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6.04.21 12:21

별없는 밤의 무도회 

-<누구세요?>가 제시하는 정체성에 대한 물음- 




장서란 _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부유하는 정체성

물질적 풍요로움과 가치판단의 기준이 부재하는 현대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부조리극은 불합리속에서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제시한다. 루카치의 말처럼 현대는 길잡이별을 잃은 사람들의 시대지만, 두 다리를 가진 우리는 여전히 걷고 또 걸어야 한다. 부조리극 또한 이러한 시대에 속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현화의 <누구세요?>는 언어의 해체, 등장인물간의 의사 소통 불가능, 극의 시작부에서 나타나는 불가해한 상황이 결 말에서 반복되는 양상을 보임으로써 전형적인 부조리극의 틀을 지닌다. <누구세요?>는 비 내리는 날 같은 집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부부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들은 서로를 이방인으로 인지하고 서로를 추방하려 한다. 남자와 여자는 자신을 입증하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며, 이웃인 남자A와 여자A의 등장은 상황을 더욱 불가해하게 만든다. 남자와 여자는 극의 절정에서 가학적∙피학적인 성행위 이후에 잠시 서로를 부부로 인식한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서는 갑작스런 여자A의 등장과 함께 남자가 여자A를 아내로 인식하고 여자A또한 남자를 남편으로 인식함으로써 등장인물 중 누구의 정체도 밝혀지지 않은 채 끝이 난다.

극의 중심 갈등은 남자와 여자의 갈등인데, 남자와 여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려는 방편으로 전화기와 꽃병이라는 오브제와 극적 공간인 집을 택한다.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기 위하여 오브제와 극적 공간을 독점하려 하며, 이는 곧 서로를 정체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관객이 판단하기로 남자와 여자는 부부 사이로 보이며, 그들은 집 안에서 그들만의 행동양식과 오브제에 얽힌 기억을 공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서로를 부부로 인식 하지 못하는 상황은 관객에게 있어서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키며, 두 사람은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고 확실한 증거인 이름을 끝내 밝히지 않는다. 이들의 논쟁은 1경 (극 안에서의 장)에서부터 쭉 이어지다가 남자A의 등장으로 전환을 맞는다.

남자A는 맥락상 여자의 내연남으로 보이는데, 막상 여자와 마주하고 나서는 여자를 알아보지 못하며, 이는 여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남자A는 남자와 여자를 폭력적으로 위협할 뿐만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공통적으로 지니는 정체성의 상실을 건 드림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 동질감을 자극한다. 이후 4경 말미에서 등장하는 여자A로 인하여 남자A의 정체성은 보다 확실해진다. 남자A는 남자처럼 자신의 직업을 밝히는 데에 그치 지 않는다. 남자A는 여자A의 남편이며, 그것은 여자A의 진술로 설득력을 얻는다. 여자A 또한 남자A의 존재로 인하여 남자 A의 아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남자A와 여자A가 서로를 통해 확립하는 정체성은 집과 물건을 통하여 정체성을 획득하려는 남자와 여자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즉 남자A와 여자A의 존재는 남자와 여자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의 부유하는 정체성을 되돌아보게 하는 대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제 5경

<누구세요?>에서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5경이다. 5경은 1경에서부터 시작되는 남자와 여자의 갈등이 극으로 치달으면서 일시적으로 해소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날씨를 암시하는 빗소리와 함께 사뭇 진정된 두 사람의 대화에서는 1경에 서부터 비효율적일 정도로 늘어지던 논쟁의 이유가 암시된다.


여자 ....... (반짝 물기를 띠는 눈)

남자 ....... (그녀를 보는 시선이 안쓰럽다. 천천히 일어

나 다가가며) 옆에 앉으면 실례가 될까요? 여자 실례가 된다면 안 앉으시겠어요?

남자 ......아뇨.
여자 그럼 대답할 필요가 없잖아요?
남자 가까이 하고 싶어서.
여자 고의적인 실례는 악의로밖에 해석할 수가 없는데 요?
남자 이해를 바라고 싶은 악의죠.
여자 이해란 강요하는 게 아녜요.
남자 전 강요당하고 싶은데요?
여자 미안하지만 난 이해를 강요해야 될 만한 일이라면

애초부터 하지도 않아요.
남자 내 이름을 한번쯤 물어보는 덴 이해를 강요할 필요

도 없을 텐데?
여자 ......? (비로소 남자를 쳐다본다.)
남자 (그녀의 시선을 반기며) 그런 화제라도 없는 것보

다는 낫잖아요?
여자 물으면 대답해주겠어요? 남자 대답하면 믿어주시겠습니까? 

여자 ......아뇨.
남자 .......
여자 어차피 가짜일 테니까.


여자의 마지막 말,“어차피 가짜일 테니까”는 남자에 대한 여자의 불신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극 전체를 흐르는 불합 리와 논리에 대한 불신에서 생겼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조차 논리와 대화로 입증할 수 없었고, 오히려 대화와 논리를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에 대한 좌절을 경험했다. 즉 여자의 말은 두 사람의 갈등은 이성에 기반을 둔 언어로 풀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를 뒤집는다면 남자와 여자의 갈등이 풀리는 지점은 행위(몸)와 감정의 선에서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5경의 말미에서 나타나는 남자와 여자의 사디즘적∙마조히즘적 성행위는 이전 논의에서 극의 잔혹성을 보이기 위한 하나의 시도, 자기 응집력을 회복하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 등 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어디까지나 남자에게만 초점을 맞춘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가 설명하는 아내의 악어 핸드백은 부유함을 나타내는 오브제일 뿐만 아니라 남 자에게 있어서 아내와 동일시되는 공포의 대상이다. 악어 핸드 백이 삼키는 물건은 손거울, 크림, 화장지, 피임약, 묵직한 곗돈이다.이때 피임약과 곗돈을 통해서 남자는 아내에게 성적∙경제적 위축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남자는 깨진술잔으로 다친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희열을 느끼며, 그 피를 자신의 몸에 묻힐 뿐만 아니라 여자에게 묻히며 여자를 욕망한다고 말한다. 피는 온전히 자신에게 속한 것으로 상징되며, 이성과 논리를 통하여서는 찾을 수 없었던 정체성을 남자는 자기 자신이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피-를 통해 발견한다. 여자에게 피를 묻힘으로써 남자에게 아내는 공포의 대상에서 욕망의 대상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디즘 적∙마조히즘적 성행위로 인하여 극은 절정을 향한다.

마조히즘적 주체는 자신의 욕망이 다른 누군가의 욕망에 의해 완전히 부정되고 사라지는 것을 경험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타인의 욕망의 자율성 또한 부정되어 사라져야만 한다. 마조히스트는 동일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파괴하면서 동시에 성취한다. 즉 마조히즘적 주체와 타자 사이에서는 권력과 권력의 부재가 동시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마조히즘은 욕망의 파괴와 그로 인한 권력의 획득, 이항대립의 차이 거부, 차이의 부재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5경에서의 사디즘적∙마조히즘적 성행위로 인하여 6경에서는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부부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관객들은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말다툼 끝에 여자가 밖으로 나간 사이 여자A가 집안으로 들어오는데, 남자는 여자A를 아내로 인식하고 여자A 또한 남자를 자신의 남편으로 인식한다. 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간 후 밖에서는 여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차임벨을 울리지만 문은 열리지 않고 극은 막을 내린다.

결국 어떠한 관계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으며, 모순되고 혼란스러운 상황만이 남는다. 누가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나타나지 않으며, 일대다의 관계가 순차적이고 인과적인 극의 순서와는 달리 근거도 인과관계도 없이 마구잡이로 나타난다. <누구세요?>에서는 극에서 가장 넓은 범위의 기능을 갖는 언어로 인하여 역설적으로 언어에 대한 믿음이 축소됨을 보여준다. 언어는 모든 다른 기호 체계를 대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배우의 언어는 관객의 상상에 인지 가능한 것을 전달하는데, 대사를 통한 맥락으로 추측할 수 있는 정보중 가장 기본적인 정보인 인물에 대한 정체성이 고정되지 않고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다른 작품보다 언어 기호-대사에 대한 믿음은 줄어들고, 준언어적 기호와 몸짓 기호, 배경과 오브제 등과 같은 다른 기호들에 대한 믿음이 중요시된다고 할 수있다. 6경에서 잠시나마 논리적인 상황이 전개되는 이유 또한 대화가 아니라 5경에서 나타나는 두 사람의 성행위, 몸짓 기호에 의한 것이라는 점 또한 이러한 논의를 뒷받침한다.



별 없는 밤의 무도회

앞에서 <누구세요?>는 불합리하기에 부조리극을 전형을 보인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극에 나타나는 불합리와 언어에 대한 불신, 정체성의 혼란은 무대밖의 관객에게 있어서 오히려 현실로 다가온다. 내가 누구인지 말하려 할 때,이름과 말은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꾸만 주변의물체-오브제에 기대어 나를 증명하려고 하나 오브제는 유일하지 않으므로 결국 나는 나 스스로를 정의하지 못하며, 마찬가 지로 타인 또한 나를, 타인을, 또 다른 타인을 정의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유일한 관계 또한 성립하지 못한다. 나 자신을 규명하지 못하기에 타인과의 의미있는 관계 또한 시작할 수 없는 것이다. 타인은 타인이어도 좋고, 또 다른 타인이어도 좋은, 그러므로 아무래도 좋은 관계가 지루한 왈츠처럼 계속해서 반복됨을 이미 현실에서 관객들은 느끼고 있다.

