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04.30 01:21

<서강대학원신문사 원우 일상공유와 문화 기고글 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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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공유 : 대학원생의 생활 등 일상적인 내용이 담긴 글. 사진을 포함한 에세이 형식

문화리뷰 : 문화 활동을 통해 느낀 점(사회/정치/문화비평/학술 등 형식 제한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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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04.30 01:18

차별이 곧 악이다

영화 ‘어스’

 

일반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하태현

 

 

 

어스’가 재미없다고?

 

영화 ‘어스’(이하 ‘어스’)는 공포 스릴러 영화로 받아들이는 관객에겐 플롯 구성이 단순하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관객은 애들레이드 가족의 생존을 응원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감독은 관객이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영화를 만들었다. 관람평을 살펴보면 재미없다는 평이 적잖게 있는 이유는 여기에서 기인할 것이다. 사실 누가 어떻게 살아남고 누가 어떻게 죽느냐는 감독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렇기에 주인공의 생존은 비교적 예상할 수 있게 그려졌다. 물론 복제인간과 진짜인간의 사이에서 누가 진짜인간인지 찾아가는 과정은 영화를 보는 즐거움에 한몫한다. 한편 진짜를 가려내는 추리 과정에 할애된 분량은 적고, 단조롭다. 진짜를 가려내는 것은 감독의 주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스’는 주인공의 생존기를 통해 복제인간과 진짜인간의 메타포를 중심으로 ‘우리(us)’는 누구이며 우리 밖에는 누가 있는지 집요하게 묻는다.

 

1968년 미국 산타크루즈 해변에서 어린 애들레이드는 가족과 함께 놀이동산에서 시간을 보낸다. 아버지가 두더지 잡기 게임에 한눈이 팔린 사이, 애들레이드는 “영혼의 여행. 당신을 찾으세요”라는 간판이 달린 거울의 방에 들어간다. 거울에 둘러싸인 애들레이드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를 만난다. 거울에 비친 상인 줄 알았는데 그가 움직인다. 충격으로 인해 그녀는 실어증에 걸렸다. 그날 이후, 애들레이드는 평생을 도망치듯 살아왔다. 시간이 흘러 애들레이드는 가족(남편 게이브, 딸 조라, 아들 제이슨)과 떠나는 휴가에 불안감을 숨기지 못한다. 트라우마가 있는 산타크루즈로 향하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가까울수록 긴장과 두려움이 역력하다. 휴가 첫날 밤, 애들레이드의 두려움은 공포로 바뀌었다.

 

그녀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제이슨이 집 앞에 낯선 사람을 발견하면서부터 그녀의 두려움은 공포로 바뀌었다. 빨간색 옷을 입은 어떤 가족은 손을 맞잡은 채 서 있다가 갑자기 애들레이드 가족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급한 마음에 애들레이드는 경찰을 불러보지만, 경찰은 끝내 도착하지 않는다. 영문도 모른 채 낯선 가족에게 공격을 당하게 된 애들레이드 가족은 그들이 애들레이드 가족과 똑같이 생긴 복제인간이라는 것을 보며 놀란다. 복제인간은 애들레이드 가족을 죽이려 하지만, 여러 번의 위기 끝에 애들레이드 가족은 결국 살아남는다.

 

나의 모습을 한 미스터리한 외부인

 

1986년 미국에선 자선 행사의 일환으로 ‘미국을 가로지르는 손(Hands across America)’이라는 캠페인을 열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굶주리고 있는 기아들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자 15분 동안 손에 손을 잡는 퍼포먼스의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거대한 캠페인 규모와 비교하면 자선단체에 직접 전달된 금액은 터무니없었다. 의도는 좋았으나 남은 것은 대상화된 연민뿐이었다. ‘미국을 가로지르는 손’ 캠페인은 세계 반대편 어딘가에선 굶주림에 고통받는 자가 있음을 기억함으로써 마음의 짐을 덜고자 했다. 그러나 낙관주의적 태도는 현실적인 변화에 도움이 못 됐다. 약자를 향한 캠페인은 지식인과 부유층의 기만에 불과했다.

 

1986년은 역사적으로 기아 퇴치를 위해 미국인이 손을 잡은 시간이기도 하지만, 애들레이드와 레드가 처음으로 대면했던 시간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해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미국 내부의 약자들, 우리 안의 우리들을 대변한다. 극 중 애들레이드의 아들 제이슨이 섬뜩한 침입자들을 보고 “우리들이잖아(“it’s us”)”라고 말하는 장면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들은 타인의 얼굴을 띈 외부자가 아니었다. 미스터리한 침입자는 나의 얼굴을 한 외부인이었다. 익숙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이질적인 그들은 ‘우리’와 쏙 빼닮았다. “정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복제인간 ‘레드’는 “우리는 미국인이야”라고 답한다. 여기서 복제인간의 존재는 단순히 유사한 외모를 지닌 도플갱어가 아니라 미국(U.S: United State)의 일반 시민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이 영화는 ‘미국인으로서의 우리’는 누구인지에 대한 성찰이 담긴 영화다. 감독은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지 뻔하게 묻지 않는다. 그는 현재 미국 사회에 속한 ‘우리’는 타인과의 경계선을 어디에 긋고 있는지 묻는다. 하지만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비단 미국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배타적인 감수성이 커지는 시기에 이 영화가 던지는 화두는 우리 모두의 성찰이 되어야만 한다.

 

네가’ 죽어야만 ‘내가’ 사는 사회

  

‘어스’의 시작과 끝의 내용은 중심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서두에 감독은 미국에 정체 모를 지하 터널들이 무수히 많다고 이야기한다. 그것들 대다수는 누가, 어떤 용도로 만들었는지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흔한 음모론의 일종이다. 그곳에서 어떤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혹은 위대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조던 필 감독은 이유와 의미를 알 수 없는 지하터널에 의미를 부여한다. 지하터널은 생체 실험이 진행되었던 곳이며, 현재는 지하 인간(복제인간)이 사는 곳으로 명명했다. 지상에선 결코 볼 수 없는 그들은 오랫동안 지하에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은 지하의 복제인간들이 터널에서 나와 손에 손을 맞잡는 캠페인을 다시 재현한다. 산타모니카 해변에서부터 첩첩산중에 이르기까지 흡사 장벽을 떠올리게 하는 이 퍼포먼스는 1986년의 캠페인과는 결이 다르다. 앞선 캠페인이 굶주린 기아를 향한 연민에 불과했다면, 마지막 장면은 복제인간들의 체제전복적 투쟁이다. 이 영화는 복제인간이 진짜 인간을 죽이는 장면을 통해 홉스적 사회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미국 사회에 만연하다고 비집는다. 국가와 공권력은 무능하거나 그들(복제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복제인간들의 분노는 지상의 인간에게 향한다. 그들은 ‘너’가 죽어야만 ‘내’가 사는 사회를 만들어간다. 그 결과는 죽음뿐이었다. 조던 필 감독은 인간의 죽음에 회의적인 태도로 일관하지 않는다. 그는 미국 사회의 불안과 분열은 반드시 죽음이 아니더라도 해결할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감독은 미국 사회에 팽배한 차별의 문제에 관한 경고 메시지를 띄우고 있다.

 

디스토피아를 단절하기 위한 몸부림

 

지하 터널에서 숨죽인 채 사는 복제인간의 삶은 2019년 현재 세계에 존재하는 사회적 약자의 삶과 유사하다. 복제인간은 생체 실험연구에 의해 육체적으로는 완벽히 복제된 인간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영혼은 허락되지 않았다. 개별적 사유는 불허됐다. 지하의 사람들은 지상의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그들의 존재를 아는 이들도 드물었다. 숨은 쉬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의 삶을 살았다.

 

언어를 구사할 줄 모른다는 설정은 특히 상징적이다. 자신의 언어가 있는 사람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고, 근거와 논리를 통해 이를 뒷받침한다. 지식인이 지닌 힘의 원천은 언어에 있다. 현실 세계에서 사회적 약자들에겐 자신만의 언어가 없는 경우가 많다. 소통되지 않는 그들은 통제의 대상으로 쉽게 전락한다. 어엿한 사회 구성원임에도 그들의 이름은 지워질 경우가 많고, 언어화되지 않은 요구는 협상 테이블에 오르지 못한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인들을 죄악시한다. 주된 논거는 이민자들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위협했고, 미국의 백인들은 그동안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대통령과 같이 정치 권력을 쥔 강자가 내뱉는 언어는 사소한 말 한마디라도 미국의 정서와 담론으로 구체화된다. 복제인간에겐 언어가 없는 것이 흠이었다면,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선 인종이 다른 것이 흠이 되고 있다. 이로써 미국인의 신분을 지닌 소수인종 사람들, 예컨대 히스패닉계와 흑인, 아시아인들은 그의 타깃이 되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발언할 수 있는 마이크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백인들에 눈에 띄는 것 자체가 불쾌함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조용히 살기를 종용받는다. 영화에서 복제인간의 삶과 비슷하게 미국의 인종적 소수자들은 2등 시민이 되고 있다.  

 

복제인간들은 지상의 인간과 묶인(Teathered) 존재다. 그림자와 같이 육체적으로는 지상 인간과 동일한 행동을 하지만 환경적 차이로 인해 정서적, 정신적으로는 차이가 벌어진다. 한 소녀는 행복하고 사랑받는 생활을 했지만, 그 소녀의 그림자 소녀는 불행하고 처절한 삶을 살았다. 한 소녀는 인형을 가지고 놀았지만, 그 소녀의 그림자 소녀는 날카로운 것을 가지고 놀았다. 영화에서 양극화된 삶을 사는 두 부류의 기원은 환경적 구조에 있다. 타파하기 위해선 혁명적인 변화가 요구된다. 15분 남짓의 게으른 퍼포먼스만으로는 무너지지 않는다. 지상으로부터 잊히고 그림자로 냉대받고 이들은 날카로운 가위를 집어 들어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자 한다. 가위는 날카로운 양날이 서로 맞물려 물건을 잘라낸다는 점에서 단절을 의미하는 도구다. 가위가 인간의 몸을 찌르는 것은 지상 위의 인간에게는 공포 그 자체지만, 복제인간에겐 디스토피아를 단절하기 위한 혁명적 몸부림이다.

 

타인을 괴물로 만드는 사회

 

‘어스’는 ‘우리’와 ‘너희’ 사이의 경계선을 두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타인을 배제해야만 하는 사회는 과연 ‘우리’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인가? 성서 말씀인 예레미야 11장 11절은 여러 번 스크린에 등장하지만, 감독은 내용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산타 모니카 해변에서 네 명의 그림자를 보여주고, 탁상시계로 11시 11분을 가리킨다.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는 노인의 팻말에 적힌 말씀(렘 11:11)은 모두 동일한 숫자를 지시한다는 점에서 여기에 중요한 상징이 담겨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말씀의 본 내용은 이러하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내가 그들에게 벗어날 수 없는 재앙을 내리리니, 그들이 나에게 울부짖어도 그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렘 11:11). 이는 하느님의 선지자인 예레미야의 예언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듣지 않았고, 이로 인해 이방인에게 침입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제국의 파멸과 멸망이 이방인(‘우리’ 사회에서 배제된 자)으로부터 올 것이라는 메시지다.

 

‘어스’의 감독 조던 필은 인터뷰에서 “우리를 죽이고 직업을 빼앗을 것만 같은 미스터리한 침입자든,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투표한 이들이든, 서로를 두려워하는 시대에 서 있다. 서로 손가락질만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정말 봐야 할 괴물은 우리의 얼굴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쩌면 악은, 우리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괴물로 만드는 사회를 비판한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타인을 짓밟아야 하는 홉스적 사회는 감독이 원하는 세상이 아니다. 그간 미국의 역사는 차별의 역사였다. 이제는 멕시코에 장벽을 세우고 이로써 자신을 지키려 한다. 트럼프 정부는 제노포비아 정치를 소환하고 있다. 정작 자신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외부의 악마는 아무런 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잘 알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이들은 괴물로 타자화되고 사회에서 밀려나고 있다.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이들. 그들은 살아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며, 인정받지 못한 이들이라는 점에서 이 사회의 복제인간과 다를 게 없다. 현실 사회에서는 그 복제인간들은 영화에서보다 더 비참한 투명인간으로 전락하고 있다.

 

차별이 곧 악이다

 

애들레이드 가족은 결국 살아남았다. 하지만 미국은 더는 안전한 땅이 아니다. 애들레이드는 미국을 떠나 멕시코로 도망가기를 선택한다. 애들레이드는 다시는 보조석에 앉지 않는다. 그녀는 운전석에 앉아 가족의 안전을 위해 최선의 판단이 무엇인지 선택하는 최종 결정권자다. ‘어스’는 지배적 위계질서인 가부장제를 비판한다. ‘어스’에서 아버지들은 두더지 게임을 하느라 딸을 방치했고, 도플갱어 앞에서 야구방망이를 들고 힘을 과시하지만 정작 문제 해결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에 애들레이드는 데이브에게 “이제 당신에게 결정권은 없다”고 말하며 가부장제에 종지부를 찍는다.

 

애들레이드 가족은 지금 미국의 대통령이 악으로 규정한 그 나라로 떠난다. 진짜 괴물은 멕시코인들이나 이방인이 아닌 차별적 시선을 지닌 미국인들 그 자체다. 미국인이 미국인을 공격하는 사회에선 그 누구도 안전을 기대할 수 없다. 언제 어디서 나를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게 한다. 미국 사회는 현재 원주민과 아프리카에서 이주한 흑인들, 히스패닉과 아시안들을 적으로 규정하기 바빠 보인다. 미국 사회는 그들을 자신들의 일부로 여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방인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은 날카로운 언어로 가공되어 사람들의 육체와 영혼에 상처 입히고 있다. 가위로 타인의 심장을 찌르는 듯한 고통은 미국에선 여전히 재현되고 있다.

