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6.08 11:41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그림으로부터 본 문화

-마크 로스코의 전시를 중심으로

 

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이소라

 

관람객과 소통하는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그림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가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이를 시각적으로 잘 나타내는 것은 그림이고, 마크 로스코는 이를 매우 잘 충족시키는 예술가라고 생각하여 마크 로스코전을 문화 체험의 장소로 선택했다. 그가 그린 그림들은 주로 추상주의 작품들인데 추상화라는 예술 작품을 매개체로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어떻게 그림 속에 담아냈을지, 관람객들에게 시각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큰 관심이 있었다. 추상화는 외부세계를 나타내는 요소를 제거하고 오로지 예술가의 내면세계만을 표현하기 위해 발전한 양식이기 때문에 화가의 감정을 매우 잘 나타내는 그림이다.

그는 그림에 자기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이를 관람객이 정서적으로 공감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표현성을 추구하면서도 자신의 그림을 통해 관람객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크 로스코전시는 그의 작품 경향에 따라 초기 작품부터 순서대로 5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의 그림이 시작되는 입구 부분의 벽 중앙에는 다음과 같은 마크 로스코의 말이 있었다. “그림은 사람과 교감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며 감상자에 의해 확장되고 성장한다.” 이는 그의 그림에 대한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나는 문장이다.

 

1. 신화제작자(Mythmaker) -신화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는 감정

그의 초기작은 주로 신화를 바탕으로 한 그림이 많아서 전시장의 초반에는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을 볼 수 있었다. 과거 고대인의 신화를 이용한 것은 감정적인 부분을 있는 그대로의 날 것으로 더 잘 표현해서 그림에 담긴 감정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마크 로스코는 예술가는 아이와 같아야 한다.”라는 말을 했다. 아이들은 감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솔직하게 표현한다. 그는 아이들처럼 자유롭고 순수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중시했다.

또 독일의 생물학자 헤켈(Ernst Heinrich Haeckel)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되풀이한다.”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사람의 유년시절은 인류 역사의 초기 단계를 반복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술가가 아이와 같다면 인류 역사의 초기 단계는 원시인이나 고대인이고 이는 곧 예술가가 이들을 계승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1942년 로스코는 신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며 거기에 자신이 느낀 불안과 공포를 표현했다. 이는 당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인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불안감과 위기의식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의 신화적 그림에는 당시 사람들이 처한 비극적인 사회상을 직시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2. 색채의 시대(Age of Colour)- Multiform

로스코 작품의 세계에서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들을 지나 전시장의 두 번째 구역에 다다르면 색채의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마크 로스코가 그린 그림들의 대부분에서 감정을 전달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색채이다. 특정한 색을 자주 쓰는 것은 그 사람의 정서를 나타내며 색채는 감정적이기 때문에 그림에 나타내는 색채에 따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캔버스의 크기도 점점 커졌는데 커다란 캔버스 안에서 색채들이 자유롭게 떠다니며 퍼지다가 다시 뭉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림마다 색채가 배치된 방법도 다양하고 색채를 그려낸 기법도 다양해서 그가 전하려는 여러 감정들을 복합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진1] NO.2 (넘버2) 1947 캔버스에 오일

 

 그의 이러한 형식의 작품들을 사람들은 멀티폼(Multiform)이라 칭하며 종종 살아있는 유기체로 비유한다. 워싱턴 내셔널갤러리의 큐레이터인 해리 쿠퍼(Harry Cooper)는 그의 에세이에서 멀티폼을 생명 기원 이론인 원시 수프(primordial soup)’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과 관람객이 만나 소통이라는 스파크가 더해지면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가 탄생하여 감정이 살아서 전달된다.

 로스코는 그림에 비극을 표현하여 관람객에게 비극적 숙명에 처한 인간을 직시하게 했고 비극, 황홀과 같은 인간 고유의 감정을 작품에 표현하고자 했다. 비극적인 모습의 그림 이면에는 밝은 에너지를 내뿜는 모습도 존재해서 사람들의 감정을 치유하는 역할도 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고 감정의 소통을 이룬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는 관람객이 자신의 그림을 보고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다는 사실은 곧 자신이 그것을 그릴 때 느낀 것과 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는 것이며 자신이 인간의 기본 감정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했다.

 또한 그는 색채를 통해 자신의 회화 작품에 내면세계의 감정을 표현하여 관람객의 내면과 소통하였다. 그리고 한 곡의 음악처럼, 한 편의 드라마처럼 전달하여 관람객에게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전시장에 자신의 그림을 내걸 때는 그림의 배치에서부터 조명의 밝기와 비추는 각도까지 섬세하게 신경 쓰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과 관람객 사이에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져서 그가 그림에 담은 감정이 보는 이에게 잘 전달되도록 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예술에 있어 감정을 표현하고 소통하여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진정한 예술을 완성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렇게 빚어진 예술은 곧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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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6.08 11:39

우리는 무슨 색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가?

- 영화 <라라랜드>를 보고 나서

 

경제학과 석박통합과정생 배보근

 

 대학원에 진학한 지 어느덧 3년이 되었다. 다양한 경험을 하는 다채로운 삶보다는 반복적인 시간과 똑같은 공간이라는 일상 속에서 특별함을 잃어가는 기분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길이 나에게 맞는 것인가?’ 스스로 물음을 던져본다. 남들과 조금은 다른 선택을 한 나에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맞다, 남들과 비교하지 말자.’라는 말로 위안을 하면서 하루를 버틴다. 앞으로 맞닥뜨릴 많은 일과 고민, 그리고 더 많은 비교 대상들이 난무하겠지만 미래에 대한 꿈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딛고 있다.

 그렇게 대학원 생활에 적응하면서 평소에 즐기던 문화생활과 여행은 추억으로 남기게 될 즈음에 라라랜드를 보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너무 강렬하게 라라랜드라는 영화가 마음에 닿았다. 어디에서나 봤을 것 같은 꿈과 사랑이라는 이중적 플롯을 지닌 영화이지만 화려한 카메라 기술과 감독의 세심한 손길로 세밀하게 만든 수작이다. 특히 재즈의 변주, 색의 변화 등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전개방식과 배우들의 연기력은 정말 흠잡을 데 없이 감탄을 자아낸다. 그래서 감독의 섬세함 하나하나를 이야기하지 않기에는 아까워 (color)’이라는 소재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라라랜드에서 가장 매혹적인 것은 배색이다. 초반에 화려한 원색의 향연에만 눈을 빼앗기기 쉽지만 단 한 장면도 색을 허투루 사용한 장면이 없다.

 첫 번째로 원색과 검정(무채색)의 대비이다. 이것은 꿈이라는 화려함과 현실이라는 어두움의 대비를 말한다. 극 중에는 이런 두 요소를 대비시키는 장면이 수도 없이 반복된다. 오프닝 곡인 ‘another day of sun’의 가사를 잘 들어보면, ‘불빛이 사라진 관객석’, ‘빛들이 수 놓인 스크린'이라는 의미의 가사가 나온다. 원색이 표방하는 화려함은 무대와 음악, 배우라는 예술인들의 꿈, 그런 꿈을 향한 순수함을 나타낸다. 반면에 검은색은 생활고와 먹고사니즘과 같은 꿈과는 거리가 먼 삶과 현실을 나타낸다. 미아의 오디션 장면은 항상 원색 배경에 원색 의상이며, 미아가 봄에 간 파티에서는 원색 옷의 파티 참가자들과 검은색 옷의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연애를 하기 전 미아의 의상은 원색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리고 메신저스 일을 하는 세바스찬은 아예 다 검은색 옷을 입고 있다.

