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18 19:14

조성호(객원기자)

지난 11월 3일 <2010 서강대학교 연합 학술제> ‘세상에 한걸음’ 준비위원회(이하 준비위원회)는 학교 행정팀으로부터 G20과 관련된 학술제는 강의실 대여를 불허하겠다는 연락을 받는다. 학교 행정팀은 “정부의 지침은 따로 없었지만 민감한 사안이라 G20 관련 학술제를 모두 취소 중이어서 학생행사도 안 했으면 한다. 총학의 강의실 대여권으로 대여를 강행한다면 그 권한을 제고해 보겠다”고 말했다. 준비위원회는 로욜라 언덕에 공동 대자보를 붙이고 학교측에 항의했다. 결국 갈등은 ‘G20 정상회의에 맞선 대학생 대안경제 포럼’이라는 제목에서 ‘G20 정상회의에 맞선’이란 문구를 삭제하는 선에서 봉합됐다. 이에 대해 정유성 학생문화처장은 “행정팀이 G20 관련 모든 학술제에 과잉대응을 해 일어난 오해라고 해명했다”라며 “준비위원회와의 대화를 통해 이를 해결했다”라고 밝혔다. 문제는 그 대화상대가 학생뿐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즉, 경찰이 학술제 통제에 나선 것으로 드러났다. 마포경찰서는 총학생회에 전화를 걸어 “행사 이후 학생들의 시위가 예상되니 만나서 조율하자”고 요청했고, 학생지원처장과 만나선 “행사 뒤 돌출행동이 우려되니 주최 쪽과 잘 이야기해달라”고 말했다. 경찰은 총장실에 전화를 걸기도 했다. 이후 학교당국은 총학생회에 “G20 관련 학술행사를 금지하고 공간을 대여해주지 않기로 했으니, G20 관련 포럼을 취소하라”고 통보했다. 학생들이 반발하자, 학교는 다시 행사 이름 가운데 ‘G20에 맞선’이라는 문구를 삭제하면 강의실을 빌려주겠다고 제안했고, 학생들은 학술제 진행을 위해 이를 받아들였다. 정윤홍 서강대 학생지원처장은 “협조 차원에서 경찰을 만났고, 학생들과는 G20 개최 등 시국을 고려해 의견을 조율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서강대는 학술제 통제에 앞서 11월 7일부터 3박4일간 국내외 시민사회단체들이 학교에서 열기로 한 ‘서울 국제 민중회의’(이하 민중회의)의 장소 제공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학술제 통제 논란은 민중회의를 취소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민중회의 주최측인 G20대응민중행동은 4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어 이러한 결정을 철회하도록 서강대에 촉구했다. 이 단체는 '이종욱 총장께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행사 개최를 며칠 앞둔 시점에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은 상식 밖의 처사가 아닐 수 없다"며 "이것은 양식 있는 대학이 취할 바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또 "국제시민사회의 의사소통이 지구촌 문제해결에 기여하는 바를 평가절하하고 불온한 것으로 치부하는 듯한 총장의 판단은 우리나라 시민사회와 학계의 격을 실추시킬 것"이라 우려했다. 이와 관련, 서강대 관계자는 "애초 사회과학연구소에서 신청이 들어왔을 때는 순수 학술행사로만 알았지만 파악한 결과 성격이 예전 판단과 다소 다르고 행사 규모도 예상보다 커 불허 방침을 정했다"고 말했다.

결국, 학술제의 포럼 주제는 수정되고 민중회의는 예수회 건물로 옮겨져 개최됐다. G20 정상회의는 ‘무사히’ 마쳤지만 서강대와 학문의 자유에 대한 고민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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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18 19:10

리린 (신문방송학과 중국인 유학생)

경주는 이번이 두 번째지만, 매번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작년에 왔을 때 아직 어학당에 다니고 있었던 저는 공부를 하기보다는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를 즐겨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 가봤던 많은 여행지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경주는 그리 특별할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대학원 생활을 시작한 저에게 경주여행은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출발 당일, 이른 아침에 학교에 모여야 되는 바람에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자는 둥 마는 둥 지하철을 타고 와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경주로 1박 2일 여행을 떠났습니다. 다들 다양한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라서 버스 안에서도 약간 서먹서먹했지요. 끼리끼리 이야기하다가 학생회장이 자기소개를 제안해서 서로 어디서 왔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의사소통이 잘 안 되기도 했지만 손짓몸짓 다해가며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보니 오히려 더 재미있는 것 같았습니다. 가는 길에 노래자랑도 하면서 지루할 뻔했던 여행 분위기를 띄우니 어느 새 우리의 첫 번째 목족지인 석굴암에 도착했습니다.

비가 막 그쳐서인지 공기가 촉촉하고 맑아서 버스에서 내리자 피로가 확 풀렸습니다. 안내해 주시는 분이 함께 올라가면서 그 곳의 역사와 신화를 상세히 소개해 주셨습니다. 사실 저는 사진 찍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잘 못 들었지만,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그냥 쭉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으로 그곳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포착하고 싶었습니다. 곧 이어 국악도 듣고, 야경도 즐겼습니다. 이튿날에는 아침부터 불국사, 계림, 천마총, 한옥촌 등 역사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곳들을 들른 뒤 경주에서의 여정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다음 날 수업 준비할 게 있었지만 빨리 집에 가서 사진을 정리하고 싶은 생각에 마음이 바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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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18 19:09


엄기호(우리신학 연구소 연구위원)

공부의 의미

신학을 공부하는 친구로부터 푸념에 가까운 문자를 받았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것이 더 이상 재밌지도 않고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수업시간에 심도 깊은 토론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삶에 대한 성찰이 있는 것도 아니라 ‘수다’만 떨다 끝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 친구뿐만이 아니다. 주변의 많은 동료와 후배들이 대학원 공부에 대해서 2학기가 넘어가면 돈 아깝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말한다.

대학원에서, 특히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유의미하게 포착하는 언어를 만드는 일이다. 특히 내가 전공하고 있는 현대문화연구는 아예 학문의 타이틀에 '당대contemporary'라는 말을 달고 있다. ‘단단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현대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당대’를 인식하고 사유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인문사회과학의 한 특징이 될 것이다. 이 학문을 하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당대 이후’ 자신의 언어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아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언어는 전략적이고 개입적일 수밖에 없다.

다른 한 편에서 인문사회과학은 ‘시대는 넘는 언어’를 배우는 과정이다. 이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사례가 일본의 후쿠자와 유치키이다. 유치키와 그의 문하생들은 일본의 명운이 걸린 우에노 전투를 ‘그네를 타며’ 바라보았다고 한다. 유치키는 자신들이 ‘그네를 타면서’ 자신들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명했다고 회상하였다. 당대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격변기에 시대를 넘는 법을 사유하고 질문하는 것이 또 다른 한 공부인 셈이다. 이런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자세는 관조이다. 이는 아렌트가 말한 바에대로 한다면 ‘게임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으며’ 단지 ‘간절한 염원을 가진 열정적인 참여자’로서 그 게임을 따라가는 태도이다.

만약 현재의 대학원에서의 공부함이 전략적이거나 개입적이지도 않고, 시대를 넘는 법에 대해 질문하는 성찰적이지도 않다면 이것은 정말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아렌트식으로 말한다면 이런 공부에는 ‘인식’도 없고 ‘사유’도 없는 셈이다. 인식이 무엇을 파악하는 것이고 그것을 언어화하는 것이라면 사유는 언어화할 수 없는 것, 파악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함으로써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들이 하는 공부가 시대의 ‘저 너머’라는 파악할 수 없지만 필연적으로 사유해야하는 것을 사유하는 것도 아니고 현실을 유의미하게 파악하는 것도 아니라면 공부는 정말 무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G20, 입장없음의 무기력함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주목해 봐야하는 것은 유치키가 자신들은 그네를 타면서 분명한 ‘의사표명’을 했다고 말한 점이다. 이 말은 당대에 대한 개입은 물론이고 시대에 대한 관조도 ‘입장’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굳이 마르크스가 말한 ‘당파성’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입장’은 시대를 읽고 당대에 개입하는 ‘앎’을 생산하는 출발점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입장 없음’이란 아무런 유의미한 앎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무력하고 부끄러운 태도이다. 그러나 이 ‘입장’이란 단지 진보냐 보수냐하는 것으로 이야기되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입장’이란 사태를 파악하고 질문을 던지는 위치 혹은 지점이다. 사태의 현란한 변형에도 불구하고 복잡함을 꿰뚫고 변형되지 않는 그 무엇을 포착해내는 힘을 입장이라고 한다. 우리 학문/사회에 이런 힘이 있는가?

우리 사회/학문이 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 지난 G20 정상회담의 과정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투쟁이다. 사실 G20이라는 행사는 대단히 복잡한 문제였다. G20은 G8과는 국제정치에서 위상을 현격히 달리한다. G8은 부자나라 혹은 전지구적으로 막강한 파워를 가진 나라들이 유엔이라는 공식적인 정치채널을 가로질러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였기에 손쉽게 저개발국과 사회운동의 타겟이 될 수 있었다. 내용적으로도 G8은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세계에 강제하는 가장 강력한 추진체였다. 하지만 G20은 다르다. 부자나라 혹은 힘 있는 나라들이 좌지우지 한다고 하기에는 그 구성이 다양하다. 인도를 남아시아라는 역내에서 힘 있는 국가라고는 할 수 있지만 부자나라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룰라가 이끌고 있는 브라질을 순순하게 신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지지하는 나라라고 볼 수 있는가? 이처럼 세계경제위기에서 태동된 G20은 간단명료하게 신자유주의적 머신이라고 환원될 수 없는 특징을 가진다. 이에 대한 반증이 바로 G20이 소개하려고 한 여러 가지 금융에 대한 통제에 대한 위기감과 반발 속에 서울에서 개최된 G20 비즈니스 정상회담이다. 이 회의야말로 G20을 보다 더 신자유주의로 끌어가기 위한 자본의 압박이었다.

다른 한 편 G20을 한국이 개최하는 것의 의미이다. 한국이나 프랑스는 G8을 G20으로 대체하려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는 미국이나 중국으로 수렴되어 가는 권력을 분산시키려고 하였고 한국은 말석일지라도 국제 거버넌스에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 것이다. 사실 한국의 입장에서는 G20이 어떻게든 사무국을 만들고 상설화하는 것만이 이 말석이라도 지킬 수 있는 길이었기에 이 회담을 필사적으로 성공시킬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국제정치의 배분원리인 지역안배에 따른다면 G20이 G19만 되어도 맨 먼저 쫓겨난 나라는 한국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본과 같은 나라들은 G20은 세계경제위기에 대한 일시적인 기구여야하고 경제가 제자리를 찾아가게 되면 다시 G8으로 전환되어야한다고 주장한 이유이다.

이러한 G20의 복잡다단한 위상은 좌파건 우파건 한국의 모든 정치세력에게 각자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G20에 대한 찬반논란을 보면 놀라울 정도의 ‘입장 없음’이 드러난다. 신자유주의자라고 한다면 단순히 G20을 지지할 수 없다. 오히려 G20이 반신자유주의적인 요소들과 추진방향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면서 비즈니스 정상회담을 좀 더 강하게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자들이라고 한다면 G20이 한국에서 개최되는 것의 의미와 이것을 상설화하는 것이 한국의 국제정치의 위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국민들에게 설파하는 것이 자발적 동원을 이끌어 내는 첩경이었다.  그러나 우파들은 놀라울 정도로 조잡한 국내용 문화정치에 몰두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1970년대 장발족과 미니스커트 단속, 혹은 초등학교에서 하는 용이 검사하듯이 쓰레기를 버리지 말자거나 음식물 쓰레기를 내놓지 말자는 황당한 캠페인들이었다. 이것은 자신들이 한 일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반증이다.

