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4 19:05


                                                                                                                곽중현 (사회학과 석사과정)

손병두 총장 4년을 되돌아보다

“서강은 지금 상처 받은 마음을 보듬어 주고, 각 구성원들의 하소연을 경청하면서 흩어진 의지들을 모아나갈
‘소통의 리더십’이 필요할 때이다. 이러한 리더십이 단순히 호기로운 자신감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서강대학교 13대 총장을 선출하기 위한 절차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총장후보자추천위원회가 구성되고 후보자들의 공개 소견발표회와 개별 면담을 거쳐, 지난 4월 14일 3명의 후보가 추천되었다. 이제 재단이사회가 3명의 후보 중 1명을 총장으로 선임하는 일만 남았다. 별탈 없이 절차들이 진행되고 있어 다행이지만, 한편으로 아쉬운 것은 현(現) 손병두 총장에 대한 공개적인 평가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차기 총장의 선출은 현 총장에 대한 평가에서 시작되어야 할진데, 후보자들의 소견발표 요약문에서도 손병두 총장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는 찾기 힘들다. 현재 서강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50주년 기념관과 국제인문관 건립에 따른 홈플러스 입점 사태에 대해서도 총장 후보자들의 입은 마치 강 건너 불난 집 구경하듯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과거에 대한 평가는 더 낳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초석이다.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손병두 총장의 임기 4년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손병두 총장의 엇나간 소통 방식

대학원 총학생회에서는 지난 4월 10일부터 13일까지 총장후보자 추천에 대한 설문조사를 각 과의 조교장을 통 해 인터넷 메일로 실시했다. 비록 짧은 기간과 기술적인 미숙함으로 많은 원우들이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그 결과 는 서강의 현 주소를 진단하는 준거임에 분명하다. 특히 차기 총장을 선출할 때 고려해야 할 기준에 대한 질문에 많은 원우들이‘구성원 간의 소통과 단합의 의지’를 선택 했다는 점은 시사하고 있는 바가 크다.

손병두 총장은 2005년 6월 24일 재단이사회에 의해 서강대학교 12대 총장으로 선임되었다. 학교 운영의 만성 적인 모순이 곪아 터져 입시부정이라는 불행한 사태가 발 생했고 서강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필요했던 것이다. 해가 다르게 추락하고 있던 서강의 대외적 위신과 평가지 수들은 구성원들의 위기감을 불러일으켰고 반등을 위한 새로운 피가 필요했다. 그 당시 재단이사회에 의해 위기 의 서강을 개혁할 적임자로 지목받은 이가 바로 지금의 손병두 총장이다. 서강 역사상 최초로 예수회 신부가 아 닌 총장으로서, 특히 전경련 부회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재계 출신 CEO 총장으로서 그가 바로 추락하는 서강의 구원투수임을 우리는 기대했고 또 그렇게 믿고 싶었다. 기부금 1000억원 모금 공약은 그가 가진 기업 경영의 경 험에 비추어 가능한 현실인 듯 보였고, 4년 동안 무보수 로 일하겠다는 굳은 다짐은 그의 진정성을 믿어주기에 충분했다. 비록 총장선출 과정에서 재단이사회와 구성원들 간 소통과 합의의 문제는 여전히 살아있는 불씨로 남아있 었지만, 외부 인사가 새롭게 총장으로 선임된 만큼 해묵은 문제는 조만간 상식적인 차원에서 해결되고 치유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아니면 대학과 기업의 구조적인 차이는 처음부터 극복 불가능한 것이었던가? 서로를 존중하며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서강인들의 소박한 바람은 손병두 총장이 체화하고 있던‘기업’문화와는 많이 달랐던 듯하다. 총장의 저돌적인 사업추진 스타일은 구성원들의 의견을 무시하기 일쑤였고, 그로 말미암은 총장과 구성원 사이의 불신과 갈등은 4년 내내 지속되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공간이지 알 수 없도록 상업시설들로만 빼곡히 채워진 곤자가 플라자, 초고가 기숙사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곤자가 기숙사, 파주 캠퍼스 조성의 독단적인 결정과 재단이사회의 무책임한 취소, 그리고 얼마 전 기공식을 가진 50주년 기념관 및 국제인문관 건립과 관련된 홈플러스 입점 사태까지. 교수협의회와 학생회의 계속되는 질문과 문제제기 그리고 대화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손병두 총장은 소신대로 사업을 드팀없이 추진해 나갔고 교수와 학생의 목소리는 소외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일례로 50주년 기념관과 국제인문관 기공식 자리에서 홈플러스 입점의 문제점 을 설파하고자 준비했던 학부생들에게 정학을 거론하며 협박까지 했다고 하니, 이를 통해 손병두 총장식 소통 방식의 일 단면을 알 수 있다. 서강을 막다른 길에 봉착하게 만들었던 소통의 문제들은 이렇듯 미해결 상태로 잔존했으며, 어느덧 개혁은 힘을 잃고 방향성을 상실했다.