 

우리’의 범주 안에 누가 들어가 있는가? 감독은 전작인 ‘겟아웃’과는 달리 ‘우리’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자로서 특정 인종을 앞장세우지 않는다. 흑인 배우가 다수를 이루지만, 그 메시지는 특정 인종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 세계적으로 흑인에 대한 차별은 명백하지만, 멕시코인에 대한 차별은 비교적 흐릿하다. 차별로 명백해진 것에는 조심스러워지지만, 흐릿한 것에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미국에서 멕시코인 혐오는 대중적이지만, 처벌받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더 은밀하고 지속해서 이어진다. ‘우리’와 ‘너희’를 가르는 경계선이 분명해질수록 차별도 분명해진다. 인종에 근거한, 성별에 근거한 차별은 멈춰져야 한다. ‘어스’는 차별적 인식이 어떤 악의 얼굴을 가졌는지 보여준다. 차별이 곧 악이다. 조던 필은 ‘어스’를 통해 어쩌면 악은 ‘우리’ 안에 있을 수도 있다는 성찰로부터 시작하자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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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04.30 00:51

일상공유

 

일반대학원 아트&테크놀로지학과 석사과정 신동우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 Paul Gauguin, 1848~1903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은 프랑스의 후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폴 고갱 (Paul Gauguin)의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이란 제목의 작품이다. 이 작품의 제목을 한국어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우리는 누구이고?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라는 제목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흔히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표현하며, 작품에서의 제목(Title)은 모든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이 작품 또한 고갱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그의 삶과 그가 느꼈을 혹은 겪었을 다양한 감정들을 우리는 마주할 수 있는데, 특히 이 작품을 그렸을 때 그는 정서적 상실감과 패배감 그리고 우울함이 극단에 이르렀을 때이고 거기에 사랑하는 딸의 죽음으로 인하여 자살을 기도하기 전, 마지막 유언과 같이 남기고자 했었던 작품이다. 이러한 예술 작품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무언가를 배울 수도 있고 교훈을 얻기도 하며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작품을 그린 고갱은 단 한 번도 전통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니었다. 금융회사에 다니면서 풍족한 생활을 영위한 직장인이었지만 당시 프랑스의 금융위기로 인해 직장을 잃고 35세에 처음 그림을 시작했는데 사실 그가 그림 쪽에는 재능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전시회에서 작품을 출품하거나 살롱에서 입선되는 정도의 실력을 가졌다고 전해지며 이러한 고갱은 자신만의 그림 스타일을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상황을 겪게 되고 그로 인하여 병에 걸려 고통을 받고 늘 자신의 실력을 끊임없이 증명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다 이상적인 화가 집단을 꿈꾼 고흐와의 만남을 통해 고갱은 고흐의 아를 작업실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고 같이 작업하고 다양한 토론을 함께 나누면서도 둘 사이의 의견 차이로 인해 자신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흐가 자신 귀를 자른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에서 귀를 자른 사건보다도 필자가 고갱의 작품을 인용한 이유를 설명하자면 당시 작품을 발표했을 당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갱이 작품의 제목을 통해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한 질문(‘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이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질문인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며 사실 이러한 질문은 나의 주관적인 견해로는 ‘나’라고 하는 자기 존재에 관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되묻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나도 많은 삶을 살아본 경험이 풍족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를 내가 선뜻 한다는 것이 매우 조심스러운 부분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얼마 전, 교정을 산책하면서였다. 다른 대학원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고 잠깐의 사회생활을 하던 도중에 대학원 진학을 두고 많이 고민 했었던 기억이 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그때 내렸던 선택으로 인하여 아트&테크놀로지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했고 현재 마지막 학기에 이르렀다. 과거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고민하던 그때가 졸업을 앞둔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점은 상황은 조금 다를지라도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 졸업과 함께 박사과정으로의 진학이나 취업에 관한 고민들 때로는 석사과정을 선택하려는 사람들과 같이 우리는 일상에서 늘 시작과 끝, 그리고 또 다른 시작의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더 많은 고민과 신중한 결정 사이에서 늘 그렇듯이 고민할 것이고 결국은 매 순간 선택이라는 것을 해야 할 것이며, 다만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 스스로가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물음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져질 질문들이라 나는 생각한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나는 내가 지각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도 남보다 늦었고사회진출도, 결혼도 남들보다 짧게는 1년,길게는 3~4년 정도 늦은 편이었다.

 

능력이 부족했거나 다른 여건이여의치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이렇게 늦다보니 내게는 조바심보다차라리 여유가 생긴 편인데,

 

나이 마흔을 훨씬 넘겨 남의 나라에서학교를 다니겠다고 결정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1997년 봄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가면서 나는정식으로 학교를 다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학교에 적은 두되 그저 몸 성히잘 빈둥거리다 오는 것이 내 목표였는데,졸지에 현지에서 토플 공부를 하고 나이 마흔 셋에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된 까닭은뒤늦게 한 국제 민간 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얻어낸 탓이 컸지만,기왕에 늦은 인생, 지금에라도 한번저질러 보자는 심보도 작용한 셈이었다.

 

미네소타 대학의 퀴퀴하고 어두컴컴한연구실 구석에 처박혀 낮에는 식은 도시락 까먹고,저녁에는 근처에서 사온 햄버거를 꾸역거리며 먹을 때마다나는 서울에 있는 내 연배들을 생각하면서다 늦게 무엇하는 짓인가 후회도 했다.

 

20대의 팔팔한 미국 아이들과 경쟁하기에는나는 너무 연로해 있었고 그 덕에주말도 없이 매일 새벽 한 두시까지그 연구실에서 버틴 끝에 졸업이란 것을 했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나는 무모했다.하지만 그 때 내린 결정이 내게 남겨준 것은 있다.

 

그것은 종이 한 장으로 남아있는 석사 학위가 아니었다.첫 학기 첫 시험 때 시간이 모자라 답안을 완성하지 못한 뒤연구실 구석으로 돌아와 억울함에 겨워찔끔 흘렸던 눈물 그것이다.

 

중학생이나 흘릴 법한 눈물이나이 마흔 셋에 흘렸던 것은내가 비록 뒤늦게 선택한 길이었지만그만큼 절실하게 매달려 있었다는 반증이었기에

내게는 소중한 기억이다.

 

혹 앞으로도 여전히 지각 인생을 살더라도그런 절실함이 있는 한 후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에세이 “지각인생”, 손석희 아나운서

 

 

마지막으로 공유하고 싶은 내용은 “지각인생”이란 손석희 아나운서의 에세이이다. 약 10년 전에 공유되었던 내용이지만 내가 이 글을 좋아하는 이유와 인상 깊은 내용은 비록 그가 남보다 늦게 시작한 결혼생활과 직장생활 그리고 나보다는 한참 늦게 시작한 유학과 석사과정에서의 굉장한 불안감과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고 결국은 종이 한 장으로 남을 석사학위보다도 차가운 연구실에서 남몰래 흘렸던 눈물과 절실함에 대한 기억과 “혹 앞으로도 여전히 지각 인생을 살더라도 이러한 절실함이 있는 한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라는 에세이의 마지막 문장이다. 결국은 그가 내린 선택과 결정에 대해 절실함을 갖고 있고 겸허하게 책임을 수용하는 태도 때문인데 나 또한 마찬가지로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수 없는 질문의 끝에서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지금 이때를 다시 돌아봤을 때 그 선택이 후회가 들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꿈과 열정을 잃지 않고 나라는 존재에 대한 정체성과 가능성을 믿는다면 나를 포함한 우리는 그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더라도 그리고 어떤 시련이 다가와도 우리는 그것들을 충분히 잘 이겨내고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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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04.30 00:48

5년째 시간이 멈춰있는 그곳, 세월호 참사 5주기를 맞이하며.

다시 물어본다. 잊지 않겠다고 한 우리에게.

 

이승은 기자

 

 

또다시 봄이다. 꽃들은 자신이 질 줄을 알면서도 철없이 만개해버리고 마는데, 만개해버린 꽃들을 보면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여기 있다. 유가족들은 세월호 참사 뒤 시간이 멈춰버렸다고 말한다. 돌이킬 수도 없고, 나아갈 수도 없어서 마치 다른 공간에서 혼자 있는 듯 보였다. 팽목항에도 어김없이 꽃이 피었고 작년 8월 진도 팽목항 분향소와 동거차도 초소 철거, 정리하면서 팽목항의 봄을 위해 잠시 들리는 분들도 줄어들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지고 발길이 끊어지는 것은 이뿐만은 아니다. 5번의 봄을 지나며 두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던 유가족은 지금도 여전히 나아진 것은 없다고 말한다. 정권이 바뀌고 나니 사람들은 ‘해결 잘되겠지’하며 관심을 멈추고 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어도 진상규명의 속도는 너무 더디어 유가족들은 답답함을 내비친다. 여전히 목소리를 높여서 계속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며 국가가 알아서 해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고 유가족들은 또 어김없이 정부를 향해 곤두세우며 목소리를 내비쳐야 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이 생기기도 한다. 2017년에는 ‘사회적 참사의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해 2기 특별조사위원회가 꾸려졌고, 지난 2월 28일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추모시설이 ‘4.16 안전공원’ 건립 계획이 확정됐다. 추모공원과 추모기념관, 추모비로 구성된 추모시설은 안산시 화랑유원지 인근 2만3천㎡ 넓이의 터에 건립된다. 내년에 디자인 공모와 설계를 걸쳐 2021년 공사를 시작할 예정이다. 여기서 진상규명만 제대로 하면 그 믿음에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진상규명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선체조사위는 침몰 원인의 결론을 내지 못했고 사회적 참사 특별 조사위도 활동 성과가 아직 미미하다. 강제수사권이 없는 위원회가 갖는 한계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전면 재수사를 요청하는 국민 청원까지 올라왔으며 이에 해당하는 내용은 해경은 왜 선원만 구조하고 승객들을 구조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는지, 세월호 급변침과 침몰의 진짜 원인은 무엇인지, 박근혜 정부는 왜 ‘7시간’ 기록을 봉인하고 집요하게 진상규명을 방해했는지를 요청하는 청원 글이다. 현재로서는 특조위가 자료 요청을 요구해도 정부 기관이 없다고 하면 받을 수 없다. 정부 문서의 보존 기간은 점점 짧아지고 책임자 처벌도 공소시효가 있는 상태에서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버린 현재 골든타임을 잡아 제대로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4.16 기억저장소는 세월호 희생 학생 어머니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하는 민간영구기록물관리기관이다. 참사 관련 자료, 희생자 유품, 유가족 활동 기록, 시민들이 보낸 추모 메시지, 피해자 구술증언 등 세월호와 관련된 모든 기록을 안산에 있는 서고 5곳에 나누어 보관한다. 이렇게 모은 기록 하나하나가 기억 투쟁을 위한 연료 역할을 한다. 희생 학생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기억과 경험을 담은 4.16 구술 증언록 <그날을 말하다>가 100권의 책으로 나온다. 4.16 기억저장소에서 2015년 6월부터 “4.16 구술증언 수집사업”을 진행한 것을 바탕으로 책으로 엮는다. 구술증언은 당사자가 특정 사건에 대한 본인의 경험과 기억, 의견 등에 대해 증언한 내용을 육성 그대로 채록하는 기록의 한 방식이다. 이번 구술증언 수집으로 흩어져 있는 4.16 관련 기억을 소환하여 기록함으로써 이후 진상규명 및 역사기술에 기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4.16의 이야기를 당사자들의 직접 증언한 구술증언을 통하여 많은 사람과 4.16 당사자들과 기억과 경험을 공유하며 세월호 참사와 그 이후에 대해 더욱 정확하고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음을 기원하며 작업을 했다. 이현정 서울대 교수(인류학자)가 구술증언팀을 꾸렸고 피해자 가족 88명, 잠수사 4명, 동거차도 어민 2명, 유가족 공동체 단체 관련자 6명의 육성을 편집 없이 그대로 옮겼다. 구술 자는 약 2시간씩 3회에 걸쳐 참사 이전의 삶, 팽목항과 진도에서의 경험, 자녀에 대한 기억, 참사 이후 투쟁과 공동체 활동, 개인과 가족의 변화와 깨달음 등을 증언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술 내용을 한 권의 책에 담아냈다. 이현정 교수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서 세월호 인양, 그리고 촛불 혁명에 이르는 유가족들의 투쟁은 트라우마의 고통을 딛고 ‘기념비적 삶’을 살아간 자들의 저항 역사라며 세월호 참사를 좀 더 정확하고 다각적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말했다.

참사 이후 시간이 지나도 그리움은 더 깊어져만 간다. 이들이 깊어지는 그리움 때문에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고통을 점점 더 진하게 익히고 있다. 조금 여유가 생기면 금세 그 틈으로 세월호 참사 당시의 기억이 채워졌고 이들은 세월호라는 괴물을 없애지 못하고 우두커니 지켜보거나 곁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 피해자들이 세월호를 마주하는 것은 고통일 뿐이지만 이 고통 속 시간은 계속 멈춰져 있다.

4.16 기억저장소는 세월호 희생 학생 어머니들이 한발 한발 해나가기 위해 만든 기간이다. 국가가 알아서 해주는 거는 하나도 없다고 느낀 이들이 결국 스스로 해나가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믿고 의지하는 수밖에 없는, 이른바 ‘사회’로 통칭하는 국가, 기업, 전문가들이 체계적으로, 구조적으로 자신들을 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그래서 믿을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그러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각자도생밖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더라도, 국가, 자본, 전문가에 의해 방치되는 대다수 약자의 삶은 그저 불안정한 우연에 달려있을 뿐이라는 것. 세월호 참사는 들켜서는 안 되는 은밀한 진실이 폭로된 것이다. 세월호 참사와 그 이후의 수습과정에서 관찰된 구조화되고 조직화한 무능과 무책임함을 보면서 한국사회에 대한 신화, 즉 암묵적인 전제와 가정이 산산이 조각났다. 산업화, 민주화, 그리고 선진화를 통해서 발전된 산업자본주의 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환상이 깨진 것이다. 유연한 노동시장, 규제 완화, 민영화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배를 운항하던 선장과 선원, 구조에 투입된 해경, 그리고 컨트롤타워로 작동해야 할 정부까지도 모두 무책임하고 비효율적이라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결국, 세월호 참사는 유연한 노동시장과 규제 완화를 통해 시장에서 효율성이 증진되고 공공기능을 민영화함으로써 유능하고 효율적인 작은 정부가 된다는 선진화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신화를 허물었으며 구조적 현실을 폭로했다. 벌거벗은 신자유주의 통치성을 보게 되었다.

잊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도록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것과

잊게 만들려는 조직들에서 벗어나 감시하겠다는 뜻이 아닐까. 신자유주의적 지배질서가 계속되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모순과 위기의 징후들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결코 세월호 참사 그리고 그로 인해 희생된 이들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잔인하게도 다시 봄이다. 4.16 기억저장소에 후원자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고, 후원하기 시작했다. “기억은 희망을 만들고, 기억하고 행동하는 것은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기억저장소의 비전에 나온 문장을 발췌했다. 잊지 않겠다고 한 우리에게 다시 물어보고 있다.

 

 

[4.16 기억전시관 : 4.16기억저장소 홈페이지]

 


1) 지주형, 세월호 참사의 정치사회학

2) 4.16 기억저장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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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04.30 00:44

우리 집 말고 너네 집! 남의 집의 문이 열렸다.

남의 집에서 집주인의 취향을 나누는 거실 여행 서비스.

 

이승은 기자

 

남의 집 프로젝트는 낯선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고 모르는 사람 집에서 열리는 모임에 참석하여 다양한 직업과 취향을 가진 이들의 생활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소셜미디어로 사람들을 모아, 모르는 사람의 집을 구경시켜주고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남의 집 프로젝트의 문지기이자 대표 김성용 씨를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학부 수업의 특강 자리에서 만나 뵐 수 있었다.

전혀 모르는 남의 집을 찾아가 집주인 취향을 즐기는 일명 ‘남의 집 프로젝트’는 아직 1년 반밖에 안 되었지만 남의 집을 찾는 게스트 수는 700명이 넘는다. 집주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집에서 노는 문화를 만들었다.

남의 집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자칭, 타칭 ‘문지기’라고 불리는 김성용 씨가 있다. 김성용 씨는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생으로 원래는 정보통신 분야에서 일하며 일명 IT 문과생이었다. 회사원이었던 그가 회사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며 처음에 장난삼아 시작했던 것을 키워 자신의 사업으로 발전시켰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셰어하우스에서 지내던 김성용 씨는 아는 형과 함께 살다 보니 자신의 집이 마치 아지트 느낌이었다고 한다. 집에서 노는 게 굉장히 재밌었고 술집이나 카페에서 노는 것과 달리 집이 주는 묘한 느낌이 좋았다. 우리 집에서 놀러 오는 것이 상대방 입장에서는 남의 집이니까 장난처럼 SNS 계정부터 만들면서 시작하였고 그때가 2년 전 1월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연희동 셰어하우스 거실을 오픈하였는데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좋아서 회사를 나오고 전문적으로 이 일에 뛰어들었다.