좌파라고 하여 다르지 않다. 좌파들내에서도 사민주의자인지 아니면 극좌파인지에 따라 G20을 바라보는 관점을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사민주의자라고 한다면 G20에 대한 비판적지지 혹은 조건부 지지가 당연한 입장일 터였다. G20은 G8과 비교해볼 때 분명하게 지구적 거버넌스에서 민주적 확장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고, 또한 내용에 있어서도 극단적인 신자유주의를 저지하고 규제와 통제를 자본에 소개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극좌파라고 한다면 G20은 당연히 저지되어야하는 자본의 기만적인 변신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의 사회단체들은 참여연대에서부터 극좌파 운동단체에 이르기까지 ‘일치단결’하여 G20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외국에서 본다면 국제거버넌스에 관한한 한국에는 ‘극좌파’밖에 없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대학, 프로젝트의 노예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승리

시민단체 혹은 사회단체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학원에서 ‘인문사회과학’을 한다는 대학원생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나는 G20에 대한 상투적인 비판이나 지지를 넘어서는 그 어떤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다. 좌와 우를 막론하고 교수들이 쓰는 신문의 칼럼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서 학문적 토론이나 성찰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도 못 들어봤다. 모두 다 후쿠자와 유키치처럼 ‘시대를 넘는 법’을 몰두하기로 한 것인가? 개입이 아닌 관조가 한국의 학문하는 태도의 대세라서 그런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한 마디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좌파건 우파건 ‘입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좌파는 모두 다 일순간 ‘극좌파’가 되어 모든 국제거버넌스를 거부하는 포지션을 취하고, 우파는 모두 G20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한국에서 개최된 것을 가지고 국내 정치용으로 사용할 궁리한 것이다. 자신이 현실에 개입하고 들어갈 지점을 파악하지 못하는데 어떤 새로운 언어와 앎이 생산될 수 있을 것인가. 우파는 ‘국격’ 운운하며 올림픽 때부터 나온 이야기나 무한반복하고 좌파도 변화하고 있는 국제정치의 위상학을 파악하지는 못하고 고작 ‘본질’론을 무한변주할 뿐이다.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이 된 데에는 보다 더 비참한 ‘공부하는 자’들의 현실이 놓여있다. 다들 BK21이니 HK이 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한다고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프로젝트 하지 않으면서 유지될 수 있는 대학원이 존재하는가? 대학원에 들어갈 때도 면접에서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가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수주한 프로젝트에 참여할 것인지를 묻는 곳이 허다하다. 공부하는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를 수행할 하위 ‘보조’를 뽑는 셈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밥줄을 국가에 스스로 반납하고 거기에 매여 현실을 인식하거나 관조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이 아닌가? 정부형 프로젝트는 독배다. 마시지 않으면 굶어죽고 마시면 바빠서 공부할 시간조차 나지 않는다. 실적을 쌓아야하기 때문에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연구단위들은 관변단체보다 더 많은 ‘전시형 행사’를 연다. 무슨무슨 콜로키움이나 컨퍼런스나 해외 석학 초청 강연같은 것을 ‘급조’해내고 관중을 동원하느냐고 정신이 없다. 물론 열심히 꿋꿋하게 연구과제를 수행하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실적용인지라 참석해보면 발표자료에서부터 대중동원에 이르기까지 허접하고 썰렁하기 짝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는 다른 그 어떤 영역도 아닌 학문의 영역에서 가장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를 프로젝트에 눈코뜰새 없게 하여 ‘입장’이라는 것을 아예 제거해버렸으니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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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18 19:07


박권일 (사회학과 석사과정/ '88만원세대' 저자)

이제 되짚어볼 때가 됐다. 서울서 열린 G20 정상회의 말이다. 이명박 정부는 “건국이후 최대의 국가행사”라며 나라 전체를 G20 광풍 속으로 휘몰아쳤고 삼성경제연구소는 이에 발맞춘 듯 경제효과 분석보고서를 내놨다. G20으로 한국이 얻을 직·간접적 경제유발효과가 약 24조 원이라고 한다. 뒤이은 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의 보고서는 한 술 더 뜬다. G20의 경제효과가 무려 “450조” 원이란다. 한국의 1년 예산이 약 300조 원이란 점을 떠올리면 이 돈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액수인지 조금 감이 올 것이다.

이런 황당한 액수가 나오는 이유, 그리고 같은 행사를 두고 두 연구기관이 계산한 액수조차 이리도 차이나는 이유는 명확하다. 경제효과 계산이 애초에 자의적인 까닭이다. 연구자가 산업연관표 상의 어떤 지수를 어떻게 조합하고, 얼마만큼의 연관값을 부여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치가 나오는 것이다.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이런 분석이 끝없이 나오는 건 물론, 정권이나 기업연관단체들이 혹세무민하기 딱 좋은 자료이기 때문이겠다. 아무튼 “약 24조원” 또는 “450조 원”의 “경제효과”를 가지는 “건국이후 최대의 국가행사”, G20 정상회의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간단히 살펴보자.

참을 수 없는 정권의 촌스러움

G20 준비과정에서 서울시민들이 겪어야 했던 불편은 한둘이 아니었다. 준비기간 내내 군사독재시절을 연상시키는 위압적인 치안정국이 지속되었고, 행사장 인근인 서울 강남 일대는 사실상 계엄 상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시민들의 헌법상 자유가 일상적으로 침해받았다. G20을 정치적 국면전환용 또는 정권홍보에 활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고 "도가 지나치다"는 평가가 해외에서도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이 G20 의장국이 되었을 때 가슴 속에 애국가가 메아리치고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11월 1일자 <블룸버그통신>은 한국의 어느 초등학교 4학년이 썼다는 글을 인용, 한국의 G20 호들갑을 작정하고 비꼬았다. 뿐만 아니다. 서울 서대문구청은 “세계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서울 G20 정상회의 기간 중 음식물쓰레기 배출을 자제해 주십시오”라는 공문으로 시민들의 분노를 사는 한편,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는 인터넷 유행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단연 ‘G20 홍보포스터의 쥐’였다. 어느 대학 강사가 동료와 함께 G20을 풍자하려는 목적으로 포스터에 쥐를 그리고 다녔고, 이를 지켜보던 어떤 시민이 경찰에 신고했다. 공안당국은 G20을 방해하기 위한 음모라며 체포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일종의 그래피티 또는 낙서를 공안사건으로 분류해 구금하고 조직사건으로 ‘엮으려는’ 정권의 시도는, 많은 사람들을 실소케 했다. 이들에게 이번 사건은 미네르바 사건이나 피디수첩 기소 등의 행태에서 드러난 이명박 정부의 ‘졸렬한 면모’를 다시금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인터넷에는 “쌍팔년도에나 볼 법한” 이 정권의 촌스러움에 대한 분노와 비판, 풍자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외국에서 손님 올 때만 반짝 선진국 국민인양 점잔을 빼는 것이야말로 후진국의 징표가 아니냐는 비아냥도 나왔다. 반면, 정작 G20 자체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의 논의는, 그저 선언적 반대조차도, 참으로 드물었다. 행사가 끝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G20에 대한 ‘시비(是非)’가 그저 MB에 대한 ‘호오(好惡)’로 대체된 이런 현실이야말로 어쩌면 우리의 문제를 징후적으로, 그러나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일지 모른다.

무기력한 결론, 불투명한 전망

G20 정상회의 의제만 놓고 봤을 때, 대부분의 매체가 ‘미국의 KO패’라는 말로 회의결과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동시에 멀지않은 미래에 환율전쟁이 본격화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회의에서 내내 최대의 쟁점은 미국의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 주장이었다. 양적 완화라고 하니까 뭔가 어려운 말 같지만, 쉽게 말해 달러를 그냥 찍어내겠다는 소리이고, 이를 통해 자국의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과격함을 넘어 무식함에 가까운’  환율조작을 하는데 다른 나라들, 특히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들이 가만히 당하고 있을 리가 없다. 이들 나라들이 자국화폐의 절상효과와 자국경제의 피해를 막기 위해 일제히 경기부양에 뛰어든다면 본격적인 환율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파국을 막기 위해서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를 줄여야 한다는데 공감하지만, 이를 위해 자국경제의 희생을 감수할 나라는 어디도 없다. 이번 서울 G20에서는 각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면서도 금융위기와 재정위기를 회피하는 이른바 ‘파레토 최적’ 전략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다시 확인되었을 뿐이다.

결국 11월 12일 발표된 G20 서울정상회의 선언문은 하나마나한 얘기만 무기력하게 늘어놓은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예견된 일이었다. 1999년 WTO 장관회의를 무산시킨 이른바 ‘시애틀 전투’로부터 촉발되어 이제는 도도한 전지구적 사회운동이 된 대안세계화운동(Alter-globalization Movement) 진영이, 다양한 이념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G20과 같은 형태의 경제위기 대처방식을 반대해온 공통적인 이유가 있다. 금융화된 자본주의를 유지시키는 목표를 버리지 않고서는 인민의 삶을 개선시키기는커녕 경제위기가 더욱 심화된 형태로 반복될 뿐이라는 점이다. 2008년 서브프라임사태의 주범들인 영미권 국가들이 반성은커녕 금융경제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새롭게 작당한 모임이 바로 G20 정상회의라는 형태였고, 그런 태생적 한계 속에서 G20 회의가 인민의 삶과 직결된 문제들, 이를테면 ‘고용 없는 성장’과 ‘불안정노동의 확산’ 등을 해결할 대안이 될 수 없음은 명약관화했다. 더구나 G20이 선정된 과정도 지극히 폐쇄적이고 반민주적이다. 20개 국가에게 세계경제의 운명을 결정해달라고 누가 부탁했는가? G10도 G100도 아닌 G20이어야할 필연적 이유는 무엇인가? 왜 부잣집 애들 몇몇이서 가난한 애들 인생을 결정짓는가?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G20 자체의 시비를 가리는 이러한 논의가 한국에서는 활발히 벌어지지 못했다. MB에 대한 혐오와 소위 “국격”에 대한 조롱만 재생산되었을 따름이다. 여기서 대학의 무기력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한국에서 ‘이론적·실천적 진지’로서의 대학을 말하는 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세계자본주의가 G20 무대에서 보여준 어떤 무기력은 우리가 “시대착오”라 내다버렸던 것들이 귀환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이를테면 지난 수십 년간 혹독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진행해온 영국의 대학교에서 ‘시대착오적’인 폭력시위와 집권당 건물점거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장하준의 신간은 왜 ‘인터넷’과 ‘시장의 자유’가 아니라 ‘세탁기’와 ‘국가의 역할’을 이야기함으로써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나.

사실, 2008년 시작한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기세등등하던 소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거센 물결도 슬슬 끝을 보이고 있는 게 아니냐는 사람들이 확실히 많아졌다. 많은 자유주의자들, 중도좌파들이 한때 인기를 끌던 ‘제3의 길’ 노선을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의 논리에 적극적으로 조응하던 주체들 역시 조금씩 전략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지배당하는 주체가 따로 있고 투쟁하는 주체가 따로 결정화된 게 아니기에, 이들은 언제든 대안적 세계화의 흐름에 환승하거나 나아가서는 능동적으로 투쟁에 나설 수도 있을 것이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희망을 이야기하는 건 여전히 섣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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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18 19:05


인터뷰 및 정리 박승일



G20 그래피티 작업이 굉장히 큰 이슈가 됐어요. 신문과 방송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해 좌담회까지 열렸고요. 이러한 반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냥 작업하고 사진 찍어서 트위터에 올릴 생각을 했었어요. 트위터에 올리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했었거든요. 그런데 경찰한테 잡히고 이후 구속영장이 청구되면서 애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사회적 파장이 발생한 거예요. 솔직히 이렇게까지 크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하지만 이렇게 된 것이 더 큰 의미를 불러일으킨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타이밍이 적절했던 것 같아요. 경호법이 11월 1일부로 공표됐는데, 기사가 11월 2일인가에 처음으로 보도 됐거든요. G20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였던 거죠. G20과 관련해 예상됐던 저항, 비판의 움직임이 아직 본격화되기 전에 사건화 되어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 같아요.
 
첫 시도이자 동시에 유일한 시도이기도 했잖아요?

 
그렇죠. G20에 대한 문제제기, 비판, 저항의 첫 번째 포화였지요. 예술행위가 일종의 총탄이 된 거예요. 처음이라서 더 큰 의미를 가졌던 것 같고 사람들도 크게 반응한 계기가 된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처음은 아니에요. 성격은 조금 다르겠지만 이전에 발생한 미네르바 사건이나 촛불 역시 이명박 정부의 상징적 이미지에 대한 파괴 혹은 훼손이거든요. 이번 퍼포먼스 역시 상징이미지를 전장의 중심에 놓고 이들 이미지에 대한 비틀기를 통해 비슷한 효과를 얻었다고 생각해요.
 
