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2.18 14:11

30대를 마무리하며

-서강, 우리의 자랑이 되어주세요

 

30대 대학원 총학생회 회장 _ 김종혁

 

 

안녕하세요 제 30대 대학원 총학생회 회장 김종혁입니다. 제가 대학원에 들어 온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학생회 임원을 3학기나 했습니다. 그동안 서강대 대학원 원우들의 목소리를 대신해 학교에 전달하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많이 했습니다. 이 지면을 통해 그러한 고민들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최근 대학원생과 관련된 이슈가 미디어에서 자주 출현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인터넷 게시글에 대학원생의 삶을 묘사하는 글도 많이 올라옵니다. 이는 19622094명에 불과하던 대학원생수가 2014년 기준으로 33872명으로 52년 만에 158배 급증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국의 산업이 지식기반으로 변화하면서 전문인력 수요 증가와 청년 취업의 여파로 취업시장으로부터 잠시 도피하기 위한 원인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대학원생의 증가로 인해 더 이상 한국사회에서 대학원생의 경험이 소수의 경험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런 요인들이 대학원의 문제가 수면위로 부상하게 된 계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대학원생의 증가와 사회적 이슈만큼 대학원생의 처지가 그리 좋아지지는 못했습니다. 아직도 개선해야 할 문제들이 여전히 산적해 있습니다. 현재 대학원의 문제점은 무엇이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요?

 

대학원생의 당연한 권리 인권

아무래도 가장 우선시해야 할 문제는 대학원생의 인권 문제입니다. 인권 문제는 원우분들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평소 학생회에서 진행하는 설문조사가 100명을 넘기 힘든데 비해서 <연구환경실태조사>200명 이상이 참여하는 것을 보면 원우분들의 인권에 대한 관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인권은 인간으로서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입니다. 그러나 대학원생의 인권은 사각지대에 놓여있습니다. 개선되어야 할 부분들이 많지만 지면의 한계 상 짧게나마 우리가 쉽게 간과하고 넘어가는 대학원의 육아하는 원우들에 대해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육아와 학업을 병행하고 있는 원우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그들이 육아를 병행하면서 공부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아이의 엄마나 아빠가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한명의 연구자입니다. 자신의 자녀로 인해서 그들의 정체성이 부정당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 아이를 집에 내팽개치고 학교를 왔냐라고 하기 전에 이들이 연구자로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베이비존, 모유실과 같은 기반시설을 제공해야 합니다. 이렇게 육아를 병행하는 대학원생의 문제뿐만 아니라 조교의 인권 부당 침해 등 여러 고질적인 문제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지난 6월에 학교에서 인권권리장전 선포식을 진행하고 학교와 권리장전을 체결했습니다. 최근 대학원사회에서 일어난 변화 중 큰 변화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최근 11월에 진행 중인 <연구환경실태조사>를 보면 많이 달라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여전히 학교의 인권실태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인권권리장전 선포식과 함께 인권위원회는 만들어졌지만 문제를 제기할 인권센터의 설립은 아직도 멀어 보입니다. 만들어진다고 해도 학교에서는 인권센터의 역할을 단순히 문제 발생 후 해결하는 것에만 주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인권센터의 바른 방향은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에 인식을 개선하고 방지하는데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학교는 예산을 문제로 이야기합니다. 이럴 때 갈 길이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래도 얼마 전 현직 대학교 총장이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검찰에 수사를 받게 된 사건은 한줄기의 빛처럼 여겨집니다.

 

대학원의 조교의 노동자성 그리고 장학금

대학원생의 <연구환경실태조사>를 보면 전업학생이 70% 이상을 차지합니다. 전업학생의 경우 등록금을 내고 생활비를 감당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원우분들이 대학원에서 조교를 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2012년에 일반장학금 지급규정이 개정되면서 학과장 장학금이 폐지되었습니다. 그 후 TA장학금(조교 장학금)으로 전환되면서 조교의 수가 늘어났지만, 이전 장학금의 총액은 오히려 줄어들었습니다. 사실 장학금의 총액이 줄어든 것도 문제이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TA장학금이 교내 장학금의 비율을 0%로 만든 조치나 다름없다는 사실입니다. TA장학금은 대학원생들이 조교로 일한 대가로 받는 임금입니다. 대학본부는 이 돈을 장학금 예산으로 지급함으로써 마치 장학금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엄연히 TA장학금은 노동에 대한 대가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걱정하듯이 조교가 임금으로 변화면서 장학금이 다시 한 번 줄어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학교는 학업을 독려하기 위한 서강만의 장학금 제도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연구환경실태조사>에서 많은 학생들이 요구하듯이 좋은 장학금 제도가 생긴다면 학생들의 연구 환경 또한 개선될 것입니다. 또한 조교의 임금과 노동자성의 인정을 통해서 그에 합당한 조교제도가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논문심사 역시 교육의 일환

대학원생들의 경제적 여건은 그리 녹록지 않습니다. 한 명의 연구자로서 대학원의 진학하지만 내야 할 등록금은 4학기 동안 거의 2천만 원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등록금이 다가 아닙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기 위해 논문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사회과학이나 경영학의 경우 논문을 쓰기 위해서 설문조사 방법을 많이들 사용합니다. 설문조사를 할 때 설문대상자에게 답례품으로 선물을 제공하는데 적게는 몇 십만 원에서 많게는 백만 원 정도의 비용이 지출됩니다. 대부분이 전업 학생인 대학원생들에게 이러한 금액은 정말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논문심사를 받기 위해서는 논문 심사료를 납부해야 합니다. 대학원 마지막 학기는 대부분 수업을 듣지 않고 논문을 씁니다. 이때 학생은 이미 등록금을 냈는데 또 논문 심사료를 내라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대학원에서 논문 심사료를 부과하는 것은 등록금을 낸 대학원생들에 이중부과나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에 경우 대학원생이 학교에 연구를 신청하면 연구비를 지원합니다. 산학협력과 연결된 수업에서 지원받을 수도 있지만 이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신청을 통해서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최근에는 많은 대학원이 논문 심사료를 일련의 교육 과정으로서 등록금에 포함시키고 폐지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위 논문은 연구자 개인만 아니라 소속 학교의 재산이기도 합니다. 또한 논문의 수준이 대학의 수준과 직결됩니다. 학위논문을 없애는 것보다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서 연구의욕을 고취시켜야 합니다.

 

결국은 대학원 졸업이후 진로가 문제

대학원의 진학은 결국 자신의 진로를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대학원의 졸업이 취업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연구환경실태조사>를 보면 많은 원우분들이 대학원생을 위한 취업시스템 혹은 교육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후 학교에 대학원생을 위한 취업교육이 있는지 확인한 결과, 이미 취업센터에서는 대학원생도 포함해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취업시장에서 석·박사생을 위한 취업의 자리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고급 연구 인력이 가장 많이 취업할 수 있는 곳이 대학과 정부출연·기업 연구소인데 학령인구 감소에 따라 대학 교수로 취업할 기회는 점차 줄어들고 기업 상황도 여의치 않습니다. 특히 대학 등 연구기관에서 국내 석·박사보다 해외 유학생을 더 선호하는 상황입니다. 서강대 경우, 자대 출신의 교수님이 많지 않습니다. 지난 기획예산팀에 확인한 결과 몇 십 명이 넘지를 않았습니다. 대학원생의 진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교 자체가 연구중심의 대학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포스트닥(박사 후 과정) 위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한 명의 교수 밑에 조교수, 부교수를 포함해 포닥이 많고 이를 통해 교수는 그들이 만든 연구 결과를 모아 방대한 논문을 쓴다고 합니다. 대학원생들도 연구자로서 생활비를 후원받으며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현재 우리 학교에서 대학원 발전계획으로 세우고 있는 것은 신입생 모집 확대와 인권 개선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일이지 발전 방안은 아닙니다. 대학원생을 지속적으로 유치하기 위해서는 대학원생의 진로를 보장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식의 변화가 없다면 대학원생들은 계속 줄어들고, 해외로 나가려고 할 것입니다.

 

대학원생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결국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학원생의 목소리가 더욱 커져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대학원생들이 처해있는 환경, 그리고 학과별 상황이 아직도 학교에 잘 반영이 되고 있지 않습니다. 학생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서는 학생자치가 잘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최근 서강대를 포함해서 많은 대학들의 학생 자치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지난 과거에서 학생회가 저지른 문제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외에도 학생들이 여유를 가지고 연대해서 목소리를 낼 수가 없다는 문제점도 있습니다. 대학원총학생회는 매 학기 초 과대표자회의를 통해 대학원생들과 개별학과의 전반적인 사항에 대해 의견을 교류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근본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현재 과대표자는 각과의 조교장이 대부분 맡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교장은 과를 대표한다기보다 학과 행정업무 담당자 성격이 강합니다. 대학원생들의 자치권 회복을 위해서는 책임 있게 과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을 선출할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대학원 총학생회도 과대표자들이 운영하는 구조로 개편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대학원 총학생회가 학교를 대신해서 일하는 행정팀이 아니라 대학원생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하는 자치기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장학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재 학생회 예산으로 이를 지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학교에서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원우분들도 대학원 총학생회가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대학원의 수준은 대학원생들의 연구 의욕에서 시작됩니다. 대학원생이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의욕을 가질 수 있도록 학교는 아낌없는 지원으로 연구 환경 조성을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서강의 자랑이 될 수 있게, 서강 우리의 자랑이 되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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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2.18 14:09

우리 학교에는 성평등위원회가 있습니다.

 

20171학기 성평등위원회 위원, 일반대학원 사회학과 석사과정 _ 한나현

 

 

아마 많은 서강대 대학원생들이 대학원 성평등위원회’(이하 성평등위)의 존재를 모를 것이다. 나 역시 총학생회 집행부로 일하면서 성평등위에 20171학기에 참여하기 전까지 성평등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소개를 위해 성평등위의 존재 이유가 적혀있는 시행세칙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서강대학교 대학원총학생회 성평등과 성적자율권 보장을 위한 시행세칙은 제 11조의 총칙에서 이 세칙이 서강대학교 대학원총학생회에서 성평등을 실현하고 특정 성별, 성정체성, 성적 지향에 관계없이 모든 구성원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 존중받는 생활공동체를 형성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고 밝힌다. 이를 위해 설치된 기구가 과대표자 회의의 인준을 거쳐 매 학기 새롭게 구성되는 일반대학원 총학생회 산하의 성평등위원회이다.

 

이 시행세칙의 제정일이 무려 2008324일인데, 10여년의 역사가 무색할 정도로 존재감이 없다. 심지어 성평등위원으로 활동할 당시에도 이전의 성평등위가 어떤 이슈를 가지고 논의했고 또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그리고 했었는지에 대해 알 방법이 없었다. 더 이상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옛 문서와 사진들이 쓸쓸하게 나뒹굴고 있는 대학원 총학생회 싸이월드 클럽에서 , 성평등위는 몇 년 전 김조광수 씨를 초청한 행사를 했었구나-‘ 따위의 조각정보만을 알 수 있었을 따름이다. (학생사회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자료의 축적과 역사의 전승은 필수적인데, 특히 대학원 사회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그런 것에 무관심하다. 매번 다시 맨땅에 헤딩하기!)

 

그러나 이러쿵 저러쿵 불평해도 사실, 제정된 세칙을 찬찬히 읽다보면 2008년 당시 성평등과 성적 자율권의 보장을 위해 수많은 토의와 자료수집과 여러 절차를 거쳤을, 그때 당시사람들의 고민의 흔적들을 줍게 된다. 가령, 시행세칙 제 2조는 성평등 및 성폭력의 개념을 정의하는 조항인데, 정식화된 개념 2가지에 세부개념 7가지 그리고 거기에 더해 예시를 13가지 종류나 들면서 (세칙에 이런 구체적인 예시를 드는 경우가 있던가? 나는 처음 본다. 예를 들어, ‘ 술자리 벌칙의 일종인 러브샷을 강요하는 행위와 같은 예시들이 일일이 첨언되어 있다.) 무엇이 성폭력인지를 규명하고자 애쓴다. 이 조항들을 읽어 내려 가다보면, “ ‘원래 다 그런 거 아냐? 그게 뭐 어때서?’ 싶은 행동들도 성폭력이거든? 제발 좀 알아들어라!“ 하는 외침이 들린다. , 내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이런 외침을 듣게 되면 그 사람의 고민과 나의 고민이 이어지면서 우리가 함께 같은 목표를 위해서 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른 시간에 있어도 서로 만나게 되는 영화 <너의 이름은.> 적인 경험.

 

하지만 물론 이들이 남겨준 유산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세칙이 처음 제정될 당시에 이것은 만든 이들의 최선이 담긴 결과물이었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개념들은 보다 더 촘촘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구멍을 메우기 위해 개정작업을 했다. 20171학기 성평등 위원들이 머리를 맞대어서 1) 성 정체성, 성적 지향에 관한 내용을 추가 하고 2) 남성, 여성', '양성'''으로 수정하고 3) 성폭력의 개념을 성적인 폭력(sexual violence)’ 뿐 아니라 성별화된 폭력 (gender violence)’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장해서 정의하는 것을 골자로 시행세칙을 고쳐 썼다. 기존의 세칙에 켜가 쌓이는 것을 보면서 다음에 올 성평등위원은 또 어떤 눈으로 이 개정된 세칙을 보게 될까? 또 어떤 개정작업이 이루어질까? 라는 기대를 품었다. 이렇게 과거로부터 전달받은 메시지를 지금에 맞게 읽고 생각하고 고쳐 쓰는 일이야말로 (대학원 신문의 이번 호의 주제인) ‘기억, 기록행위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이런 기억, 기록행위를 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그러나 이렇게 달콤한 기대에 부푼 마음과는 달리 개정은 과대표자 회의에서 아무런 지적 없이 간단히 통과했다. 분명히 부족한 것이 많을 텐데 아무도 토론을 걸어오지 않았다. .지적받고 싶다. 귀찮은 일이 줄어서 기뻤지만 뒷맛은 씁쓸했다.