그가 회사까지 나오면서 이 일을 제대로 해보기 위해서는 가설검증이 필요했다. 정보통신 분야에서 일할 적 항상 가설검증을 하던 습관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김 대표가 말하는 첫 번째 가설검증은 ‘모르는 사람의 집에 놀러 갈 사람이 있을까‘였다고 밝혔다. 모르는 사람이 우리 집에 와야 하므로, 처음에는 대외활동 주고받는 페이스북 커뮤니티에 홍보 글을 업로드 했다. 1시간도 안 돼서 신청 알람이 오고 반응이 좋아 다양한 컨셉으로 카테고리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남의 집 도서관’이 바로 두 번째 컨셉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연희주민센터에서도 연희동 주민들을 위해서도 남의 집 도서관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남의 집 도서관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가설검증은 ‘모르는 사람을 집으로 초대할 사람이 있을까’였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플랫폼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극히 사적인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공유하며 경험하게 되는 체험은 이미 다양한 양면적인 플랫폼들 사이에서 가능한 부분이다.

모이면 돈이 되는 것. 유튜브도, 카카오도 모두 같은 원리였다. 문을 열고 모이도록 만들라! 그래서 다양한 문들을 열기 시작했다.

 

뭐 이런 것까지

집이라는 공간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무궁무진한 아이템들이 나온다. 집에서는 일얘기는 하지 않고 시답잖은 얘기가 가능하니 말이다.

남의 집 모임 형태로 열린 주제는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취미부터 특이한 취향까지 다양하다. 김성용 씨는 “뭐 이런 것까지…….”라고 할 정도로 소소한 취향들을 끄집어내려고 한다고 밝혔다. ‘남의집 마그넷’은 집주인이 여행 간 도시들을 기억하는 방법으로 마그넷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게스트분들과 여행 추억을 어떻게 간직하는지 등에 대해 나누기 위해 문을 열게 된 상자다. ‘남의집 고수’는 베트남 고수를 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수로 만든 음식들을 미친 듯이 먹어보기 위해 문을 열게 되었고, ‘남의집 아침’은 호스트분의 라이프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체험이다. 아침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아침을 어떻게 보내는지, 나에게 아침은 어떤 의미인지 등을 이야기 나눠보는 체험이다. 이밖에도 ‘남의집 보이차’, ‘남의집 필름카메라’, ‘남의집 수립과 기록’등 ‘뭐 이런 것까지’가 가능한 체험들이 많다.

김성용 씨가 말하는 세 번째 가설검증은 남의 집 모임 형식 말고 다른 것을 찾다가 발견하였다. 집을 독립서점 혹은 카페처럼 사용할 수 있을까였다. 집은 열어두어 낯선 사람들과 취향을 공유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지만, 대화에 서툰 호스트분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대화를 뺀 남의 집을 만들어 본 것이다. 남의 집 서재로 카테고리를 만들어, 호스트 집에 초대된 게스트들이 대화 없이 호스트 집에 있는 책을 읽든, 자신이 가져온 책을 읽든 상관없이 책만 읽고 체험을 할 수 있다.

네 번째 가설은 해외에서도 가능할까였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던 참에 문지기인 김성용 씨에게 먼저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분들이 먼저 문을 열고 싶다고 요청을 했다. 이로써 해외에도 문을 열게 되어 스페인, 호찌민, 이스탄불, 도쿄, 크로아티아 등 다양한 나라에서도 남의 집에서 놀 수 있다!

이렇듯 남의 집은 집으로 떠나는 여행 가치를 여행 서비스로 만들게 되었다. 처음 방문한 공간에서 낯선 이들과 어울리는 여행들의 경험을 이제 일상에서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상 속에서 여행 같은 경험은 우리가 마냥 입 밖으로 툭툭 던지고 했던 말들을 문지기 김성용 씨는 진짜 만들어낸 것이다.

집이라는 공간만큼 미지의 공간도 없다는 말이 굉장히 진하게 남아있다. 루브르 박물관은 2만 원만 내면 누구나 들어가서 구경할 수 있지만 ‘집’이라는 공간은 굉장히 사적이기 때문에 미스테리한 느낌을 준다. 또한, 과거에는 ‘집’이라는 공간이 가족들이 함께 사는 주거지라는 기능이었다면 현재 1인 가구가 500만 명이 넘어서면서 소규모 가구의 집들이 많아지면서 개성과 취향을 드러내고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주택난에 시달리는 젊은 사람들이 겨우 구한 비좁고 개성 없는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하기 시작하며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다. 이렇듯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매력으로 남의 집 프로젝트는 지난 1년 반 동안 거실을 공개한 집주인이 100명 게스트는 700명이 이르렀다. 오픈 지역 또한 서울뿐만 아니라 제주도 그리고 해외까지 뻗어있기 때문에 더 많은 지역과 나라에서도 집주인들이 문을 열 수 있게 만들 셈이라고 한다.

대화가 핵심인 남의집 프로젝트가 강조하는 두 가지 요건은 의외로 ‘익명성’과 ‘단발성’이다. 그는 익명성에 대해 “서로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특별한 기득권이 없다”라고 말했으며, 단발성이 중요한 이유는 “그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말 못 했던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을 남의집 프로젝트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건 내일 안 볼 사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느슨하지만 깊은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이 남의집 프로젝트가 가는 방향이다.

 

김성용 씨는 “여행 비즈니스 플랫폼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다른 여행 플랫폼과의 차이점은 여행 동기를 만들어준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다른 플랫폼들은 여행 동기를 먼저 가진 뒤에 플랫폼에 접근하지만 남의집 프로젝트는 여행 계획이 없던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서 여행을 이끌어낸다”고 덧붙였다.

일상 속에서도 언제든 작은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남의 집이 주는 메시지가 아닐까.

 

 

[ 남의집 페이스북 페이지 ;  김성용 대표 ]

 

[ 남의집 홈페이지 ]

 

[남의집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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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04.30 00:39

자살 보도의 문제점을 꼬집다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한창현 박사 인터뷰

 

자살에 대한 보도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부분을 생각해야 한다는 거죠”

 

 

논문 소개

 

방송 뉴스 자살 보도 시 미화법 사용과 배경 설명이 대학생의 자살 관련 인식에 미치는 영향”

-한창현(서강대 박사과정 수료), 유현재(서강대 교수), 정휘관(식품의약품안전처), 한택수(국민건강보험공단), 서영지(University of Georgia 박사과정)-

 

2018년 엔자임 학술상 수상

 

 

인터뷰 및 편집 박시은, 전건웅

 

 

서강대학원신문(이하 서강)> 엔자임 학술상이란 어떤 상인가요?

 

한창현 박사(이하 한)> 엔자임이란 회사는 PR 회사인데 헬스 커뮤니케이션 관련 후원을 많이 해요. 엔자임 학술상은 엔자임 회사에서 헬스 커뮤니케이션 학회 소속 연구자들의 연구를 지원하기 위한 취지에서 만든 거고 1년에 한 번, 두 명씩 연말에 시상하고 있습니다.

 

서강> 이번에 수상하신 논문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한> 방송 뉴스에서 자살을 보도할 때 이런이런 내용은 다루지 말라고 하는 지침이 있어요. 그 지침을 방송국에서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인식을 잘 못 해요. ‘어떠한 장면을 내보내면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걸 알면 내보내지 않을 텐데…’ 라는 취지죠. 방송 자살 보도 권고기준에 따라서 지켜지지 않았을 때, 이러한 악영향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예요.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권고기준을 잘 지켜야 이러한 악영향을 막을 수 있다”라는 연구죠.

 

서강> 연구하실 때 데이터는 어떻게 모으시고, 어떤 방법론을 사용하셨나요?

 

한> 실제로 자살 장면을 묘사하는 방송뉴스의 앵커 중, 자살 보도 권고 기준을 지킨 앵커와 동일한 기준에서 자살 보도 지침을 지키지 않은 앵커의 뉴스를 제작해서, ‘권고 기준을 지킨 사람과 지키지 않은 사람의 뉴스를 접한 사람들이 서로 어떠한 차이가 발생하는가?’ 집단 간 비교 연구를 한 거죠.

 

서강> 실제 뉴스가 아닌 실험 연구를 하신 거네요?

 

한> 그런데 그 앵커는 실제 앵커, 기존에 다른 연구들은 글로 읽거나 하는 방식이었거든요. 그런 게 아니라 실제 뉴스 방송과 똑같은 앵커를 써서 똑같은 방송을 만들었어요.

 

서강> 실제 앵커를 어떻게 섭외 하신 거예요?

 

한> EBS와 협의를 해서 EBS 앵커가 EBS에서 촬영을 하고, 대신에 그 내용을 저희가 다 만들어줬죠.

 

서강> 이해를 돕기 위해, 모방 자살이란 무엇이고, 자살 보도의 미화법의 예시를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한> 정확히 이야기하면 이런 거예요. 미화법이란 것이 아름답게 꾸민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살에 대해서 동정을 할 수 있게 되는, ‘그럴 수 있겠다’라고 심정적으로 공감을 갖게 하는 것이 미화법에 가깝거든요. 예를 들면, “오늘 새벽 두 시경 서울에 사는 40세 김 모 씨가 다섯 살 세 살 난 두 딸에게 극약을 먹여 살해한 후, 자신도 같은 약을 마셔 숨졌습니다. 이들은 약을 마신 직후 친척들에 의해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지만, 병원에 도착해 숨졌습니다.” 이렇게 팩트만 전달해도 되는데, “가장 김 모 씨가 사업실패로 인해 아내가 집을 나가자 딸들과 함께 동반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동반 자살이라고 표현하는 거죠. 동반 자살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미화법인데, ‘얼마나 힘들었으면 아이와 함께 자살을 시도했을까?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거죠. 정확히 팩트대로 이야기하자면 이건 부모가 아이를 죽인 거잖아요. 부모가 아이를 살해한 후, 본인도 자살 한 것인데, 일종의 이게(동반 자살로 표현) 자연스러운 묘사처럼 보이지만 많은 것을 무마하는 거죠. ‘부모가 혼자 죽으면 아이도 혼자 남게 되고, 그 아이는 어떻게…’ 처럼 사람들에게 공감을 만들고, 이렇게 팩트만 전달했을 때와 미화법을 사용했을 때 사람들의 생각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 거죠.

 

서강> 그러한 미화법이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가 많이 사용하는 편인가요?

          

한> 그렇죠. 우리나라는 동반 자살이라는 표현을 많이 써요. 저희가 지적했던 부분은 이거예요. 미화법을 사용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동반 자살이 미화법이라는 얘기는 안 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외국에서는 동반 자살이라는 표현이 미화법이기 때문에 쓰지 말라고 해요. 그러니깐 “규정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미화법을 사용하지 말라고는 하지만 앵커들이 동반 자살이 미화법이라는 것을 인지 못 한다는 거죠. 이런 표현들 자체가 미화법이라는 것을 첫 번째 보여주는 거고, 그리고 실제로 이런 표현들이 사람들의 공감을 형성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서강> 자살 배경을 설명해주는 것도 자살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데?

 

한> 자살에 대한 배경설명 자체가 어느 식으로든 간에 들어가 버리면 모방 자살에는 트리거(trigger) 효과라는 게 있어서, 이런 배경이 설명되면 그것과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도 자살로 이 고통을 마감해야겠구나 하는 근거가 되어 버리게 돼요. 지금은 많이 줄었는데, 많은 경우 기자들이 가정불화라든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쭉 설명을 하는 것이 기자의 본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꽃(핵심)은 그거예요. 그렇게 설명해주는 거(배경설명) 자체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해주는 거는 맞아요. 그런데, 자살 고위험군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배경설명 자체가 자살로 연결될 수 있다는 거죠. 배경설명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자살에 대한 설명을 하지 말아야 한다’ 보다 그 설명으로 인해서 자살에 대한 욕구가 있었던 사람들이 자살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기 때문에 설명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죠.

 

서강> 실제로 모방 자살이 자살 보도로 인해서 증감이 많은 편인가요?

 

한> 앞으로 이 부분이 추가적으로 발전시켜야할 부분인데, ‘실제로 자살로 이어지는가?’ 는 검증할 방법이 없어요. 이론적인 부분에서 놓고 봤을 때, 모방 자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베르테르 효과라고 해서 ‘(자살이) 소설에서 묘사됐을 때 유사한 형태로 자살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유사한 자살이 일어난다고 해서 배경설명 자체가 자살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는지까지는 논리적인 비약이 있을 수 있죠.

 

KBS가 故성재기 씨의 자살 퍼포먼스를 중계하는 장면. 대 부분의 미디어가 자살 보도 권고기준을 지키지 않고 있다. 사진 출처=트위터 사용자(@ve****) 화면 캡처

 

서강> 그럼 이번 실험은 어떻게 설계되었나요?

 

한> 변인은 배경설명이 있고 없고 미화법의 사용이 있고 없고, 미화법의 사용은 동반 자살의 표현을 썼을 때와 ‘동반 자살’ 대신에 ‘살해 후 자살’이라고 썼을 때 둘 사이가 차이가 있는지. 배경설명을 했을 때와 안 했을 때 둘 사이에 차이가 있는지. 총 네 가지의 그룹으로 두 가지를 본 거예요.

 

서강> 실험의 결과는 어땠나요?

 

한> 결과는 ‘동반 자살이라고 표현된 방송을 본 사람들이 살해 후 자살이라는 방송을 본 사람들에 비해서 자살자들에 대해서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다음에 ‘자살자에 대한 인식, 자살 행동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방송을 보기 전에 자살에 대한 좋다 나쁘다는 인식이 있을 거 아니에요. 영상을 보여주고 난 뒤의 다시 조사했을 때 인식을 미화법이나 배경설명이 들어간 경우, 자살에 대한 태도가 나쁘다는 생각이 줄어든다는 거죠. 인식론적인 영향을 미친다. 추론을 해보면 일반적인 사람들이 자살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변한다고 봤을 때, 자살 고위험군에 있는 사람들은 더 자살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떨어질 수 있다는 거죠.

 

서강> 이러한 결과가 가지는 의의가 무엇인가요?

 

한> 자살에 대한 보도를 할 때 미화법과 배경 설명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봐라. 미화법과 배경설명을 설명하면 자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줄어든다. 그러니 모방 자살의 위험이 늘어난다.” 보도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언론에 말할 수 있죠.

 

서강> 자살 보도에 왜 미화법과 배경설명이 많을까요?

 

한> 이러한 효과가 있다는 것을 인식을 못 하는 거야. 공부하고 일찍 자야 되는걸 알면서 안되듯이, 미화법을 쓰면 안 되고 배경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걸 기자들도 알아요. 그런데 실제로 쓸 때 무의식적으로 쓰게 되는 거예요. 자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동기를 붙이는 자체가 미화법인 줄을 모르는 거죠. 어떠한 심리적인 스트레스와 상황에 의해서 자살에 이르게 됐다는 것을 보통 팩트로 보지만,. 헬스 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 보면 팩트가 아니라 이러한 상황에 의해서 자살하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미화법이거든요. ‘자살은 아름다운 거야’라고 쓰는 것이 미화법이 아니라, 자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자체가 미화법이라는 거죠.

 

서강> 헬스 커뮤니케이션의 미화법에 대한 관점이 기자들의 의무와 부딪히지 않을까요?

