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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호] 패러다임: 문화를 파괴하는 문화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황 동 준

 

<출처: pixabay>

 

어렸을 적, 컴퓨터를 망가뜨려 수리를 맡겨야 했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오늘날의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아마 초등학생 시절, 컴퓨터의 용량을 줄이고자 C 드라이브에 있는 빈 폴더를 ‘모두’ 지웠다. 아무런 파일도 없는 빈 폴더인데도 꽤나 큰 용량을 잡아먹고 있어 깔끔하게 처리하자, 컴퓨터는 아주 가벼워졌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컴퓨터를 켜보자 나는 사고쳤다는 것을 직감으로 깨달았다. 알고 보니 그 빈 폴더들은 겉보기에는 쓸데없어 보여도, 사실은 파일들이 숨겨져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던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벌어진다. 자신에게 불필요해 보이거나 당장에 유익하지 않은 일들을 “내가 왜 해야 해?”라는 말과 함께 지워버림으로써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생활세계는 점점 무너진다. 사회학자 가핑클(Harold Garfinkel)의 위반실험은 생활세계의 붕괴가 얼마나 병리적인 현상인지 잘 보여준다. 가핑클의 위반실험을 각색하여, 두 친구가 오랜만에 만난 상황을 가정해 보자. A가 B에게 “잘 지냈어?”라고 묻자, B는 이렇게 답한다. “잘 지냈다는 말이 무슨 말이야. 회사 잘 다니냐는 거야? 재정 상황이 괜찮냐는 거야? 건강이 좋냐는 거야?” 당황한 A가 대화를 이어가고자 “뭐야 왜 그래? 그럼, 회사는 좀 어때?”라고 묻자, B는 또 이상하게 답한다. “너의 말이 이해가 안 가. 상사와의 관계를 묻는 거야, 회사의 운영 상태를 알고 싶은 거야, 아니면 나의 업무만족도에 대해 말하는 거야?” A는 난처한 표정으로 “너 문제 있어? 우리 이렇게 대화한 적 없잖아!”라고 역정을 낼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우리가 당연시하는 맥락과 의미를 무시 또는 결여한 채 대화하는 ‘위반’ 실험은 B를 통해 사회적 맥락을 무시하는 것이 우리가 공유하는 생활세계를 붕괴시키는 행동임을 보여주고, A를 통해 우리는 위협받는 생활세계를 다시금 복원하여 유지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음을 잘 드러낸다.

 

그러나 오늘날 직장, 학교, 심지어 가정 내에서도 이러한 위반 상황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때로는 당연시되고 있다. 과거에 당연했던 것들을 이제는 의심하는 것이 당연해진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B와 같은 사람들이 다수가 되어 가며, 이제는 위반 상황이 병리적인 상태가 아니라 정상적인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과거에 당연했던 것들이 모두 정당한 것도 아니고, 이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모두 잘못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정치이론가 드닌(Patrick J. Deneen)은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에서 오늘날의 이러한 혼란은 역설적으로 자유주의가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매우 흥미로운데, 그에 따르면 자유주의가 처음부터 내걸었던 가치는 ‘주어진 전통으로부터 자유’로, 당연하게 여겨졌던 종교적 인습과 억압적인 전통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돌파하자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에 제어장치는 없었기에, 일상생활의 대부분의 영역이 종교적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세속화된 오늘날, 자유주의의 칼은 우리가 암묵적으로 근거하고 있는 ‘문화’를 향했다는 것이다. 즉, 자유주의의 성공은 ‘문화를 파괴하는 문화’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불합리한 전통의 족쇄에서 해방되어 더 나은 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자유주의에 과도한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야 반박할 수도 있다. 정치경제학자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이러한 입장을 대표하는데, 그는 『자유주의와 그 불만』에서 드닌을 넌지시 겨냥하여 오늘날의 문제는 자유주의의 ‘극단적 사례’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즉, 본래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바는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문화를 견고하게 지키면서 비합리적이고 억압적인 요소들을 축출하는 것인데,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급진적인 상대주의자들에 영향을 받은 극단적인 정치 운동들이 오늘날의 혼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자연과학의 합리성을 상대주의적으로 보는 관점이 2가지 극단적인 오류를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한편으로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라 여겨진 과학이 정치적 이해관계와 권력구조에 의존하여 시대에 따라 가변적인 지식을 생산한다는 주장에 영향을 받아, 인습으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자유주의의 목적을 또 다른 ‘권력의 행사’로 여기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에 대한 반동으로 객관적인 실재나 합리적인 과정보다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과 인식에 기반한 극단적인 운동들이 전개되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대표적으로 과격한 성소수자 좌파 운동, 또는 포퓰리즘에 기반한 우파 정치를 지적하는데, 이는 자유주의가 의도하지 않은 병리적인 극단적 사례라 비판한다.

