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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27호]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영화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영화

 

 

서인숙_상명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1. <블레이드 러너>: 기억과 역사에 대한 포스트 모던한 불확실성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1982)에는 인간과 사이보그의 경계 지우기와 테크노포비아적 디스토피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담겨 있다.

 

영화에서 데카르트적 인간 중심적 사고가 해체된 탈 중심화와 탈 인간화의 포스트 모던한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르는 SF영화라 할 수 있다. SF영화에서는 포스트 모던한 기후와 징후 속에서 탈 인간적 삶의 충돌과 대립을 디스토피아적으로 그려낸다. 특히 사이보그는 최첨단 과학 기술의 정점이자 인간 지성의 승리로 인식되는 보편적 관점을 뒤집고 기계가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대체함으로써 인간의 특권적 위치를 박탈하는 혼성적이고 잡종화된 인간과 인공물의 무너진 경계를 표상한다. 이 무너진 경계는 인간 이성과 정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계몽주의 사고의 폐기와 인간 중심적 주체성을 불안정하게 동요시키는 징후로 읽힌다. 인간을 대체하는 복제품인 사이보그의 극단에는 인간 폐기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드리워져 있으며 SF영화에는 이런 암울한 테크노포비아가 투영되어 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1982)에는 인간과 사이보그의 경계 지우기와 테크노포비아적 디스토피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담겨 있다. <블레이드 러너>2019년이라는 멀지 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인간과 레플리컨트(복제인간)의 대립을 다룬다. 영화에서 인간의 미래 사회는 타이렐이라는 기업이 지배하면서 다른 행성으로의 영토 확장을 위한 도구로 인간 대신 레플리컨트를 만들어 행성들을 식민화한다. 행성으로 떠난 레플리컨트가 지구로 귀환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만약 법을 어기고 레플리컨트가 지구로 돌아온다면 레플리컨트 사냥꾼인 블레이드 러너에 의해 회수(처단)된다. 영화는 지구로 돌아온 4명의 레플리컨트를 처단할 임무를 맡은 블레이드 러너(해리슨 포드 분)의 추적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여기서 기계로 만들어진 복제인간, 레플리컨트는 인간과 닮을 꼴인 외양만 지닌 게 아니라 사고할 줄 아는 지능과 희로애락이 감정을 지니고 있어서 인간과 구별이 매우 어려울 정도이다. 타이렐사가 만든 최신형 레이첼이라는 여성 레플리컨트는 과저의 기억까지도 이식되어 있어서 스스로 복제 인간임을 자각하지 못할 정도이다. 인간과 유사한 레플리컨트의 존재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 정체성에 대한 포스트 모던한 불확실성을 통해 근본적 의문을 던진다.

가장 진보된 복제인간 레이첼은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고 그 기억의 증거로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을 지니고 있어 스스로 인간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은 그녀를 만든 타이렐 사장의 사촌의 기억을 이식한 것이다. 지금껏 모더니즘 관점에서 기억이란 인간 고유의 역사성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인간 정신 내부에 존재하는 무형의 증거이었다. 인간은 스스로 지닌 기억을 통해 자신이 누구임을 확신하고 주체성을 자각해 왔다. 하지만 이제 원본과 동일한 복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미래 사회의 테크놀로지는 인간 고유의 특성이던 기억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제 원본과 복제품의 차이는 해체되면서 인간과 인종적 기계라는 관습적 구분도 사라지게 된다.

장 보드리야르가 포스트모더니즘을 시뮬라크라simulacres의 시대로 규정한 대로, 레플리컨트는 인간에 대한 환각적 닮은꼴을 실현시킨 시뮬라크라이다. 시뮬레이트simulate의 의미는 그것이 시뮬레이트하기를 원하는 원본과 동일해지기를 목표하는 것이고 영화에서 복제인간, 레이첼은 이런한 완벽한 시뮬레이션의 실체라 할 수 있다.

영화에서 인간과 복제인간의 유일한 차이는 역사성의 유무에 달려 있다. , 한 인간을 개인화 할 수 있는 기억의 기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전자는 삶을 통해 '경험된' 기억을, 후자는 삶과 무관하게 '이식된' 기억을 지닌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 또한 라깡에 따르면 무의미하다. 그에 따르면, 어차피 인간의 정체성이란 애초에 오인을 통해서 획득된 기억이고 이 기억 자체가 허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기억조차도 복제인간의 기억의 작위성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참/거짓, 실재/상상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포스트 모던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2. <비디오드롬>: 침범된 육체, 포스트모던 육체

 

 <비디로드롬>은 정신과 육체, 외부와 내부,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해체하면서도 이미지, 리얼리티, 환각, 그리고 신경증을 서로 용해될 수 없게 섞어 놓음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영화가 아닌 영화 자체가 포스트모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영화이다.

