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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115호] 대학, 프로젝트의 노예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승리


엄기호(우리신학 연구소 연구위원)

공부의 의미

신학을 공부하는 친구로부터 푸념에 가까운 문자를 받았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것이 더 이상 재밌지도 않고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수업시간에 심도 깊은 토론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삶에 대한 성찰이 있는 것도 아니라 ‘수다’만 떨다 끝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 친구뿐만이 아니다. 주변의 많은 동료와 후배들이 대학원 공부에 대해서 2학기가 넘어가면 돈 아깝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말한다.

대학원에서, 특히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유의미하게 포착하는 언어를 만드는 일이다. 특히 내가 전공하고 있는 현대문화연구는 아예 학문의 타이틀에 '당대contemporary'라는 말을 달고 있다. ‘단단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현대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당대’를 인식하고 사유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인문사회과학의 한 특징이 될 것이다. 이 학문을 하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당대 이후’ 자신의 언어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아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언어는 전략적이고 개입적일 수밖에 없다.

다른 한 편에서 인문사회과학은 ‘시대는 넘는 언어’를 배우는 과정이다. 이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사례가 일본의 후쿠자와 유치키이다. 유치키와 그의 문하생들은 일본의 명운이 걸린 우에노 전투를 ‘그네를 타며’ 바라보았다고 한다. 유치키는 자신들이 ‘그네를 타면서’ 자신들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명했다고 회상하였다. 당대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격변기에 시대를 넘는 법을 사유하고 질문하는 것이 또 다른 한 공부인 셈이다. 이런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자세는 관조이다. 이는 아렌트가 말한 바에대로 한다면 ‘게임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으며’ 단지 ‘간절한 염원을 가진 열정적인 참여자’로서 그 게임을 따라가는 태도이다.

만약 현재의 대학원에서의 공부함이 전략적이거나 개입적이지도 않고, 시대를 넘는 법에 대해 질문하는 성찰적이지도 않다면 이것은 정말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아렌트식으로 말한다면 이런 공부에는 ‘인식’도 없고 ‘사유’도 없는 셈이다. 인식이 무엇을 파악하는 것이고 그것을 언어화하는 것이라면 사유는 언어화할 수 없는 것, 파악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함으로써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들이 하는 공부가 시대의 ‘저 너머’라는 파악할 수 없지만 필연적으로 사유해야하는 것을 사유하는 것도 아니고 현실을 유의미하게 파악하는 것도 아니라면 공부는 정말 무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G20, 입장없음의 무기력함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주목해 봐야하는 것은 유치키가 자신들은 그네를 타면서 분명한 ‘의사표명’을 했다고 말한 점이다. 이 말은 당대에 대한 개입은 물론이고 시대에 대한 관조도 ‘입장’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굳이 마르크스가 말한 ‘당파성’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입장’은 시대를 읽고 당대에 개입하는 ‘앎’을 생산하는 출발점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입장 없음’이란 아무런 유의미한 앎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무력하고 부끄러운 태도이다. 그러나 이 ‘입장’이란 단지 진보냐 보수냐하는 것으로 이야기되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입장’이란 사태를 파악하고 질문을 던지는 위치 혹은 지점이다. 사태의 현란한 변형에도 불구하고 복잡함을 꿰뚫고 변형되지 않는 그 무엇을 포착해내는 힘을 입장이라고 한다. 우리 학문/사회에 이런 힘이 있는가?

우리 사회/학문이 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 지난 G20 정상회담의 과정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투쟁이다. 사실 G20이라는 행사는 대단히 복잡한 문제였다. G20은 G8과는 국제정치에서 위상을 현격히 달리한다. G8은 부자나라 혹은 전지구적으로 막강한 파워를 가진 나라들이 유엔이라는 공식적인 정치채널을 가로질러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였기에 손쉽게 저개발국과 사회운동의 타겟이 될 수 있었다. 내용적으로도 G8은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세계에 강제하는 가장 강력한 추진체였다. 하지만 G20은 다르다. 부자나라 혹은 힘 있는 나라들이 좌지우지 한다고 하기에는 그 구성이 다양하다. 인도를 남아시아라는 역내에서 힘 있는 국가라고는 할 수 있지만 부자나라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룰라가 이끌고 있는 브라질을 순순하게 신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지지하는 나라라고 볼 수 있는가? 이처럼 세계경제위기에서 태동된 G20은 간단명료하게 신자유주의적 머신이라고 환원될 수 없는 특징을 가진다. 이에 대한 반증이 바로 G20이 소개하려고 한 여러 가지 금융에 대한 통제에 대한 위기감과 반발 속에 서울에서 개최된 G20 비즈니스 정상회담이다. 이 회의야말로 G20을 보다 더 신자유주의로 끌어가기 위한 자본의 압박이었다.