 두 번째로 사랑을 표현한 보라색이다. 영화 포스터를 장식한 것처럼 보라색은 극 중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색이다. 세바스찬과 미아가 언덕 위에서 처음 본 하늘의 색, 영화 관람을 약속한 후 세바스찬이 부두에서 본 하늘색, 연애를 시작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장면에서 쓰레기통, 이 장면에서 미아의 가방색, 집에서 둘이 피아노 앞에서 노래할 때 미아의 드레스, 회상 신에서 미아가 성황리에 연극을 마친 뒤 입고 있는 보라색 원톤 드레스, 마지막 신에서 홈 비디오의 마지막 장면에서 미아의 의상이 그렇다. 영화의 색이 워낙 화려하다 보니까 색을 중구난방으로 쓰는 것 같지만, 몇몇 색은 특정한 장면에서만 사용한다. 그 중 첫 번째로 보라색은 사물에는 대체로 진한 보라색, 미아의 의상은 연보라색, 하늘은 파스텔 톤으로 표현한다. 좀 더 나아가면 파스텔은 전반적으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색으로, 연애를 시작한 미아의 의상은 전반적으로 원색에서 파스텔 톤으로 바뀐다. 데이트하는 세바스찬의 의상도 흰 셔츠 일색에서 파스텔 톤으로 변한다.

 세 번째로 의상의 변화이다. 세바스찬이 브라운 수트를 몇 번 입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지막 피아노 치는 장면에서 단 한 번 올 브라운 수트를 입는다. 중간에는 톤이 업된 브라운 수트를 미아와 첫 영화 관람 때와 친구의 파티에서 연주할 때 두 번 입고 나온다. 이는 둘 다 사랑스러운 감정, 순수함의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브라운은 세바스찬에게 퍼스널 컬러이다. 그러므로 격동의 시기를 보내는 영화 중간에는 브라운의 색이 나오지 않는다. 잘 보이지도 않고 아무도 신경 쓰지도 않을 극의 첫 장면, 세바스찬의 첫 장면인 고속도로 위에서 브라운 셔츠를 입고 있다. 그 상태로 삼바 타파스 앞에서 자신의 꿈인 재즈 클럽을 한 번 더 되새긴다. 세바스찬이 삼바 타파스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집에 돌아가 누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피아노 앞에 앉아 피아노를 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감독이 연속된 장면에서 의상을 구분해서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브라운이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위의 세 장면은 분명 연속된 장면이다. 하지만 의상을 통해서 시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간 장면에서 현실에 쫓기는 세바스찬의 셔츠는 어두운 회색 내지 밝은 검정으로 봐도 좋다. 시간상으로 연속된 장면이라고 구성할 수 있는 장면들을 굳이 나눈 것이다. 자신의 꿈인 재즈클럽 사장을 되뇌는 세바스찬과 피아노 앞에서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 세바스찬을 순수한 브라운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색의 의상을 극 중간에는 전혀 입지 않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셉스(Seb’s)의 사장으로 나타났을 때 입고 나옴으로써 순수한 자신의 꿈을 이뤘다는 것을 시사한다.

 네 번째로 조명을 이용한 색의 변화이다. 색에 관한 감독의 섬세함은 조명을 봤을 때 더욱 두드러진다. 세바스찬이 클럽에서 징글벨을 연주하는 장면에서, 처음 클럽에 입장하면서 사장과 인사하고 피아노에 앉기 전까지 세바스찬의 의상은 검정과 흰색이다. 전형적인 현실의 색. 하지만 피아노에 앉은 세바스찬에게 조명이 약간 밝아지면서 짙은 푸른색, 그리고 연주에 몰두할 때는 파란색으로 더 밝아진다. 생활고에 쫓겨 어쩔 수 없이 싫어하는 곡을 연주하는 세바스찬의 심경과 곧 꿈에 대한 열정을 찾는 변화를 같은 의상, 다른 조명으로 표현한 멋진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다섯 번째로 5년 뒤의 마지막 장면에서의 의상 색이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소름 돋았던 순간은 5년 뒤 장면에서 차에서 내린 미아의 의상을 보는 순간이었다. 절대 무채색만의 의상은 입지 않았던 미아가 완전한 흰색과 검은색의 드레스를 입었다. 그리고 액세서리마저도 투명한 다이아몬드로 바뀌어 있다. 이전에는 에메랄드 목걸이, 녹색 귀걸이를 주로 했다. 배우라는 꿈을 이뤘기 때문에 연기는 더 이상 꿈이 아닌 생활, 즉 현실이 되었다. 혹은 5년의 시간 동안 성공을 위해서 현실적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세바스찬은 엄청난 성공은 이루지는 못했지만 재즈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욕심, 재즈 클럽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그를 표현한 브라운의 수트는 순수한 꿈을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영화를 보는 내내 세심하게 표현한 색들에 매료되어 있었다. 두 주인공은 꿈과 현실이라는 고민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과 너무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극 중의 색들을 자연스레 삶에 반영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슨 색을 꿈꾸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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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4.08 16:20

재원의 성격으로 충족되지 않는 공공성 - 자율과 참여로 공공의 가치 구현해야

 

 

 

김소연_연극평론가

 

 

대학로X포럼은 페이스북 그룹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연극 및 공연예술인들의 토론 플랫폼으로 현재 뜨거운 논쟁이 진행 중이다. 그 중 하나인 지난 해 국립극단에서 진행된 창작극 개발 프로젝트작가의 방’. 논쟁은 한겨레 기사, “[단독] 국립극단도 검열했다... “‘개구리같은 작품 쓰지 말라강요”(2017316.)에서 촉발되었는데, 이 프로그램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미 계간 [연극평론] 2017년 봄호에 발표된 고연옥의 기고국립극단 작가의 방’, 왜 극작가를 교육, 교정하려 하는가?”에서 있었다. 두 글의 제목에서도 대비되듯이 지금 논쟁은 국립극단이 운영한 특정 프로그램에 한정되는 것이 아닌 공공극장의 공공성에 대한 여러 쟁점들로 전개되고 있다.

 

 

검열과 공공극장

 

검열은 최순실 게이트에서 시작되어 대통령 탄핵심판까지 이어진 일련의 과정에서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비록대통령(박근혜)탄핵소추안에 블랙리스트 작성과 실행이 포함되지 않아 탄핵심판에서 다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미 김기춘, 조윤선이 구속되었고 앞으로 진행될 박근혜 전 대통령 수사에서도 검열은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주요한 사건으로 다뤄질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여론은 박근혜 정부의 검열이 밝혀질 만큼 밝혀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특검 수사가 김기춘, 조윤선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검열의 기획, 실행, 지시를 밝혔다고 하지만, 그 구체적 실행과정까지 밝힌 것은 아니다. 또한 특검의 수사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작가, 단체, 작품에 대한) 직접지원에 한정되어 있을 뿐, 국공립기관단체의 검열 정황에 대해서는 수사조차 시작되지 않았다. 이것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잇단사과에 대한 예술계의 반응이 차가운 이유다. 사과 받고 싶어도 무엇을 사과 받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겨레 보도는 검열이 국립극단, 즉 국공립기관단체에서도 이루어졌다는 증언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보도 이후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홈페이지를 통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발언이 있었지만 직원 개인의 견해라는 사과문을 발표한다. 곧이어개인의 견해로 지목된 정명주 국립극단 공연기획팀장은“(국립극단은) 소수의 편향적인 의견으로 비판받지 않을 수 있는 다수의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 와전된 것이라는 해명을 대학로X포럼에 게시한다.