          

한> 자살에 대한 보도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부분을 생각해야 한다는 거죠.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자살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기자의 의무일 수 있지만, 자살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사람들, 자살의 위기에 놓여있는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들일 수 있어요. 장애인들을 배려하고, 자살의 위험에 놓여있고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자살에 대한 정보로 인해 자살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최대한 자제할 수 없겠냐는 거죠.

 

자살의 위험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살의 보도라는 자체가 팩트 그대로 이야기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안 하잖아. “누가 투신했다.”라고만 이야기하면 되는데 굳이 이유를 밝힐 필요가 있냐는 거지, 예를 들어서 ‘학생들에 의해서 놀림을 받던 사람이 투신했다’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팩트로밖에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아이들에 의해서 놀림을 받던 사람에게는 놀렸던 아이가 투신으로 인해서 처벌을 받으면 이게 하나의 수단이 되는 거예요. ‘아, 내가 그 아이들에게 복수할 수 있구나!’라는 방법이 되는 거예요. 사회적으로 왕따를 받고 놀림을 받는 아이들이 있으면 그 아이들을 돌보아주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 아이들을 돌봐주는 데 있어서, 놀림으로 인한 투신과 같은 보도는 이 아이들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복수의 방법을 알려주는 게 될 수 있는 거예요.


서강> 일상 속에서 생사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에게는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이네요.

 

한> 놀림을 받던 아이가 투신해서 자살한 것은 팩트잖아요. 기자들에게는 이게 자살에 대한 미화라고 생각 못 하는 거예요. 기자들만 뭐라 할 수 없어. 정말 자살의 위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방법이 더 좋은 방법일까 생각해봐야 해요. 노회찬 씨의 자살을 생각해봤을 때, 이게 가십거리가 될 가능성이 크잖아요. ‘정치적인 도덕성에 의해서 흠결이 나자 자살하였다.’라고 보도했을 때, ‘죽음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주장함.’ 이런 식으로 간다고요. 문제는 딸려오는(부차적인) 방식인데, 죽음으로써 더이상 노회찬씨의 실제 도덕성에 대한 문제는 왈가왈부하지 않게 되는 거야. 문제 해결 방식을 제시하게 되는 거죠.

 

강예원씨 스튜디오 실장도 그냥 자살해버리잖아요. 나는 억울하고 자살한다. 이게 인간의 심리적인 측면에서 자살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인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하면 복수할 수 있을까’는 인간의 심리에 있어요. 사회에서 계속 그런걸 확대 재생산 시킨다는 거죠. 나는 이것을 죽음으로 해결을 해버린다는 거죠.

 

옛날에 최진실 씨가 자살했잖아요. 최진실 씨가 죽기 직전에 자기가 살고 싶어서 이거(목줄)를 땡겼어요. 그런데 그런 걸 보도 안 하잖아. 자신이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자살한다는 자체가 복수거든 다시 생각해보니깐 죽을 일까진 아니거든, 그래서 다시 죽음의 순간에 풀려고 했는데 풀려고 했다는 것은 보도를 안 한단 말이지. 최진실 씨는 그 사람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하고 상대방은 빌런이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최진실 씨를 완벽하게 피해자로 만들어야 하는 거야. 최진실 씨를 자살을 기도했다가 실패하고, 이도 저도 아닌 정신적으로 나약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거야. 언론에서 봤을 때 이 사람은 완전히 나쁜 사람, 최진실 씨는 피해자로 만들어야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만들어야 하는게 생리적으로 맞는 거죠.

 

서강> 이러한 보도방식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한> 권고지침만 준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죠. 지금 언론의 문제가 자극적인 기사를 만들어야 히팅(조회) 수가 올라간다고, 자살에 대한 권고기준을 줘도 의도적으로 낚시성 기사를 만들어요. 이 분야에 있어서는 아주 기본적인 내용조차도 자살에 대한 미화법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개선되어야 하는 데 어려움이 있죠.

 

당장 내가 히팅 수를 올릴 수 있는 기사가 있다고 하면, 그 자체로 돈이 되고 자신의 능력이 되는 거니깐 교묘하게 쓰고 있는 거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죠. (한 가지 예방법은) 자살 관련 기사들을 보면 요즘에 그런 기사들이 있어요. 자살과 관련해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중앙자살예방 협회에 연락하도록 (기사 밑에 삽입) 되어 있어요. 아이러니하지만 그런데도 집어넣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 기사를 보고 자살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는 거죠.

 

서강> 실험의 한계점이나 향후 연구 방향이 있다면?

 

한> 이론적으로 헬스 커뮤니케이션에서 할 수 있는 거는 이런 거예요. 자살 관련 보도를 접하잖아요. 지급 같은 경우는 AI 시대잖아요. 특정 기사를 보고 이 사람의 심적인 변화라던가 이 사람이 자살을 시도하던가 실제적인 데이터를 땡겨올(수집할) 수 있어요. 지금 같은 경우는 이론적인 부분에만 머물러 있는데, 이건 법적인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인데… 우울증 환자가 있잖아요? 이 사람의 핸드폰 사용을 모니터링하는 거예요. 특정 기사를 반복적으로 접한 이후에 이 사람이 실제로 자살을 시도했다던가 하는 데이터로 연계시킬 수 있다는 거죠. 이럴 경우에 법적으로 권고사항을 정할 수 있다는 거죠. A, B, C라는 기사 중 C라는 기사를 계속 보고 자살 시행까지 옮기게 되는 걸 알 수 있다는 거죠. 이 사람이 병원에 가는지 의료 데이터, 핸드폰을 보려면 이 사람의 신상정보와 모니터링, 이걸 통해서 정확한 데이터를 추출해내서 정책까지 만들 수 있는, 문제가 될 수 있는 게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할 것인가. 생명을 존중할 것인가 하는 법적인, 윤리적인 문제가 있는데, 기술적으로는 접목시킬 수 있다는 거죠.

 

 

서강> 인권 문제 라던지, 법적으로 많이 부딪힐 것 같은데요?

 

한> 자살 관련 캠페인이 있잖아요. 실제로 우울증이 높고, 자살 고위험군이 있는 사람이 실제로 어디로 많이 가는지 (GPS를 통해) 조사하면, 어떤 방식의 캠페인이 더 효율적인지 조사할 수 있다는. 거지. 지금은 그런 것들을 발견해낼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정말 우리가 부딪히기만 할 것인가. 우리가 심야버스가 만들어질 때 사람들이 어디서 택시를 많이 타는지, 버스를 많이 타는지 빅데이터를 만든 다음에 심야버스를 만들었잖아요. 당장 나에게 도움이 되면 사람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거죠. 자신들의 승차 정보가 서울시에 의해서 모니터링되었다는 거는 신경 쓰지 않아요.

 

새벽 4시 반에 가장 많이 차는 버스. 만원 버스는 강남으로 가서 청소하시는 분들이 가장 많이 이용해요. 새벽 4시 반 버스가 없으면 안 되는 거야. 다른 사람들한테 새벽 4시 반에 버스를 증차하자고 하면 아무도 동의를 안 하겠죠. 새벽 4시 반에 강남으로 가장 많이 유입된다는 데이터를 보여줘야 그분들을 위한 버스를 증차시킬 수 있는 거죠. 이건 전부 사람들의 개인적인 데이터죠.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예를 들어 TV에서 자살을 극적으로 묘사한 장면을 많이 보여주게 되면 핸드폰 GPS를 통해서 이 사람들이 그 묘사한 장소를 많이 가더라, 관련된 영상을 많이 보더라 이런 정보를 뽑을 수 있죠.

 

지금 논문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거고, 그렇다고 우리가 자살 위험군들을 다 찾아내는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원하기는 그 사람들을 이용해서 하고 싶은데, 기술만 가능하면, 법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이 연구가 원래 진행되어야 했을 방법이 가능하죠. 실제로 위험군에 있는 사람들이 자살 관련된 영상을 볼 때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지 조사가 가능하죠.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순 있지만, 실제로는 이런 식으로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거죠. 현실적으로 이렇게라도, TV 방송을 만들었고, 실제 보았고, 이전에는 글로만 보여줬었거든요. 그런데 이거는 실제 방송을 만들고 100명이 넘게 모으고 이런 게 획기적인 거죠(웃음).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거는 기술적으로 모두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정교화하고 법제화할 수 있다는 거죠. 법제화하는 거는 자살 위험군에 있는 사회적 약자를 돌봐주길 원하는 거고, 권고사항으로 힘들죠.

 

서강> 자살은 본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 않나요?

그런 걸 다 모니터링하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상황이 될 수 있잖아요.

 

한> 아니지, 떨어지려고 하는 사람을 잡는 건 아니잖아요. 담배 피고 싶은 사람이 자신이 피고 싶어서 피는 게 아니라, 자꾸 담배 피우는 장면을 보니깐 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잖아요. 이 사람은 담배를 피지 않을 자신의 권리를 침해받는 것일 수 있어요. 자살하는 사람도 자살에 대한 묘사가 없었으면 굳이 자살로까지 안 갈 수 있는 거죠. 사실 표현의 자유가 더 문제인데 영화 드라마 작가들에게도 문제가 생길 수 있죠. 이게 통제하는 게 아니라 자살에 대한 연구를 해보면, 지하철 도어에 지금 스크린 도어가 생겼잖아요. 스크린 도어가 생겨도 정말 자살할 사람은 자살할 거라고 생기는데, 실제 자살률이 줄어요. 이건 자살할 권리를 침해하는 거랑 조금 다른 거예요. 자살을 많이 하는 다리가 있는데 거기를 막으면 다른 데 가서 자살을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자살률 자체가 줄어요. 사람들 심리가 그렇다는 거죠. 자살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조금 다르게 접근할 수 있어요.

                                                                   

정말 자살이 자의에 의한 선택이냐는 거죠. 외부의 영향에 의해서 대부분 자살이 순간적이고 충동적으로 일어난다는 거죠. 그건 진정한 자유가 아니잖아. 인지과학에서 보면 3초만 기다리면 돼요. 3초만, 3초만 더 기다리면 전두엽에서 그걸 정리해요. 충돌을 억제할 수 있어요. 얼마나 웃긴 거야. 지하철 스크린 도어만 막아도, 다리만 막아도 자살률이 준다니까? 괴롭힘당한 아이가 미디어를 통해 자살로 복수하는 것을 보고 자살을 한다면 그 아이가 정말로 선택해서 하는 자살이냐는 거죠. 가뜩이나 더 나가면 3, 4살짜리도 아빠가 죽이고 자살을 해요. 그러면 ‘이 불쌍한 애들 남길 바에야 같이 죽자’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지. 미디어에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고 표현하는 거지.

 

 

*본 논문은 학술연구정보 서비스(RISS)에서 다운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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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04.30 00:33

이주노동자를 위한 챗봇을 개발한 ‘행복한 길찾기’ 프로젝트

서강대학교 아트&테크놀로지학과 김상용 교수님 인터뷰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다양한 분야로 나누는가,

저는 이 안에서 융합이 일어난다고 봅니다”

 

‘행복한 길찾기’ 프로젝트는 한국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이주노동자 지원센터 김포 이웃살이의 현실적인 고충에서 비롯됐습니다. 지원센터의 인력에 비해 도움이 필요한 이주노동자가 너무 많고, 긴급한 상황에서 즉각적인 지원이 불가능한 현실에 주목한 김상용 교수님과 대학원 연구팀은 이주노동자들이 메신저를 통해 대화로 소통하며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인공지능 기반의 챗봇 개발을 기획했습니다. ‘행복한 길찾기’ 프로젝트를 지도한 지도교수이자, ‘따뜻한 기술’로 융합 분야에 접근하고 있는 김상용 교수님을 만나보았습니다.

 

인터뷰 및 편집 박시은, 이승은

 

 

서강대학원신문(이하 서강)> 프로젝트의 이름은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방향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 이름을 지으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상용 교수(이하 김)> 처음엔 개인적인 체험에서 시작됐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하지만 예수회 사제예요. 가톨릭 사제이다 보니까 소외된 사람, 가난한 사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을 저희 사제들이 돌봐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가장 약자들이 누구인가 살펴봤을 때, 저 자신에게는 한 달에 두 번씩 찾아갔던 김포 지역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요즘에는 외국인 노동자라 부르지 않고, 이주노동자라고 부릅니다. 3~4년 전에 이주노동자들을 만나면서, 그분들이 주최한 레크리에이션 놀이를 함께 한 적이 있어요. 그분들이 퀴즈를 내서 상품을 줬었는데, 상품 이름 중에 최상의 상품의 이름이 ‘행복한 길찾기’였습니다.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이주노동자들에게 비친 한국 땅에서의 삶이 ‘길’이라는 것이 제겐 상징적이고 메타포로 느껴졌습니다. 그 용어가 깊이 와 닿았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길찾기’라는 키워드가 거기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서강> 이와 같은 프로젝트를 기획하신 구체적인 계기가 궁금합니다.

 

김> 구체적인 계기가 된 것은, 세계적인 사회학자이면서 시카고 대학에서 석좌교수를 하고 계신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이라는 교수님이 계시는데, 마사 누스바움 교수님이 새롭게 낸 책 가운데서 『Creating Capabilities(역량의 창조)』라는 책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대학원생들과 함께 나누기도 했죠. 이 책에서의 중요한 내용은, 내 안에 잠재된 역량이 내가 태어난 환경에 너무나 지배적으로 영향을 받는 나머지, 이 역량이 꽃피지 못하고 심지어는 내가 이러한 역량이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많은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보고서예요. 그래서 전 제가 접촉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이 역량으로 발휘될 수 있겠는가?’에서 출발한 거예요. 이 이야기가 작년 9월 이야기입니다.

대학원생들과 함께 creative project라는 수업을 하면서 이 프로젝트를 제안해봤어요. 대학원생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줬었지만, 만약에 대학원생들과 함께하지 못했다면 학부생들과 하려 했습니다. 의외로 대학원생분들이 다섯 분이나 참여해주셔서 굉장히 재밌게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김포지역 박스포장업체  < 영화포장 > 에 방문하여 이주노동자와 인터뷰하는 모습

 

서강> 아직 이주노동자가 언론에 보도되는 형태가 차별적이고, 인권이 무시되면서 보도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께서 보신 이주노동자의 삶의 모습과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김>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서 대학원생들과 공장도 방문했었는데, 우선 이주노동자들이 한국 땅에서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임금체불입니다. 이 노동자들이 비자를 받을 수 있는 비자 단계들이 있는데, 김포지역의 노동자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고, 농촌에 있는 노동자들이 가장 힘듭니다. 임금체불은 좀 더 속사정이 있습니다. 우리 문화 안에는 아직 타자에 대해 배타적인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빈번하게 인권침해로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서, 숙련된 노동자들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업주 입장에서는 빨리 속도를 내야 하니까 애가 닳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욕을 하거나 일부러 임금체불 합니다. 이런 것들이 노동자들에겐 가장 힘든 겁니다. 생활 기반과 직결된 문제이니까요.