 

그러나 후쿠야마는 자연과학의 합리성을 비판한 상대주의 운동을 가장 큰 적으로 규정하면서도 정작 상대주의의 논의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데, 이는 그가 얼마나 상대주의를 오해하고 있는지 뿐 아니라 잘못된 기반 위에서 비판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연과학에 대한 상대주의적 접근은 1960년대부터 그 움직임이 커졌는데, 그 기폭제가 된 것은 쿤(Thomas Kuhn)의 『과학혁명의 구조』 때문이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패러다임’(paradigm)이란 용어도 그가 정교하게 고안한 것인데, 쿤에 따르면 패러다임이란 과학적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천문학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의 전환, 또는 물리학에서 뉴턴의 법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의 전환이 패러다임 전환, 즉 과학혁명에 해당한다. 그러나 쿤의 독창적인 기여는 이후 패러다임이 이전 패러다임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하거나 진리에 더 가깝기 때문에 과학혁명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과학공동체 내부에서 과학자들의 투쟁과 그 결과로 ‘믿음의 분포도’가 새로운 방향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라 주장함에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과학이 과학자의 ‘마음대로’ 이루어지거나, ‘아무거나’ 된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반드시 기존의 지배적인 패러다임 내부의 변칙들이 누적됨에 따라 기존의 믿음과 새로운 믿음이 충돌하는 긴장 상태의 결과로 ‘내파’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변칙의 등장도 기존 패러다임적 전통에 의거해서 등장할 수 있고, 새로운 패러다임도 기존 패러다임에 대한 급진적인 변형에 의해 등장하는 것이므로, 자유로운 상상에 의한 판타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오직 주어진 전통에 기반할 때만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주의적인 함의는 특히 대학생들에게 폭발적인 영향을 미쳤다. 베스트셀러가 된 쿤의 저서로 인해 대학가에서는 수많은 과격한 급진적인 운동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쿤은 자신을 상대주의자로 평가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였는데, 심지어 자신의 논의에 영향을 받아 자연과학을 상대주의적으로 분석한 과학지식사회학의 스트롱 프로그램에 대해 “해체주의가 미쳐버린 상태”라고 힐난할 정도였다. 만약 쿤이 대학가에서 벌어지는 급진적인 정체성 운동 등에 대해서도 평가했다면, 아마도 이와 똑같이 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후쿠야마의 주장이 타당한 것 아닌가? 물론 오늘날의 해체주의적 경향을 띤 과격한 운동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그것이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상대주의에 기반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주의 자체가 그러한 운동을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때로는 각자의 관점에 따라 도덕적으로 옳거나, 추구하는 가치 자체는 건전하다고 하더라도 후쿠야마가 지적하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오류로 전락하는 이유를 쿤의 패러다임 이론은 이미 예증하고 있다.

 

패러다임 개념에 대한 앞선 설명만으로는 마치 패러다임은 ‘지배적인 사고관’만을 뜻하는 것만 같아 보인다. 실제로도 이런 식으로 오용되는데, 사실 쿤이 의도하고자 한 패러다임은 ‘집합적인 과학적 실천’을 의미한다. 이는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규칙 따르기’ 개념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데, 쿤은 동물원의 예시를 통해 이를 설명한다. 아버지와 그의 아이가 동물원에 갔는데, 아버지가 아이에게 오리를 가리키며 알려주고, 다음에 거위를 마주했다고 해보자. 아이가 거위를 보고 오리와의 유사성에 기반해 ‘오리’라고 하자, 아버지는 오리와 거위의 차이점, 예컨대 크기, 부리의 뾰족함 등에 기반해 ‘거위’임을 알려준다. 이를 통해 아이는 자신이 인식한 세계와 실제 세계 간의 불일치를 조정해 나가고, 그 결과로 얻은 규칙을 새로운 상황에서도 적용해 나간다. 자연과학의 경우 학생이 여러 연습문제와 실험을 통해 F=ma에서 질량(m)을 새로 마주한 현상에서 수많은 값 중 무엇에 해당하는지를 능숙하게 연결해 나갈 수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쿤의 예시처럼 동물을 분류하고, 가핑클의 예시처럼 “잘 지내?”와 같은 말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암묵적인 유형이 있듯이, 패러다임 이론은 우리가 주어진 공동체 혹은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따르는 규칙이 드닌에게 있어서는 ‘문화’와 같음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문화는 모든 ‘주어진 것’ 혹은 전통이나 관습의 이름으로 별다른 설명 없이 ‘강요’되는 것들을 개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거부하고 파괴하는 문화다. 그 극단의 결과로서 나타난 사회적 혼란은 후쿠야마의 주장처럼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상대주의 때문이 아니라, 이제는 과학이 종교와 전통의 자리를 대체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은 여전히 과학을 신봉하고 이성에 기반하여 살고자 한다. 그러나 문제는 자유주의의 발전이 가핑클이 말하는 위반적 상황을 정상적인 상태로 만들어버렸고, 드닌이 말하는 ‘문화를 파괴하는 문화’가 새로운 사회적 규칙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과한 우려라고 일축할지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타고 있는 배에 구멍이 나 물이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배를 수리한다는 명목으로 과도한 망치질로 인해 배에 구멍을 내는 것은 아닌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에 따르는 규칙, 기반하는 문화가 무엇인지 성찰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