이에 대해 처음 문제제기를 기고한 고연옥 작가‘( 작가의 방책임작가)를 비롯해 구자혜, 김슬기 등 참여 작가들은작가의 방에 대한 논란이 검열이냐 아니냐에 대한 사실 확인으로 축소되는 것을 우려한다는 글을 각자의 페이스북에 게시한다. ‘개구리같은 작품은 쓰지 말라(이든 그런 논란을 국립극단은 피해야 한다이든)는 검열 혹은 가이드라인만이 아니라 모호한 계획, 급작스러운 프로그램 변경 등등 국립극단 측은 작가들에게는 내내 불편한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국립극단은 모호하게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성과(그런데 그 성과의 기준 역시 모호하다)만을 암암리에 재촉하는 무례하고 무책임한 권력이었던 셈이다.

한편, <개구리> 논란이 검열 사태로 이어지는 동안 이 작품의 제작자인 국립극단은 어떠한 책임 있는 태도를 취했는가[김재엽], 검열 논란에 명확한 답변을 회피하는 것은 (공공단체인) 국립극단의 책임방기이다[임인자], 국립극단이 (공공단체로서) 객관적인 공론을 중시한다면 먼저 공론장을 만들어라[이연주] 등등의 의견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각주:1]

 

 

공공극장의 공공성에 대한 질문들

 

다소 길게 국립극단작가의 방논란을 소개하는 이유는, 박근혜 정부의 검열이 박근혜, 김기춘, 조윤선 등의 불법 행위에 한정되지 않는 공공극장 공공성의 허약한 토대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검열이냐 가이드라인이냐, 강요냐 의견제시냐는 문제를 회피하는 의도적 논란이다. 직원 개인의 견해라는 해명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연옥 책임 작가를 비롯하여 참여 작가들의 증언 그리고 국립극단 측의 해명에서 드러나듯이 국립극단에서 공연하고 싶으면 논란을 일으키는 작품은 쓰지 말라는 메시지로 발화되었고 그렇게 수용되었다. 이는 근거 없는 모호한 기준으로 창작을 제한하는 검열이다.)

작가의 방참여 작가들을 비롯하여 이번 논쟁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국립극단의책임이다. 왜 국립극단은 작가를 존중하지 않는가, 왜 국립극단은 제작한 작품의 책임을 예술가 개인에게 떠넘기는가, 왜 국립극단은 검열이라는 사태 앞에서 명백한 해명과 입장을 제시하지 않는가, 왜 국립극단은 예술에 당연히따르게 마련인 서로 다른 견해의 충돌을 건강한 공론장으로 수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이러한 문제제기에는 국립극단이 국가의 공적 재원으로 운영되는 공공단체로서, 특히 연극계의 공적자원의 상당 부분이 집중되어 있는 공공단체, 공공극장을 운영하는 공공기관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공적 의무에 대한 질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공공재원으로 운영되는 극장을 공공극장이라고 부른다. 직접 공연을 제작하지 않고 공연단체들에게 발표공간으로 제공되는 대관 중심 공공극장(대표적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운영하는 아르코예술극장, 대학로예술극장을 들 수 있다)이든 직접 공연을 제작하고 자체 제작공연으로 극장을 운영하는 제작 중심 공공극장(대표적으로 국립극단이 운영하는 명동예술극장, 국립중앙극장 등을 들 수 있다)이든 대관료와 티켓 수입이 있지만 운영의 대부분은 공적 자금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공공극장은 공공재원이 투입된다는 이유로 정부 행정조직에 준하는 운영규칙을 따른다.

국가가 이렇게 공적 자금으로 극장을 운영하는 이유는, 극장과 예술의 공공적 가치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공공극장을 운영하는 주체들은 극장과 예술의 공공적 가치에 대한 질문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법을 준수하고 (불법 검열을 거부하고), 공적 재원으로 한국 연극의 미래를 발굴하며 (예술가들은 기관의 사업 목표를 수행하는 용역계약자가 아닌 파트너이며), 논쟁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 극장이 우리 사회의 이슈에 대해 생산적인 논쟁을 벌이는 공론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 이것이 공공극장의 공공성이 아니냐는 질문이다.

 

공공극장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

 

지난 가을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 선고가 내려질 때까지 광화문광장에는 매주 시민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촛불을 들고 모였다. 바로 그 광장 한복판에서 세워진광장극장블랙텐드천막극장에서는 겨울 내내 공연이 올라갔다. 17일 천막극장을 설치하고 16일 극단 고래 <빨간시>를 시작으로 탄핵심판 다음 날인 311일 야외퍼포먼스 <우리가 헌법이다_헌법퍼포먼스>로 마지막 프로그램을 끝낸 후 318일 천막극장이 해체되는 과정까지.. 이 극장은 기부와 후원 등의 자율적 참여로 운영되었다. 한겨울 새벽, 연극인, 동료예술가, 광화문캠핑촌의 해고노동자 그리고 시민들이 함께 자재를 나르고 뼈대를 세웠다. 해체 역시 연대의 퍼포먼스였다. 모든 공연은 일체의 제작비나 개런티 없이 진행되었고, 공연 팀은 공연만이 아니라 극장 운영의 공동 운영자로 극장 관리와 공연 진행을 함께 했다. 극장운영위원들은 보드이자 스탭으로서 프로그래밍을 비롯하여 극장의 운영방향을 논의하고 결정하고 실행했다. 직접 공연을 올리지 않았지만 젊은 연출가들은 극장무대감독으로 공연 팀의 공연 진행을 돕고 극장운영에 참여했다.

광장극장블랙텐트의 이러한 경험은 공공극장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넓혀준다. 광장극장블랙텐트 선언문에서는 이 극장이 박근혜 정부의 공공극장이 배제한 약한 자, 억압받는 자들의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임시 공공극장이며, 시민들과 함께 연극의 미학적 과제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실험극장이라고 선언한다. 비록 제한된 조건이었지만, 극장 프로그램은 물론 운영에서도 공공극장이 구현해야 할 공공의 가치란 무엇인가를 계속 질문하고 그 답을 구하고자 실천했으며 동료들과 시민들을 설득하고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공적 재원으로 운영되는 그래서 공공극장이라 불리는 우리의 공공극장들이 하지 않았던 질문들을 광장극장블랙텐트는 스스로 던지고 실천했다. 이러한 노력이 있을 때에야 공공극장의 공공성은 우리 사회에 자리 잡을 것이다.

비단 광장극장블랙텐트만이 아니다. 지난 해 5개월간 계속 되었던권리장전 2016 검열각하를 비롯하여 검열과 정책파행으로 창작환경이 극도로 위축되어 있던 박근혜 정부 시절 연극계에서는 무엇보다 연대가 활발했다. 연출가동인제로 운영되는 연극실험실혜화동1번지의세월호를 비롯한 일련의 기획들, 젊은 연극인들의 연대로 운영되고 있는화학작용’, 끊임없이 미학적 급진성만을 요구하는 신진 지원 프로그램들과 달리 혹은 그러한 프로그램들마저도 돌아보지 않는 20대 연극인들의 연대로 치러지고 있는이십할페스티벌등 이미 연극계에는 다양한 이슈와 과제를 중심으로 한 자발적 네트워크가 활발하다. 앞서 언급한 대학로X포럼은 서울연극제대관탈락 사태 때 공공극장의 공공성 훼손의 문제에 대해 연극인 개개인의 연대로 토론회를 개최하면서 시작되어 연극계의 공론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검열과 문화정책 파행으로 연극계의 창작환경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검열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국공립극장들에서도 배제가 이루어졌던 정황들은 너무나 많다. 국공립극장들에 공적 자원이 집중되어 있는 현실에서 이에 대한 진상규명은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이 과정에서 연극계의 다양한 노력들로 연극의 공공성, 극장의 공공성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공적 제도에 기입하는 것 또한 중요한 과제다. 이제 공적 재원과 행정조직운영규칙이 아닌 공공적 가치를 묻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공공극장을 상상하고 실천할 때다. 우리가 새롭게 만들어야 할 공공극장은 자율적 운영과 참여로 공공성에 대한 건강한 공론장을 형성하는 그런 극장이어야 한다.

