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3.04.15 17:22

 

 

 

 불안, 제약이자 가능성

윤 여 일(작가)

 

 

 

불안한 시대다. 불안에 물드는 시대다.

불안은 미래 시제의 감정이다. 불안한 시대인 것은 미래가 불확실해서다. 불확실한 미래는 불안을 동반해 현재를 찾는다.

불안한 시대다. 불안에 익숙해져버린 시대다. 사회는 불안해하기를 권하고, 불안이야말로 사회의 지극히 정상적 감정이 되었다. 이 사회의 인간은 불안에 물들어 불안 없이는 살지 못한다.

불안은 떨쳐낼 수 없다. 불안한 자는 자신을 불안케 만드는 사회를 향해 불안을 분노로 전환시켜 발산해야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길은 막혀있다. 안에서 불안이 차올라 바깥으로 꺼내보지만 현실 벽의 두께에 부딪혀 죄다 토해내기도 전에 체념으로 다시 집어삼킨다. 그리고는 버틴다. 버티는 자들의 표정에서는 냉소의 빛이 돈다. 그게 시대의 낯빛이 되었다.

집어삼킨 불안은 퇴행증세를 보인다. 불안은 바깥으로 분출되지도 안에서 온전히 형체를 이루지도 못한 채 갑갑함, 우울함, 자기연민, 자기혐오로 점차 변질되고 있다. 불안은 안에서 고이고 부패하여 오히려 감수능력과 사고력을 좀먹는 쪽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불안은 떨쳐낼 수 없다. 어차피 불안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 그것을 자원으로 사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을 제약하는 조건은 자신에게 유일한 가능성의 조건이다. 병든 자에게는 병의 무거움을 철저히 의식하는 것이 일종의 건강함의 표시이듯 불안한 자는 불안을 철저히 파고들고 활용하는 것이 능력일 것이다.

 

 

 

 

나는 불안하다. 내 불안의 본질은 내게 주어진 시간에는 끝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쓰는 존재다. 나는 쓰는 존재로서 불안하다.

잠들기 전, 하루가 품는 절박함이 이 정도인가 의심스러워지는 밤이 있다. 그러면 시간은 내 안으로 스며들지 못한 채 바깥으로 흩어진다. 잠들지 못하는 공허한 지속을 벗어나려는 무망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은 이어진다. 시간을 손으로 세어보지만 시간은 손에서 새나간다. 오늘은 이제 그만 마무리하고 내일의 힘을 비축하려고 잠을 청하지만 생각의 꼭지를 잠글 수 없다. 생각들의 소음이 속삭인다. 침묵 속에서 박동소리가 들려온다. 다시 의자로 돌아가 앉을 힘은 없는데도 밤이라는 치유의 시간은 속절없이 낭비된다. 짧은 삶의 시간을 비웃는 광년의 조소가 들려온다. 숨은 거칠어지고 잠들지 못하는 밤은 길어진다.

죽음은 풍화작용이다. 쓸 수 있는 시간은 언젠가 멈출 것이다. 나는 언젠가 언어가 지닌 포착의 힘을 박탈당하고 말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를 거쳐 흘러나오는 언어도 끊길 것이다. 그러나 쓰는 자는 죽음과 독특한 거래를 할 수 있다. 사후의 삶을 작품에 걸어보는 것이다. 그러려면 자신의 작품과도 밀약을 맺어야 한다. 작품을 써내는 것은 작가이지만, 작가가 작품에 속하는 것이지 작품이 작가에게 속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작품과 이런 밀약을 맺기로 한다. 그리고 작품에 헌신하기로 한다. 나는 지금의 불안을 미래의 작품으로 보상받는 회로를 만들어본다.

그리고 이따금 그런 밤에 여행을 계획한다. 여행이 그저 일탈이어서가 아니라 이처럼 불안케 만드는 시간의 반대 형상을 지녀서다. 여행의 시간은 신축적이다. 충만하며 내게 밀착되어 있다. 불안한 나는 상상 속에서 지금의 버거운 시간을 여행의 시간으로 옮겨놓는다. 내 불안을 자원으로 삼아 지금의 작업에 몰입할수록 그 불안의 시간에서 벗어나 여행하는 시간은 늘어난다.

이것이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인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쓰고, 다니는 나로서는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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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3.04.15 17:18

 

 

 불안은 당신의 몸을 겨냥한다.