두 가지 충격이 동시에 있었는데, 상징이미지에 대한 풍자도 충격이지만 오히려 구속영장이 청구됐다는 게 더 큰 충격이기도 합니다.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공안당국의 대응에 대한 충격이겠지요.

 
실질심사를 받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이 그렇게 충격적이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당사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했거든요. 검사의 태도나 내부의 분위기를 봤을 때 사건이 공안화되는 과정이었고, 때문에 수순에 따라 당연히 구속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각오까지 하신 건가요?
 
각오를 했지요. 대비까지 했고요. 예상했던 것보다 결과가 늦게 나왔거든요. 저녁 8시쯤에는 결과가 나올 줄 알았는데 한 열 시까지 기다렸어요. 그 상황에서는 ‘아, 이제 구속이구나’라고 생각했죠. 어쨌든 제 입장에서는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에 대해서 의아하다는 생각보다는 수순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로 여겨졌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정부가 이런 일로 영장을 청구하는 게 충격적이라고 말하는 게 반갑더라고요. 한 쪽에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표현하는 그 기간 동안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사람들의 감각이라든가 의식이 전과는 많이 달라진 거잖아요. 공안적 행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시민적 의식이 있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이런 점에서 반갑고 의미 있는 반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소하게 묻힐 수도 있는 사건이었는데, 정부가 무식하게 대응해서 사건의 의미도 증폭되고 사람들의 반응도 더 커진 것 같아요. 조연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 셈이네요.

그러게요. 어떤 사람들은 엑스맨이라고 하더군요. 검찰이 내부의 안티세력이 아닐까하고. 그간 이명박 정부가 하는 행태들이 사람들에게 일종의 희극적 대상으로 여겨졌던 것 같아요. 시대에 안 맞는 권위주의적인 모습이나 과거 독재 정부의 행태를 답습하는 게 대표적이지요. 그런데 시민 의식이 전과 다르고 민주주의에 대한 감각이 바뀐 상태에서는 이런 것들이 구시대적 잔재로 희극화되어 나타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검찰의 태도 역시 희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쌍팔년도도 아닌데 구속수사라니요.
 
이 사건을 기획하셨을 때는 발랄한 태도로 임하셨을 것 같아요. 어떠셨나요?

 
그래피티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단계에서는 발랄하고 즐겁게 임했죠. 행위 자체가 과거의 운동권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 일종의 예술적 행위이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긴 임했는데, 작업을 하는 당일에는 비장하다고 해야 할까요? 전투적 감각을 가지고 있었죠. 어쨌든 경찰과 맞서거나 마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요. 아무래도 법의 벽에 부딪치는 행위이기 때문에 긴장이 됐어요. 하지만 긴장하면서 그림을 그릴 때는 심리적인 방어선을 넘어선다는 것에 대한 희열이 있었어요.
 
희열이요?
 
금지의 선을 넘는데서 오는 쾌감이 굉장히 컸던 것 같아요. 어떤 선을 넘어섰다는 느낌이 제 안에 있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 역시 한국인이기 때문이죠. 해서는 안 되거나 못하게 하는 문화적 금지의 선이 분명히 있는 것 같거든요. 하물며 사람들은 보도블록에 분필로 낙서하는 것도 잘 못하잖아요. 재미있겠다고 생각은 하는데 실제로 하는 것은 잘 못해요. 귀찮기도 하거니와 어떤 선을 넘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거든요. 그리고 그런 행위를 했을 때 다른 사람의 반응, 예컨대 경찰 조사 같은 압박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요. 그래서 그 선을 넘는 것에 대해서 큰 희열을 느낀 거죠.
 
쥐를 굉장히 정교하게 잘 그리셨어요. 쥐로 표상되어 왔던 이명박 대통령을 희화화하기 위해서 쥐를 그리신 건가요? 그림을 그리셨을 때 의도하신 게 있었을 것 같은데요.
 
저도 한국인이라서 이명박 대통령의 별명이 쥐 이미지와 겹쳐지는 걸 의식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도안을 할 때에는 G20에서 G라고 하는 이니셜을 발음(G=쥐)했을 때의 형상을 뽑아나는 게 더 중요하게 작용했어요. 이명박을 쥐 이미지로 패러디한 그림은 이미 인터넷에 많이 있잖아요? 이명박의 얼굴과 겹쳐지게 만드는 그림. 그런데 그것과는 다르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오히려 이명박이 안 떠오르도록 보이게요.
 
어, 그건 의외네요?
 
이명박이 안 떠오르도록 사실적인 쥐를 그리고 싶었어요. 그냥 쥐를 그리고 싶었던 거죠. 의미의 폭이 훨씬 넓게요. 사실적으로 그리면서 동시에 쥐에 부여된 이미지, 즉 권세나 부에 대한 탐욕스러움, 다중의 건강한 의식을 갉아먹는 이미지, 인간 삶에 꼭 필요한 공동체적인 것을 훼손하는 그런 이미지까지 포함해서 그리려고 했어요. 그래서 이명박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사실적인 쥐에 가깝게 표현하게 되었죠. 그리고 뱅크시의 그림들에서 이미지를 차용해서 이를 혼성해서 만들었고요.
 
쥐의 이미지가 이명박 보다는 G20의 G가 좀 더 이미지화 된 거라고 볼 수 있겠네요. 말씀하신 것처럼 쥐가 상징하는 탐욕이나 교활함 등을 G20이라는 거대 시스템과 연결 지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요. 굳이 사람을 찾자면 이명박뿐만 아니라 20명의 정상을 다 쥐의 이미지로 표현해야 했죠.
 
그럼 스무 마리의 쥐가 필요한 건 아닌가요? (웃음)
 
G20이잖아요. 20마리의 g를 포함하는 거대 구조, 체계로서의 큰 G.
 
아, 큰 G요?
 
스무 개의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 그들을 다 쥐의 이미지로 포착하고 싶었던 거죠.
 
G20이 국격이라고 선전하는 포스터에 쥐 한 마리를 그림으로써 이를 웃음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셨어요. 이러한 작업이 갖는 효과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포스터에 쥐를 그리는 발상은 지젝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정치권력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언어나 그림 등의 상징적 이미지들을 이용합니다. 지젝은 정치권력이 상징적 이미지들의 체계와 관련해 어떻게 발생되고 유지되는지를 논의해요. 나아가 정치권력을 지탱하고 있는 그러한 상징체계가 어느 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무너지는가에 대한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하지요. 이런 차원에서 쥐는 G20 그룹으로 대표되는 현재의 정치권력을 상징하는 것이자 동시에 그러한 정치권력을 희화화하며 무너뜨리는 하나의 이미지적 총탄, 예술적 총격으로서의 의미가 있어요. 다른 한편으로, 내용적 의미 외에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렸다는 행위 자체에도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이러한 행위를 통해 “아, 이런 것을 해도 되는 구나”라는 생각들이 가능하게 된다는 거지요. 상상력을 정신의 차원에서 행위의 차원으로 이전하는 것은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가능성의 범위를 넓히도록 촉구하는 효과를 갖는다는 겁니다. 요컨대 68혁명의 구호, 즉 ‘현실적이 되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처럼 실제적인 것과 가능한 것 사이의 구획선을 무너뜨리는 행위적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아요.
 
재현을 통한 효과뿐만 아니라 있고 행위 자체의 효과도 있다는 말씀이신데요.

 
그렇죠. 아, 이게 가능하구나라고 생각하는 것. 사람들이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의 지평을 넓혀주거든요.
 
반대로 구속 영장이 청구되고 벌금이 부과되는 것을 보면 ‘역시 안 하는 게 낫겠다’라고 냉소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걱정이 되는 점이 그거에요. 인터넷 기사들을 봤는데, 주로 정치적인 논의나 구속수사의 부당성에 관련된 논의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저는 그런 논의들 보다 그래피티 예술가들이 그래피티의 가능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글들이 무척 반가웠어요. 동지를 만난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이 사건의 가장 큰 수혜자나 의미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공공미술을 하는 사람들, 포괄적으로 말해서 예술가들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 시대의 예술가들이 예술이 가지고 있는 정치성을 환기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고요. 나아가 제도권에 흡수되거나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던 예술가들이 다시금 거리로 나와 정치와 만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강하게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방금 말씀드렸듯이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는 게, 오히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더 겁을 먹지 않을까, “저건 구속감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더 방어적이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들어요. 물론 저는 한편으로는 기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어쨌거나 이를 통해서 법의 극단적인 지점이 드러나게 되었으니까요. 단순히 경범죄로 처리될만한 일이 현재 공안적 사건으로, 즉 공안적 관점에서 반국가적인 행위로 규정이 되고 일종의 상징적 테러행위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라는 거지요. 이렇게 극한을 경험했으니, 이후에는 편안하게 놀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해본다는 겁니다.
 

앞서 말씀하셨던 80년대의 운동을 보면 선전, 선동의 요소가 강하잖아요. 깃발 들고 전진하는 식으로요. 그런데 현재 진행되는 공공예술들의 특징을 보면 굉장히 소소하고 심지어는 대의를 보여주지도 않는 것 같아요. 이런 변화는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요?

 
예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힘은 정치에 내재하고 있는 동일성, 대의, 합의 등 이런 경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거예요. 다른 방식의 표현과 행위가 가능하다는 게 예술이 가지고 있는 힘이잖아요. 예술가들이 표현하는 ‘차이’가 어떤 정치적 대의에 동일화되거나 수단화되는 게 아니라 분산적이고 이질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통념을 깨는 게릴라적인 행위로, 예술적 저항으로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방향으로 진행될 것 같은데요.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응원 메시지들이 많이 왔더라고요. 어떠셨어요?
 
꽤 많이 왔어요. 갑자기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돼 버렸는데(웃음). 이번 기회에 그런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할 생각이에요. 그 중에는 정말 반가운 사람도 있어요. 토론토 G20 회의 때 시위를 조직했다가 구속되어서 지금은 가택연금 상태에 있는 활동가 한 분이 편지를 보냈거든요. 굉장히 반갑고 동지애를 느꼈어요.
 
작업은 혼자 하셨는데 연대가 생겼네요.
 
그렇죠. 그런 게 제일 큰 효과죠. 플러스 알파가 된 거죠.
 
운동 양식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아요. 대규모 파업에서 1인 시위로, 다시 그래피티 작업과 같은 퍼포먼스 형태로요. 앞으로도 이런 방향으로 진행될까요?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번에 새삼 느낀 것이 언론의 힘인데요, 이런 행위가 실천적 성격을 갖지만 여전히 표상의 장에 속해있는 것이기 때문에 언론이 보도를 해주지 않았다면 그 반향이 실제로 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여기에는 정치적인 행위가 매스 미디어라는 또 다른 표상의 장에 흡수될 가능성이 존재하지요. 그렇다면 매스 미디어와는 다른 자율적인 매체를 통해 이루어져야겠지요. 예컨대 소셜 미디어를 이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봐요. 또 한편으로, 거대 언론에 의존하지 않는 예술적 상상력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또 다른 아이디어들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단초로 그쳐야 되지 계속 똑같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봐요. 예술은 반복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서, 뒤샹처럼 미술 전시회에 변기를 갖다놓고 ‘샘’이라고 하는 걸 반복하면 아무런 의미나 효과가 없는 것처럼. 그 예술에 담겨있는 의미를 파악해야지 행위만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앞으로 모든 표현을 퍼포먼스로 하자는 것은 우스운 행위가 될 수밖에 없고, 다만 이 행위의 의미를 곱씹어보자는 겁니다. 이러한 행위가 법의 한계선, 그 금지선을 아주 가벼운 일상적 방식으로 무너뜨렸다는 것. 이러한 이해를 공유한다면, 이 후의 행위들은 꼭 그래피티가 아니더라도 가능하다고 봐요.
 
예술은 반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매번의 시도가 굉장히 중요하면서 동시에 어려울 수밖에 없잖아요.
 
