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0.18 10:53

 

어떤 위안

 

상수_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과정

 

20179, ‘대단한단편영화제에 다녀왔다. 영화 <연애담>의 감독 이현주의 단편 네 작품을 특별전으로 상영한다는 소식에 얼른 예매를 서둘렀다. 두 여자의 사랑을 담담한 색채로 그려낸 퀴어영화 <연애담>, 17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 경쟁부문의 대상 등 유수의 영화제에서 주목받았고 개봉 후에도 팬덤(‘팀 연애담’)을 형성할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다.

이현주 감독 개인이 품었던 지난 짝사랑의 기록이라는 네 편의 영화, <과외>, <우리 결혼해요>, <Distance>, <바캉스>. 영화 안에 그의 삶이 얼마나 녹아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 <연애담>을 비롯한 네 편의 단편 모두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들의 서사가 실감나게 등장한다. 결혼을 종용하는 엄마 덕에 하는 수 없이 게이 지인과의 위장결혼을 준비하는 레즈비언, 유학을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는 외로운 벽장 안의 레즈비언,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홧김에 애인에게 키스해버리는 레즈비언한 사람의 감독이 어떤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는지를 시간 순서대로 보는 것은 꽤 즐거운 경험이었는데, 한 사람의 또렷한 성장을 체감하는 동시에 그 작품들을 관통하는 일관성 있는 서사나 변치 않는 그만의 화법을 발견할 수 있어 그랬다.

이 글의 제목이 어떤 위안인 까닭은 여기서 내가 영화의 만듦새나 미학에 대한 시시콜콜한 분석을 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를 전공한 적이 없고 그런 것들을 잘 알지 못한다. 나는 이 영화들을 보러온, 그 날 그 극장에 함께 앉아있던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연애담>을 보고 이현주 감독에게 이성애자들이 로맨스 영화를 보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고 편지를 보냈다던 어느 동성애자 관객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 날의 극장도 그랬다. 2000년대 초반에 촬영된 <과외><우리 결혼해요> 같은 작품은 화질이나 촬영기법, 등장인물들의 외형이나 미감, 서사의 진행방식 모두 지금과 같지 않아 조금은 촌스럽게 느껴졌다. 디지털 촬영의 세련됨에 익숙한 나는 민망해져 얼른 다음 작품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관객석에서 하나 둘씩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안의 반대와 세상의 눈이 무서워 억지로 결혼을 하는 동성애자와 그 연인의 이야기는, 어쩌면 클리셰로 느껴질 만큼 익숙한 것이 아니었나. 수많은 비평들과 영화이론들이 명징한 언어들로 날을 세워 영화의 의미와 아름다움과 세련됨을 파헤치더라도, 결국 한 축에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부리는 날것의 감정들이 있다는 게 새삼 다가왔다. 그것을 위안, 위로, 공감 따위의 말로 겨우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와 정체성이 맺는 관계에 대해 건조한 언어들로 굳이 풀어내지 않아도, 우리는 텔레비전에 내가 나오면 좋다는 원초적인 즐거움을 안다. 여기에 좀 더 살을 붙여 말해보자면 나일 법한’ ‘나와 비슷한모습을 발견할 때 즐거워한다. 불규칙하게 흩어진 점들을 연결하면 하나의 그림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미디어에서 재현된 인물들을 구심점 삼아 저마다의 정체성을 구성해낸다.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긋는 동력은 아마도 텔레비전에 내가 나오면 좋은바로 그것이 아닐까? 신부대기실에서 연인의 손을 맞잡는 하은의 모습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울음을 울었을 것이다. 바람난 엄마의 애인더러 이 아저씨가 엄마 친구야? 영미는 내 친구야!”라고 외치며 키스하는 윤주의 모습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성 소수자들의 사랑을 그린 적지 않은 수의 작품들은 따가운 비평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다. 소수자를 재현할 때의 정치함은 물론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얼마나 많은 동성 간의 로맨스들이 결국에는 이성애 규범적인 로맨스 공식에 복무하고야 마는가. 그렇지만 많은 이론가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뒤덮인 허다한 허물들을 명징한 언어로 폭로하기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사랑이라는 그 이름을 가장 살갗에 닿는 언어로 파악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가장 보통의 연애. 영화 <연애담>이 가지는 미덕도 그것이었다. 분명 보편성이 특별함을 지워내는 순간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장 그 순간에 극장 안 모두를 묶어내는 감정이 분명 있지 않을까. 언어는 이 모두를 휘감는 날것의 감정들을 이론화할 수 있을까? 그것은 정치하게 배치될 수 있을까? 이를 포착해낼 수 있는 더 많은 영화 언어들이 나와야 할 것이다.

또한 힘겨운 커밍아웃, 비극으로 끝나버리는 결말, 눈물 흘리고 상처받는 퀴어들의 서사에서 벗어나 퀴어들의 삶에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퀴어임이 부각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서사에 섞여 드러날 수 있는 이야기들이 풍부하게 만들어져야 한다. 물론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억압받는 이야기 또한 그 사회상을 고발한다는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현주 감독은 누군가에게는 잘 알고도 익숙한 이야기면서 누군가에게는 낯선 이야기를 사실적이면서도 재미있게, 그렇지만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섬세한 이야기꾼이라 생각한다. 보편과 특수 사이의 균형을 절묘하게 탈 줄 아는 이야기꾼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

 

극장에 앉아서 나와 같은 것을 보고 있는 누군가가 나와 비슷한 결의 웃음과 울음을 운다는 사실이 가끔은 생경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위안이 될 때가 있다. 같은 곳에 발을 디디고 있는 누군가를 확인한다는 사실이 가끔은, 그렇게 막연하게 나를 위로한다. 영화관에 온 이유도, 그래서 집중을 하는 정도도, 울고 웃는 순간도 공유하고 있음을 느꼈던 그 날의 극장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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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0.18 10:51

 

<효리네 민박>과 여성주의 예능의 미래

 

연혜원_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회학과 석사과정

 

