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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3호] 쓸모없는 배움

이 재 만 SF작가

 

작년 이맘때쯤 나는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한 번도 배워본 적없고, 배우겠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을 어느 날 문득 해보고 싶다는 충동이란 게 존재한다. 떡볶이는 맛이 없는 음식임을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한다거나 일론 머스크의 트위터를 읽고 도지코인에 손댔다가 전 재산을 증발시켜버리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나는 그런 짓은 안했다) 그나마 피아노 배우기는 가장 안전하고 온건한 충동에 속했기에 나는 큰 고민 없이 사무실에서 가장 가까운 학원을 골랐다. 나는 높은음자리와 낮은음자리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악보도 읽지 못했다. (사실 지금도 잘 이해 못 한다) 의무교육 12년을 받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  사례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있지 않은가?


나는 악보를 보는 것에 막연한 공포를 갖고 있는 사람이고, 음악은 듣기만 했지 내가 직접 연주할 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나 자신에게 굳이 피아노를 배우는 이유를 물어볼 때 내 안에 남은 대답은 하나뿐이다.


나에게 피아노는 거의 완벽하게 쓸모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숨겨진 피아노에 대한 천재성을 각성하여, 어느 날 문득 길을 걷다가 버려진 피아노를 발견하고 그걸 연주하는 사이 행인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연주가 끝났을 때는 눈물을 흘리는 청중들의 박수를 피해 사라지는 일은 없다. 아니, 그냥 동네에서 하는 조촐한 송년 모임에서 연주하는 일조차 없을 것이다. 왜냐면 나는 내 실력과 재능에 대해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고 있고, 이것은 철저하게 실패가 예견된 일이기 때문이다. 나를 가르치는 선생님도 내게는 기대하는 바가 없을 것이고 만약 있다면, 그냥 연습곡 한 곡만이라도 완주하는 정도이다. 내가 남들이 듣는 장소에서 연주를 (단지 나와 같은 장소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엉망진창인 소음을 내어 타인을 괴롭히고 싶진 않다)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무슨 부모님 무덤 앞에 무릎 꿇고 “꼭 세계 제일의 피아니스트가 될게요”라고 맹세를 한 것도 아닌데 그럴 이유가 있을까?


성과를 기대하지 않고, 기대받지도 않기에 자유로운 일, 실패하거나 중도에 포기해도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 일이기 때문이다. 매주 두 번, 30분씩 하는 레슨을 지난 일 년 동안 거르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당장 포기해도 누가 뭐라 않는 일이니까. 실패해도 되는 일을 할 때의 자유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헐렁한 마음가짐으로 지난 일 년간 피아노를 배운 나에게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이 있을까? 당연히 없다. 여전히 양손을 써가며 제대로 칠 수 있는 짧은 곡조차도 없다. 내가 실망해야 할까? 레슨비를 바쳐가며 배운 피아노인데 짧은 곡 하나 연주 못 한다면 내 돈과 시간에 대한 모욕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그보다 더 허망한 곳에 시간과 돈을 낭비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이 쓸모없는 배움이 주는 가치는 단 하나다. 시간은 사치재다. 난 그것을 피아노에 쓰고 있을 뿐이다. 레슨과 연습을 위해 쓰는 시간과 돈을 다른 곳에 투자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것을 그냥 피아노에 날려버리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상처 주지않는, 내 나름대로 가장 온건한 방식으로의 사치인 셈이다.


적어도 나에게 피아노는 아무런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할 배움이다. 돈을 받고 연주할 수준은 당연히 못 될 것이고, 누군가의 마음을 위로하는 무형의 결과를 낳을만한 재주도 못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또 다른 의문에 이른다. 모든 배움이란 게 꼭 쓸모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 돌이켜보면 쓸모가 아닌 유희로서의 배움은 이미 어릴때 많이 해왔다. 아이들이 발음조차 하기 힘든 공룡 이름을 읊어대는 것처럼 우리에겐 배워서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그것을 알게 되는 과정, 외우고 연습하여 숙달되는 과정을 즐기던 배움이 있었다.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한 주인공 트레이너 프랭크던은 영화 내내 게일어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 게일어는 사어(死語)로 분류되는 사용인구가 적은 언어다. 노년의 한물간 권투 트레이너가 늘 게일어 책을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영화를 보았던 당시에는 그냥 괴팍한 캐릭터임을 그리기 위한 장치 정도로만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돌이켜보니 다르게 느껴진다. 거의 사용할 일이 없는, 인물의 나이로 보건대 어쩌면 게일어로 대화할 만한 상대를 만나기도 전에 죽어버릴지 모를 아일랜드계 노인에게 게일어 책을 읽는 시간은 더할 나위 없는 사치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잔상 때문인지 나에겐 피아노 말고도 또 다른 쓸모없는 것 배우기 명단에 한 줄이 더 남아 있다.