 

 

박 승 일(서강대 신방과 박사수료)

 

 

 

 

 

사례 1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개강총회 뒤풀이 자리에서 술을 마시다가 음주가 지나쳐 토할 경우 무게중심이 머리에 쏠려 자칫하다간 화단에 고꾸라져 사망할 수 있습니다. 이참에 공부하자고 책을 읽으면서 도서관에 가다가는 청명한 하늘에 반사된 유리창 빛에 넘어져 뇌진탕으로 사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집에 있어서도 안 됩니다. 밀폐된 공간에는 포름알데히드와 기타 중금속이... 천식과 폐렴을...

 

 

 

 

사례 2

질병을 예방하고 노화를 방지하며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서는 고른 영양섭취가 필수적입니다. 암 예방을 위해서는 마늘, 당뇨병 예방은 콩, 심장병에는 고등어, 노화억제에는 호두, 다이어트에는 버섯, 정력증강에는 보리, 활성산소 해독에는 부추, 두뇌계발에는... 건강을 위해서는 고른 영양소 섭취 외에도 하루 1시간 이상의 유산소 운동과... 특히 술과 담배는... 또한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위기탈출 넘버원><비타민>

<위기탈출 넘버원>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삶의 여러 상황 속에 있을법한 재난(재해 및 범죄) 사고의 유형과 그 대비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부지불식간에 틈입하여 안전에 대한 앎을 각인하고 허용 ()가능한 행동의 범위를 구획하는, 그럼으로써 결국 불안을 삶 깊숙한 곳까지 침투시키는 불안의 정치학에 다름 아니다. 안전에 대한 집착은 동시에 불안을 증폭하는 것이기도 한데, 문제는 불안이 그 자체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안개와도 같이 여기서 저기로 또 시시때때로 불거지면서 그 전염성을 퍼뜨린다는 것이다. 이처럼 증폭된 불안은, 아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사고의 가능성을 전제하는 까닭에 특정한 분야로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삶 전체가 잠재적 위기상황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강박과도 같은 주의 사항을 신체 위에 아로새긴다. 살아 있는 게 기적인 이 위기상황 속에서 우리의 신체는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비가시적인 위험을 파악하고 이로부터 탈출하느라 분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불안하다.

물론 불안과 관계 맺는 방식은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위기탈출 넘버원>이 일상 여기저기에 산포되어 있는 위험 요소를 직접적으로 가시화함으로써 경각심을 일깨운다면(당신도 이와 같은 사고를 당할 수 있다), 또 다른 건강 프로그램인 <비타민>은 몸에 좋은 음식, 질병의 자가 진단법, 의사의 진단 및 처방, 예방과 치료법 등 건강한 신체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고 다시 이를 근거로 적절한 대응법을 제시하는 식이다(당신은 이렇게 대처해야 한다). 무엇을 먹어야 하며 또 먹어서는 안 되는지, 운동은 얼마나 어떻게 해야 하고, 건강 검진은 얼마 만에 받아야 하며,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예방·치료·관리·재활과 관련된 수많은 건강 정보들이 전문성의 외피를 벗고 웃음과 퀴즈를 통해 자연스럽게 전달된다. 예상할 수 있듯, 그 다음 날이면 방송에 소개된 브로콜리가 동나고 병원에는 관련 질병을 문의하는 전화가 빗발친다. 하지만 불안은 여기서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불안은 위험의 탈장소화를 통해 일상의 전 평면으로 흩뿌려지고, 뒤이어 의학적 시선 아래에 포섭됨으로써 일상과 의학의 경계를 와해하는 결정적 촉매가 된다. 일상의 의료화(medicalization)는 모두의 불안 위에 구축되어 있는 셈이다. 언젠가부터 콜레스테롤, 활성산소, 항산화작용, 줄기세포 등의 전문 용어가 일상적인 표현으로 널리 쓰이게 된 것이나 비타민으로도 부족해 오메가3, 미네랄, 마그네슘, 칼슘, DHA까지, 신체 부위별로 특화된 약들을 상시 복용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건강에 대한 불안과 함께 정확히 그것을 겨냥하고 있는 관리와 처방의 실천, 곧 신체를 둘러싼 지식()의 역학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위험(danger)과 리스크(risk)

