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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4호]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출처: 네이버 무비

 

한양대학교 프랑스학과 겸임교수 김 영 재 

 

일요일 오후의 극장은 낯설어

익숙한 광경이 펼쳐진다.


얼마 남지 않은 휴식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많은 선택을 뒤로하고,
두 시간 남짓의 시간 속에 스스로를 내맡긴다.

 

북적이던 기억을 뒤로하고
초라하게 반짝이는 광고들과 원색의 디자인들.

 

필자 역시 그런 편안한 분위기에 시간을 맡기려고 극장에 왔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어떤 영화를 보고,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대화를 나누기 위해 극장에 오곤 했다. 실내에는 버터향 가득한 음식 냄새들이 있었다. 설레는 표정의 사람들과 영화의 팜플렛들과 기념품들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기 있는 흥행작이라면, 표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아 같이 영화를 보러 온 일행 중 한 두사람은 미리 줄을 서야 표를 구할 수 있었다. 손을 꼭 잡은 연인들과 한껏 차려 입은 노년의 신사와 그 손을 꼭 쥐고 있는 어린아이의 해맑은 눈빛. 주전부리들을 사가느라 분주한 사람들 사이로, 상영관의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흘러나오는 뉴스릴의 경직된 목소리들. 극장에 갈때마다 밍크 목도리에 고운 한복을 입으셨던 할머니, 영화가 끝나고 충무로의 음식집을 정하느라 분주한 부모님,사람들에 치여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내 손을 꼭 쥐던 동생의 왼손. 이런 것들이 필자 추억 속의 극장과 관련된 감각적인 기극장에서 영화를 본 지 너무도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 영화는 절대 관객을 편하게 놓아두지 않을 것 같다. 정신없다. 영화가 진행 될수록 이야기는 산으로 가고 점점 거대한 유니버스로 날아 간다. 온갖 오마주와 패러디와 잡념과 술자리의 수다들로 가득한 영화다. 어릴 때 좋아했던 우상들이 등장하지만, 전혀 다른 모습과 연기를 펼친다. 요새 사람들은 좋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절대 필자의 취향은 아니다. 뭐 이런 영화도 있고, 저런 영화도 있는 영화의 파편들이다. 이 설렘들 가운데서 <벤허>, <플래툰>, <아마데우스>, <부시맨> 등등의 영화들이 자리 잡고 있다. 보통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작은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통해 주말에나 볼 수 있던 영화의 추억들에 비해, 극장에 가는 행위는 내 인생의 중요한 ‘푼크툼’들이다. 시간이 흘러, 가족들은, 친구들로, 연인으로 변해갔지만, ‘영화’라는 것을 기억하는 필자의 감각은 시청각 이외의 후각과 촉각으로 이루어진 덩어리다. 

 

영화가 시작됐다.
한적한 시간들을 골라 영화를 보는데,

잘 생각해보니, 

관객으로 가득 찬 거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영화를 둘러싼 기술의 발달은 영화 관람 이라는 행위를 변화시켰다. 멀티플렉스 극장이 생겨나, 표를 구하는 일이 조금은 수월해졌다. 비슷한 시간대의 다른 스크린에서 볼 수도 있었다. VCR을 이용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영화를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워낙 고가의 가전제품이어서 그것을 갖고 있는 친구들은 흔치 않았다. 인기 있는 작품들은 미리 예약을 해야만 볼 수 있었다. 아직은 극장에서 보는 ‘시네마토그래프’의 위력을 대신할 수 없었다. 시험이 끝나거나, 친척 어른들이 생각없이 주시고 간 큰 용돈이 생겨야만 극장에 갈 수 있었다. 

 

케이블 티비가 나타나고 디지털 티비가 나타났다. 몇몇 사람들은 이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행위는 사라질 것이라 말했다. 집에서 편하게 원하는 영화를 볼 수 있는데, 굳이 사람 많은 극장에 가는 것을 지속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여유가 있는 집은 여러 개의 스피커가 달린 큰 텔레비전을 샀으며, 집에서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이 시절은 짧게 스치고 지나간 레이저디스크(LD)를 거쳐 DVD의 시절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영화’를 하나의 정보로 이해했던 사람들에게 디지털 시대의 기술들은 극장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킬 충분한 자원들을 제공받았다. 그럼에도 난 극장은 절대 사라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사람들이 극장에 가는 이유는 영화가 갖고 있는 정보를 능가하는, 추억과 기억의 총합 속에 자리 잡은 ‘극장’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이 발명되고 상용화되면서 수많은 ‘미스터 둠’은 영화가 곧 사라질 것이라 예견했으나, 서로 협력하고 보완하면서 각자의 영역에서 활약해왔다. 산업화와 정보화시대를 거치며, 영화는 시청각 예술의 결정체로서의 지위를 차지했고, 방송은 광고의 홍수와 함께 시장에서의 거대한 성을 쌓아갔다. 시네마토그래프는 사라지지 않았다. 방송이 제공하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홈씨어터’와 ‘VOD(Video on Demand)’를 통해, 바쁜 일상에 번거로운 절차 없이 영화에 다가갈 수 있는 방법들은 확대되었지만, 스크린에 상영하는 방식의 영화산업은 끊임없이 성장했고, 영화를 보는 표준은 ‘극장에서 상영된 것’을 단체로 보는 방법 이었다. 