 

방금은 마치 학생사회가 성평등에 대해 아주 무관심한 것처럼 묘사했지만, 사실 성평등위를 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성평등한 문화를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2008년에 처음 시행세칙과 성평등위를 만들자고 제안했던 사람이 그랬고, 성평등위의 활동이 기록되어야 한다고 믿으며 나에게 기고를 제안해준 대학원 신문사 편집위원이 그랬으며, 실태조사에서 자신의 피해경험을 자세히 기술해주었던 익명의 응답자가 그랬다.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회에서 벌어지는 성폭력을 막고, 보다 평등한 관계맺음의 방식을 만들어 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20171학기에 성평등위에서 실시한 <성평등 실태조사> 문항에 대한 사람들의 길고 긴 답변들은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회가 폭력에 무방비하며, 피해자에게 희생을 감수하도록 함으로써 멀쩡한 척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러한 실상을 자세히 써 보내주는 마음에는 무언가 달라질 수 있고 달라져야만 한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나는 사실 이 답변들이 버거웠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많지 않고 혹은 내가 잘 할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사를 한 이상, 답변을 받은 이상, 이 무게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하려고 노력해야 했다. 그래서 지난 학기 동안 실태조사 결과를 홍보하고, ‘인권권리장전에 조사결과를 반영하고, ‘인권위원회를 설치하는 데에 이를 근거자료로 사용했다. 뚜렷한 성과가 있었는가 물어보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첫 번째, 홍보가 잘 되었다면 문의가 많이 들어올 텐데 그것도 아니고, 두 번째, ‘인권권리장전은 애초에 규범적인 이어서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하고, 특히 세 번째, ‘인권위원회는 학교와 논의한 지 한참 되었지만 더디게 진전되고 있다. 또한 현재의 인권위원회의 설치 구상이 얼마나 피해자를 고려한 것인지, 문화적인 측면은 간과하고 오로지 사건의 후처리만을 맡게 되는 것은 아닌지 등등 의문스러운 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기억기록만 남는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가 각자의 몫으로 참여하고 있는 이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회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일을 진행하고 있는지 서로 적극적으로 알리고 공유해서 많은 사람들이 학내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과정에 접근할 수 있고, 관심을 기울이고, 관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참고로, 이번 학기에 성평등위에서 주력으로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부모원생의 학업권과 육아권 보장 프로젝트(가제)’이다. 이 프로젝트의 주제 역시 지난 학기 실태조사에서의 요구를 반영하여 선정한 것이다. 학교 내에 육아에 필요한 서비스와 공간을 마련하고, 홍보하는 일을 계획하고 있다. 수유실 공간을 늘리고 환경 개선하기, 학내 혹은 학교와 연계된 보육시설 요구하기, 부모원생 커뮤니티 만들기 등등을 떠올리고 있는데, 아무래도 장기적인 프로젝트가 될 것 같다. 대학원생의 육아가 학업을 포기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대학원 사회가 함께 노력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 일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마침 총학생회에서 <대학원생 연구환경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있으니 이를 통해서 상상력을 나누어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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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2.18 14:07

기억을 나누는 기쁨

 

기억의책 편집자 _ 박범준

 

 

기억의책을 만들기 시작한 지 2년이 지났다. 70여권 기억의책을 만드는 동안 꿈틀 직원 수는열 다섯을 넘었고, 바다 건너 대만에서도 첫 번째 기억의책이 인생서책(人生書冊)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처음 시작할 때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일들이 즐겁게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기억의책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아버지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단지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셨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철이 들면서부터 아버지와 불화를 거듭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제법 당당하고 어른스러운 나였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늘 위축됐다. 나를 철없고 답답한 막내아들로 보는 아버지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아버지 앞에 서면 긴장했다. 조리 있게 내 뜻을 설명하지 못했고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을 강변할 뿐이었다. 아버지는 회사일로 바빠 보이지 않다가 느닷없이 나타나 나에게 이해할 수 없는 잔소리를 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나이를 먹으면서도 아버지와의 관계는 내 마음 속에 깊은 상처였다. 늘 힘들었고, 자주 불화했고, 그 속에서 깊은 좌절과 수치심을 느꼈다. 막연하게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낄 무렵 내 생에 더 큰 시련이 찾아왔다. 10년 동안 함께 살아온 아내와의 결별이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제법 당당하고 어른스러웠다고 말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특히 아내와 감정싸움을 할 때면 마치 아버지와 관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철없고 답답한 사람으로 돌변했다. 그때마다 어렴풋이 아버지와의 관계가 내 삶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실수가 쌓이면서 아내와의 관계는 점점 나빠져 갔고, 마흔을 살짝 넘긴 나이에 아픈 이별을 맞이했다.

살다보면 잘 맞지 않아 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어리석고 성숙하지 못한 나는 너무나도 아프게 헤어져야 했다. 그 뒤에 찾아온 것은 깊은 좌절의 시간이었다. 다행히도 좌절을 딛고 일어서던 무렵에 나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반드시 회복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더 이상 유치하고 미성숙한 채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아버지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는 시도는 번번이 좌절했다. 너무나도 다른 세월을 살아오면서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아버지와 나는 사사건건 부딪혔다. 차라리 멀리 떨어져 지내는 것이 관계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의 어려움을 느끼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날 제사를 마치고 식사를 하다가 오랜만에 아버지가 말문을 여셨다.

요즘은 무슨 일을 하고 있냐?”

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당시에 쓰기 시작한 책에 대해 설명을 드렸다. 아버지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너는 대체 언제 정신을 차릴 거냐? 그런 책을 쓰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어디 취직할 생각을 하지 않고......”

나에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을 철없는 짓이라고 비난하시는 것에 마음이 상한 나는 거친 숨을 가다듬어야 했다. 예전 같으면 욱하고 성질을 냈겠지만 차분하게 내 감정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아버지, 저 이제 나이가 마흔이 넘었어요. 아버지가 제 삶을 인정해주지 않으셔서 답답해요.”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아버지가 조금은 내 뜻을 이해해 주시리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의 말을 듣고 불같이 화를 내셨고, 나는 다시 한번 좌절하면서 자리를 떠야 했다.

혼자 방에 누워서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대체 나의 삶을 인정해달라는 말이 뭐가 그렇게 화가 날 말인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무서운 생각 하나가 내 머리를 스쳤다.

마흔이 넘은 아들의 삶을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아버지에게 말하던 그 순간까지 내가 일흔을 넘긴 아버지의 삶을 인정한 적이 있었던가?’

철이 들면서 아버지의 삶은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뿐 그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 적은 없었다. 마흔이 넘도록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아들의 마음이 답답했다면, 일흔이 넘도록 아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제서야 아버지가 보인 분노를 이해하면서 혼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 무렵 한 책에서 아버지의 어린 시절에 대한 대화를 나누라는 조언을 들었다.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가치관의 차이로 부딪히기 쉽지만, 아버지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어른이 되고 아버지가 되어버린 내 기억 속 아버지 모습이 아니라 천진난만하고 꿈이 많던 미래를 고민하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년은 나처럼 생각이 많고 겁이 많았다. 미래는 불안했고 기댈 곳은 많지 않았다. 기억 속 나의 어린시절 혹은 내 주변 가까이 지내는 친구나 후배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제서야 거짓말처럼 아버지의 모습이 편안하게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내 꿈 중에 하나가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세상에 내놓는 것이었다. 운 좋게도 나는 30대에 그 꿈을 이뤘지만, 혹시 아버지에게도 그런 꿈이 있지 않았을까? 굳이 많은 독자를 만날 수는 없어도 상관없다. 누구에게나 자신 삶의 이야기는 그 무엇보다 의미 있을테니 말이다. 적어도 아들, 딸과 손주들은 그 책을 읽고 자신의 뿌리를 떠올릴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모이면 사회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기록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생애를 담은 책이니 생애사라고 부를지, 자신의 삶을 기록한 책이니 자서전이라고 부를지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가 기억의책이라는 이름을 생각해냈다. 대단할 것 없고 특별할 것 없어도 한 사람의 기억을 그대로 담은 책이다.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책을 만들자는 말씀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 왜 또 쓸데없는 짓을 하냐고 꾸짖지 않을지..... 여전히 나에겐 아버지에 대한 불편함과 두려움이 남아있었다. 먼저 제주해녀 할머니의 기억의책을 만들었다. 경험 없이 의욕만 앞선 책이었지만 함께 참여한 동료들에게는 소중한 경험과 큰 용기를 준 책이다. 딸을 여섯 낳고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얻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책이 한권 나오니 기억의책을 더 만들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아버지도 흔쾌히 책을 만들고 싶다고 하셨다. 아버지 기억의책을 만들고 나서 아버지로부터 큰 선물을 받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가 용기를 내주지 않으셨다면 사라져버렸을 이야기들이 빛바랜 사진과 함께 책으로 남았으니 말이다. 아버지 책을 만들어서 처음 보여드리는 날 무척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책을 찬찬히 살펴보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오래 기다리셨죠? 이제야 막내아들이 아버지 삶을 그대로 인정해드려요.’

기억의책을 만들기 위해 꿈틀이라는 이름의 사회적기업을 만들었다. 꿈틀에 참여한 분들은 모두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다. 실향민이신 아버지의 이야기가 궁금한 원성철 대표님, 어머니에게서 늘 너는 늘 남의 이야기만 쓰지 말고 네 엄마 이야기도 한번 써봐라. 엄마 이야기가 책 한권이다라는 말을 들었다는 권민진 부편집장님, 젊어서 아버지를 잃은 강민수 부편집장님, 인류학 석사로 지역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가며 논문을 쓴 오주해 작가님, 홍보영상을 촬영해준 인연으로 시작해 회사에 들어온 영상담당 김동언씨, 일인창조기업으로 어르신들의 옛 사진을 모아 전시회를 여는 일을 했던 박미혜 이사님 등등. 이제는 열다섯 명이 넘은 꿈틀 식구들은 책을 가장 잘 만들거나, 글을 제일 잘 쓰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삶은 기록할 가치가 있습니다라는 믿음으로 삶의 의미를 가장 잘 존중하고 삶의 이야기를 제일 잘 경청하는사람들이다. 그 힘으로 우리는 세상에 없던 부모님의 삶을 책으로 엮어서 남기는 일을 만들어왔다.

20179월에는 대만에서 만든 첫 번째 기억의책이 세상에 나왔다. 여행 중에 만난 대만 젊은이들에게 내가 하는 일을 설명하면서 나도 우리 할아버지 책을 만들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 그 친구 소개로 알게 된 대만의 젊은 작가, 편집자, 디자이너들에게 꿈틀이 추구하는 가치와 하고 있는 일을 설명하고 대만에서도 이런 일을 해보자고 설득한 지 1년여만의 일이었다. 한국에서도 첫 번째 기억의책이 나오면서 회사의 꼴을 갖추고 일이 시작되었다. 책을 만들 수 있는 팀이 짜여지고, 보여줄 수 있는 시제품이 나왔으니 대만에서도 곧 기억의책들이 하나 둘 세상에 나오리라 기대한다. 마침 11월에는 대만에서 첫 번째 기억의책 주문이 들어왔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가족의 기억의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가장 한국적인 문화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일인데, 어쩌면 인류에게 가장 보편적인 욕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구에게나 하나 뿐인 자신의 기억은 소중하다. 어르신들은 누군가 자신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귀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무척 행복해하신다. 한 나절 동안의 인터뷰에 지칠 법도 하지만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동안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열정을 보여주시는 경우가 많다. 그 이야기가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오는 순간보다도 그렇게 누군가 앞에서 자신의 기억을 토로하는 순간 더 행복해하시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기억을 풀어놓는 동안 스스로 자기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많은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들은 한 뇌인지언어학자는 그렇게 오래된 경험을 더듬고 언어로 구성하여 표현하는 것이 가장 높은 수준의 뇌인지언어활동이며, 그런 활동이 어르신들의 치매를 예방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의견을 주셨다. 2018년에는 어르신들이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고 다른 사람과 나눔으로써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되는 기억활동 교육프로그램을 산학협력으로 개발할 예정이다.

기억의책을 통해 가족들은 간접적으로나마 깊이 있는 삶의 경험을 공유하는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것이 주는 긍정적인 영향은 나 스스로가 아버지와의 경험을 통해 확인한 바이다. 더 나아가서 장례식장에서 고인 삶의 이야기를 나누고, 고인의 기일에 가족들도 제사준비에 스트레스를 받기 보다는 고인 삶의 이야기를 나누며 추모하는 가족문화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2017년 꿈틀은 제주도 서귀포서 남원읍 하례리의 어르신 열 분의 기억의책을 만들었다. 한 마을에 태어나서 평생을 살아온 열 분 삶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라면 마을 이야기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기획한 프로젝트다. 2018년에는 제주도 4.3사건 70주년을 맞아 4.3 생존자 약 백 분의 어르신 기억의책을 제작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재일제주인등의 재외동포, 특정지역이나 직업의 경험을 공유하는 어르신들의 기억의책을 만드는 작업은 공동체의 역사를 개인 삶의 기억들로부터 구성하는 의미있는 작업이라 되리라 기대한다.