그러나 정체성의 표류에 휩쓸린다 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걸어갈 것이다. 집 안에서는 사람들이 서로는커녕 자기 자신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아도 집 밖에서는 빗줄기가 내리고 천둥이 치고 해가 뜬다. 남자와 여자A가 애써 획득한 정체성을 다시 무너뜨려도 문밖에 서는 여자가 차임벨을 울리며, 정체성과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이성과 언어 반대편에 있는 감성과 행위의 극한까지 달려가는 투쟁이 치열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누구세요?>는 별 없는 밤의 무도회이다. 끊임없이 짝을 바꾸어 가면서 나와 타인의 바닥을 더듬는 이야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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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6.04.21 11:55




프리 제돌: 수족관 돌고래의 생명정치 



남종영_한겨레신문 환경 기자, 영국 브리스톨대학교 인문지리학 석사



미국 플로리다 주의 시월드는 세계적인 범고래쇼로 유명한 곳이다. 동물학대 논란이 제기되어지난 3월 범고래 공연과 번식의 단계적 중단을 선언해 뉴스 전파를 탔다. 이곳에는 ‘돌핀 코브’라는 먹이주기 체험 시설이 있는데, 돌고래를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늘 줄이 길게 선다. 2014년 이곳에 갔을 때 죽은 생선이 올려진 하얀 접시를 나눠주며 가이드가 신신당부한 말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자, 이렇게 세 단계의 동작을 해주시면 됩니다. 돌고래가 오면 턱을 한번 만져주고, 하얀 접시위의 생선을 집어 떨어뜨리고, 다시 머리를 쓰다듬어주세요. 그리고 절대로 하얀 접시를 난간 위로 들지 마세요. 돌고래 눈에 띄면 안 됩니다!”

돌고래는 이 하얀 접시를 절대로 보아선 안 된다. 하얀 접시는 인간이 원치 않는 돌고래의 행동을 ‘격발’하는 하나의 물체다. 하얀 접시를 난간 위로 들어 올리면, 돌고래는 점프해 생선이 담긴 하얀 접시를 낚아챈다. 이 과정에서 관람객이 돌고래에게 손목을 물리는 사고가 몇 번 발생했다. 

재밌는 점은 돌핀 코브의 돌고래들이 굳이 힘써 점프를 하지 않아도 관광객들 가까이 가면 생선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그들에겐 절박하지 않다. 그러나 돌고래들은 인간들이 주는 생선을 ‘수동적으로’ 받아먹지 않고,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방식으로도 배를 채우려고 한다. 동물지리학자 트레이시 워켄틴(Tracy Warkentin)은 이를 ‘동의의 균열’(cracks in consent)혹은 ‘동물의 저항’(animal resistance)로 해석했다. 




“박쥐가 되는 건 어떤 기분일까”

돌핀 코브의 돌고래들은 ‘어포던스’의 예를 잘 보여준다. 어포던스는 이론생물학자 제임스 깁슨(James Gibson)이 정리한 개념이다. 

텅빈 방에 축구공 하나가 덜렁 놓여 있다고 상상해보자. 방문을 열고 들어간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대부분은 공을 들고 두리번거릴 것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공을 통통 튀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공을 던져 ‘벽치기’를 할 것이다. 

‘어포던스’는 동물과 환경 사이에 작용하는 행동 유발성이다. 좁게는 행동을 유발하는 ‘격발 장치’로서의 본능을 우리가 가졌다는 뜻이지만, 넓게는 동물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해 반응하고 상호작용하는 잠재력을 말한다. 

여기서 환경이란 물질적인 모든 것이다. 지구가 만들어놓은 자연적인 모든 것들 - 바다, 하늘, 물, 불, 바람, 바위, 동식물, 인간 등 -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동물이 생산한 모든 것들 – 공, 책, 스마트폰, 배설물 등-로, 쉽게 말하자면 ‘나 이외의 모든 것’이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으로 우리는 환경을 만난다. 반응하고 학습하여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감각기관이 진화해 오늘에 이르렀다. 감각기관은 불균등한 진화는 다양한 종의 진화로 귀결됐다. 동물 사이의 차이로 이어졌다. 개는 냄새만 맡고 자신의 집으로 찾아올 수 있지만, 인간의 후각은 맛있는 음식 앞에서나 가동되는 사치스러운 감각이다. 후각이 발달한 개가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인간과 다르다. 당연히 개의 감각 세계와 그로부터 유래된 인지 체계는 인간과 천양지차다. 어떻게 다르냐고? 경험을 할 수 없으니 알 수 없다. 시각 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인간이 개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언젠가 철학자 토머스 나이젤이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박쥐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박쥐는 어두움 속에서 음파로 세계를 인식한다. 그의 정신작용을 인간이 어떻게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수족관과 어포던스

2013년 남방큰돌고래 제돌이를 시작으로 한국에서는 다섯 마리의 돌고래가 제주 앞바다로 돌아갔다. 이들 돌고래는 바다에서 불법포획돼 수족관에서 돌고래쇼를 벌이던 동물들이었다. 자, 그럼 ‘어폰던스’라는 개념을 붙잡은 채, 야생에서 갓 잡혀온 제돌이가 수족관에 적응하는 몇 날들을 상상해보자. 

제돌이의 감각기관은 야생바다에 맞게 진화되어 왔다. 주된 감각기관은 청각이다. 어두운 바다 밑에서 천리안은 필요없다. 그래서 돌고래는 귀로 본다. 음파를 쏜 뒤 되돌아오는 반송파를 이용해 물체의 모양, 크기, 거리, 질감을 파악한다. 메아리를 이용해 위치를 추적하는 기술, 즉 ‘반향정위’(echolocation)라는 것이다. 시각의 경우 인간과 거의 비슷한 시력을 가졌지만 보조적이다. 돌고래가 눈을 완전하게 쓸 때는 수면 위로 도약했다가 철퍽 하고 수면 아래로 잠수하는 찰나의 순간이다. 돌고래에게 바다 위의 세계는 그래서 전혀 다른 감각기관을 사용하는 외계인의 행성과 진배없다.  

지금 수족관에 잡혀온 남방큰돌고래 제돌이는 자기 생애에서 가장 좁은 공간에 처했다. 무한의 바다를 누비던 몸이 기껏해야 초등학교 교실 한 칸 정도의 크기에 갇혔다. 소독약 냄새가 가득하고 호루라기 소리가 귀를 찌른다. 바다에서 먹던 활어를 먹지 못한다. 인간이라는 외계종이 ‘죽은 생선’을 내던진다. 넓은 바다를 누빌 때 쓰던 근육의 사용을 멈춰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음파 기관이다. 음파를 쏘면 몇 미터 못 가서 콘크리트 벽에 튕겨 나온다. 돌고래 보호운동가인 릭 오배리가 말했듯 “수족관에 있는 돌고래는 마치 사방이 거울로 만들어진 집에 사는 것과 같다”. 반향정위를 위한 신체기관은 꺼두어야 한다. 새로운 환경에서 돌고래가 적응하려면 자신의 감각기관을 좁은 수족관 환경과 동조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야생의 몸’에서 ‘돌고래쇼의 몸’으로

돌고래 수족관은 기본적으로 이윤의 공간이다. 그러나 사회의 감시와 대중의 여론 때문에 동물복지에도 신경써야 한다. 수족관 조련사들은 돌고래가 제값을 지닐 수 있도록 건강하게 관리하면서 아울러 돈을 벌 수 있도록 쇼를 가르친다. 미셸 푸코가 말한 ‘생명정치’(biopolitics)가 수족관에서 행해진다. 인간 정치가 그러한 것처럼 개체 수준과 집단 수준에서 돌고래 몸을 관리하고 개조한다. 

나는 다수의 현장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돌고래 몸의 개조를 개념화해보았다. 수족관에 잡혀 온 야생 돌고래는 ‘야생의 몸’(wild body)에서 ‘수족관의 몸’(captive body)으로 다시 ‘돌고래쇼의 몸’(show body)으로 변환된다. 이 세 단계에서 ‘먹이 지배’(feed control)와 ‘긍정적 강화’(positive reinforcement)라는 두 가지 기술이 돌고래 몸에 투과된다. 둘은 인간이 수족관 돌고래를 다스리는 가장 기본적인 통치기술이다. 다음은 돌고래 몸의 개조 단계를 정리한 것이다. 

1단계__돌고래가 가장 먼저 배우는 게 ‘죽은 생선’(dead fish)을 먹는 것이다. 배고플 때까지 돌고래를 굶긴다. 남방큰돌고래는 대개 이주일 동안 굶으며 저항하다가, 살기위해 죽은 생선을 받아들인다.

2단계__돌고래는 좁은 수족관에 갇힌 충격에서 천천히 헤어나오기 시작한다. 좁은 공간에서 운동하는 법을 익히고 소나를 끄고 소리의 눈을 닫는다. 돌고래는 ‘수족관의 몸’이 된다. 

3단계__돌고래가 죽은 생선을 허락하면, 사육사들은 먹이 지배를 통해 묘기를 가르친다. 원칙적으로 돌고래는 연습이나 공연 중에만 보상용으로 생선을 먹을 수 있다. 수족관에서는 간단한 법칙이 통용된다. “배고플수록 많이 배운다”. ‘돌고래쇼의 몸’이 완성된다.



감금의 아상블라주

돌고래쇼가 벌어지는 수족관을 상상해보라. 공연장과 좁은 내실, 두 공간 사이를 가르는 철문, 시멘트 바닥, 인공 해수, 타깃, 호루라기, 훌라후프, 소독약 냄새, 어두침침한 조명, 웅웅거리는 소음, 죽은 생선을 던져주는 사육사, 왁자지껄한 관중 등이 수족관의 행위자들(actors)이다. 야생에서 잡혀온 돌고래는 감각기관으로 인지하면서 물체들과의 관계를 설정한다. 밥줄을 쥐고 있는 조련사와의 사회적 위계도 확인한다. 어포던스가 발현되어 새로운 몸이 된다. ‘수족관 돌고래’로서 새 삶을 출발한다. ‘돌고래쇼의 몸’이 되기까지 제돌이는 6개월이 걸렸다. 다른 남방큰돌고래도 그 정도의 기간을 거쳐 무대에 선다. 

그러나 수족관은 인간의 전일적인 지배가 이뤄지는 생명정치 공간은 아니다. 그보다는 수족관이라는 공간을 형성하는 물질적, 비물질적 요소로 구성된 네트워크 속에 돌고래가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감금의 아상블라주’(assemblage of captivity)에서는 끊임없이 인간과 돌고래의 ‘밀당’(negotiation)이 이뤄지고 때때로 ‘돌고래의 저항’이 발생한다. 토라진 돌고래가 특정 조련사를 거부하기도 하고, 리더 돌고래의 주도로 일부 묘기를 빠뜨려 쇼를 빨리 끝내기도 한다. 

제돌이는 2013년 다시 바다로 돌아갔다. 거기서 제돌이는 다른 행위자들과 다른 양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바닷물, 해류, 햇빛, 차가운 바람 그리고 최근에는 돌고래 관광을 하러 찾아오는 인간들과 요트들도 있다. 그러면, 두 공간-수족관과 야생-에서 돌고래와 인간이 맺는 관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둘을 비교해본다면 돌고래를 대상으로 한 생명정치의 작동 양식이 더 뚜렷하게 부상할 것이다. 