여성주의 예능이 나아갈 방향을 찾기 위해, 예능이라는 극 자체가 여성예능을 어떻게 실패시키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어쩌면 우리는 실패의 돌무덤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 예능에서 여성의 정체성은 남성의 이성애적 섹슈얼리티를 기준으로 순결하고 신비스러운 성녀와 욕망을 드러내고 도발적인 창녀, 못생기고 우스꽝스러운 악녀의 이미지 사이 어딘가에서 맴돌고 있다. 타자가 규정한 섹슈얼리티 속에서 하염없이 떠도는 사이 여성 출연자가 가진 고유한 이야기는 희미해지고 여성 출연자들은 도돌이표처럼 남성의 투사체에 갇혀 버리고 말 뿐이다. 한국 예능에서 아름다운 여성 게스트는 늘 남성 출연자들에게 선물처럼 주어지고, 못생긴 여성 코미디언은 언제나 좌절하길 반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여성 예능에 대한 새로운 시도들이 계속 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KBS2<언니들의 슬램덩크>부터 EBS<까칠남녀>, On Style<뜨거운 사이다>, <바디 액츄얼리> 등 다양한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여성 예능을 표방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들 사이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을까? 여성 예능이라는 포부를 밝힌 프로그램들의 가장 고전적인 오류는 출연자만 여성으로 채운 채 여성주의 예능으로 도약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언니들의 슬램덩크>가 대표적이다. <언니들의 슬램덩크>는 여성 출연자로 출연진을 메우고 난 뒤 그들에게 남성적인 시선이 반영된 캐릭터를 덧입히기를 반복한다. 여전히 캐릭터는 아름다운 여성과 못생기고 웃긴 여성으로 양분되어 있다. 양분된 캐릭터들은 때때로 의외성을 보여주며 웃음과 감동을 주지만 일시적인 의외성은 캐릭터를 온전히 전복 시키지는 못한 채 사그라져 버린다.

 

여성을 응시하는 여성주의 예능

 

<까칠남녀><뜨거운 사이다>는 최근 한국사회에 불 지펴진 페미니즘 담론을 토크쇼 포맷으로 옮겨오면서 여성예능에서 여성주의 예능으로 도약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과거 방송에서 감춰져왔던 여성의 진짜 경험와 욕망을 여성의 목소리로 드러내고, 남녀관계와 일상생활에 대한 페미니즘적 시각을 보다 심도 있게 다룬다는 점에서 분명 진일보했다. 그럼에도 여성주의 토크쇼는 여전히 여성이라는 범주를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도기적이다. 과도기라는 표현은 아직 완성되지 못하고 결여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반드시 거쳐 가야 할 다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범주를 해체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범주 되어 있고, 왜 범주되었는지에 대한 집요한 고찰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더 욕심을 내어 과도기를 거쳐낸 여성주의 예능을 경험하고 싶다면, 그 예고편을 JTBC<효리네 민박>에서 찾아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효리네 민박>과 응시하지 않는 연습

 

<효리네 민박>이 가진 미덕은 여성이라는 범주를 응시하지 않으면서 여성 주체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지점에 있다. 이 같은 내러티브 방식은 역으로 여성 주체를 여성에서 벗어난 고유한 주체로 승격시키는 효과를 가져 온다. <효리네 민박>에서 이효리와 아이유는 여자 연예인에게 뒤따라오는 흔한 수사들로 설명 당하지않는다. <효리네 민박>에서 편집과 자막은 이효리가 민낯인지 아닌지 궁금해 하지 않으며, 나영석의 수많은 예능들이 여배우들의 배우스러움에 집착하는 것과 같이 이효리와 아이유를 가수스러움에 가두는 실수를 범하지도 않는다, 나아가 <효리네 민박>은 간편하게 가부장적인 규범에 기대어 극을 해석하지도 않는다. 이상순이 아무리 집안일을 잘 한다고 해서 이상순을 쉽사리 ○○주부라 부르지 않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진보에는 제작진만큼이나 출연자들의 기여가 컸다. 전통적인 성역할에 구애받지 않는 결혼 생활과 여자 연예인에게 흔히 기대하는 역할극에서 탈피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준비가 되어 있는 이효리라는 개인의 수행적 역할은, <효리네 민박>에서 여성이라는 범주와 가부장적 상징틀을 해체하고, 출연자 각각의 고유한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갔다.

 

많은 사람들이 여성은 재미가 없기 때문에 예능이라는 장르를 이끌어가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다소 경악스러운) 편견을 가지고 있음에도 <효리네 민박>은 좋은 성적을 거두며 막을 내렸다. 사실 <효리네 민박> 이전까지 이효리 또한 여성 출연자의 전형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왔다. 그동안 이효리가 돋보였던 이유는 섹시한 여가수망가지는 여자라는 두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가 충돌하는 장면을 가장 매력적으로 수행해왔기 때문이다. <효리네 민박>에서 이효리는 이러한 전형성에서 탈피해 최초로 이효리라는 개인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극의 성공이었다. <효리네 민박>은 예능 산업에서 남성의 섹슈얼리티 기준을 벗어난 여성 캐릭터의 가능성을 입증한 셈이다. 이것이 바로 <효리네 민박>의 성공을 단순히 이효리 부부에 대한 대중들의 관음증과 이들 부부가 가진 예능감, 그리고 아이유의 스타성으로만 재단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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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0.18 10:47

베트남은 성장 중

 

이현지_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경제학과 석사과정

 

하계학술문화탐방을 기회로 베트남을 가게 되었다. 이전부터 왜 베트남이 매력적인 투자지인 것인지 궁금하였기에 이를 해소하는 것이 이번 문화탐방의 목적이었다. 밤늦게 베트남에 도착한 비행기에서 내려 35일동안 베트남의 다낭, 호인안, 후에를 둘러보았다. 이 글은 35일동안 내가 생각하고 느낀 베트남에 대한 글이다. 주의할 사항은 이 보고서는 객관성이 없다는 점이다. 관광객으로써 좋은 점만 보려하고, 대표적인 것만 보려하였기에 상당히 주관적인 글이 될 것이다. 이를 주의하여 읽어주시기 바란다.

 

베트남의 경제

KOTRA에서 발간한 “2017 베트남 진출전략에 따르면, 201512월 한국과 베트남간의 FTA 발효 이후 베트남과의 교역량과 투자 규모는 점점 증가하여 지난 2016년에 베트남 시장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수입 점유율은 18.5%로 중국 다음으로 2위를 차지했다. 또한 한국의 누적 투자액은 521억 달러로 베트남 최대 투자국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이와 같이 베트남에 투자하는 것이 매력적인 이유는 베트남이 젊은 국가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 이후 경제 개방을 한 베트남은 경제 개발의 후발자이며, 매년 5~6%씩 경제성장률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인구 또한 약 1억 명으로 생산가능인구 비중이 2015년 기준 70.8%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기업이 베트남 시장에 진출한 것은 1990년대부터였다. 현재도 제조업에 대한 투자규모가 가장 크게 나타나지만, 최근 투자규모가 증가하고 있는 산업은 부동산이다. 20157월 베트남은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 및 임대제한 정책을 완화하여, 베트남에 살고 있지 않아도 외국인이 베트남에 있는 부동산을 취득하여 임대소득을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오피스 시장에 대한 투자가 주목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경제성장률 상승과 함께 매년 신생 기업의 수가 늘어나고 있으며, 이들의 오피스 수요도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오피스와 상업지역을 확보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의 주요 도시 중 다낭후에를 베트남 중부지역의 경제거점이자 관광도시로 지정하였다. ‘다낭은 레저 여행 수요와 한국을 비롯한 중국인 등의 여행 수요가 현재 폭증하고 있는 지역이며, ‘후에는 베트남 역사문화의 모든 것이 있는 도시로 부동산 투자 전망이 밝은 곳이라고 한다.

