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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6호] 디아스포라 독립운동가들의 분노와 승화 교훈

국학인물연구소 소장 조준희

 

‘디아스포라(diaspora)’란 “정치, 경제, 법 등 사유로 원래 속해 있던 곳을 떠나 다른 데 살 수밖에 없게 된 사람이, 그 기원 장소와 강한 사회, 문화 연대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려고 하는 삶의 형식”으로 정의되는 현대 사회학 용어다. 일제강점기 국외로 망명해 죽는 날까지 국혼(민족혼)을 사수하고자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전형적인 디아스포라였다.

나라를 잃자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기회로 삼아 호의호식한 부류가 많았지만, 분노하고 고향을 떠나 나라를 되찾을 방략을 모색한 부류도 있었다. 후자 중 인문학의 근간인 문·사·철 분야에서 공로가 있던 3인 사례로써 분노의 대아(大我)적 승화와 교훈을 확인해 보자.

 

왼쪽부터 단애 윤세복, 백암 박은식, 이극로 박사 [출처: 필자]

 

1. 독립운동가의 분노와 망명, 시행착오 

1) 흥업단 총무 윤세복의 민족교육 운동 

 

역사학계에서 ‘서강학파’를 주도했던 고 전해종 교수의 조부는 애국지사 전재일, 선친은 애국지사 전성호 장군이다. 전성호 지사는 100여 년 전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를 졸업한 뒤 자매기관인 ‘흥업단’에 파견되어 군사훈련을 지도했다.

학계에서 단 한 번도 연구된 적 없는 흥업단은 어떤 단체였을까? 홍범도 장군의 참모였던 김호가 “이주 동포의 산업 진흥”을 표방해 1919년 무송현에서 조직했고 낮에는 교육 기관으로 위장하고 단원들이 농사를 짓다가 밤이 되면 전사로 변해 무기를 거래하고 훈련하는 독립운동단체로 발전했다. 

 

흥업단의 정신적 지도자는 총무 직함의 윤세복(1881〜1960)으로 본래 경남 밀양 출신 교사였다. 그의 독립운동 투신 배경은 딸의 증언으로 전해 온다. 

 

“한말에 융희황제께서 일본사절단을 거느리시고 남순하실 때 대구에 기착하셨는데, …가까이에서 본즉 어전에서의 일본인들의 행동이 방약무인이요, 오만불손하므로 전신이 전율하여 분노를 억제하기 어려워 더 이상 보지 못하고 퇴장한 후로부터 일본인을 원수로 여기게 되고 배일사상이 점차 굳어지다가…” 

 

보수 전통이 뿌리 깊게 내려온 영남 지역에서 황제에 대한 일인들의 무례한 행태를 목격한 충격과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은 그날 이후 일제에 맞서 국권회복에 필요한 해결책을 찾는 데 이르게 했다. 그는 을사오적 암살 기도 사건으로 유명했던 나철을 찾아가 자문을 받은 뒤 막대한 가산을 정리해 곧바로 망명길에 올랐다.

일제는 김호와 윤세복을 주시했고 “무사단(武士團)”이란 별칭의 무장 게릴라 단체라는 첩보를 입수해서 1919년 11월 일본 낭인 나가노(中野淸助)에게 지령해 마적 두목 장강호(長江好)와 함께 지뢰와 독가스 등 살상 무기로 무장한 채 토벌에 나서게 했다. 1920년 6월에 이르러 외교장 전성규 등 단원 6인이 무기를 운반하다가 이들에게 붙잡혀 총살되고 말았다.

부하들의 죽음 앞에 보복 대신 자신의 전문 분야인 교육에 전력하여 밀산현 대흥학교, 영안현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이주 동포 자제들에게 민족교육을 시행했다. 1942년 임오교변 사건 주모자로 체포되고 동지 10명이 고문으로 옥사했을 때 분노와 비애를 또다시 승화시켜 감옥에서 수련에 매진했고 수행서 『삼법회통』 그리고 순국 동지 추모 옥중 시를 남겼다.

윤세복은 교사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과 전 재산을 바쳐 이국 땅에서 학교와 독립운동 기지를 일치시키는 기틀을 마련했던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로 망명지사와 2세들에게 큰 정신적 감화를 주었다. 나아가 광복이 되자 고국에 돌아와 서울에서 홍익대 설립 지지로 교육의 열망을 실현시켰다(현재는 재단이 바뀜).

 

 

2) 언론인 박은식의 역사책 출판

 

박은식(1859˜1925)은 황해도 황주 출신 유학자로 황성신문 초대 주필을 지낸 뒤 황성신문 사장·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역임하면서 언론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데 1907년 7월 통감부가 작성하고 이완용 내각이 추인한 ‘신문지법’이 공포되어 언론 탄압이 시작되고, 1909년 2월 ‘출판법’이 공포되어 구국 계몽의식이 담긴 도서 50종 20여만 권이 압수당했다.

이에 박은식은 1911년 음력 5월 국혼 사수를 다짐하고 비장한 각오로 압록강을 건넜다. 그의 술회에는 일제의 언론 및 출판 통제에 대한 분노와 망명 동기가 잘 드러나 있다.

