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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3호] 거인과 메뚜기, 여우와 신 포도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석사과정 황 동 준

 

어느 날 『천로역정』을 읽다가 어느 한 구절을 읽고는 “내가 왜 공부하는가?” 를 설명해주는 좋은 비유를 발견했다. 『천로역정』에서 주인공 크리스찬은 구원에 이르기 위해 천국을 향해 걸어가던 중 어떤 두 사나이를 만난다. 두 사나이는 크리스찬에게 이 길에서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보았다며 살고 싶다면 되돌아갈 것을 권한다. 저 앞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는데 그곳에는 온갖 귀신 들과 용들 그리고 커다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다며 말이다. 그리고 그 옆에 는 괄호치고 ‘민13:30-33’이라 적혀있었다. 어떤 내용일까 궁금해 성경을 펼쳐 찾아봤다.

 

저자 존 번연이 인용한 민수기의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자신들이 들어가 거주할 가나안 땅을 정탐하는 상황의 내용이다. 이스 라엘을 이끈 모세는 각 지파의 족장들을 정탐꾼으로 보냈는데 그들은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 가나안 땅에 젖과 꿀이 가득했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가나안의 거주민들은 너무나 강하고 거대한 거인처럼 보였고 자기 자신이 메뚜기 같았 다고 말한다. 이에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며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말하자, 함께 정찰한 갈렙과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조용하게 하고 “두려워 말라. 우리가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우리가 능히 이기 리라!”라고 외쳤지만, 백성들은 이미 겁을 먹어 듣지 않을 뿐이었다.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정탐꾼들과 두 사나이는 모두 직접 보고 경험 한 것에 대해 ‘악평’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 길로 가려는 사람들에게 되돌아가 라고 권했다. 나는 왜 이 장면을 보고 ‘공부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 을까? 그것은 저 너머에 있는 무언가에 대해 저들과 나는 상반된 평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찬은 이 길의 끝에 ‘천국’이 있을 것이라 보았지만 두 사나이는 결국 ‘사망’만 가득하다고 말한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승리’를 선포 했지만, 나머지 정탐꾼들은 ‘패배’와 ‘좌절’을 보고했다.

 

그렇다면 나에게 ‘저 너머에 있는 무언가’란 무엇일까? 나는 사회학 이론 이 나에게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공부한다. 나는 이 길을 걸어가다 보면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에 도달할 것이라 믿는다. 최종적인 진리가 아니 라 가치 있는 곳 말이다. 만약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공부는 시간 낭 비일 뿐이다. 차라리 빨리 취업해서 돈을 버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참 많이 듣는 말이 “그걸로 뭐 먹고 살아?”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들이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해주지 못한다. 그들은 나의 불안정한 미래에 대 해 쏟아부은 등록금과 시간이 아깝다는 듯이 말하며 나에게 운을 빌어준다. 하지만 나에게 “그 공부가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어?”라고 묻는다면, 나는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설명해줄 수 있다. 나에게 가치 있는 것은 공부의 즐거움이지, 공부의 돈벌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길은 나와 같이 불안정하고 돈도 못 벌어도 순수이론을 공부하는 것이 재밌는 우리 같은 이상한 사람들에게만 만족스러운 길이다. 그러나 이 순례길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저 앞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거인들이 즐비해서가 아니다. 두 사나이와 정탐 꾼들처럼 경험해봤으니 돌아가라는 말이 나를 가장 씁쓸하게 한다. 실제로 어떤 교수님은 “그런 이론적인 책은 화장실에서나 읽어라”, “이론은 천재들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헛된 꿈을 갖지 말고 현실적으로 ‘유망한’ 방향으로 틀 수 있도록 조언한 것이겠지만 내겐 슬픈 말이었다.