 

베트남의 카페

베트남에서 가장 많이 본 것은 오토바이와 카페이다. 특히 카페의 경우 한국보다 훨씬 그 수가 많고 색다른 모습이었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카페의 문은 모두 열려 있으며 탁자와 의자가 카페 앞 길가에도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카페 중 한국기업인 공차도 다낭에 있었다. 한류 영향 때문인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수많은 카페들이 있었지만, 그 중 공차에 유독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이 신기하였다. ‘호이안의 경우 구시가지로 낮은 건물들이 옹기종이 예쁘게 모여 있는 곳이었다. 과거에는 건물들의 용도가 어떤 용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는 다양한 상점과 카페 및 식당으로 변모해있었다. 전체적으로 색감이 예쁜 호이안은 상점들의 간판 또한 개성이 있었다. 카페의 내부는 생각보다 협소하였지만 직접 커피콩을 갈아서 내려주는 커피는 맛있었다.

흔히 동남아의 이미지는 위생적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의 카페든 식당이든 어느 곳을 가도 화장실이 항상  청결했던 것 같다. 화장실이 깨끗하고 사용하기 편리하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위생도 깨끗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러한 사소한 점이 베트남의 위상을 높여주는 요인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본 베트남의 카페나 상가들은 모두 유니크하고, 그들의 문화가 적절히 묻어나와 매력적이었다. 특정 관광지나 도시에만 한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프랑스의 식민지화로 외국인들의 유입이 많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현재에도 꾸준히 찾아오는 외국인들의 수가 많아서 인지 몰라도 상점의 인테리어들은 한국보다도 아름다운 경우가 많이 있었다.

 

 

베트남의 거리

베트남 중부지역의 경제거점이자 관광도시로 지정된다낭에서는 계속 도시화를 위한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도로를 넓히는 공사를 하거나, 아파트 및 호텔을 건설하는 모습은 어디에든 존재했다. 매일매일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낭에는 한국인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는 듯하였다. 심지어 한국어로 부동산이라고 적혀있는 간판도 보였다. 부동산이 있을만큼 한국인의 투자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한국에 돌아와 이들 부동산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니 다낭에 한창 건설 중인 호텔, 아파트 및 상가를 소개하는 정보가 많이 있었다.


 베트남은다낭의 바다 근처에 한국의 강남처럼 계획도시를 만들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파트를 건설 중이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아파트를 매매하는 것은 외국인도 가능하다고 한다. 특히 이곳 아파트 분양가는 20평대가 5천만 원 정도이며, 제일 가격이 비싼 것은 1억 정도라고 한다. 한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이지만 한 달 월급이 평균 30만 원대인 이곳 사람들은 지불할 수 없는 가격임에 틀림없다.

베트남의 국가 부는 전체 중 상위 10%가 대부분을 이룬다고 한다. 수영장이 있는 주택과 외제차를 보고 예상은 하였지만 베트남의 소득 격차 또한 큰 것 같았다.

 

베트남의 사람들

베트남의 사람들은 친절했다. 말이 안통해 손짓발짓으로 말을 건내는 것을 참을성있게 기다려주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봐 주었다. 게다가 어딜가든 젊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베트남 국민의 평균 연령대는 낮다고 한다. 이들의 노동력이 베트남의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번 학술문화탐방을 통해 처음 계획하였던 것을 모두 보고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베트남이란 나라가 한국보다 아직 개발될 가능성이 뛰어나며, 생산가능인구가 많다는 점은 확실한 것 같다. 사회주의 국가라는 점이 투자를 하는데 발목을 잡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투자지로는 매력적일 것이다. 한국이 베트남과 꾸준히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우호적인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사과하고 인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이다. 관광객의 입장에서 베트남의 대표적이고 좋은 점만 보고, 베트남을 자세하고 깊게 알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 아쉽지만 좋은 경험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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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6.08 11:41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그림으로부터 본 문화

-마크 로스코의 전시를 중심으로

 

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이소라

 

관람객과 소통하는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그림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가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이를 시각적으로 잘 나타내는 것은 그림이고, 마크 로스코는 이를 매우 잘 충족시키는 예술가라고 생각하여 마크 로스코전을 문화 체험의 장소로 선택했다. 그가 그린 그림들은 주로 추상주의 작품들인데 추상화라는 예술 작품을 매개체로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어떻게 그림 속에 담아냈을지, 관람객들에게 시각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큰 관심이 있었다. 추상화는 외부세계를 나타내는 요소를 제거하고 오로지 예술가의 내면세계만을 표현하기 위해 발전한 양식이기 때문에 화가의 감정을 매우 잘 나타내는 그림이다.

그는 그림에 자기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이를 관람객이 정서적으로 공감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표현성을 추구하면서도 자신의 그림을 통해 관람객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크 로스코전시는 그의 작품 경향에 따라 초기 작품부터 순서대로 5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의 그림이 시작되는 입구 부분의 벽 중앙에는 다음과 같은 마크 로스코의 말이 있었다. “그림은 사람과 교감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며 감상자에 의해 확장되고 성장한다.” 이는 그의 그림에 대한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나는 문장이다.

 

1. 신화제작자(Mythmaker) -신화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는 감정

그의 초기작은 주로 신화를 바탕으로 한 그림이 많아서 전시장의 초반에는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을 볼 수 있었다. 과거 고대인의 신화를 이용한 것은 감정적인 부분을 있는 그대로의 날 것으로 더 잘 표현해서 그림에 담긴 감정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마크 로스코는 예술가는 아이와 같아야 한다.”라는 말을 했다. 아이들은 감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솔직하게 표현한다. 그는 아이들처럼 자유롭고 순수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중시했다.