사진설명 = 서울대공원 수족관 내실에서 ‘스테이셔닝’을 하고 있는 제돌이. 스테이셔닝은 사람이 오면 물가로 다가오는 행동으로, 돌고래가 수족관에 들어와 맨 먼저 학습하는 동작이다.  사진=남종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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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5.12.07 14:43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2015년 공동학술대회 <현대사회에서의 치유와 행복>

 

 

영성과 치유

 

 

 

박병준 _ 국제인문학부 철학전공 교수/철학연구소장


 

인간 본성으로서의 ‘영성’

 

 오늘날‘영성’만큼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는 상징어도 없을 것이다. 영성은 어원적으로‘초월’과‘내재’를 포괄하는 중층적 의미를 지닌 매우 심오한 개념으로서 대체로 신화나 종교학의 상징적 전유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제 영성은 종교에 국한된 상징어로 이해되기보다는 철학적 통찰이 요구되는 인간 본성의 주요개념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심연’으로서의 인간은 본성적으로 끊임없이 자기규정을 넘어서는‘초월의 존재’이며, 이러한 심연과 초월성을 포섭하는 전인적 이해의 단초를 제공하는 핵심 개념이 바로‘영성’이다. 이러한 영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배타적인 신비 속으로 자기를 감추는 비현실적 개념이 아니라 자신과 관계하며, 또한 자기를 타자와 관계시키는 정신의 본질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성은 부정이 아닌 긍정, 절망이 아닌 희망, 불행이 아닌 행복에로 끊임없이 자기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철학상담에서 요구하는‘치유’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철학상담에서 상정하는 내담자의 자기치유의 가능성에 대한 이론적 근거와 정당성을 초월로서의 영성에서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치유와 연관된 영성, 즉‘영성 치유’는 인격의 성숙과 의식의 확장을 지향하며, 정서적 체험을 불러일으키는 데 관심을 두며, 대상과의 관계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현재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인‘인문 치유’와‘마음 치유’를 포섭하는 상위의 심화된 형태의 치유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영성은 정신적 존재인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근본 본성인 초월성에 근거하여 자연적이면서도 동시에 초자연적인 실재에 대한 갈망을 배재하지 않으면서 궁극적인 의미와 가치를 지향하고 추구하게 함으로써 통합적이며 전인적인 삶에로 나아가도록 돕는‘힘’으로 작용한다. 영성은 어원적으로 영혼과 관련하여 생명의 원리로서, 특히‘지성혼’과 관련하여 사물의 이치를 분별하는 로고스의 원리로서 이해되지만, 내용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정신의 초월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영성의 본질을‘생명’, ‘로고스’, ‘초월’의 원리로 규정하고, 이를 현대적 사유 안에서 이해 가능한 방법으로 모색해 보는 것이 이 글의 주된 핵심이다.

 

실존적‘물음’으로 향하는 감성, 이성, 그리고 ‘영성’


 초월로서의 영성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게 하는 지속적인 힘이며, 자신이 마주한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자 삶의 부정적인 경험들을 극복하게 함으로써 통합적이며 전인적인 삶에로 나아가도록 돕는 치유의 힘이다. 물음은 근본적으로 존재에로 향해 있으면서 우리를 절대적인 존재 의미에로 이끌어주며, ‘허무’가 아닌‘존재’에로, ‘존재 부정’이 아닌‘존재 긍정’에로, 그리고‘무의미’가 아닌‘의미’에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제 물음 속에 있는 인간의 영성 자체가 바로 인간에 대한 전인적 이해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감성, 이성 그리고 영성을‘물음’과 연결시켜 논의를 확장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영성의 차원에서 감성은 인간의 삶에 의미 있는 물음을 던지는 주요한 단초가 된다. 실존철학에서 보듯이 인간의 영성적 물음은 사실 감성적인 것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죽음과 허무, 무의미와 부조리, 불안과 두려움 등 실존적 상황에서 느끼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들은 단지 지양되고 제거되어야할 부정적 요소이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을 근본적인 영성적 물음에로 이끌어주는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한다. 우리는 고통과 불안이 가져오는 실존적 물음의 긍정적 의미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이 실제로 실존적 물음을 던지는 순간은 고통과 상처 그리고 좌절과 두려움에로 내몰린 한계 상황이라는 점에서 감성은 물음을 촉발하는 주요 계기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감성이 물음을 촉발하고는 있으나, 감성에서 촉발된 물음은 아직 그 의미가 분명하고 명확하게 주제화 되어있지 않다. 물음의 방향 설정은 감성 보다는 오히려 이성에 의해 주도되어야 할 필요성이 여기서 제기된다. 감정에 내몰린 마음의 상태를 이해하고 그것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감성 자체가 아닌 이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적 사유는 항상 말 혹은 언어를 매개로 물음의 수행 원리로서 작용하지만, 물음의 수행 원리로서의 이성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이성의 한계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비로소 이성을 넘어선 영성의 단계로 도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파스칼은『팡세』에서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고, 진리 인식의 길이 오로지 이성에만 있지 않고 인간의 영적 직감에 있다는 사실을 통찰한 바 있다. 인간의 삶에는 무조건적인 헌신과 희생, 봉헌과 사랑과 같은, 영성 없이 오로지 이성의 합리성만으로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는 숭고한 절대적 가치와 의미들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 절대적 의미를 갖고 다가오는 이런 숭고한 가치들에 대한 물음은 이성의 차원을 넘어선 영성적 물음을 통해서만 그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물음의 무한성이 제시하는 존재 의미 - 전인적 치유로서의 ‘영성’

 

 

 

 인간의 물음이 끊임없이 수행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물음의 초월적 성격을 규정해 주고 있으며, 그 초월성 안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성적인 것에로 정향되어 있다. 물음의 무한한 지평 안에서 인간은 절대적이고 궁극적이며 최종적인 것과 조우하게 되며, 바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영성인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영성은 중단 없는 물음과 함께 하는 ‘정신’에 있다. 인간의 정신의 초월성은 인간이 물음의 실행을 통해 유한한 존재로서 자기를 인식하는 가운데 그런 유한성을 넘어 묻게 되는 물음의 무한한 가능성에서 주어진다. 이성을 압도해 오는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인간은 불안하여 자주 절망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의 실존적 본래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이와 정면으로 대면해야만 한다. 이성을 압도해 오는 사태 앞에서 인간의 정신이 전체 의미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포착하는 그 순간 영성은 드러난다. 인간의 이런 영성은 무엇보다도 무한성과 절대성을 자기 안에 함축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물음 자체에서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인간은 정신의 끊임없는 물음 실행을 통해 내적으로 초월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것과 조우하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이며 무제약적인 절대적인 존재 지평에서 수행되는 물음으로부터 궁극적으로 존재 의미가 밝혀지며, 바로 여기서 인간의 삶에 활력과 생명을 불어넣는‘치유’를 가능케 하는‘존재 긍정’과‘존재 강화’로서의 존재 이해가 일어난다.


 여기서 인간의 정신의 근본 작용인 감성과 이성과 영성이 인간의 치유의 통합적인 내적 원리로 작용하는 철학상담의 방법론을 감성, 이성, 영성의 차원의 ‘3단계 영성 치유’ 방법으로서 ‘전인적 영성 치유’로 명명한다. 이 방법은 인간 본성의 세 원리, 즉 감성, 이성, 영성의 통합적 적용을 통한 인격의 전인적 치유를 목표로 한다. 이는 문제에 직면한 인간이 감성적 물음을 통해 문제의식을 촉발하고, 이를 분별하는 이성적 통찰의 물음 수행과 궁극적인 의미를 좇아 끊임없는 자기 초월을 통해 물음을 지속시키는 영성의 도움 없이는 온전한 치유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겪는 마음의 상처는 정서적 차원의 공감만으로 혹은 사물의 이치를 분별하고 인식하는 이성의 힘만으로 온전한 치유가 이루어질 수 없다. 나의 경험 일체는 그것이 내 영혼에 생채기를 내는 부정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엄연히 나의 일부요 내가 평생 감당해야할 몫이다. 이런 부정적인 경험들로부터 오는 마음의 깊은 상처들은 단순한 감정의 순화나 이성적 통찰의 대화만으로는 온전한 치유가 이루어지기 힘들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를 전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존재 긍정으로서의 영적인 힘이 요구된다.


전인적 영성 치유로의 초대 - 영성 치유의 3단계


 영성 치유의 첫 단계는 감성을 통한 영성적 물음의 촉발 단계로서 이 단계에서는 감정이 어디로 흐르는지 살펴서 왜 그런 감정에 처해 있는지 그 물음을 촉발하고, 또 감정의 순화를 거쳐 이성적 사유에로 나갈 수 있는 내적인 역량을 키우는 단계이다. 이는 상처받는 자가 자신의 감정에 함몰되기보다 감정으로부터 빠져나와 감정과 대면함으로써 자신의 내적 상태를 살필 수 있는 용기를 얻는 단계이다. 그래서 이 단계는 궁극적으로 의미 발견과 의미 부여에로 이끌어주는 실존적 상황과 직결된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유한한 자신의 한계 앞에서 감성이 자극하는 물음은 한계 상황에 맞선 지극히 실존적인 물음일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런 물음 자체가 내담자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 될 수도 있지만, 이를 통해 내담자는 자기 치유를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된다. 영성 치유의 두 번째 단계는 감성에 의해 촉발된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물음의 수행 단계이다. ‘이해’없는치유는 불가능하다. 인간이 뜻하지 않은 불행 앞에서 이를 이해하고자 부단히 몸부림치는 것은 불행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노력의 일환이다. 철학상담의 철학적 대화는 기본적으로 이런 이성적인 물음에 기초한다. 물론 이 단계가 감성을 전혀 배제한 채 이성만으로 이끌어진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철학상담의 진정한 철학적 대화는 감성과 이성이 상보적으로 작용하는‘공감적 대화’가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영성 치유의 세 번째 단계는 궁극적이며 최종적인 의미를 좇아 지속적으로 물음을 던지는 영성단계이다. 영성 치유의 본질은 인간의‘초월성’과 인간의 ‘근본 물음’의 수행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인간을 치유에로 이끄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 안에서 인간의 자기 긍정을 가능하게 하는 절대적인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신적 존재인 인간은 그 본성상 끊임없는 물음 실행 속에 있는‘묻는 존재’이다. 이 물음은 근본적으로‘존재 물음’을 향해 있다. 존재 물음에는 절대적인 존재 긍정을 통해 모든
부정을 넘어섬으로써 자기 안에 일체의 허무를 이기는 영성이 내재되어 있다. 철학상담의 방법으로서의‘전인적 영성 치유’의 핵심은 감성에서 촉발되고 이성에 의해 주도적으로 물어지는 문제 제기와 문제의식을 존재 긍정의 영성적 물음에로 포섭하는데 있다. 바로 이를 통해 내담자는 자신의 삶의 궁극적 의미에 도달하게 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문제를 의미 전체 안에서 발견할 때 자기 치유적인 이해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철학상담의 모든 철학적 대화가 기본적으로 지향해야할 핵심 요소이자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내적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영성은 종교를 떠나서도 이해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삶의 요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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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5.12.07 14:22

아트&테크놀로지 전공 < Imagination Seminar >

 

가상인간을 중심으로 한 인간-컴퓨터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

 

강신화 _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Institute for Creative Technologies 연구원


 

가상인간, 무엇인가?