 

대학원 동료 선생님들과 나는 ‘저 너머 무언가’가 무엇인지 서로 다르게 해석한다. 누군가는 나처럼 역경을 뚫어서라도 쟁취하고 싶어 하지만, 대부분은 쓸데없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론으로는 살아남기 어려우니 다른 경험연구로 가야 한다며 설득했을 때 내 생각을 밝히자, 누군가는 “너희 이론하는 사람들이랑은 대화가 잘 안된다”며 타박하기도 했다. 당황스러웠지만 이해했다. 왜냐하면 같은 말을 두고 다른 의미로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저 너머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동음이의어였을 뿐이다.

 

김경만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에서 나오는 ‘여우와 신 포도’의 비유는 나의 상황을 더 잘 설명해준다. 김경만은 이 비유를 통해 세계적인 학문장 에 도전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사회과학자들을 비판한다. 이 우화에서 여우는 높은 곳에 있어 닿지 않는 포도를 먹어보지도 않은 채, “저 포도는 어차피 신 포도일 거야!”라며 자신을 위안한다. 이처럼 한국의 사회과학자들이 서구 이론의 종속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한국이론을 만들자고 말하면서도, 정작 서구이론을 제대로 공부해보지도 않고 외면해버린다는 것이다. 만약 서구이론 이 정말 적실성이 없으므로 기각해야 한다면, 그것을 낱낱이 해부한 뒤 비판 하면 되는 일이다.

 

나는 이 글을 읽고는 내가 추구하던 ‘저 너머 무언가’를 이제 ‘포도’라고 불러 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저 포도가 먹어보고 싶지만 다른 사람들은 저 포도를 신 포도라 생각해 먹고 싶지 않기에 위에서 말한 여러 대화에서 우리는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왜 꼭 포도를 먹어야 해? 다른 맛있는 먹을거리도 많은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맞는 말이지만 저 말 뒤에는 ‘배를 채우는 것’이 목표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나는 배부르기 위해 포도를 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저 포도 자체가 궁금한 것이다. 비록 나의 장래가 유망 하지 않아도,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더라도 사회학의 이론들이 ‘좋아서’ 공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이 공부를 계속하기로 마음먹을 수 있었던 것일까? 나를 추동하는 것은 무엇일까? 얼마 전 연구실에서 다른 선생님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계속 혼자 책만 보고 글만 쓰다 보면 외롭지 않아요?” 나는 “공부하고 글을 쓸 때면 책과 논문의 여러 저자들과 대화하고 겨루고 있다 는 느낌이 들어요. 그러니까 저는 혼자가 아니라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거죠. 그래서 오히려 가슴이 뛰어요”라고 답했다. 부르디외(Pierre Bourdieu)에 따르면 나와 같은 사람들이 모인 상징공간에서 지적으로 겨루며 투쟁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일루지오(illusio)', 즉 ‘장(field)에 대한 환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지식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나에게는 이 공부가 너무나 중요하고 재밌어서 마치 실재인 것처럼 다가오지만, 남들에게는 전혀 관심도 재미도 없고 이해할 수 없기에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환상 이 없다면 학문에 대한 집단적인 참여가 불가능하다. 이처럼 저 포도가 맛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분투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우와 신 포도의 우화와는 다르게, 포도를 먹는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다. 정탐꾼들이 보고한 것처럼 거인들을 쓰러뜨려야 하고, 두 사나이의 말처럼 용과 귀신들을 지나쳐야 한다. 그러나 나는 위험을 피해 목숨을 지키고자 했던 저들과는 목표가 다르다. 역정을 뚫고서라도 천국으로 가려고 한 크리스 천처럼, 거인들을 물리치고 가나안 땅을 취하려고 한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나는 저 포도를 먹어보고 싶다. 즉, 내가 부여하는 가치의 우선순위가 다른 것이다. 물론 나는 아직 메뚜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일루지오에 빠진 나를 보고는 망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일루지오 덕분에 언젠가 학술지에 글을 게재하고 수많은 이론가와 학자들과 겨루다 보면, 언젠가 그 포도를 먹어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글이 나를 비롯한 순수학문을 공부하는 많은 메뚜기들에게 작은 위로와 감명을 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