이주노동자분들이 가장 큰 고통 중에 두 번째는 생존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번 돈을 본국에 어떻게 보내야 할지, 어떻게 은행 계좌를 만드는지, 자기 나라의 음식을 먹고 싶은데 마켓이 어디에 있는지도 찾기 힘듭니다. 임금체불도 상담하려면 노동센터에 가야 하는 데 어디에 있는지 등 이런 기본적인 것이 길이 없는 겁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이런 길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 행복한 길찾기 >  챗봇 카테고리 중 생활정보  Task Flow  자료 사진

 

서강> 그렇다면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시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은 앞서 말씀하신 기본적인 것들을 노동자분들에게 바탕으로 깔아주는 것이었군요. 결과물인 챗봇(Chatbot)의 카테고리를 보면 생활, 의료, 금융, 언어, 교통이 있는데, 이 데이터들은 어떻게 받으신 건가요?

 

김> ‘이웃살이’라는 이주노동자 지원센터가 있습니다. 이곳이 10년이 넘었어요. 이런 노동 상담과 관련되어 기록한 문서 데이터가 있었습니다. 그 데이터베이스를 10년 치를 다 보진 못하고 3년 치를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전부터 봤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데이터베이스로 해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되었습니다. 이 아이디어를 런칭하고, 대학원생들은 이주노동자들과 접촉면이 없었기 때문에 카테고리는 제가 만들어줬습니다.

 

 

서강> 결과물로 챗봇이 나오기 전에는 어떤 아이디어들이 있었나요?

 

김> 학부에서 처음 진행하려고 했을 때는 학부생들이 대학원생만큼 전문적인 코딩 지식이라든지 이 프로젝트에만 매진할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테크놀로지 기반이 아닌 구체적인 책자 형태로 예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김포지역의 노동자들이 1500명 정도 되는데, 1000부 정도 찍으려고 예산까지 냈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원생들이 참여하게 되어서 대학원생들을 기반으로 했을 때는 테크놀로지가 가능하니까 좀 더 실험적인 것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 대학원 성격에 맞게 런칭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죠.

 

 

서강> 프로젝트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인데, 연구원들 안에서 챗봇을 만들 만한 코딩 기술을 가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대학원 안에서 소화될 수 있을 줄 알고 기대했는데 그게 안 된다는 것을 대학원생들과 네 번째 만남에서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펀딩을 받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상하지 못했던 예산을 확보하여 개발자를 초대해야 한다는 것이 조금 힘들었습니다.

 

 

 

김포 이웃살이에 대학원 팀과 함께 방문하여 지원센터 신부님들과 인터뷰하는 모습

 

서강> 행복한 길찾기 안에서 융합의 과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김> 제게 어떤 면에서는 분명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융합이라는 말이 나온 지 7~8년 정도 됐습니다. 거기엔 ‘숨어있는 이데올로기’가 있습니다. 비판적인 의미인데요. 깊은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고 빨리 써먹을 수 있는, 이것이 제 불만입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저에게 행복한 길찾기의 융합은 나의 인생과 별 관계가 없었던 미얀마, 필리핀 등 하층 계급이라 표현할 수 있는 이주노동자들과 접촉면을 가져서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들의 니즈를 경청하는 태도입니다. 이를 단순히 일상적인 대화라 보기보다는 굉장히 멀리 있었던 타자가 나에게 조우한 것입니다. 아트&테크놀로지 대학원생 입장에서는 내가 꿈을 꾸고 있는 청년으로서 아텍에 와서 인문, 예술, 디자인, 기술을 배우고 있는데,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융합은 삶의 융합입니다. 삶의 융합이라는 것은 지성인으로서 대학원생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지위, capital을 어떻게 나누는가, 어떤 다학제 간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것보다 조금 반대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다양한 분야로 나누는가, 저는 이 안에서 융합이 일어난다고 반대의 관점으로 봅니다. 이는 윤리적인 실천영역과 함께 닿아있습니다. 내 삶 안에, 나의 인격체 안에 복잡하고 다양한 것이 완전히 타자에 의해 접촉면을 가지면서 나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고정불변한 면이 변해보는 것이 융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행복한 길찾기는 저한테 이렇게 의도되었고, 이 목적들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믿습니다.

 

 

서강> 행복한 길찾기 프로젝트처럼 앞으로도 이러한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계시는가요?

 

김> 그러기 위해서 제가 아텍에 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단발적인 프로젝트라면 저는 아마 학교에 남아있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관심 있는 것은 따뜻한 기술입니다. 아직 제가 연구하는 분야는 완전히 minority 해요. 한마디로 제 분야는 Moral Technology입니다. 어떻게 따뜻한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이 분야는 여러 분야로 나뉠 수가 있는데, 개인의 창작품이 아닌 타자와 대화하는 Social Art가 있고, 또 하나는 Social Impact입니다. Social Art는 ‘어떻게 미학을 가지고 취약 계층들과 대화할 것인가’를 고민한다면, Social Impact는 ‘현대에 따뜻한 기술을 갖고 기능적으로, 실질적(Design, Application, Device)으로 어떻게 이 사람들에게 접근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그래서 행복한 길찾기는 제가 Social Impact처럼 고안한 것이고, 지금 기획하고 있는 것은 Social Art입니다.

 

 

서강> 왜 지금까지는 행복한 길찾기처럼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기술 지원 형태의 프로젝트가 없었는지 교수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김> 교육 현장에서 융합적인 사고로 교육받아 꿈을 키워가는 젊은이들을 만나면서 든 생각은, 서강대학교의 아트&테크놀로지학과는 융합을 연구하기 위해 모이는 일종의 플랫폼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서강에 온 지 4년이 되었는데, 여기서 느끼는 것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이러한 프로젝트는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그 이유를 저도 고민해봤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지금 10대들은 멀리 있는 타자들에 대해서 접촉면을 갖지 못했거나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교육에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고 봅니다.

 

 

서강> 현재 행복한 길찾기는 어느 정도까지 진행이 되어있나요?

 

김> 챗봇 형태로는 완성이 됐습니다. 지금 이주노동자들의 비율을 보면 필리핀 노동자들이 다수이고, 그다음은 베트남입니다. 이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영어와 베트남어 번역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예산이 확보되면 그다음 그룹은 태국과 미얀마로 번역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처음에 영어전문가에게 맡겼다가 노동자의 언어로 번역이 되지 않아서, 겨울 방학 때 전면적으로 수정해서 노동자들과 같이 감수하는 방법으로 다시 했습니다.

 

 

서강> 혹시 기업과 협업하고 있나요?

 

김> 그렇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하는 프로젝트가 Social Impact와 관련해서 런칭했잖아요? Social Impact라 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떻게 이 사회의 근원적인 시스템에 영향력을 미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종의 움직임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본의 영향을 받으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순수하게 기부 받는 형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은 것이 제 취지였어요. 행복한 길찾기도 그렇게 해서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서강>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앞으로의 융합 분야의 미래는 어떤가요?

 

김> 학문적으로 대답하고 싶은데요. 외국 저널들을 보면 굉장히 빠른 속도로 미래 비전이 AI로 집결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융합도 역시 세계적인 조류를 따라가는 거죠. 융합 분야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AI, 두 번째는 바이오(bio)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빠르게 생성되고 있는 분야인데요. 바이오에 관련되어서 특히 잠재적 시장이 크게 파악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이오 부문으로 융합이 굉장히 일어날 것 같고, 마지막 세 번째는 엔터테인먼트입니다. AI는 순수하게 생활기술이라고 하죠. 바이오는 삶의 질, 엔터테인먼트는 Enjoy 하는 것입니다. 제 바람이 있다면, 서강대학교는 선택과 집중을 했으면 합니다. 정부에서는 확실히 AI로 큰 기금을 가지고 지원하려고 합니다. AI 부문에 큰 파이가 있으니 다들 이쪽으로 쏠리게 됩니다. 우리 대학이 이 쏠림에 가면 오히려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분야보다 우리가 지금까지 잘 해왔던, 서강의 깊이 있는 인문 중심으로 가서, 인문 중심의 새로운 융합들이 두 번째, 세 번째로 여겼던 바이오와 엔터테인먼트 이 안의 틈새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게 진짜 융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판단할 때 앞서 세 가지 제시했던 기술(AI), 생명공학(bio), 콘텐츠(Entertainment), 이 부문에서 우리가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데, 큰 자본을 들이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속해서 상층부 단위에서 논의되고 있는 High-technology를 어떻게 기술을 잘 접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가. 저는 이를 서강이 잘할 수 있고 변별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교도부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이것이 제가 기대하는 서강에서의 융합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성공회 대학교가 처음 시작할 때, 다른 사람들이 굉장히 낯설어했습니다. 왜냐면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NGO 학과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 학과가 성공회 대학교의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그렇듯이 모든 사람이 High-technology를 가지고 효용에 온전히 경도되어 있을 때, 서강은 서강만이 할 수 있는 인문 중심의 융합에 집중해서 이 High-technology를 잘 나누고 전달했으면 좋겠습니다.

대중들의 인식도 함께 따라주어야 할 텐데요. 그래서 아까 제가 제시한 Moral Technology라 하는 큰 담론에서 제가 중점으로 두고 있는 Social Art, Social Impact에서 지금 청년들에게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 만큼 좋은 결과물들을 내야 합니다. 가치뿐 만이 아니고 이윤도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저한테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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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04.30 00:25

“이미 늦었어요.”라는 말이 싫지만 느려지고 싶은 당신에게

 

송혜현 _ 건국대 중국어학과 졸업

 

<1>

언젠가 지하철에서 봤다. 어느 지역의 슬로라이프 국제대회 광고. 이 대회에서 소개하는 슬로라이프는 ‘제 속도의 생활미학’이라고 한다. ‘슬로’는 느리고, 오래된 것, 특히 사라져가는 음식, 환경, 전통의 가치를 대변하지만 일상에서의 생활은 느림과 빠름이 공존하므로 슬로라이프는 그러한 일상을 직시하고 빠름과 느림의 공존을 지향하는 사회라며, 대립이 아닌 균형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그들은 ‘슬로’에 해당하는 가치들로 분야를 나누어 대결을 펼친다. 누가 가장 슬로라이프에 적합한지 겨룬다. 아마 이런 것이 균형인가. 참된 공존?

괜한 이질감에 사로잡혔다. 내가 알던 슬로라이프는 과연 무엇이었길래 ‘슬로라이프’로 대회를 열어 경쟁을 한다는 것이 이토록 어색하게 다가온 걸까.

‘슬로라이프’와 ‘대회’가 양립가능한 개념이었던가? 대회라는 단어는 경쟁, 속도, 순위와 그것에 따른 물질적 보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슬로라이프는? 그 반대의 개념이 떠오른다. 일본의 문화인류학자이자 환경운동가 쓰지 신이치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1]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비판하며” 슬로라이프 운동을 주창하였다. 시간적 개념에 대한 느림을 선언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반발하고, 인간성을 회복하려 한다. 현대사회에서 느림과 빠름, 슬로라이프와 자본주의. 이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2>

이 공존을 짚어보기 위해 먼저 슬로라이프가 제어하고자 하는 시간을 살펴보기로 한다. 자본주의 시대에 도래하여 파생된 다양한 문제점들이 그 속도감에서 기인했으며, 슬로라이프는 이것에 중점을 맞추고, 현대의 시간 개념을 거스르려 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시간은 금이다. 곧 시간은 돈인 것이다. 19세기 초 영국 소설가 리턴 남작의 <돈>에서 처음 언급된 이 말은, 당시 영국의 초기 산업자본주의를 반영한다. 얼마나 많은 시간 일하느냐, 얼마나 빠른 속도로 일하는가에 따라 노동자들이 손에 쥐는 돈의 양도 달라졌다.[2] 정보자본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 현재, 시간은 그 영향력이 더욱 커져 자본시장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전제 조건이다. 이른바 표준시간 체제는 국제 금융 거래의 대부분이 데이터베이스화된 화폐로 처리되는 현실에서 상호 환산 불가능한 복수의 시간 체계가 이 시스템에 동시에 공존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자본은 초코드화된 거대한 단일 시간 체제를 유지한다.[3] 이러한 시간 체제 안에서 슬로라이프의 느림은 모순적일 수 밖에 없다.

슬로라이프를 대표하는 지역인 슬로시티는 하나의 관광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해당 지역은 관광수입으로 그 명맥을 이어간다. 끊임없이 관리 되어야만 하는 조경, 만들어진 도보여행 코스, 특정한 테마로 조성된 마을. 그리고 이런 것들을 체험하는 도중 휴대폰 어플로 길을 찾고, 신용카드로 그곳에서 무엇인가를 결제하는 당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슬로시티에서 ‘느림’을 체험하고, 또 다른 체험을 위해 다시 돈벌이에 나선다. 결국 이곳의 ‘느림’은 외지에서 찾아올 관광객들을 위해 애써 조율된 느림이며, 오늘날의 시간을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자본이 허락한 속도와 리듬에 구속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느림이 슬로라이프가 추구하는 본연의 느림이 맞는지 의문이 남는다.

앞서 언급한 시간뿐 아니라 city, 즉 도시라는 공간도 자본주의와 뗄 수 없는 개념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의 생산에 바탕을 둔 도시 산업경제를 전제로 발달했다. 막스 베버의 설명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도시들이 있었지만, 중세 말기 서구의 도시가 없었다면 자본주의는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산업구조의 고도화 및 인구의 급속한 증가를 가능하게 하면서 자본주의 발전의 장 또는 자본 축적을 위한 건조환경을 제공했던 도시의 발달이 없었다면, 자본주의는 존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4] 따라서 슬로시티라는 개념은 애초에 형용모순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 개념을 받아들이려면, 슬로시티를 도시성이 완전히 관여하지 않는 공간이 아니라 도시이지만 다른 층위의 공간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공간이 과연 슬로라이프를 온전히 담아 낼 수 있는가? 또한 기존의 도시화라는 개념아래 도시와 도시가 아닌 곳으로 구분되던 공간이 슬로시티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은 물리적 거리나 행정 구획에 영향을 받지 않는 정보자본주의의 그물망 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것은 결국 슬로시티가 이러한 질서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뜻은 아닌가?

이러한 현대의 시공간 속에서 슬로라이프의 주창자 쓰지 신이치는 세가지 차원의 슬로무브먼트를 통해 슬로라이프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개인에서 시작해 공동체를 거쳐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어 글로벌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시적, 제도적 차원에서의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슬로무브먼트는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추구되어야 하는 개념이다. 동시에 일어날 ‘글로벌’한 변화를 위해서 오늘날의 인터넷과 기술로 인한 네트워크의 수혜를 받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결국 현대사회가 마련해두고 있는 여러 문명의 이기들, 즉 휴대폰이나 컴퓨터, 인터넷처럼 견제해야만 하는 문명의 장치들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5] 슬로라이프가 거부해야 하는 것들을, 슬로라이프 유지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미국의 여성 인구학자인 도넬라 메도우즈는 쓰지 신이치에게 보낸 글에서 천천히 산다는 것(슬로라이프)은 최신 기술개발을 위해 쏟아 붓는 막대한 에너지나 원료 등을 소비하지 않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글로벌 네트워크 차원의 슬로라이프 운동을 하자면서 이러한 기술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가.

 물론 이윤과 성과, 그것에 따른 계층화의 모순도 발견할 수 있다. 슬로시티가 관광수입을 얻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목할 점은 슬로시티는 5년마다 진행되는 자격검증을 통해 슬로시티의 지위를 유지하거나, 박탈 당한다는 것이다. 슬로라이프는 평가 당하고 있으며, 자격 유지를 목적으로 해당 지역은 타지역과 ‘슬로라이프’ 경쟁을 하고 성과를 보여주어야 한다. <2018 국제 슬로시티 어워드>수상의 영광은 전주시에 돌아갔다. 올해 우리나라의 1등 슬로라이프 도시는 전주인 것이다.