유치된 ‘자본’과 필요한 ‘지원’의 괴리

그렇다면 소통의 부재가 원우들에게 미친 직접적인 결과는 무엇인가? 대학의 존재이유인 연구지원의 상대적 축소가 그 결과다. 대학원 총학생회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많은 원우들이 차기 총장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로‘연구지원의 확대’를 선택했다. 논문학기 원우들은 도서관 캐럴에서 쫓겨났고, 종교학과와 여성학과 원우들은 연구실이 없어 행정업무가 이루어지는 조교실 한 구석에서 책을 펼치고 있다. 예식장, 커피점, 식당을 비롯한 상업시설들은 자신들의 수익을 올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을 뿐, 곤자가 플라자 어디에도 원우들의 연구와 학업을 위한 공간은 존재치 않는다. 더욱이 곤자가 플라자의 실질적인 복지혜택은 도대체 무엇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20년 후에는 그 공간의 이용권한이 학교에 귀속된다지만, 그 때까지 건물이 낙후되지 않고 견뎌 줄지는 말 그대로 미지수다. 또한 홈플러스가 입점하게 되면 서강은 시장바닥으로 변할 것이 자명하다. 쇼핑몰 카트가 캠퍼스 안을 힘차게 주행할 것이고, 이를 제도적으로 근근이 막아낸다 하더라도 학교 주변의 교통문제와 그에 따른 소음은 면학분위기를 해치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더욱이 대학원 전체가 홈플러스가 입점하는 50주년 기념관으로 옮겨갈 계획이라고 한다. 공간이 어떻게 대학원에 배정될지는 앞으로 두 눈 부릅뜨고 계속 지켜볼 문제지만, 그 결정을 선뜻 반길 수 없는 이유는 바로 홈플러스의 입점과 그 영향력 때문이다. 손병두 총장 은 원우들의 학업권과 직결되는 이상의 문제들을‘별로 중요하지 않은’문제로 폄하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원우들에게로 돌아오고 있다. 대학은 학문 발전을 위한 연구 지원을 위해 존재한다는 기본적인 상식이 손병두 총장에게는‘별로 중요하지’않았던 것 같다. 이는 총장이 알고 있는‘지원’과 현장에서 연구자들이 필요로 하는‘지원’이 큰 차이를 보이는 탓이다. 결국 문제는 다시‘소통’으로 돌아간다.

소통에 대한 의지가 제도적으로 구체화되길 바라며

얼마 후면 새로운 총장이 선임될 것이다. 손병두 총장이 선임시기부터 소통의 단절을 잉태하고 있었다면, 이번에는 이러한 전철을 되풀이하지 말기를 바란다. 서강은지금 상처 받은 마음을 보듬어 주고, 우리의 하소연을 경청하면서 힘 있게 의지들을 모아나갈‘소통의 리더쉽’이필요하다. 새로 선출될 총장은 소통의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제도적 장치’를 갖추어 소모적인 대립과 낭비를 미연에 방지해 주길 바란다. 과거로부터배울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서강의 미래는 그리 참담하지 않을 것이다. 소통에 대한 의지만은 다들 충만하지만, 구체적인 정책과 방안이 없어 보이는 총장 후보자들이 우려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 우려가 기우이길 조심스럽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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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3 23:19


원용진(신방과 교수)

인간의 조건과 소통

해녀의 잠수는 보물 캐기다. 숨 가쁜 잠수를 하지만 해녀는 바다 밑바닥 모든 것을 샅샅히 건져 올리진 않는다. 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도움될 만큼만 건져 올릴 뿐이다. 인간이 역사를 만드는 방식도 이 같지 않을까. 인간은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그를 자신의 삶과 연결시킨다. 과거의 삶에 담긴 보물을 캐 현재로 가져온다. 그리고 미래를 새롭게 연다. 해녀의 잠수 작업처럼 보물을 캐어 새로운 미래를 여는 인간 능력을 아우구스티누스는탄생성(natality)이라며 노래했다.

바다 속 보물을 캐는 행위는 해녀 자신 만을 위한 것은아니다. 자신의 생활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과도 연관됨을 해녀는 알고 있다. 그의 잠수는 결코 개별적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물 밖의 세상과 절연하거나 선행하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성 속 삶, 세계-내-존재가 곧 해녀의 삶이다. 바다, 보물, 바다 바깥의 타인을 인식 대상으로 삼기도 이전에 이미 해녀는 그 세계 안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 복수성을 내포하는 존재다.