 테크놀로지의 발달, 특히 컴퓨터 인공지능의 발달은 다양한 분야의 인간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컴퓨터 인공지능을 이용해 연구되고 개발되는 가상인간은 교육, 훈련, 상담, 그리고 마케팅 도메인까지 그 영역을 확대하여 적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가상인간은 컴퓨터를 통해 구현되는 가상세계에 존재하며, 대부분이 실제인간과 유사한 크기와 모습을 지니고, 사고 및 감정을 표현하며, 언어 및 행동을 구사할 수 있는 개념으로 연구되고 개발된다. 이러한 가상인간은 실제인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그 적용성이 평가된다. 가상인간과 관련된 연구 및 개발은 인공지능, 자연언어처리, 컴퓨터그래픽스, 혼합현실 등의 연구 분야가 총동원되고, 최종적으로 실제인간과의 원활한 상호작용을 평가함으로써 일단락 된다고 할 수 있겠다.

 

 가상인간 관련 연구 분야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인공지능 분야에서는 가상인간의 사고 및 분석을 가능하게하고, 자연언어처리 분야는 가상인간의 언어 인지, 분석, 처리를 통한 구현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컴퓨터 그래픽은 가상인간의 모습과 행동을 구현한다. 혼합현실 분야는, 이렇게 생성된 가상인간이 실제인간과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그 기반환경을 마련하여 가상인간의 적용성 평가를 가능케 한다.

  가상인간은 일반적으로 에이전트(agent)와 아바타(avatar)의 두 종류로 구분된다. 두 종류 모두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작동되기는 하나, 에이전트는 컴퓨터 자체가 컨트롤하는 것이고 아바타는 실제인간이 컴퓨터 프로그램화 된 가상인간을 자신을 대표하는 객체로서 컨트롤하여 상대방과 상호작용하는데 이용한다. 아바타는 할리우드의 영화 <아바타>에서 실제인간과 한 몸이 되어 생각하고 표현하며 행동하는 3D 컴퓨터그래픽 캐릭터로 등장했던 가상인간들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쉽게 갈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예로는, 온라인 가상세계의 대명사격인 세컨드라이프1)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바로 아바타이다.

 

또 하나의 실존(인간), 가상인간


 여러 연구결과들을 통해, 실제인간이 상호작용하고 있는 가상인간인 -아바타(다른 실제인간과 상호작용하는데 가상인간을 중간 매개체로 이용하는 경우)와 에이전트(컴퓨터 자체와 상호작용하는 경우)- 를 비교하여, 어떤 경우에 실세계에서 실제인간들 관계 및 상호작용 시에 나타나는 사회적 영향 및 효과 등이 그대로 또는 다른 방향으로 반영되는 지 보고되어지고 있으나, 결론이 일치하고 있지는 않다. 기존의 여러 연구는 실제인간이 아바타와 상호작용하는 경우에 실제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에 해당되는 사회적 영향 및 효과를 나타낸다고 보고해 왔으나, 최근에는 에이전트와의 상호작용에서도 에이전트의 행동이 실제인간이 자연스럽다고 느낄 정도로 구현이 된다면 아바타와의 상호작용 결과와 같은 경향을 나타낸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러한 보고 결과는 컴퓨터 자체인 에이전트도 실제인간 상호작용에서 요구되는 사회심리학적 요소를 잘 이용하면, 실제인간이 컴퓨터 자체를 실제인간처럼 대한다는 ‘CASA’(Computer As Social Actors) 패러다임에 의거한 결론이다.

 

 실제인간과 같은 또는 실제인간을 능가하는 가상인간개발이란 실제인간을 창조해낸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때, 관련 테크놀로지에 아직 많은 한계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한계에 부딪힐 때 현명한 접근법이란 CASA 패러다임에 입각한 사회심리학적 요소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실제인간은 가상인간이 에이전트이든 아바타이든 컴퓨터 프로그램화 된 캐릭터라는 사실을 먼저 감지하고 가상인간과 상호작용을 시작한다. 그런 이유로 실제인간은 가상인간과의 상호작용에서 다른 실제인간과 상호작용할 때 얻을 수 있는 점들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그 상호작용에 임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상황이 가정된 인간 (실제인간) -컴퓨터 (가상인간) 간의 대화에서 가상인간이 실제인간의 대화리듬에 맞춰 가장 적절한 시기에 고개만 가볍게 끄덕여준다거나 웃어준다거나 하는 등의 단순한 피드백을 제공하는 것은, 실제인간 사이에서 행해지는 사회적 활동을 효과적으로 하게 하는 방식 그대로를 반영하는 것이다.

 

 다시 언급하지만 가상인간 개발과 관련한 테크놀로지의 한계로 인해 가상인간을 형성하는 여러 요소 간에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다. 즉, 컴퓨터그래픽 자체의 기술은 최근 몇 년 사이에 급격한 발전을 이루어 가상인간의 모습을 실제인간과 거의 유사하게 구현해낼 수 있다. 그러나 가상인간의 사고, 인지 및 분석 능력 등과 불어 자연언어처리 등의 기술이 아직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으므로 실제인간과 거의 유사한 모습을 지닌 가상인간의 사고나 말, 행동 등이 실제인간이 보여줄 수 는 정도까지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렇게 불균형으로 빚어진 가상인간을 실제인간이 기이하게 느끼게 되는 현상을 ‘Uncanny Valley’효과라고 일컫는다. 이런 현상의 초래를 방지하기 위하여 CASA 패러다임에 입각한 효과적인 사회 심리적 요소들을 가상인간 연구 및 개발 시에 활용하는 것이 더욱 고무되어야 한다고 본다.

 

실제인간과 유사한 크기와 모습을 지니는 가상인간은 사고 및 감정을 표현하며, 언어 및 행동을 구사할 수 있는 개념으로 연구되고 있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편집자주)

 

무한한 인내의 심리 상담사, 가상인간


상기에 언급한 가상인간의 활용사례 중 특히 심리 상담과 관련한 가상인간의 연구 및 개발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는 가상인간 관련 테크놀로지의 한계를 사회심리학적 요소를 적절히 적용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분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다른 분야와 달리 심리 상담에서는 우선 상담사가 상담고객의 자기고백을 잘 들어주는 것이 임무이다. 상담사의 역할이 단순하게 상담고객의 자기고백 경청에서부터 고난이도의 상담을 하는 것까지 여러 단계로 분류될 수가 있겠는데 가상인간이 상담사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은 상담고객의 어떤 자기고백이던 간에 무한한 인내심을 갖고 경청해줄 수 있다는 점과 상담사의 선입견이나 주관적인 가치관에 의거해 상담고객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장점들은 상담에서 가장 중요한 상담고객의 익명성을 보장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고 볼 수 있겠다.


 현재의 가상인간 관련 테크놀로지가 지니는 한계점들을 고려해볼 때 가상인간의 상담사로서의 역할은 아직까지 상담고객의 자기고백 경청과 더불어 상담고객 심리상태 증상에 의거한 관련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는 웹사이트를 추천하는 것에 그친다. 하지만 실제인간 상담사와의 고난이도 상담을 권유하는 정도의 수준에서 그 활용 효과를 극대화 시킬 수 있겠다. 가상인간 상담사는 상담고객의 자기고백에 응대하는 간단한 감정표현, 언어 및 행동을 통한 피드백 등을 구현함으로써 이와 같은 시나리오를 가능케 하고 있다.


삶의 동반자로서의 가상 인간 - 더 넓은 영역에서의 가상인간


 상담형 가상인간 시나리오를 통해 실제인간 생활에서의 가상인간의 활용을 살펴본 바와 같이 가상인간은 실제인간 생활에서 유익하게 활용될 수 있는 가치를 보유한다. 실제인간의 생활을 이롭게 하는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데스크톱 컴퓨터에서 스마트폰으로 그 영역이 확장되고 있다. 가상인간의 활용 매체 또한 데스크톱 컴퓨터에서 스마트폰으로 바뀌는 경향을 무시할 수 없다. 매체 고유의 성격이 다르듯이 각 매체에 제공되는 가상인간 어플리케이션 또한 매체의 특성을 잘 살려 개발되어야 한다. 특히 스마트폰의 장소와 시간에 제한 없는 무한한 상호작용 매체로서의 가능성을 고려해볼 때 스마트폰상의 가상인간은 실제인간의 상담사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인생에 있어 좋은 친구 같은 삶의 동반자로서의 역할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런 가상인간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선 실제인간 만큼 완벽할 수는 없지만 가상인간이 실제인간보다 월등할 수 있는 고유의 특성을 잘 살리는 연구 및 개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본 글의 결론을 맺는다.


1) http://secondlif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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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5.10.11 21:38




서강대학원신문(이하 서강)_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지난 학기 대학원 총학생회 정책국장을 거쳐 이번 29대 총학생회장에 출마하게 된 계기와 당선 소감이 궁금합니다.