 

미국 드라마 왕좌의게임(The game of throne)를 보면서 기억에 남는 대사가 하나 있다.

아무도 너를 노래하지 않을 거야!”

중세 판타지라고 할 수 있는 이 드라마의 원작소설 제목은 불과 얼음의 노래(The song of ice and fire). 그 세계관 속에서 노래란 이야기고 역사이며 곧 기억이다. 아무도 너를 기억하지 않을 거야. 너는 어떤 역사에도 한 줄 이름을 남기지 못할 거야라는 말이 귀족에게 또 기사에게 커다란 저주 혹은 욕설처럼 쓰이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굳이 영웅이야기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기억 받고 싶어 한다. 혹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까봐 두려워한다.

기억의책을 만들면서 자신의 기억에 귀기울이는 사람이 있고, 자신의 기록이 세상에 남는다 사실에 행복해하는 많은 평범한 어르신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 뜻을 같이 하는 좋은 동료들과 더 큰 꿈을 꾸고 있는 꿈틀은 더 많은 행복한 기억들을 함께 쌓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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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2.18 14:07

기억과 불멸 사이 인공지능의 기억, 인간의 기억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저자, 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_ 김재인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에는 자아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이 나온다. 주인공 쿠사나기 소령은 상당히 철학적인 유명한 화두를 던진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기 위해 많은 부품이 필요하듯이, 자신이 자신답게 살려면 아주 많은 것이 필요하지. 타인을 대하는 얼굴, 자연스러운 목소리, 눈뜰 때 응시하는 손, 어린 시절 기억, 미래의 예감. 그것만이 아냐. 전뇌(電腦)가 접속할 정보와 네트워크. 그 모든 것이 나의 일부이며 나라는 의식을 낳고 동시에 계속해서나를 어떤 한계로 제약하지.” 나는 이 대사를 출발점으로 삼아 인공지능의 시대에서 기억의 자리를 살펴보려 한다. 이 글은 최근에 출간한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에서 다뤘던 주제 하나를 풀어 보완하고 확장한 것이다.

 

정체성 또는 동일성과 관련해서 테세우스의 역설이라는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 고대 영웅 테세우스가 탔던 배는 굉장히 오랜 기간 보존되었는데, 낡은 부분을 교체하다 보니 어느새 모든 부분이 교체된 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는 동일성을 유지한 걸까 아닐까? 이 역설이 문제가 되는 건 우리의 몸을 이루는 기관들도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기 때문이다. 심장, , 눈을 이루는 세포를 제외하면, 가령 가장 오래 유지되는 뼈도 10년이면 완전히 바뀌는데, 나의 정체성은 어떻게 유지된다고 할 수 있을까? 아장아장 기어 다니던 나와 지금의 나가 과연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 근거를 기억에서 찾곤 한다. 비록 몸은 바뀔지라도 기억의 동일성이 우리를 똑같은 존재로 보존해 준다는 것이다. 앞서 본 쿠사나기의 말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사실 기억은 둘로 구별해볼 수 있다. 하나는 나의 내적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 기억이다. 쿠사나기는 이 두 종류의 기억과 그 기억이 이루는 네트워크가 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기억의 문제는 정신 차리고 잘 살펴야 한다. 자신의 내적 기억만을 기억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금세 난관에 봉착하게 되니 말이다. 인간의 기억은 부단히 망각되고 왜곡되고 편집되고 변형되고 갱신된다. 따라서 본성상 변하게 마련인 기억이 자기 정체성의 기초가 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주목할 것은 외부 기억일 것이다. 타인의 증언을 포함한 외부 기억과 관계가 나를 확인해주어야 나는 나일 수 있다. 내가 분명히 기억한다고 믿는 걸 남들 모두가 부정한다면, 나의 기억이 진짜인지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제 내적 기억과 외부 기억을 비교·검토해 보자. 나는 내적 기억이란 용어 대신 인간 기억이라는 말을, ‘외부 기억이라는 포괄적 용어 대신 컴퓨터 메모리 같은 걸 가리키기 위해 외장 기억이라는 말을 쓸 것이다. 외장 기억은 USBSD 메모리, 하드디스크, SSD 같은 유형을 말한다. 그런데 이때 외장 기억과 인간 기억은 과연 기억이라는 같은 유() 아래에 있는 걸까? 그 둘은 기억이라는 명칭만 공유할 뿐 본성은 전혀 다른 게 아닐까? 최소한 입력(코드화), 보존, 출력(해독)’이라는 과정만 보더라도 외장 기억과 인간 기억은 너무도 다르다.

 

아마도 외장 기억을 인간 기억의 유비로서 기억이라고 지칭한 것부터가 문제의 시작인 것 같다. 이미 2500년 전에 플라톤은 문자를 외장 기억으로 여기면서 비판한 바 있다. 외장기억이 인간의 기억 능력을 저하시킬 것이라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실은 인간 기억을 보호하고 도와주는 것이 바로 외장 기억이다. 오히려 인간 기억은 변화무쌍하고 휘발성도 강하다. 인간 기억이 왜 이런 특성을 지니게 되었는지는 진화의 역사만이 알려줄 수 있으리라.

진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억은 본성상 현재가 과거를 포함한다. 현재에 과거가 다 담겨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인간 기억의 경우 과거가 현재에 끊임없이 삼투되면서 존속하는 반면, 외장 기억에서는 현재가 과거를 완전히 덮어쓰고 대체한다. 인간 기억은 회상이라는 심리 활동을 통해 현재로 소환되며, 이 과정에서 기억 내용이 변한다. 반면 외장 기억은 내용이 저장될 때 따른 규칙을 따라 역순으로 해독된다. 입력과 출력 사이의 내용은 똑같이 유지된다. 이는 마치 도서관과도 같다. 서가에 꽂아놓았던 책을 그대로 꺼내는 것이다. 물론 저장 매체가 훼손되면 내용이 손실된다. 망각은 외장 기억에서는 치명적이지만, 인간 기억에서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한편, 󰡔특이점이 온다󰡕(2005)의 저자이자 구글의 엔지니어링 이사인 레이 커즈와일은 2030년이면 인간의 의식을 컴퓨터에 업로드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2045년경이면 인간 뇌와 결합한 인공지능이 모든 인간의 지능을 합친 것보다 강력해질 것이란 구체적 예측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타고난 생물학적 사고 장치와 우리가 만들어낸 비생물학적 지능이 융합됨으로써 인간의 지능은 엄청나게 확장된다. 학습은 일단 온라인을 통해 이뤄지겠으나, 뇌 자체를 온라인에 접속할 수 있게 되면 거추장스런 과정 없이 곧바로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다운로드받게 될 것이다. (...) 지구 상의, 그리고 지구를 둘러싼 지능은 줄곧 기하급수적 확장을 거듭하여 결국에는 지능적 연산을 뒷받침할 물질과 에너지가 모자라는 순간에 다다를 것이다. 그렇게 우리 은하의 에너지를 모두 소모하고 나면 인간 문명의 지능은 이론적으로 가능한 최고의 속도로 더 먼 우주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413) 커즈와일의 이런 주장은 중요한 전제를 깔고 있다. 바로 인간의 기억과 컴퓨터의 기억이 같은 본성을 가졌다는 전제 말이다.

 

커즈와일의 주장은 새로운 건 아니다. 이미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괴델, 에셔, 바흐󰡕(1979)에서 뇌와 컴퓨터, 마음과 프로그램의 동일성을 주장한 바 있으며, 최근에는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호모 데우스󰡕(2015)에서 같은 주장을 했다. 이들의 공통된 논점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뇌는 자연에 존재하는 다른 물질과 다를 바 없는 물리적 하드웨어다. 그 안에는 소프트웨어나 프로그램에 해당하는 뭔가가 작동하고 있다. 그게 마음이다. 하드웨어가 똑같이 물리의 지배를 받는다면 그 성격에 관계없이 소프트웨어의 구현이 가능하다. 따라서 실리콘 기반인 컴퓨터를 통해 탄소 기반인 뇌 안에 든 마음의 구현도 가능하다.’ 이를 논거로 삼으면 인간을 닮은(human-like) 인공지능의 출현이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가능해진다.

 

이 주장은 논리적으로 흠잡을 데 없어 보이지만 큰 허점이 숨어 있다. 인간이 마음을 갖고 있다는 객관적인 사실은 확인 가능하다. 하지만 어떤 과정을 거쳐 마음이 생겨났는지 또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우리가 아는 건 거의 없다. 그저 38~40억 년에 걸친 기나긴 생명의 진화 과정 중에서 생겨났다는 것만 알 뿐이다. 논리적으로 구현 가능하다는 것만 가지고, 생성 원리나 작동 프로세스를 모르면서 똑같이 만들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과 기술적, 공학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논리적으로 가능할지는 몰라도 실제 엄청난 시간이 걸릴 테니까. 박물관에 가면 아름다운 고려청자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고려청자를 만들지 못한다. 물론 언젠가는 똑같이 구현해낼지도 모른다. 가까운 시일에 그런 일이 일어날지 확신하지 못할 뿐. 인공지능의 경우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아니, 사정이 훨씬 나쁘다고 해야 옳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닮은 지능을 갖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정확히 충족시킬 수 있는 논리 또는 알고리즘이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형 인공지능이 실현되려면 두 층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 정보의 입력과 출력을 통해 특정 활동 내지 기능이 이뤄지는 층과 그런 활동이 고장 났을 때 이를 스스로 자각하는 층이 그것이다. 마음의 특징은 이 2개의 서로 다른 층이 하나의 통일체로 작동한다는 데 있다. 생물 또는 마음은 자기가 고장 난 것을 스스로 고치는 자가수선(自家修繕)이 가능하다. 내가 보기에 그게 가능한 것은 생물뿐이고 컴퓨터는 불가능하다. 버그를 잡는 디버깅 프로그램의 예를 드는 사람이 있는데, 디버깅 프로그램도 버그에 걸리면 사람이 개입하지 않는 한 고칠 방도가 없다. 결국 가장 상층(meta-layer)에서는 인간이 개입해야만 한다.

 

생명체만이 가진 지능의 이런 특징은 진화의 산물이다. 문제가 발견됐을 때 스스로 문제를 자각해 빠르고 정확하게 보정(補整)하는 개체가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반면 개체군 차원에서는 강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강자라는 지혜의 터득이 중요해진다. 최강이 되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적응할 수 있는 다양성을 최대화하는 것이 진화에서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지능은 그런 진화 전략의 연장선상에서 생성되었다. 그래서 인공지능과 차별되는 마음의 능력이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 능력이라고도 요약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은 지금도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인간 몸과 마음과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잘못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이해는 이미 폐기됐다. 뇌과학 연구를 통해 컴퓨터와 뇌의 작동 방식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알파고에 적용된 신경망 학습이니 심층학습이니 하는 것도 유비적 표현일 뿐, 인간의 신경망과 인공지능의 학습 방식은 전혀 다르다. 신경망 학습마저도 통계학적이며, 그 결과물인 인공지능은 결정론적 계산기이다. 무수한 사칙연산 과정에서 중간에 하나만 틀려도 답이 안 나오는 수학 문제를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컴퓨터의 메모리는 중간에 바뀌지 않아야 하며, 고정성과 안정성이 제일 중요하다.

 

반면 인간의 신경망은 손실과 추가의 과정이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의 기억은 계속 변한다. , 인간의 기억을 컴퓨터에 업로드하는 게 기술적으로 가능할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그 순간부터 기억은 정지한다. 컴퓨터 메모리는 고정불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그 순간을 포착한 사진을 찍어놓은 것과 같다. 하지만 현실 속 인간의 기억은 늘 변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고 나면 컴퓨터의 기억과 현실 속 나의 기억은 전혀 다른 게 될 수밖에 없다. 내 안에선 변하는데 저장된 그곳에선 멈춰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나는 늙어 가는데 사진 속 나는 예전 모습 그대로인 것과 같다.

이번엔 반대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 두 편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의 신경망과 똑같이 작동하는 레플리컨트(복제인간) 제조 기술을 발명했다고 치자. 내 기억을 열 명의 레플리컨트에 이식하면 현실의 내가 지닌 기억과 레플리컨트들이 지닌 기억이 시간이 지난 뒤에도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나대로, 레플리컨트는 레플리컨트대로 열한 명 모두 기억이 바뀌어 갈 텐데?

 

인간과 컴퓨터에게 기억이라는 같은 낱말은 전혀 다른 뜻을 지닌다는 것을 확인했다. 본래 유비(analogy, 비유)는 알아듣기 쉽게 하려고 사용하는 수단이지만, 더 큰 오해로 이끌고 가는 경우가 많다. 유비는 ‘A : B = C : D’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방식이다. 가령 : 컴퓨터 = 마음 : 인공지능같은 식이다. 하지만 여러 측면에서 인간과 컴퓨터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채, 계속 유비적 용어를 쓴다면 오해는 커질 수밖에 없으리라. 잘못된 유비의 예로는 기계학습, 신경망 학습, 진화 알고리즘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기억, 학습, 진화, 알고리즘 각각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다만 어렵다는 이유로 기피하기 때문에 유비에 빠지는 것일 뿐이다.