해녀의 잠수 뒤에는 인간의 탄생성, 복수성이라는 존재 조건이 어른거리고 있다. 해녀의 잠수 뿐 만이랴. 인간의 어떤 행위도 그 존재조건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다. 그런데 그 존재조건이며 인간의 능력이기도 한 탄생성과 복수성이 전에 없던 새로운 조건을 맞이하고 있다. 과거로부터 보물을가져오며, 남과 더불어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인간 능력이 점차 위험한 조건 속에 처해 가고 있다. 더 가쁜 숨을 몰아쉬고 더 많은 물질을 해하는 해녀의 운명처럼 말이다.


탄생성과 복수성이란 인간 조건, 인간 능력에 대한 논의가 체계화되고, 그를 도모키 위한 노력의 경주가 요청된 이래로 그들은 오히려 더욱 질곡에 빠져들었다. 복수성을 숨막히게 하는 치열한 개인주의와 탄생성을 움쩍달싹도 못하게 만드는 이기적 공동체 주의 탓이다. 그리고개인주의와 이기적 공동체주의의 조합을 통해 사회는 경제 지상주의로 치닫고 있다. 그 조합 앞에서 모든 사회적인 것, 정치적인 것은 몸을 숙이고 있다. 화폐가 인간을말하고, 화폐가 인간을 평가하는 정치실종, 사회실종의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해서 탄생성, 복수성을 부정하는 구심력을 거슬러가며 탄생성, 복수성을 되살리자는 원심력적 호소가 여기 저기서 터져 나왔었다.

원심력적 호소가 너무 적은 탓이었던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원심력적 호소는 구심력을 이겨내지 못한 채 간간히 귓등을 스쳤을 뿐이다. 구심력에 탄력을 붙이는 국가적 관성 탓이다. 애초 사적 개별 존재인 인간에 이기적 경제지상주의가 덧 씌여질 즈음 개별 존재는 방황할 수 밖에 없었다. 개인이 가진 탄생성과 복수성이 아직 완전히 고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적 관성은 개별적 존재의 방황을 이기적 경제 지상주의 공동체 형성을 통해 끝장내려 했다. 개별적인 채로 유적(類的) 존재가 되어야 하는 인간의 갈등적 존재론을 현대 국가들은 이기적 경제지상주의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봉합하려 했다. 개인의 자기 소외까지 극복할 수 있는 공동체를 창조해 총체적 유적 존재로 인간을 이끌면서 헤겔의 상상력 까지 넘어서는 경제 지상주의 총체성에 도달한 셈이다.


탄생성과 복수성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이들은경제 지상주의 총체성에 다시 도전장을 내민다. 총체성이 다 뒤덮지 못한 틈으로부터 그 도전장의 얼굴들이 삐져나온다. 혹은 그 틈들에 도전장을 밀어 끼워 본다. 총체성과 그가 다 뒤덮지 못한 틈새를 대결시켜 보려 한다. 탄생성과 복수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도전장을 던지고, 관계의 끈을 잇고 변화를 모색한다. 어설프게 이뤄진 개별적 존재와 유적 존재 간 봉합에 균열을 꾀하려 한다. 그래서 더 많은 이질적인 틈새를 발굴하고, 그에 해석을 부여하고, 새롭게 틈새를 만들려 한다.

봉합된 듯한 총체성에 눌려 숨죽여 온 틈새 찾기, 찾아낸 틈새와 허세부리는 총체성의 관계 맺기, 틈새 간의 관계 맺기 작업을 두고 소통이라 이름 붙인다. 모험적 관계맺기, 이질적인 것과 줄 대기, 그를 통한 새로운 모색을 포괄하는 개념이라 한다. 그러므로 소통은 때론 평화적이지만 가끔씩은 전투적이기까지 하다. 바다 속을 긁어내는 거대 해녀에 맞서 그러지 말기를 요청하는 목소리도, 숨가쁘게 그를 거부하며 개별 존재를 조직해 만든 해녀 공동체의 항의 이 모든 것들이 그에 속한다.

해녀가 바다와 만나길 거부했다면 애초 해녀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질적인 것 간의 만남을 통해 해녀는 새로운 영양가를 찾아냈고, 그를 타인에게 전할 수도 있었다. 소통은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 탄생성과 복수성을 더 단단하게 한다. 이질적인 것 간의 만남으로 인한 당혹함이나 낯설음을 풀기 위해 과거를 캐고, 타인을 고려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통은 탄생성과 복수성이라는 인간 조건을 흐르게 해주는 엔진일 수밖에 없다.