김형욱(이하 김)_ 일단은 아직도 대학원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는 사실이 얼떨떨하고요. 제가 올해 나이가 30살인데, 30살이 되니까 제가 존경하는 독립 운동가이신 우당 이회영 선생님이라고 계시거든요. EBS에서 방영된 우당 이회영 선생님 관련 영상을 보고 감명을 받았거든요.영상 장면에서 제 뇌리를 스친 것이‘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였어요. 일제 강점기 당시 이회영 선생님이 독립운동을 하시려고 많은 재산을 처분을 하시고, 만주로 건너 가셔서 신흥 무관학교를 설립을 하셨거든요. 그 결심을 하시게 된 게, 30살 쯤 되신 것 같더라고요. 선생님처럼 저도 개인적인 뭔가를 해보고 싶어서, 제 생활 반경 내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보니 대학원 내에 총학생회라는 조직이 있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본인을 희생해야하는 자리이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나보다는 다른 대학원 원우들을 위해 뭔가 도움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출마하게 되었습니다.


총학의 대표성 문제

서강_ 이번 대학원 총학생회 선거 투표율이 27대, 28대와 마찬가지로 10%대에 그쳤습니다. 누군가는 현저하게 낮은 총 투표율로 인해 총학생회장으로서의 대표성에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투표 일주일 전까지 대부분의 교내 공간에서 홍보 포스터, 브로슈어 등을 찾아보기가 힘들었고, 공청회 등과 관련한 정보를 접하기도 쉽지 않았는데요. 이에 대한 생각과 홍보 이외에도 선거 일정 전반적으로 아쉬웠던 점은 무엇인가요?

김_ 일단은 투표율이 낮았던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저도 굉장히 동감하는 부분입니다. 이번에 투표율을 보니까 13.04%가 나왔더라고요. 지난 학기 재학생이 1270여명 정도였거든요. 다른 학교 이야기를 들어보면, 고려대학교의 경우에도 저랑 비슷하게 2학기부터 임기를시작하는데, 거기도 9-10%정도밖에 안 나왔더라고요. 물론 제가 모든 학교의 투표율을 조사해본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현상으로 나타는 것은 그 정도의 수치인 것 같아요. 그렇다면 투표율이 왜 이 정도일까 하고 저 또한 의문을 많이 가졌어요. 저희가 선거 과정에서 (말씀하셨듯이) 공청회를 한다고 팸플릿에는 적어놨는데, 아무래도 이런 홍보 방안이 사실 내부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도 있고, 전반적으로 선거 시스템에서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인 거 같아요. 선거 포스터 같은 것도 혼자 학교를 돌면서 붙였고, 브로슈어 같은 것도 선거인단 서명을 받으러 다닐 때 그때 나눠드린 거 말고는 뭐 딱히 그 후 홍보기회가 없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저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건설적인 토론이 오고갈 수 있도록 공청회에 대한 홍보나 선거 과정 홍보를 좀 더 활성화시킬 방법을 마련해 보려고 합니다.


서강_ 27대, 28대를 거쳐 이번에 당선된 29대 총학생회장도 같은 특정 학과 출신이고 구성된 총학 집행부 절반도 마찬가지입니다. 서강대학원을 대표하는 총학이라기보다는 서강대학원 특정학과 대표회 같다는 느낌입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_ 이 점에 대해서는 저도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관계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최근 4-5년 동안에 신문방송학과 출신의 사람들이 총학생회장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그것이 직접 선거라는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암암리에 선출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싶어요. 전임 28대 총학생회 같은 경우를 살펴보자면 원칙상의 임기 1년을 마친 후에도 다음 총학생회장에 출마한 후보자가 아무도 없어서, 학칙에 따라 한 학기 동안 비대위 체제를 꾸렸던 부분이 있었거든요. 총학생회장에 출마하고자 하는 후보자들이 계속해서 나타나지 않는현실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선거에 대한 홍보는 충분히 더 이루어져야만 하고요. 이 과정에서 이전 학생회에서 다음 학생회로 넘어갈 때 구성원들이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 힘든 상황인 것 같습니다. 저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신문방송학과 출신이 계속해서 학생회장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번 집행부 구성에 있어서 최대한 다양한 학과를 전공하는 사람들로 학생회를 꾸리고자 노력했고, 실제로 그렇게 구성했습니다. 저도 이 점에 대해서는 문제로 충분히 받아들이고 해결하고자 고민하고 있습니다.


학생회 사업, 이대로 괜찮은가

서강_ 선거공약집을 보니 새로이 구상 중인 사업보다는 기존 사업을 수행하는 데 치중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전 총학이 진행한 학생사업과 달리 새롭게 구상 중인 학생회 사업이 있는지 궁금하고, 원우들이 알면 유용한 학생회 사업 세 가지를 꼽는다면요?

김_ 일단 새롭게 구상하고 있는 학생회 사업은 먼저‘서강대 대학원생 권리장전’을 학교 내부적으로 제정하려고 합니다. 법적인 장치라기보다는 선언문 성격이 강하죠. 작년에 <대통령 직속 청년 위원회>에서 대학원생 권리장전을 만들었어요. 그 과정에서 본교 대학원 총학생회가 참여를 했었고 서울 소재의 몇몇 학교들이 참여를 했습니다. 그것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별로 사정이 다르고 표방하는 가치들이 달라 의견 조율이 쉽지 않았거든요. 학교마다 다른 특성들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점들을 반영해서 서강대만의 대학원생 권리 장전을 제정하려고 해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어떤 강제성이나 규율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선언적인 성격이 강해요. 예를 들어 카이스트의 경우에는 물론 이공계 특성화 대학이기 때문에 서강대와는 상황이 다를 수도 있지만, 권리장전 선포식을 진행한 후 그 선포문을 각 연구 교수실이나 연구실 앞에 붙여놨다고 해요. 저희 또한 학교를 이루는 여러 주체들 간의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반영하여 서강대만의 권리장전을 제정하고자 합니다. 두 번째로 사업에 있어서 매 학기마다 저희가 연구 환경 개선 물품을 원우들에게 나누어 드리고 있거든요. 연구 환경 개선 물품을 지급하는 사업 같은 경우 모든 재학생 원우분들에게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번거로우시더라도 과에 연락을 하셔서 꼭 받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로 학술 특강 사업 경우에는, 타 기관에서 수강할 경우 비싸게 수강할 수밖에 없는‘SPSS 특강’이나‘영어논문 작성법’도 저렴하게 수강하실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저희가‘제2보건소 사업’이라고 해서 비상약품 같은 것을 간단하게 구비해놓고 있어요. 소화제랑 여성용품 등을 구비해놓고 있으니 편리하게 이용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복지국에서 문화 지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거든요. 지난 학기에는 뮤지컬 <시카고> 표를 저렴하게 구매를 해서 원우분들께 나누어드렸습니다. 물론 모든 원우분들이 혜택을 보실 순 없겠지만, 적극적으로 참여를 해주시면 저희가 최대한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서강_ 서강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외국인 유학생의 비율이 타 대학에 비해 높은 편입니다. 구체적인 대학원 내 외국인 유학생의 실정은 어떠한지, 총학과 외국인 유학생들과의 소통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업을 기획하는데 있어서 국적과 문화, 언어가 다양한 외국인 유학생들을 모두 포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김_ 지난 학기 재학생 기준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외국인 유학생이 전체의 8-9%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기존에 외국인 유학생분들 대상으로 한 사업은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 외국인 문화 탐방, 외국 유학생 간담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느낀 바로는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은 총학생회에서 관행적으로 진행해 왔는데, 지난 학기에 해보니까 사실상 인문사회 계열은 입학 조건 자체가 한국어 능력을 보는 조건이 있어서 인문사회계열의 유학생분들은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한 분들이 많으시더라고요. 하지만 이공계열의 경우에는 한국어를 전혀 못 하시거나, 영어로만 소통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희가 학내에 한국어 교육원과 연계를 해서 체계적인 한국어 교육 커리큘럼을 제공해드리고 싶어서 그것을 진행하려고 해요. 그리고 외국인 문화 탐방 같은 경우에도 유학생분들에게 한국 전통 문화를 체험하는 장을 제공하고 있는데, 단발성에 그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자 합니다.


학내를 넘어 사회 속으로

서강_ 총학생회 공약집에 제시된 정책 부분에서 전국 대학원 총학생회 협의회(이하 전원협) 활동에 대한 부분이 있습니다. 전원협과 관련하여 본지도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다루어 왔습니다. 서강대가 전원협을 통해 이뤘던 연대와 앞으로 전원협 활동 계획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김_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지난해에 대통령 직속 청년 위원회에서 대학원생 권리장전을 제정할 때 본교 대학원총학생회가 참여를 했었고, 작년쯤에는 등록금이 책정되던 시기에 대학원생들에게 과하게 부과되는 등록금을 줄이기 위해 전 대학원총학생회장이 타대 총학생회장들과 함께 시위 등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등록금 문제 같은 경우에는 전원협을 통해 정보 교류 차원에서 많은 이야기를 공유할 예정입니다. 지난 8월 1일에 정기 회의를 서강대에서 개최했었는데 그때 나온 이야기가 너무 서울 소재, 수도권 소재 대학원 학생들 위주로 모이니까 지방에있는 대학원 학생들은 전원협의 존재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제안서 같은 것을 통해 지방 소재 대학원에도 전원협을 알리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그리고 사실 전원협 자체도 아직은 공고화가 덜 된 측면이 없지 않아 있어요. 왜냐하면 대학원총학생회 구성원들이 주기적으로 바뀌다보니 그 명맥이 시간적으로 끊기기 때문이에요. 저는 전원협이라는 단체가 대학원 사회에 대한 정보 교류의 장으로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여기며, 연대를 통해 강남대 인분사건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공동 대응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일단은 전원협 내에서 회의의 정기화(정례화)를 통해 어느 정도 단체를 공고화 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학생들과의 한걸음 더 나아간 소통을 위하여

서강_ 학생회 사업에 대한 홍보나 공지 사항 전달이 매번 학생들에게 메일이나 문자 발송과 같이 일방적인 통보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요. 이와 같은 수직적 소통 방식이 대학원 총학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데 어려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학원생들의 학내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방식과 학생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은 무엇이 있습니까?