 

인간은 태곳적부터 불멸을 꿈꿔왔다. 하지만 실제로 바랐던 건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젊음과 건강이었으리라. 자기 기억이 화석처럼 기록되어 남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어차피 우리 삶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 다행인 건 우리가 죽으면 이미 아무 문제도 없고 살아있는 한 죽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삶의 순간마다 성실하게 임하는 방도 말고 다른 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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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2.18 14:05

일본군위안부기억의 재현과 확장을 위한 기록물 관리기관의 운영

 

영남대 역사학과 강사 _ 남영주

 

1. 기록물 관리 실태와 기록관 운영

20151228일 한일 외교장관은 회담을 통해 한국과 일본 정부가 일본군위안부문제를 항구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합의 사항을 발표하였다. 피해자 할머니들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합의는 재협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현실적으로 위안부 문제는 한일 정부 간의 정치적 문제로 다루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 이 문제는 민간차원에서 목소리를 높여야 할 것이기에 일본군위안부관련 단체들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특히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인정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민간단체들이 수집한 위안부 관련 기록물은 위안부의 실체를 증언하는 결정적인 역사 자료이다. 위안부 기록물의 가치를 인식한 국가기록원은 일본군위안부관련 기록물을 국가지정기록물로 지정하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을 관리하는 공공기록물관리기관이 설치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공공기관이나 과거사청산위원회가 명문화된 법률이나 규정이 있는 것에 비해 위안부 관련 기록물 관리기관은 사립박물관으로 분류되어 규정의 적용이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일본군위안부기록물 기관으로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생활공간에 건립된 <나눔의 집 일본군위안부역사관>, 대구·경북지역의 사)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 건립한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운동사의 현재를 담은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부산지역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이끈 김문숙 씨가 중심이 되어 건립한 <민족과 여성 역사관> 등이다.

<나눔의 집 일본군위안부역사관>1930년대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일본에 의하여 자행된 일본군 성노예제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1998년 개관하였는데, 일본군 성 노예제를 주제로 세계 최초로 세워진 역사관이다. 2015년 개관한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1997년 발족한 사)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 <일본군위안부역사관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다양한 방식의 범국민 모금 캠페인을 통해 형성된 기금을 기반으로 설립된 대표적인 커뮤니티 아카이브이다.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1994년 정대협이 사료관 건립준비위원회를 발족한 것을 계기로 2012년 개관하였다. 위안부 관련 기록물의 수집과 전시를 통해 위안부 교육과 문제해결,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전시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련기관과 연대하며 노력하는 행동하는 박물관이다. <민족과 여성 역사관>1990년 윤정옥 교수가 한겨레신문에 󰡒󰡐정신대󰡑원혼의 발자취 취재기󰡓를 연재하여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자, 󰡐부산여성의 전화󰡑의 운영위원장이었던 김문숙 씨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한 것이 오늘날 역사관을 설립하게 된 계기이다. 김씨는 1991년 사)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부산 정대협을 분리하고,󰡐정신대 전화󰡑를 개통하는 등 우리나라 최초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위안부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최초로 일본 정부로부터 위안부 배상 책임을 이끌어낸 시모노세키 재판을 주도하였다. 현재 위안부 기록물󰡑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모임의 한국대표를 맡고 있다. 앞서 언급한 기관들은 여러 단체들의 협력과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비해, 이 역사관은 김 관장의 私財를 기반으로 발족한 후 지금까지도 운영의 대부분을 김 관장이 담당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은 범죄행위’, ‘피해사실’, ‘해결을 위한 노력으로 분류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위안부 관련단체들이 제공하고 있는 전시 콘텐츠는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구술 즉 피해사실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본 역사관은 해결을 위한 노력과 관련된 기록물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데, 시모노세키 재판과 국민기금 반대운동 결과 생산된 기록물이 대표적이다. 시모노세키 재판에 참여한 2명의 위안부 할머니와 2명의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의 증언 기록과 재판에 관련된 모든 기록은 향후 피해 할머니들이 모두 사망한 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증거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김 관장은 역사관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배상이며, 이를 위해 역사관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민족과 여성 역사관은>1이 운영하는 일본군위안부기록물 관리기관인데, 인력 부족으로 인해 기록물 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현재 90세의 고령인 김 관장은 향후 역사관의 존폐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별다른 대안이 없으며 본인의 여력이 다할 경우 기록물은 국가에 기증할 계획이라고 하였다.(201612월 인터뷰)

 

2. 연대와 좌절

위와 같이 민간단체들이 설립한 위안부 기록물 관리기관은 이 문제를 피해 할머니들이 살아계시는 동안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201741일 제1회 일본군위안부박물관 회의를 東京에서 개최하는 성과를 낳았다. 1회 일본군위안부박물관회의 실행위원회는 “201512월 한일 정부가 피해자의 의사를 묻지 않고 합의를 하면서 위안부 문제가 모두 해결된 듯 한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위안부 피해 실태와 역사를 전하는 박물관의 역할은 차세대평화와 인권 교육이라는 목적 뿐 아니라 피해여성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도 지극히 중요해졌다고 이번 회의를 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여기에는 전 세계 일본군위안부박물관 7개와 위안부 관련 기억 활동을 전개하는 4개의 NGO 단체가 참가하여, 위안부로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기억을 계승하고 전쟁이 없고 여성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앞으로도 연대하여 활동해 나갈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201710월 말,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등 9개국이 공동으로 신청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보류되었다는 소식은 그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 모든 단체와 관련자들을 절망하게 하였다. 위안부 기록물은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상세히 알려주는 피해자의 증언 기록을 비롯해 위안부 운영 사실을 증명할 사료 등 2744건으로 구성되었다.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서 발언하고 이를 바탕으로 진상 규명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한 자료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유네스코 분담금 납부 거부를 무기로 내세워 유네스코를 압박한 일본 정부의 저지를 이겨내지 못했다. 또한 일본군위안부피해자인 이기정 할머니가 1111일 별세하여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총 33명으로 줄었다. 생존 피해 할머니들은 평균 85세 이상의 고령이며 언제 세상을 떠나지 알 수 없다. 우리에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이제 우리는 위안부 문제의 증거로 활동하는 피해 할머니들이 모두 사망한 후 이 문제의 해결과 기억화를 어떠한 방향으로 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들이 역사증거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피해 할머니들이 모두 사망한 후에도 운영 가능한 역사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록관 운영방안에 대해 모색해보아야 하는 시점이다.

 

3. 기억의 재현과 확장을 위하여

무엇보다도 일본군위안부기록물 관리기관에 대한 지원이 있어야 한다. ·물적 자원의 부족으로 인해 기록물 관리가 공공기록물관리기관 수준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지원을 위한 법 제정이 시급한 실정이다. 법률 제정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우선 <국가지정기록물>을 확대 지정할 필요가 있다. <국가기정기록물>에 대해서는 국가기록원에서 기록 관리에 필요한 물품을 지원하고 있다. 20179월 기준 총 12(15)<국가지정기록물>로 지정되었는데, 그 중 일본군위안부관련 기록물이 <국가지정기록물>로 지정된 사례는 3건이다. 8호 일본군위안부관련 기록물(2013, 나눔의 집, 3060), 8-1호 일본군위안부관련 기록물(2014,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940), 8-2호 일본군위안부관련 기록물(2014, 나눔의 집, 125) 뿐이다.

둘째, 소장기록물에 대한 목록화 작업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일부 일본군위안부기록물 관리기관의 경우 인적 자원의 부족으로 인해 소장 기록물에 대한 목록화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어서 소장 기록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록물의 소실이 우려되고 있다. 목록화 작업이 끝난 기록물에 대해서는 기록물 DB를 구축하여 이용자들에게 제공되어야 한다. 나아가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하여 모든 일본군위안부관련 기록물들을 열람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중 범죄행위와 관련된 기록물을 수집하는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기록물 관리기관이 수집하고 있는 기록물은 대부분 피해사실과 관련된 것이다. 일본이 위안부의 실체를 인정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피해 할머니들이 모두 사망했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범죄 행위와 관련된 기록물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중국, 대만, 필리핀 등 국외 위안부 관련기관 특히 가해국 일본의 위안부 기록물 관리기관과의 협력을 통한 기록물 발굴과 확보가 필요하다.

넷째, 기록물 관리기관은 소장하고 있는 기록물을 활용하여 일본군위안부의 기억을 확장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견학, 전시, 출판, 강좌, 강연, 세미나, 홍보(소식지) 등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노력을 해야 한다. 특히 소장기록물을 교육용 콘텐츠로 개발하여 역사교육에 활용할 수 있게 하여 후세대들이 이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해결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국가기록원 및 전공자들과의 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섯째, 일본군위안부기록물 관리기관의 활동을 기록화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모두 사망한 후에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한 기관의 활동 또한 중요한 역사기록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1992년에 시작된 수요집회는 25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쉬지 않고 개최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생산된 기록물은 향후 위안부의 실체를 입증하는 중요한 기록의 하나가 될 것이다. 앞서 살펴본 일본군위안부기록물 관리기관은 각기 다른 설립 주체로 인해 기관마다 집중하고 있는 활동이 다르다. 따라서 각 기관의 특성이 반영된 기록물 또한 향후 일본군위안부의 역사를 구성하는 역사기록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사진|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내 희움 스토어

 

여섯째, 피해 할머니들이 모두 사망한 후에도 위안부 기록물 관리기관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후원기관 및 후원자를 확보해야 한다.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의 경우 대구·경북지역에서 결성된 사)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 중심이 되어 건립된 커뮤니티 아카이브이다. 시민모임은 시민단체 활동을 통해 기록물을 수집하고 각 종 행사를 개최하여 역사관을 홍보하고 있다. 또한 시민모임의 브랜드 희움’(희망을 모아 꽃 피움)의 물품 판매를 통한 수익금을 역사관 운영에 활용하고 있다. 이 역사관은 시민단체 활동과 비즈니스가 만나서 탄생한 결과물로써 시민의 힘으로 역사관을 운영할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이다. 시민모임의 활동은 지속가능한 역사관 운영을 모색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위와 같은 제안이 실행되어 피해 할머니들이 생존해 있는 동안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빠른 시일 내에 국가의 지원과 관심이 있어야 한다. 20171124일 국회에서는 매년 814일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지정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그간 이 문제를 위해 노력한 관계자들의 땀이 결실을 맺은 결과이다. 그러나 더 이상 이 문제를 미루기에는 우리에게 시간이 많이 남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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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2.18 14:02

사라짐의 과정을 지켜보는 일

 

<안녕,둔촌주공아파트> 발행인, <마을에숨어> 대표 _ 이인규

 

 

 

사라질 고향을 기록하기로 했다.

사회생활에 치이던 20, 힘들 때면 나는 늘 나의 고향, 둔촌주공아파트를 그리워했다. 이곳은 나에게 언제 와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다. 앞으로 남은 인생길에서도 이렇게 흔들리는 일들은 많을 텐데, 재건축으로 이곳이 사라지면 나는 어디에서 위안을 얻어야 할까? 이곳을 떠나면 그리울 것이 분명한데 다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는 걸까? 이곳이 사라지고 나면 이렇게 아름다운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은 아마 믿지 않겠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둔촌 주공아파트가 사라지기 전에 기록으로 옮겨 담기로 했다.

 

아파트를 기록한다고 하면 건축물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내가 둔촌주공아파트의 건물 형태를 매우 좋아하는 것은 맞다. 아주 어릴 적에 잠시 있었던 낯선 외국 생활 이후에 내가 다시 아는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해 준 것이 바로 둔촌주공아파트의 새하얀 타워형 아파트 형태였다. 지금도 빛에 따라 달라지는 둔촌 주공아파트 건물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곤 한다. 하지만 내가 기록을 통해 남기고 싶었던 것은 단지 건축물에 대한 기록은 아니었다.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것

기록을 통해 남기고 싶던 것은 내가 이곳에서 경험한 모든 환경과 모든 관계였다. 아파트 단지를 만들 때 원래 있던 작은 동산 두 개와 완만한 구릉 지형을 그대로 살려 만들었다. 그 덕에 미세한 오르막을 걸을 때 다리에 힘이 들어갔지만, 땅을 대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몸으로 매일 느꼈다. 아파트 동과 동이 연결된 관계, 그 사이에 놓인 작은 오솔길과 푸른 잔디밭, 놀이터와 쉬어갈 수 있는 정자의 배치 등 섬세한 고민과 배려로 만들어진 멋진 부분들이 단지 안에 가득했다. 많은 시설이 있었지만 불필요하고 인위적인 것은 거의 없었다. 꼭 있어야 하는 것들이 적절히 놓여 오가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안에서 살면서 맺은 관계들도 모두 귀하다. 어릴 적에 동네를 오가면 아는 사람을 늘 만났다.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인사를 나눴고, 서로의 안부를 전하는 짧은 대화도 오갔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던 사람도 시간이 가고 자주 보면서 더 반가운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자율적이고 자유롭되 서로 피해를 주지 않고 배려하는 선을 지켰다. 9시 이후에는 청소기를 돌리거나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는 서로 지켜야 할 생활의 규칙이 있었고, 이러한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다 같이 모여 논의하던 협의 과정이 있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어르신들의 자원봉사를 많이 보며 자랐다.