그 저류에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위기탈출 넘버원><비타민>은 불안을 표상/재현(representation)하는 방식에서 사뭇 차이를 보인다(최근에는 소재 문제 때문인지 그 경계가 점차 희미해지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하지만 방송국 프로그램 소개를 보면 두 프로그램의 목표가 확실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위기탈출 넘버원>이 그리는 세계에서 위험은 개인의 바깥에서 가해지기 때문에, 이때의 개인은 언제 사고가 들이칠까 불안해하면서도 그저 조심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그것이 탈출인 이유도 개인을 둘러싼 위험 지대를 벗어나는 것 말고는(물론 탈출은 불가능하다)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위험에 대한 강조와 함께 불안을 삶의 한 가운데 기입해 넣은 것이야말로 이 프로그램의 탁월한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런 반면, <비타민>의 세계는 위험의 원인이 개인 내부에서 비롯되는 까닭에 이에 대한 적절한 관리와 통제가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이 세계에서 개인들은 건강과 관련된 여러 지식을 숙지하고 또 따름으로써 스스로를 의학적 주체로 새롭게 자리매김하도록 요구받는다. 그런데 이때의 의학적 주체는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만이 아니라 언제고 병에 걸릴 수 있는 모두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실로 소비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위험(danger)이 더 이상 예측 불가능하고 정체가 불분명하며 무엇보다 부정적이기만 한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적절한 통제와 개입을 통해 관리(management)해야 하는, 심지어 그것을 감수함으로써 긍정적인 결과를 산출하기까지 해야 하는 일종의 리스크(risk)로 변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비자와 리스크 관리(risk-taking)의 절묘한 결합이다. 이와 더불어 불안 역시 개인의 행동과 습관을 이전과 다르게 변형시키는 중요한 인자로 격상되기에 이른다. 삼겹살 앞에서 칼로리 때문에 불안해하는 주체는 이미 비만과 고혈압의 발병 가능성까지 계산하는 건강 관리의 주체인 셈이다. 이처럼 의료서비스의 소비자는 질병이라는 리스크를 헤지(hedge)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치료 및 관리의 주체이자 객체로 변형시킬 뿐만 아니라 여기에 결부된 수많은 행위들을 다시 건강/질병의 범주 속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수행하게 된다(주의력결핍ADHD는 언제부턴가 갑자기 질병이 되고 말았다). 이 과정 속에서 불안은 졸지에 더 나은 삶을 위한 유인책이 되고 만다.

 

불안과 함께통치하기

역설적인 것은 이 두 프로그램이 이러한 차이와 함께하나의 결과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마치 담뱃값에 새겨진 그로테스크한 폐암 사진과 그 밑에 조그맣게 새겨진 경고문(담배 성분 및 가능한 질병의 나열)이 서로 다른 선의 작동과 배치를 형성함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담배에 연결된 신체를 곧장 향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개인의 바깥과 안을 동시에 공략함으로, 즉 개인을 불안 속으로 몰아넣고(위기탈출 넘버원과 폐암 사진) 다시 그 불안을 스스로 관리(risk-taking)하도록 요구함으로써(비타민과 경고문) 불안과 개인의 신체를 하나의 순환으로 긴밀하게 엮어 낸다. 요컨대, 불안을 (위험이라는) 부정성과 함께 인구 전체로 퍼뜨리는 동시에, 이에 대한 해법은 (리스크라는) 긍정성과 함께 순전히 개인의 차원으로 한정하는 식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달성 가능한 것이 인구와 개인의 동시적 통치임은 물론이다. 불안은 인구의 일부가 아니라 그 전체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와 함께 행위 주체가 스스로를 관리·조절·통제하도록 부추긴다는 점에서, 정확히 현대적 통치(governmentality)에 맞닿아 있다. 잠깐 언급할 것은, 앞에서의 긍정성이 (칭찬을 통해 행동의 변화를 유도하듯) 어떤 변화에 뒤이어 다른 변화가 강화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단순히 그 결과가 바람직하다는 뜻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부정과 긍정 모두 통치가 작동하는 한 단면일 뿐이다. 이처럼 불안은 신체를 사이에 둔 채 통치의 한 상관항으로 스스로를 변형시켜가며 끝없이 비대해진다.

당연하게도 신체를 관류하면서 작동하는 불안의 정치학은 몇몇 TV 프로그램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불안은 온갖 매체와 콘텐츠를 통해 신체에 직접 가닿는다. 자동차 사고, 화재, 산업 재해, 건물 붕괴, 가스 누출에서부터 치매, 각종 암, 심장병, 뇌출혈에 이르기까지 재난과 질병이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촘촘하게 포박하고 있다. 어찌할 것인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은 뭐라도 움켜쥐게 만든다. 바로 이때 마치 구세주와도 같이 이 모든 불안에서 우리를 구원해줄 뭔가가 있었으니, 그것의 이름은 바로 보험’. 하지만 주의할 것. 보험은 보험금을 납입하는 한에서만 우리의 불안을 아주 잠깐 동안 유예시켜줄 뿐이다. 게다가 보험은 우리가 느끼는 불안의 원인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을 돈으로 환산해서 보상해주지 않던가.

