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설 칼럼

[135호] 학술적 관점에서 바라본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 역사 국정화와 ‘중세 대한민국’

학술적 관점에서 바라본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역사 국정화와 ‘중세 대한민국’

 

계승범 _ 사학과 교수

 

 

교과서 국정화: 국가주의 강화 선언의 결정판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헌정질서’니‘국론통일’이니‘자유민주체제’니 ‘태극기’니 하는 단어들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법무부 장관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행위에 엄정히 대처할 것을 선언했으며, 검찰총장도 자유민주 체제의 수호를 검찰의 사명으로 강조했다. 대통령의 국론통일 강조는 이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얼마 전에는 여당의 한 국회의원이 국론을 분열시키려는 세력들에 대한 대책 마련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런가 하면 행정자치부에서는 국경일에 일반 가정(아파트)의 태극기 게양을 강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바 있다.


 이런 일련의 언행은 바로‘국가주의’를 강화하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국가주의는 국가중심주의 내지는 국가우선주의로 풀이할 수 있는데, 여기서 국가는 바로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헌법을 갖고 있으니 그런 헌정질서를 수호해야 하며, 따라서 헌법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국론을 분열시키는 행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공권력을 투입해 제압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현 정부의 이런 취지를 국민들에게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태극기 게양을 강제하겠다는 것이다.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든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책동은 이런 추세의 한 결정판이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저런 일련의 움직임이 전혀 자유민주주의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국론통일과 국기 게양 강제는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본질적으로 상충한다. 상식으로만 보아도, 국가가 국민에게 어떤 일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맞지 않는다. 국론이 다양한 것을 부정적 의미의 분열로 범죄시하고, 국론통일을 강요하는 행위도 자유민주주의와는 배치된다. 심지어 역사를 국정화하겠다는 발상은 자유민주주의와는 상극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다양해 한 마디로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요체의 하나는 자유주의다. 또한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는 완전한 독립체로서 개인이 갖는 선택의 자유를 이른다. 단순히 반공의 의미가 아닌 것이다. 실제로, 역사상 개인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유주의자들과 충돌한 대상은 대개 국가권력 내지는 관습적 권위체계였다. 요컨대 자유주의와 국가주의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

 

 현재 지구상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모두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유민주주의 사회라면 적어도 개인보다 국가를 우위에 두지는 않는다. 자유민주주의가 무르익은 선진국에서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매우 공평하게 중시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개인의 이해와국가의 이해가 충돌할 때 개인의 자유선택을 최대한 인정해 주는 것이 바로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정신이다. 이런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획일성이 아닌 다양성을, 일방적 통제가 아닌 상호 조화를 추구한다. 요즘 권력의 중심부에서 벌어지는 역사의 국정화 기도를 접하며 오히려‘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역사 기억은 하나일 수 없으며 하나여서도 안 된다. 특히 국가가 독점하는 역사 기억은 신뢰도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사실상 정치선전에 지나지 않는다. 유신의 망령처럼 되살아나는 역사 국정화 움직임은 국민의 머릿속 기억까지 일개 정권이 일방적으로 통제하고 특정 관점을 독점적으로 주입시키려는 것으로 심각한 시대착오이자 폭력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일을 추진하는 과정도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기 마련이다. 현행 교과서 내용이 마음에 안 든다면 검인정 교과서 집필기준을 수정하면 될 일이지 국정화를 시도할 일은 아니다. 교과서의 내용 문제와 국정화 전환 문제는 격이 전혀 다른 별개의 사안이므로, 이 둘을 인과관계로 묶은 현 정권의 논리 수준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또한 현행 검인정 교과서가 정녕 죄다 좌편향이라면, 이명박 정권을 포함하여 지난 10년간 그런 교과서를 승인한 교육부장관 및 그 이하 관련 공무원들을 모두 고발하는 조치를 먼저 선행해야 일의 순리에 맞고 그나마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교과서 검인정제보다는 자유발행제를 채택하는 것이 헌법이념에 부합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결도 이 정권에게는 우이독경이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정권이기 때문이다.

중세로 회귀하는 대한민국


 시대에 역행하는 역사 국정화 파동은 글로벌시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품격마저 현저하게 떨어뜨린다. 글로벌시대 국가의 품격은 글로벌 추세에 발맞추거나 그것을 얼마나 선도하는가에 달려있다. 선진국 가운데 역사교과서 가지고 이런 소모적 전쟁을 일으키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한반도만 벗어나면 이런 사안은 논쟁거리조차 되지 않는 우스갯거리일 뿐인데, 이런 유치하고도 창피한 일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며 강요하는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함인가? 현재 한국사회가 당면한 현안이 안팎으로 얼마나 산적해 있는데, 시대에 역행하는 이런 국정화 문제로 온 나라를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인물을 과연 한 나라의 참 리더요, 진정한 대통령이라 할 수 있을까?

 중세가 불투명한 인치(人治)의 시대였다면 근현대는 투명한 법치(法治)와 합리적 상식의 시대이다. 그런데 법치와 상식은커녕 인치마저 내던진 채 중세로 회귀하는 대한민국이 어디로 갈지 갑갑하다. 국민의 생각을 통제하려 한 권력치고 장수한 예는 역사상 거의 없으며, 궁극적으로 성공한 사례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