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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3호] 허락받지 못한 즐거움

성지훈 (37세, 서울시 용산구) 

 

온라인 커뮤니티엔 종종 ‘무식 논쟁’ 이야기가 오른다. 일테면, “영국이 섬인 걸 모르는 건 무식한 건가요?” 라거나, “중국이
한자 쓰는 것을 모르는 게 무식한 건가요?” 같은 이야기. 비슷한 류의 이야기가 많지만 대부분 ‘이런 것도 모르다니 정말 요즘 애들 무식하네’ 류의 댓글과 ‘전공 아니면 이런 것 모를 수도 있지 별 것도 아닌 걸로 잘난척한다’류의 댓글로 다툼이 벌어지다 결론도 소득도 없이 페이지 뒷편으로 밀려난다. 같은 맥락에서 ‘맞춤법’(골이 따분하다, 괴자번호, 일해라 절해라 같은) 논쟁도 있겠다. 최근엔 한 카페에서 올린 사과문에 등장한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을 두고 벌어진 논란이나 어느 영화평론가가 사용한 ‘명징한 상승과 직조’라는 말에 따라붙은 논란도 있겠다.


우리는 왜 읽지 않나


이런 논란의 뒤에는 ‘문해력’이나 ‘반지성’ 같은 지적이 따라 붙는다. 텍스트보다는 영상에 익숙한 세대, 시간을 둔 사유보다
는 짧은 시간의 직관을 더 중시하는 세태에 대한 그럴싸한 분석과 함께. 물론 이 지적들은 매우 중요하고 대부분 귀담아들어야 할 말이다. 우리 사회는 분명 언제부턴가 행간을 정주하며 사유하는 태도가 사라졌다. 2021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를 보면 성인의 연간 종합 독서율(지난 1년간 일반도서를 1권 이상 읽거나 들은 사람의 비율)은 47.5%, 연간 종합 독서량은  4.5권으로 지난 2019년에 비해 각각 8.2%포인트, 3권 줄었다. 2011년과 비교하면 19.3%, 5.4권 감소했다. 우리 사회는 분명 점점 더 읽지 않고 더 배우지 않고 있다.


이것은 긴 글을 읽지 않는 시대, 400자가 넘는 텍스트는 ‘스압’이라고 인식하는 시대 때문일까. 그렇다면 왜 이런 시대가
온 것일까? 그저 유튜브와 쇼츠가 책이나 신문보다 더 재미있기 때문일까? 그저 세대가 달라졌기 때문에, ‘요즘 애들’은 책도 읽지 않고, 그래서 무식해서 문해력도 떨어지고 그저 재미있는 것만 찾기 때문에 모르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게 된 것일까. 그런데, 지금 ‘무식한 요즘 애들’을 보면서 걱정하는 어른들도 고전문학보다는 전자오락을, 신문보다는 썬데이서울을 더 재밌게 봤던 것은 마찬가지 아니었나. 책을 읽지 않고, 새로운 지식과 정보의 습득을 꺼리게 된 것은 ‘현상’이지 ‘원인’이 아니다. 우리는 사실 그동안 현상을 우려하고 개탄했을 뿐, 사유하지 않고 읽지 않는 세상의 원인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던 것 아닐까.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새로운 글자를 만들려는 세종(한석규 분)과 이에 반대하는 사대부 대표 정기준(윤제문 분)의 토론이었다. 정기준은 “쉬운 글자는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백성이 글을 배우면 읽게 될 것 이고, 읽으면 생각하게 될 것이고, 생각하면 쓰게 될 것”이며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 때문에 모든 백성이 쓰고 생각하고 말하는 세상은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했다. 반면 세종은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 때문에 모든 백성이 말하고 생각하고 쓰는 세상은 각자가 자기의 삶을 찾아가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정치와 삶의주체가 누구냐 는 토론의 내용은 차치하고, 그 둘이 공히 공유했던 것은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이란 즐거운 일’이라는 점이다.