  1. 주1) 국립극단‘작가의 방’에 대한 각 필자들의 글은 페이스북 그룹‘대학로X포럼’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facebook.com/groups/1524165964529525/permalink/189617944399484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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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4.0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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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4.08 15:54

 

어느 대학원생의 고백

 

 

강보름 _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현재 내 상황을 가장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 가난한 대학원생.

어려운 집안형편에 대학도 아등바등 겨우 마쳤으면서 마음의 소리를 좇겠다며 대학원에 진학했고, 돈 안 되는 인문학 중에서도 으뜸인 현대 문학을 전공한다. 이에 더해 연극으로 먹고 살고 싶다는 풍운의 꿈까지 안고 있다.

논문 학기임에도 아르바이트를 쉴 수 없는 불우한 신세지만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우스운 이유겠지만, 한 줄의 문장에 담긴 인생이 가슴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들 때문이다.

26살이 되어 다시 읽은 채만식의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 속 문장들이다.

 

인텔리... 인텔리 중에도 아무런 기술 없이 대학 졸업 증서 한 장을 또는 조그마한 보통 상식을 가진 직업 없는 인텔리...

해마다 천여 명씩 늘어가는 인텔리... 뱀을 본 것은 이들 인텔리다.

부르주아지의 모든 기관이 포화 상태가 되어 더 수요가 아니 되니 그들은 결국 꾐을 받아 나무에 올라갔다가 흔들리는 셈이다. 개밥의 도토리다.

인텔리가 아니 되었으면 차라리 노동자가 되었을 것인데 인텔리인지라 그 속에는 들어갔다가도 도로 달아나오는 것이 99퍼센트다.

그 나머지는 모두 어깨가 축 처진 무직 인텔리요, 무기력한 문화 예비군 속에서 푸른 한숨만 쉬는 초상집의 주인 없는 개들이다.

레디메이드 인생이다.

- 채만식, <레디메이드 인생>, 문학과지성사, 47

 

, 풍자의 쾌감이 밀려오는 동시에 답답해진다. 80여 년이 지나도 똑같다. 채만식이 1934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단편소설 속 시대상은 2017년의 상황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만치 꼭 닮아 있다.

매 주 토요일마다 뜨거워지는 광화문 광장을 바라보며 나는 도리어 자괴감을 느꼈다. 자본주의 사회의 잉여인간인 가난한 대학원생은 광장에 나갈 자격조차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사회를 위한 어떠한 생산적 노동에 기여함도 없으면서 민주주의와 정의를 외치는 것은 자기 분열적 모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상에 홀로 서는 것이 두려워 소속감을 필요로 했던 내게, 대학원은 좋은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광장으로 가기까지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어쩌면 핑계 대기에 급급한 이 상황이, 예비연구자는커녕 제대로 된 비경제활동인구[각주:1] 몫도 해내지 못하는 나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드는 듯하다.

광장이냐, 연구실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렇게 고민만 하는 사이 광장에는 다시 봄이 찾아 왔다. 더욱 더 커진 부채감을 안고, 나라는 한 인간의 쓸모를 고민하며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 논문을 붙들고 있다.

  1. 만 15세가 넘은 인구 가운데 취업자도 실업자도 아닌 사람, 곧 일할 수 있는 능력은 있으나 일할 의사가 없거나, 전혀 일할 능력이 없어 노동공급에 기여하지 못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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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4.08 15:50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를 읽고

 

신문방송학과 전공 석사과정 황민아

 

   

이 책은 사회변혁 운동가이자 문학평론가인 김명인이 기록한 2000년대 전후의 글들로 구성된 책이다. 한때는 유신체제와 신군부로 대변되는 독재 권력에 맞서 사회변혁 운동으로 80년대를 살아낸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또 다른 한때는 80년대를 지나 90년대 이후 문학의 변화상을 감시하고 비판해온 문학비평가로서 살아온 김명인은 한국 사회의 모습을 망원경 혹은 현미경의 거리로 일축일신하며 한국 사회의 문제와 일상을 들여다보고 비판한다. 특히 2000년대 참여정부 시절 돌기처럼 솟아올랐던 정치경제적 문제와 사회문화문제를 토대로 고찰한 김명인의 글은 현재에도 유효한 근원적인 사회 문제 진단과 그 통찰력을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이 지난 이 시점, 본 글은 김명인의 비평이 놓치고 있었던 부분과 그의 논의에서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부분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계속되는) 민주주의의 배반

 

박근혜와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인해 한국사회의 썩고 추악한 모습이 겹겹이 드러나고 있는 현재, 대다수의 한국 시민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과 함께 분노와 참담함으로 엉킨 일상들을 보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혹자는 보수 정권이 들어섰던 지난 10여 년 동안 이루어진 민주주의의 퇴행을 강력하게 역설하며한때집권했던 진보당의 시절을 장밋빛으로 물들여 회상하기도 한다. 자신들 앞에 당면한 사회적인 혼란과 정의롭지 못한 기득권의 민낯을 직시하며 잠시라도 분노를 잊고 싶어서일까.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병리를 더욱 곪게 하여 폭발시켜 버린 박근혜 정권의 병폐 아래 사람들은 다시는 마주 할 수 없기에 실컷 좋았다고 생각하기 쉬운 과거로 회귀하기도 한다. 단적인 예로 <무현, 두 도시 이야기>라는 노무현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개봉하는 등 노무현을 향한 노스탤지어가 만연해도 이상하지 않은 이 시점, 참여정부 시절에 기록된 김명인의 비평문은 우리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다. 과연 그때의 민주주의는 우리를 배반하지 않았는가? ‘우리에 과연 누가 포함될 수 있는가를 세밀하게 따져보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참여정부 시절의 민주주의 역시우리를 배반하였고 앞으로도 민주주의의 배반은 계속될 것이라는 게 나의 대답이다.

밀레니엄이라는 허공의 숫자가 매겨진 지 약 10년 후가 지난 한국 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김명인이 들여다본 10년 전의 모습들과 많이 겹친다. 꿉꿉한 뱀은 탈피만 할 뿐 여전히 그 몸체를 가지고 있듯이 신자유주의 질주는 멈추지 않고 경제적 약자, 비정규직의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인간적인 유대는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어 하나의 사물로 취급된다. 성주 주민들은 한미동맹이라는 핑계로 결정된 사드 배치를 반대하기 위해 여전히 고군분투 중이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의 인권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난한 열거법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민주주의의 배반 속에서 과연진보는 어떻게 이루어나갈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시민들이 그토록 선망하는민주주의그 자체는 무엇인가?

김명인은 민주주의가 배반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반합리주의적이라고 진단하며 기형적인 근대화 속도로 인해 그동안 한국 사회가 체화하지 못했던근대적 합리주의를 이제는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명인이 생각하는근대적 합리주의란 투입과 산출에 따라 예측이 가능한 상태이다. 투입과 산출에 적용할 항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김명인은민중의 생존권공공의 행복을 위해합리성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구축해야 할 정신적 인프라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김명인의 주장에는 합리성만으로 예측할 수 없는 배제의 가능성이 도사린다.

