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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42호] 꽃처럼 나답게 피어나는 것 (손은정) 예술이란 시간과 공간속에서 자신의 존재로 살아가는 행위 그 자체- 꽃처럼 나답게 피어나는 것. 손은정_ 플라워 아티스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공대를 나왔고,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굳이 꽃을 배우러 가고. 그러한 과정은 어쩌면 남들에게는 너무 생뚱맞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내겐 공학을 하든, 글을 쓰든 ,예술을 하든, 이 모든 것들이 시간을 걸쳐가는 좌표점을 찍어가는 방식과 프로세스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좌표를 좋아한다. 내가 서 있는 공간과 시간에 ‘존재’를 표현하는 것. 우리는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라는 존재가 태어나서 무엇인가, 어떠한 존재로 존재한다는 것 그것을 인간은 끊임없이 증명해내고자 한다. 비록 한 점일지라도 나라는 존재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을 관계속에서든 .. 더보기
[142호] 기업예술의 탄생 (동덕여대 심상용 교수) 기업예술의 탄생 심상용_ 미술사학 박사, 동덕여자대학교 큐레이터학과 교수 “기업들에게 민주주의에서의 표현의 자유, 정당한 법의 절차, 혹은 정치적 대표성 등의 법적 권리를 주는 것은 일단의 계약서에 그런 권리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업들에게 이러한 권리를 허용하는 의원들이나 판사들은 지적으로 정직하지 못하거나 혹은 수퍼자본주의의 영향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오직 ‘사람들’만이 그런 권리를 소유해야 한다. ‘기업국가’ 한국 1997〮 · 98년의 환란과 IMF 사태, 2008년의 글로벌 금융대란을 거치면서 한국에서 기업은 국가운명에 상응하는 지위로 격상된 듯하다. 기업이 국가비전이요, 사회적 토대요, 민중의 철학이어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선전이었다. 정부와 기업, 기업과 정부의 협력이 공공연하게 미화되.. 더보기
[142호] 해결하지 않는다. 함께 헤맬 뿐이다. (장현정) 해결하지 않는다. 함께 헤맬 뿐이다. 장현정_ 사회학자, 도서출판 호밀밭 대표 10대 후반부터 20대 후반까지 약 10년 정도 록 밴드 활동을 했다. 음악을 그만둔 뒤로 어쩌다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문화연구, 철학, 미학 같은 학문도 기웃거렸지만 늘 스스로를 공부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딴따라’라고 생각하며 살려고 노력했다. 어떤 쪽이든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보다 자유롭고 엉망진창(?)으로 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던 것 같다. 굳이 표현하자면 나에게 학문이나 일은 ‘낮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고 딴따라나 삶은 ‘밤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 ‘워크 라이프 밸런스 work-life balance'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 낮과 밤도 균형을 이루면 좋은데 우리들 대부분은 밤에도 환하게 형광등을 밝혀놓고 자기도.. 더보기
[142호] 소통이 힘든가요, 거울을 보세요. (경희대 임성민 교수) 소통이 힘든가요. 거울을 보세요. 임성민_ 저자, 경희대학교 의상학과 교수 타타타 “니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1992년 가수 김국환이 발매한 ‘타타타’란 노래의 가사이다. 산스크리트어인 타타타는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한다.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무엇일까. “그걸 의미한 게 아닌데.” 자신의 의도가 전달되지 못해서 마음 상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은 없다. 느낌을 통해 추론할 뿐이다. 말이나 표정, 행동 등을 통해 상대방의 생각을 예측하고 이러한 예측으로 서로를 대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대하는 방법에 항상 화가 나 있다면 상대방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표현에 문제가 있을 확률은 1에 가깝다. 자신을 제대로 드러내는 방법의 시작은 자신을.. 더보기
[141호]주체적 개인을 위협하는 고도 정보화 사회의 역설-참다운 공동체를 위하여_김재홍 주체적 개인을 위협하는 고도 정보화 사회의 역설 - 참다운 공동체를 위하여 김재홍 시인 _ 2003년 로 등단. 시집 『메히아』, 『다큐멘터리의 눈』 발간 에피스테메(Episteme)나 아비투스(habitus)가 만일 우리 무의식 속에 잠재된 집단성에의 맹종적 태도나 다수성에의 몰입을 지시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마땅히 부정되어야 한다. 혹은 인간 조건의 보편성과 사고의 인접성에 대한 세밀하고 방대한 지적 성과를 충분히 사숙하지 않은 단순 추상화라면 이 또한 거부되어야 한다. 한때는 분화보다 총화가, 다양성보다 총체성이 우리에게 활력을 불어넣던 때가 있었다. 대량생산과 박리다매의 수출 전략이 국가경제의 에너지원이 되던 산업화 시대의 기업에는 말할 것도 없으며 가난을 면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생존 과제인 수많은.. 더보기
