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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글

[140호] 무의미의 축제 하나. 대학원 수업 중이었습니다. 한 ‘학생부모’(아이를 둔 대학원생)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유치원생 아들이 치마를 입어도 되냐고 물어봤어요.” 마침 그 수업은 여성학 수업이었습니다. 그 학생 부모는 질문을 받고, “그래도 된다”고 쉽게 대답할 수 없던 자신이 혼란스러웠다고 고백했습니다. 남자인 아이가 치마를 입고 유치원에 갔을 때,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고 했습니다. 배움과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 어쩐지 저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둘. 고향집에서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곧 서울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려와 읽고 있던 책을 덮었습니다. 밀란 쿤데라 장편소설『무의미의 축제』. 마침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던 차였습니다. “다르델로, 오래전부.. 더보기
[139호] 대의(代議) 그리고 재현(再現) “사람은 ‘분노’할 줄 알아야 해.” 감자탕을 먹다 말고 선배가 말했다. 요는 아주 사소한 일이더라도, 불의와 불합리에 분노할 줄 알아야한다는 말이었다. 선배는 그러한 삶을 위해서, 필요한 순간에 목소리를 냈던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꽤나 소심한 성정으로, ‘굳이 그렇게 불편한 이야기들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나만 꾹- 참으면 조용히 넘어가게 될 텐데’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며칠 후다. 친구랑 떡볶이를 먹으러 갔다. 꽤나 유명한 ‘맛집’이라 기다리는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줄의 맨 뒤에 서서 5분 정도를 기다렸을 때다. 뒤이어 온 손님 무리가 우리를 지나쳐, 가게로 들어가더니 ‘waiting list’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떡볶이 집에 나름의‘룰’이 있.. 더보기
[138호] 웃을 일이 없는 세상, 웃음의 ‘가능성’ 더보기
[137호] 대안에 대한 대안(계속) 1. 3년 전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보냈던 하루하루를 생각해봅니다. 그곳은 시간을 수치로 매겨 나타내는 시계가 없었기에 무언가 다급하거나 촉박할 이유가 없는 공간입니다. 가리지 않고 모든 걸 품는 하늘과 거기에 덧대어 흘러가던 구름을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길 위를 어슬렁거리던 까만 개의 눈동자와 지긋이 마주해봅니다. 가지에서 떨어져 나와 죽음을 맞이하고 있던 반쯤 말라버린 나뭇잎 하나를 발견합니다. 작은 것들이 주는 아름다운 정동을 느낍니다. 2. 돌아온 세상은 빠른 속도로 하나의 방향으로만 내리닫기만 합니다.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느낄 새도 없습니다. 삼천포로 빠지고 싶은 여유를 부리고 싶지만 괜한 죄책감이 듭니다. 눈앞에 닥친 것에 급급해져 주위를 둘러볼 수가 없습니다. 다들 자신의 고통에, 누군가.. 더보기
[136호] 몸과 노동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근황을 물으면서 신문편집회의를 시작했다.‘다들 어떻게 지냈어요?’ 최근 주말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편집위원 한 명이 아르바이트하면서 느꼈던, 전혀 시시콜콜하지 않은 한풀이를 늘어놓았다. 나의 언어로 대신 전하는 것보다 당사자의 언어로 직접 전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편집위원에게 카페 아르바이트하면서 겪었던 일과 느낀 점에 관한 글을 부탁하였다. “나는 왼손잡이다. 반면 우리 사회에는 오른손잡이가 많다. 아르바이트하면서 느낀 점은 이 불균형이 가지고 오는 파급이 생각보다 만연하다는 것이었다. 커피 원두를 가는‘그라인더’에서 원두 가루를 뽑아내고, 에스프레소를 추출하기 전에 이 분쇄된 가루를 다지는 과정을‘탬핑(tamping)’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라인더에서 탬핑까지 모든 과정.. 더보기