먼저 김명인이 지향하는 근대주의적 합리주의는 합리성 즉 이성적 사고를 토대로 한특정공론장을 전제로 한다. 합리적인 이성은 대상을 전제하여 관념을 중심으로 적절한 산출과 투입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다. 이 과정은 산출과 투입을 결정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작동될 수 있으며 투입과 산출이라는 관념적인 방식에 맞지 않는, 합치할 수 없는 주장은 배제될 가능성이 있다. 즉 근대적 합리주의에는 산출과 투입 과정조차도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배제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적 합리주의가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계속해서 지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한 대안은 근대적 합리주의의 통합적인 방식보다 기존에 형성되어있던 공론장을 균열시키고 틈새를 벌려 또 다른 배제의 목소리를 공론장에 참여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이는 김명인이 언급한 합리성보다는 몸과 몸으로 부딪혀 공론장의 지평을 넓혀가는 갈등적 민주주의에서 발견될 수 있다.

 

 

일상의 정치화, 정치의 일상화

 

단단하게 형성된 공론장에 틈새를 벌려 새로운 목소리를 들려주는 일이야말로 문학이 할 수 있는 하나의 역할이 아닐까. 격변했던 한국 근대화를 몸으로 직접 거쳐 온 김명인은 그가 맞닥뜨린 사회 현실뿐만 아니라 문학 사조 역시 비판적으로 들여다본다. 그에 따르면 사회 현실문제와 불가분한 관계를 지닌 문학 사조 또한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무엇이 한국 문학의 바람직한 형상일 수 있을까에 관한 깊숙한 성찰과 비판도 들여다볼 시간도 없이 맞이한 2000년대는 소위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괴물의 모양새를 가진 무정한 자본의 논리가 마음 놓고 판을 치는 시대이다. 이미 한국 사회를 덮친 이 괴물 앞에 자그만 한국 문학의 판 역시 속수무책이었고 이미 한국의 다른 제도와 마찬가지로 기성화된 일부 문단 권력은 자신을 성찰할 여유도 없이 대중의 입맛에 맞는, 더 잘 팔릴 수 있는 작품들을 쏟아냈다. 김명인이 바라본 2000년대에 횡행한 작품들은 대개 일상에서 포착할 수 있는 얄팍한 감성을 풀어낸 것들로 주를 이루었고지성과 공동체적윤리성이 결여된일차원적인 감각만을 자극하는 값싼 소모품으로 전시되었다.

현대 한국 문학 사조에 대한 김명인의 뼈아픈 진단은 아직도 유효하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와 더불어 문학의 판에도 뿌리내린 상업주의와 고착된 문단 권력은 신경숙의 표절문제가 불거졌을 때 대다수 문학인의 침묵과 방관으로 인해 막혀버렸던 공론장, 하나의 고발 이후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속속히 드러난 문단 내 성폭력 사건 등과 같이 수면 위로 튀어나오는 돌기들을 통해 훤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 문학의 기성화, 문단의 권력화는 80년대 이후의 한국 문학 작품에서 드러나는 사회 비판의식의 결여와 맞물린다. 김명인은 그 속에서 한국 문학의 매너리즘 속에서 문학을 통한일상적 정치, 정치적 일상으로의 변혁을 기원한다.

김명인이 강조한 일상적 정치, 정치적 일상을 향한 바람은 1969년 캐롤 해니시의 선언이 천명하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제2물결 페미니즘의 주요 슬로건에서 이미 드러나기 시작했다. 공론장에 참여하지 못하는 배제 당한 목소리, 거대 담론과 이분법에 갇혀서 새어 나오지 못한 일상적 존재의 목소리, 차별에 억눌린 목소리를 끌어내어 감추어진 존재를 드러내는 일은 문학과 정치가 할 수 있는 공통의 역할일 것이다. 도미니카의 소설가 진 리스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라는 작품을 통해 19세기 고전 <제인에어>의 백인 중심적 서사에서 삭제되었던 광녀 앙투아네트의 목소리를 새롭게 발굴하고 나아가 기존의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전복한다. 이처럼 배제된 목소리를 수면 위로 드러내는 문학의 사회적 역할로 비추어 봤을 때 과연 현대 한국문학은 그 역할을 적절히 수행하고 있는가?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지성을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 말들의 카니발현장을 한국문학에서 목도하기 위해서는 문학의 판을 구성하는 이들이 안락한 자리에서 벗어나 그 판을 깨뜨리는 불온한문학의 등장을 위해 무거운 돌을 삼켜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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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2.14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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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2.14 15:20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을 보고

 

 

박효진 _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여성학 협동과정 석사과정

 

 

 

 

지난 9월 보건복지부는 불법 임신중절수술을 한 의료인에 대해 12개월의 강력한 자격정지 행정처분을 하는 입법예고안을 냈다. 이에 여성들은 거리로 나와‘검은 옷’을 입고‘낙태죄 반대’를 외쳤다. 이‘검은 시위’는 10월 3일 폴란드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를 뺏긴 것에 애도를 표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현재 폴란드 뿐 아니라 아일랜드, 아르헨티나 등 카톨릭 국가들에서 낙태죄를 강력하게 처벌하고 있다. 낙태죄는 단순히 산모의 임신중단권과 태아의 생명권의 문제를 넘어 국가의 출산율 장려 정책, 종교계의 권력, 의료 및 의약품계의 이해관계 등과 더불어 이해되어야 할 문제이다.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낙태를 둘러싼 이러한 다양한 갈등 요소들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낙태가 법적으로 전면 금지된 차우세스쿠 독재정권 시절의 루마니아를 배경으로 한다. 당시 루마니아 정부는 부국강병이라는 기치 아래 출산율 장려를 목적으로 극단적 낙태금지법을 시행했다. 이유를 불문하고 모든 낙태가 법적으로 금지되었고, 임신중절술을 시행한 의사와 산모 모두 적발되었을 시 10년이상의 징역형을 살아야 했으며, 심지어 콘돔, 피임약 등의 피임기구들도 국가에서 몰수하여 철저히 금지했다. 1966년 시행된 이 법은 89년 루마니아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무려 23년간 지속되었다.

 

 


아이를 기를 형편이 안 되는 상황에서 태어난 많은 아기들이 길거리에 버려지거나 고아원 등 시설에 맡겨졌고, 이는 심각한 영양결핍과 유아사망률 증가로 이어졌다. 또한 불법 낙태시술로 인해 매년 500여명의 여성이 출혈과 감염으로 사망하면서 1983년의 모성 사망비는 66년에 비해 7배 높아졌다. 이는 주변 국가인 불가리아나 체코보다 약 9배 정도 높은 비율이었다. 89년 낙태금지법이 철폐된 이듬해 모성사망비는 이전의 절반으로 감소했다.
영화의 주인공은 평범한 공대 여학생인 오틸리아다. 그녀의 기숙사 룸메이트 가비타는 뱃속에 4개월 하고도 3주가 지난 아이가 있고,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의사로부터 불법 낙태 시술을 받기로 되어 있다. 오틸리아는 가비타에게 낙태수술비를 빌려주고, 시술 장소인 호텔에 같이 간다. 의사는 자신이 징역을 살 수도 있는 위험한 수술을 단 돈 몇 푼에 해 줄 수 없다며 둘이 차례로 자신과 섹스를 하지 않을 거면 수술은 없던 일로 하겠다고 협박한다. 호텔비와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이미 여기저기서 돈을 꾸었을 뿐 아니라 하루하루 지체될수록 수술 위험이 커지는 상황에서 둘은 어쩔 수 없이 의사의 협박에 응하고 만다.
가비타가 아닌 오틸리아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스토리는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실질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만든다. 임신한 가비타가 유일하게 도움을 요청한 사람은 부모님도, 임신시킨 남자도 아닌 친구 오틸리아였다. 국가의 인구조절정책, 낙태금지법, 임신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남성 사이에서 오로지 불법이 되는 것은 여성의 몸이고, 이를 해결해야 하는 것도 여성들이다. 오틸리아 역시 언젠가 자기가 원치 않는 아이를 갖게 된다면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은 가비타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몸의 통제권을 뺏긴 여성들은 성폭행이나 고소, 협박 등으로부터도 안전하지 못하다. 가비타가 오틸리아와 나눈 고통과 두려움, 죄책감은 오롯이 배가 되어 돌아와 이들의 어깨를 짓누를 뿐이다.