그게 예술가들이 가진 운명이면서 동시에 위력이기도 해요. 매순간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감각이나 삶의 어떤 지점, 한계선들을 넘어설 것인가 고민해야 되고, 또 예민하게 느껴야 하거든요. 항상 민감한 촉수를 가져야 한다는 게 예술가의 고뇌이자 위대한 힘이겠죠.
 
공부하신 전공과는 상관없이 예술가로 자리매김하고 싶으신 건가요?
 
넓은 의미에서는 그래요. 예술이 좁은 의미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면요. 정치적 행위 역시 넓은 의미에서 예술적 행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감각적인 것을 재편하는 것, 곧 볼 수 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누구에게 어떻게 분배하는가는 정치적인 문제에 다름없기 때문이죠. 예술적인 하지만 좁은 의미의 예술이 아니라 일종의 감각학이 정치적 행위에 도입되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한국사회에서 저항의 정치가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서강대에서 학생들이 G20과 관련해서 학술 토론회를 기획했는데 학교 당국에서 금지 조치를 내렸던 사건이 있었어요. 인문학을 전공한 총장이라서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말이지요.
 
그게 전력이 없는 게 아니에요. 제가 학교 다닐 때는 박홍이 있었거든요. 당시 보수 우익의 최전선에서 활약하신 분이잖아요. 서강에 그런 전통이 없는 건 아니에요. 전통이 있는 학교에요(웃음). 졸업한 후에 서강에 대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어느 학교보다도 빠르게 신자유주의를 향해 내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자유주의 이념으로 똘똘 뭉쳐서 대학의 기업화, 자본화에 앞장서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한 쪽에서는 알아서 기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이에 저항하는 메세지를 던졌다는 게 대비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학생들도 이 둘 사이에서 헷갈려 하는 것 같아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뒤쳐지기 않기 위해 알아서 스펙을 관리하는 쪽이 있다면, 반대로 이로부터 배제되거나 혹은 자발적으로 멀어지는 쪽이 있을 텐데요. 이런 점에서 후배들에게 고민의 지점을 던져주신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어떤 면에서는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적인 의식을 갖는 것이 오히려 더 필요한 것 같아요. 신자유주의의 힘은 기존의 경계들을 무너트리는데 있거든요. 학생과 노동자, 대학과 기업처럼 서로 다른 단위의 체계와 경계들을 무너뜨리고 하나로 재편한다는 것. 그래서 대학은 학문의 전당, 기업은 자본의 전당이라는 통념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거든요. 학교도 하나의 상품이고 기업이라는 생각을 하잖아요. 학생의 돈을 받아서 열심히 재테크하고 부동산 투기하는 등 영리로 삼고요. 대학은 학생들을 금융 노동자 내지는 소액 투자자로 여기거든요. 지식을 이미지 상품으로 팔면서 실제로는 기업 운영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왜 학생들은 자신들을 노동자로 생각하지 않고 여전히 소비자로만 생각할까요. 대학에 몸담고 있는 시간을 신자유주의 사회로 편입되기 전의 준비시간으로만 생각하고 있어요. 왜 자신들을 이 사회의 정치경제적 시스템과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있는 이익 집단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왜 대학은 신자유주의적으로 운영을 하는데 어째서 하부조직은 그 생각을 못하냐는 말이에요. 그들도 당연히 노동자로서의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공부가 갖는 노동의 의미와 성격을 인식해야 돼요. 제 말은 신자유주의의 첨병이 되라는 게 아니라 자신을 신자유주의의 피해자로 여기지 말고 역으로 이기적으로 이용하라는 말이에요.
 
학교만큼이나 신자유주의적으로 생각하면 누가 인문학을 하겠어요? 다 경제나 경영을 하지요.
 
그래피티를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대학교 강사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의문을 갖더군요. 낯설다는 거예요. 그것도 왜 40대가 그런 짓을 했을까. 그런 의아함 뒤에는 모종의 틀이 있어요. 대학 강사와 40대한테는 정치적인 예술 행위가 어울리지 않다는 겁니다. 그리고 인문계는 현실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어요. 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놓여있는 현실의 논리와 메커니즘의 작동 방식에 더 예민할 수 있는 게 인문학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잖아요. 인문학은 자기 존재에 대한 반성적 규정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인식을 강요하거든요. 그거 빼고 인문학에 무슨 본질이 있겠어요. 그렇다면 인문학을 한다는 것이야 말로 돈을 번다는 차원을 넘어서 더욱 더 현실에 대한 개입, 참여와 뗄 수 없는 학문을 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제 행위의 의미도 그런 거예요. 경계를 허물고 상상을 동원하는 것과 현실에 개입한다는 게 다른 말이 아니에요. 현실적이라는 게 돈을 버는 것으로만 축소되어 마치 돈을 안 벌면 현실과 유리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런데 돈을 버는데 매몰되는 것이야말로 현실로부터 철저히 유리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앞으로의 공부나 활동에서 계획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일단 이 사건에 대해서 천천히 깊게 생각을 해보고 싶어요. 그렇게 제 행위의 의미를 곱씹고 이를 공부로 연결시키고 싶네요. 왜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낡은 통제 메커니즘이 전면화되고 확산되고 있는가를 분석해 볼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예컨대 공안이라고 하는 것이 과거에는 남북 대치 상황 속에서 이념적 의미를 갖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이번 사건은 이념적 성격을 갖지 않더라도 국가의 권위나 기능을 훼손하는 행위라면 얼마든지 공안화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어요. 공안의 의미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거지요. 이명박 정부 들어서 행정 자치부가 행정 안전부로 바뀌었거든요.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행정의 의미가 안전 일반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고, 또한 공안의 의미가 더 이상 이념적인 범위에 한정되지 않고 행정적 범위까지 확장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미네르바 사건도 일종의 공안적 사건이 되는 것이고 단순히 정부의 기능이나 명예를 훼손하는 것도 공안의 관점에서 취급되고 있는 거예요. 따라서 이런 공안을 뒷받침하는 통제의 기술들인 감청, 감시 등의 확산에 대해서 공부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형성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들을 통해서 연대의 망을 구축해볼 계획이고요.

제가 혹시 놓친 부분이 있나요? 꼭 지면화하고 싶으신 말씀이라던가.
 
서강대 학생들이 아직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나요? 6두품이라는 생각?
 
(웃음) 많죠. 서울대는 차치하고 연고대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체질이에요(웃음). 그렇기 때문에 항상 경계에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양가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성골과 진골에 비해서 훨씬 더 권력과 부에 대한 열망에 강하게 빨려 들어가게 되는 위치이기도 하고, 반대로 아예 반골 쪽으로 갈 수 있기도 하고 말이지요. 과거 서강대에는 6두품에서 반골로 가는 경향이 좀 있었는데요.
 
반골쪽으로의 움직임은 많이 사라졌어요.
 
제발 좀 거기서 벗어나기를 바라요. 6두품에 대한 자긍심? 저는 후배들이 그런 자긍심을 가져주길 바라요. 주류를 삐딱하게 볼 수 있는 시각 말이에요. 이상하게 서강대에 예술가들이 많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겠지요. 그런데 이 자리가 참 좋은 위치에요. 경계의 위치이기도 하고요. 잠재성과 가능성의 위치라니까(버럭). 박찬욱, 문성근, 신해철을 봐요. 그 분야의 중심과는 약간 다른 선을 긋거든요. 불안정하거나 주변적인 위치라고 체념하기 보다는 긍정적인 위치로 전유했으면 좋겠어요. 저부터 그렇게 해야겠지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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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18 19:00


조성호-(이하 성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어떻게 읽었어? 1930년대 소설치곤 구보 박태원의 도시적 감각이 굉장히 세련되더라고.
정미지(이하 미지)- 지금 우리가 느끼는 거랑 별반 달라 보이지 않던데? 그런데 서울 풍경은 많이 달라졌잖아.
성호- 그렇긴 한데 오늘날의 우리가 당시 경성을 거닐던 구보와 같은 도시적 감각을 여전히 느끼고 있을까? 벌써 70여 년이나 흘렀잖아? 도시풍경이 변한만큼 구보와는 다르게 서울이 느껴질 법도 한데.
미지- 글쎄, 그럼 우선 구보가 처음 산책을 떠났던 곳부터 출발해보자. 여기가 구보의 집이 있던 청계천이지?
성호- 어, 근데 구보가 집을 나선 이유가 재미있었어. 글로 먹고 산다지만 딱 26세의 남자다워.
미지- 구보는 결혼을 재촉하는 어머니 잔소리에 쫓기듯 집을 나섰지.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산책하거나 구경하러 나왔네. 그런데 ‘천川’ 이라는 이름을 달기에는 영 어색한 것 같아.
성호- 오늘은 더 그러네. ‘세계 등 축제’ 행사한다고 물 위에 설치된 저것 좀 봐.
미지- 지난 6월에는 지방선거에 투표하자는 피켓으로 가득했거든. 꼭 여기는 나라에서 사람들에게 뭔가를 통보하는 곳 같아.
성호- 국가차원에서 복원 한 건데 그런 식으로 활용할 수도 있는 것 아냐? 하긴 투표하잔 국가홍보라는 게 얼마나 먹히는진 며느리도 모르지만.
미지- ‘자연’을 복원했다지만, 너무 부자연스럽지 않아?
성호-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지. 저렇게 사람들이 좋아하잖아? 사막의 오아시스 정도는 아니더라도 눈요기 정도는 될 것 같은데. 유지비가 장난이 아니긴 하지만.
미지- 시멘트 위에 흐르는 물이 어떻게 자연이야. 진짜 자연을 즐기는 게 아니라 그냥 저걸로라도 위안을 삼는 거지.
성호- 위안도 위안이지만, 저런 축제처럼 세계적인 행사를 유치한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도 있지.
미지- 그런데 저기 나라별 정치인 인형들 모아놓은 곳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인형에 오스트리아 옷을 입혀 국제적으로 망신당했다고도 하지? 청계천 복원이든 세계 행사 유치든, 나라에서 생색내는 것뿐이지 그렇게 자랑스럽게 다가 오지는 않는 것 같아.
성호- 그렇게 생색낼만한 일이 서울시민에게 꼭 불필요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저기 보이는 덕수궁에서 하고 있는 전통행사처럼.


“구보는 갑자기 걸음을 걷기로 한다. 그렇게 우두커니 다리 곁에 가서 있는 것의 무의미함을 새삼스러이 깨달은 까닭이다.”

미지- 내가 매번 이 근처를 지날 때마다 항상 똑같은 수문장 교대식을 하고 있더라구. 궁중의상을 입어보는 코너도 마찬가지고.
성호- 하긴, 평민 옷 입어 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 같으니까.
미지- 그 시대에 우리나라에 임금만 있었던 건 아니잖아.
성호- 그렇긴 한데 덕수궁 정도 되니까 궁중문화를 전통으로 재현해야겠지. 또 화려하기도 하고.
미지- 장소로만 보면 그렇긴 한데, 궁중문화가 꼭 전통의 전부인 것처럼 보인단 말이지. 또 아이러니한 건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소수였을 왕이나 귀족의 흉내를 내는 걸 좋아한다는 거야.
성호- 민주주의 사회니까 절대권력에 대한 백일몽의 기회도 균등히 주는 거겠지.
미지- 잠깐 즐기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전통을 왕의 입장에서만 자꾸 보면 나머지 다수에 대한 건 묻혀버릴 수도 있다는 거지.
성호- 현대에서 재현되는 전통이 지나치게 기득권 중심적이라는 얘기야?
미지- 맞아. 저 왕의 옷을 입어보는 아이들에게 만약 전통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당시 많은 평민들보다는 높으신 분들의 화려한 모습만 떠올릴 것 같아. 그리고 이건 꼭 아이들만의 문제는 아니야.
성호- 애들보단 어른들이 더 좋아하더라. 아무래도 힘든 시대를 겪어선지 어른들에겐 화려한 전통이 잘 통하는 것 같아. 국사교과서 보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해도 위로부터의 역사 중심이잖아? 게다가 이젠 그나마도 선택과목 신세지만.
미지- 우리는 항상 국사교과서가 자라나는 아이들한테 미칠 영향을 걱정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전통을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기는 어려울 거야.
성호- 그럼 도시에서 전통이 재현되는 방식이 중요하겠네. 왜냐면 그런 게 은연중에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까.
미지- 그렇지. 지금도 국민이라는 단어와 백성이라는 단어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왕조를 강조하는 전통 재현은 위험할 수도 있어.
성호- 그래도 덕수궁 같은 게 관광명소로서 서울시의 수익창출에 이바지하는 면도 무시할 수 없겠는데? 청계천 유지비용 대려면 저렇게라도 사람들을 끌어 모아야지. 한 두 푼도 아니고.
미지- 내가 처음 서울에 왔을 때 느낀 게 한국을 대표해야 한다는 서울의 의무감 같은 거였거든. 이왕 재현한다면 다양한 방향으로 했으면 좋겠어. 저기 보이는 광장에서 해도 되잖아.