김_ 저희가 직접 발로 뛰는 게, 직접 연구실 찾아가서 원우분들과 소통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사실 총학생회가 당연히 해야 하는 부분인 것 같아요. 책상에만 앉아 있으면 안 되는 거지요. 그것이 진정성 있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사실 대학원 총학생회 홈페이지가 있어요. 고려대 같은 경우에는 대학원총학생회 홈페이지 관리가 굉장히 잘 되어있거든요. 그리고 이번 주에 대학원학생회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알려주는 <원총 소식>이라는 것도 따로 개설되어 있고요. 그런데 서강대학원 총학생회 홈페이지 같은 경우에는 업데이트도 안 되고 관리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을 개선하고 보완해서 홈페이지를 통해서 다양한 의견을 받고, 총학생회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홈페이지 혹은 페이스북을 통해서 알리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아요. 그래도 저희가 직접 찾아가서 그때그때 상시적으로 물어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아요. 어차피 연구실에 많이들 계시니까요. 직접 찾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일단은 총학생회와 원우분들 사이의 소통 채널이 다양해야 하는데, 중앙대 같은 경우에는 계열별로 대표를 두어서 의사소통하고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채널을 만들어놨더라고요. 그런데 대학원 과대표자는 학부 과대표와는 달리 대부분 직접 선거로 선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표성을 띤다고 보기가 애매할 수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고민해야할 것 같아요. 또 특히나 자연과학계열, 이공계열 같은 경우에는 랩실 별로 대학원 생활이 진행되기 때문에 학생회에서 진행되는 사업이나 사안에 대해서 쉽게 접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만약 그러하다면 저희가 직접 찾아가서 학생회와 진행 중인 사업을 소개하고, 이공계열 원우분들에게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볼 예정입니다.


서강_ 학부생뿐만 아니라 대학원생의 학생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지속적으로 지적되는 문제점입니다. 매번 선거 때 기록되는 낮은 투표율이나 학생회 사업의 참여 저조가 이를 나타내는 예시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로 인한 총학생회의 고충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학생 정치에 대한 대학원생들의 무관심을 해결할 방안은 어떤 게 있을까요?

김_ 저는 대학원생들이 학생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 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전의 총학생회를 하셨던 분들도 열심히 하셨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대표자 회의를 학기마다 한 번만 열기도 했고, 기존 사업을 되풀이하기도 했거든요. 결국 저는 총학생회가 더 노력을 한다면 원우분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고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실거라고 생각합니다. 관심을 가져주실 때까지 총학생회가 더 열심히 해야겠죠. 당연히 학생회가 원우분들을 위해서 봉사를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 주체인 저희가 그만큼 더 노력을 해야겠죠. 그러면 자연스럽게 저는 많은 원우분들이 학생회의 문을 좀 더 두드리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서강_ 마지막으로 29대 총학생회장의 앞으로의 포부를 듣고 싶습니다.

김_ 일단은 제가 일반대학원 원우분들을 대표하는 자리잖아요. 그런 자리인 만큼 원우분들의 목소리에 최대한 귀를 기울이면서 책임감 있고 성실하고, 투명하게 학생회를 관리할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겠고요. 원우분들에게 헌신하겠다는 마음가 짐으로 학생회를 잘 이끌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총학생회가 많이 부족하고 어설픈 부분도 많아요. 사실 저희도 학생이니까요. 그래도‘쟤네가 어느 정도 노력을 하고 있구나’그런 부분을 원우분들이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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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5.10.11 20:56

초민감성 분자 검출을 위한 초미세간극 금속센서 개발

 

신유나 _ 화공생명공학과 석사

 

지난 8월 게재된 논문에서 복잡한 공정 없이 1 나노미터 크기의 초미세간극 금속센서를 제작하는 기술을발표했다. 이 기술로 질병진단의 정확도를 획기적으로 높이고 환경오염물질 및 독성물질의 조기경보에 응용 가능한 1 나노미터 크기의 금속 초미세간극을 대면적으로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초미세간극 금속센서 개발의 배경
초미세간극 금속센서는 금속 나노구조체 사이에 형성된 미세한 간극 구조를 이용하여 다양한 분자들의 광학신호를 검출해내는 나노소재기반의 센서이다. 금이나 은과 같은 금속 나노입자 간의 거리가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1만큼 줄어들어 초미세간극이 형성되면
주변의 전자기장을 강하게 증폭시킬 수 있게 되며, 더 낮은 농도의 물질을 더 빠르게 검출할 수 있어 다양한 센서로 응용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금속 간 초미세간극은 반도체 공정과 같은 마이크로/나노공정에서도 가장 만들기 힘든 구조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초미세간극을 제작하는 방법은 정교한 식각공정을 포함하는 복잡한 마이크로/나노 공정이 주를 이루어왔고, 고가의 나노공정장비 사용과 복잡한 공정으로 인해 비효율적이며 그 응용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실험실 수준을 벗어나 다양한 분야로의 응용을 위해서는 복잡한 공정과 숙련된 기술자 없이 대면적의 초미세간극을 제작할 수 있는 방법의 개발이 요구되는 실정이었다. 한편 금속 나노입자들의 자가배열을 통해 초미세
간극을 형성시킬 수 있으나, 이러한 방법은 간극의 밀도나 크기를 제어할 수 없어 재현성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금속 나노입자의 서로 뭉치는 특성 때문에 아예 간극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점도 있었다. 따라서 기존의 초미세간극 제작 방식들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초미세간극 제작방법에 관한 연구가 요구되어왔다.


초미세간극 제작 방법 및 성과

금속 나노입자에 껍질을 씌우고 껍질만을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손쉬운 방법을 통해 기존의 복잡한 마이크로/나노 기술이나 고도의 기술력에 의존하지 않는 대면적의 초미세간극 금속 구조체를 제작했다. 이 기술은 <그림 1a>에서 보는 바와 같이 1) 금속 나노입자에 실리카 껍질을 씌우고 단일층으로 밀집된 대면적의 구조를 형성시키는 단계, 2) 나노 입자들의 단일층을 다양한 고체 기판으로 옮긴 후 화학적 에칭으로 나노입자들의 껍질부분만을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단계를 포함한다. 실리카 껍질을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금 코어 나노입자 간의 인력에 의한 상호작용을 통해 금속 입자들이 서로 가까워지게 되면서 균일한 1나노미터 크기의 초미세간극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제작된 초미세간극에 대한 광학특성을 알아보기 위해서 전자기장 수치해석(electromagnetic field simulation)을 진행하였고, 수치해석 결과를 통해 실리카 껍질을 제거하고 1 나노미터 크기의 초미세간극이 형성되면 전자기장 강화효과가 매우 증폭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아가 <그림 1b>에서 나타낸 것과 같이 나노 입자들의 껍질을 제거한 후 제작된 초미세간극을 이용한 광학기반의 분자검출을 수행하여 검출 분자에 대한 광학신호의 검출감도가 향상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간극에 접근하는 다양한 분자들의 신호를 효과적으로 검출함으로써 센서기반기술로서 고감도 분자 검출에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림1. 초미세간극 금속센서의 제조 및 초민감성 분자 검출 시스템 모식도><그림1. 초미세간극 금속센서의 제조 및 초민감성 분자 검출 시스템 모식도>

 

 

활용 방안 및 기대효과
 제작된 초미세간극은 강화된 전자기장을 발생시켜 검출 분자의 광학 신호를 매우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검출 분자들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빈 공간을 가진 형태로 극미량의 분자를 효과적으로 검출할 수 있다. 따라서 소량의 생체분자에 대한 감지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질병조기진단의 정확성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인체에 유해한 환경오염물질 및 독성물질의 검출에 매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차세대 질병진단시스템, 환경오염물질 실시간 모니터링 등과 같은 다양한 나노바이오센서 기술에 응용될 수 있어 바이오센서 분야의 실용화를 한층 앞당길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더욱이 해당 기술은 그동안 고도의 전문성과 기술력의 요구로 인하여 제작과 활용이 매우 제한적이었던 초미세간극의 개발과 응용에 도움을 주어 다양한 분야로의 응용과 실용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바이오센서산업 측면에서 볼 때, 제작된 초미세간극 센서의 제작공정에 대한 연구, 그리고 정밀제작을 위한 시스템 연구와 실제 센서로의 접목을 통해 실용화 가능성을 확인하는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현재의 센싱 기술을 향상시킬 수 있는 초민감성 나노센서의 실용화와 산업화가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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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5.06.22 15:34


백제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 명문의 재검토


이천우_사학과 박사과정


학문 간의 소통 필요

본 논문은 2014년 2학기 대학원 수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성하게 되었다. ‘사학’이라 한다면 넓게는 ‘역사 전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만,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문헌학, 고고학, 미술사학 등 다양한 방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 나 역시 사학, 특히 한국 고대사를 전공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문헌학’에 편중되어 공부를 해왔었다. 때문에 고고학과 미술 사학 등 인접 학문에 대한 지식은 전무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나 개인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현 사학계 내부가 가지고 있는 고민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다보니 소수의 연계 연구가 시도되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각각의 분야, 즉 문헌학은 문헌학, 고고학은 고고학, 미술사학은 미술사학대로 나름의 연구 방법론을 구축하여 학문 간의 교류가 점점 소원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본 논문을 준비하면서 이러한 교류의 필요성을 절감했으며, 향후 문헌학뿐만 아니라 인접 학문과의 소통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백제 왕흥사지 발굴 내용

본 논문의 주인공인 백제 왕흥사는 이러한 학문 간 소통의 필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왕흥사는 사비시기의 사찰로,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 의하면 法王 2년(600) 봄 정월에 창건하여 무왕 35년(634)에 완성되기까지 약 35년에 걸쳐 건립된 사찰이라고 한다. 건립 목적은 ‘王興’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왕권 강화 목적으로 건립되었을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왕흥사에 관한 초기 연구 성과에서는 사료가 워낙 소략하여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 성과는 기록상에서만 존재했던 왕흥사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었다. 특히 2007년 3월 28일에 시작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왕흥사지 제8차 발굴조사 결과 목탑지에서 사리기가 출토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사리공 내부에서 출토된 사리기는 청동사리합과 은제사리호, 그리고 금제사리병의 3중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청동사리합에 5자 6행 29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왕흥사의 창건과 관련된 것으로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 명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丁酉年 2월 15일 백제왕 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刹을 세웠다. 본래 사리가 2매였는데 봉안할 때 신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曷)[각주:1]’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







백제왕 昌은 威德王의 이름으로, A에 의하면 죽은 왕자를 위해 刹을 세웠다고 한다. 이는  법왕 2년(600)에 창건하기 시작하여 무왕 35년(634)에 완성되었다는 사서의 기록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위덕왕대의 정유년은 위덕왕 재위 24년(577)에 해당하는 시기로 창건하기 시작한 법왕대보다 23년이나 앞선 시기였다. 이를 토대로 왕흥사의 건립 연대에 관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발표함에 따라, 두 사서 기록에 대한 신빙성이 떨어지게 되었다.