또 독일의 생물학자 헤켈(Ernst Heinrich Haeckel)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되풀이한다.”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사람의 유년시절은 인류 역사의 초기 단계를 반복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술가가 아이와 같다면 인류 역사의 초기 단계는 원시인이나 고대인이고 이는 곧 예술가가 이들을 계승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1942년 로스코는 신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며 거기에 자신이 느낀 불안과 공포를 표현했다. 이는 당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인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불안감과 위기의식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의 신화적 그림에는 당시 사람들이 처한 비극적인 사회상을 직시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2. 색채의 시대(Age of Colour)- Multiform

로스코 작품의 세계에서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들을 지나 전시장의 두 번째 구역에 다다르면 색채의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마크 로스코가 그린 그림들의 대부분에서 감정을 전달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색채이다. 특정한 색을 자주 쓰는 것은 그 사람의 정서를 나타내며 색채는 감정적이기 때문에 그림에 나타내는 색채에 따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캔버스의 크기도 점점 커졌는데 커다란 캔버스 안에서 색채들이 자유롭게 떠다니며 퍼지다가 다시 뭉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림마다 색채가 배치된 방법도 다양하고 색채를 그려낸 기법도 다양해서 그가 전하려는 여러 감정들을 복합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진1] NO.2 (넘버2) 1947 캔버스에 오일

 

 그의 이러한 형식의 작품들을 사람들은 멀티폼(Multiform)이라 칭하며 종종 살아있는 유기체로 비유한다. 워싱턴 내셔널갤러리의 큐레이터인 해리 쿠퍼(Harry Cooper)는 그의 에세이에서 멀티폼을 생명 기원 이론인 원시 수프(primordial soup)’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과 관람객이 만나 소통이라는 스파크가 더해지면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가 탄생하여 감정이 살아서 전달된다.

 로스코는 그림에 비극을 표현하여 관람객에게 비극적 숙명에 처한 인간을 직시하게 했고 비극, 황홀과 같은 인간 고유의 감정을 작품에 표현하고자 했다. 비극적인 모습의 그림 이면에는 밝은 에너지를 내뿜는 모습도 존재해서 사람들의 감정을 치유하는 역할도 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고 감정의 소통을 이룬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는 관람객이 자신의 그림을 보고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다는 사실은 곧 자신이 그것을 그릴 때 느낀 것과 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는 것이며 자신이 인간의 기본 감정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했다.

 또한 그는 색채를 통해 자신의 회화 작품에 내면세계의 감정을 표현하여 관람객의 내면과 소통하였다. 그리고 한 곡의 음악처럼, 한 편의 드라마처럼 전달하여 관람객에게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전시장에 자신의 그림을 내걸 때는 그림의 배치에서부터 조명의 밝기와 비추는 각도까지 섬세하게 신경 쓰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과 관람객 사이에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져서 그가 그림에 담은 감정이 보는 이에게 잘 전달되도록 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예술에 있어 감정을 표현하고 소통하여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진정한 예술을 완성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렇게 빚어진 예술은 곧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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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6.08 11:39

우리는 무슨 색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가?

- 영화 <라라랜드>를 보고 나서

 

경제학과 석박통합과정생 배보근

 

 대학원에 진학한 지 어느덧 3년이 되었다. 다양한 경험을 하는 다채로운 삶보다는 반복적인 시간과 똑같은 공간이라는 일상 속에서 특별함을 잃어가는 기분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길이 나에게 맞는 것인가?’ 스스로 물음을 던져본다. 남들과 조금은 다른 선택을 한 나에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맞다, 남들과 비교하지 말자.’라는 말로 위안을 하면서 하루를 버틴다. 앞으로 맞닥뜨릴 많은 일과 고민, 그리고 더 많은 비교 대상들이 난무하겠지만 미래에 대한 꿈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딛고 있다.

 그렇게 대학원 생활에 적응하면서 평소에 즐기던 문화생활과 여행은 추억으로 남기게 될 즈음에 라라랜드를 보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너무 강렬하게 라라랜드라는 영화가 마음에 닿았다. 어디에서나 봤을 것 같은 꿈과 사랑이라는 이중적 플롯을 지닌 영화이지만 화려한 카메라 기술과 감독의 세심한 손길로 세밀하게 만든 수작이다. 특히 재즈의 변주, 색의 변화 등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전개방식과 배우들의 연기력은 정말 흠잡을 데 없이 감탄을 자아낸다. 그래서 감독의 섬세함 하나하나를 이야기하지 않기에는 아까워 (color)’이라는 소재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라라랜드에서 가장 매혹적인 것은 배색이다. 초반에 화려한 원색의 향연에만 눈을 빼앗기기 쉽지만 단 한 장면도 색을 허투루 사용한 장면이 없다.

 첫 번째로 원색과 검정(무채색)의 대비이다. 이것은 꿈이라는 화려함과 현실이라는 어두움의 대비를 말한다. 극 중에는 이런 두 요소를 대비시키는 장면이 수도 없이 반복된다. 오프닝 곡인 ‘another day of sun’의 가사를 잘 들어보면, ‘불빛이 사라진 관객석’, ‘빛들이 수 놓인 스크린'이라는 의미의 가사가 나온다. 원색이 표방하는 화려함은 무대와 음악, 배우라는 예술인들의 꿈, 그런 꿈을 향한 순수함을 나타낸다. 반면에 검은색은 생활고와 먹고사니즘과 같은 꿈과는 거리가 먼 삶과 현실을 나타낸다. 미아의 오디션 장면은 항상 원색 배경에 원색 의상이며, 미아가 봄에 간 파티에서는 원색 옷의 파티 참가자들과 검은색 옷의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연애를 하기 전 미아의 의상은 원색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리고 메신저스 일을 하는 세바스찬은 아예 다 검은색 옷을 입고 있다.

 두 번째로 사랑을 표현한 보라색이다. 영화 포스터를 장식한 것처럼 보라색은 극 중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색이다. 세바스찬과 미아가 언덕 위에서 처음 본 하늘의 색, 영화 관람을 약속한 후 세바스찬이 부두에서 본 하늘색, 연애를 시작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장면에서 쓰레기통, 이 장면에서 미아의 가방색, 집에서 둘이 피아노 앞에서 노래할 때 미아의 드레스, 회상 신에서 미아가 성황리에 연극을 마친 뒤 입고 있는 보라색 원톤 드레스, 마지막 신에서 홈 비디오의 마지막 장면에서 미아의 의상이 그렇다. 영화의 색이 워낙 화려하다 보니까 색을 중구난방으로 쓰는 것 같지만, 몇몇 색은 특정한 장면에서만 사용한다. 그 중 첫 번째로 보라색은 사물에는 대체로 진한 보라색, 미아의 의상은 연보라색, 하늘은 파스텔 톤으로 표현한다. 좀 더 나아가면 파스텔은 전반적으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색으로, 연애를 시작한 미아의 의상은 전반적으로 원색에서 파스텔 톤으로 바뀐다. 데이트하는 세바스찬의 의상도 흰 셔츠 일색에서 파스텔 톤으로 변한다.