“구보는 고독을 느끼고, 사람들 있는 곳으로, 약동하는 무리들의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생각한다.”

성호- 하긴 그래. 광장 한 켠에 어떤 시민단체가 마련한 무대 위에서 누군가 MB 뭐라고 외치니까 경찰 둘이 그 쪽으로 서서히 다가가는데 분위기 살벌하다.
미지- 몇 년 전만해도 월드컵 응원이나 촛불집회 때처럼 이름 그대로 ‘광장’이라는 의미가 있었는데, 지금은 철저히 통제되고 관리되는 곳이 바로 시청광장인 것 같아.
성호- 그래도 명색이 광장인데 보수 중인 청사건물 막고 있던 커다란 가림막에서 하트 손짓 하며 웃는 김연아, 한효주가 무색하다. 오히려 두 사람의 이미지만 손해 볼 같은데?
미지- 그게 바로 대외적 이미지로는 개방된 도시이고 싶은 바람과, 진정으로 개방하고 싶지는 않은 바람 사이의 괴리감 아닐까? 이렇게 넓은 공간인데, 우리는 여기서 다른 곳보다 훨씬 더 답답함을 느끼잖아. 최인훈의 ‘광장’의 한 구절이 생각나네.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어디도 갈 수 없는.’
성호- 주인공 이명준은 6.25 전쟁 후 남한과 북한 중 갈 곳을 선택하란 요구를 받고 결국 제3국을 선택할 자유라도 있었지. ‘도시의 자유’란 말도 여기만 보면 순전히 거짓말 같아. 사람들이 모이고 싶을 때 모이는 거지 허락 받고 모이면 그게 무슨 광장이야?
미지- 현재로서는 도시인의 자유보다 자동차의 자유가 더 중요한 거 같아. 여기 광장도, 단지 무언가 사건이 일어나서 교통혼잡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장소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성호- 우울한 말이네, 그래도 도시인이 자동차만의 자유를 원하는 것 같진 않아. 과거 혁명들만 봐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는 게 거리를 차지하는 거잖아? 자가용 소유자로서는 광장이 당장 불편할 순 있어도 도시인에겐 광장을 다르게 체험하고픈 심리가 늘 있을 것 같아.
미지- 오프라인에서 의견개진에 대한 제약을 받을수록 온라인 광장으로 더 몰리게 되는 것 같아. 현실에서 할 수 없는 말이 많아질수록 인터넷으로 쏠리게 되고.
성호- 그런데 알다시피 인터넷이란 광장 역시 자유의 공간이 되기 어려워 보여. 일상에서 우린 익명의 사람과 마주치면서도 늘 위협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인터넷에서 익명성을 주장하면 당장에라도 범죄를 저지를 것처럼 취급하잖아? 할 말 있으면 우선 민증부터 까보라는 식이지.
미지- 그럼 우리는 어느 광장으로도 갈 수 없겠네. 정말 ‘어디도 갈 수 없는’ 까닭에 망명이라도 가야 하는 걸까?
성호- 망명이라면 벌써 일부 누리꾼들이 사이버 망명을 떠나기도 했잖아? 당장 우리가 망명 같은 걸 갈 순 없으니 차나 한 잔 하러 가자.

“구보는 차를 마시며, 문득, 끽다점(喫茶店)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음료를 가져, 그들의 성격, 교양, 취미를 어느 정도까지 알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여본다.”

미지- 어라. 저것 좀 봐. 외국 커피 프렌차이즈 간판 위의 전통식 지붕이 올려져 있네. 너무 우스꽝스럽다.
성호- 스타벅스가 있는 저 자리는 구보가 머물렀던 조선 최초의 다방인 ‘낙랑파라’가 있던 곳이었대. 플라자호텔과 웨스턴조선호텔 사이에서 한옥지붕 얹은 스타벅스라. 마치 외국 관광객이 상투를 틀고 문화체험 하는 것 같네.
미지- 어디에든 지붕이나 상투만 올리면 한국적으로 보일 거라는 생각은 너무 게으른 것 같아. 그래도 나름 먹히니까 저러겠지? 저 커피브랜드는 이미 한국에 넘쳐나는데 이제는 ‘전통’스러운 이미지까지도 이용하고 싶은가 봐.
성호- 굳이 저렇게 용쓰며 현지화 전략 안 해도 빈 자리가 없는데. 그러고 보니 정말 이 정도 커피 한 잔 값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여유를 즐기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아. 소설에서도 구보가 틈만 나면 다방에 가서 친구도 만나고 사람들도 관찰하면서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잖아? 당시에 굉장히 세련된 경험이었을 것 같은데.
미지- 지금 까페에 많이 가는 사람들의 심리에는 또 다른 면도 있는 거 같아. 구보처럼 사람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걸 보면.
성호- 그러고 보니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혼자만의 공간처럼 앉아있는 게 신기하네.
미지- 커피값에는 그런 이중적인 심리도 감안한 비용이 포함된 거 아닐까?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 무관심하도록 개인의 영역을 철저히 지켜주는 게 세련된 경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성호- 어찌 보면 참 피곤한 경험일 수도 있겠다. 집같이 편한 공간 놔두고 왜 저렇게 나와서 있는 걸까?
미지- 타인들이 옆에 있다고 무조건 피곤한 건 아니지. 가족처럼 친밀한 관계가 더 피곤해서 모르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게 더 마음이 편할 수도 있으니까.
성호- 군중 속의 고독이라기 보다 군중 속의 안식을 구하려는 거로군. 여기와는 달리 도시인이 군중 속에서 불편하게 머무르는 곳 중 하나인 지하철에 가 보면 이런 심리를 더 잘 알 지 모르겠다.
미지- 그럼 다리도 아프니 지하철 타러 가자.



“자기는 대체, 이 동대문행 차를 타고 어디까지 갈 것인가를, 대체 어느 곳에 행복은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성호- 도시인에게 지하철은 편한 교통수단이긴 하지만 구보가 탔던 전차와는 달리 도시인으로부터 도시풍경을 빼앗기도 하지.
미지- 지하철만큼 도시인의 심리를 잘 보여주는 공간은 없는 거 같아. 다른 교통수단과는 달리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어야 하고, 그 와중에 시선을 외면해야 하는 불편한 공간이니까.
성호- 구보가 전차에서 과거에 맞선 봤던 여성을 우연히 만났잖아? 서로 관심 없는 척 하는 공간인 동시에 우연한 만남을 기대해도 좋을 만한 곳이 지하철이지.
미지-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촌락과는 달리, 우연한 만남의 연속인 도시에서 ‘상호무관심’과는 상반되는 운명적인 만남이나 이벤트를 기대하는 마음도 있을 거고.
성호- 지난 번 언론에서 다뤄졌던 ‘지하철 결혼식’ 사건만 해도 도시인들이 잊고 살았던 무언가를 자극하는 사건이었던 같은데?
미지- 초대받지 않은 결혼식에 참석해서 사랑을 축복해 줄 수 있다는 점과, 경제적인 조건을 초월한 ‘순수한’ 사랑에 대한 기대가 충족됐던 게 아닌가 싶네.
성호- 축의금에 대한 부담도 없었잖아? 현대 도시인에게 잊혀져 왔던 순수한 사랑에 대한 향수가 대표적인 근대문물인 지하철에서 복원된 사실이 재미있네.


“구보는 다시 밖으로 나오며, 자기는 어데가 행복을 찾을까 생각한다.”

미지- 벌써 우리 산책의 마지막 장소인 광화문 광장이다. 1년여 만에 만든 거치곤 볼만한데?
성호- 휑했던 시청광장과는 달리 야경이 꽤 화려하긴 하다. 전기세는 엄청나겠지만.
미지- 이순신 장군 없이 세종대왕 동상이 홀로 외로이 있네.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보수하려고 이순신 동상을 ‘요양’ 보냈다고 하더라.
성호- 왜 하필 서울의 중심이라 할만한 여기에다가 왕과 장군의 동상을 모셔놨을까? 단지 현대인들의 ‘전통’ 영웅들에 대한 숭배라고 단정하기엔 뭔가 좀 찜찜해.
미지- 두 동상이 세워진 시기를 생각해보면, 이순신장군은 박정희 때고, 세종대왕은 MB 땐데, 과거를 현재로 끌어다 이용하려는 것 같지 않아?
성호- 그렇다면 저런 동상건립이 전통에 대한 향수라기보다 철저히 근대적인 전략이라는 거니? 하긴 이순신하면 위기에 빠진 나라에 백의종군했다는 이미지가 강하고 세종대왕은 백성을 어여삐 여겨 훈민정음 창제했다는 소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으니까. 높으신 분들이 탐낼 만도 하네.
미지- 그러고 보니 덕수궁에서 했던 이야기와도 통하는 면이 있네. 복원이나 전통의 재현을 순수하게만 볼 수 없는 게 도시라는 공간이라는 거지.
성호- 그러고 보니 도시에 사는 건 우리들이었는데 막상 그 공간을 점유하고 정의하는 건 국가였네. 그 동안 익숙하게 걸어 다녔던 도시가 조금은 낯설게 느껴진다. 넌 어땠니?
미지 - 처음엔 구보한테 많이 동감하면서 산책을 시작했는데, 7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서울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부분들도 많았던 것 같아.
성호- 다시 글도 쓰고 어머니 말씀도 들을 결심을 하며 귀가하는 구보처럼 우리도 일상을 챙기러 돌아가자.

“이제 나는 생활을 가지리라. 내게는 한 개의 생활을, 어머니에게는 편안한 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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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18 18:56


이은정(이화여대 강사)

흘깃 바라보기만 해도, 보는 이를 한 순간에 결박시켜버리는 사진이 있다. 푼크툼, 사진의 어떤 의외의 부분이 보는 이의 마음과 머리와 눈을 찌르듯 상흔과 자상을 남기는 순간이다. 김수영의 이 사진이야말로 몇 번을 보아도 생생한 푼크툼, 녹록치 않은 결박을 느끼게 한다. 어떤 이는 이 사진에서 ‘런닝구의 포스’를 발견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영화배우 양조위의 깊고 쓸쓸한 표정을 얘기하기도 하며, 어떤 이는 그 불온한 아우라에 일순 전염되고, 어떤 이는 그 퀭하고 형형한 눈빛에 한참 사로잡혀 있기도 한다. 사진 속의 김수영은 뺨을 괴고 앉아 생각에 골몰한 채 비스듬한 시선으로 묻는다. “나, 너, 우리, 어떻게 살고 있는가?”

김수영은 생전보다 사후에 각인된 시인이다. 1970년대와 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광휘처럼 조명을 받은 시인이다. 지금은 김수영이라는 이름의 무게와 부피 자체가 너무 커져서 한 시대에 속한 시인이 아니라 오히려 시인의 이름이 상황과 현실을 재구해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 시대 속에서 고뇌하고 고투하던 시인 김수영이 잉태되었지만, 지금은 외려 김수영이 현실의 맥락을 만들어내면서, 시인과 현실이 삼투하고 과거와 현재가 삼투한다.