[135호] 2015년 12월. 국가란 무엇인가? 2015년 12월. 국가란 무엇인가? 1. 오쿠다 히데오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임순례 감독이 연출한 영화 는 주인공 최해갑과 그의 가족들이 국가가 요구하는 불합리한 의무를 피해 저 먼 남쪽 섬으로 떠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를 본지 꽤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아직 뇌리에 남는 장면 중 하나는 자신의 뒤를 캐는 사복 경찰의 주민등록증을 최해갑이 과감하게 종잇장처럼 구겨서 강으로 던져버리는 장면이다. 항상 지갑에 넣어서 지니고 있는 내 주민등록증이 뜨끔 떠올랐다. 어쩌면 주민등록증은 국가가 국민에게 강요하는 존재 증명서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주민등록증뿐만 아니라 국가로부터 미리 정해져서 당연하게 요구되는 것들이 많은 것 같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던져본다. ‘과연 국가라는.. 더보기
[134호] 화폐에 가려진 가치 화폐에 가려진 가치 돈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실제로 우리는 의식주는 물론 사람의 마음까지도 돈을 기준으로 가치를 매기곤 합니다. 모든 기준에 돈을 대입하다보니 돈이 아닌 것으로 무언가를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해보입니다. 하지만 분명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사물함이나 연구실에 붙어 있는 친구의 쪽지, 지친 친구에게 내미는 한 잔의 커피, 뜬금없는 한 통의문자나 전화, 힘든 하루를 마치고 현관문을 열었을 때 느껴지는 사람의 온기, 말없이 잡은 손 등등.. 이 지면을 빼곡하게 채우고도 남을 만큼 생각이 납니다. 어쩌면 우리는 돈에 짓눌려 마비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마비시킨 돈의 메커니즘은 무엇인지 알아야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번 호 기획을 통해 여러분에.. 더보기
[133호] 안전을 가장한 감시 안전을 가장한 감시 얼마 전 노트북에 있는 카메라를 종이로 가렸다. 작동하지 않는 카메라이지만 불편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문득 카메라와 눈을 맞추는 느낌이 들면서 ‘파놉티콘’을 떠올렸다. 어느 때보다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요즘이다. 우리는 안전을 위해 수많은 정보를 ‘누군가’에게 제공한다. 심지어 나도 모르게 사적 정보가 제공되기도 한다. 이것이 안전을 위해 포기해야 할 기회비용인지 안전으로 포장된 교묘한 감시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안전한 세상이 아닐 수도 있다. 누군가에 의해 감시당하는 것을 안전이라고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안전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게 된 이유는 무엇이며, 안전이라는 이름을 이용하여 ‘누군가’가 얻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편집장 채다희 더보기
[132호] 편집장의 글 배제된 청년 세대요즘만큼 청년 세대가 화두가 된 적이 있을까 이 글을 읽는 대다수는 청년일 것이고, 나머지는 ‘청년이었던’ 누군가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함께 청년을 논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청년은 회색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사회에서 그들의 위치 또한 비슷하다. 청년은 꼭 회색 집단이 된 것 같다. 어디에나 속할 것 같고 쉽게 언급되지만 그 누구도 진정 관심을 갖지 않는다. 색을 잃은 청년 세대가 사회적 배제의 결과라는 생각에서 기획을 시작했다. 이번 호를 통해 청년 세대가 겪고 있는 사회적 배제와 관련한 논의를 하고자 한다. 왜 사회는 청년을 배제의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사회적 배제가 청년에게 끼친 영향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과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래야 배제된 현 상황을 극.. 더보기
[131호] 세대와 빈곤 ‘세대와 빈곤’이라는 기획은 후속 세대에 관한 우려 섞인 관심에서 시작했다. 후속 세대라는 이름으로 조명 받는 학문의 하위 계층들은 지식 생산의 수직 구조에서 가장 아랫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후속이라는 지난한 약속을 얻어내기 위해 파편적인 양성 기간들을 보낼 때 그 순간 잊혀지는 것은 그들의 육체와 정신을 거쳐 만들어진 노동이다. 이렇게 제대로 부각되지 못한 채 상실되는 노동은 빈곤의 출현을 부른다. 이제 세대의 이름을 사회에 펼쳐보자. 사회의 지속과 안정을 위해 궁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여성, 비정규직, 청년실업자들이 눈앞에 떠오른다. 후속 세대라는 훈육 프로그램 속에서 노동이 비자발적으로 상실됐다면 미래 설계의 사회적 프로그램 속에서 상실되는 노동은 더 멀쩡하고 조용한 빈곤을 출현시킨다. 우리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