우리에게 주어진 녹지와 나무가 넉넉했기에 단지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물에게도 자리를 내어주는데 인색하지 않을 수 있었다. 베란다에 새가 둥지를 틀면 아기 새가 다 자랄 때까지 어미 새를 도와 먹이를 주기도 하고, 아이 어른 할 거 없이 오가는 고양이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를 키우다 너무 커버려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경비아저씨가 닭장을 만들어 돌봐주시기도 했다. 매일 아침 들리는 새 소리가 좋았고, 새를 위해 작은 집을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내가 말하는 고향이라는 것은 특정한 공간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의 삶의 방식, 특유의 정서에 가까운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동안 당연하다고 배웠고 그렇게 믿고 살아왔던 삶의 가치관 같은 것 말이다. 이러한 일들이 둔촌 주공아파트를 떠나고부터 너무 많이 사라졌다. 더는 내 방 창문으로 푸른 나무를 볼 수 없었고, 집 밖을 나서서 거닐 수 있는 오솔길도 없었다. 이웃과 인사를 나눠본 적도 없었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이웃들만 늘어갔다. 둔촌 주공아파트에서 살면서 만들어진 나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고 싶었지만 환경적으로 그럴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둔촌으로 돌아갈 수 있길 계속 열망했다.

 

기록

<안녕,둔촌주공아파트>를 시작한 2년쯤 되던 지난 201412월에 다시 둔촌 주공아파트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꼭 한번 다시 이곳에서 살아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나는 많이 아프고 지친 상태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곳에서 다시 치유되었고 힘을 얻었다. 하루 일과에는 짧은 산책과 창밖을 보며 잠시 쉬는 시간이 더해졌고, 이웃과 자연스러운 인사를 나누며 지냈다. 다시 내가 삶에서 소중하게 여기고 가치를 두고 싶은 것들을 지키며 살 수 있었다.

 

둔촌으로 다시 돌아와서 기뻤던 것은 내가 기억하는 그 삶이 '미화된 기억'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나라는 존재를 만들었던 과거의 기억이 거짓이 아니고, 아직도 이곳에는 실재한다는 안도감이 나를 다음 단계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동안 믿고 살아온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흔들릴 때 우리가 고향을 찾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나의 고향을 기록으로 담는 것도 미래로 나아갈 힘을 얻고, 새로운 생각과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이 기록의 힘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 기록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기록은 단지 수장고에 잘 보관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이야기할 수 있는 소재가 되어야 한다.

 

사라짐의 과정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지난여름부터 주민들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매일매일 많은 것이 사라지고 있다. 사라짐은 현재 진행형이 되었다. 무너지는 모래성을 손으로 붙잡고 있는 기분이다. 그나마 모든 것이 온전했던 지난봄, 가장 반짝거리던 마지막 시간을 기록으로 남겨놓은 <안녕,둔촌X가정방문>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128일 나의 집 이사를 마지막으로 그 기록에 담긴 모든 집은 사라진다. 하지만 그 시절 각자의 이야기와 고민, 온기가 담겨진 집의 모습은 기록에 그대로 박제되어 기록에 참여한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원점이 되어줄 거라 믿는다. 그로부터 얼마나 자신의 삶이 더 나아갔는지 다시 되돌아가 생각해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상실은 이미 시작되었다. 사라지는 과정을 기록하는 것은 겨우 견디고 있는 상실의 당사자인 나에게는 개인적으로 너무 힘든 작업이다. 결국 사랑했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는 이 과정을 기록으로 옮기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지금 시점에서 내가 더 집중해야 하는 것은 사라지는 과정을 기록하는 것 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하나라도 해결해보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잃고 나서 애도하며 슬퍼하기 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해야 한다.

 

재건축 과정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게 된 나와 같은 처지의 고양이, 나무들에 마음이 갔다. 둔촌 주공아파트에서 나고 자라다가 처음 낯선 환경에 도달했을 때 적응하느라 힘들었던 나를 떠올리며, 둔촌 주공아파트를 벗어나서는 살아본 적이 없을 존재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잘 적응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뜻이 맞는 분들과 모여 우리 동네에 함께 살던 동네 고양이들의 이사를 준비하는 모임 둔촌냥이의 활동에 함께 하고 있다. 3만 그루에 달하는 나무로 가득찬 둔촌 주공아파트에서 단 한 그루라도 더 살릴 수 있는 방법도 고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이 땅에 지어지게 될 새로운 아파트 단지에 둔촌 주공아파트의 기억을 심어두고 싶다. 완전히 다른 모습의 공간이 되겠지만, 다시 찾아와볼 사람들이 옛 추억을 더듬을 수 있는 작은 단서들을 새로운 공간에서도 발견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렇게 기억이 이어지고 지역과 공간에 대한 애정도 이어질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다시 이 지역에서 새롭게 둥지를 틀 많은 사람이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기고 간 목소리를 통해 자연을 벗 삼고, 이웃 간 마음의 벽을 허물어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삶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우리의 둔촌 주공아파트는 비록 사라지지만, 이 터전을 사랑해온 사람들의 마음만은 다시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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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0.18 11:18

AI, 예술의 벽을 넘을 수 있을까

 

정준모_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미술비평

 

 

인공지능예술의 현재

최근 뉴욕의 사진전문갤러리 메트로픽처스에서 미국작가 트레버 파글렌(Trevor Paglen, 1974~ )의 전시회가 열렸다. 컴퓨터와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이 스스로 학습하면서 새롭게 만들어내는 내는, 아니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이미지들의 보이지 않는 변화를 추적하는 전시다. 전시된 작품들은 인공지능이 스스로 공부하는(Deep Leaning) 과정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이미지들을 추적하고 연구한 결과물로 소프트웨어 개발자들과 컴퓨터 과학자들이 수 년 동안 스탠포드대학의 레지던시에서 협업을 통해 얻은 성과물이다. 이 성과물들은 컴퓨터가 학습과정에서 급증하는 보이지 않는 이미지들을 스스로 생성해내면서 예상할 수 없거나 감지할 수 없는 것들을 채록(?),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시에 출품된 작품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이미지들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되는데 우선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자주 사용되는 부분 프로그램들을 모은 이미지와 컴퓨터가 판독 가능한 풍경, 그리고 컴퓨터가 스스로 만든 이미지들로 구성되었다. 그중에서 컴퓨터가 읽을 수 있는 이미지들은 독일의 예술가 히토 스테이얼(Hito Steyerl, 1966~ )의 이미지 백여 개를 가져다가 다양한 얼굴 인식 알고리즘을 적용시킨 이미지와 함께 나이, 성별, 감정 상태 및 기타 특징을 읽고 만들어낸 프로그램을 함께 전시했다. 또 한편에는 철학자이자 혁명가인 동시에 정신과 의사이기도한 프란츠 파농(Franz Fanon, 1925~1961)이나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Simone Weil, 1909~1943)의 사진을 읽기위해 안면인식프로그램을 사용했다. 파농의 얼굴에서 파생된 또 다른 다양한 파농의 얼굴 표정은 컴퓨터에 탑재된 생체 인식 소프트웨어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그 결과물들은 그 소프트웨어에 의해 결정된 고유의 특성을 보여준다. 같은 이미지에서 각각 대립되는 환각적인 형상들을 만들기 위해 파글렌은 이미지들을 전조와 관념, 괴물, 꿈 등으로 분류하고 다시 이를 인식해 조합하도록 인공지능을 훈련시켰다. 이렇게 교육을 받은 인공지능은 점점 더 자기 혼자 스스로 으스스하고 섬뜩하지만 아름다운 새로운 이미지들을 첫 번째 인공지능과 함께 협업을 통해 생산해냈다. 이 전시에 출품된 비디오 설치작업은 일반적인 컴퓨터 속의 인공지능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수 십 만개의 교육용 이미지들을 훈련을 통해 어떻게 사물과 얼굴, 표정과 행동을 익히는지 보여준다.

 

과학과 예술의 만남

늘 새로운 것에 목마른 예술가들에게 과학과 신기술은 충실한 동반자인 동시에 조력자였다. 사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1519)가 위대한 예술가로 추앙받는 것도 실은 그가 새로운 과학적 기법과 원리를 그림에 도입해 인간의 눈에 보이는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재현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원근법 특히 선원근법과 명암원근법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또 해부학을 통해 인체의 구조를 파악하고 있었던 그는 피부만 그린 것이 아니라 뼈대를 세우고 근육을 더해 인체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1879~1955)의 상대성이론은 현대미술의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예를 들면 마그리트(René Magritte,1898~1967)<유리의 집>(1939)은 빛의 속도로 달리는 물체는 시간이 느리게 가고 길이가 짧아진다는 특수상대성의 원리에 의한 길이수축의 원리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또 다른 초현실주의자 달리(Salvador Dalí, 1904~1989)의 작품 <기억의 지속>(1931)에는 움직임이 없는 쥐죽은 듯 고요한 해변에 시계가 나무에 늘어진 채 걸려 있다. 상대성이론의 정지된 시간의 개념이 보인다.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는 시간과 공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시공간이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입체파회화(Cubism)도 마찬가지이다. 백남준(1932~2006)의 작품도 과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의 비디오아트는 1969년 일본 공학자 슈야 야베(Shuya Abe, 1932~ )의 도움을 받아 비디오 합성기를 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야베와 함께 만든 비디오 신시사이저는 여러 비디오 영상 제작에 사용되었다. 비디오카메라나 다른 소스로 부터 최대 7개의 영상을 받아들여 실시간으로 편집이 가능했던 다재다능한 도구였다. 스캐닝, 색채변화, 녹화의 주요기능은 신시사이저의 건반처럼 빠르게 깜빡이는 화소단위 정보의 집합 영상을 전자적 메카니즘으로 직접 연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예술적 업적은 이런 기술적인 발명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이를 통해 인간 삶의 근원적 문제인 시간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도록 비디오라는 매체, 형식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위대한 예술가로 추앙받는다.

이후에도 많은 예술가들이 새로운 과학을 이용해서 작업을 해왔다. 그리고 이제 곧 인공지능이 많은 전문직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측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판사나 증권투자자들의 자리는 물론 의사들의 일자리까지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 많은 예술가들이 인공지능을 통해 새로운 예술을 시도하고 있다.

하긴 하나를 가르치면 스스로 열을 아는 스스로 학습하는 능력을 까지 갖춘 인공지능이 못 할 것은 없을 것처럼 보인다. 영국의 화가 헤롤드 코헨(Harold Cohen, 1928~ )은 이미 1973년 소위 아론’(Aaron)이라는 그림 그리는 인공지능을 내 놓았다. 그 후 아론은 진화를 거듭해 1980년대에는 3D 공간에서 물체나 사람을 배치하고 1990년대에 들어서는 스스로 그림을 그릴 정도로 발전했다. 아론의 그림은 1986년 코헨의 영국 테이트미술관에 기증되어 어엿한 미술관 작품이 되었고 1995년에는 경매를 통해 소장되기도 했다. 벤자민 그로서(Benjamin Grosser)는 쌍방향 대화형 그림 그리는 도구로 작업을 한다. 그는 익숙하지 않은 것을 익숙해지도록 상호 작용적인 경험, 기계 및 시스템을 구성하여 소프트웨어가 우리의 행동을 규정하는 방식을 알려주어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바꿔 놓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그림에 영향을 주는 대화, 배경음악등 프로그램자체가 소리에 따라 반응하면서 캔버스위에 흔적을 남기도록 하고 있다.

음악에서도 작곡과 연주하는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야마하는 자동연주피아노 디스크라비에’(Disklavier)를 만들었고, 2012년에는 캐나다의 한 작곡가는 협업을 통해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 당시 관객들은 사람과 인공지능이 작곡한 음악을 구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예일대에서 컴퓨터 공학을 하는 도냐 퀵(Donya Quick)쿨리타’(Kulitta)라는 작곡 프로그램을 만들어 사운드 클라우드로 공개해 사람이 만든 음악과 인공지능이 만든 음악을 가려보라고 했다.

 

도구냐 예술이냐

인공지능이 인간이 만든 음악과 구분 할 수 없을 정도의 음악을 만들었다고 해도 이것을 과연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사실 작곡하는 인공지능 쿨리타의 경우 저장된 자료에서 규칙들을 분석하고 음계를 조합해 작곡을 하는데 이는 일종의 자기학습 방식으로 이 방식을 이용하면 클래식뿐만 아니라 여러 음악을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기계시대 원본개념의 상실이 아니라 예술의 기본구조를 깨는 결과를 초래 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컴퓨터 즉 인공지능이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한다고 하지만 이것을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음악이나 미술은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느끼고’, ‘이해해서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더 중요한 작업이다. 인공지능이 좋은 음악을 만들 수는 있을지는 모르지만 음악을 창조하기보다는 분석해서 조합하는 것이라는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젊은 새로운 음악가들은 쿨리타같은 인공지능을 이용해서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아론같은 그림 그리는 인공지능도 사람이, 미술가가 애초에 만들고 창작해놓은 작품들로부터 학습이 시작되고 비롯된다는 점에서 현재의 시각으로는 예술이라기보다는 모방또는 복제의 하나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실 요즘 상업적인 영화나 음악의 경우 빅데이터를 분석해 이를 토대로 대중들이 관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요소들을 매우 정교하게 배치해 흥행과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것과 어쩌면 닮아있다. 관객이나 청중들의 감상패턴이나 반응을 섬세하고 촘촘하게 분석해서 영화나 음악을 만드는 것은 이미 알려진 비밀이다. 넷플릭스의 성공작 하우스 오브 카드BBC 원작을 토대로 관객들이 원하는 감독과 배우를 기용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초단위로 분석해 흥행요소를 이어 붙인 것이다. 장면과 상황 즉 이야기를 엮었다. 소비자 성향 분석을 위해 기존 작품의 장면을 초단위로 분석할 정도로 치밀하다.