 세 번째로 의상의 변화이다. 세바스찬이 브라운 수트를 몇 번 입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지막 피아노 치는 장면에서 단 한 번 올 브라운 수트를 입는다. 중간에는 톤이 업된 브라운 수트를 미아와 첫 영화 관람 때와 친구의 파티에서 연주할 때 두 번 입고 나온다. 이는 둘 다 사랑스러운 감정, 순수함의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브라운은 세바스찬에게 퍼스널 컬러이다. 그러므로 격동의 시기를 보내는 영화 중간에는 브라운의 색이 나오지 않는다. 잘 보이지도 않고 아무도 신경 쓰지도 않을 극의 첫 장면, 세바스찬의 첫 장면인 고속도로 위에서 브라운 셔츠를 입고 있다. 그 상태로 삼바 타파스 앞에서 자신의 꿈인 재즈 클럽을 한 번 더 되새긴다. 세바스찬이 삼바 타파스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집에 돌아가 누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피아노 앞에 앉아 피아노를 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감독이 연속된 장면에서 의상을 구분해서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브라운이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위의 세 장면은 분명 연속된 장면이다. 하지만 의상을 통해서 시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간 장면에서 현실에 쫓기는 세바스찬의 셔츠는 어두운 회색 내지 밝은 검정으로 봐도 좋다. 시간상으로 연속된 장면이라고 구성할 수 있는 장면들을 굳이 나눈 것이다. 자신의 꿈인 재즈클럽 사장을 되뇌는 세바스찬과 피아노 앞에서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 세바스찬을 순수한 브라운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색의 의상을 극 중간에는 전혀 입지 않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셉스(Seb’s)의 사장으로 나타났을 때 입고 나옴으로써 순수한 자신의 꿈을 이뤘다는 것을 시사한다.

 네 번째로 조명을 이용한 색의 변화이다. 색에 관한 감독의 섬세함은 조명을 봤을 때 더욱 두드러진다. 세바스찬이 클럽에서 징글벨을 연주하는 장면에서, 처음 클럽에 입장하면서 사장과 인사하고 피아노에 앉기 전까지 세바스찬의 의상은 검정과 흰색이다. 전형적인 현실의 색. 하지만 피아노에 앉은 세바스찬에게 조명이 약간 밝아지면서 짙은 푸른색, 그리고 연주에 몰두할 때는 파란색으로 더 밝아진다. 생활고에 쫓겨 어쩔 수 없이 싫어하는 곡을 연주하는 세바스찬의 심경과 곧 꿈에 대한 열정을 찾는 변화를 같은 의상, 다른 조명으로 표현한 멋진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다섯 번째로 5년 뒤의 마지막 장면에서의 의상 색이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소름 돋았던 순간은 5년 뒤 장면에서 차에서 내린 미아의 의상을 보는 순간이었다. 절대 무채색만의 의상은 입지 않았던 미아가 완전한 흰색과 검은색의 드레스를 입었다. 그리고 액세서리마저도 투명한 다이아몬드로 바뀌어 있다. 이전에는 에메랄드 목걸이, 녹색 귀걸이를 주로 했다. 배우라는 꿈을 이뤘기 때문에 연기는 더 이상 꿈이 아닌 생활, 즉 현실이 되었다. 혹은 5년의 시간 동안 성공을 위해서 현실적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세바스찬은 엄청난 성공은 이루지는 못했지만 재즈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욕심, 재즈 클럽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그를 표현한 브라운의 수트는 순수한 꿈을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영화를 보는 내내 세심하게 표현한 색들에 매료되어 있었다. 두 주인공은 꿈과 현실이라는 고민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과 너무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극 중의 색들을 자연스레 삶에 반영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슨 색을 꿈꾸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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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4.08 16:20

재원의 성격으로 충족되지 않는 공공성 - 자율과 참여로 공공의 가치 구현해야

 

 

 

김소연_연극평론가

 

 

대학로X포럼은 페이스북 그룹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연극 및 공연예술인들의 토론 플랫폼으로 현재 뜨거운 논쟁이 진행 중이다. 그 중 하나인 지난 해 국립극단에서 진행된 창작극 개발 프로젝트작가의 방’. 논쟁은 한겨레 기사, “[단독] 국립극단도 검열했다... “‘개구리같은 작품 쓰지 말라강요”(2017316.)에서 촉발되었는데, 이 프로그램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미 계간 [연극평론] 2017년 봄호에 발표된 고연옥의 기고국립극단 작가의 방’, 왜 극작가를 교육, 교정하려 하는가?”에서 있었다. 두 글의 제목에서도 대비되듯이 지금 논쟁은 국립극단이 운영한 특정 프로그램에 한정되는 것이 아닌 공공극장의 공공성에 대한 여러 쟁점들로 전개되고 있다.

 

 

검열과 공공극장

 

검열은 최순실 게이트에서 시작되어 대통령 탄핵심판까지 이어진 일련의 과정에서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비록대통령(박근혜)탄핵소추안에 블랙리스트 작성과 실행이 포함되지 않아 탄핵심판에서 다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미 김기춘, 조윤선이 구속되었고 앞으로 진행될 박근혜 전 대통령 수사에서도 검열은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주요한 사건으로 다뤄질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여론은 박근혜 정부의 검열이 밝혀질 만큼 밝혀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특검 수사가 김기춘, 조윤선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검열의 기획, 실행, 지시를 밝혔다고 하지만, 그 구체적 실행과정까지 밝힌 것은 아니다. 또한 특검의 수사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작가, 단체, 작품에 대한) 직접지원에 한정되어 있을 뿐, 국공립기관단체의 검열 정황에 대해서는 수사조차 시작되지 않았다. 이것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잇단사과에 대한 예술계의 반응이 차가운 이유다. 사과 받고 싶어도 무엇을 사과 받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겨레 보도는 검열이 국립극단, 즉 국공립기관단체에서도 이루어졌다는 증언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보도 이후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홈페이지를 통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발언이 있었지만 직원 개인의 견해라는 사과문을 발표한다. 곧이어개인의 견해로 지목된 정명주 국립극단 공연기획팀장은“(국립극단은) 소수의 편향적인 의견으로 비판받지 않을 수 있는 다수의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 와전된 것이라는 해명을 대학로X포럼에 게시한다.