[141호] 헌법의 주체로서 광장의 국민에 관한 헌법해석적 검토_박찬권 헌법의 주체로서 광장의 국민에 관한 헌법해석적 검토 박찬권 _ 고려사이버대학교 법학과 조교수 최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정국에서 나타난 광장의 목소리를 계기로 일반 국민들은 헌법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대통령의 탄핵을 지지하는 촛불 집회와 이에 비해 소수였지만 탄핵을 반대하는 태극기집회에 모인 국민들은 각자 자신들의 주장이 헌법을 수호하는 길이라 외쳤고, 탄핵 심판을 담당한 헌법재판소는 헌법의 이름으로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하였다. 이제 국민은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조항만을 가지고도 그들이 국가의 주인임을 자각하고 행동하고 있다. 진정한 국민주권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미 도래하였다... 더보기
[141호] 전능했던 주체와 무기력한 주체, 그리고 파상(破像)의 힘_임명현 전능했던 주체와 무기력한 주체, 그리고 파상(破像)의 힘 임명현 _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석사, MBC 기자 아주 예전부터 나에게 허락된 인생이 단 한 번뿐이라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비극적으로 느껴졌다. 여러 번 살 수 있다면, 아주 주류처럼도 살아보고, 또 아주 비주류처럼도 살아보고, 권세와 쾌락 이기심을 추구하면서 살아보고, 신앙와 윤리 이타심의 원칙을 지키며 살아보고... 아니 최소한 두 번은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면 한 번은 내가 살고 싶은 대로, 다른 한 번은 남이 살아보라는 대로 살 수 있지 않은가. 허황된 생각이었다. 내가 살 수 있는 삶은 단 한 번뿐이다. 그나마 이 삶이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다. 평균 수명이라는 통계가 있긴 하지만 그것이 내 삶에 적용되리라는 보장은.. 더보기
[141호] 전문등반을 하는 여성들의 주체성_김세옥 전문등반을 하는 여성들의 주체성 김세옥 _ 이화여대 여성학과 석사, 한국여성산악회 산에서 발견한 여성의 역사-산에도 여자가 있었다 등반은 ‘무상(無償)의 행위’이다. 올랐다는 사실외에는 어떤 보상도 없다. 물리적인 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니까 반자본주의 적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산에 간다. 등산에 입문한 후 나의 의문은 ‘왜 목숨걸고 등반할까?’였다. 하지만 인류는 한계에 도전하는 위대한 본성으로 죽을 수도 있는 신대륙, 남극, 북극, 히말라야에 도전하며 인간의 대서사를 만들어왔다. 유산(遊山)을 목적으로 산에 가던 인류는 200여 년 전쯤부터 더 높이 오르겠다는 욕망으로 근대등반을 시작했다. 적지 않게 남아있는 조선 선비들의 유산기에서 알수 있듯 이전의 산은 도전의 장이라기보다 바이오필리아 .. 더보기
[140호] "무의미의 축제" 몇몇 사상가들이 삶의 의미라는 문제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데에는 매우 일반적인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바로 ‘의미’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의 문제라는 점 때문이다. 삶의 의미는 질감이나 무게, 색깔 같은 사물들 자체의 특징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사물들에대해 이야기하는 방식과 관련된 문제이다. 양배추나 심박동 측정기 자체는 의미가 없다. 그것들은 우리의 대화에서 거론될 때에만 의미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삶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삶을 의미 있게 만들 수 있을 뿐이다. -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인생의 의미』(2016) '잃은 것을 찾는 삶' 천주희 (문화연구자 겸 작가) 지난 10년 동안 대학(원)생으로 지불한 등록금은 약 5000만 원. 그중 2.. 더보기
[140호] 세상은 당신의 ‘쓸모’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_천주희(『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저자) 세상은 당신의 ‘쓸모’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천주희 _『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저자 나는 일을 하고, 글을 쓰고, 연극을 한다. 언제부터 나의 경제활동과 창작활동이 분리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나의 노동이 경제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할 때부터, 어쩌면 나는 빈곤의 숙명을 애써 덤덤하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석사과정에서 어떤 연구를 하고, 어떤 지식을 생산하든지 그것은 남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내 삶의 과제는 늘 생존 그 언저리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매 학기 값 비싼 등록금을 지불하고,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대학원 석사를 마치고 졸업할 때쯤 덤덤함은 막막함으로 이어졌다. 여느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