하지만 장르에 따라 다르지만 원칙적으로 음악의 경우 작곡 방식과 코드의 진행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라면 이 다른 장르상의 차이를 자연스럽게 이어붙이고 잘라 새로운 음악을 만들거나 편곡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창조가 가능하지만 컴퓨터와 프로그램은 다르다. 왜냐하면 사람은 비선형구조로 생각하지만, 프로그램은 선형구조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화가와 소설가, 음악가를 대체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지만 절대적으로 인간의 감성의 영역인 동시에 비선형적인 예술의 영역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는 미지수다. 사실 사전적 의미로 본다면 예술은 미적 작품을 형성시키는 인간의 창조 활동이라고 정의할 때 인공지능이 창작해낸 예술품들이 과연 종래의 미학적 관점과 태도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인간의 경우, 삶의 주변과 자연 등 모든 것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한다. 또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는 등 변수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그 과정과 과정마다 변화와 대응을 해나간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오직 완성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작동하거나 아니면 완성되었다는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판단을 하기 보다는 계속해서 학습을 해야 하는 과정이라면 결코 완성작을 내놓을 수 없을 것이다. 또 작업을 하는 중간에 나타날 수 있는 새로운 변수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없으며, 영감을 얻을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백남준에게 TVVCR 기술이 붓을 대신하는 도구였던 것처럼 인공지능은 예술의 도구 또는 조력자는 가능하겠지만 예술가를 대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인간이 만든 예술작품과 외형이나 형식이 다를 바 없다고 하더라도 작품이라면 필히 갖추어야할 창조성과 예술성과 내면의 소리를 담아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허상에 불과하다. 넉넉하게 봐서 현대미술에서 사용되는 오마주(Hommage), 패러디(Parody), 차용(Appropriation), 키치(Kitsch)등의 하나로 정의 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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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0.18 11:15

예술이란 시간과 공간속에서 자신의 존재로 살아가는 행위 그 자체

- 꽃처럼 나답게 피어나는 것.


손은정_ 플라워 아티스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공대를 나왔고,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굳이 꽃을 배우러 가고. 그러한 과정은 어쩌면 남들에게는 너무 생뚱맞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내겐 공학을 하든, 글을 쓰든 ,예술을 하든, 이 모든 것들이 시간을 걸쳐가는 좌표점을 찍어가는 방식과 프로세스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좌표를 좋아한다. 내가 서 있는 공간과 시간에 ‘존재’를 표현하는 것. 우리는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라는 존재가 태어나서 무엇인가, 어떠한 존재로 존재한다는 것 그것을 인간은 끊임없이 증명해내고자 한다. 비록 한 점일지라도 나라는 존재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을 관계속에서든 시간 속에서든 밝혀내고자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이유인지도 모른다.

 딱 작년 이맘때 세운상가에서  ‘꽃, 시간의 강을 건너 시간과 만나다’ 라는 전시를 했다. 세운상가라는 우리나라 건축, 산업적으로 의미가 있는 ‘공간’ 에서 그 ‘시간’을 꽃으로 표현해내는 작품이었다. 세운상가는 1968년에 완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이다. 당시의 타워팰리스였던 그 세운 상가는 전후의 빈민촌을 밀어버린 한국의 토지개발과 건축의 상징이라 할만큼 의미있는 곳이다. 산업적으로 보자면 세운상가는 우리나라의 IT와 기술 산업의 메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이 곳에서 전시를 한다는 것은 ‘시간’ 을 고스란히 작품에 담는 것이다. 5층 중정에 장소를 잡았다. 햇빛이 들어오는 세운상가 5층 중정에 8층부터 5층까지 낚시줄을 이어 꽃들을 엮어 드리우고 시간의 흔적으로 탑을 만들었다. 세탁기, 텔레비전, 카세트 오디오 등의 80년대의 상징이던 가전들을 맨 아래에 버팀 삼아 그 위에 90년대 등장한 데스크 탑들과 뚱뚱이 모니터들 그리고 다이어트를 한 듯한 LCD 모니터들. 그리고는 그 위에는 나의 자랑이었던 1세대 아이팟, 폴더 폰, 시스코의 IP Phone 및 무선 Access Point 와 같은 2000년대 이후의 IT 장비들이 마치 탑처럼, 성처럼 그리고 무덤처럼 쌓여있고 그 군데군데, 부분부분을 각종  꽃으로 장식했다.  사실 그 꽃들을 통해 표현하고 싶은 것은 역시 ‘시간’ 이었다. 이제는 쓰지도 않을 그러한 기술의 흔적들은 그렇게 남는다 할지라도 ‘생명’ 과 사람의 흔적인 시간은 각기 다른 속도로 지고, 피고, 시들고를 반복하는 것을 전시 기간 1주일 동안 보여주고자 했다. 결국 시간의 한 시점에서 본다면 ‘기술’ 이란 것은 결국 정지해 있는 죽은 것이지만 생명은 매 순간 단 한번의 쉼도 없이 끊임없이 ‘살아 있는 것’ 이라는 의미에서 인간의 삶이란 것이 지극히 보잘것없고 무미해 보일지라도 얼마나 위대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또한, 꽃을 보이지 않는 낚싯줄로 꿰어 공중에 달아 늘어뜨린 것은 또 다른 기술로 인한 ‘공간’의 도래를 의미한다. 가상화와 클라우드를 통해 사이버 공간은 이제 또 다른 하나의 ‘공간’ 으로서 각자의 인격과 삶을 가진 공간이 되어버렸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를 통해 개인은 각각의 얼굴을 가지고 서로 공중에서 연결된 듯 연결되지 않은 듯 ‘소통’ 하고 있다.

사진1 | 세운상가에 전시된 작품 ‘Cross Time with Flowers (2016)’


 즉 꽃을 통해 기술과 사람, 사람과 기술이 뒤얶혀 있음을 표현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아우리는 ‘시간’ 이라는 것을 ‘세운 상가’ 라는 공간 자체가 무대가 되어 자연스럽게 녹여내고자 했다. 그러나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내가 전혀 계산에 넣지 않았던 그 공간의 ‘사람들’ 그들이  작품안으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세운상가는 우리같은 외부인들에게는 ‘특별한’  공간일지 모르지만,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고 생계를 이어오는 기술자분들, 상인분들에게는 ‘생활’의 공간이다. 그곳에 외부인들이 들어와서 어떤 행위를 하는 일들이 반복되면 그들은 피로감과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다. 막상 작품 하단의 기계들을 설치하는 동안에는 시큰둥하던 상가분들 그리고 기술자분들이 꽃이 등장하자마자 무언가 달라졌다. 사람들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향기를 맡으며 다가와서 말을 걸기 시작했다. ‘사람’ 이 작품속으로 걸어들어오는 순간이었다. 

 꽃! 아무짝에도 효용없고 관심도 없는 ‘꽃’ 을 시작하게 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왜 사람들은 꽃을 좋아하는가? 사람이 태어나도, 사람이 죽어도, 결혼이나 승진처럼 축하할 일이 있어도 반면 테러나 슬픈 일을 애도할때도 꽃을 준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다른 감정을 하나의 어떤 ‘것’ 이 표현할 수 있다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그것도 그러한 복합적인 의미가 한 나라, 문화권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것도 아주 먼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즉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러한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함께 전달하는 유일한 것이 꽃이라는 생각에 그 의미를 알아내고 싶었고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인간의 무의식에는 ‘꽃’ 이 어떤 식으로든 각인 되어 있고, 그것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무관심하던, 무뚝뚝하던, 오히려 조금은 성가셔하던 세운상가 입주자 혹은 각 상가/회사에서 일하시던 분들은 꽃이 들어오면서 너무나 달라졌다. 그들은 미소와, 관심과 격려를 보내기 시작했고 과자를 사먹으라며 간식으로 주시는 분, 화장실을 쓰게 해주시는 분, 꽃을 설치하는 과정을 구경하시는 분, 질문하시는 분들로 갑작스럽게 부산스러워졌다. 24시간의 설치작업은 말 그대로 꽃처럼 마음들이 피어난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더 놀라운 일은 설치가 끝나고 오픈식이 끝났는데 어느 한 70대 어르신 한 분이 한참을 내 작품 앞에 서 계시는 것이다. 감사하기도 하고 혹시 마음에 안 드시나 싶기도 해서 다가가서 말을 건넸더니 이 작품의 작가냐 물으신다. 그렇다고 대답을 드리니

 “아 여기 말이야 시간을 표현할 수 있는 더 오래된 게 하나 딱 있으면 딱 좋을 텐데. 나한테 1940년대 진공관 라디오가 있는데 말이야. 그게 여기 중간에 딱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아.”

 처음에는 이분께서 내게 진공관 라디오를 파시거나 대여하시려나 하고 오해를 했었다. 그러나 그 분은 정말 자신의 오디오가 그 자리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내게 공짜로 그 80여년된 진공관 오디오를 빌려주셨다. 작품 중앙에 아이팟과 나란히 배치를 하니 ‘화룡점정’ 이 따로 없었다.

내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하신 그 분. 그렇기에 그 자리에 IT의 시작이자 오늘날 자신을 여기 세운상가로 오게 한 진공관라디오가 ‘기술과 시간과 사람’ 을 이어주는 오브제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 이승근 오디오 기술장인. 그 분이야 말로 세운상가와 함께 한 사람 그 자체였다. 10대 시절, 진공관 라디오가 좋아서 배운 기술. 그때부터 지금까지 50여년의 세월을 함께 해온 세운상가의 기술장인 . 나의 작품은 결국 그의 ‘시간’을 만나 완성 되었다.

 나의 작품 전반을 아우르는 주제는 ‘사람과 시간과 기술’ 을 꽃으로 표현해내는 것이다. 사실은 세운상가의 ‘시간’ 의 강을 ‘기술(Technology)’이 엮어가는 과정을 꽃으로 표현하기 위해 처음에는 ‘세운상가’라는 건물의 상징성과 ‘역사성’을 중심으로 담으려 했었다. 그러나 이 살아있는 공간에서 ‘시간’은 결국 그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 들로 인해 녹아나고 그들의 직간접적인 참여로 이 작품은 완성이 되었다. 작품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오래된 가전들을 내게 보낸 이들의 사연. 그리고 세운상가의 상인들과 기술자들의 이야기 소리, 미소 그리고 심지어는 진공관 라디오까지. 그들의 이야기가 과정 중에 그대로 꽃처럼 녹아 들어갔다. 

  ‘꽃, 시간의 강을 건너 시간과 만나다’ 는 그렇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 태어나고, 사라지고,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과 기술을 담아내는 전시가 되었다. 아직도 긴 여운이 남는 이 전시는 아마 내 작품 생활에 가장 중요한 작품이 될 것임은 틀림없다. 장소의 시간성이 그대로 무대가 되고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꽃으로 표현되는 과정이 녹아 함께 설치가 된 이 작품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시간과 공간이라는 어떤 좌표 점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그것이 스스로에게이든, 사회를 향한 것이든, 자발적인 것이든 억지로 강요된 것이든 어떤 행위를 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삶이라고 정의한다면 나는 모든 ‘인간’ 은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예술이라는 것은 ‘살아가는’ 그리고 ‘살아내는’ 행위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이왕 해야 하는 것이라면 아름답게 해내고 싶다. 결국은 그것이 삶이고 , 삶은 그 하나하나가 예술 활동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한다. 언젠가 질 꽃이라면, 피는 그 순간은 내가 최고인양 피어낼 수 있는 그런 꽃처럼 여한 없이 아름답게 자기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그게 예술이지 다른 무엇을 예술이라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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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0.18 11:11

기업예술의 탄생

 

 

심상용_ 미술사학 박사, 동덕여자대학교 큐레이터학과 교수

 

 

기업들에게 민주주의에서의 표현의 자유, 정당한 법의 절차, 혹은 정치적 대표성 등의 법적 권리를 주는 것은 일단의 계약서에 그런 권리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업들에게 이러한 권리를 허용하는 의원들이나 판사들은


지적으로 정직하지 못하거나 혹은 수퍼자본주의의 영향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오직 사람들만이 그런 권리를 소유해야 한다.

 

 

기업국가한국

 

1997· 98년의 환란과 IMF 사태, 2008년의 글로벌 금융대란을 거치면서 한국에서 기업은 국가운명에 상응하는 지위로 격상된 듯하다. 기업이 국가비전이요, 사회적 토대요, 민중의 철학이어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선전이었다. 정부와 기업, 기업과 정부의 협력이 공공연하게 미화되고 도덕적인 것으로 포장되었다. 국세청 자료에 의하면, 2012년 전체 기업 영업이익의 24.9%(39조원)는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 두 기업이 낸 것이다. 2009년의 16.9%에 비하자면 비약적인 증가세가 아닐 수 없다. 같은 기간 개별기업으로서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이익 비중은 2009년 이후 두 배로 뛰었다. 이렇듯 짧은 기간에 국가의 경제 집중도가 위험수위를 오르내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 이명박 정부의 고환율 정책이었다.