사망 시 일억 원까지 보상해 줍니다’. 이처럼 보험은 질적으로 서로 다른 생명과 돈을 등가의 위치에 두는 데 성공함으로써 (그 결과) 불안해하는 이들의 보험 가입을 유가족에 대한 경제적 책임이자 의무로 손쉽게 이양하는 데에도 더불어 성공한다. 여기에 덧붙여 보험은 다달이 납부하는 보험금을 그대로 방치하기보다는 금융과 연계시켜 투자하도록 권유함으로써 인간의 생명을 돈으로, 그리고 다시 적극적인 재무 설계로 옮기는 데에도 성공했다. 불안은 이와 같이 위험의 부정성과 리스크 관리의 긍정성를 통해 통치의 궤적 가운데 그대로 포섭되어 여기에서 저기로 계속해서 그렇게 떠돌아다닐 뿐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한다면 그것은 바로 불안과 함께이루어진 통치의 한 결과로서일 것이다. 당연히 그 한 가운데에 우리의 신체가 있음은 물론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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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3.04.15 17:15

 

 

 

위기의 담론에 불안하게 대처하는 방법

 

불안을 증폭시키고 전염시키는 불안의 애국적 사용설명서

 

 

최 정 우(비평가, 작곡가, 파리 국립동양어문화대학 강사)

 

 

*사진출처: 민중의 소리

 

 

우리는 이미 불안의 자기증식과 대량생산 체제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불안은 감정적인 것이나 심리적인 것이기 이전에 먼저 하나의 구조 또는 체제이므로. 이러한 불안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애초부터 잘못된질문의 형태가 아닐까.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이 모든 불안을 걷어내 주겠다고 약속하는 어떤 달콤한 소시민적 행복의 속삭임, 그 치유에의 유혹과 건강성에의 회유에 가장 먼저 의문을 던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문제는 불안의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불안의 체화 혹은 내재화일 것이다. 불안은 일종의 신체기관처럼 우리의 존재와 주체성/정체성 안에 내속되고, 또한 일종의 공기처럼 우리의 가능조건 그 자체를 구성하는 무의식적 기계가 되고 있다는 점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불안은 합리성의 한 형식, 합리적 선택을 위한 하나의 가능조건이므로.

 

 

국가의 불안을 국민의 불안으로 전가시키기

그러므로 어쩌면 문제는 바로 이러한 불안이 비합리적일 때, 합리성으로부터 벗어난 듯이 보이는 어떤 비가시적이고 비실체적인 이유로 발생할 때이다. 이 비가시적인 불안은 그 자체로 이중적, 그것도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중적이다. 이 보이지 않는 불안은 민족의 단결이라는 허명(虛名)을 책동하고 국민의 화합이라는 공언(空言)을 획책한다. 미지의 적, 하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된 적에 대한 불안, 과도한 것 혹은 과소한 것에 대한 불안, 이 모든 비가시적인 불안은 그 불안의 실체를 보이게끔 만들기를 원하고, 그 불안의 허구적이며 구성적인 대상은 바로 이러한 합리적이고 가시적인 필요성에 의해 탄생하고 형성된다. 이 가장 비합리적인 합리성은 여러 가지 형태와 방식으로 드러난다. 국가의 안보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은 시민들이라기보다 국가 그 자체이며, 이렇게 국가는 그 자신의 병리적인 성격을 계속해서 노출함으로써 오히려 그 자신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역설적으로 역설하는 것. 국가가 가장 불안해하는 것은 바로 국민이 전혀 어떤 불안도 느끼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자신의 불안을 국민의 불안으로 전가시키며 불안의 대량생산을 위한 컨베이어 벨트를 오늘도 쉬지 않고 돌리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안보에 대한 불안은 결국 적을 창출하기, 그것도 적을 더욱 광포한 존재로 창출하기라는 작업으로 표출되는데, 이는 특정한 정권의 욕망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라는 이름으로 당연시되는 국민의 욕망이기도 하다. ‘친북혹은 종북에서 문제가 되는 지점은, 소위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그 스스로 어떤 침묵의 대상, 하나의 빈 공간, 부재의 근거로서 북한이라는 기표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적대적 공범자라고 하는 권력 차원의 표층적인 분석만을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그것을 뒤집어 공범자적 적대자라는 미시 차원의 심리적 방어기제 역시 문제 삼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북한의 존재 혹은 남북한 사이의 영원한 대치의 의미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근대국민국가의 불가능성 그 자체가 근거하고 있는 어떤 가능조건, 근대국민국가의 담론 자체와 전체를 구성하는 어떤 균열과 틈, 그리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불가능한 교훈이나 불가능의 전범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바로 이러한 남북한의 분단 상황을 민족주의적으로 지양해야 할 것이라든가 세계사적 사명으로 통일해야 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어떤 민족주의적 지향성세계사적 소명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한반도의 역사적이고 지정학적인 위치와 상황 그 자체가 역으로 건강하지 못한근대국가의 봉합을 건강성이라는 허구의 이름으로 덮고 있는 저 국민국가 체제의 상징적이고 폭력적인 일반성에 대해, 일종의 파열하는 실재로 작용할 수 있는 독특성을 갖고 있다는 점, 바로 그 점에서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세계사 속의 이러한 실재로 이해된 한국사야말로, 역설적으로 가장 적극적인 세계사적 기여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불안을 가장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나는 한반도와 통일이라는 주제를 세계라는 하나의 상징체계에 대한 일종의 치명적 실재로 이해한다. 내가 민족/국민국가 안에서 모종의 건강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실재가 지니는 수행적 불건강성일 것이며, 내가 조국이라는 단어로 생각하고 품게 되는 나만의 민족적 감수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의 대상은 또한 한반도가 지닌 세계사적 실재로서의 역사적/국제[정치]적 파국의 지위일 것이다. 근대 민족/국민국가(nation-state)완전한완성을 위한 하나의 전제조건이자 선결조건으로 이해되고 추구되는 통일이란, ‘선진국화에 대한 저 모든 도착적인 담론들의 기초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통일의 담론으로부터 이탈한 지점에서 비로소 통일을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통일이란 근대적 상식의 복원과 복기라기보다는, 바로 그러한 상식의 가능조건들을 비판하고 파열하는 데까지 나가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우리의 불안을 사용해 저들의 불안을 새롭게 창출하고 확인시켜줄 수 있는 실재의 방법, ‘균열의 전략이다. 우리의 상황은 어쩌면 그러한 근대적 국민국가들 사이의 평화라는 상식의 체계 그 자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균열의 양가성(ambivalence)을 더욱 노출시킬 수 있는 역사적 소여그 자체일 것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불안을 가장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안에 대한 우리의 이 가장 불안한 감각과 사유를 통해 국가가 행하는 저 불안의 대량생산에 대항할 수 있으며 또한 대항해야 한다. 이 대항은 물론 불가능성의 대항이며 아포리아적인 대항일 테지만, 우리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불안을 헤집고 증폭시켜야 한다. 불안을 사회적 치유의 대상으로 삼을 때 우리는 다시금 저 불안의 국가적 대량생산 체제 안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므로.