탄생성과 복수성을 눌러 숨막히게 한 국가 그 엔진인 소통을 그대로 둘 리가 없다. 소통에 끼어들기 국가 프로젝트가 펼쳐진다. 정교하게 혹은 폭압적으로 이뤄지는 국가적 프로젝트 탓에 소통도 비틀거리게 된다. 같은 기표를 활용하되 다른 기의를 갖도록 강제하는 국가적 프로젝트가 여기저기서 벌어진다. 같은 생각을 갖도록 하는 홍보, 전달의 의미로 소통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습속을 만들어 낸다. 습속 만들기 국가 프로젝트 탓에 이질적인 것은 제거의 대상이 된다. 탄생성은 잊어야 할 유산으로 읽어낸다. 복수성은 거추장스러운 이념으로 처리되고 말 뿐이다.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더더욱 죽이는 전체주의적 경제 지상주의 사회로 가는 경향이 짙어지고있다.
 

거대 해녀가 바다를 헤집으며 개별 해녀를 숨막히게하고, 자원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숨막힌 해녀와 고갈되는 자원을 대하며 푼 돈을 협상하고 어쩔 수 없었다며 위로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소통했다고 자부한다. 바다와 해녀 그리고 미래 뿐 만 아니라 소통조차도 질곡의 과정에 접어든 셈이다. 그래서 오늘은 어둡고 내일은 더더욱 암흑이다. 모든 이질적인 것들이 설 수 있는 기반조차도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소통은 더 절실하고, 소통을 질곡에서 꺼낼 의지는 더더욱 요청된다. 그것만이 희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소통을 질곡에서 구해내 탄생성, 복수성을 회복하기위한 희망 프로젝트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봉합된 것처럼 보이는 총체성에서 틈새 찾기가 첫 번째일 듯하다.총체성에 포섭되지 않았던 삶, 포섭 바깥에서 벌이는 삶 그런 틈새 찾기가 소통을 구하는 첩경이다. 그런 삶은 창조해내는 일 또한 소통의 전제다. 좀 더 열린 존재되기,포용적 유적 존재되기를 위한 본보기들을 찾고 구성해내야 한다. 다시 바다 속을 뒤지듯 과거로부터 보물을 캐는 생성적 연구 작업도 그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분자적 운동은 어떨까. 자신의 정체성에 집중하여 그 고집을 놓지 않으려는 집착증이 아닌 다른 것에 모험적으로 접근해보고 즐겨보는 분열증적 분자 운동도 소통을 회복하기 위한 전제다. 그러기 위해선 견고하던 울타리를 허물어야 한다. 모든 자율적인 존재들의 연합이 그런 분열증적 분자운동이 가져올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어디에 있더라도, 그 장소에서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이접(離接)의 화신이 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코스모폴리탄 되기라고 말해버리면 지나친 단순화일까.

중심을 찾고, 그에 기대는 집착하는 것은 버릴 일이다.중심을 뺀 (n-1) 운동이야말로 진정한 운동일지 모른다. 중심을 자처했던 모든 것들은 탄생성과 복수성 그리고 소통을 배신했다. 중심은 틈새를 남기지 않을 총체성을 향해 달려야 하는 존재론적 운명이기 때문이다. 반동적 총체성을 부수기 위해 찾은 저항적 총체성은 필연적으로 저항마저도 배신하게 됨을 역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지켜보아온 터이다.


해녀가 사라지고 있음은 탄생성, 복수성 그리고 그의 엔진인 소통이 질곡에 처하고 있음의 알레고리다. 하지만 아직 물질을 하는 해녀가 남아 있음을 희망의 메시지다. 국가적 봉합 프로젝트가 아직은 허술함을 보이고, 그에 도전장을 내밀 순간이 있다는 징후다. 인간이 살아가야 할 만큼의 긴 시간 동안 바다도 살아야 하고, 그 안의 보물도 살아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한다면 알레고리에,메시지에, 징후에 눈길을 주어야 함은 당연함을 넘어서 의무적인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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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3 23:05



우찬제 (국어국문학과 교수)


말의‘홍수’와 소통의 위험

『홍수』에서 르 클레지오는 안개와 폐허의 장벽 뒤에서“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낙원”을 응시한다. 조화롭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미묘하고도 아련한 희열을 주던장소였다. 그런데 인간은 결정적이고 급속하게 그 낙원을 상실했다. 실낙원의 증후는 다채롭지만, 그 중“소리들은 소란으로 변”했다는 대목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말[言語]들은 그 광란의 무용을 다시 시작했다. 말들은 서로 얽히고 덧붙여지고, 분할되고 하는 것이다.”말의 광란은 매우 심각한 지경이다. 말은 인간의 정신을 넘어서고, 정신은 말을 따라가지 못한다. 소란한 소리로부터 인간의 소외 양상은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말들은“계속 이어지고 거대해지는데, 정신은 그만 십분의 일초가 부족하여 정신이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이윽고 그 말은 수많은 불균형이 폭발한 후에 무(無)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가, 광란(狂亂)과 밤과, 소리가 울려퍼지는 야수 같은 선풍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하여“한층 더 은밀하고 더 굉장한 말들”은 존재의 리듬을 파열하기에 이른다.“행복과 고통의 전언”도 균열을 벗어나지 못한다. 소리의 소란과 언어학대로 인해 르 클레지오의 주인공은 마침내 실어증에 걸린다. 현대 문명과 인간 삶에 대한 비판과 부정 의지가 남달랐던 작가다운 성찰이다.