 

“국체(國體)는 비록 망했으나 국혼이 불멸하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국사책마저 분멸하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 한 글자의 자유가 없으니 오로지 해외로 나가서 4천 년 문헌을 모아서 편찬하는 것이 우리 겨레의 국혼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서간도 망명 직후 고대사 저서 집필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6개월 만에 『대동고대사론』·『동명성왕실기』·『명림답부전』·『천개소문전』·『발해태조건국지』·『몽배금태조』 6권을 완간했다. 그는 영웅숭배열이 국력의 성쇠와 관계있다고 확신하고 동포의 정신 속에 내재한 ‘영웅혼’을 일깨우는데 집필 동기를 두었다. 이들 저서에는 “한민족 고대 영웅의 정신을 계승하여 부국강병의 힘과 정신을 균형 있게 발전시키자”는 내용이 담겨 있다. 역사소설 『몽배금태조』를 통해 “나라의 승패와 존망이 땅의 크고 작음, 백성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그 나라 인재 여하에 달린 것”이라 한 대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웅이 되고 서로 단결하면 민족자존과 독립의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외쳤다.

박은식은 국혼을 살리려면 무엇보다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민족주의 사학을 주창했던 인물이며, 훗날 임정 2대 대통령이 되었다.

 

 

3) 경제학 박사 이극로의 한글운동가 변모

 

영화 「말모이」의 주인공 이극로(1893~1978)는 경남 의령의 농사꾼 출신으로 국운이 기울자, 독립군이 되기로 결심하고 가출했다. 천신만고 끝에 1916년 중국 상하이 동제대학에 입학해 1920년 졸업했고, 이동휘가 레닌을 만나러 갈 때 수행원으로 동행해 그 길로 독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지금의 훔볼트 대학)에 입학해서 1922년부터 1927년까지 경제학을 전공했다. 고학생으로서 역경을 이겨내고 『중국의 실크공업』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극로의 유학 시절 주목되는 행적은 일본 관동대지진과 한인 학살에 대한 대일 규탄 전단지 배포, 일제의 침략과 조선 독립운동 현황 서적 출판, 1927년 벨기에 브뤼셀 피압박민족대회 참가다. 그러나 격분하고 기대했던 그의 열망과 달리 나라 잃은 한국인의 호소를 경청하는 서양인은 없었고 결과적으로 모든 항일 활동이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 은사였던 인류학자 리하르트 투른발트는 이극로에게 “민족의 본질은 첫째 ‘어학의 통일’로 동일한 문화생활을 해온 그 배경으로 된 것인 까닭에, 민족 단결이란 무엇보다 강하다”라며 ‘말글 통일과 민족 단결’이라는 화두를 주었다. 프랑스 유학생 공탁도 그에게 “한글운동은 민족의 혼을 되찾고 동포들의 정신 통일과 민심을 귀일시키는 것”이라고 독려했다. 1928년 6월 6일, 더블린에서 교육 현황 시찰 도중 아일랜드인들이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간판과 도로표식이 영어로 표기된 것을 보고 ‘우리 말과 글도 저런 신세가 되지 않겠는가!’라며 깊이 탄식했고, 대오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침내 한글 운동가로 거듭나 1929년 고국 땅을 밟았고 조선어학회를 이끌며 일생 한글 운동을 실천했다. 월북 문제로 남한에서 잊혔다가 2014년에서야 세종로공원에 이극로 이름 석자가 새겨진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기념탑이 건립되었다.

 

조선어학회 한말글수호기념탑 [출처: 필자]

 

 

2. 선현의 승화를 본받아 국혼의 불씨를 살리자

 

지금까지 디아스포라의 삶을 택해 민족정신(윤세복), 민족사(박은 식), 민족어(이극로) 수호에 공적을 남긴 위인들을 살펴보았다. 교사, 언론인, 농부로 고향과 배경이 달랐어도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초지일관으로 목표를 이룬 공통점이 보인다. 

 

특히 유럽에서 ‘한 알의 밀알’로서 이극로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아서 100년이 흐른 지금 유럽에서 앞다투어 한국어를 배우려 한다. 한국학과가 신설되고 있으며, 한국어 강좌가 개설되고 “글로벌 언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인기리에 수강생이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다만 화려한 한류의 이면에 우리 사회는 인문학의 위기이자 혼백의 균형이 아닌 혼(魂, 정신)을 뒤로하고 너도나도 백(魄, 물질)을 좇는 현실이며, 만연한 사대주의와 도덕적 해이의 고해에서 많은 이들이 희망을 잃고 표류하는 형국이다.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이라고 역설했던 이극로 박사는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청년들을 향해 “먼저 뜻을 세워야 된다. 성공은 큰 포부와 굳은 뜻에 달려 있고, 성공한 사람은 큰 포부와 경륜을 세우고 굳은 뜻으로 자신이 있게 앞만 보고 나아가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인문학이 민족의 정신이고, 국혼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분노의 에너지를 공익과 공생으로 바꾼 선현을 계속 찾되 국립서울현충원 윤세복 지사와 박은식 임정 대통령 묘소, 광화문 조선어학회 기념탑에 꼭 한번 들러 보기를 권한다. 우리말과 글, 우리 역사와 철학의 지혜로써 국혼의 불씨를 살리고 각자 연구 분야에서 뜻의 깃발을 바로 세워 흔들림 없이 밝은 미래를 향해 한 계단씩 오르는 서강인이 배출되기를 성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