오틸리아는 방금 수술을 마친 친구를 호텔에 혼자 두고 어쩔 수 없이 잠시 남자친구 어머니 생일파티 자리에 참석하게 된다. 어른들 사이에 낀 오틸리아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그저 불편하게 자리를 지킨다. 중년 남성들은 처음에 오틸리아에게 몇 가지 의례적이고 짐짓 무례한 호구 조사를 한 뒤엔 계속해서 의회 이야기, 정책 이야기, 경제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그러자 한 여성이“정치적인 이야기는 그만 하자”고 핀잔을 두며 부활절 달걀을 예쁘게 색칠하는 방법 같은 일견 사적인 이야기를 이어간다. 아무 의미 없이 삽입된 장면이라기엔 너무나 긴 일상적 대화가 식탁 위에서 오고 간다.

오틸리아가 방금 한 경험은 저녁 식사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이야기일까? 누군가의 낙태 경험은 정치적인 이야기일까, 사적인 이야기일까? 출산율과 태아의 생명권은 너무나 중요하고 공적인 문제이지만 섹스와 피임, 임신, 출산은 오로지 여성들만의 일이며 사적인 일이고, 게다가 낙태는 영원히 숨겨야 할 비밀이다.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를 논하는 데 있어서 정작 여성의 경험, 여성의 목소리는 배제되는 것이 현실이다. 여성의 몸은 국가와 종교, 의료계 등 다양한 이해관계의 전쟁터다. 가비타와 오틸리아의 경험은 가장 사적인 경험이면서 정치적 이슈의 최전선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의 기치인“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는 여전히 유효하다.
최근, 폴란드 여당 법과정의당은 낙태 전면금지법안을 폐기했다. 한국의 보건복지부는 기존에 12개월로 설정했던 입법예고안의 형량을 1개월로 낮추었다. 여성들의 절실한 목소리가 조금씩 세상을 움직인다. 낙태죄 폐지를 외치는 여성들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생명에 대한 책임을 여성들에게 전가하기 이전에 누구나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라는 것. 여성의 몸의 주체는 여성이며, 그것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본권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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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2.14 15:10

英祖의 對民詢問活動과 그 정치적 의미

 

 

주채영 _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학과 석사 졸업

 

 

‘詢問’이란 일반적으로 임금이 신하들에게 의견을 구하는 질의를 의미한다. 따라서 국왕이 국정을 운영하는 데 순문은 빠질 수 없는 정치 행위였다. 그렇지만 영조 대에 이르면 순문의 형태에 변화가 일어나 순문의 대상이 관료에서 백성으로 확대되었다. 영조는 능행길에서 백성들에게 농사의 형편을 묻거나 궐문 밖에 백성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생활상을 알아보았다.