 

<3>

이렇듯 자본주의 안에서 슬로라이프는 모순을 껴안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슬로라이프는 이미 현대사회의 문화로 자리 잡았으며, 이러한 이유로 그 자체가 가진 모순을 정당화할 수 있다. 슬로라이프를 문화산업의 일환으로 바라본다면 공존을 인정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1999년 시애틀 시위를 취재한 핼 헤밀턴은 말한다. “시장 교환의 논리에 [6]지배 받게 된 문화 속에서 모든 것은 상품화된다. 우리의 시간도, 지식도, 바라보는 경치도, 물과 음식물도 마찬가지다.”[7]

20세기 초중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의해 ‘문화산업’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그들은 대중문화 생산자들이 그 수용자들을 기만해 문화산업의 지배 논리에 수동적으로 복종시키며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비판력을 상실하도록 유도한다고 주장하였다.[8] 아도르노는 문화 산업이라는 용어를 통해 오늘날의 문화가 철저하게 이윤을 추구하는 비즈니스가 되었음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9] 이때까지만 해도 문화와 산업이라는 모순적 상생을 비판하는 측면이 강했다.

문화와 산업, 문화산업이라는 단어 자체부터 모순적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의 문화는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그것을 구분하려는 것은 서양 중심적인 사고이며 야만적 사고라고 말했다. 결국 문화란 정신적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의 총체적 활동의 결과이기에 동양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반면, 산업은 우열을 가릴 수 있다. 문화라는 정신적 가치와 산업이라는 물질적 가치는 서로 조화하기보다는 대립적이고 분리된 기표로 인식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산업 구조가 고도화하고 대중의 소비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문화적 욕구는 확대되고, 문화를 경제활동의 대상으로 삼아 산업화되었다[10]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문화산업은 초기의 부정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상품성을 인정하는 측면이 강하다. 문화의 산업화가 예술과 문화자체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느냐의 논의에서 벗어나 21세기 현재에는 문화 산업의 흐름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이동연 문화자본의 시대-한국 문화자본의 형성 원리에 따르면 “문화산업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정의했던 범주를 훨씬 넘어서 대중매체, 엔터테인먼트, 여가, 라이프스타일, 관광, 정보, 커뮤니케이션 분야로 확대” 되어 왔기에 문화산업 자체를 부정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시대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이렇게 문화 혹은 예술과 자본과의 관계는 21세기에 들어서서 다각도에서 고찰될 필요가 있다. [11]

슬로라이프는 이미 문화적 가치를 갖고 문화산업에 활용되는 문화상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미디어의 발전으로 문화상품은 멀티미디어라는 기능을 통해 소비자에게 전달되기 시작했다. 미디어에서는 다른 종류의 삶을 보여주며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도록 돕는 비상탈출 버튼의 역할[12]을 하는 콘텐츠로 슬로라이프를 소개한다. 삶을 옥죄는 성장 압박과 과도한 속도 경쟁에 대한 일종의 반발심리로,[13] 각박한 삶에서 잠시나마 숨 돌릴 틈을 주는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문화의 확장으로 등장한 슬로시티는 결국 슬로라이프라고 불리는 느림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생활문화가 실현될 수 있는 공간 중 하나이다. 고도 산업사회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도시 생활에 있어 새로운 창조적인 문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구가 나타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도시 개념이 바로 슬로시티인 것이다[14]

슬로라이프의 개념 역시 이에 따라 재해석해봄직하다. 현재 대다수의 사람들이 중요시 하는 속도의 경제를 무시한 채 느림의 생활문화로 모든 것을 대체 하자는 것이 아니라 빠름과 느림, 농촌과 도시, 로컬과 글로벌, 아날로그와 디지털 간의 조화로운 삶의 리듬을 지키자는 의미[15]로서의 슬로라이프라면, 어느 정도의 아이러니 또한 좋지 아니한가? ‘슬로’라는 단어 자체의 원 의미에 매몰되기 보다는 ‘빠르다’는 이유로 생성되는 다양한 문제점들을 조화롭게 상쇄하자는 의미로 확장시켜 생각해야 하며 ‘느리다’는 것은 ‘빠르다’의 반의어로써, 상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4>

 자본주의사회에서 목적과 속도를 잃어버리면 금세 도태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로라이프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조금 잃어도 되는 사람들, 조금 뒤쳐져도 되는 사람들, 즉 대개는 기득권자들이다. ‘느림’은 현대 문명에 대한 명백한 대안이라기보다는 배부른 자유주의자들의 자족적인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16]

 시장조사전문기업 마크로밀엠브레인의 트렌드모니터가 전국 만 19~59세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슬로시티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 73.7%가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현대인들에게 슬로시티가 좋은 대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슬로시티에 가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될 것 같다는 의견도 55.7%로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전체 74.1%가 방문객이 많아지면, 결국 본래의 의미가 많이 변질 될 것이라고 응답했으며,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할 것 같아 우려된다(67%)는 지적과 40.5%는 결국 지역 홍보 및 마케팅 수단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 인식도 가지고 있었다.[17] 슬로라이프를 원하는 사람들도 슬로라이프가 지속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 지를 걱정한다. 슬로라이프가 자본주의와 공존하는 방법은 이렇듯 기대와 우려를 낳는다.

그러나 쓰지 신이치는 말한다. “인생은 모순덩어리 아닙니까! 우리는 어차피 이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님이 좌선을 하며 깊은 성찰에 심취해 있는 동안에도 그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모순을 안고 있으면서도 이 세계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조그만 것이라도 발견해서 실천하려는 노력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릅니다.”[18]

 


 

[1] 이때 말하는 자본주의 논리는 자본주의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한다. 이를테면 경쟁, 성과, 경제, 계급, 이윤 등. 쓰지 신이치는 자신의 책에서 이것들과 대응하는 슬로라이프 운동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2] 변현단, <소박한 미래: 자급자족을 위한 農 철학 이야기>, 들녘, 2014,

[3] 임태훈, <검색되지 않을 자유>, 알마, 2014

[4] 최병두, 아시아 자본주의 발달과 도시, 2005

[5] EBS 지식채널, <지식e season5>, 북하우스, 2009

[6] 자본주의의 경제 논리

[7] 쓰지 신이치, <슬로 이즈 뷰티풀>, p65

[8] 이동연 외 공저, <누가 문화자본을 지배하는가? 한국 문화산업의 독점구조>, 문화과학사, 2015,

[9] 김평수, <문화산업의 기초이론>,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10] 9와 동일

[11] 9와 동일

[12] 김교석, [세상 속 컬처랜드]비상 탈출을 꿈꾸는 사람들, 욜로를 로망하다, 경향신문, 2017.04.21.

[13] 장원석, 우리는 왜 삼시세끼에 열광했을까?, 중앙시사매거진, 2015.05.25.

[14] 손대현 장희정 <슬로 시티에 취하다>, 2012, 조선앤북

[15] 손대현 장희정, <슬로매니지먼트>, 2012, 조선매거진

[16] 8과 동일

[17] 트렌드모니터, 2014 슬로시티 관련 인식 조사

[18] 5와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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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04.30 00:19

협업을 통한 시각예술과 VR의 융합

- 작품 <VR - Liquid Nostalgia 5> -

 

Tiffany Lee (이승연) _ 시각예술가, 국민대 미술학과 회화전공 박사과정

 

연구자이자 작가인 본인은 2017년부터 디지털 매체를 이용하여 작업을 해오고 있으며, 이후 이 작업을 선보이기 위한 개인전을 준비하며 협업 연구를 진행하였다. 오늘날 작가는 전통적인 작가들처럼 홀로 수행하듯 진행하는 작업방식을 넘어 다양한 장르 및 매체와 소통하며 작품과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이 글은 본인 작업의 주요 개념과 함께 VR 분야와의 협업 연구를 통해 제작된 <VR - Liquid Nostalgia 5>에 대해 설명하며, 장르 간 융합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 작업의 주요 개념

본인은 2012년부터 일상적 기호를 재전유re-appropriation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일상적 기호들을 퍼스의 기호학에 따라 도상, 지표, 상징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고, 이를 기존의 맥락에서 벗어나게 하여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다. 포스트 콜로니얼 문예 연구에서 중요한 문화비평 용어 중 하나인 재전유는 어떤 기호가 놓여 있는 맥락을 변경함으로써 그 기호를 다른 기호로 작용하게 하거나 다른 의미로 바뀌게 하는 행위를 수반하는 것을 뜻한다. 이 용어는 점차 문화연구 전반으로 확대 사용되고 있다. 본인은 재전유 개념을 시각예술에서의 방법론으로 적용하여 사유 확장을 위한 시공간의 틈을 생성하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본인 작업에서 ‘기호의 재전유’ 방식은 이미 고정된 의미작용이 이뤄지고 있는 기호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 의미가 가진 문맥 또는 맥락을 변화시켜 또 다른 의미의 관점을 제시하여 사유를 확장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최종적으로 아도르노(Theodor Adorno, 1903-1969)의 질문처럼 “물신화 현상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완전한 자유와 해방이 가능한가?”라는 광범위한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일부이다.

 

Tiffany Lee <Liquid Nostalgia 1> digital drawing, 2018

 

Tiffany Lee <Liquid Nostalgia 5> digital drawing, 2018

 

 

■ 리퀴드 노스탤지어 시리즈 Liquid Nostalgia Series

2018년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인 <리퀴드 노스탤지어> 시리즈 역시 기호(사진 지표)를 재전유하는 방식으로 제작된 작업이다. 이 시리즈는 구글 지도Google Maps의 스트리트 뷰Street View 서비스가 제공하는 거리 사진에서 출발하였다. 2005년에 제작된 구글 지도는 스마트폰으로 길을 찾고 위치를 파악하는 데 있어 이미 표준처럼 자리 잡았다. 현대인에게 일상적 미디어가 된 셈이다. 일상적 미디어로서의 구글 스트리트 뷰는 실용, 추억, 호기심 등의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본인은 구글 스트리트 뷰가 제공하는 거리 풍경들을 사진 지표론에 따라 하나의 지표기호로 보고, 바르트의 사진론을 적용하여 이 사진들이 불러오는 감수성에 대해 고찰하였다.

구글 스트리트 뷰는 360도 카메라를 사용하여 실제 땅에 선 사람이 건물을 보는 각도로 거리를 촬영한 후, 이 사진들의 재조합을 통해 3D처럼 재현한다. 사용자는 이러한 디스플레이 시스템 안에서 방향 버튼의 클릭을 통해 이동할 수 있다. 세계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느낌을 받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거리는 명백히 현재의 거리가 아닌, 과거 어느 시점에 찍힌 모습이다. 실제로 현재 그 거리의 풍경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보장하지 않는다. 과거의 모습들로 때로는 조악하게 조립된 이 거리에서 본인은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가 이야기한 사진의 우울 그리고 밋밋한 죽음을 느꼈다. 이는 이 지도에 사용된 사진들이 하나의 지표기호로서 그가 말한 사진의 노에마noema “그것은-존재-했음”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이 지도 시스템의 거리 위에서 사용자는 공간을 이동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지만 실은 2D인 사진의 조합이므로 그곳에는 어떠한 실제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지도의 거리에 “비현대적인(비시사적인) 수수께끼 같은 지점, 이상한 정지, 정지의 본질 자체 같은” 것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감정은 그 안을 돌아다니는 본인에게 노스탤지어로 다가왔다.

이후 스트리트뷰가 제공한 거리풍경들 위에 아이패드iPad와 애플팬슬Apple Pencil을 사용하여 디지털 드로잉 연작을 제작하였다. 디지털 드로잉 풍경은 구글 스트리트 뷰(기호)를 재전유하는 과정에서의 형태 왜곡, 색상 왜곡을 통해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보다 선명한 색 표현을 위해 디지털 드로잉을 RGB 방식으로 제작하고, 색감의 생생한 재현을 위해 모니터, 디지털 액자, TV, 프로젝터 등의 디스플레이 매체들을 사용하여 설치하였다. 이러한 과정으로 실제 명백히 ‘존재했었던’ 장소들은 그 본래의 지시대상과 목적성을 잃고 작가의 초현실적인 공간으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재전유된 공간에서 ‘일상적 미디어(구글 스트리트 뷰)는 우리가 현존하는 세계에 대해 얼마만큼 어떻게 진실한가?’라는 의심쩍은 물음을 던진다.

 

<VR - Liquid Nostalgia 5> 협업연구 과정

 

Tiffany Lee, <VR - Liquid Nostalgia 5>, VR 녹화 영상 캡처, 2018

 

 

■ 디지털 드로잉을 가상현실로 : 작품 <VR - Liquid Nostalgia 5>

작품 <VR - Liquid Nostalgia 5>는 2D로 제작된 디지털 드로잉 <Liquid Nostalgia 5>을 서강대학교 아트&테크놀로지학과 박시은 연구원과 함께 3D 가상현실 VR(Virtual Reality)로 구현한 작업이다. 정지된 이미지가 보다 직접적인 초현실적인 공간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시각예술 작가와 VR 테크놀로지 연구원이 협업한 것이다. 이 작업은 2018년 12월 후쿠오카 art space tetra에서 열린 전시 <Tiffany Lee Solo Show - Liquid Nostalgia>에서 녹화된 영상의 형태로 전시되었다.

이 작업의 특징은 부동의 디지털 이미지와는 다르게 감상자와 상호작용한다는 점이다. 감상자들은 기존의 회화적 감상법처럼 수동적으로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HMD(head mounted display)를 착용한 채 디바이스Device를 작동하여 보다 능동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가상현실에 단순히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조작으로 움직임을 가하며 화면에 구현된 것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장비를 착용하고 작동하며 돌아다니는 동안 사물들과 마주치게 되는데, 이때 공간 안의 몇몇 사물들은 센서에 의해 소리나 빛으로 반응한다. 예를 들면 공간의 가운데에 위치한 빨간 공중전화 부스에 가까이 다가가면 센서등이 켜지는 것처럼 조명이 켜지며, 왼편에 위치한 나무 근처로 가면 나무 속에 숨어있던 까마귀가 놀란 듯 ‘까악까악’ 소리가 들린다. 또한 자동차 근처로 다가가면 비켜서라는 듯이 요란한 경음기 소리가 울린다. 이러한 반응 장치들은 감상자의 감각들을 다각도로 자극하며, 공간적-시간적 체험을 하게 한다.

이 작업의 또 다른 특징은 2D의 픽셀 풍경을 다시 3D로 만드는 과정에서 풍경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마치 종이처럼 납작하게 배치하였다는 것이다. 감상자는 평면에서 오려낸 납작한 사물들이 배치된 풍경 안을 돌아다닌다. 기본적으로 가상현실(VR)은 체험자의 몰입도를 최대화하기 위해 3D 사물들을 배치한다. 그러나 이 작업은 드로잉의 특징을 최대한 유지하며 사물들을 2D 그대로 배치해 연극 무대 같은 느낌을 준다. 납작한 사물들을 통해 체험자들은 실제 공간이 아님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으며, 재구성되고 조작된 세계를 돌아다닌다는 것을 전제로 두고 체험한다. 기존의 VR이 3D로 재현하며 실제 세계라고 “믿게끔 하는” 것이라면, 이 작업은 가상공간임을 전제로 두고 2D와 3D 사이의 공간을 제시한다. 이런 특수한 공간감은 디지털 드로잉이라는 평면적 회화 매체와 마땅히 3D로 재현되어야 할 VR 매체의 혼용을 통해 각각의 매체가 가진 고유의 느낌을 유지하면서도 그 영역을 확장한다.

