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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4호] 통영의 조각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문 다 희

 

내 고향은 대전, 내 대학 생활은 경북이었다. 서울 중심주의의 영향을 받아, 학부를 졸업하면 꼭 수도권에서 일하고 싶었다.  맹목적인 중앙을 향한 열망이었다. 그런데 통영이라니, 나는 통영에서 일하게 되었다. 충청도도 경상북도도 아닌,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최소 4시간 30분, 기차역도 없으며, 높은 건물이라곤 종합병원밖에 없는 도시... 이삿짐을 싸며 울었다. 내가 생각하던 입사 후의 삶과 너무 달랐다. 젊은이가 바글바글한 빌딩 숲에서, 사람이 빽빽한 지하철을 타고, 멋지게 출근하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어촌의 비린내가 나고, 굴 껍데기가 산을 이루고, 버스 배차 간격이 평균 40분인.. 그런 도시.. 나는 통영으로 이사했다. 울고불고한 것이 머쓱하게 나는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됐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놀랐는가? 지금부터 내가 사랑하는 통영을 보여주려고 한다.


자연과 함께하는 운동


도남동 스탠포드호텔 1층에서는 투숙객이 아니더라도 자전거를 빌려준다. 가격도 상당히 저렴한 편. 물론 자전거 동호회 사람들에게는 바다 옆에서 라이딩을 하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처럼 가끔 짧은 거리를 오가는 이동 수단으로만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에게 스탠포드 호텔에서 한산 마리나 리조트까지 대략 3km 정도의 해변 도로를 통영의 크고 작은 섬들을 보며 자전거를 타는 것은 정말 특별한 경험이다. 한국 지리 시간에 배우는 것처럼 “한반도의 서해는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남해는 섬이 많은 리아스식 해안에…”하는 문장들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진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수평선은 보이지 않고, 바다 위에 산봉우리들만 보인다

내가 살던 대전과 달리, 통영은 오르막길과 내리막들이 굉장히 많다. 크고 작은 산들도 있는데 통영에서 산을 오를 때 가장 좋았던 점은 산에 올라서 바다도 함께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부산도 산과 바다가 잘 어우러진 도시이지만, 통영에서 등산하는 것이 더 좋은 이유는 통영의 산이 부산의 산보다 비교적낮기 때문이다. 해발 461m이지만, 다 올라가지 않아도 멋진 풍경을 맘껏 볼 수 있다. 앞서 바다 위에 산봉우리라는 표현을 썼는데 통영으로 섬 여행을 간다면 등산이 필수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천천히 살기


서울에 자리한지 어느덧 7개월... 지하철을 놓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뛴다. 운동, 학업, 인간관계 그 어느 것도 놓칠 순 없다. 몸이 세 개여도 모자랄 지경이다. 통영의 일상과는 분명히 다르다. 경상남도의 시 단위 도시이다 보니 노인인구가 많다. 출근길에 지나가는 시장에는 항상 노인들이 많았다. 노인들은 걸음이 느리다. 뒷짐을 지고, 또는 지팡이를 짚고 느리게 걷는다. 따라 걷는 나의 발걸음도 자연스레 느려진다. 내 앞에 가시는 할머니가 뒤돌아서 너무 느려서 미안하다고, 앞질러 가라고 말씀하신다. 출근 시간이 임박하지 않은 이상 나도 천천히 걸어본다. 그리고 내가 노인이 될 날을 떠올려본다. 대도시의 버스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승객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모든 승객이 앉을 때까지 출발을 지연시킬 수 없다. 통영에서는 모든 승객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버스가 출발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승객이 노인이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물건을 팔기 위해 버스를 이용하는 할머니는 보따리를 다섯 개 들고 탄다. 버스 기사님과 다른 승객들은 불편한 기색 없이 기다린다. 할머니가 시장에서 내릴 때는 너도나도 짐을 같이 내려준다. 할머니는 감사의 말을 잊지 않는다. 각각의 도시마다 배려의 방식이 다르다. ‘빨리빨리’ 삶에 익숙한 나는 천천한 삶도 있음을 알게 된다.