따라서 불안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러한 불안의 승화를 희망하고 기획하고 획책하는 모든 시도와 기도들로부터 결단코 단절할 필요가 있다. 불안의 안전한 분출을 조장하고 장려하는 모든 국가적 배려는 일차적으로 불안의 단순한 해소를 목표로 하는 것이며, 그러한 해소란 그 자체로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으로 규정되고 소화될 수 있는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해결의 과정일 뿐이다. 사회적 불만사항의 원만한 제거, 개인적 스트레스의 경제적 해소 등을 목표로 하는 불안의 해소라는 담론은, 그것이 바로 해소를 목표로 하는 한에서 불안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만을 문제 삼는 지극히 실용적인 불안의 경제학, 또는 더 나아가 불안을 어떻게 통제하고 조절할 것인가만을 문제 삼는 지극히 정상적인 불안의 정치생리학이기도 하다. 반대로 불안은 조건임과 동시에 그러한 조건 위에서 거쳐야 하는 하나의 과정이기도 하며, 심지어 그러한 과정이 도달하고 도달해야 할 어떤 목표이기도 하다. 불안이 목표가 되는 이러한 뒤틀린 목적론자체가 바로 저 불안의 병증이자 동시에 해법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불안은 또한 하나의 징후일 것이다. 불안이라는 증상을 어떻게 치료할까를 묻지 말고, 불안이라는 징후를 어떻게 확장하고 각인시킬까를 물어야 하는 이유이다.

 

 

고로, 당신의 불안을 사용하라.