김수영 신화 혹은 우상화의 시간들 속에는

시대를 거듭하며 화두는 변하게 마련이다. 어제의 신화가 오늘은 휴지쪼가리가 되기도 하고, 오늘의 우상이 내일은 한 구석에 내팽개쳐지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시간을 견디는 것이야말로 실로 위대한 일이다. 신화와 우상이 일정 시간을 견뎌내면 그것은 쉽사리 신화적 ‘현상’ 혹은 우상의 ‘파괴’로 내닫지는 않는다. 김수영의 시와 산문은 언제 어느 부분을 펼쳐보아도 마음을 달아오르게 하지만, 그의 글만 시간을 견뎌온 것은 아니다. 김수영의 정신은 자유, 양심, 정직 등의 명사로 화석화되지 않는 동사(動詞)가 되었으며 상징이자 메타포가 되었다. 현재에도 김수영의 정신은 폭포처럼 곧은 소리를 부르며 내리꽂히고,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처럼 활강하고 비상하며, 부드러운 풀처럼 눕고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신화화와 우상화의 밀도를 채우는 정신의 움직임, 김수영의 정신은 생장하는 신화다.

오늘 왜 김수영을 되풀이하여 읽는가. 김수영을 소환하고 기억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미미하고 보잘 것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와 반성에서 김수영 읽기를 시작하지만, 그 욕망들이 모이는 지점은 그의 시가 지닌 배음과 둔중한 울림, 경쾌하면서도 강고한 정신적 배면을 공유하려는 욕망이다. 당대의 정서적 혹은 정치적 금기어들을 한껏 발화했던 김수영의 시를 끈질기게 재독하는 맥락 안에는 우리 시대의 공통적 욕망이 잠재해 있다.
김수영의 삶은 시의 텍스트였다. 자신의 삶을 자기 시의 텍스트로 삼는 시인은 의외로 많지 않다. 따라서 자기 삶의 비루함 혹은 자기 환멸을 견디기 위해 고투하는 자는 거듭 김수영의 시를 읽는다. 우리 안에는 저마다 여러 자아가 있다. 바깥 세계를 내다보며 세계와의 불화 속에서 정의나 양심, 자유와 도덕에 대해 간절한 마음을 가져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한 순간일 뿐, 목전에 놓인 일상의 격랑과 광폭한 속도전에 금세 휩쓸려 들어가 버린다. 진실했던 그 순간은 진심이지만, 그 순간을 지나면 이내 그 자성의 순간을 면죄부 삼아 자신을 위무하며 다시 일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마치 예방주사를 맞으면 치명적인 중병에 걸리지 않듯 우리는 자신을 방어하는 자유와 정의를 순간순간 치레하면서 현실 위에서 위태롭게 운신하듯 살아간다.  

그런데 김수영의 시는 치열한 자기반성과 실천적 자아가 결정(結晶)화된 명징한 텍스트다. 그의 글에 비친 내 얼굴은 김수영을 닮은 듯 뜨겁고 진지하며 정직하고 자유롭다. ‘먼지야 풀아 나는 정말 얼마만큼 적으냐’라는 시인의 정직하고 간절한 일상적인 반성은 우리로 하여금 위선을 벗어던지게 하고, 시인이 ‘조금쯤 옆에 서 있다는 것을 안다’고, 게다가 ‘그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임까지 알고 있다고 말할 때, 마음속 공감의 환호를 누르기 어렵다. 우리 는 자신을 따갑고 뜨겁게 응시하는 정직하고 환한 거울을 김수영의 글에서 찾는다. 따라서 김수영을 현재화하는 작업은 반성과 자학과 진보의 쾌감을 동시에 안고 있다.

실천적 자아의 아비투스, 에토스적 독서 욕망

진실이 매끄럽게 소통되는 세계는 굳이 진실을 힘주어 말하지 않는다. 구호와 플랭카드가 여기저기 내걸려 펄럭거리는 세계는 그만큼 슬로건과 강령을 필요로 하는 세계다. 당대와 현재를 동시에 재구해내는 김수영의 시를 읽는 우리는 자의식적인 독자, 개인과 역사에 대한 방향감각을 지닌 실천적 자아의 독서욕망을 가진 독자다. 익히 알듯 김수영은 반동적인 부정의 어법, 일상어가 시가 되는 경지, 새롭고 낯선 현학적 시의 풍경으로 매력을 발휘하지만, 무엇보다도 반전통적인 것들을 철저하게 비판하는 동시에 전통적인 것의 반동을 긍정하는 시인의 결기야말로 가장 위력적이다. 맹목적 전통 추수가 아니라 역사와 전통의 ‘더러운 진창’까지 정면으로 관통해 들어감으로써 고통스럽게 얻어낸 ‘거대한 뿌리’는 당시뿐 아니라 최근 다시 조명되는 탈식민주의적 독해가 명쾌하게 성취되는 지점이다.

김수영은 현실인식을 지향하는 독자집단의 전위적 지리를 담당한 시인이자 한국시의 베스트셀러 시집의 지형도를 바꾼 시인이기도 한데, 김수영을 읽는 독자의 욕망 안에는 나르시시즘이 없지 않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자기 안의 뜨거움이 지닌 역사적 방향 감각을 시인의 것과 일치시키고 또 자신은 늘 사회와 세계를 향해 의식을 열고 있다고 믿는 자홀감, 이것이 독자의 또 다른 욕망이다. 독자의 일정 취향 즉 아비투스(habitus)가 독자 자신의 계급을 유지시키고 동시에 그 정체성을 인정하게 하는 기제가 되므로 김수영의 시를 읽는 것은 역사와 현실에 대한 감각이 유사한 집단의 ‘구별짓기’를 통해 일종의 동류의식을 형성하기도 한다.

오늘 김수영을 읽는 독자의 욕망 안에는 자신이 지향하는 모습을 실현하려는 욕구와 자신을 현시하려는 욕구가 공존하고 있다.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들여다보려는 개인적인 욕망과 더불어, 김수영의 시를 읽음으로써 동시대 독자들과 공유하는 실천적 자아를 유지하려는 욕망이 병행하고 있다. 부연하면, 김수영의 가열한 정신에 대한 매혹, 그리고 그 치열함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는 욕망을 실현하는 한편, 모순된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감각을 갖고 있다는 자신의 독서욕망을 충족하고 이같은 독자집단의 연대적인 독서를 통해 사회적 자아를 자기 안에 세우고 유지하려는 에토스적 욕망 또한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온몸을 던지지 않는 시대를 향한 투신의 언어

김수영의 시는 의미의 잉여가 많아 매번 새로 읽힌다. 잦은 논의로 익숙하게 읽히는 시들보다 그 바깥의 시들에서 시인의 맨 얼굴, 더 웅숭깊고 강렬한 언어를 만나기도 한다. 또한 김수영의 시를 거듭 새로 읽으면서 그의 성취와 한계들도 속속 재독되고 있다. 탈식민주의적 프리즘, 문학과 정치의 연동 등에서 새로 읽히는 생산적 의미들에 비해, 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의 시스템 속에 머물렀던 것은 한계로 지적되기도 한다. 김수영의 시읽기로 들어가는 정식 입구는 없는 셈이다. 외길로 보여도 다가가보면 무한히 넓은, 더 많은 십자로가 무수히 열리는 것을 봐왔던 까닭이다. 그리고 김수영 시의 진경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시선들 위에서 우리가 지금 김수영을 다시 읽으며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현재 자기 삶의 박자를 찾기 위해서이다. 김수영은 지사연(志士然)하기보다 정신의 어떤 높이와 강골의 태도 같은 것만 보여주었다. 그저 자기 정신의 높이와 궤적, 그 속도를 드러냈다. 사랑이란 결국 타자와 섞이는 운동이라는 것, 그곳에 다가가기 위해 그는 시를 썼다. 높이, 궤적, 속도, 방향, 그리고 언어. 추상적이나마 김수영의 시에 장전된 이 힘들에서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는 자기 삶의 박자를 찾아본다.

순정하게 온몸을 다해 뛰어드는 사람 없는 시대, 온몸을 다해 무엇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오늘, 온몸을 던져야 한다고 외쳤던 시인에 대한 선망은 열패감과 더불어 부풀어 오른다. 그 대상이 나든 세계든, 온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난공불락인 이곳에서, 그의 물음은 뼈아프다. 그 뼈아픈 선망과 열패감 속에서 내 안의 타자성을 극복하고 진짜 나를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 김수영을 읽는다. 
 
명문장으로 꼽히는 글도 닳아버린 눈으로는 읽을 수 없다. 허나 젊은 우리의 눈은 살아있으니 가래 같은 더께를 뱉어내면 다시 선명하게 읽을 수 있다. 묵독 말고 기침 하듯 소리 내어 읽으면 더 잘 읽을 수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인에게 시는 곧 삶이니 ‘시를 쓴다는 것’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다. 차가운 지성의 ‘머리’나 뜨거운 열정의 ‘심장’만이 아닌 이 모두의 “온몸”으로 현재의 안팎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김수영은 모리스 블랑쇼의 책을 읽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읽고나자마자 즉시 팔아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김수영의 글이 마음에 들어 공연히 그의 책을 끼고 다닌다. 그것은 내가 지향하는 내 모습이 담긴 거울이자 구호이며 강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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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18 18:54


이성혁 (문학평론가)


1989년 3월 7일 새벽, 기형도 시인은 종로에 있는 한 삼류 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숨졌다. 만 29세. 그리고 같은 해 5월, 그의 유고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곧 기형도를 뒤따라 세상을 떠나게 될, 당대의 평론가 김현이 이 시집에 감동적인 해설을 썼다. 요절한 시인의 시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을 평론가의 해설이 실려 있는 이 시집은 1990년대에 굉장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독재 체제에 항거하는 데 기꺼이 참여했던 1980년대의 시가 대낮의 시라고 한다면, 기형도의 시는 밤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1990년대의 청년들은 <입 속의 검은 잎>에서 어두운 곳에 감추어져 있었던 자신의 검은 자화상을 발견하곤 했다. 

입속의 검은 잎, 낯선 나와 마주치기 

기형도의 시를 읽어보면, 마치 그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한, 그것도 그의 내면 깊은 곳까지 들여다본 적이 있었던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이 느낌은 환각일 뿐이겠지만, 이 환각이 아마도 <입 속의 검은 잎>을 그토록 많은 사람이 찾게 한 원인이기도 하다. 이 시집을 통독하고는 그의 비극적인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어떤 상실감에 사로잡힌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옛 친구의 죽음 소식을 들었을 때 가지게 되는 상실감. 그런데 망자와의 그런 친근감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그 친근감은 독자들이 감지한 ‘옛 친구’가 바로 독자 자신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기형도가 자신의 시에 자주 썼던 대명사 ‘나’는 독자들이 자신의 삶을 겹쳐놓을 수 있는 빈 자리였던 것이다. 무슨 말인가? 

기형도는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病」에서)라고 쓴 바 있다. 이 구절의 화자인 ‘나’는 이미 주어를 잃고 헤매는 자, 자기 자신이 낯설게 된 자다. 그래서 ‘나’에게 낯선 자인 시 속의 ‘나’의 진술은 “낯선 풍경화”에 대한 묘사가 된다. 그래서 이때의 ‘나’는 자아가 자신과 합치시킬 수 없는, 주어를 잃은 주어다. 저 주어는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역시 주어를 잃어버린 수많은 ‘나’들-독자들-이 ‘나’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저 ‘나’는 당신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주어를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당신 얼굴이 갑자기 낯설게 보이지 않는가? 그래서 갑자기 울부짖고 싶지 않는가? 아래의 읊조림이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로 기형도 시의 주어를 잃은 주어인 ‘나’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자들이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진눈깨비」에서

<입 속의 검은 잎>은 주어를 잃어버린 ‘나’의 어떤 여정을 보여준다. 그 ‘나의 여정은 기형도 시인의 개인적인 경험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여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록 기형도가 짧은 삶을 살았고 그래서 많지 않은 작품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의 시 세계는 간단하지 않다는 점을 미리 지적해야겠다. 그는 그 두껍지 않은 시집 안에 여러 테마를 시화하고 있으며 여러 형식과 문체를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지면이 한정된 이 글에서 그의 다채로운 시 세계를 전반적으로 모두 언급할 수는 없고, “주어를 잃고 헤매이는” ‘나’의 삶의 궤적을 보여주고 있는 시편들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시편들이 독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기도 하다. 