다른 한 편 G20을 한국이 개최하는 것의 의미이다. 한국이나 프랑스는 G8을 G20으로 대체하려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는 미국이나 중국으로 수렴되어 가는 권력을 분산시키려고 하였고 한국은 말석일지라도 국제 거버넌스에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 것이다. 사실 한국의 입장에서는 G20이 어떻게든 사무국을 만들고 상설화하는 것만이 이 말석이라도 지킬 수 있는 길이었기에 이 회담을 필사적으로 성공시킬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국제정치의 배분원리인 지역안배에 따른다면 G20이 G19만 되어도 맨 먼저 쫓겨난 나라는 한국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본과 같은 나라들은 G20은 세계경제위기에 대한 일시적인 기구여야하고 경제가 제자리를 찾아가게 되면 다시 G8으로 전환되어야한다고 주장한 이유이다.

이러한 G20의 복잡다단한 위상은 좌파건 우파건 한국의 모든 정치세력에게 각자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G20에 대한 찬반논란을 보면 놀라울 정도의 ‘입장 없음’이 드러난다. 신자유주의자라고 한다면 단순히 G20을 지지할 수 없다. 오히려 G20이 반신자유주의적인 요소들과 추진방향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면서 비즈니스 정상회담을 좀 더 강하게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자들이라고 한다면 G20이 한국에서 개최되는 것의 의미와 이것을 상설화하는 것이 한국의 국제정치의 위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국민들에게 설파하는 것이 자발적 동원을 이끌어 내는 첩경이었다.  그러나 우파들은 놀라울 정도로 조잡한 국내용 문화정치에 몰두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1970년대 장발족과 미니스커트 단속, 혹은 초등학교에서 하는 용이 검사하듯이 쓰레기를 버리지 말자거나 음식물 쓰레기를 내놓지 말자는 황당한 캠페인들이었다. 이것은 자신들이 한 일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반증이다.

좌파라고 하여 다르지 않다. 좌파들내에서도 사민주의자인지 아니면 극좌파인지에 따라 G20을 바라보는 관점을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사민주의자라고 한다면 G20에 대한 비판적지지 혹은 조건부 지지가 당연한 입장일 터였다. G20은 G8과 비교해볼 때 분명하게 지구적 거버넌스에서 민주적 확장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고, 또한 내용에 있어서도 극단적인 신자유주의를 저지하고 규제와 통제를 자본에 소개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극좌파라고 한다면 G20은 당연히 저지되어야하는 자본의 기만적인 변신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의 사회단체들은 참여연대에서부터 극좌파 운동단체에 이르기까지 ‘일치단결’하여 G20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외국에서 본다면 국제거버넌스에 관한한 한국에는 ‘극좌파’밖에 없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대학, 프로젝트의 노예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승리

시민단체 혹은 사회단체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학원에서 ‘인문사회과학’을 한다는 대학원생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나는 G20에 대한 상투적인 비판이나 지지를 넘어서는 그 어떤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다. 좌와 우를 막론하고 교수들이 쓰는 신문의 칼럼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서 학문적 토론이나 성찰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도 못 들어봤다. 모두 다 후쿠자와 유키치처럼 ‘시대를 넘는 법’을 몰두하기로 한 것인가? 개입이 아닌 관조가 한국의 학문하는 태도의 대세라서 그런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한 마디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좌파건 우파건 ‘입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좌파는 모두 다 일순간 ‘극좌파’가 되어 모든 국제거버넌스를 거부하는 포지션을 취하고, 우파는 모두 G20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한국에서 개최된 것을 가지고 국내 정치용으로 사용할 궁리한 것이다. 자신이 현실에 개입하고 들어갈 지점을 파악하지 못하는데 어떤 새로운 언어와 앎이 생산될 수 있을 것인가. 우파는 ‘국격’ 운운하며 올림픽 때부터 나온 이야기나 무한반복하고 좌파도 변화하고 있는 국제정치의 위상학을 파악하지는 못하고 고작 ‘본질’론을 무한변주할 뿐이다.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이 된 데에는 보다 더 비참한 ‘공부하는 자’들의 현실이 놓여있다. 다들 BK21이니 HK이 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한다고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프로젝트 하지 않으면서 유지될 수 있는 대학원이 존재하는가? 대학원에 들어갈 때도 면접에서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가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수주한 프로젝트에 참여할 것인지를 묻는 곳이 허다하다. 공부하는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를 수행할 하위 ‘보조’를 뽑는 셈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밥줄을 국가에 스스로 반납하고 거기에 매여 현실을 인식하거나 관조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이 아닌가? 정부형 프로젝트는 독배다. 마시지 않으면 굶어죽고 마시면 바빠서 공부할 시간조차 나지 않는다. 실적을 쌓아야하기 때문에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연구단위들은 관변단체보다 더 많은 ‘전시형 행사’를 연다. 무슨무슨 콜로키움이나 컨퍼런스나 해외 석학 초청 강연같은 것을 ‘급조’해내고 관중을 동원하느냐고 정신이 없다. 물론 열심히 꿋꿋하게 연구과제를 수행하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실적용인지라 참석해보면 발표자료에서부터 대중동원에 이르기까지 허접하고 썰렁하기 짝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는 다른 그 어떤 영역도 아닌 학문의 영역에서 가장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를 프로젝트에 눈코뜰새 없게 하여 ‘입장’이라는 것을 아예 제거해버렸으니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