단순함


대도시 부산에서도, 특히 번쩍번쩍한 광안리 해변에 가면 관광객도 많지만, 러닝을 하러 나온 주민들도 많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이 반려견과 함께 걷거나 뛴다. 개들은 제각각 멋진 옷과 하네스, 강아지 유모차를 자랑한다. 요즘 반려견들이 많은 사랑을 받는다고 느꼈던 장면 중 하나이다. 통영의 반려인들도 자신의 반려견을 아주 사랑한다. 하지만 멋쟁이 광안리 반려인들과는 다르다. 비록 화려하고 깔끔한 미용이 안 되어 있고 고물상에서 집어 온 것만 같은 ‘목줄’을 하고 있는 반려견이지만, 일하다 문득 창밖을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몸집이 큰 개의 활동량을 채워주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산책시키는 아저씨가 보인다. 퇴근하다 보면 강아지 전용 가방도 아닌, 평범한 가방에 너무 어려 걷지도 못하는 새끼 강아지를 데리고 나와서 세상을 보여주는 할아버지가 있다. 답답해서 낑낑거리는 강아지를 보도블록에 내려주고, “봐봐, 무섭잖아” 하면서 꼭 안고 간다. 개들의 멋진 헤어스타일과 옷, 하네스가 아니어도 강아지를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 같은 마음이다. 하지만, 같은 마음이 지역의 차이를 덮어주진 못한다. 나는 지금 서울에 살면서 주거 문제를 겪고 있다. 이렇게 집이 많은 왜 내 집은 없을까 생각하고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를 보면 저 아파트는 얼마일까,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 살까, 나는 평생 살아볼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남산타워가 보이는 카페에 가면, 이 카페는 임대료가 비싸서 커피가 비싼가, 내가 지불하는 커피 값에 과연 이 풍경과 맛이 합리적일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때론 멋지게 사진을 찍어 소셜 미디어에 자랑한다. 하지만 통영에서는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가면 멋진 풍경과 커피를 즐기면서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다. 사진 찍을 일도 없다. 그냥 풍경을 감상하면서 여러 감정을 느끼며 나에게 좀 더 집중한다. 이 풍경을 보면서 나는 어떤 마음을 느끼는지, 이 장소에서 이 책의 의미가 나의 마음에 어떻게 다가오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삶을 살면서 어떤 것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야 할지 헷갈리는 때가 있다. 나는 단순하게 나의 마음을 보려고 한다. 내가 거짓말과 겉모습에 치중하는 것은 아닌지, 내 마음은 지금 어떤지.


같은 시공간에서 만난다는 우연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통영을 아름답게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람이다. 좋은 사람들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은, 내가 통영을 잊지 못하고, 또 자주 찾게 되는 이유이다. ‘서울말’을 쓰고 ‘어린’ 내가 ‘사투리’를 쓰는 ‘나이 많은’ 자신들을 불편해할까 봐 조심스레 다가와 주던 직장 선배들. 가끔은 ‘통영’이라는 곳이 주는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들이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 것일까를 생각한다. 그들은 나에게 좋은 인생 선배가 되어주었다. 좋은 풍경에 섬세한 배려심이 만드는 느리게 가는 삶의 방식, 그리고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단순함을 담고 있는 도시, 그리고 그 도시에 나와 같은 시간을 살았던 사람들. 최근 역주행으로 유명해진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와 같이 실린 앨범에 <별의 조각>이라는 노래가 있다.


“ 태어난 곳이 아니어도 / 고르지 못했다고 해도 / 내가 실수였다 해도 / 이 별이 마음에 들어 /

낮은 바람의 속삭임 / 초록빛노랫소리와 / 너를 닮은 사람들과 / 이 별이 마음에 들어”

 

우연했던 통영의 조각이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다. 가끔은 바쁜 대학원 생활에 지쳐 그것들을 잊고 살 때가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두에게 내가 경험한 통영의 한 조각을 소개하면서 통영에 대한 나의 기억도 꺼내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