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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4호] 빼앗긴 미래에 청년들의 청춘은 오는가

지속가능성 과학자 이혜림

 

봄으로 부터


찰나의 봄이었다. 지난주, 토요일은 여름이더니 일요일은 겨울이었다. 며칠 전 아침엔 코트를 입고 다녀도 쌀쌀하게 느껴졌는데 점심시간에는 여름처럼 포근했다. 그 와중에도 꽃이 피어나는 걸 보면 분명 어딘가 봄은 있다. 봄의 온화함을 너무나도 사랑하는데 자칫 건물 안에서 하루하루 돈벌이만 하다가 보면 봄이 오고 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것만 같아 문득 겁이 난다. 불쑥 여름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져 오늘 출근길엔 부랴부랴 트렌치코트를 걸쳤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후에는 트렌치코트를 입지 못하고 걸쳐놓았다. 꽤나 좋아하는 트렌치코트를 입을 수 있는 날이 줄어드는 것이 아쉽다. 사람이야 옷을 바꿔 입으면 될 일이지만 다른 생태계 구성원들은 어쩌고 있는지, 앞으로 어쩌면 좋을지 염려스럽다.

 

빼앗긴 미래


며칠 전이었다. 제1차 국가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안)이 발표되었다. 경험적으로 학습된 무기력함에 역시나 이렇게나의 미래는 오늘날의 기득권층인 386세대 아저씨들에게 빼앗긴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저씨들이라는 표현은 기득권층에 대한 잘못된 일반화와 부정적 감정이 들어찬 잘못된 표현이다. 분명 여성층도 있으며, 다양한 연령이 참여하여 함께 결정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여성과 다양한 연령이 진정성 있게 참여했다면 모니터를 통해 비치는 계획안을 조금은 더 반갑게 맞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 아쉬움은 여전하다.

 

기술에 의한 세대의 파편화


요즘은 MZ가 대세다. 그 이전에는 X세대도 있었고 Y 세대도 있었고 거슬러 올라가면 386세대도 존재하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인간의 생애 주기 속에 모두들 한 번쯤은 ‘요즘 애들’로 살게 된다. 16개 MBTI도 부족한데 10년~20년을 하나의 세대로 묶어 일반화시킨다니 터무니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에 매번 고개를 끄덕이며 ‘요즘 애’ 들을 보며 서로 신기해한다. 2023년, 오늘을 살아가는 모두는 데이터가 된다. 개인은 빅 데이터의 일부로서 빅 데이터를 토대로 구성된 알고리즘에 따라 선별 ‘당한’ 정보와 콘텐츠를 접한다. 모두가 각자의 굴을 파 나간다. 싫어하는 것, 불편한 것은 회피하고 좋아하는 것 들로만 자신을 채울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나의 동굴 아닌 어떤 곳에 누가, 무엇이, 어떻게 있는지 디깅을 시작한 우리는 서로를 살피기 어렵다. 이처럼 세대의 구분은 오랜 기간 존재해 왔지만, 최근의 기술은 세대를 더 파편화시켜 단절시키기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니 어쩌면 현재 기득권층인 386세대가 MZ 세대의 목소리를 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새파랗게 어린 청년과 새빨간 지구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단어로써 대게 쓰이는 ‘청년’의 청은 푸를 청(靑)이다. 청색은 기후 위기 시대 속 청년의 모습과 같이 모순된 색이다. 맑은 가을 하늘과 같이 밝고 선명할 수도, 하강하는 주식시장의 화살표 같기도 하다. 20년 후 주 생산인구로서 사회를 지탱할 청년이지만 새파랗게 어리다고 판단해서 인지 중요한 정책적 결정에 쉬이 참여할 수 없는 구조가 됐다. 이미 새빨간 지구의 나빠질 일만 남은 상황을 재확인하며 나는 또 한 번 새파랗게 질려버릴 듯하다. 기후 위기 시대에 청년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는 게 많아질수록 속상하다.


청년의 봄, 청춘


1926년 6월에 발표된 저항 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봄은 계절적 개념일 뿐만 아니라 식민 지배 시대의 배경을 토대로 광복으로 해석되곤 한다.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 기후 위기 시대의 청년으로서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와 같은 시구절처럼 나 또한 주체적으로 해내고 싶다. 내 땅을 내 의지로 일궈낼 수 있는, 내 미래를 내가 그려갈 수 있는 그 것이 청춘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결말은 좌절감과 우려를 내포하고 있다. 1943년 세상을 떠난 시인은 삶의 마지막까지도 광복이라는 봄을 맞이하지 못했다. 미래세대 없는 미래계획을 지켜보며 나의 마음은 시에 드러난 시인의 마음과 같이 좌절감과 우려를 품고 있다.


봄으로


시인은 떠났지만 봄은 있었다. 우리는 결국에는 광복을 맞이했다. 세계적인 정세와 더불어 어려운 상황에도 끊임없이 독립을 향한 움직임이 지속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 사회를 지탱하고 이끌어갈 청년의 봄은 오늘의 봄이며 미래의 봄이기도 하다. 청년의 목소리가 봄의 열쇠이다. 시인과 같이, 같은 마음을 나누었던 당시의 사람들과 같이, 지금의 많은 청년들, 그리고 나는 봄을 바란다. 학습된 무기력함을 극복해 보려 노력하고 어떠한 방법이 있을까 고민한다. 오늘날 우리는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 속에서도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 기성세대가 청년을 이해할 마음이 없더라도 우리의 편이 될 수 있도록, 청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청년은 연대하여 목소리를 키우고 끊임없이 설명하고 설득해야만 한다. ‘고요 속의 외침’ 게임은 뒤돌아선 앞사람의 등을 두드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단단한 회색의 벽과 같은 뒷모습에도 손이 부서져라 두들기더라도 포기할 수 없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청년의 미래는 기성세대로부터 빼앗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조들이 그러하였듯, 희망을 잃지 않고 힘을 모아 보다 빨리 우리의 봄을 맞이하길, 그리고 그 봄이 오래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