 

바로 사어(死語) 배우기다. 후보로는 중세국어와 만주어가 있다. 라틴어도 사어에 포함되지만, 라틴어는 잘난 척하기에 좋다는 아주 큰 쓸모가 있기에 배우기 후보에서 제외했다. 중세 한국어와 만주어 모두 배워두어도 마땅히 써먹을 데가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마음에 든다. 학자로서의 삶을 살 게 아니라면 그냥 용비어천가의 첫 줄을 중세 조선식으로 발음할 수 있는 정도의 ‘잘난 척’ 용도밖에 없다. 만주어를 배운 사람들이 쓸모를 인정받은 가장 최근의 일은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청나라 군사들의 만주어 대사를 감수한 일이다. 그나마도 만주어 사용인구가 워낙 적어서 배우들의 대사가 제대로 발음되고 있는지는 그들만이 알 것이고. 사어 배우기 같은 지나치게 학문적인 분야말고도 쓸모없는 것 배우기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세상에는 이런 쓸모없는 배움의 즐거움에 중독되어 가족이나 반려자에게 등짝을 맞아가며 사는 이들도 많다.


최근에 새로 시작한 게임 중에 하나는 커벌 스페이스 프로그램, KSP로 불리는 게임이다. 이 게임은 매우 정교한 수준의 물리적 법칙을 구현한다. 게임 내에서 로켓 발사체를 제작하여 우주로 쏘아 올리고 궤도에 안착시키거나 달 탐사를 하는 등의 미션을 진행하는 형식이다. 한글화된 매뉴얼을 접하기 힘들어 이런저런 커뮤니티들을 돌아다니며 게임 하는 법을 익히다  보니 최소 항공우주 공학도 수준의 천체물리학 지식으로 무장한유저들을 자주 만나게 된 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중력의 270배를 구현하는 회전 놀이기구를 만들거나 전혀 하늘을 날 것 같지 않은 기괴한 모양의 비행기를 띄워 놓고 낄낄 거린다) 이들은 실제 항공우주공학 전공자들도 있겠지만 그저 게임을 위해 항공기의 구조와 역학, 천체 물리학을 공부하기도 한다. 오죽하면 NASA 공학자조차도 학위 취득때 보다 게임을 하면서 궤도 역학을 더 잘 이 해하게 되었다고 할 정도일까. 하여간 게임진입 장벽이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높고 내가 만든 로켓은 날리기는커녕 발사대에서 폭발되기 일쑤라 틈나는 대로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리는 절차나 기초적인 항공우주 이론 등을 찾아서 읽고 있다. (그리고 사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도 마음을 다잡기 위해 두어 시간 동안 수 십 대의 로켓을 날려 먹다가 왔다)


실용적 가치가 없는 배움을 즐기는 일에는 어떤 가치가 있을까? 취업을 하기 위해, 스펙을 쌓기 위해, 더 높은 연봉과 지위를 위해서가 아닌 그야말로 쓸모없는, 오직 자기 만족을 위한 배움에는 어떤 미덕이 있을까? 모른다. 애초에 배움에서 쓸모를 찾아야 할 이유조차도 모르겠다. 배움 그 자체가 즐거움이라면 쓸모는 부차적인 것이다. 배움의 가치는 즐거움이 우선이고 쓸모는 그다음인 셈이다. 결론을 내기 위해 지나친 억지를 부린 것 아닌가 싶다.


음... 글 제목과 어울리게 쓸데없는 소리를 길게 늘어놓다 보니 어떻게든 교훈적으로 마무리 하고 싶어져서 과욕을 부렸다. 이렇게 마무리 하자.


종종 비슷한 연배의 아저씨들과 하는 농담 중에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는 꽃 사진이 가득 차 있는 핸드폰 사진폴더 또는 카톡 프사다’가 있다. 이 말을 하자 같이 일하는 반백 살 넘은 프로그래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꽃을 보고 나무를 봐도 예쁜 줄 모르고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예쁜 꽃과 나무들이 늘 곁에 있었구나...' 깨달았다고. 이제야 눈에 담아두려는데 그 예쁜 것들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이름을 몰라 야생화 도감을 사서 꽃과 나무와 풀의 이름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배움의 즐거움은 늘 같은 때에 같은 형태로 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즐거움이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