그러므로 당신의 불안을 향유하라. 불안을 평온하고 안정된 심리적/육체적 삶을 위해 단지 해소되어야 할 장애물로 보는 이상, 현대적 불안의 해소그 자체는 요원하며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우리의 체제는 역설적이게도 지속적인 불안의 창출과 재생과 반복을 통해서 비로소 제대로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불안을 전이시키고 전염시켜야 한다. 불안의 전이와 전염은 가장 감각적인 행동이자 가장 정치적인 행동이 될 수 있다. 가장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 행동이야말로 가장 시의적절하다. 그리고 우리의 불안이 가리키는 길은, 바로 이 반시대성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 그러니, 당신은 당신의 그 반시대성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당신의 그 시대착오적인 불안에 당당함을 가져도 좋다. , 당신의 불안을 당신만의 사적인 것으로 처분하거나 해소하려고 하지 않는 한에서. 당신의 불안은 당신의 사유재산이 아니라 이 국가의 공공재임을 애국적으로(!) 명심하라. 이는 그 불안을 국가에게 되돌려주고 그 불안을 널리 퍼뜨려야 하는 이유가 된다. 그 불안으로, 그 불안을 전염시킴으로써, 그렇게 그 국가에 봉사하라. 불안의 대상을 국가가 가르쳐주고 지정해준 대로 쉽게 확정하지 말고, 불안을 사용하고 또 그 불안에 대한 당신의 무감각함을 응용해, 그 불안 자체가 지닌 감각과 인지의 불가능성을 유지하라. 그리고 그 불안으로 국가를 오염시키고 희석시키고 무엇보다 전염시켜라. 그리하여 그 불안이 야기하는, 그리고 또한 그러한 불안을 야기했던 전선(戰線)을 확인하고 확정하라. 이 불안의 불가능성을 통해 어떤 가능성을 불러오라, 마치 유령을 불러오듯, 그렇게 음울하고 불온하게. 불안이 여전히 영혼을 잠식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불안은 또한 저 국가를 먹어치울 것이다. 국가가 마치 구제역처럼 여기는 저 불안의 유령이, 그 복수의 날개를 펼쳐, 국가에게 불안을 안겨줄 차례이다. 역사의 천사가 내려앉듯, 아니 숫제 내리꽂히듯, 그렇게 창궐할 차례이다. 고로, 당신의 불안을 사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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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3.04.15 17:11

 

 

 불안한 영혼과 두려움의 지배

 

 

서 용 순(영남대)

 

 

모든 것이 흔들린다. 적어도 외양은 그렇다. 우리에게 드러나는 세계는 그 자체로 동요하고 있고, 그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존재 역시 흔들리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세계에 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주 심각한 동요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는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어쩌면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모종의 불안이며, 그 불안이 구체화되는 순간 우리는 두려움의 지배를 받는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것에 대한 불안은 가까운 미래에 두려움으로 바뀔 것이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무슨 이야기냐고? 결코 복잡하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불안으로 드리워진 세계고, 그 이면에는 무시무시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만 말해도 될 것이다. 그것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한 사람들은 거의 없을 테니까.

 

불안에 시달리는 영혼, 대학원생

우리는 이미 대학에 일반화되어 있는 어떤 분위기에 익숙하다. 대학교에 갓 입학한 학부생들부터 박사과정의 대학원생들까지, 대학의 구성원 전반은 어떤 불안감에 시달린다. 대학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거의 모든 학생들은 취업의 고민에 시달린다. 이른바 명문대 또는 상위권 대학의 구성원들이라도 이러한 불안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런 와중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문의 세계에 발을 들인 사람들은 정말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특히 미래에 대한 아무런 보장이 없는 인문사회과학, 순수 자연과학 계통의 대학원에 진학한 정신 나간(!) 예비 연구자들의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자못 궁금해질 정도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선택을 끝까지 후회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대학원 과정 내내, 주변의 걱정과 비아냥거림을 감내해야 하고, 그런 와중에 엄청난 피로감과 자괴감을 느끼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자신이 생각했던 학문과 대학원에서 접하는 제도적 학문 사이의 괴리 역시 그들을 실망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하다.