기억, 유년의 상실체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받쳐주고 있는 뼈대 중 하나는 ‘기억’이다. 기형도 시인의 기억은 풍성하지 않다. 그의 기억은 상실로 채워져 있다. 그에게는 유년 시절의 기억마저도 따스하지 않고 춥다. 그의 시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시 중 하나인 「엄마 걱정」에서 시인은 “해는 시든 지 오래/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시장에 간 우리 엄마/안 오시네”라고 쓴다. 그리고 그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유년 시절을 그는 “내 유년의 윗목”이라고 표현한다. 유년의 기억은 찬 윗목에 앉아 있다. 원초적 상실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체험은 기형도 시편들의 깊은 곳에 자리 잡는다. ‘엄마’의 부재와 가난, 그리고 외로움과 두려움.  

그런데 “찬밥처럼 방에 담겨”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병든 아버지의 존재 때문이기도 하다. 기실 기형도는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시를 더 많이 남겨 놓고 있다. 「겨울판화」 연작시라든지 「위험한 가계」와 같은 시들은 병든 아버지와 어려서 죽은 누이에 대한 기억을 시화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기형도 전집>의 연보를 보면 그 시작(詩作) 작업은 기형도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연보에 따르면, 시인이 열 살 때(1969년) 부친이 중풍으로 쓰러지시면서 비교적 유복한 편에 속했던 집안은 급격히 가세가 기울어진다. 그리고 시인이 열여섯 살 때에는 바로 위의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된다. 기형도 시인의 원체험은 이러한 상실의 아픔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년의 상실 체험은 성인의 삶에서도 반복된다. 이는 뿌리내린 기억의 힘이 어떤 운명을 형성하면서 유년의 체험이 미래의 삶에서도 반복되기 때문에 일어난다. 역시 독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시 중 하나인 「빈 집」은 그 ‘빈방’에서의 유년 체험이 성인이 되었을 때 어떻게 반복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인 ‘사랑’을 빈집에 가두어놓고는 쓸쓸한 가슴을 안고 거리로 나간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울먹이던 아이는, 이제 성인이 되어서도 사랑하는 이를 잃게 되는 상황을 반복해서 맞는다. 빈방에 홀로 남아있던 아이는, 이제는 희망과 꿈과 기억과 사랑을 그 빈방에 유폐시키고 집을 떠난다.

검은 진실, 말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해 말해야 한다는 것

사랑을 잃고 무작정 떠난 것이므로 목적지는 없으리라. 그리고 사랑을 잃고 기억을 버리려고 하는, 그리하여 주어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植木祭」에서)라고 시인이 말하듯이. 이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을 쓸쓸하게 드러내는 매체는, ‘가는 비’다.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지만,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가는 비…… 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가는 비 온다」에서)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사람들의 모습은 음산하다. 죽음을 각오한 자에게 시는 이 도저한 생기 없는 풍경에 견디지 못하여 입을 다물어버리기 직전에 뿜어져 나오는,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 정연한가”(「오후 4시의 희망」에서)라는 탄식과 같다. 

이제 시인은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흔해빠진 독서」에서)라고까지 말한다. 그는 이 죽은 자들을 왜 추억하려는 것일까? 죽은 자들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기 위해서일 테다. 하지만 이들에 대해 말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공포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가 증언하려는 죽음들, 그것은 「입 속의 검은 잎」에서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으로 상징화된다. 그런데 그는 그 “검은 잎이 두렵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같은 시에서 “그의 장례식”에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가야 하는 것”…, 시인은 어떤 의무감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나’-독자-처럼 상처투성이의 삶을 살았을, 아버지와 누이와 같은 ‘죽은 자들’, 그 말할 수 없는 자들에게 가야하며, 그들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의무일 것이다. 
 
기형도 시인이 공포를 느끼면서도 죽은 자들을 대신해 말하고 있는 장례식장은, 주어를 상실하고 헤매던 그가 결국 도달한 곳이다. 이곳에 머무르면서 시인은 ‘나’에 대해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인 ‘영혼’(「오래된 書籍」에서)이라고 지칭한다. 여기에 이르면 독자들은 도저한 비관주의를 보게 될지 모른다. 기형도의 죽음이 마치 자살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 한다고 그를 힐책하는 사람도 생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시에서 시인은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꿈꾸어야 한다, 단/한 줄일 수도 있다//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진술하고 있기도 하다. 그 “하나의 목적”이 진실을 의미한다면, 시인이 이 구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인은 ‘거짓’(허구)을 통해서라도 검은 진실을 증언해야 한다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 아닐까. ‘나’-독자-의 내면이 죽어가고 있다면 죽어가고 있다는 진실을 시인은 말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그의 “가야 한다”는 의무일 것이다. 그 의무에 따라 기형도 시인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인 시집을 남겼다. 이 검은 페이지를 비관에 빠진 자의 넋두리로 치부할 순 없다. 검은 진실을 드러내고 증언하는 일은 삶에 죽음을 불어넣고 있는 이 허위의 세계에 대한 고발이자 부정이고 항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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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18 18:49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2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요절가수 고 유재하. 생전의 그는 엄청난 대중적 파급력을 담보했던 인기가수도 자체 후광이 눈을 멀게 하는 미남도 아니었다. 솔직히 단 한 번도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직접 목도한 대중 또한 거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잘 알지도 본적도 없고 더구나 세상을 떠난 지 23년이나 된 가수의 노래가 왜 지금도 많은 영화 속에 삽입되며 존재가치가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일까?  

23년 전 세상을 떠난 유재하를 지금 우리가 다시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재하는 데뷔음반이 곧 유작앨범이 된 대중가요 사상 유례가 없는 비운의 가수다. 그는 세월이 흐를수록 생존의 아쉬움을 더하는 독특한 가수다. 당시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직접 작사, 작곡, 연주,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에다 편곡까지 능수능란했던 탁월한 음악적 재능과 그가 제시한 기념비적인 음악업적 때문이다. 그가 사망했던 1987년 당시, 가수가 노래 뿐 아니라 작사·작곡 그리고 연주와 편곡까지 혼자 해내는 멀티 플레이어 재능은 모든 음악가들이 꿈꿨던 희망사항이었다. 그럼 점에서 유재하는 모든 음악제작 과정이 분업화되어 있던 당대 대중음악계의 구조적 시스템에 변화를 몰고 온 선구자다.

창작은 고사하고 표절사태로 얼룩져 분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현재의 한국대중음악계에 그의 이 같은 음악적 업적은 왜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지에 대한 명징한 해답일 것이다. 실제로 단 한 장의 음반을 통해 평단과 대중 모두로부터 “생소한 변조와 독특한 코드 진행으로 대중음악 수준을 외국의 팝 이상으로 몇 단계 끌어 올렸다.”는 극찬을 이끌어낸 국내 뮤지션은 전례가 없다. “유재하의 죽음은 한국 발라드가 음악적으로 10년은 후퇴했음을 의미한다.”고 말한 뮤지션 김동률과 "유재하는 나의 등대"라고 고백한 유희열, "한국 가요계에 축복 같은 존재"라고 의미를 전한 빅마마의 말처럼 그의 요절은 한국 대중음악계의 크나 큰 손실이었다.

최루찬 속 순수한 사랑의 속삭임

유재하가 데뷔한 1987년의 한국은 정치사회적으로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던 격동의 시기다. 가왕 조용필의 일인독재가 시작된 80년대 대중음악은 몇 가지 흥미로운 기록을 잉태시켰다. 주류와 언더의 공존이다. 당시는 조동진사단과 록밴드 들국화로 대변되는 언더가수들의 약진과 더불어 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로 대변되는 민중가요도 주류 대중음악계에 지분을 획득했을 정도로 80년대는 음악적 다양성이 담보되었던 한국대중음악 최대의 활황기였다. 특히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토해낸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사계’, ‘마른 잎 다시 살아나’ 같은 민중가요들은 격동기의 시대적 아픔을 담아냈고 당대의 민주화 운동 진영과 일반 대중의 정서적 교감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는 시대적 소임을 다한 명곡으로 각광받았다.

그런 점에서 유재하의 노래들은 완벽하게 이질적이다. 격동의 시대적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지극히 소소한 개인적 감성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재하의 모든 음악은 서울음대를 다녔던 여자 친구와 첫 만남부터 몇 번의 헤어짐 그리고 재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솔직하게 담은 연애일기 즉 사랑노래다. ‘사랑’이라는 소재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각광받는 대중가요의 화두다. 그렇담 단순히 사랑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그가 시간 초월적 뮤지션으로 기억되는 걸까? 절대로 아니다. 비록 대중적 공감대가 큰 사랑을 화두로 삼긴 했지만 그의 노래는 우선 가요의 히트 기반인 통속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그가 제시한 가사쓰기는 천편일률적이고 상투적인 사랑타령에서 빗겨나 개인의 내밀한 감성을 시적인 분위기로 표현한 차별적이고 독보적인 작업이었다. 적어도 유재하 등장 이전까지 사랑노래를 이처럼 순수하고 품격 있게 제시했던 뮤지션은 없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엄청난 반응을 이끌었지만 이제는 장르자체가 희미해진 민중가요와 살아생전엔 아무런 조명을 받지 못하다가 사후에 대중적 각광을 받으며 더욱 더 기억되고 추앙받는 유재하의 극열한 존재감이다. 무엇 때문일까? 표면적으로 ‘남녀상열지사’라는 흔한 소재를 차용했지만 고품격의 서정적 멜로디와 담백한 감성으로 덧칠된 그의 노래는 용광로처럼 타올랐던 당대 대중의 격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치유의 연금술을 발휘했다. 또한 혁명적 구호에 뭍혀 잠시 망각했던 평화로운 일상을 자각시키는 놀라운 마법을 구현했다. 23년 전에 제시된 유재하식 애틋한 사랑의 정서는 이제는 가치가 희석된 사랑의 근원적 의미까지 되묻고 있다.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인스턴트 식으로 수없이 되풀이하는 지금 세상에 그가 노래한 지고지순한 순백의 정서는 돌아가고 싶은 순수의 시대에 대한 대중적 로망으로 작용하고 있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넘쳐나기에 조금은 모자란 듯 착해 보이는 캐릭터가 더욱 더 대중적 호감을 이끌어내고 있는 세상이 아니던가!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의 접점에서


순수함과 더불어 뜨거웠던 그의 음악 열정과 실험정신도 우리 시대가 기억해야 될 미덕이다. 그의 음악적 화두는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크로스오버한 고품격의 팝 발라드였다. 격을 달리했던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 허물기로 새로운 장르를 창조한 그의 선구적 도전정신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좋은 본보기가 될 수밖에 없다. 당시 그의 곡이 기존의 가요와 차별된 외국의 팝송을 능가하는 고급스런 사운드로 들렸던 것은 바이올린, 첼로 등의 현악기와 클라리넷, 플롯, 오보에 관악기까지 다채로운 클래식 악기들을 대중음악에 접목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양대 음대 작곡과를 전공, 클래식의 화성학을 터득하고 갖가지 악기들의 음색을 관할하는 비범한 재능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는 대학 재학 시절에 이미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이 참여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주자로 활약했다. 그는 피아노는 기본이고 바이올린·첼로·기타 등 무수한 악기를 마스터한 멀티 플레이어였다. 순수음악도가 대중가수로 변신한 것은 당시로서는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이 또한 투잡, 쓰리잡으로 각광받는 현재의 멀티 플레이어 시대에 부합되는 선구적 모습이다.