조선 초부터 국왕은 民意를 파악하기 위한 방편으로 신문고를 설치한다거나, 擧動할 때 上言이나 擊錚등의 방법을 이용했다. 왕의 궁 밖 출입이 드물었던 조선 후기에 영조는 유난히 궐 밖 출입도 잦았고, 백성들과도 많이 접촉했다. 영조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백성들을 불러 ‘순문’했다. 궐 밖으로 출입이 많았기 때문에 이미 선대왕들에 비해 대민접촉의 기회가 많았음에도, 영조는‘순문’의 대상을 관료에서 궐 밖의 백성으로 확대했다. 백성을 대상으로 한 순문은 영조 재위기간 내내 계속되었다. 관료가 아닌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순문을 행한 것은 영조가 처음이었다. 충분한 대민 접촉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순문의 대상을 民으로 확장한 영조의 의도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 이 연구에서는 상언과 격쟁 등에도 적극 응하던 영조가 특별히 백성들에게 순문을 실시한 정치적 의도에 대해 알아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본 연구에서는 愛民∙爲民의 레토릭 뒤에 숨은 ‘정치 전략가’영조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Ⅰ. 英祖의 對民詢問추이
영조는 즉위 초부터 종묘나 능으로 자주 행차했기 때문에 민과 접촉할 기회도 많았다. 영조 즉위년(1724) 12월에 幸行에 나선 대가 앞에 서얼 260명이 난입하여 서얼 허통을 주장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영조는 궐을 나설 때면 으레 상언이나 격쟁을 장려했으며,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재위 원년(1725)에 懿陵에 다녀오다가 양주의 노인을 불러 직접고을의 폐단을 물어보았다. 이것이 민을 대상으로 하는 첫 순문이었다.
영조는 재위 기간 중 총 129회에 걸쳐 순문을 실시했으며, 순문의 내용 및 대상, 순문의 장소도 점차 확대해 나갔다. 영조의 대민순문 초기는 능행길에 만나는 농민들을 대상으로 農形을 파악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대민순문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영조는 국정 운영에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가장 대표적 사례가 바로 良役變通논의에 등장한 대민순문이었다. 영조는 재위 26년(1750), 100여 년간 결론을 내리지 못하던 양역변통 논의에 대해 전격적으로 대민순문을 실시했다. 이때는 양역변통에 대한 논의가 정점으로 치달을 때였다. 양반 엘리트층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논의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영조는 홍화문 밖에 士庶人을 불러 모아 놓고, 양역변통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이를 통해 영조는 균역법 실시의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영조가 균역법 시행과 관련하여 실시한 순문이 최소 4회였다. 균역법에 대한 논의가 완료되자, 영조는 이듬해 바로 새로운 정책 과제인 濬川문제를 제기하는 등 주제를 바꿔가면서 순문을 계속 실시했다.
영조 28년(1752)에는 순문의 대상에 큰 변화가 있었다. 貢人과 市人이 순문의 대상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주로 신분(士庶人) 혹은 지역민(방민, 경기도민, 향민 등)으로 구분하던 순문 대상에 貢∙市人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영조는 공∙시인을 선화문에 불러 놓고 그들에게 弊􂙰을 물었다. 이후 공∙시인을 대상으로 폐막을 묻는 순문은 총 26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영조는 재위 29년(1753)에 貢市堂上을 신설하였다. 이는 당시에 공∙시인과 관련한 현안들이 국정의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준천 시행이나 공시당상의 신설 등은 당시 사회가 도시화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따라서 영조는 재위 중반기를 넘어서면서 농정뿐 아니라 공시폐막도 대민순문의 주요 의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영조의 대민순문은 영조의 재위말년으로 가면서 다시 큰 변화를 맞는다. 바로 湯劑進御여부에 대한 순문이었다. 영조 50년(1774)에 처음 유생과 방민을 모아 놓고 탕제를 계속 마셔야 할지에 대해 순문했다. 그리고 51년(1775)에는 총 8회에 걸쳐 탕제 진어 여부를 순문했다. 같은 해에 실시한 순문의 주제 중 탕제 진어 여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또 다른 특징적 모습은 영조의 순문에 폐막이 없다고 답하거나 천세를 외치거나 聖德頌을 부르는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영조가 말년에 실시한 대민순문은 전반기와 같은 민정 파악이나 정책적 활용보다는 민을 대상으로 군주에 대한 충성을 받고자 했던 자리로 보인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에 따르면 영조가 행했던 대민순문의 특징을 시기에 따라 2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재위 전반기에는 민정을 살피거나 정책적인 의도를 갖고 대민순문을 실시한 경우가 많았다. 반면 후반기에는 군주로서의 권위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Ⅱ. 英祖의 對民詢問활용 의도
영조는 경종 시해 혐의를 안고, 노론의 지지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다. 따라서 그를 둘러싼 정통성 시비와 충역논란이 필연적이었다. 더욱이 재위 초반기에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대기근과 무신란 등으로 민심이 크게 동요했다. 영조는 어떻게든 민심을 안정시킬 방법을 찾아야 했다. 영조는 합문폐쇄와 전위소동과 같은 극단적 방법까지 동원하며, 신료들을 억누르고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잡고자 노력했다. 이반된 민심을 안정시키고, 자신이 구상한 정국을 운영하려면 신료들을 누를 수 있는 국왕만의 가치가 필요했다. 영조가 택한 방법은 성리학적 질서를 충실히 따르는 군주이자 백성을 사랑하는‘愛民∙爲民의 군주 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애민과 위민은 조선 건국 이래로 강조되어 온 가치였다. 영조는 이것을 자신만의 것으로 확보해야 민심도 잡고, 신료들과의 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영조가 택한 방법은 직접적인 대민접촉을 통해서 민의 실체를 현실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민에 대한 인식 전환을 통해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영조가 대민순문을 시작한 것도 위민과 애민의 군주 상을 자신만의 가치로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 때문이었다.
순문은 거동이 아닐 때에도 궐 밖에 백성들을 모아 놓고, 그들의 입으로 말하는 민의 형편을 들을 수 있는 장치였다. 또한 대민순문은 위민과 애민을 추구하는 임금과 조정 관료들이 순문현장에서 민이 요구한 것을 들어줘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영조는 위민∙애민의 군주 상을 내세워 정책 결정의 주도권도 행사할 수 있었다. 孝宗때부터 지적되어 온 양역폐단을 해결할 때에도 대민순문의 방법을 활용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중앙 군문을 강화함에 따라 군역에 대한 부담도 같이 증가했다. 그러나 군역을 짊어질 양정의 수는 줄었기 때문에 그 부담이 주변에 전가 되면서, 양정 한 사람이 져야 할 군역은 더욱 무거워졌다. 이 부담을 줄이는 방법은 양반층에게도 수포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양반 관료층은 갖가지 이유를 내세워 이에 대한 저항을 했고, 결국 양역변통 논의는 100여 년간 성과 없이 계속되었다. 영조는 자신의 손으로 이 문제를 매듭짓고자 했다. 이를 위해 영조는 전격적으로 대민순문을 시도했다. 그는 백성들을 모아 놓고 양역변통의 방법에 대해 질의했고, 백성들은 그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답했다. 영조는 이 자리에서 조정 관료들에게 그동안 실체 없이 다퉈왔던‘민의’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 양반 관료층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백성이 불편해한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할 명분이 없어졌다. 영조는 위민∙애민의 명분 싸움에서 현실에 존재하는 민의 존재를 소환함으로써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었다. 영조 재위 전반기에 행한 대민순문의 특징은 경전 속에만 존재하던 민을 실제 정치 현장으로 불러냄으로써, 위민과 애민의 가치를 선점할 수 있었다는 것과 이 가치를 이용해 정책 결정과정에 활용했다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반면 영조 재위 후반기는 국왕권 강화를 과시할 수 있는 전시성 정책들이 주를 이루었다. 영조는 의례나 의장을 정비하여 국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하였고, 궁 밖 행차나 거둥 등을 국왕의 위세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대민순문 활동에서도 유사한 모습이 나타났다. 즉위 후, 38년 동안 행한 대민순문이 총 46회였는데, 壬午禍變이후 親政에 복귀하여 진행한 대민순문이 83회로 거의 2배에 가까웠다. 주제나 대상에서는 농형과 공시폐막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는 전반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영조의 순문에 임하는 민의 태도에는 변화가 나타났다. 공∙시인들을 대상으로 한 순문에서‘폐단이 없다’는 답변이 나왔다. 여전히 공∙시인들이 관료 혹은 종친들의 폐행으로 고통 받는 현실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러한 반응은 영조의 기분을 거슬리지 않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 무렵 영조는 걸핏하면 대신들을 책망하고 나무라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사전에 순문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답변을 조율했을 가
능성도 있어 보였다.
재위 후반기에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위민이나 애민활동과는 전혀 관계없는‘탕제 진어 여부’가 순문의 주제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영조는 재위 50년(1774)과 51년(1775)에 유생과 방민들을 불러 모아 놓고 탕제 진어 여부를 여러 차례 순문했다. 탕제 진어 여부에 대해 묻는 자리에서 천세를 부르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탕제는 임금인 영조의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재위 기간 내내 君父의 모습을 추구했던 영조였다. 부모의 건강을 위해 탕제를 들기 간청하는 자식의 모습으로, 순문 자리에 모인 민들은 영조에게 탕제 마시기를 권했다. 영조는 이 자리를 통해 군부의 모습을 민에게 확인 받았다. 이 무렵 대민순문은 이전과 같이 민정을 살피고 정책의 도움을 받는 자리가 아니었다. 영조가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한 정치적 퍼포먼스(political performances)였다. 이 자리에서 영조는 총감독 겸 주인공이자 성군이었으며, 민들은 그의 선정으로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엑스트라이자 교화의 대상인 臣子였다. 이러한 모습들은 실상 독재자로 변한 영조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수단이었고, 신료와 민의 입장에서는 그의 신경을 건드려 일어날 풍파를 막기 위해 비위를 맞추는 행위였다.
영조는 많은 약점을 안고 즉위했다. 그가 자신의 취약점들을 극복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선대왕과는 다른 전략을 구사해야 했다. 영조가 택한 전략은 완벽한 유교적 성인군주로, 신하들을 압도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위민군주의 모습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명분만으로는 부족했다. 조선 건국 이래로 강조되어 온 유교적 성인군주나 위민군주는 擇君을 들먹이는 신료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보장해주지 못했다. 국왕권을 위협하는 신권에 대항하기 위해 영조는 국면 전환이 필요했다. 영조는‘위민 군주 상’을 새롭게 해석했다. 그동안 피상적으로 논의해 왔던 민을 실체를 가진 존재로 만들어 현실의 정치 무대로 이끌어 냈다. 신료들은 그동안 추상적으로 말해왔던 민의가 그들의 눈앞에서 ‘실제로 표출되는 장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영조는 위민의 가치라는 측면에서만큼은 신료들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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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2.14 14:57

타고르와 21세기: 미학적 인간의 재발견

 

 

김은경 _ 비쉬바바라티 대학 미학 박사 졸업, 폴수학학교 교사

 

 