그런 것은 그래도 참아낼 수 있다. 그런대로 제도적 학문의 풍토에 적응하거나, 자신의 학문을 추구하기 위한 고된 과정임을 받아들이면 된다. 견디기 힘든 것은 그들이 자신의 앞길을 전혀 그려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다른 직종과 달리 공부를 업으로 삼는 길은 어떤 구체적인 전망도 보여주지 않는다. 선택의 폭은 좁을 수밖에 없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논문을 쓰고, 자신의 학문을 갈고 닦으면 된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구체적인 전망이 결여된 허울 좋은 원칙론일 뿐이다. 공부를 업으로 삼아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려면, 공부만 잘해서 될 일이 아니다. 전임교수로 취직하기 위해서는 학문 그 자체보다도 학문 외적인 요소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강사 자리 하나라도 얻으려면 신경 써야 하는 일은 무수히 많다. 권력자들의 비위를 거스르면 안 되고, 심하게 튀어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해도 앞날이 보장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미 박사 학위 소지자는 포화상태다. 게다가 최근에 개정된 강사법은 학문 후속 세대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다. 이전에는 박사 수료 상태에서 시간 강사로 강의를 맡을 수 있었지만, 일단 강사법이 전면적으로 시행되면 그 가능성은 상당히 줄어든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거기서 오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오늘날의 모든 대학원생들은 모두 불안에 시달리는 영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저 불안한 가운데, 그 불안과 친구가 되어 사는 길밖에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 이 불안이라는 친구는 나의 등에 칼을 꽂을지도 모른다. 특징적인 것은 지금 이 불안이 결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래서 이런 불안은 곧바로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오늘의 대학원생들, 이름만 거창한 학문 후속 세대는 모두 두려움의 지배를 받는 영혼들이다. 그것은 정확히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가 던지는 두려움과 동일한 선상에 놓여 있다. 이 세계를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바로 그 두려움의 지배 속에서 살고 있다. 노동의 파편화와 사회 안전장치의 해체, 경제 민주화의 후퇴와 자본의 일방통행은 무차별적 경쟁만을 인간의 미덕으로 남겨 놓았다. 세계는 황폐화되고 있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혼은 자본과 화폐의 위력 앞에 무기력하게 스러져 간다. 이제 모두는 치열하게 경쟁한다. 오로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지극히 일차원적인 당위만이 이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다. 이 세계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두려움을 벗어나지 못한다. 설령 내가 지금 잘나가더라도, 내일의 내 모습이 어떻게 변해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몰락에 대한 공포, 그 끔찍한 가난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공포야말로 지금의 세계를 움직이는 지극히 부정적인 힘이다. 두려움의 실례들은 도처에 깔려있다. 신문을 펼치고, 포털 사이트를 클릭할 때마다, 생활고와 연결된 범죄를 발견하고, 삶의 구석구석에서 불안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 존재들을 목격한다. 누구도 떨쳐낼 수 없는 그 두려움은 점점 더 세계를 조여 온다. 학문의 세계에 대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불안은 삶을 잠식한다.

학문의 세계에서 그러한 불안과 두려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이들은 바로 배움의 와중에 있는 대학원생들이라는 사실을 우선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학문이 세계의 지배적 논리에 점차 종속되고 있는 이 와중에, 그러한 두려움의 지배를 가장 많이 받는 것은 역시 가장 힘없는 존재들이다. 물론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구축한 전임교수들이라고 해서 이러한 불안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학문적인 활동보다는 주변적인 업무들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시간강사들의 상황은 아주 열악하다. 강사법이 그대로 실행될 경우 상당수의 시간강사들은 실업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위협은 아주 현실적이다. 그러나 역시 그런 변화에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을 이들은 가장 젊은 연구자들인 대학원생이 될 수밖에 없다. 불안은 영혼만을 잠식하는 것이 아니다. 그 불안과 그것에 따라오는 두려움은 실제 삶을 잠식한다. 당연히 번민이 따라온다. 비참한 가난에 시달리는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이제라도 공부를 포기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번민들. 실제로 높은 뜻을 품고 학문의 길을 선택했다가, 채 석사도 마치기 전에 공부를 접는 대학원생들도 많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은 그런 결과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한국의 대다수 비인기 학과 대학원생들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이다. 정치권과 제도권 아카데미에서 아무리 학문 후속세대와 비정규직 강사에 대한 처우 개선을 이야기해도 그것은 그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지만, 해결책은 요원하다 못해 전무하다. 이러한 문제가 지속된다면, 대학의 학문 후속 세대 대부분은 기껏해야 비정규직 강사가 되거나, 잘못하면 그저 박사를 취득함과 동시에 실업자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대학원은 유명무실해질 것이고, 대학원 진학은 그저 학벌 세탁을 위한 매매행위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 그래도 대학은 걱정이 없다. 박사학위 소지자는 지천에 깔렸다. 여의치 않으면 정년퇴직한 교수들을 비정규직 강사로 채우면 되고(실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들이 세상을 뜨고 나면 인문학 등의 비인기 학과를 없애면 그만이다. 그 정원을 인기 학과로 돌리면 학교 장사는 더 번창할 것이다. 대학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학문을 수요공급의 법칙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이미 대학원 지원자가 3명이 넘지 않는 학과의 당 학기 대학원 정원을 몰수하는 대학도 있다. 마치 팔리지 않는 상품을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 것처럼……

 

 