이에 대해 처음 문제제기를 기고한 고연옥 작가‘( 작가의 방책임작가)를 비롯해 구자혜, 김슬기 등 참여 작가들은작가의 방에 대한 논란이 검열이냐 아니냐에 대한 사실 확인으로 축소되는 것을 우려한다는 글을 각자의 페이스북에 게시한다. ‘개구리같은 작품은 쓰지 말라(이든 그런 논란을 국립극단은 피해야 한다이든)는 검열 혹은 가이드라인만이 아니라 모호한 계획, 급작스러운 프로그램 변경 등등 국립극단 측은 작가들에게는 내내 불편한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국립극단은 모호하게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성과(그런데 그 성과의 기준 역시 모호하다)만을 암암리에 재촉하는 무례하고 무책임한 권력이었던 셈이다.

한편, <개구리> 논란이 검열 사태로 이어지는 동안 이 작품의 제작자인 국립극단은 어떠한 책임 있는 태도를 취했는가[김재엽], 검열 논란에 명확한 답변을 회피하는 것은 (공공단체인) 국립극단의 책임방기이다[임인자], 국립극단이 (공공단체로서) 객관적인 공론을 중시한다면 먼저 공론장을 만들어라[이연주] 등등의 의견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각주:1]

 

 

공공극장의 공공성에 대한 질문들

 

다소 길게 국립극단작가의 방논란을 소개하는 이유는, 박근혜 정부의 검열이 박근혜, 김기춘, 조윤선 등의 불법 행위에 한정되지 않는 공공극장 공공성의 허약한 토대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검열이냐 가이드라인이냐, 강요냐 의견제시냐는 문제를 회피하는 의도적 논란이다. 직원 개인의 견해라는 해명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연옥 책임 작가를 비롯하여 참여 작가들의 증언 그리고 국립극단 측의 해명에서 드러나듯이 국립극단에서 공연하고 싶으면 논란을 일으키는 작품은 쓰지 말라는 메시지로 발화되었고 그렇게 수용되었다. 이는 근거 없는 모호한 기준으로 창작을 제한하는 검열이다.)

작가의 방참여 작가들을 비롯하여 이번 논쟁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국립극단의책임이다. 왜 국립극단은 작가를 존중하지 않는가, 왜 국립극단은 제작한 작품의 책임을 예술가 개인에게 떠넘기는가, 왜 국립극단은 검열이라는 사태 앞에서 명백한 해명과 입장을 제시하지 않는가, 왜 국립극단은 예술에 당연히따르게 마련인 서로 다른 견해의 충돌을 건강한 공론장으로 수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이러한 문제제기에는 국립극단이 국가의 공적 재원으로 운영되는 공공단체로서, 특히 연극계의 공적자원의 상당 부분이 집중되어 있는 공공단체, 공공극장을 운영하는 공공기관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공적 의무에 대한 질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공공재원으로 운영되는 극장을 공공극장이라고 부른다. 직접 공연을 제작하지 않고 공연단체들에게 발표공간으로 제공되는 대관 중심 공공극장(대표적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운영하는 아르코예술극장, 대학로예술극장을 들 수 있다)이든 직접 공연을 제작하고 자체 제작공연으로 극장을 운영하는 제작 중심 공공극장(대표적으로 국립극단이 운영하는 명동예술극장, 국립중앙극장 등을 들 수 있다)이든 대관료와 티켓 수입이 있지만 운영의 대부분은 공적 자금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공공극장은 공공재원이 투입된다는 이유로 정부 행정조직에 준하는 운영규칙을 따른다.

국가가 이렇게 공적 자금으로 극장을 운영하는 이유는, 극장과 예술의 공공적 가치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공공극장을 운영하는 주체들은 극장과 예술의 공공적 가치에 대한 질문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법을 준수하고 (불법 검열을 거부하고), 공적 재원으로 한국 연극의 미래를 발굴하며 (예술가들은 기관의 사업 목표를 수행하는 용역계약자가 아닌 파트너이며), 논쟁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 극장이 우리 사회의 이슈에 대해 생산적인 논쟁을 벌이는 공론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 이것이 공공극장의 공공성이 아니냐는 질문이다.

 

공공극장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

 

지난 가을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 선고가 내려질 때까지 광화문광장에는 매주 시민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촛불을 들고 모였다. 바로 그 광장 한복판에서 세워진광장극장블랙텐드천막극장에서는 겨울 내내 공연이 올라갔다. 17일 천막극장을 설치하고 16일 극단 고래 <빨간시>를 시작으로 탄핵심판 다음 날인 311일 야외퍼포먼스 <우리가 헌법이다_헌법퍼포먼스>로 마지막 프로그램을 끝낸 후 318일 천막극장이 해체되는 과정까지.. 이 극장은 기부와 후원 등의 자율적 참여로 운영되었다. 한겨울 새벽, 연극인, 동료예술가, 광화문캠핑촌의 해고노동자 그리고 시민들이 함께 자재를 나르고 뼈대를 세웠다. 해체 역시 연대의 퍼포먼스였다. 모든 공연은 일체의 제작비나 개런티 없이 진행되었고, 공연 팀은 공연만이 아니라 극장 운영의 공동 운영자로 극장 관리와 공연 진행을 함께 했다. 극장운영위원들은 보드이자 스탭으로서 프로그래밍을 비롯하여 극장의 운영방향을 논의하고 결정하고 실행했다. 직접 공연을 올리지 않았지만 젊은 연출가들은 극장무대감독으로 공연 팀의 공연 진행을 돕고 극장운영에 참여했다.

광장극장블랙텐트의 이러한 경험은 공공극장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넓혀준다. 광장극장블랙텐트 선언문에서는 이 극장이 박근혜 정부의 공공극장이 배제한 약한 자, 억압받는 자들의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임시 공공극장이며, 시민들과 함께 연극의 미학적 과제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실험극장이라고 선언한다. 비록 제한된 조건이었지만, 극장 프로그램은 물론 운영에서도 공공극장이 구현해야 할 공공의 가치란 무엇인가를 계속 질문하고 그 답을 구하고자 실천했으며 동료들과 시민들을 설득하고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공적 재원으로 운영되는 그래서 공공극장이라 불리는 우리의 공공극장들이 하지 않았던 질문들을 광장극장블랙텐트는 스스로 던지고 실천했다. 이러한 노력이 있을 때에야 공공극장의 공공성은 우리 사회에 자리 잡을 것이다.