 

영화는 우습게 끝났다. 배우들의 연기는 좋았지만, 영화의 만듦새를 이야기할 만한 영화는 절대 아니다. 영화광이 겪는 최대의 장점은 정말 다양한 이야기와 감성을 골고루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훌쩍 올라버린 상영관의 입장 요금만 아니었으면, 중간에 뛰쳐나갔을 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사랑하게 되면서 내 스스로 갖고 있는 ‘영화적 cinematic’이라는 가치와 절대 부합할 수 없는 영화. 같이 본 사람은 저렇게 마지막을 뭉게도 괜찮은 거냐며 투덜거렸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초기 영화에서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 Kinetoscope’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 Cinematographe’는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장치였다. 1889년 에디슨이 고안한 기계는 한명씩 들여다볼 수 있었으며, 그 안에 영상이 나타나도록 하는 장치였다. 반면 1892년 뤼미에르 형제의 기계는 여러 사람이 어두운 방 안에서 수동적인 자세로 동시에 영화를 볼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에디슨의 것이 ‘개별미디어’였다면, 뤼미에르 형제의 것은 동시에 시청 가능한 ‘매스미디어’의 형식을 띠고 있었다. 영화 산업의 기술표준은 뤼미에르의 것이 자리 잡았고, 특허권과 기기 판매에 관심이 많던 에디슨의 형식은 패배했다. 전통적으로 영화는 공동의 것이다. 스크린 앞에서 우린 함께 웃고, 함께 숨죽이고, 함께 울었다. 하지만 이젠 ... 

 

영화 산업이 큰 위기라고 한다. 2023년 현재 한국 영화의 점유율은 19% 정도다. 팬데믹 이전까지 전 세계에서 50%를 넘는 자국 영화시장을 갖고 있던 것이 우리나라였다. 흥행대작들의 성적이 좋지 않은 탓도 있지만, 실제로 제작되는 스크린용 영화의 편수가 급격하게 줄었다. 또한 그에 대한 투자도 줄어들었다. 관객들이 보는 영화의 편수는 증가했지만, 극장의 관객은 줄었다.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 플랫폼들이다. 영화 또는 드라마의 시청시간은 늘어났지만, 관객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상영관의 스크린이 아니다. 대개 그들은 가장 편안 한자세로, 개인의TV나 컴퓨터, 혹은 모바일 기기들을 통해 시청한다. 이제 영화는 뤼미에르의 표준에서 벗어났다. 영화인들도 극장개봉을 통한 배급보다 전 세계에 동시에 배급될 수 있는 플랫폼들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초대박을 기대할 수는 없어도, 안정 적인 수익구조를 만들어주는 플랫폼들의 제작시스템도 매력 중 하나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영화를 보는 사람도 전통적인 극장의 ‘시네마토그래프’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이에 더해 팬데믹 이후 극장의 관람료는 두 배에 가깝게 올랐다. 나 같은 ‘꼰대’가 아닌 이상, 극장에 갈 이유가 없어지고 있다.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조차 모호해지고, 영화로 기획되었던 작품들도 드라마의 형식으로 플랫폼을 통해 제작되고 방영된다. OTT 기업들은 개별 작품들의 질적인 완성도 이상 시청자들이 채널에 머무르는 것(retention)에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기술 표준이 대형스크린이 아닌, 모바일기기나 TV이기 때문에 영상 또한 자극적이거나 원색을 많이 사용한다. 고가의 5.1채널스피커로 극장의 사운드를 경험하는 것은 옛날 일이고, 이제는 블루투스 기기를 사용하는 스테레오가 음향의 표준처럼 자리 잡았다. 그리고 내 가슴 깊은 곳에 담겨진 ‘영화적’인 장면들보다 대사와 스토리 구조 또는 장르를 통해 표현되는 영화들이 많아졌다. 영화가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장면들은 사라져가고, 원색적 소재, 과감한 이야기와 떡밥이, 영화 또는 드라마의 성공을 좌우한다. 감독의 시대는 가고, 작가의 시대가 왔다. 이것이 순환인지, 질주 인지는 알 수 없다. 단, 내가 사랑하던 영화는 점점 더 찾기 힘들어 질 것 같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원스>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와 경쟁했던 작품도 넷플릭스에서 심드렁하게 봤던 <서부전선 이상없다.>이었다.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는 작품들은 독특한 분위기들이 있다. 소위 말하는꼰대의 영화라는 생각이다. 실험적인 것에 인색하고, 과감한 표현에 인색하고, 유색 인종에 인색하고, 가족과 미국적 이데올로기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매우 보수적인 작품들이 자리를 차지했었다. 그런데 대체 영화가... 머릿속에는 가지 생각뿐이었다. ‘ 모든 것이고, 내가 사유했던 모든 장소였던, 영화가 이렇게 번에 사라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