‘읽는 일’이란 인간의 가장 오래된 유희다. 상상하고 사유하는 것은 본능에 가까운 즐거움이다.(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이불 속에서 떠올리는 그 많은 상상과 망상들만 봐도. 그건 얼마나 즐거운 놀이인가) 그렇다면 지금 읽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가장 오래된 유희를 즐거워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는 이 유희를 언제부터 즐거워하지 않게 되었을까. 그리고 ‘왜’ 그럴까?

 

우리는 무엇을 즐거워하고, 무엇을 즐거워하지 않는가


즐거움을 쫓는 일이란 ‘욕망’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욕망은 결핍된 것을 채우거나 쾌락을 쫓아가는 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생산하고 실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읽고 배우는 일이란 즐거운 일’이라고 한다면 읽고 배우는 일은 어떤 이유와 목적, 또는 직관적인 쾌락이 없어도 욕망하고 즐거울 수 있는 일이란 의미가 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서 우리는 욕망을 ‘통제’하도록 학습한다. 또 사회는 욕망을 제도와 법, 통념으로 관리되고 통제될 수 있도록 포섭한다. 이는 읽는 일 그 자체로, 지식을  쌓고 사유하는 그 자체의 즐거움보다는 ‘무엇을 하기 위해서’ 읽거나 ‘무엇이 되기 위해서’ 배우는 것으로 사유의 즐거움을 포섭하는 셈이다.


말인즉슨 어느 순간부터는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 혹은 과제를 하기 위해서, 또는 취업하기 위해서 같은 명확한 목적성이
없는 읽기 행위(사실 이는 단지 읽기 행위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위에 적용되는 말이다)를 ‘욕망하지 않는다’고 여기게 되거나 또는 ‘그 자체로 실존하는 욕망을 통제하거나 규범 안으로 포섭’하는 것 다. 즐거움을 즐거움이라고 여기지 않게 되는 일. 우리는 어쩌면 어느 순간부터 읽고 쓰고 말하며 사유하는 즐거움을 허락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즐거워하고 무엇을 즐거워해야 한다고 배우고 있을까. 그러니까 우리는 무엇을 욕망(한다고 착각)하고 있을까. 그건 아마 이 사회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겠다.


모든 것이 물질적 가치로 환산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오직 물질을 욕망하는 것만을 허락받은 듯 살고 있다. 그러니
까 목적성 없이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는 ‘비경제적인 유희’는 즐거울 수 없게 된다. (당장의 가시적인) 목적이 없는 읽기는
‘즐거움’의 영역에 들어올 수 없다고 여기게 되는 셈이다. 영국이 섬인 것을 당장 모른다고 어떤 손해가 발생하지는 않기 때문에, 모르는 단어를 마주했을 때 사전을 찾아보고 새로운 어휘를 습득하는 것은 나에게 가시적인 성과를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허락받은 즐거움, 혹은 즐거움이라고 규정되어진 것만을 욕망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를 포섭해버린 그것들. 그 포섭에서 탈주하기 위해, 우리의 ‘그 자체로 존재하는 욕망’을 찾아오는 일이란 이 포섭의 체제를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사유하고 읽는 자들이 이 포섭의 체제를 인식할 수 있겠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러니까 적어도 ‘왜 우리는 읽고 생각하지 않을까’라는 의심이라도 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심심한 사과’를 이해하지 못한 이들에게 혀를 차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이 포섭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얼마 전엔 어느 유명한 래퍼가 가사에서 ‘되’와 ‘돼’의 맞춤법을 반복해 틀려 놀림 받았다. 그 래퍼는 ‘그거 모르는 게 무슨
대수라고 난리들이냐’는 태도를 보였다. 참 혀를 차고 싶은 태도였지만, 우리가 혀를 차고 그를 놀린다고 그가 내일부터 ‘되’와 ‘돼’를 구분하게 되지는 않는다. 심심한 사과와 명징한 직조 역시 마찬가지다. 무식 논쟁 같은 걸 하면서 ‘즐거움’을 빼앗긴 이들을 놀리는 것보단 우리가 사는 세계의 실체를 더 열심히 살피고, 사유하고, 말하는 것이 우리가 더 즐거워지는 일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