자기 자신으로 남을 수 있는 용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확실한 답은 없다. 누군가 이러저러한 방법을 쓰면 당신의 불안은 해소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거짓말이다. 너무나 부끄럽고 죄스럽게도 이 상황을 일거에 해결하는 묘방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단 한 가지 이야기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두려움에 맞서는 용기가 없이는 무엇도 할 수 없다는 말. 이미 불안과 두려움이 일반화된 오늘날, 그 불안과 두려움을 피할 수 있는 장소는 어디에도 없다. 공부를 그만두고 취업 전선에 뛰어든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또 다른 불안과 더불어 같은 두려움이 달려든다. 세계의 흐름에 따라 나를 바꾸려는 노력이 만나게 되는 것은 어느 것도 바뀌지 않는 허탈한 현실일 뿐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바디우(Alain Badiou)는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두려움에 맞서는 용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용기는 순간적인 영웅적 행위와는 거리가 멀다. 그 용기는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용기, 어떤 순간에도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으려는 용기다. 당연히 이러한 용기는 지속을 요구한다. 오늘날 풍요로운 삶과는 거리가 먼 학문을 하는 것은 바로 그 용기를 시험대에 올리는 과정이다. 어떠한 현실의 어려움도 이겨 나갈 수 있으리라는 용기 없이 학문을 시작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시험대에 오른 용기는 쉽게 무뎌진다. 시작의 기억은 점점 흐릿해지고, 어리고 철모르던 젊음의 객기였다는 자조 속으로 사라지기 일쑤다. 그렇게, 우리는 시작의 용기를 지워버린다. 그 용기를 기억해내야 한다. 다시 한 번, 불안과 두려움이 아무 문제도 아니었던 그 순간의 기억을 되찾는 것. 오늘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용기에 대한 기억이다. 그 용기는 나의 삶을 다른 이의 삶이 아닌 나의 삶으로 유지하게 하는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 남을 수 있는 용기. 그것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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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3.04.15 16:59

 

 

그림_박혜민 作

 

episode 1.

최근 인터넷에서 재미있는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엄청나게 복잡한 휴대폰 잠금패턴 화면을 캡처한 사진과 함께 그 휴대폰의 주인이 지나친 보안의식으로 인한 강박장애를 갖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현대인들이 가진 여러 가지 강박장애의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리는 불안이라는 보편적 심리상태에 직면하게 됩니다.

저는 불안할 때면 손을 자주 씻는 버릇이 있습니다.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이런 행동 또한 불안으로 인한 강박 증상의 일종이라는군요. 이를 의식해서인지 얼마 전부터 손 씻고 싶은 욕구를 애써 외면했더니 이제는 온갖 키워드로 논문을 검색()하는 횟수가 잦아집니다. 또 다른 강박일까요. 왜 이리도 불안한 걸까요? 생각과는 자꾸만 어긋나는 현실 때문일까요? 열심히 공부하자는 마음과 달리 몇 글자 못 읽고 집으로 돌아가는 허탈한 하루가 더해지면서 결국 자신에 대한 불만이 불안으로 변모된 것은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여기저기서 불안의 요소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지만 막상 불안과 직시하고자 그 정체를 물을 때면 쉽사리 잡히지 않는 게 또한 불안의 특징인 것 같습니다. ‘두려움과 달리 불안정체 없음의 정체를 갖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불안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정서인가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혹은 적어도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실효적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요? 질문을 던집니다.

 

김하늘 기자

 

episode 2.

고등학교 시절 영·수 특별반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여간 특별한 게 아니었습니다. 혼자 힘으로 반 평균을 좌지우지하는 친구들을 위한 아주 특별한 반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존심 배려 차원에서 당사자에게 직접 통보하기는 했다지만, 복도 저편에 나란히 불 밝힌 교실을 힐끔 들여다보면 누가 주인공인지 금세 알 수 있었죠. 우반과 열반, 나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 구분이, 명문대와 비명문대를 논하는 순간 너무나 절실히 다가왔던 기억이 납니다. 빙하를 가로지르는 남극의 크레바스적 간극, 대입은 그 사이에서 배태된 인생 최초이자 최대의 불안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불안의 꼴은 걷잡을 수 없이 증식되고 있습니다. 어둠, 고독, 악몽, 이별, , 전쟁, 천재지변, 죽음, 심지어 사랑에 대해서도 불안해합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불안해하고, 결혼에 대해 불안해하죠. 때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고, 어떤 책임을 맡는 것에 대해 불안해합니다. 남과 다르다고 불안해하기도 하고요. 병리적인 불안도 있지만 비병리적인 불안의 사례도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해서, 이번 호 서강대학원 신문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그 정체 모를 감정(정서)에 대해, 그리고 이로 인한 영혼의 잠식에 대해 물음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쳐내려 할수록 오히려 더욱 견고하고 치밀하게 달라붙는, 그래서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쉬는 것 외에는 도무지 벗어날 길이 없는 그 불안에 대해, 손쉬운 힐링과 치유가 아니라 묻고 또 묻는 방식으로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김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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