비단 광장극장블랙텐트만이 아니다. 지난 해 5개월간 계속 되었던권리장전 2016 검열각하를 비롯하여 검열과 정책파행으로 창작환경이 극도로 위축되어 있던 박근혜 정부 시절 연극계에서는 무엇보다 연대가 활발했다. 연출가동인제로 운영되는 연극실험실혜화동1번지의세월호를 비롯한 일련의 기획들, 젊은 연극인들의 연대로 운영되고 있는화학작용’, 끊임없이 미학적 급진성만을 요구하는 신진 지원 프로그램들과 달리 혹은 그러한 프로그램들마저도 돌아보지 않는 20대 연극인들의 연대로 치러지고 있는이십할페스티벌등 이미 연극계에는 다양한 이슈와 과제를 중심으로 한 자발적 네트워크가 활발하다. 앞서 언급한 대학로X포럼은 서울연극제대관탈락 사태 때 공공극장의 공공성 훼손의 문제에 대해 연극인 개개인의 연대로 토론회를 개최하면서 시작되어 연극계의 공론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검열과 문화정책 파행으로 연극계의 창작환경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검열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국공립극장들에서도 배제가 이루어졌던 정황들은 너무나 많다. 국공립극장들에 공적 자원이 집중되어 있는 현실에서 이에 대한 진상규명은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이 과정에서 연극계의 다양한 노력들로 연극의 공공성, 극장의 공공성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공적 제도에 기입하는 것 또한 중요한 과제다. 이제 공적 재원과 행정조직운영규칙이 아닌 공공적 가치를 묻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공공극장을 상상하고 실천할 때다. 우리가 새롭게 만들어야 할 공공극장은 자율적 운영과 참여로 공공성에 대한 건강한 공론장을 형성하는 그런 극장이어야 한다.

  1. 주1) 국립극단‘작가의 방’에 대한 각 필자들의 글은 페이스북 그룹‘대학로X포럼’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facebook.com/groups/1524165964529525/permalink/189617944399484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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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4.0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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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4.08 15:54

 

어느 대학원생의 고백

 

 

강보름 _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현재 내 상황을 가장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 가난한 대학원생.

어려운 집안형편에 대학도 아등바등 겨우 마쳤으면서 마음의 소리를 좇겠다며 대학원에 진학했고, 돈 안 되는 인문학 중에서도 으뜸인 현대 문학을 전공한다. 이에 더해 연극으로 먹고 살고 싶다는 풍운의 꿈까지 안고 있다.

논문 학기임에도 아르바이트를 쉴 수 없는 불우한 신세지만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우스운 이유겠지만, 한 줄의 문장에 담긴 인생이 가슴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들 때문이다.

26살이 되어 다시 읽은 채만식의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 속 문장들이다.

 

인텔리... 인텔리 중에도 아무런 기술 없이 대학 졸업 증서 한 장을 또는 조그마한 보통 상식을 가진 직업 없는 인텔리...

해마다 천여 명씩 늘어가는 인텔리... 뱀을 본 것은 이들 인텔리다.

부르주아지의 모든 기관이 포화 상태가 되어 더 수요가 아니 되니 그들은 결국 꾐을 받아 나무에 올라갔다가 흔들리는 셈이다. 개밥의 도토리다.

인텔리가 아니 되었으면 차라리 노동자가 되었을 것인데 인텔리인지라 그 속에는 들어갔다가도 도로 달아나오는 것이 99퍼센트다.

그 나머지는 모두 어깨가 축 처진 무직 인텔리요, 무기력한 문화 예비군 속에서 푸른 한숨만 쉬는 초상집의 주인 없는 개들이다.

레디메이드 인생이다.

- 채만식, <레디메이드 인생>, 문학과지성사, 47

 

, 풍자의 쾌감이 밀려오는 동시에 답답해진다. 80여 년이 지나도 똑같다. 채만식이 1934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단편소설 속 시대상은 2017년의 상황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만치 꼭 닮아 있다.

매 주 토요일마다 뜨거워지는 광화문 광장을 바라보며 나는 도리어 자괴감을 느꼈다. 자본주의 사회의 잉여인간인 가난한 대학원생은 광장에 나갈 자격조차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사회를 위한 어떠한 생산적 노동에 기여함도 없으면서 민주주의와 정의를 외치는 것은 자기 분열적 모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상에 홀로 서는 것이 두려워 소속감을 필요로 했던 내게, 대학원은 좋은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광장으로 가기까지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어쩌면 핑계 대기에 급급한 이 상황이, 예비연구자는커녕 제대로 된 비경제활동인구[각주:1] 몫도 해내지 못하는 나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드는 듯하다.

광장이냐, 연구실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렇게 고민만 하는 사이 광장에는 다시 봄이 찾아 왔다. 더욱 더 커진 부채감을 안고, 나라는 한 인간의 쓸모를 고민하며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 논문을 붙들고 있다.

  1. 만 15세가 넘은 인구 가운데 취업자도 실업자도 아닌 사람, 곧 일할 수 있는 능력은 있으나 일할 의사가 없거나, 전혀 일할 능력이 없어 노동공급에 기여하지 못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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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4.08 15:50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를 읽고

 

신문방송학과 전공 석사과정 황민아

 

   

이 책은 사회변혁 운동가이자 문학평론가인 김명인이 기록한 2000년대 전후의 글들로 구성된 책이다. 한때는 유신체제와 신군부로 대변되는 독재 권력에 맞서 사회변혁 운동으로 80년대를 살아낸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또 다른 한때는 80년대를 지나 90년대 이후 문학의 변화상을 감시하고 비판해온 문학비평가로서 살아온 김명인은 한국 사회의 모습을 망원경 혹은 현미경의 거리로 일축일신하며 한국 사회의 문제와 일상을 들여다보고 비판한다. 특히 2000년대 참여정부 시절 돌기처럼 솟아올랐던 정치경제적 문제와 사회문화문제를 토대로 고찰한 김명인의 글은 현재에도 유효한 근원적인 사회 문제 진단과 그 통찰력을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이 지난 이 시점, 본 글은 김명인의 비평이 놓치고 있었던 부분과 그의 논의에서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부분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계속되는) 민주주의의 배반

 

박근혜와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인해 한국사회의 썩고 추악한 모습이 겹겹이 드러나고 있는 현재, 대다수의 한국 시민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과 함께 분노와 참담함으로 엉킨 일상들을 보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혹자는 보수 정권이 들어섰던 지난 10여 년 동안 이루어진 민주주의의 퇴행을 강력하게 역설하며한때집권했던 진보당의 시절을 장밋빛으로 물들여 회상하기도 한다. 자신들 앞에 당면한 사회적인 혼란과 정의롭지 못한 기득권의 민낯을 직시하며 잠시라도 분노를 잊고 싶어서일까.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병리를 더욱 곪게 하여 폭발시켜 버린 박근혜 정권의 병폐 아래 사람들은 다시는 마주 할 수 없기에 실컷 좋았다고 생각하기 쉬운 과거로 회귀하기도 한다. 단적인 예로 <무현, 두 도시 이야기>라는 노무현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개봉하는 등 노무현을 향한 노스탤지어가 만연해도 이상하지 않은 이 시점, 참여정부 시절에 기록된 김명인의 비평문은 우리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다. 과연 그때의 민주주의는 우리를 배반하지 않았는가? ‘우리에 과연 누가 포함될 수 있는가를 세밀하게 따져보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참여정부 시절의 민주주의 역시우리를 배반하였고 앞으로도 민주주의의 배반은 계속될 것이라는 게 나의 대답이다.