그의 독자적 음악세계와 천재성은 기존 대중가요와 멀찍한 간극을 둔 다양하고 까다로운 화성 구사와 놀라운 음악적 아이디어들이 담긴 노래들에서 쉽게 발견된다. 멜로디는 이전의 방식과 차원을 달리했다. 사실 처음 듣는 유재하의 선율 패턴은 당대 음악 관계자들마저도 “가수의 노래가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였을 만큼 생경한 사운드였다. 하지만 그 것은 국내 대중음악의 새로운 시작이자 도약이었다. 데뷔음반이자 유작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는 발표 당시 일부 음악 마니아들의 호평이 있긴 했지만 반년이 지나면서 사장될 운명의 음반이었다. 앨범이 나온 지 반년의 시간이 지난 운명의 11월 1일,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그는 대중음악의 전설로 비상했다. 비로소 그의 존재를 알게 된 대중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멜로디와 모양새의 대중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 그의 천재적 음악성을 기리기 위해 뜻있는 음악인들이 ‘유재하 가요제’를 만들어 대학생 창작자들을 인큐베이션하기 시작했다.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가장 권위 있는 신인 창작자들의 등용문으로 자리 잡은 ‘유재하 음악경연대회’가 그것이다.  1989년 1회 대회 금상수상자인 조규찬을 비롯해 유희열, 고찬용, 오소영, 정혜선, 임주연, 스윗소로우, 노리플라이등은 모두 이곳을 통해 배출된 탁월한 아티스트들이다. 유재하의 음악은 사후에 더욱 주목받으며 시대 초월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가 후배가수들에게 얼마나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뮤지션인가는 발라드의 황제 신승훈이 자신의 데뷔 20주년 앨범을 유재하의 기일인 11월 1일에 발매한 사실에서 입증된다.

음악적 자주성의 실현

유재하의 음악은 지금도 끊임없이 대중문화 각 장르의 중요 소재로 각광받고 있다. 11월이 되면 하루 종일 그의 음악이 라디오를 통해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막 개봉한 영화 <맛있는 인생>에 삽입된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과 더불어 각종 TV프로그램과 언론의 기사를 통해 그의 가치는 확장되고 있다. 지금도 그의 창작 작업이 재조명되는 이유는 창작이 실종된 카피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가 지금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노래는 범람하지만 위로의 기능을 발휘하는 따뜻하고 서정적인 노래가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늘 외롭다. 체질화된 사회적 경쟁 시스템은 우리를 쉬 지치게 만든다. 급속도로 디지털화된 세상은 편리함을 안겨주긴 했지만 사람들을 오히려 더욱 바쁘게 만들었고 여유로운 삶을 강탈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중독적인 후크와 자극적인 댄스 그리고 섹시 비주얼이 강조된 노래가 판치는 요즘 한국대중가요계의 트렌드는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바쁘고 경쟁에 지친 지금의 대중에겐 휴식과 위로를 안겨줄 유재하와 같은 감성적이고 서정적 노래가 절실하다.

국내 대중음악 사상 처음으로 음악적 자주의 실현이라는 혁명적 분기점을 제시하며 후대 뮤지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유재하의 유일한 정규앨범은 80년대 최고의 명반으로 추앙받고 있다. 유재하는 선구적인 실험정신과 깊은 울림을 유지하는 고품격의 창작음악을 우리에게 선물한 위대한 뮤지션이다. 그가 왜 지금도 우리에게 기억되는지에 대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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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18 18:45


임종진(사진작가)



올해를 넘기면 어느새 15주기를 맞이한다. 스스로 삶을 거두고 떠난 사람. 그가 없는 빈자리는 기억 저편의 아련함으로 가득 메워졌다. 쌓인 세월만큼 그리 깊어가는 것일까. 여전히 그가 그립다. 15년 전의 과거형으로 기억되지만 그대로 가슴 깊이 남아있는 사람. 김광석. 오늘도 광석이 형이 그립다. 지난 2005년 12월 초순 즈음 어느 늦은 밤. 먼지 냄새가 폴폴 묻어나는 필름을 꺼내 든 순간 예상했던 대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1996년 1월’ 이후 되도록 꺼내려하지 않았던, 일부러 살펴보려 하지도 않았던 그런 필름꾸러미였다. 사진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사진 작업물에 대한 애착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옛 기억이 상념에 허우적댈 것이 뻔했기에 ‘보는’ 것을 자제하려던 것이었다. 남들이 생각하기엔 유별나다고 웃을 수 도 있는 일이지만 내겐 그만큼 특별한 추억의 저장물이기도 했다. 그 필름 속 주인공이 바로 노래하는 사람 <김광석>이었기에.

말없이, 위로를 건네는 그런 사람

1992년 즈음, 대학생으로 전공인 공예와 디자인을 팽개치고는 한창 사진찍기 재미에 빠져가던 무렵인 그해에 난 완전히 김광석이라는 노래꾼에게 젖어 있었다. 집이든 어디든 그의 노래들을 틀어놓는 것은 물론 콘서트장 두루 찾아다니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새로 나오는 음반은 그때마다 모두 구해 귀가 닳도록 들었다. 주변 친구들에게 무작정 들어보라고, 그러면 매달리게 된다고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 일은 늘 떠벌이는 일상과도 같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현실에 대한 나른함 그리고 실패하는 사랑이 있었기에 누군가 나를 달래주는 이가 필요했다.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나도 그래’ 하면서 씩 웃어주는 이. 언성 높인 꾸중과 별것 아닌 것에 시간 낭비한다는 얄팍한 충고가 아닌, 말없이 옆자리에서 위로를 건네는 그런 사람이 더없이 필요했다. 가슴에서 울려 나오는 그의 목소리와 노랫말은 그런 나를 감싸주었다. 내게는 이미 투정 다 들어주는 동네 형처럼 너무나 친숙하게 되어버린 사람이었다.

어느 날 문득 광석이 형을 사진으로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음이 가는 것에 카메라가 향하기 마련 아닌가. 아직 어설픈 실력이긴 해도 한번 찍어보기로 했다. 들로 산으로만 다니던 초보 시절 처음으로 사람을 대상으로 사진을 찍게 된 것이기도 했다. 그 후 콘서트를 찾아갈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갔다. 아직 노출 값이 무엇인지 좋은 앵글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그것을 큰 문제로 생각하진 않았다. 노래하는 모습, 잠깐 쉬면서 목을 축이는 모습, 도란도란 관객들과 얘기를 나누는 모습, 그리고 한없이 맑기만 했던 그 웃는 모습까지 하나 둘 필름에 담았다. 달리 보면 필름의 컷과 컷 사이 담기지 않은 그의 몸짓과 숨결까지, 내 의식 속에 담겨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참을 지난 뒤의 일이기도 했다. 사실 그때는 지금처럼 상업적 이유를 앞세운 초상권 운운하며 사진을 못 찍게 하는 경우가 없을 때였고 오히려 그렇게 한 가수의 공연모습을 사진에 담는 사람 자체가 없을 때였다. 공연장에 갈 때 마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의 모습을 필름에 담을 수 있었다. 가끔은 한참 공연 중이던 광석이 형이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저 친구는 누구지?’ 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럴 땐 괜스레 쑥스럽기도 하고 얼굴이 벌게지기도 했다.

사막의 단비 같은 그의 음악, 그의 존재

아무튼 사각의 카메라 프레임을 통해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노래의 울림 그대로 감동적이었다. 그러다가 공연장이 아닌 곳에서 우연하게 스치는 인연들이 이어졌다. 한 카페에서 술기운에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는 형을 발견하고는 부끄러워하며 초콜릿을 전해주고는 화답으로 캔 맥주를 얻어먹기도 했다. 또는 길을 걷다가 기타 백을 들고 마주 오는 모습을, 또는 커피숍에서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런 인연들 언저리에 결국 용기를 내어 다시 얘기를 전했다. 몇 년 전부터 당신의 사진을 찍어왔다고. 그 사진들을 전해주고 싶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광석이 형은 예의 그 표정처럼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집 주소를 적어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오긴 하지만 주소를 적은 쪽지를 들고 헤헤거리며 한걸음에 작업실로 달려갔다. 필름들을 꺼내 좋은 컷이 무엇일까 살피면서 들뜬 기분에 휘파람까지 불었던 기억이다. 며칠을 사진암실에서 밤을 새면서 현상액에 홀연히 드러나는 그의 형상들에 환호성이 났고 좋아해주실까 하는 기대감을 한 아름 품기도 했다. 시차를 두고 두 번에 걸쳐 보냈던 흑백사진들을 광석이 형은 무척 맘에 들어 했다. 콘서트장 대기실에서 만나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곧 작은 선물 하나 줄 테니 기다려달라는 말을 해주었고 1000회 콘서트 때 역시 무대 뒤에서 얼굴을 마주보며 얘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결국 필름 속에는 단순히 그의 이미지만 담긴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의 음악과 존재는 메마른 사막 같은 내 삶에 하나의 단비로 촉촉하게 다가왔다. 그 기운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커다란 위안의 여지로 남게 될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광석이 형이 생을 멈춘 날인 1996년 1월 6일 이후, 난 그토록 소중히 아끼던 필름들을 소주잔의 힘을 빌어 모두 벽장 속에 넣어버렸다. 애써 돌아보지 않으려던 긴 시간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필름을 보면 그와 나누었던 나름의 교감과 기억들이 날것처럼 튀어나올 것이기에 일부러 안보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그의 노래는 계속 들을 수, 아니 들어야했지만 필름을 본다는 것은 그렇게 가슴 한쪽이 저며 올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꽤 긴 시간이 흘렀다. 10주기가 되는 2006년 1월을 앞둔 2005년 12월. 당시 몸담고 있던 한겨레신문에서 다시 그를 기억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10년 동안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바라 본 필름들은 하나하나 감회가 새로웠다. 신문 문화면에 그의 10주기 특집기사를 준비하면서 벽장 속 낡은 필름들은 다시 빛을 받게 되었다. 그 10년이라는 시간의 축적이 주는 호기도 있었고 여전히 그립기만 한 김광석이라는 존재를 다시 세상 속으로 꺼내놓고 싶어졌기 때문일까.

소소한 일상의 가치, 그 행복을 일깨워준 가인(歌人)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필름은 자신의 존재를 회상이라는 방식으로 돌아보게 하는 듯 했다. 지난 시간들의 기억과 사진을 찍던 그 자리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여전히 형을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움에 낡은 LP판을 뒤지며 형을 추억하는 이들. 직접 공연을 보지는 못한 어린 나이에도 그저 형의 노래가 좋아 찾아 듣는 이들. 마찬가지로 그들과 같은 심정으로 여전히 맴도는 나 자신. 이 모든 생각들을 담아 한 권의 책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처음 사진을 배우던 오래전 어느 기억들이 그 생각을 더 들추어 보채기도 했다. 내게 광석이 형은 사람을 향하는 사진으로써 첫 모델이자 대상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저 좋아하는 감정 하나로 카메라를 들고 콘서트장을 돌던 그 시절은 마냥 신나는 날들이기도 했다. 그를 떠나보내고 난 뒤 시간이 흘러 이렇게 추모하고 기억하기 위한 자리를 생각하게 될 줄 그때는 어찌 가늠이나 할 수 있었을까. 책을 내기까지 많은 사람들과 ‘김광석’이라는 한 ‘존재가치’를 바라보는 시간들이 있었다. 그들의 기억 속에 어떤 기운으로 남아 있는지. 왜 여전히 울림의 여지로 남아있는지. 서로 나누어 그를 기억하는 시간들은 입을 맞추듯 언제나 같은 결론, 즉 ‘위안’으로 이어졌다. 들으면 들을수록 마치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 같다는 동질감이 있었으며 어떤 특별함이 아닌 일상의 삶 안에서 행복의 가치를 찾아보자는, 그런 얘기를 해주었다고.

지금 나는 기자의 지위를 내려놓고 한 사람의 평범한 사진가로서 타인의 삶이 지닌 가치를 찾는 일에 마음을 쓰고 있다. 그 타인이 국가나 인종, 또는 가난함과 부유함, 성별의 차이나 장애의 유무 등에 따라 어느 한 쪽에 낮게 치우친 이들이라 해도 마음을 두어 바라보면 그 가치가 결코 작지가 않음을 누구나 알 수 있다. 광석이 형의 노래를 하나하나 새겨 듣다보면 작고 소소한 삶의 가치가 결코 낮추어 바라볼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하려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노래 <나무>의 노랫말과 같이 무성한 가지로 그늘을 만들어 누군가의 삶의 쉼터를 만들고 싶어 했던 것처럼. 그에 대해 쓴 책 [김광석 그가 그리운 오후에]가 한 가인(歌人)에 대해 마음을 두어 바라본 소중한 기억의 산물인 이유는 그래서 스스로 자명하다. 부질없이 휘둘리던 삶의 테두리 안에서 나는 안식의 여지를 그에게서 받았다. 마음을 두어 바라본 첫 사람. 가인(歌人) 김광석. 여전히 생각나는 오늘 난 다시 그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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