 

<블레이드 러너>가 인간과 동일한 레플리컨트의 기억과 역사하는 매개체로 인간의 정체성을 불안정하게 동요시킨다면, <비디오 드롬>은 스크린 이미지에 중독된 인간 정신을 침범되고 절단되어 변이된 육체로 전치시켜 환각적 신경증을 재구성한다. <데드링어>, <플라이> 등에서 테크놀로지의 전개와 발전을 육체의 해부와 변형, 그리고 그 위에다 사도마조히즘적 성애적 요소까지 첨가해 전위적으로 재현해 온 감독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이다. <비디오 드롬>(1982)에서 크로넨버그는 시각 미디어의 위협과 병리 현상을 작위적이지만 매체반영적인 환영으로 강렬하게 묘사하고 있다.

케이블 방송국 운영자 막스 렌은 방송국의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가학적 성행위를 그로테스크하게 전시하는 하드 코어, 비디오드롬을 찾게 된다. 하지만 이 비디오드롬을 한 번 본 시청자는 머리에 종양이 생기면서 환각 상태에서 비디오에 전적으로 조종되는 중독성에 빠지게 된다. 사도마조히즘의 성관계를 나누었던 막스의 애인 비키는 텔레비전 스크린으로 변형되면서 막스를 유혹하고 막스는 비키가 된 텔레비전과 섹스를 나룰 뿐만 아니라 비디오드롬에 조정된 채 동료들을 살해하게 된다.

막스를 비디오드롬으로 이끄는 안내자 오브라이언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텔레비전 스크린은 정신의 눈의 망막이다. 그러므로 텔레비전 스크린은 두뇌의 물질적 구조의 부분이다. 그러므로 텔레비전 스크린에 나타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위한 생생한 경험으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텔레비전이 현실이고 현실이 텔레비전보다 덜한 현실이다."

 

이러한 오브라이언의 언술은 재현이 실재를 대체하고 재현에 의해 실재가 강탈당하는 보드리야르와 동일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현재 테크놀로지화 되고 시뮬레이트 되면서, 현실이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가 현실로 중첩되어 인간의 정신이 이미지에 종속되는 상상적 세계에 살고 있다.

영화는 이미지에 종속된 정신, 이것을 인간의 종양을 야기 시키는 질병으로 묘사한다. , 침략적이고 저항할 수 없는 이미지의 파워를 통해 스펙타클 사회에서 자기 통제가 불가능한, 이미지에 의해 지배받는 인간과 미디어의 전도된 관계를 자기 증식적인 바이러스처럼 취급한다. 스펙타클은 소비하고픈 욕망을 부추기고 욕망은 끊임없이 다음 생산품과 그 다음 생산품으로 이전되기 때문에 무한정으로 자기 증식된다.

자기 증식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바이러스적 이미지와 이미지의 수송자로 전락한 주체의 전도된 관계는 주인공 막스의 신체의 침탈과 변형을 통해 육체의 타자화로 표현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주인공이 비디오드롬에 빠져들수록, , 그의 환각이 심해질수록 그의 육체의 변형 또한 극심한 형태로 형상화 된다. 현실/환각, 인간/테크놀로지, 자아/타자의 경계가 해체되고 기괴하게 재현되는 중심 지역은 막스의 신체에서이다. 말하자면 이분법이 해체되는 영화의 포스트모더니티는 육체 지우기와 병행된다.

영화에서 비디오드롬을 보던 막스의 배가 흉물스럽게 갈라지는데 마치 여성 자궁의 형태를 띤 입구가 생겨나고 뱃속의 내장은 비디오 플레이어로 작동된다. , 막스는 일종의 비디오 터미널이 되고 그의 자궁 모양의 뱃속으로 총이나 비디오 테이프를 삼키거나 반대로 폭탄을 꺼내기도 한다. 말하자면 현실과 재현이 하나로 용해되듯이 이미지와 육체가 하나가 된다.

이런 이미지에 의한 육체 침입이 은유하는 대상은 이미지에 의해 조종되고 종속된 막스의 정신이다. , 침탈되고 절단되어 변형된 육체의 미디어화는 이미지의 환각에 시달리는 막스의 정신적 외상에 대한 공포어린 표상이자 물질화이다. 막스의 내면화된 환각을 육체를 통해 외형화 시킴으로서 내면적 정신과 외형적 육체의 경계를 사라지게 만들뿐만 아니라 이것을 미디어 신체로 치환한다. 그 결과 막스의 인간적 육체는 점점 지워지고 포스트모던 육체가 자리 잡게 된다. 이것은 비디오화된 막스의 정신을 타자화된 육체성으로 표상하여 주체와 타자의 구분이 지워짐과 동시에 인간과 미디어의 경계도 해체하는 포스트 모던한 사고를 구현한 것이다.

<비디로드롬>은 한편으로는 정신과 육체, 외부와 내부,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해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지, 리얼리티, 환각, 그리고 신경증을 서로 용해될 수 없게 섞어 놓음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영화가 아닌 영화 자체가 포스트모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