소리가 존재의 숨결 혹은 존재의 리듬에서 일탈한 채 소란한 광란으로 치닫는 상황에 대한 절망과 비판이 비단 르 클레지오만의 몫일 수는 없다. 한국의 젊은 작가 한유주 또한 말의 대홍수 시대에 절망한 경우다. 그녀가 보기에 우리는 지금 말의 대홍수 시대를 살고있다. 소란스러운 말, 거친 말, 폭력적인 말,“어떠한 반성도 회의도 추억도 갖지 못”(「그리고 음악」)한 말들이 횡행하는 부정적인 수사학의 시대를, 한유주는 야만적인 삶이고 문화에 불과하다고 진단한다. 반성적 영혼의 숨결이 거세되었기에, 존재든 말이든 그 고유의 자리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한유주는 생각한다.“경험은 초라했고, 그래서 가진 것이 없었다.”(「지옥은 어디일까」). 세상에“슬프고 광포한 일들”은 무수히 일어나지만,“슬픈 일들은 어떤 사람들의 기억하지 못하는 꿈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꿈들을 환영처럼 드리우고 세계의 뒷면으로 숨어들어”(「달로」)가는 형국을 지긋하게 응시한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범어 어원에서 숨결을 뜻하는 리듬, 그 생명의 원천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된다. 리듬이 거세된 현실에 대한 도저한 인식이 한유주로 하여금 종종‘음악’의 세계로 이끌리게 한다.「그리고 음악」,「암송」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소리의 소란이나 그 때문에 형성된 증오는, 진정한 인간적 리듬을 함축하는 음악에의 동경을 통해서만 겨우 넘어 설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소통을 위한 리믹스

『펭귄뉴스』,『악기들의 도서관』의 김중혁 또한 소통을위한 예민한 귀를 지닌 작가다. 그의「자동피아노」는“어째서 소리가 모이면 음악이 되는 것일까, 소리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일까 아니면 창조하는 것일까, 왜 어떤 것은 소리이고 어떤 것은 음악일까.”라는 문제를 고민하는 두 피아니스트의 대화를 주조로 하는 소설이다. 비토는“음악은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소멸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 어디에나 있는 음을 피아니스트가 자신의 몸으로 육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음, 소리가 선재한다. 피아니스트가 음을 만들어내서도 만들어낸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다만 투명한 마음으로“자신의 몸을 통째로 예술에게 빌려줘야 한다고”비토는 강조한다. 실제로 비토는 개별의 소리들이 제값을 잃지 않으면서도 음악으로 통합되고, 그 음악이 속한 음악 장(場)에 허심탄회하게 조화를 이루며, 그런가 하면 다시 독립적인 소리로 생명을 지닌 채 세계로 되돌아가는, 그런 리듬의 세계에 자신의 몸을 빌려주고자 한 예술가로 이야기된다. 가령 비토가 연주하는 소리를 전화기를 통해 주인공이 듣는 장면에서는, 독립적인 소리/음이 음악으로 수렴되고 음악을 통해 다시 소리/음들이 확산되는, 수렴과 확산의 원환적 반복과 순환을 통해서 소리와 존재의 숨결을 탐문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나눌 수 있다. 이때 개별 소리와 전체로서의 음악은‘따로-함께’공존한다. 나누어지는 듯 어우러지며 공존한다. 연주자와 음악, 수용자의 관계도 그와 흡사하게 행복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근대 이후 인간과 예술을 괴롭히며 숨결의 리듬을 방해하던, 주체와 객체의 험악한 분열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까 연주가 이루어지는 현재시간의 연주 행위는 독주일 수 없다. 소리/음, 음악, 연주자, 수용자가 서로 스미고 짜이며 진정한 소통을 위한 생명의 리듬을 합주한다. 작가 김중혁이 꿈꾸는 음악적 황홀경은 이런 리듬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한 어떤 경지다.

