다고 해도 위헌이겠지만, 현실에서 행정과 정치의 운동장은 균형을 크게 잃었다.

 

주택소유자와 세입자 간의 정치적 불균형은 같은 모양으로 1인 가구와 4인 가구, 비정형 노동자와 정규직 노동자, 수도권  외 시민과 수도권 시민에게도 적용된다. 이들도 정치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 있다. 1인 가구, 비정형 노동자, 비수도권 시민에게 1인 1표라는 말은 이제 그만하자. 촘촘하게 짜여 있는 기득권 정치는 성(城) 밖 사람들을 성안으로 쉽사리 들이지 않는다. 


정치에서조차 시민이 동등하지 않다는 지금의 현실이 바로 ‘청년 정치’를 호출한 배경이다. 사회에 진입하지 못한 사람을
지칭하는 다른 말로서 ‘청년’이라는 말은 종종 쓰인다. 쉽게 이해되고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청년’이라는 말은 사회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힘을 갖고 있다. 이 직관적인 ‘청년’이라는 말을 빌려서 ‘청년 정치’는 사회에서 영향을 미치며 기존의 질서와 부딪힌다. 사회가 호출한 ‘청년 정치’의 본질은 ‘사회에 진입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이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갈망이다.


물론 청년 정치는 약점이 있다. 이미 실패한 적도 있다. 청년이라는 연령 범주는 젊은 기득권까지 포함하는 것이기에 청년
정치 = 새로운 정치라는 등식은 무조건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젊은 정치인에게 권한을 부여했는데 청년 정치인이 기득권과 다르지 않았다는 청년 정치의 실패도 있다. 또한 젊다는 것 그 자체가 정치적 역량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충분히 지적받을 지점이고 필자를 포함한 청년 정치인들이 반성하고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청년 정치의 한계 때문에 청년 정치를 그만하자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면 ‘청년 정치’는 그 자체로 완벽
한 것이어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견고하고 촘촘한 현재의 정치에 조금이라도 균열을 만들어보자는 수단으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략이 실패했다고 단정 짓기에는 아직 이르다. 동시에 새로운 정치를 만드는 유일한 수단이 청년 정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효과적인 다른 전략이 있다면 그것도 해야 한다.


세상이 변하는 만큼 제도도 변해야 한다. 현실을 따라오지 못한 낡은 제도는 시민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소외된 시민
들이 다시 주인공으로 서는 정치를 만들어야 한다. 청년 정치는 수단일 뿐이다. 유일한 수단이 아니라 그저 유효한 수단이다. 우리에겐 더 많은 청년 정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