물론 두 사서의 기록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문헌사적 시도가 이루어진 반면, 고고학계에서는 문헌 기록을 단순히 기록의 오류로 판단하여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왕흥사에 대한 문헌사적 연구와 고고학적 연구는 서로 엇박자를 내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왕흥사에 대한 문헌사적 연구가 한계에 봉착하여 더 이상의 연구 진전이 없는 반면, 고고학적 성과는 꾸준히 축적되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연구 성과 역시 ‘백제왕 昌’ 재위 24년(577)에 왕흥사가 건립되었음을 전제로 하면서 모든 연구 성과의 결과들이 위덕왕대로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능사로 대표되는 6세기 중반에서 미륵사지와 제석사지로 대표되는 7세기 전반으로의 과도기적 양상의 형태를 왕흥사지로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명문에 대한 재검토와 해석 시도


본 논문에서는 기존 연구의 결과론적 해석을 배제한 뒤 고고학적 성과와 사리기 명문 내용을 재검토 하고자 하였다. 새로운 자료의 발견은 한국 고대사의 이해를 심화시켜주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검토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문헌 기록과의 연결성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본고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사리기 명문에 대한 재검토와 그에 따른 해석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제8차 왕흥사지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청동사리합 명문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보다 23년이나 먼저 왕흥사가 축조되었음을 밝혀주는 근거가 되어왔다. 특히 명문의 ‘백제왕 昌(=曷)’은 왕흥사의 건립 시기를 위덕왕대인 577년으로 보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러나 그러나 왕흥사 목탑지 심초부에서 발견되는 특성은 미륵사지와 제석사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7세기의 양식에 가까우며, 명문 내용 역시 달리 해석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능성을 모두 차단한 채 건립 주체를 ‘위덕왕’이라는 점에만 초점이 맞추어졌다. 본고에서는 왕흥사 목탑지가 갖는 특성이 무왕대, 즉 7세기 전반의 양식과 유사하다는 점과 함께 명문의 ‘昌(=曷)’字를 ‘昌’이 아닌 ‘曷’字로 볼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명문의 내용을 새롭게 해석하였고, 사리합은 아들을 잃은 무왕을 위로하기 위해 당 태종이 하사한 물품이었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물론 본고는 그간 명문 판독과 내용에 대한 문제제기가 학계에서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 시론적 형태의 문제제기가 될 수 있겠지만, 고고학적인 연구 성과와 문헌사적인 연구 성과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昌(=曷)’는 ‘昌’와 ‘曷’, 두 문자로 판독 가능하다는 연구 결과를 반영하기 위해 동시 표기함(편집자 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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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5.06.22 15:27

미국의 히스패닉과 백인의 집단간, 세대별 이념성향 분석




김성모_정치외교학과 석사과정


인구 증가와 정치적 영향력의 상관관계


‘히스패닉과 백인의 집단간, 세대별 이념성향 분석‘은 미국에서 실시한 설문지 데이터를 통해 통계로 분석한 논문의 주제이다. 히스패닉과 백인을 주제로 글을 쓰게 된 배경은 미국정치 수업을 들으며 미국 내 히스패닉의 영향력이 인구수의 비약적인 증가에 결정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에 대한 반문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미국 내 거주중인 한국인도 인구수만 증가되면 영향력이 증가될 수 있을까?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는 답변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경우 인구수는 매우 작지만 그 영향력은 미국 내 지배적인 것을 반례로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주제를 경험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하버드에서 조사한 2010-2012년의 히스패닉과 백인에 대한 여론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히스패닉의 영향력 증가에 대한 분석을 실시하였다.

분석을 위한 연구 가설은 ‘백인이라는 주류집단에 대해 히스패닉은 비 주류집단으로서 적극적으로 동화하려는 노력이 있을 것이다.’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미국 내 특정 정치이슈에 대한 히스패닉이 나타내는 이념성향을 집단별, 세대별로 분석하였다. 예를 들어 히스패닉은 미국의 대표적인 민주당 지지 세력인데 반해 백인은 민주당과 공화당을 지지하고 있는데, 만약 특정 정치이슈에 대해 히스패닉 중 공화당을 지지하는 세대집단 또는 특정집단이 존재한다면 이들과 백인의 공통점 또는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분석해내는 것이 한 예일 수 있을 것이다. 지면 관계상 이하의 내용은 서유강론에서 논하는 것으로 매듭짓고자 한다.


논문에 도움이 되는 팁!


대학원에서 2년 6개월을 공부하며 참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 논문이나 기말 페이퍼에 도움이 되는 것을 몇 가지 남겨본다면, 첫 번째로 대외적인 활동이 있다고 생각한다. 국내에는 각 전공별 국내 학회에서 진행하는 학술회의가 개최되고 있다. 국내 학회의 경우는 학회에 연락하여 대학원 패널을 신청하게 되면 학회에서 전문가들과 토론을 나눌 수 있고 그 만큼 학문적 역량을 키워나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본인은 다행히 좋은 기회를 얻어 태국 치앙마이 대학교에서 열린 아시아 국제정치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수 있었고 국내에서는 한국정치학회에서 열린 국내학술회의에서도 발표하며 많은 배움을 얻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두 번째는 교수님과의 소통이다. 현재 학위 논문을 쓰면서 1주일에 두 번 씩 찾아뵙고 있는데 예전에 그렇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다. 논문을 쓸 때 많이 찾아뵙고 상담할수록 논문의 성과는 물론 식견 또한 비약적으로 커진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있다. 처음에는 어렵더라도 자주 찾아뵙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논문의 주제 선정과 진행에 관한 것이다. 주제 선정에 대하여 지도 교수님께서 수업 중에 말씀 하신 적이 있는데 “주제를 선정하지 못하는 것은 공부를 덜 했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다. 논문을 쓰는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보면 참 당연한 말씀인 것 같다. 결국 주제 탐색은 선행연구 속에 답이 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긴 글 읽어주신 원우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원우 여러분의 건승을 기원하며 글을 마무리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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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5.04.17 14:28

서강논문상 ‘서유강론’



자본주의적 매트릭스의 종교성에 대한 민간 신앙적인 돌파구 모색 개요




 이정훈 _ 종교학과 박사과정



     무속 신앙은 흔히 어리숙한 사람들에게 사기를 쳐서 쉽게 돈을 뜯어내는 기제로 인식되어 왔다. 근래 들어 어떤 방송국의 유명한 PD는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극도의 편집증을 발휘하여 그러한 집단의 인식을 충분히 이용하였다. 몇날 며칠을 발품을 팔아다가 변장도 하면서 사주팔자를 알아보고 신기를 시험했으며 생생하게 그 현장을 담았다. IMF 환란 당시에는 있는 돈을 다 끌어모아 빚을 갚아도 모자랄 판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굿판이 성행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일반의 인식대로 무속 집단이나 민간 신앙이 돈만 밝히고 사기를 친다는 것은 확실한 것인가? 본 논문은 이러한 의문에서 비롯되었다.

     본문 내용은 소비문화가 하나의 매트릭스를 형성하고 있고 유아기적 최초의 출생의 트라우마를 건드리지만, 고착되는 욕망을 넘어 빙빙 도는 상실의 형태로 악순환을 끊지 못하는 상태임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모든 것의 배후에 진정한 실재를 은폐하는 ‘대타자’(The Big Other)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트릭스를 넘어서면 진정한 현실이 있는 거도 아니다. 이러한 형태는 종교적 상징이 될 수 있는데, 어디까지나 내세의 파라다이스를 기대하며 현세를 살아가는 것이 거의 모든 종교의 기본적 패턴이 아닌가? 허면 자본주의는 어떤가? 모든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결정하는 상품, 돈, 자본을 생산하고 유통시킨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물질로 환원되고, 대신 물질의 자본적 관계가 주체로 환원된다. 이로써 본문에서는 명확히 밝히지 않았지만 상품 관계와 인간관계의 전도가 일어나는 와중에 자본주의와 종교 관계 또한 전도가 일어난다. 자본주의는 종교성을 일부 획득하지만, 종교는 자신의 성격을 일부 상실하게 되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악순환을 거듭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갈 길은 더욱더 요원하다. 그것의 가장 가까운 예가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라고 볼 수 있다. 그 추악한 냄새 때문에 프로테스탄트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붙이기에도 모자라다.

     최소한 민간 신앙은 사회적 자본의 계층 간 분배 역할이라도 한다. 하지만 교회는 목사와 결탁한 몇몇 장로들만 신난다. 하염없이 순진한 마음으로 매주 헌금을 갖다 바치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소박한 서민들이다. 이미 자본주의와 분리할 수가 없게 된 기독교는 자신의 주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맘몬의 지성소를 만들어놓고 천상의 권력이 아닌 지상의 권력에 합장하며 들러붙고 있다. 종북의 기치를 가장 높이 들어 올린 단체가 바로 개신교이며, 그들은 광화문에서 부채춤을 추는 것 이외에 아무런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지 않는다. 비록 논문에서는 “abducted agency”라는 개념을 예로 들어 소비문화가 상품을 구매하도록 끊임없이 꼬드기면서 원초적 트라우마에 반복적으로 생채기를 내지만, 소원 성취의 미명 아래 끊임없는 악순환에 들어가 마침내 에너지를 매트릭스에 저당 잡히고 마는 구조 정도만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내세를 빙자하여 현세에 대한 희롱을 메커니즘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기독교와 유사하고, 민간 신앙에서 발견될 수 있는 다른 가치가 그 흐름을 끊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살펴봐야 한다. 우리의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가능할까? 현재의 위기에 조상님에게 축원하는 그 행위로 무엇인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적어도 민간 신앙은 내세와 현세를 혼동시키는 기만의 술수는 부리지 않는다. 조상님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조상님과 우리가 같은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자크 알랭 밀레와 지젝은 이 부분에서 활용될 수 있는 욕망과 충동의 구분에 대한 사유를 보여준다. 욕망이 일단의 결여에 대한 몸부림이라면, 충동은 메울 수 없는 구멍 그 자체이며 그 간극 주위를 끝없이 맴도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소비문화와 기독교 모두 뻥 뚫린 구멍(도달할 수 없는 소원성취, 내세의 파라다이스)을 악순환시키는 충동의 영역에서 움직이고, 민간 신앙은 조상님의 결여를 뼈저리게 체험하면서 그것을 메우려 하니 욕망의 영역에서 움직이다. 물론 욕망과 충동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자세한 고찰이 필요하겠지만 지면상 그런 여유는 없다. 흔히 최선이 아니면 차악을 선택하라는 말이 있는데, 차악(민간 신앙)을 선택할 수 없다고 최악(기독교, 소비문화는 물건이라도 준다)을 선택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럼 아직까지는 마이너스(복채)인데, 여기서 더 좋은 것을 보태 최소한 제로베이스로 만들 여지는 있는가?