이런 맥락에서 김중혁의「엇박자 D」의 세계 역시 흥미롭다. 음치에 가까워 박자를 제대로 맞출 수 없었던 ‘엇박자 D’는 학창 시절 합창 공연을 망쳐놓은 상처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무성영화 전문가로 성장한 그는 공연 기획자인‘나’와 함께 무성영화와 음악을 리믹스한 공연을 한다. 공연의 끝에 그는 회심의 리믹스 작품을 관객들에게, 특히 학창 시절 합창을 같이 했던 옛 친구들에게,선사한다.“22명의 음치들이 부르는 20년 전 바로 그 노래”라고‘엇박자 D’가 말하고 있거니와, 한 사람의 소리가 둘, 셋, 넷, 다섯 사람의 소리로 바뀌면서 합창이 되는데, 합창이라고 하기에는 서로 음도 박자도 맞지 않지만 잘못 부르고 있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 그런 노래였다. ‘나’는 그 노래가 매우 아름답고 절묘하게 어우러졌다고 느낀다.“아마도 엇박자 D의 리믹스 덕분일 것이다. 22명의 노랫소리를 절묘하게 배치했다. 목소리가 겹치지만 절대 서로의 소리를 해치지 않았다. 노래를 망치지 않았다.”각각의 소리가 어느 한 곳으로 귀속되거나 구속되지 도 않고, 그렇다고 다른 소리를 해쳐 어설픈 혼돈의 도가니를 만들지도 않은 절묘한 상태가 아닐 수 없다. 각각의 소리가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가 되어 서로 호응하는 상호주관성의 지평에서 상호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전체의 생명을 얻는 장관이다. 합창이면서 독창이고, 독창이면서 합창인, 이 세계는 불가능한 듯 보이는 개인과 집단의 조화 가능성을 예술적으로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조화의 리듬을 통해 생명력 있는 리듬의 형성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그 같은 인류의 오래된 과제는 새삼 환기된다. 특히 합창/집단의 세계에서‘엇박자 D’는 타자화된 소수자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던 현실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작가가 탐문한 바‘엇박자 D’에 의한 절묘한 리듬의 세계는 매우 웅숭깊은 것이 아닐 수 없겠다.


리듬과 숨결의 소통을 위하여

소란스런 소리로부터 진정한 숨결을 지닌 리듬, 그 역동적이고 발견적인 가치를 모색할 수 있는 음악의 세계로 향한다는 것은, 넓게 보아 문학적 정의의 추구에 동참하는 것이나 한 가지다. 여기서 음악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것을, 혹은 리듬을 추구한다는 것을, 단지 좁은 의미에서의 음악적 리듬의 구성, 그러니까 선율과 화성의 요소에 국한해서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음악에서의 리듬도“음 길이와 그 강세만을 가지고 결정하기 어려운 복잡성” (서우석,『시와 리듬』)을 지니고 있거니와, 문학에서도“단지 언어의 객관적 사실들 속에서 작업하기 위해서, 즉 측정되고 객체화된 선조적 시간 속에 잔류하면서 창조적시간화의 행위를 무시할 때 리듬의 본질을 놓치고”(김성도,『기호, 리듬, 우주』)말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리듬은 변화무상하고 역동적인 불안정성 속에서 존재의 숨결과 기미들을 길어 올린다. 리듬은“흐름이자 동시에 과정”(김성도)이다. 현재 속에서 주체가 대상과의 구체적인 교섭과 대화 과정을 통해 역동적 의미를 창조적으로 생산해내는 게 리듬, 곧 존재의 숨결이다.

요즘 학문장에서 융합이나 통섭의 담론이 흔히 강조된다. 예의 담론이 지향하는바 역시 진정한 소통을 통해 존재의 리듬 내지 존재의 숨결을 회복하려는 방향에 맞추어져 있어야 하지 않을까. 리듬이 훼절된 존재 상태는 위험하다.위험 상태는 진정한 소통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부정적 소통을 촉진한다. 그러면 존재의 리듬은 더욱더 헝클어지고 악화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진실의 소통이 필요하다.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탐문하는 것이 바로 진실의 자리다. 그런데 그것이 파편적 진실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융합되고 통섭된 진실이라야 온전한 소통의 지평을 낳을 수 있고, 존재의 리듬, 존재의 숨결을 회복하는데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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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3 22:52


 

 


 

 





 

 













 

김경만(사회학과 교수)


학문에서의 소통이란 무엇이며 또 기능은 무엇인가? 대학원 신문사에서 소통에 관한 글을 부탁받았을 때 주저 없이 응낙한 이유는 내가 이 질문에 대해서 오랫동안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소통이란 그 사전적 의미가“막히지 않고 잘 통함”인데, 학문에서 막히지 않고 잘 통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보통 우리는 어떤사람이 꽉 막힌 사람이라고 할 때 이 사람과“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 철학과 사회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 주제였으며, 지금도 그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합리성 개념과도 소통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즉, 어떤 사람이 합리적(rational 혹은 resonable)인 사람인가라고 물어볼 때 우리는 소통이 되는 사람, 즉대화가 되는 사람을 말한다. 예를 들어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 아들과 아버지가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해보자. 아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아버지는 두 가지의 반응을보일 수 있다. 첫째는 아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 긍정적, 혹은 부정적 태도를 취하든, 그런 답에 대한 근거를댐으로서 자신의 답을 정당화하는 아버지들이 있고, 둘째는 아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 답할 가치가 없다고 하며 무시하는 아버지들이 있을 것이다. 바로 첫째 타입의아버지가 합리적이고 소통이 잘되는 아버지일 것이다.좀 더 현학적으로 표현하면 첫 번째 타입의 아버지는 계몽주의를 대변하는 비판적 합리성을 가진 아버지라고 표현할 수 있다. 즉,“대화”를 통해서, 혹은 더 나가서“논쟁”을 통해서 무엇이 합리적이고 정당화될 수 있는가를찾아내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합의에 이르는 것이“소통적 합리성”(communicative rationality)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판과 평가, 그리고 논쟁의 부재