기업 프랜들리 정부기업하기 좋은 나라등의 구호가 매일 저녁 뉴스를 타던 5년을 포함해 지난 20년 동안 한국은 급격하게 기업국가로 재구조화되어왔다. 이 기간 동안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이윤창출을 내기 어려울 것으로 간주되는 공공영역의 기업이나 조직, 활동들은 급속하게 위축되거나 폐기되었다. 기업국가가 추구하는 가치와 실행의 목록은 이렇다. 경영진단이나 경영화의 이름으로 효율성과 민영화의 날을 갈고, 그 벼려진 것으로 공공영역과 활동들을 회복불가의 상태에 이를 때까지 들쑤시고, 그것들을 사적 수익의 식탁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로버트 라이시Robert B. Reich에 의하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승리를 위해 민주주의를 쪼그라들게 하고, 소비자와 투자자의 근력을 키워 시민의 운동력을 박탈하는 국가다. 조지프 스티글리츠에 의하면 기업국가는 지난 30년 동안 우파가 최소정부라는 이름으로 추진해온 것인데 그의 표현을 빌자면 이렇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국가는 자유주의자들이 옹호하는 최소국가가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것(국가)는 지나친 제약에 쫓겨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는 공공재(기간시설 및 과학기술, 교육에 대한 투자)조차 공급하지 못하는 국가, 지나치게 허약하여 공정한 사회구축의 전제조건인 소득재분배조차 시행하지 못하는 국가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 정부의 규모는 전혀 줄지 않았으며, 기능적으로 심각하게 왜곡되어 부유층에게 푸짐한 선물을 내어주고 있다.”

기업국가 한국의 상황도 이에 못지않다. 오슬로 대학의 박노자는 한국에서 특권층·중상층이 아닌 사람으로 늙어가는 것은 처벌에 가까운 것이라 했다. 10대 그룹 대주주 10명에게 돌아간 주식 배당금이 70만 명 이상이 되는 공식실업자들이 받을 돈의 약 30%에 해당되는 이 사회에서 현대판 귀족사회의 부활을 본다고도 했다. 주로 현대미술의 V.I.P. 핵심 고객이기도 한 상위 1%의 평균 소득은 중위소득에 비해서도 22.6배나 된다. 반면 빈곤격차(poverty gap)는 세계에서 4번째로 높은 나라다. 기업국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공공성의 부재며 공공재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다. 기업의 치열한 경쟁체계가 사회의 모든 기관과 조직, 개인으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교육, 예술, 문화, 심지어 가정에조차 수익창출논리가 침투하고, 각 영역의 공공성과 자발성의 기반은 심각하게 훼손된다. 기업국가에서 기업의 이익사냥을 벗어날 수 있는 땅은 단 한 평도 없다. 기업의 입장에서 공공영역은 준비된 경쟁자가 부재하다시피 하는 금싸라기 땅과 진배없다. 진출이 허용되는 순간, 막대한 이익이 기업의 차지로 돌아갈 것이다. 이들 기업이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내는 일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오늘날 대기업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특혜를 통해 차지한 돈의 일부를 공공영역을 수호하려는 정부의 의지를 꺾는데 투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탁으로 한국의 교육과 문화는 분야는 이미 최소한의 공공성마저 담보하기 어려울 만큼 과도하게 사유지화 되어버렸다.

정부는 교육을 높은 비용을 지불하는 소수에게만 혜택이 집중되도록 시장화 하는 사교육관련 기업들을 감시하는 일을 일찍이 포기해버렸다. 그 결과 공교육은 토대마저 흔들리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정부가 교육이 기업의 쓸 만한 부품을 생산해내는 비인간적인 공정이 되도록 하는데 오히려 앞장서왔다는 사실이다. 학생들은 이 기업국가, 교육방임정부에 의해 살인적 경쟁에 내던져지고 일찌감치 심신의 황폐화를 경험하게 된다. ‘자라는 아이들에게 불행을 떠안기는 것이 한국 공교육의 실체인 것이다.

대중문화는 몇 개 기업에 이익이 집중되는 독점구조로 급속히 이행되어 생태계의 교란은 이미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다. 예술도 자본기계의 부속으로 급속하게 편입되어, 공공미술관은 민영화되고, 이론과 비평은 시장의 병참기지로 전락하고, 예술가는 브랜드화된 스타로 대체되었다. 작가건, 이론가건, 관장이건, 큐레이터건 심지어 감상자들조차 이익 지향적으로 인식하고 기업적으로 판단한다. 기업화된 개인이나 기업의 소장품 목록에 들고, 유능한 시장조직의 일원이 되는 것 외의 다른 활동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시장에서 성공한 예술이 진정한 예술로 선전되고, 구성원들은 이익과 효율성에 의해 서열화 된다. 이들 모두는 창작하는 빈곤층creating poor으로 주저앉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않은 채 경쟁 속으로 투입된다.

한국은 복수의 비엔날레를, 그것도 성대하게 치른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나라가 되었는데, 이는 비엔날레를 의사 기업쯤 되는 것으로 아는 잘못된 인식이 한 몫 한 결과다. 비엔날레를 먹거리 산업의 전초기지쯤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비엔날레의 이면에 대해 더 깊이 성찰하려는 시도는 매우 부족하다. 오늘날 글로벌 비엔날레들은 반자본주의 이념을 표방하는 듯하면서, 실은 자본의 구동력으로 돌아가는 진정한 자본주의 벤처venture’로서 기능한다. 글로벌 거대 비엔날레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거나 앞으로 거래될 것들이 매우 특별한 가치 있는 것들이라고 믿게 만들기 위한 시장의 보조 추진 장치로 작동한다. 글로벌 비엔날레의 또 하나의 기능은 지구촌의 지역들에 예술의 글로벌 스텐다드를 유포시킴으로써 글로벌 시장으로의 편입을 용이하게 하는, 일종의 중앙화폐의 그것이다. 중앙은행 시스템이 중앙화폐 이외의 것들을 정크화폐로 낙인찍듯이, 지역의 예술과 미학에 불량 낙인을 찍는 기능인 것이다. 글로벌화가 지역 검열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이로 인해 글로벌 미술시장을 독과점하고 있는 소수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오래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농담을 빗대어, 오늘날 경쟁적으로 치러지고 있는 글로벌 비엔날레들의, 현 시장 질서를 영속화하려는 위선적인 속셈을 폭로 한다. “그들- 글로벌 비엔날레들- 는 오늘날의 예술계가 자본주의 기계의 일부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신은 여기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정말로 자본주의 기계의 일부이다!”

한국이 비엔날레라는 자본주의 기계를 통해 큰돈을 벌게 되는 일은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글로벌 비엔날레 체계가 미래에 큰 수익을 올릴 지도 모를 지역의 예술적 잠재력의 싹을 사전에 잘라내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예술의 탄생

 

최근 대기업들이 예술의 전면으로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한류韓流의 성공, 미술시장의 활성화 등으로 예술의 투자수익모델화 가능성이 점쳐지면서 기업과 예술의 다양한 협력이 전례 없이 고무되고 있다. 국내의 영향력 있는 전시와 학술행사, 수상제도 등은 갈수록 소수 거대기업이나 대기업의 직·간접적 운영이나 후원, 기부등과 긴밀하게 결부되고 있다. 공공미술관 생태계 전반에서 비중이 큰 사립미술관들의 대다수가 재벌이나 거대기업 소속인 상황에서 예술에 미치는 이들 기업의 막대한 영향력이 그리 새로운 현상인 것만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미술관에 뿌리내린 대기업 안주인들의 손길이 힘으로 작동하는, 이를테면 재벌가의 미술관을 살펴보면 요즘 가장 잘나가는 작가의 답이 나온다는 작금의 상황은 이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특히 재벌 소유 미술관들의 활동이 발휘하는 영향력은 이전에도 남달랐지만, 그 힘의 작동방식에 있어 오늘날처럼 절대적이거나 포괄적이지는 않았다.

재벌가 사모님은 리히텐슈타인을 좋아한다같은 냉소 섞인 풍자에는 생각보다 함의가 담겨 있다. 기업예술의 전형적인 속성이 그 가운데 하나로, 예컨대 기업예술은 리히텐슈타인 같은 스타작가를 일관되게 선호한다. 분명 보편적 의미의 취향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탈세나 비자금조성 같은 직접기여일 수도, 기업 이미지 개선이나 광고 같은 간접기여일 수도 있지만, 어떻든 기업이익에 부응하려면 스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업은 이익이 담보되지 않는 취향을 위해서는 결코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기업의 자발적 선행은 불가능한 개념으로, 기업은 좋은 일을 위해 좋은 일을 하지 않는다. 취향에 대한 존중과 자발적인 예술애호라는 요인이 전무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것이 돈을 벌어주는 예술보다 상위의 기준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없다.

그러므로 예술투자 기업은 블루칩 작가를 차지하거나 생산해내는 경쟁을 선동하고, 그들이 주류를 차지하도록, 그리고 안정적인 투자대상으로 자리잡는 시장이 조성되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시장이 이미 안정적으로 구축된 작가들은 값이 오를 대로 오른 주식처럼 수익성이 떨어지므로, 기업은 갈수록 투자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신진작가들을 키우는데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블루칩 작가의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는 이유가 이것이다). 미래의 스타-블루칩 작가들에 대한 집중은 투자의 변동성을 더욱 증가시키고, 그것은 다시 집중성을 높이도록 하는 원인이 된다. 특히 경기가 자주 불황국면을 들락거리게 되면 기업들은 집중성을 더욱 높여 스스로 위험성이 낮은 활동만을 찾아나서는 회피효과를 강화한다. 절대다수의 작가들이 이 범주 밖으로 밀려나게 되는 것인데, 그렇게 만든 당사자인 예술투자기업은 이미 브랜드화되었거나 앞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없는, 사실상 대다수의 작가들에게 돈을 쓰는 것은 문화경쟁력을 떨어트리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취향이라는 상쟁재로 인해 고도의 수익성을 창출할 수 있는 투자재가 있을 뿐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20117월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이우환>전이 열렸다. 구겐하임의 아시아예술 담당 삼성 시니어 큐레이터알렉산드라 먼로Alexandra Munroe에 의하면, 전시의 취지는 한국작가 이우환을 세계적 인물이자 현대의 거장으로 조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2010년부터 삼성이 구겐하임에 제공해온 아시아관련 예술펀드가 아니었더라도, 한 아시아 작가의 세계미술에 대한 영향력이 구겐하임의 관심사가 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돈이 아시아현대미술에 대한 미술관의 관대함의 급수를 갑자기 높게 올렸을 거라는 것이 단지 추론만은 아니다. 이 사실이 전시의 보도자료에 명시되어 있다 : “이 전시는 삼성의 선도적인 후원으로 성사되었다.” 이는 그에 상응하는 선도적 후원이 가능하다면, 구겐하임의 큐레이터십이 여타의 작가들에 대해서도 자신의 소신이나 평가를 조정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다.

20146월 알프레드 파크망Alfred Pacquemen 전 퐁피두센터 관장의 기획으로 프랑스 베르사유 박물관에서 개최되었던 이우환의 초대전에도 같은 맥락의 개입이 있었다. 기획자는 철과 돌이라는 두 물질이 충돌하는 효과가 이우환 조각의 핵심이라 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전시만을 놓고 보자면, 이우환이 전시를 위해 직접 구입한 알프스 지역과 스칸디나비아 산 돌 만큼이나 베르사유의 중앙 홀에 삼성전자가 설치한 대형 초고화질UHD TV도 상징적인 요인이 아니었을까. 201388일자 <리베라시옹Libération>의 기사에서 베르사유의 까뜨린느 뻬갸르Catherine Pégard관장도 이와 관련한 베르사유의 확고한 입장을 밝힌다. "우리의 모든 행사에는 메세나가 같이 합니다.”

미디어들은 이우환이 베르사유에 초대된 두 번째 아시아 작가라는 사실에 방점을 찍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세 번째다. 지난해 6월에서 9월 사이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사진전이 베르사유의 부속건물인 오랑주리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물론 유병언의 사진들의 베르사유 초대와 그가 베르사유에서 진행되는 물의 궁전의 숲행사의 유일한 메세나로서 기부한 14십만 유로 사이에 연결고리가 없을 수 없다. 지난 2014612일 베르사유 박물관에서 진행된 뻬캬르 관장과 <연합뉴스>의 인터뷰에서 이 전시를 위한 유병언의 기부금은 5백만 유로로 언급되었다. 프랑스 외무장관 로랑 파비우스Laurent Fabius의 권유로 취소되긴 했지만, 또 다른 후원의 대가로 그의 사진들이 콩피에뉴 나폴레옹 3세 극장에서 열리는 음악회에서 전시될 예정이었다.