지난 20세기가 이성적 인간을 요구했다면 통합과 화합을 시대적 소명으로 하는 21세기는 미학적 인간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타고르의 미학을 통해 21세기가 지향하는 미학적 인간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세 가지 소통
타고르는 우리의 모든 정신적 능력은 세상과의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보았고 거기에는 물질적, 이성적, 감성적, 세 가지 소통이 있다고 했다. 물질적 소통은 지난 세기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개발했는지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이익과 소용에 닿는 것이라면 자연을 얼마든지 개발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처럼 굴었다. 인간의 이익을 위해 마구잡이로 개발되어 파헤쳐진 자연은 이제 인간 삶을 위협하고 있다. 타고르는 인간이 자연 앞에서 마치 주인인양 굴었던 태도를 통해서 물질적 소통의 한계를 지적하지만 물질적 소통 없이는 인간이 생존을 유지할 수 없다는 진실을 간과하지는 않는다. 두 번째 소통은 이성적 소통으로 이는 인간의 지적인 능력을 활용하는 것인데 타고르는 이를 마치 법정에서 우리의 지성이 자연을 증인석에 세워놓고 그 안에 감추어진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질문을 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인간의 이성적인 탐구에는 언제나 미묘한 자아의식이 결부되어 있다. 인간이 이룩한 모든 문명과 문화는 인간 이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이성적 교류는 나와 남, 주체와 객체 등을 명확하게 나누기 때문에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며 여기에는 거리감이 있음을 강조한다. 마지막 소통은 바로 감성적 소통인데 타고르는 이것을 미학적 소통이라고 불렀다. 물질적 소통이 우리의 생존을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이성적 소통을 통해서 인간은 지성적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마지막 소통을 통해서 사랑의 감정, 즐거움의 감정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게 된다. 타고르가 말하는 이 감정적 소통은 결국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타고르에 의하면 사람이란 외부 세계에서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대상을 사랑하고 그 사랑 속에서 최상의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자식이 내 존재의 빈 공간을 채워 나를 완전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렇게 사랑한다면 세상과 나 사이에 거리감이 사라지고 세상과 내가 하나라는 일체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렇게 세상과 소통하는 것은 결국 나를 알아가는 방법이다. 인간은 거울이나 물에 비춰보기 전에는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나를 알아가는 과정 또한 외부세상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위에서 살펴본 세 가지 소통의 본질은 결국 인간 자신을 알아가는 활동이다.

두 개의 나 그리고 투명한 벽
인도의 철학에서 말하는 궁극의 목표는 깨달음이다. 이는 우리가‘나’라고 여기는 이 작은 나에서 벗어나 큰 나를 깨닫는 것이다. 인도의 철학은 우리가 현재 나라고 느끼는, 수많은 제약 속에 있는 나는 결코 참된 내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한 나는 곧 신이며 이 세계 자체임을 깨닫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지점에서 타고르는 독특한 이야기를 한다. 타고르 역시 인간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 하지만 두 개의 나 사이의 관계는 인도 전통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다. 인간을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은 그리 특별할 것이 없다. 서양의 전통에서도 인간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지닌 존재로 여겨졌다. 타고르의 독창성은 두 개의 나, 즉 ‘작은 나’와‘큰 나’가 서로 사이좋게 공존해야 한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타고르는 인도 전통에서 말하는 것처럼 큰 나를 깨닫기 위해서 작은 나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하는데 이렇게 큰 나와 작은 나가 친밀하고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는 사람을 바로 예술가라고 했다. 예술가는 큰 나와 작은 나 사이에 투명을 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교류가 용이한 것이다.

 

 

 

타고르는 이 투명한 벽을 예술가들이 갖고 있는 영감의 원천으로 보았고 이를‘보편적 인간의 마음’이라고 불렀다. 근대 서양 미학에서는 예술가를 천재로 취급하면서 일반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 반면, 타고르에게 예술가는 보편적 인간의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예술작품은 외부세계에서 작은 나 안으로 들어온 것을 가지고 만들어진 개인의 내면세계가 투명한 벽을 통해서 큰 나로 간 다음 여기서 얻은 보편적 경험을 통해 내면의 세계를 재구성해서 외부 세상에 내놓는 것이라고 보았다. 타고르는 이처럼 예술작품이 두 번의 정제과정을 거쳐서 나오기 때문에 현실보다 더 진실하다고 했는데 이는 예술을 이데아에서 두 번 멀어진 것으로 보는 플라톤의 관점과 대비된다.

 


아름다움이란?
우빠니샤드에 보면 신이 이 세상을 만든 것은 즐거움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인도 철학은 이처럼 세상이 창조된 원인을 즐거움으로 볼 뿐만 아니라 창조자의 내적 본질도 즐거움으로 본다. 그리고 이러한 신적인 즐거움이 예술 작품을 통해서 얻는 즐거움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물론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느낀 즐거움과 인간이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느끼는 즐거움은 천지차이가 있지만 인도 미학은 인간이 예술 체험을 할 때‘나’의 경계가 희미해진다는 것에 주목하면서 일상에서 해방되는 이러한 순간을 절대자로 향하는 터닝 포인트로 여겼다. 인도 미학에서는 이처럼 예술 활동을 통해서 화학적 변화를 거친 인간의 감정을‘라사(rasa)’라고 불렀는데 이는 인도 미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이다. 인도 미학은 이처럼 인간의 감정을 일상적 감정과 일상을 초월한 감정으로 나누었다. 라사가 감상자 안에서 일으켜지는 예술적 즐거움이라면 미는 예술가가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을 외부의 객관적 사물로 형상화시켜 놓은 것이다. 즉, 라사는 감상자의 주관적 체험이고 미는 생산자의 객관적 표현이라고 구분할 수 있다. 인도 미학은 객관적인 미와 주관적인 즐거움인 라사를 같은 것으로 보았으며 예술의 생산자와 감상자가 감정적 경험을 나누는 것을 중요시했다.
타고르는 주관과 객관을 이어주는 이러한 인도 전통 철학에서 얘기하는 미의 개념을‘서로 다른 성질을 융합시키는 미’의 개념으로 발전시킨다. 타고르는 미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거미줄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다.

거미는 사방팔방으로 거미줄을 치면서 자신은 중심에 머물러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은 중심에 머문 채 주변 세상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활동은 추한 것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고 멀리 있는 것을 가깝게 만들고 낯선 것을 친밀하게 바꾼다. 그것은 ‘나’와‘나 아닌 것’사이에 천 개의 다리를 놓는다. 아름다움이란 이처럼 영혼과 물질 사이에N놓이는 다리다.


21세기, ‘다름’을 추구하다
타고르에게 미학은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여정이고 예술은 그것을 기록하는 활동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타고르는 이 세상을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아름다움을 직관할 수 있다고 한다. 아름다움을 설명하면서 타고르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세상 밖의 시선’으로 볼 것을 이야기한다. 사물의 색깔이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빛에 반사되어 우리 각막으로 투영됐을 때 우리 시각이 인지하는‘일시적인’현상인 것처럼 지구에서 벌어지는 힘의 작용은 지구를 벗어나서 이해해야 제대로 알 수 있다. 이처럼 세상을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시선으로 보는 타고르의 이야기는 이 세계를 신 브라흐마의 현현으로 여기는 인도 전통 철학의 관점과 일견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타고르는 전통을 새롭게 해석한다. 그는‘세계가 하나’라는 사실을 세상의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찾으려고 했다. 즉, 세상 안에서 동질성을 찾지 않고 세상을 하나로 묶어주는 보편법칙이나 원리를 찾았던 것이다. 세계 안에서 같은 속성을 찾는 것과 세계 밖에서 세상 안의 다양성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더 큰 법칙을 찾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타고르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가 되기 위해서 서로 같을 필요는 없다. 세계는 점점 좁아지면서 사람과 사람이 섞여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서로 다른 이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하는지 터득해야할 중대한 시점에 와 있다.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타고르의 주장이야말로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많다. 다름이 만들어내는 조화를 볼 수 있고 거기서 균형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미학적 인간이 되기 위한 자질이라고 타고르는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21세기가 요구하는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타고르는 같은 속성을 갖고 있는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세상을 꿈꾼 게 아니라 다른 속성을 갖고 있는 너와 내가 더 큰 세계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하나가 되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생각은 지금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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