     민간 신앙의 재수굿에는 잘 살고 있던 신도들이 신령의 은덕을 망각하고 있다가 굿이 계기가 되어 다시 그 사실을 기억하고 응분의 정성으로 보답하는 의례 과정에서 나타나는 ‘지연된 시간’이라는 요소가 있다. 이것은 신령의 은덕을 입고 사는 사람에게 일종의 도덕적 채무감을 부여하는 것인데, 지속적인 단골 관계로 해소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자본주의에서 볼 수 있는 이자 문제다. 자본주의의 씨앗을 잉태하는 중세 때 고리대금업자는 시간을 훔치는 자로 표현되고 있으며, 시간은 오직 하느님에게 속한 것이기에 고리대금업자는 하느님의 재산을 훔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자본주의와 이자의 큰 단위인 부채로 유지되고 있으니, 시스템 자체가 고리대금업이라면 이 체계는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를 훔치는 매트릭스가 아닌가? 그렇다면 하느님의 재산에 해당되는 것이 뭐가 있는가? 인간의 생명, 더 좋은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인간의 노동력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반면 인간의 생명을 빚진 조상님에 대해 끊임없이 지연된 시간을 빌미로 도덕적 채무감을 갖는다는 것은, 받은 생명에 대해 잊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가 만들어낸 생명이 아니라 조상님에게 받은 것이다. 기독교 입장에선 신성 모독의 혐의를 타자에게 씌우지 말고 본인 스스로 잘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과연 어느 것이 더 도덕적인 태도인지 말이다. 시스템 자체가 부채가 아니면 유지될 수 없는 자본주의에 목매달고 있는 기독교인지, 아니면 그 자본을 털어서라도 채무감을 벗고 자유롭게 받은 생명에 감사하는 민간 신앙인지 말이다.




서울 재수굿 공수내림 (출처: 한국민속신앙사전)

재수굿은 서민들이 가족의 안녕과 재복 등 집안에 재수가 형통하기를 빌기 위해서 지내던 한국의 기본적인 무속제의이다. (편집자주)


     사실 바로 그 낭비라는 개념으로 옭아맨 혐의 자체가 절약이라는 도그마를 완수하기 위한 것 아닌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대로라면, 칼뱅의 주장처럼 사치와 낭비를 절제하고 절약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애초에 그 혐의가 유언비어이고 그것이 낭비가 아니라면 어쩔 것인가? 채무자 본인이 채무감을 떨쳐내고 빚을 다 갚은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할 기회가 극단으로 치닫는 자본주의에서 쉽게 부여되는가? 또한 한국의 자본주의에서? 어림없다고 본다. 조상님이라는 어떤 것을 빌어서라도 채무자의 감정을 달래줄 그 무엇이 우리나라에는 사회적 안전망으로 전혀 부여되어 있지 않다. 차라리 그것이 없는 걸 탓해야지 아무도 보듬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그나마 채무자와 그 가족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몸을 던져 힘들게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만신 탓을 하는가? 그런 걸 게으름이라 부르는 것이요 태만이라고 콕 집어 부르는 것이다. 그럼 애초에 기독교는 얼마나 불우 이웃을 위해서 적선을 했는가? 일간지 통계에 보니 예산의 4%도 안 된다고 한다. 예수와 사도들이 시킨 일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으면서 어찌 자기반성 없이 형제의 티는 보면서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가? 하긴 처음부터 자기반성이라는 게 있었으면 기독교일 리가 없다. 그런 것이다.

     한편 그와 같은 사태를 민간 신앙과 기독교의 대립이라는 막연한 긴장감으로 상정할 수 없기에,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원시의 생존 경제에 대한 소고를 살짝 요약해서 보여주려고 했다. 또한 primitive라는 측면에서 생존 경제와 민간 신앙의 친연성(affinity)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려 했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이 조금 아쉬움이 좀 남는다. 생존 경제에서는 돈이나 자본 그리고 생산기술이 없이도 자본주의 사회가 뽐내는 것만큼의 욕망 정도는 쉽게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부시먼들은 하루나 이틀을 일하고 또 그만큼 쉬는 데에도 노동생산성 측면에서 높은 효율을 발휘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높은 생산성은 소위 미개인이 자신들의 생산수단을 철저히 이용하지 않을 때 달성되는 것이다. 저장 대신 궁핍을, 시장 대신 교환 거부 의지를 선택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줄 수 없는 독립과 자유를 살펴볼 수 있고 한 사회가 다른 사회에 종속되는 사례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게 된다.

     다른 한편 본문에서 사례로 든, 부채를 갚아야 하는 돈을 민간 신앙의 재수굿에서 사용한다는 것은 겉으로는 신령(조상님 등)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에게 속아서 거저로 돈을 갖다 바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속으로는 대감신의 공수처럼 “먹고 쓰고도 남게 부러울 만큼 도와준다.”는 신령의 ‘넘치는 무엇’(자본주의의 잉여와 같은 의미)에 대한 약속을 지향하는 것이다. 즉 미래에 풍요롭게 될 자기 자신에 대한 상징적 가치를 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성공한 기업가들이 장학재단을 만드는 것 역시 앞서 언급했던 도덕적 채무감을 상쇄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들이 헛된 곳에 돈을 쓰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이러한 민간 신앙적인 도덕적 채무감에 대한 봉사가 당장의 소비문화가 가져다주는 잉여의 향락과도 상쇄될 수가 있다는 측면에서 사회 전체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한 쪽에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아 합리적으로 소비문화에 동참하는 주체가 있다면, 다른 한 쪽에서는 실제로는 부채를 지니고 있음에도 자신이 그나마 가진 돈을 신령이 약속해주는 잉여를 믿고 비합리적으로 행위하는 주체이고 이 주체는 어쩌면 히스테릭하다. 히스테리컬하다고 비합리주의적으로 비난받을 이유가 있는가?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의 히스테리란 사회적 지시에 대한 의문 및 거절이다. 이것 없이 사회가 긍정적으로 개선될 수 있는가? 특히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의 “도착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 본연의 권리도 행사할 수 있다. 이것은 교환을 거부하고 시장을 무력화시키는 생존 경제의 의지와도 맞닿아있는 셈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라는 명제를 다시금 편견 없이 바라볼 눈을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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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4.08.06 14:55

 

윌리엄 제임스의 저작에서 “Each”가 주는 의미와 영향에 대한 고찰

(A Pluralistic Universe The Will to Believe 를 중심으로)

 

박재한_종교학과 석사과정 수료

 

논문 이야기 1

 

석사 과정에 입학한 나에게 논문이란 것은 막연하고 커다란 산과 같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논문을 써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학부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지 않은 나에게 석사 과정의 24학점은 심적으로 논문을 쓰기에 충분하지 않은 시간처럼 보였다. 논문, 그 이름만 들어도 부담감이 느껴지는 이름이다. 하지만 학부와 달리 대학원 연구실 의자와 책상이 개별적으로 주어진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수업 이후에 자유롭게 개인적으로 연구하고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장소, 이번 서유강론에 게재된 나의 논문도 이곳에서 완성하게 되었으니 대학원 연구실의 당위성이 저절로 입증된 셈이다.

 

내가 논문에 대한 막연한 부담감으로부터 조금은 벗어나 서유강론에 논문을 제출하게 된 이유는 함께 대학원 연구실을 지키는 친구의 권유였다. 내 옆 자리에 앉아있는 박사 과정 중인 친구는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친구인데 학교의 소식과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에 눈이 밝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논문상에 응모하였던 것이다. 순간 내게도 이것이 나의 논문에 대한 부담감과 더 깊이 직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내가 쓴 글에 대해서 평가를 받아보자는 것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논문상에 응모한 거의 모든 사람에게 비공개로 심사를 해주신 교수님들의 심사평을 전해준다고 하였기에 상금을 떠나서 내가 평가를 받음으로써 현재 나의 위치를 가늠하고 논문 글쓰기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란 기대가 생긴 것이다. 따라서 나의 주된 목표는 심사평을 받아보는 것이었다.

 

 

논문 이야기 2

 

    

 월리엄 제임스(1842-1910)

더 나아가 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문제는 다른 종교에 대한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합리성과 절대주의의 차원에서는 소수의 종교 현상들이 중심 무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윌리엄 제임스는 페히너와 헤겔까지도 뛰어넘어 그 현상들의 순간적 경험까지도 소중히 여긴다. 그리고 그 소수의 현상 또한 하나의 우주라고 지칭한다. 여기서 드디어 종교간 대화의 장이 마련되는 셈이다. 공존이 가능한 세계, 그리고 그 공존의 조합까지도 또 다른 새로운 우주로 여길 수 있는 조화로운 세계! 제임스는 이렇게 홀로 미국인으로서 당시 옥스퍼드 학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불어넣어주었다. 혹자는 제임스가 이성을 무시하는 사람이라고 혹평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임스는 이성과 합리성을 무시하지 않고 재해석하려했던 사람이다. 그에게 합리성은 따듯한 열정과 믿음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종교가 정치와 연합하여 사람들의 사고를 통제하려했던 때가 있었다. 일본의 국가신도 부활과 식민지 때의 민족말살정책의 모습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현 시대는 종교적 배타성과 폭력성의 양상이 정치 현상 속으로 녹아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생명 정치 하에서 벌거벗은 주권을 가지고 오늘도 호모사케르로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들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진정 나의 나됨이 타자로부터 기인할지도 모른다는 수수께끼 같은 모순적 질문들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살아갈 때 종교 뿐 아니라 우리 사회 또한 공존하는 연합됨의 즐거움을 향유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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