짧은 글에서 더 복잡하고 현학적인 얘기를 하는 것보다 곧바로 이런 소통적 합리성이 국내의 사회과학, 인문과학계에 존재하는가를 얘기해보자. 학문에서 소통의 정도는 위에서 언급한 소통적 합리성이 학문에 참여하는 사람들, 즉“사회과학자들”사이에서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가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소통이누구와 누구사이에서 이루어지는가이다. 서구의 사회과학과 우리 사회과학만을 놓고 비교해 봤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사회과학자들, 즉 전문가(professional)들 간의소통이 서구에 비해서 매우 떨어지는 반면, 대중과의 소통은 매우 활발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 점은 금방 이해될 수 있다. 서구에 비해서 우리나라에서는텔레비전과 대중 매체, 예를 들면 신문, 혹은 일반 잡지-신동아 등-에 글을 기고하는 사회과학자들을 너무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들은 사회과학의 사명, 사회적 책임, 혹은 지식인의 사회적 기여라는 이름 아래 대중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때로는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강연하지만, 이런 형태의 소통은 위에서 언급한 합리적소통-즉, 대화 당사자 간의 소통-이라 할 수 없다. 왜냐면 이런 방식의 소통은 사회과학자가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대중에게 전해주는 것이기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소통은 대중이 사회과학자들의 일방적 지식전달에 대해서 반대나 이견을 표출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는 의미에서“쌍방적이며 합리적 소통”이라 할 수 없다.

이에 더해서 한국 사회과학이 안고 있는 소통의 문제는 한국의 사회과학자들은 정작 자신들이 속한 사회과학 장“내”에서의 소통은 등한시 한다는 데서 찾아 볼 수있다. 사회과학 장내에서의 소통이 원활한가를 측정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지표는 물론 학술지 안에서의 소통이다. 학술지에 내는 소위 학술적 가치가 있는 글들은 사회과학 장내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들끼리 만의“소통의 장”(communicative field)안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논문들을 학술지에기고만 할 뿐 이들 글들에 대한 상호 비판과 감시, 그리고 그에 따른 논쟁이 국내 사회과학계에는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국내 학술지에 서로에 대한 비판과 논쟁적 글이 실리지 않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로도 확인되지만, 여러 가지의 다른 방법으로도 입증될 수 있다.


관료주의화된 등재제도

우선 학술진흥재단의 등재지, 등재 후보지를 선정하는 제도를 보면, 과연 우리나라에 사회과학의 장 (field)-즉 전문가들만이 상호 작용하는 공간-이 존재하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왜 학술진흥재단에서 등재지 제도를 만들었을까? 나는 사회과학자들, 인문과학자들 중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의아해하거나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민주화를 부르짖는 민교협도, 또 개별 학회도 이에 대해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왜 등재지 제도가 만들어졌는가? 서구의 학술지가 어떻게 운영되는가를 살펴보면 답은 간단하게 나온다. 예를 들어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나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등 미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술지들이 SSCI(Social Science Citation Index)에 등재됐기 때문에 유명한가라는 질문은 정말 우스운 질문이다. 이들 학술지들은 Thomson사에서 SSCI를 만들기 오래 전에 이미 학자들 사이의 소통과 경쟁을 통해서 그 집단에서 가장 뛰어나고 창의력 있는 글이라고 평가 받은 글들만을 게재함으로써 그 권위와 명성을 쌓아온 학술지들이다. 즉, 서로의 연구에 대한 치밀한 비판과 논쟁을 통한 소통을 통해서 어느 학술지가 권위 있는 학술지인가가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술진흥재단에서 등재지를 선정하는 심사에 참여해본 사람들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에서 저명 학술지로 선정되는 것은 심사를 몇 명이 하느냐, 얼마나자주 출간되느냐, 게재 거부율이 얼마나 되느냐, 학술지를 발행하는 학회의 회원 수가 얼마나 되느냐 등의 소통의 본질적 의미와는 하등 관계없는 피상적 항목에 매겨지는 점수로 환산되는 지표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여기서 밝힐 수는 없지만 몇 년 전에 한국의 유수한 학회에서 초청받아서 강연했더니 자기 학회에 가입하라는 신청서를 주면서 꼭 가입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학회 회원수를 늘려야 자신들의 학회지가 등재지가 되는데 도움이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관료주의적 발상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데는 누구도 이견이 없겠지만, 그 책임이 바로한국의 사회과학, 인문과학자 자신들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는 거의모든 학회지가 등재지가“되어가고”있고, 현재 아닌 것들도 등재지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이제 그 원래의취지와는 반대로 등재지 제도는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왜냐면 모든 학술지가 등재지가 되어가고, 따라서 어느 학술지가 권위 있는 학술지인가를 구분해내려는 애초의 취지는 무색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인문, 사회과학을 막론하고 국내에서는 전문가들끼리 소통-지적 산물에 대한 상호 비판과 논쟁, 평가-이 부재한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그리고 이는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질적 저하를 불러오는 가장 큰 원인임에 틀림없다.