또한 이 작업은 미디어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보다 친근한 미술로 다가갈 수 있다. VR이 기존에 지닌 게임적인 즐거움을 주면서 동시에 시각예술 작품에 대한 직접적 감상이 이루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HMD 착용 여부에 따라 감상자들은 현실과 상상 풍경의 경계를 자유롭게 드나든다. 눈에 착용하는 비교적 간단한 장치로 현실과 가상세계를 오고 가는 체험을 제공함으로써 실재와 환영의 경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다. 게임적인 즐거움을 통한 재전유된 풍경의 직접 체험은 이러한 사고 과정으로 유도함으로써 구글 스트리트 뷰(미디어)가 제공하는 풍경 사진의 지시대상과 목적성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고찰해보기를 권유한다.

작품 <VR - Liquid Nostalgia 5>는 게임과 교육 분야에서 가장 먼저 응용된 VR을 본인의 디지털 드로잉과 접목해 시각 예술 분야에서의 새로운 감상 경험으로 제시해보려는 협업 연구였다. 시각예술은 오랜 역사 동안 그리고 최근에는 더욱이 기술과 융합해왔다. 키네틱 아트, 비디오 아트, 뉴미디어 아트 등은 이미 미술사에서 하나의 견고한 장르가 되었으며, 동시대 미술에서는 최신기술을 적용한 작품들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이러한 융합은 각각의 매체를 재해석하며 그 고유의 영역을 확장 시켜나간다. 본인 역시 최근 주목받는 VR 분야와의 협업을 통해 그동안의 평면과 설치 형식들을 넘어 보다 확장된 예술적 실험을 할 수 있었다. 디지털 회화와 VR이 융합된 이 작업은 성찰적 기능과 상상적 즐거움이 공존하는 효과적 실험이었다. 앞으로도 협업 연구를 지속해가며 작업을 통해 동시대 사회와 삶에 대한 보다 넓은 통찰을 제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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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9.04.29 23:59

라운드테이블

<각 전공분야에서 학계 간 융합을 바라보는 관점> 

 

진행 및 기록 : 박시은 서강대학교 대학원신문 편집장

토    론 : 안근영 미디어학과(05BOX 감독)

이찬주 신문방송학과

박지현 아트&테크놀로지학과

박연주 행정학과

이승은 서강대학교 대학원신문 편집위원

전건웅 서강대학교 대학원신문 수습편집위원

 

이번 라운드테이블은 서강대학원신문 148호의 주제 ‘융합’이란 키워드와 함께 기획된 ‘각 전공분야에서 학계 간 융합을 바라보는 관점’을 알아보며 진행해보고자 한다. ‘융합’이라는 단어 자체가 전공 분야에 따라 익숙하게 다가올 수도 있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학계간의 융합을 해야 한다고 배우며 공부하고 있지만, 기술 중심의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기술에 대해서만 융합을 강조하고 있다. ‘코딩(Coding) 교육’이 대표적인 사례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융합인재’를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코딩처럼 기술을 하나쯤은 배워야 한다는 생각, 부담감을 느낀 적이 있는지에 대해 서로 다른 전공자들의 의견을 나누는 자리를 만들었다. 융합이라는 용어를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있는지 먼저 코딩에 대해서 운을 띄어보았다.

 

박시은(이하 신문사)> 융합을 각 전공마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우선 ‘코딩’과 관련이 없는 비전공자 같은 경우, 기술에 대한 융합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코딩’을 배워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토론자분들께 코딩을 경험해 본적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박연주> 저는 코딩에 대해 전혀 생각도, 접해볼 경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래도 행정학과가 사회과학계열, 문과 쪽에 가깝다 보니까 코딩을 배우지 않습니다. 이제 대학교 학부생 1, 2학년 같은 경우 코딩을 필수 과목으로 배워야한다고 하는데, 저까지만 해도 그런 제도가 없어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안근영> 코딩을 할 줄은 잘 모릅니다. 미디어아트 만들 때 기본적으로 프로세싱을 다뤄본 적은 있습니다. 그래서 코딩이 뭔지는 알지만 굳이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습니다. 코딩을 배우면 당연히 많은 것을 할 수 있어서 좋긴 하겠지만, 저 같은 경우는 작품을 만들거나 기획할 때 코딩을 잘하는 사람을 섭외합니다. 섭외할 때 이야기를 나누면서 실현이 가능한지 물어봅니다. 다시 말하자면, 코딩의 기본적인 것은 아는 상태에서 접근하는 거죠.

 

이승은> 우연한 기회에 과목을 수강하면서 코딩을 접했습니다. 1학기 때는 코딩의 중요성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듣다가, 수업을 들을수록 비전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배워두면 확실히 쓸모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능동적으로 코딩을 배우는 것에 임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빅데이터 자격증도 같이 준비하고, 스터디도 하게 됐습니다.

 

전건웅> 융합이라고 한다면, 제가 생각할 때는 어떤 분야든 합치면 융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부에서나 학교에서는 기술적인 프로그래밍이라든지 기계를 다룰 줄 아는 기술적인 융합만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공부와는 맞지 않고, 저한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 대학원에서는 전부 프로그램을 다루고, 빅데이터에서도 융합을 해야 한다는 게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이걸 꼭 해야 하나?’, ‘왜 해야 하지?’라는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신문사> 코딩을 주로 배우는 전공자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박지현> 컴퓨터공학과를 전공했지만, 처음에는 성적에 맞춰서 전공을 선택했기 때문에 코딩을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학과에서는 C언어부터 가르치는데 어려웠지만 하다보니까 적응이 된 거죠. 대학원 올 때는 코딩 말고 다른 쪽을 하고 싶어서 선택한 게 아텍이였습니다. 그런데 아텍에서 코딩을 하면서 코딩이 저랑 잘 맞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정부에서 코딩 교육을 내세우고 있는데, 저 학부 때 코딩 교육이 들어왔어요. 그때 제가 무용과 조교로 들어가서 코딩 교육을 했었습니다. 코딩 교육의 목적이 비전공자들에게 ‘컴퓨팅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건데, 지금 코딩을 무조건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문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융합이라는 것이 꼭 그 기술을 갖지 않아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면 되는 거잖아요. 저 같은 경우는 인문사회 쪽 소양이 없으니까 그러한 소양을 가지려 하는 것이고, 비전공자는 컴퓨팅적 사고를 가져서 어떠한 흐름으로 되는지, 이렇게 서로 이해하는 게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안근영> 컴퓨팅적 사고란 무엇인가요? 컴퓨팅적 사고가 컴퓨터를 다룰 때 언어 능력의 차원에서 얘기하는 건지 더 나아가서 다른 방식을 얘기하는 건가요?

 

박지현> 영어권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언어를 접하는 것처럼 코딩을 하는 이유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사건을 풀어나가는 구조나 문제를 접근하는 사고방식이 서로 다를 수 있는데, 컴퓨팅적 사고는 한마디로 알고리즘 사고라 보시면 돼요. 언어적인 측면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예를 들면, C언어만 배워도 다른 언어를 접하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언어 체계, 흐름이 비슷하기 때문이죠. 알고리즘을 짰을 때 이것도 언어기 때문에 사고의 순서가 있습니다. 이를 이해할 줄 아는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거죠.

 

신문사> 실제 삶에서 어떤 문제가 나에게 주어졌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거죠?

 

박지현> 네. 저희 영역뿐 만 아니라 다 같이 무언가를 이야기 할 때, 서로 접근 방법이 다른 거죠. 저의 예를 들자면 지난번 프로젝트를 하면서, 세 명이 있었는데 굳이 (분야를) 나누자면 문과, 이과, 예체능이었거든요. 문제 정의를 내리고 풀어나가는 진행 단계에서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찬주> 저는 정부나 대학에서 중점적으로 기술 위주의 융합을 강조하는 것에 비판적인 입장과는 다릅니다. 물론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너무 무비판적으로 무용과 학생에게 코딩을 가르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제가 여기 와서 느낀 것은, 융합이라는 게 종류가 여러 가지잖아요. 어떤 지식과 지식의 융합이라든지, 사회학과 물리학의 융합 이런 식이죠. 이러한 융합은 두 영역의 도메인 지식을 다 알아야지만 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융합이잖아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기술을 이렇게 까지 강조하는 게, 인문사회 계열에서 시작할 수 있는 융합의 가장 기초가 그 전공자의 도메인 지식에 방법의 융합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학부 때 R이 어려워서 포기를 했었습니다. 대학원와서 다시 R을 배우면서 텍스트 마이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고, 데이터 마이닝도 할 수 있게 되고, 그러다 보니 그 전에는 회기 분석, 내용 분석 등 전통적인 방법으로 하던 것을 그런(코딩) 역량을 갖추니까 신방과에서 다룰 수 있는 연구주제가 훨씬 더 넓어졌습니다. ‘이래서 기술을 강조하나 보다.’, ‘이래서 이것(코딩)부터 시작하라고 하나보다.’라고 느꼈습니다. 물론 문제도 있겠지만 이런 목적들이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문사> 실제로 행정학과에서의 코딩을 배워야 하는 필요성은 어느 정도나 되나요?

 

박연주> 아직까지는 전혀 필요성은 없지만, 요즘에는 초등학생들한테 코딩을 가르치거든요. 초등학교 교과과정에 있어요. 저희가 예를 들어서 ‘인터넷’에 대해서 정확히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저희끼리 다 공유하고 있는 지식과 가치가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코딩이라는 게, ‘약 20년 후쯤 되면 자연스럽게 코딩도 전체적으로 공유하는 지식과 가치가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자면 저희가 한글과컴퓨터, 파워포인트도 처음 사용할 때 배우지 않아도 그냥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생각해보면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것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 것처럼 이제는 초등학생부터 가르치는 이유가 초등학생들에게 코딩에 대한 기본 지식과 가치를 주입을 시켜서 나중에 그들이 저희 정도 나이가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그것을 다른 영역에 적용시켜서 사용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보니까 저도 약간의 두려움이 있는 거죠. 아직까지 코딩에 대해서 개념도 모르고, 필요성도 못 느끼고 있지만, 지금 여러분이 하는 얘기를 제가 거의 못 알아듣고 있는 것처럼 10년 후에는 인터넷을 모르는 80대, 90대 할머니처럼 나만 코딩을 못 알아듣지 않을까 라는 두려움이 있죠.

 

전건웅> 전 기술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에 비판적입니다. 이는 이윤 창출, 기업에 친화적이라 생각합니다. 취직을 하기 위해 기업에 맞춰가는 느낌이 든다는 거죠. 그것이 이제 융합이라는 걸로 포장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코딩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계속 작용하는 거죠. 어떤 반항심마저 듭니다.

 

안근영> 저희 연구실이 기본적으로 융합하는 연구실이었습니다. 뉴미디어아트라는 용어가 처음 나왔을 때가 2000년대 초중반입니다. 제가 대학원을 처음 들어갔을 때 2011년도예요. 2011년도는 인터렉티브 미디어아트가 뜨기 시작했을 때입니다. 미디어아트가 궁금해서 배우고 싶었고, 원래 전공이 영화과이기 때문에 영화를 더 잘 찍기 위해서 대학원에 들어갔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서 느낀 것은 처음에 사람들이 ‘이게 대세다’라고 했지만, 실제로 10년이 넘고 나서(2010년 초중반) 미디어아트란 용어가 이제 흔한 용어가 됐습니다.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게 되고. 미디어아트가 처음에 나왔을 때는 예술과 테크놀로지, 미디어가 결합된 융합 학문이라고 생각을 했었고, 융합으로 새로운 아트워크(Artwork)를 만드는 장르였거든요. 지금은 융합이라는 자체가 전반적으로 다른 지향으로 가고 있죠.

정부에서 말하는 융합과 코딩 교육의 문제점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지점일 거예요. 이것이 취업의 목적이고, 이윤 창출을 할 수 있는 건데, 초등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의무교육이 되는 것도 역시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국영수과 위주로 공부하라고 배웠습니다. 원래 그 전에는 학문이라는 게 통합적으로 배웠거든요. 사실 다 배워야 합니다. 이걸 다 배워야 통합적으로 인식하고, 대학이라는 곳에 가서 세분화 시켜서 공부하는 거죠.

이게 과연 ‘지금 사람들에게 코딩이 융합적인 사고를 키우는 것인가?’라고 했을 때는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융합 분야에서 인터렉티브 아트를 강조했다가 지금은 그걸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거든요. 앱 개발이라든지 이런 쪽으로만 치중을 해요. 저의 학부 사람들을 보면, 초기에는 아트, 작품을 했던 사람들이 많았어요. 설치 작품이나 시각화 작품을 많이 했었는데, 지금 후배들을 보니까 졸업 작품으로 앱 개발을 하고, 즉 취업 위주로만 생각합니다.

융합이라는 것은 간학제적 학문에서 다학문(multidisciplinary)으로 가고 있는 상황이고, 다양한 학문적인 접점을 찾아서 새로운 사고를 해보자는 지점을 찾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게 단순하게 코딩이 융합적인 사고를 키우는 데 있어서 좋다, 나쁘다, 이런 차원은 아닌 것 같아요. 당연히 코딩은 중요한 것이고, 하면 생각이 확장되는 게 맞죠. 사회 레벨에서 말하는 융합적인 사고와, 대학에서 말하는 융합적인 사고는 간극이 항상 있어요. 근데 정부나 사회, 기업에서 말하는 측면은 그 쪽이 맞을 거예요. 그래서 코딩 교육을 강조하는 거고, 코딩을 하면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건데, 그렇게 따지면 코딩을 안배우면 불안하잖아요. 사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요. 코딩을 잘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과 의사소통만 된다고 하면, 즉 컴퓨팅적 사고력만 갖고 있다면 언제든지 그것을 구현할 수 있게 소통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돼요. 그런 것에 대해서 저에게는 부담을 가지거나 조급하다는 게 사실 와 닿지 않습니다.

 

신문사>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어느 정도가 될까요? 코딩을 할 수 있는 사람과 의사소통하려면 어쨌든 그 분야에 이해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배워야 하는 당위성은 그대로 주어지지 않을까요?

 

안근영> 어느 정도 깊이에 따라 다르겠죠. 예를 들면 제가 여러분에게 영화 용어를 쓰면서 이야기하면 못 알아들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를 일반적인 레벨까지 낮춰주고 얘기해야 하는 것인데, 어느 정도 그 개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야기할 때 설명 없이 쉽게 넘어가잖아요. 그런 것처럼 코딩에 대해 기본적인 것만 알아도 상대방과 소통할 수 있는 폭은 훨씬 넓어지는 거죠.

 

이승은> 저도 역시 코딩을 하면서도 거기(기업)에 끼워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언론사에서도 데이터 분석을 할 줄 아는, 코딩을 하는 능력을 갖추길 원합니다. 융합이 언론사까지 확장된 거죠. 하지만 막상 그 능력을 갖추고 가면 실제 전통적인 언론인들의 업무를 보는 것이 아닌 뉴미디어 팀으로 빠지게 됩니다. 기자의 타이틀을 가졌지만, 데이터를 하는 사람이 됩니다. 언론고시 준비와 데이터를 다룰 줄 아는 능력까지 갖춰서 왔지만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노동 가치가 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창조경제 때부터 융합이라는 단어가 쏟아져 나오면서 우리가 압박감을 받고 있지만, 이를 저항할 수는 없는 것인가, 그게 가장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항하고 싶은 입장입니다. 코딩을 배워보니까 좋기는 하지만, 속내는 얘기 나누다보니까 융합인재라는 것에 저항하고 싶은 입장인 것 같더라고요. 딜레마라는 말이 무엇인지 와 닿았습니다.