밀레니엄이라는 허공의 숫자가 매겨진 지 약 10년 후가 지난 한국 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김명인이 들여다본 10년 전의 모습들과 많이 겹친다. 꿉꿉한 뱀은 탈피만 할 뿐 여전히 그 몸체를 가지고 있듯이 신자유주의 질주는 멈추지 않고 경제적 약자, 비정규직의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인간적인 유대는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어 하나의 사물로 취급된다. 성주 주민들은 한미동맹이라는 핑계로 결정된 사드 배치를 반대하기 위해 여전히 고군분투 중이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의 인권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난한 열거법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민주주의의 배반 속에서 과연진보는 어떻게 이루어나갈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시민들이 그토록 선망하는민주주의그 자체는 무엇인가?

김명인은 민주주의가 배반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반합리주의적이라고 진단하며 기형적인 근대화 속도로 인해 그동안 한국 사회가 체화하지 못했던근대적 합리주의를 이제는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명인이 생각하는근대적 합리주의란 투입과 산출에 따라 예측이 가능한 상태이다. 투입과 산출에 적용할 항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김명인은민중의 생존권공공의 행복을 위해합리성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구축해야 할 정신적 인프라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김명인의 주장에는 합리성만으로 예측할 수 없는 배제의 가능성이 도사린다.

먼저 김명인이 지향하는 근대주의적 합리주의는 합리성 즉 이성적 사고를 토대로 한특정공론장을 전제로 한다. 합리적인 이성은 대상을 전제하여 관념을 중심으로 적절한 산출과 투입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다. 이 과정은 산출과 투입을 결정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작동될 수 있으며 투입과 산출이라는 관념적인 방식에 맞지 않는, 합치할 수 없는 주장은 배제될 가능성이 있다. 즉 근대적 합리주의에는 산출과 투입 과정조차도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배제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적 합리주의가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계속해서 지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한 대안은 근대적 합리주의의 통합적인 방식보다 기존에 형성되어있던 공론장을 균열시키고 틈새를 벌려 또 다른 배제의 목소리를 공론장에 참여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이는 김명인이 언급한 합리성보다는 몸과 몸으로 부딪혀 공론장의 지평을 넓혀가는 갈등적 민주주의에서 발견될 수 있다.

 

 

일상의 정치화, 정치의 일상화

 

단단하게 형성된 공론장에 틈새를 벌려 새로운 목소리를 들려주는 일이야말로 문학이 할 수 있는 하나의 역할이 아닐까. 격변했던 한국 근대화를 몸으로 직접 거쳐 온 김명인은 그가 맞닥뜨린 사회 현실뿐만 아니라 문학 사조 역시 비판적으로 들여다본다. 그에 따르면 사회 현실문제와 불가분한 관계를 지닌 문학 사조 또한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무엇이 한국 문학의 바람직한 형상일 수 있을까에 관한 깊숙한 성찰과 비판도 들여다볼 시간도 없이 맞이한 2000년대는 소위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괴물의 모양새를 가진 무정한 자본의 논리가 마음 놓고 판을 치는 시대이다. 이미 한국 사회를 덮친 이 괴물 앞에 자그만 한국 문학의 판 역시 속수무책이었고 이미 한국의 다른 제도와 마찬가지로 기성화된 일부 문단 권력은 자신을 성찰할 여유도 없이 대중의 입맛에 맞는, 더 잘 팔릴 수 있는 작품들을 쏟아냈다. 김명인이 바라본 2000년대에 횡행한 작품들은 대개 일상에서 포착할 수 있는 얄팍한 감성을 풀어낸 것들로 주를 이루었고지성과 공동체적윤리성이 결여된일차원적인 감각만을 자극하는 값싼 소모품으로 전시되었다.

현대 한국 문학 사조에 대한 김명인의 뼈아픈 진단은 아직도 유효하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와 더불어 문학의 판에도 뿌리내린 상업주의와 고착된 문단 권력은 신경숙의 표절문제가 불거졌을 때 대다수 문학인의 침묵과 방관으로 인해 막혀버렸던 공론장, 하나의 고발 이후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속속히 드러난 문단 내 성폭력 사건 등과 같이 수면 위로 튀어나오는 돌기들을 통해 훤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 문학의 기성화, 문단의 권력화는 80년대 이후의 한국 문학 작품에서 드러나는 사회 비판의식의 결여와 맞물린다. 김명인은 그 속에서 한국 문학의 매너리즘 속에서 문학을 통한일상적 정치, 정치적 일상으로의 변혁을 기원한다.

김명인이 강조한 일상적 정치, 정치적 일상을 향한 바람은 1969년 캐롤 해니시의 선언이 천명하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제2물결 페미니즘의 주요 슬로건에서 이미 드러나기 시작했다. 공론장에 참여하지 못하는 배제 당한 목소리, 거대 담론과 이분법에 갇혀서 새어 나오지 못한 일상적 존재의 목소리, 차별에 억눌린 목소리를 끌어내어 감추어진 존재를 드러내는 일은 문학과 정치가 할 수 있는 공통의 역할일 것이다. 도미니카의 소설가 진 리스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라는 작품을 통해 19세기 고전 <제인에어>의 백인 중심적 서사에서 삭제되었던 광녀 앙투아네트의 목소리를 새롭게 발굴하고 나아가 기존의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전복한다. 이처럼 배제된 목소리를 수면 위로 드러내는 문학의 사회적 역할로 비추어 봤을 때 과연 현대 한국문학은 그 역할을 적절히 수행하고 있는가?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지성을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 말들의 카니발현장을 한국문학에서 목도하기 위해서는 문학의 판을 구성하는 이들이 안락한 자리에서 벗어나 그 판을 깨뜨리는 불온한문학의 등장을 위해 무거운 돌을 삼켜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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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2.14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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