사람들은 기부에도 품격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더라도, 그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오늘날 돈으로 살 수 없는 품격은 존재하지 않으며 돈이 품격을 가리는 것도 아니다. 전술한 인터뷰에서 "베르사유에 낸 유병언의 후원금이 공금횡령으로 조성된 것이라면 베르사유에도 책임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빼캬르 관장은 후원금이 문제가 있다면 베르사유는 책임자가 아니라 제1의 피해자"라고 펄쩍 뛰었다. 전시를 열 당시만 해도, 그 돈이 그토록 검은색인지 알 수 있는 단서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병언의 사진을 "평범함 속의 비범함"으로 극찬한 것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 당시만 해도 그 작품이 아마추어 수준이라는 단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품격 있는 후원이 주는 명예와 로비로 사들이는 명예를 구분하는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병언의 루브르 전시에 글을 쓴 사람은 박사학위 소지자로 1993년부터 파리 국립미술학교의 사진 큐레이터였으며 2010년부터 사진 분야의 전시를 책임지고 있는 안-마리 가르시아Anne-Marie Garcia. 아마도 유병언이 기부한 11십만 유로가 그렇게 하도록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베르사유의 뻬갸르 관장도 전직 기자로서의 필력을 살려 영원과도 같은 순간같은 시적인 표현을 동원해 이 훌륭한 사진작가를 찬양했다. 2012<꼬내상스 데 자르Connaissances des Arts>2013<보자르 Beaux-Arts>에서도 유병언의 사진을 테크닉이 뛰어난 걸작으로 평하는 뻬갸르 관장과 편집자 또마 슐레세르의 글들이 실렸다. 이 사태에 대해 베르나르 아스케노Bernard Hasquenoph는 탄식한다. “모두들 그의 케이크 조각을 원한다. 냉소만 나올 뿐이다.” 사실은 유병언의 케이크가 아니라 돈의 케이크일 것이다.

재력으로 인식을 조정하고, 로비로 예술성을 획득한다는 사실이 글로벌 현대미술의 판이 벌어지는 곳에서는 어디든 공공연하게 확인된다. 한 때 명망을 누렸던 기관들조차 앞장서서 면죄부를 발행했던 중세 교회의 관례라도 따르듯, 후원이나 기부의 관행 안에서 액면가에 따라 구분되는 예술적 인정의 쿠폰을 주고받는다. 오늘날 예술투자 기업은 기부나 후원의 명목으로 포장된 로비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들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는 싸움에서 우위를 장악하고 있다. 베르사유 박물관이 제프 쿤스나 무라카미 다카시 같은 상업적 키치작가를 끌어들였던 것도 이 맥락인데,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대해 아스케노는 일갈한다. “() 소득원에 불과한 사람을 위대한 아티스트로 포장하는 데서, 우리는 현재 우리의 대표적인 미술관들이 예산이 없다는 핑계로 모든 종류의 타협을 허용하는 윤리적 일탈의 기미를 본다.” 그럼에도 이를 단지 몇몇 기관이나 그 관련자들의 박약한 윤리성의 문제로만 다뤄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정부와 기업, 공공선과 자본, 공공영역과 사유지 사이의 필수적인 균형 틀이 위협받고 있는 이 시대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다. 한국에서 여전히 구겐하임의 전시가, 모마의 컬렉션이, 테이트 모던과의 계약체결이, 베르사유 미술관의 초대가 우상화되고, 위대한 예술성을 가름하는 결정적인 심급으로 작용한다는 것 역시 단지 한국예술의 낙후성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러한 균형틀이 깨져 심각한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는 한국사회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문제다.

지난 20141, 한국의 또 다른 거대기업이 거액의 후원금의 힘으로 유럽의 또 다른 미술관과 계약을 체결했다. 현대자동차는 영국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미술관과 11년이란 최장기 파트너십을 체결한 첫 번째 기업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계약의 첫 사업으로 비디오 작가 고백남준의 작품전을 열기로 계약을 체결했고, 전시의 원활한 개최를 위해 미술관 측이 작가의 작품 9점을 구입하는 것도 후원하기로 했다. 선구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과의 관계가 현대자동차로선 손해보지 않는 비즈니스 전략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술적인 것으로 자주 오인되곤 하는 비즈니스적 성과에 의해 가려져서는 안 될 측면들이 있다. 후원금 계약체결이 테이트 모던의 학예팀을 움직여 백남준이 세계 미술사에 끼친 영향을 재조명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비즈니스적 성과에 의해 미술관이나 큐레이터의 우선적인 관심사를 조정하거나 통제하는 것은 언제든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형성되는 의미를 여과 없이 가치화하는 한국예술 장의 관행을 내부적으로 채우는 자기기만과 허세 가 그것이다. 기업의 푸짐한 후원금 계약으로부터 오는 것은 진정한 예술의 성과와는 관련이 없는 기업예술의 장황한 레토릭일 개연성이 그만큼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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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0.18 11:09

해결하지 않는다. 함께 헤맬 뿐이다.

 

장현정_ 사회학자, 도서출판 호밀밭 대표

 

10대 후반부터 20대 후반까지 약 10년 정도 록 밴드 활동을 했다. 음악을 그만둔 뒤로 어쩌다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문화연구, 철학, 미학 같은 학문도 기웃거렸지만 늘 스스로를 공부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딴따라라고 생각하며 살려고 노력했다. 어떤 쪽이든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보다 자유롭고 엉망진창(?)으로 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던 것 같다. 굳이 표현하자면 나에게 학문이나 일은 낮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고 딴따라나 삶은 밤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 ‘워크 라이프 밸런스 work-life balance'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 낮과 밤도 균형을 이루면 좋은데 우리들 대부분은 밤에도 환하게 형광등을 밝혀놓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삶의 영역에서 밤을 밀어내 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낮의 영역에서는 물론 답이 아주 중요하고, 그 답은 숫자 하나만 틀려도 사람이 죽거나 건물이 무너질 수 있는 것이라 아주 엄밀해야 했다. 하지만 밤의 영역에서는 반대로 답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밤의 영역에서는 답이 처음부터 없거나 혹은 아주 많은 답이 가능했다. 그리고 나는 밤을 더 사랑했다.

물론 한편으로는,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키우면서 삶 자체가 우리들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부여하는 엄중함도 경험했다. 나날이 늙어가는 부모와 나날이 커가는 아이들의 중간에 끼어서, 아마도 나에게 삶의 엄중함은 앞으로 더욱 크고 무겁게 다가올 것이다. 삶의 엄중함이란 내가 나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혹은 내 직업이 무엇이고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지 따위에 전혀 개의치 않고 그저 자연처럼 냉정하고 차분하게 다가오고 흘러갈 뿐이었다. 그렇게 낮과 밤이 혼재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어렴풋이 어떤 깨달음 같은 걸 하나 얻게 되었다. 그것은 눈이나 뇌로 확인하고 명료하게 전달될 수 있는 성질은 아니라서 깨달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느낌이라고 표현해도 좋겠다. 평소 쓰지 않던 근육을 쓰게 함으로써 우리 몸과 마음의 균형을 되찾아 마침내 고요한 삶으로 이끄는 요가처럼, 나 역시 어떤 이데올로기에 마취돼 스스로를 너무 힘들게 하고 다그치지 않았나 하는 서늘한 느낌.

요컨대, 시시각각 세계가 보내는 신호에 반응하며 삶을 충실하게 산다는 것은 답을 내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일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느낌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났지만,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미 충분히 삶을 긍정하고 이 세계를 사랑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지만 자신의 일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소수다. 돈을 벌기 위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는 일도 그 사람 자체가 좋아서 만나는 게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어서라면 사랑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하루하루 새로운 걸 알게 될 때마다 가슴 설레고 스스로 성장하고 있다는 충만함을 느끼는 공부가 아니라 그저 좋은 대학에 가거나 출세를 위해 하는 공부라면 그런 공부가 사랑스러울 리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무언가를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비쩍비쩍 말라갈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어려운 이치도 아닌데 왜 진즉 깨닫지 못했을까 싶다.

도구화된 것들, 지금 여기 내 눈앞에 펼쳐진 것들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늘 그 다음, 혹은 미래의 어떤 답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삶이란 우리를 우리 자신의 삶으로부터 소외시킨다. 언젠가부터 인문학이 유행하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에 단 하나의 답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아주 수많은 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사이에서 기쁘게 헤맬 수 있는 용기와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인문학에 다가가는 것이다. 우리가 인문학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도 오직 그것뿐이다. 단 하나의 답을 가진 사람이 모두를 향해 일방적으로 떠드는 독백 (mono-logue)’ 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답이며 그렇게 다양한 답 사이를 관통하고 가로지르며 서로가 기쁘게 헤맬 수 있는 이른바 대화 (dia-logue)' 의 세계로 향하기 위함이다. 주어진 틀에서 끊임없이 일탈하며 적극적이고 나아가 공격적으로 헤매되 각각의 악기가 모두 답이고 서로 소리를 주고받으며 무대 위에서의 한순간 한순간에 집중하는 록 음악처럼 말이다.

학자든 예술가든 기업가든, 자신의 일을 그 무언가를 위한 도구로 삼지 않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데 더 관심이 있을 것이다. 교수가 되기 위해공부하는 삶, 명성을 얻고 유명해지기 위해만든 작품, 돈을 벌기 위해하는 사업..... 이런 삶들은 가치 없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다지 인문학적인 삶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혼자 있는 시간에 더 바랄 것 없는 충만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그 무엇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우선 살아있다. 우선 살아있고, 그렇게 살아있는 자신을 의식하면서 시시각각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곱씹는다. 이들에게 삶이란, 주어진 규칙에 따라 플레이해야 하는 게임이나 해답을 찾아야하는 시험 같은 게 아니다. 놀이다. 놀이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호기심을 거두지 않고 묻는다. 묻고 헤매고 기분 좋게 갈팡질팡한다. 묻고 헤매고 기분 좋게 갈팡질팡하는 사이 자기도 모르게 삶의 근육과 뼈가 단단해지지만 그 자신은 그러거나 말거나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것을 위해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학교 시험에서 주어진 답은 하나일 테지만 학교 바깥에서 그런 일은 거의 없다. 하늘이나 바다, 일출이나 노을, 혹은 아이들의 웃음이나 어르신들의 주름을 여러 사람이 동시에 보고 모두 똑같은 느낌을 받거나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끔찍한 일이다. 독재나 폭력은 특별한 개념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일상적인 말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모두가 똑같이 행동하고 똑같이 생각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게 독재고 폭력이다. ()인문학적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몸에 밴 습관이나 익숙한 사고방식이란 얼마나 완강한가. 요즘 인문학이 유행하니 이런저런 기관에서 가끔 특강을 할 기회가 있는데, 그럴 때 자주 받는 질문들도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우리가 인문학을 해서 얻는 게 무엇인가요?”

먹고 살기도 팍팍한데 꼭 이런 인문학 같은 것이 필요한가요?”

시간이 별로 없는데 인문학을 빠르게 속성으로 배울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사실 나에게는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처럼 들린다. 밤에 어울리지 않는, ()인문학적 질문이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질문이라기보다 독백이기 때문이다. 질문이란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답이 있는 대화에 참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지 자신의 필요나 입장만 중심에 놓고 도구화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인문학이라는 말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많이 오염됐기도 했지만 사실 검도를 배우든, 야구를 배우든, 최소한 나름의 분야마다 기본적인 태도와 룰은 있는 법이다. 답을 찾으려고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돈을 벌겠다고 음악을 하는 뮤지션을 보고 있는 것처럼 뭔가 어긋나 있고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합리화를 하며 살아간다. 모놀로그의 삶 말이다. 하지만 인문학은 다이얼로그의 삶에 관한 것임을 한 번 더 강조하고 싶다. 자기 안의 욕망을 자기증식 시키다가 마침내 자멸을 향해 나아가는 폭탄 같은 삶은, 인문학적 삶과는 상극이다. 몇 줄 좋은 문장을 읽는다고 삶에 윤기가 돌 수는 없는 일이다. 먼저 삶 자체를 어떻게 바라봐야 좋을지 생각해볼 일이다.

내가 어릴 때 록 음악을 사랑했던 이유는 음악 자체도 좋아했지만 무엇보다 그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어떤 태도가 멋있어보였기 때문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이제는 록 음악과는 별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음에도 스스로 딴따라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역시 바로 그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인문학도 마찬가지다. 인문학이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니저러니 떠드는 것처럼 우리에게 실제로 무슨 큰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다. 인문학 역시 그저 가장 자기다운 삶을 살고 싶고, 혼자 있는 시간에 충만하고 싶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어떤 태도일 뿐이다. 삶을 제대로 살고 싶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삶은 여행 같은 것이라고들 말한다. 좋은 표현이지만 어떤 여행을 말하는 건지 가끔 궁금할 때도 있다. 여행은 일이 아니라 삶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만 빠듯하게 일정을 짜고 사진촬영을 끝내면 또 바쁘게 동선에 따라 이동하는 식의 여행이라면 그것은 이미 여행이 아니라 출장이라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이때의 여행은 삶을 위한 것, 질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욕망의 해결을 위한 하나의 일에 불과하다. 진정한 여행은 나름 준비를 하더라도 결국은 가서 헤매고, 헤매는 과정에서 한 뼘쯤 기존의 자신을 넘어서는 계기가 된다. 우리의 삶이 여행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과연 목적지가 어디가 될지, 오늘 하루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시시각각 긴장하고 또 그래서 한편으로는 설레는, 말 그대로의 여행에 가까운 걸까 아니면 스테이지마다 정해진 미션들을 수행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야 하는 출장 같은 여행에 가까운 걸까.

나 스스로는 여전히 소년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생각이나 습관도 10대 후반의 그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어느새 나이를 먹어 가족, 학생들, 직원들 등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졌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압축적 성장을 비롯해 여러 중층적 이유로 구조적 모순이나 불평등도 심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가슴이 답답할 때가 많다. 한방에 무언가가 해결되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만 그런 세상은 역사 속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안 올 것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그럴 때마다 나는 정답 없는 세상에서 마음껏 찧고 까부는 딴따라의 심정으로 더욱 자주 이렇게 되새겨본다.

해결하지 않는다. 함께 헤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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