표절과 중복게재, 소통의 부재가 야기한
한국 사회과학의 질적 현실

사회과학자 상호 간의 소통의 부재를 여지없이 나타내는 또 하나의 슬픈 얘기를 덧붙이면서 이 글을 끝내고자 한다. 우리나라처럼 사회과학자들이 정치권에 흡수되어서 정치가로 변신하는 나라도 흔치 않다. 내가 얘기하려는 것은 사회과학자들이 정치하지 말아야한다 뭐그런 식상한 얘기가 아니라 소위 훌륭한 사회과학자라고 해서 학계에서 이름이 알려지고, 대중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 정치권에 발탁되어서 소위“인사청문회”에 회부됐을 때 거의 예외 없이 제기되는 표절, 중복게재 의혹이다. 연일 텔레비전 토론회와 신문, 잡지 등에 등장해서 사회, 문화, 정치, 경제에 대해서 마치 깊은 지식을 가진 것 같이 떠드는 사람들이 대부분 정치권에 발탁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거의 모두가 표절과 중복게재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정말 개탄해야 할 것은 이들이 표절하고, 중복 게재를 했음에도 이를 알아 채지조차 못한, 혹은-만일 사실이라면 더 슬픈-알았더라도 감히 폭로하지 못해온, 학자들 간의 소통이 부재하는 한국 사회과학의 현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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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3 22:35

을 허하라!

서강에는 대학원 신문이 없다. 신문이 없다는 것은 각 단과대학의 소식을 간추려 전할 매체가 없음을, 연구동향과 성과를 알릴 수 있는 소통(疏通)의 장(場)이 없음을 말한다. 소통의 부재는 필연적으로 단절을 낳고, 이러한 단절은 분과 학문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학문적 요구에 장애로 작동한다. 대학원의 목적이 지식인의 양성이라면, 그리고 이 지식인이 결코 고립된 영역에 한정된 기능인이 아니라면, 소통의 단절을 극복하고 틀지어진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모두에게 요구되는 소임이 아닐까. 때문에 신문을 만드는 것은 단지 하나의 매체를 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말 그대로 서로를 통(通)하게 하는 길이며, 동시에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작지만 견고한 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신문이 소통을 저절로 담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많은 경우 신문을 둘러싼 권력 다툼과 소통의 부재를 목도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이 그러할수록 더 치열하게 소통의 장을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소통이야말로 공감을 가능하게 하고 너와 나를 조우하게 하는 최소한의 그리고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해서 서강 대학원 신문은 ‘소통을 허하라’라는 기획 의도를 가지고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올 수 있는 마당을 펼쳐보이고자 한다. 가르치는 자의 목소리와 배우는 자의 목소리가 한데 엉겨서 밤하늘의 별 마냥 성좌를 이루어갈 때, 바로 그 곳에 꿈이 있으리라 믿는다.  

서강 안에 무수히 많은 얼굴을 담는다.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이질적인 얼굴들이 교차되고 중첩되어 흐릿하지만 얼핏 형상을 이룬다. 말없는 목소리들이 부활하고 얼굴 없는 면(面)들이 의미를 얻는다. 하지만 결코 하나는 아니리라. 때문에 하나로 응축되어 있는 지층의 한 허리를 버혀내어 그 속에 켜켜이 담긴 목소리들을 끄집어내는 작업은 다자들의 말을 복원시키는 정치적 울림을 얻는다. 그것은 말을 통하게 하는 ‘소통의 정치학’이자 잊혔던 존재를 상기시키는 ‘기억의 정치학’이다.

거창한 의도로 신문을 발간한다. 봄날의 노곤함과 존재의 피로함이 작업을 더디게 만들고 열악한 환경이 손끝을 무디게 만들지만 첫 술에 배 부르려는 욕심을 떨쳐버리고 여기 재창간호를 발간한다.  

편집장 박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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