 

이건웅> 요즘 문제가 많이 되는 게, 언론사에서 영상으로 뉴스를 전달하는 뉴미디어 팀을 뽑아요. 그런데 그 팀들은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언론사는 언론사 타이틀만 주고 유튜브에서 창출되는 수익금만 임금으로 줍니다. 오히려 일을 잘하는 사람들을 팀을 만들어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팀으로 만들고, 일을 많이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저항감이 생겼고, 배울 기회는 많았지만 코딩을 일부러 안배우고 있습니다. 그래도 굉장히 불안합니다. ‘나중에 다른 분야 사람들과 얘기 나눌 때 말이 안 통하면 어떡하지?’이런 생각도 드는 거겠죠.

 

안근영> 실제로 불안한가요?

 

박연주> 네, 솔직히 불안하죠. 행정학과에서 경제학을 배운 입장에서 설명하자면, 카르텔이 붕괴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용의자의 딜레마라고 하죠. 둘이 합쳐서 최악의 경우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런데 이제 최적의 효율을 얻으려면 비전공자는 그것(코딩)에 대해 저항하고 전공자는 그 분야를 깊게 연구해서 발전시켜 나가고, 비전공자는 그것을 굳이 할 필요 없이 자신의 분야를 열심히 하는 거죠. 이게 아마 사회적으로 최적의 효율을 이끌어내는 방법일 거예요.

카르텔이 붕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처럼 저희도 이제 붕괴하게 되는 거죠. 비전공자는 코딩을 배우지 않으면 불안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배우게 되고, 이제 그것을 지켜보는 다른 비전공자들도 불안하니까 같이 배우게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이찬주> 저는 체제에 복종하는 입장입니다.(웃음) 큰 저항감도 없었습니다. 대학원 올 때는 학문의 울림이 클 것이라 생각했으나, 이제는 졸업을 빨리하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어요. 저는 사실 융합과 관련된 정책이 나오는 걸 보면서 알았죠. 기업들에서 융합을 원하는 구나. 그래서 저는 철저하게 거기에 맞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융합 쪽으로 준비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생각보다 제 방향에서는 거부감 없이 좋았습니다. 의견들을 들으면서 공감이 됐던 것이, 학계수준의 융합과 기업과 산업수준의 융합이 질적으로 많이 다르다고 하셨잖아요. 학교에서 융합을 강조하는데, 제가 하면서도 ‘이정도가 융합이라고?’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신방과에 데이터를 적용하는 게 융합이야?’ 어이없기도 했습니다.

요즘 마지막 학기 다니면서 논문을 쓰면서 (취업)원서도 넣고 있어요. 원서 쓸 때 자기소개서에 ‘신방과 전공생이면서도 데이터를 잘 다룰 줄 안다’를 어필하는데, 합격률이 괜찮은 거예요. 산업 수준에서는 이쪽 방향을 원한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이 정도의 얕은 수준도 융합이라 하는 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학계수준에서 진정한 경계가 없어진 다학제간의 융합이 일어나려면 한참 멀었지만, 산업수준에서는 얕은 융합을 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안근영> 저는 그게 얕은 융합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아요. 융합이라는 것 자체가 얕고 깊은 게 어디 있겠어요. 두 가지 이상을 결합시킬 수 있는 중간 지점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융합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융합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는 거죠. 과거에는 그것조차 생각하지 않았잖아요.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는 자체가 그전보단 우리가 발전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라 생각해요.

기업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시키는 일만 합니다. 그렇게 융합을 크게 할 필요도 없어요. 그런데 공학 분야 친구들은 7년 이상 일하다보면 시스템이 바뀌죠. 시스템이 바뀌면 새롭게 해야 돼요. 하지만 일만 하다보니까 새로운 것을 배울 시간도 없고, 일만 하다 끝납니다. 7년으로 인생이 끝날 수도 있죠. 항상 공부해야 해요. 영상 쪽도 마찬가지인데, 트랜드가 계속 바뀝니다. 사람이 기술을 못 따라가요. 어린 애들은 더 잘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안은 결국 사회가 조장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을 소모품으로 쓰는 거고. 공부를 오래한 사람들이 항상 얘기하는 것이 있어요. 본질을 어떻게 보고, 다루느냐의 문제거든요. 사실 본질은 비슷해요. 예를 들면 물리학자와 공학자, 철학자가 생각하는 지점이 언어와 의식이 다를 뿐, 생각은 비슷하거든요. 공통점이 다 있어요. 그 공통점 안에서 소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부분들을 최대한 연구하려고 노력하고, 그것에 대해서 세상 흐름이 어떻게 흐르는지만 알면 걱정 없는 삶을 살 수 있어요.

한정적으로 더 좋은 기업에 가야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면 더 큰 무대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걸 선택하는지에 따라서, 이게 옳거나 그르다는 건 없는 것 같아요. 선택의 문제죠. 좋은 직장가고 싶어서 거기에 맞춘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도 좋은 거 같아요. 명료하고 삶의 방향이 뚜렷하잖아요. 그런 것들을 찾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아까 코딩을 안 배워서 불안하시다고 했는데, 마음이 아팠어요. 저도 매순간 불안하니까, 어느 순간 어떻게든 되겠지란 마인드가 되더라고요. 세상에 안 불안한 사람이 없잖아요? 다 불안하니까 이러한 라운드테이블을 하는 거 아닌가요.

 

신문사> 그렇죠. 그러한 불안감에서 시작됐습니다. 시대에서 요구하는 것이 나와 적합하다 느꼈을 때, 그것을 열심히 가꿔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사회에서 무언가를 강조할 때 불안감이 있고, 뒤처진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는 게 안타까운 것 같습니다.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인데 사회에서 전반적으로 내세우는 가치들에 의해서 걱정해야 되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승은> 사회적으로 힘 있는 사람이 이러한 얘기를 다뤄줬으면 좋았을 텐데, 결국엔 구조적인 문제가 부딪힐 수밖에 없잖아요. 신자본주의 형태에서 봤을 때는 유연한 노동 시장에서 한 사람에게 요구하는 역량이 계속 늘어 가는데, 그래서 정책을 다루는 사람이 이에 대해 얘기를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거죠. 그렇다면 덜 불안해할 수 있고요.

 

안근영> 우리나라 정치인 중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정부는 국가의 삶의 방향성을 정해줘야 하기 때문에, 지금 융합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간 것이고요. 융합이라는 타이틀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4차 산업혁명과 연결돼서 나온 겁니다. 기본적인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거든요. 노동시장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미국 같은 경우도 외국의 싼 노동공장을 샀다가 다시 돌아오고 있잖아요. 그 이유는 글로벌 시대에서 다시 폐쇄적인 시대로 가고 있어요. 결국에는 생존의 문제인 것 같아요. 과거 글로벌 경제가 호황이었을 때는 상관이 없는데, 호황이려면 한쪽은 불행해야 돼요. 사실 미국은 군수산업으로 호황을 누렸었습니다. 이는 어떤 나라는 항상 전쟁을 해야 된다는 거죠.

전반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는 우리 정부에서도 융합을 강조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우리가 자원이 풍부한 나라도 아니고, 갖고 있는 것은 사람의 뇌밖에 없거든요.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고민했을 때는, 지금 노동인구도 계속 줄고 있잖아요. 이러한 복합적인 문제로 갖고 있기 때문에 명확한 답이 있다곤 할 순 없는 것 같아요.

이것은 어떠한 삶을 어떻게 살지에 대한 문제인 것 같아요. 사실 융합적인 사고도 결국 먹고 살려고, ‘융합적인 사고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의 문제가 나온 것이라 봅니다.

 

신문사> 마지막으로 앞으로 융합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각 전공분야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각 분야에서 어떻게 융합을 접하면 좋을까요?

 

박지현> 융합은 학문마다 영역이 다 다르잖아요. 서로 그것을 감수하고 의사소통할 때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내려놓고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기술을 이미 배운 입장에서 융합을 접하는 거니까, 예를 들면 신문방송학과와 제가 같이 무언 갈 하고 싶으면 학문을 배워도 좋지만, 처음에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부담감보다는 그 분야의 사람과 만나서 대화를 하고, 이렇게 생각하는구나만 얘기해도 크게 와 닿거든요. 지금 제가 학원에서 가르치는 아이들만 봐도 대학에 가려면 생활기록부에 코딩교육을 배웠다는 것을 쓰고 안 쓰고의 차이가 큽니다. 이정도로 사회가 요구하고 있습니다. 서로 학문에 대해서 이해하고, 천천히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한데, 지금 너무 융합에 급하게 다가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비전공자에게 코딩을 어디서 어떻게 배워야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저는 먼저 그 사람과 대화를 해봅니다. 저도 아텍에서 느낀 게, 가끔 프로젝트를 할 때 대화가 안 될 때가 있거든요. ‘왜 저런 방식으로 다가가지?’등의 생각이 드는 거죠. 그 한 단계만 넘어서도 충분히 나중에 코딩을 실질적으로 배우거나 할 때, ‘이런 부분은 이렇게 할 수 있구나’에 대한 벽이 조금 낮아지니까요.

 

이찬주> 저는 ‘왜?’라는 질문이 이미 스스로 정립된 상태에서 문과생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얘길 하고 싶습니다. 저 같은 경우엔 산업의 인재로서, 아니면 내 연구를 더 풍성하게 하겠다는 학문적인 목적이든 목적이 스스로 정립된 다음에, 아예 두려움이 큰 사람이 (코딩을) 시작하려면, 이걸 C‘언어’라 하잖아요. 처음에 코딩 공부가 어려워서 스터디를 시작했을 때, 제가 한 학기 먼저 코딩을 공부해봤다는 이유로 강의식으로 맡아서 하게 됐었어요. 책임감이 생기니 어쩔 수 없이 코드를 뜯어보게 됐는데, 정말 영어를 처음 공부할 때처럼 문법이라 생각하고 왜 여기 괄호가 붙고, 이러한 함수, 파라미터가 왜 쓰이는지 등 하나하나 샅샅이 분해했어요. 두려움을 가지던 문과생이었던 제가 언어라 생각하고 배우니 보이더라고요. 외국어 하나를 배운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아요.

두 번째는, 첫 번째가 방법이었다면, 인문사회계열 학생이 배울 때 자신의 도메인 영역에 대한 중심을 잘 지켜야 할 것 같습니다. 코딩이 주가 아니잖아요. 그 도메인 지식을 잃지 않아야 비로소 융합이 되고, 자신의 영역이 발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새로 준비하시는 분들에게 이런 두 가지 팁을 드리고 싶습니다.

많은 의견을 들으면서 융합에 대한 생각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지만, 가장 기초적으로 시작하기 좋은 융합은 자신의 지식 영역을 제대로 구축한 다음에 방법을 끌어다 오는 것이라 생각해요.

 

박연주> 제가 가장 비전공자에 가깝다 생각하는데, 융합에 대한 최소한의 이야기를 하려면 코딩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융합이란 것도 기본적인 가치관과 지식을 공유를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더더욱 코딩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코딩이라는 주제를 말했을 때 다들 어느 정도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말씀을 하시는데, 저는 이해가 안 되다 보니까 그렇게 되다 보면 전 융합 자체가 안 되는 거잖아요. 의사소통을 위해서라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근영> 코딩이 기술적인 측면인데, 아까 말씀처럼 방법적으로 쓰이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제가 융합 학문에 대해 공부했던 입장에서 얘기 하자면, 결국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데, 본질을 찾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미디어아트가 처음 나왔을 때, 인터렉션이 되는 것 자체에 사람들이 신기해했습니다. 상호작용 하는 것 자체가 첫 번째의 기술적 가치였는데, 어느 순간 그게 반복되다 보니까 어떤 학회나 비엔날레 같은 곳에 가보면 결국에는 기술 시연장 밖에 안 됩니다. 사실 거기에서는 본질이 빠지는 거죠. 콘텐츠를 어떻게 하고, 기술을 거기에 집어넣어서 콘텐츠를 부각시키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가치를 더욱 끌어내야 하는데, 이젠 새로운 기술 시연장 밖에 되지 않는 것 때문에 점차 미디어아트에 대한 관심사가 줄어들고 외면하게 된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콘텐츠를 무엇을 만들 것이고, 어떤 가치관에서 어떤 이야기를 풀어낼 건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거죠. 본질에 대한 생각이 필요한 것 같아요. 무엇이든지 간에. 아까는 이유를 찾으셨고 어떤 방법에 대해서 말하셨잖아요. 다 맞는 얘기입니다. 저도 공부할 때 제가 다 했던 방법들입니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고, 이건 왜 그렇지?’에 대한 의문들이 많이 생겼고, 그로 인해 첫 번째로는 시선이 많이 확장되는 것 같아요.

두 번째는 내가 가지고 있는 영역을 기반으로 새로운 것을 접목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엮어서 새로운 생각을 도출한다는 것 자체가 융합적인 사고입니다. 거기서 시작해야 합니다. 코딩도 마찬가지 일거고.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하셨고, 저도 얘기 나누면서 코딩 공부에 대해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습니다. 좋은 기회였던 것 같아요. 이러한 장들이 많이 생겨서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보면 더 좋은 방향으로 사고하도록 바뀔 것 같습니다.

 

이승은> 융합에 대해서 조금 찾아보다가, 러쉬(LUSH)가 인스타그램을 삭제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어요. 왜 그랬을까 찾아보니 러쉬 측에서는 ‘더 이상 인스타그램으로 고객들과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우리는 직접적으로 고객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연구, 개발할 것이니 인스타그램을 그만 하겠다’라고 처음으로 대기업에서 인스타그램이란 마케팅 도구를 안 쓰겠다는 의사를 표했어요. 이러한 반응을 계속 관심 있게 살펴보면서 관련된 책을 찾아봤는데요. ‘콘텐츠의 미래’라는 책에서 본질에 대한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나온다는 것을 알았어요. ‘연결이 중요하다. 콘텐츠를 어떻게 포장할 것인지 기술이 중요한 게 아니고,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 기업은 그것을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 콘텐츠를 먼저 만들어 놓고 사람을 끌어오는 게 아닌, 사람을 먼저 모을 생각을 하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학계에서도 그러한 균형을 맞추기 위한 시도를 하는 걸 보면서, 저는 무작정 융합이라는 걸 봤을 때 아무 감흥이 없었고, 낭만주의적인 담론만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여기서 융합에 대한 구체적으로 많은 의견이 나눠지는 걸 보면서 학계에서도 그렇고 많은 전문가들이 진정한 융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발전시키려 하는 노력이 있으니 마냥 불안해하고 우울해 하지만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웅> 저도 막연하게 융합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눠보니 제가 공부하는 것에 이러한 것들(융합)이 필요하고 궁금한 것을 해결하는 데 코딩이라든지 프로그램이 필요하겠다 싶으면 얼마든지 재미있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융합이라는 단어가 던져졌고, 그에 이끌리는 게 아니라 내가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면 스스로의 연구나 삶의 질의 향상에 의미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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