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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6호] 분노하라

 분노하라

 

동물권 단체 케어 대표 김 영 환

 

 

출처 : Pixabay

 

 국민 일반에게 제시될 수 있는 규범 중 가장 설득력이 높은 것을 찾아보라고 한다면, 나는 누군가의 사소한 이익을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고를 것이 다. 이 문장에서 누군가라고 할 때의 누구는 고통을 느끼는 능력을 가진 대상들, 대체로 말해 동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나는 이 문장이 국민 일반에게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다른 모든 당위 문장, 예를 들어 국가로 하여금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지게 하여야 한다.”라는 제헌의 최고이념보다 그 정당성이 더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에 비추어 현실을 본다면 공장식 농장에서의 가축 취급은 역사상 최악의 범죄일 것이라는 유발 하라리의 이야기는 적극 동의가 된다. 유발 하라리의 이야기는 공장식 축산에서 동물이 당하는 고통의 심각성과 함께 지구상 대동물의 다수가 공장식 농장에서 사육되는 가축이라는 사실로부터 나오는 결론이다. 공장식 농장 외에서 벌어지는 동물 학대, 예를 들어 동물실험이나 한국의 개 농장과 개 도살장에서의 동물 학대도 그 고통이 공장식 축산 못지않으므로 나는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동물 학대는 역사상 최악의 범죄다라고 말한다.

 

 오늘날 동물 학대를 역사상 최악의 범죄라고 할 때 그것이 국민에게 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이 요구하는 바는 모든 사회적 의제 중에서 동물 학대를 없애는 데 즉각 가장 많은 힘을 쏟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요구는 사회에서 수용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검토조차 되고 있지 않다. 사회적 의제 중 동물과 관련하여 흔히 듣는 말은 동물사랑, 생명 존, 동물복지, 지속가능성 같은 것들인데 그 말은 동물 학대를 없애는 데 즉각 가장 많은 힘을 쏟는 것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동물을 사랑한다는 말은 자신이 동물을 볼 때 행복해진다는 경험을 진술하는 것인 경우가 대부분인지라 개인 생활세계에서의 제한된 경험에서 촉발되는 감성은 개인의 생활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동물시설에서 동물이 겪는 삶과는 관련이 없다.

 

생명 존중이라는 말은 식물의 생명을 완전히 훼손함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는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동물의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면 그것은 생명 그 자체가 소중한 것이 아니라 동물이 소중한데 동물을 있게 하는 전제로서 생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동물의 생명은 내재적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동물이 적어도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을 때, 그를 위한 도구적 가치를 가질 따름이다. 동물복지라는 말은 동물에게 삶과 죽음의 최소한의 질이 보편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회피하는 개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증된 동물복지 축산농장에서 살고 있는 가축은 전체 가축의 10%가 안 된다. 대부분의 동물이 동물복지 축산농장의 밖에서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데 축산동물 학대에 대한 문제 제기에 대해 정부는 동물복지 축산농장 인증제의 개선으로 대응하고 있다.

 

 인간의 이기심이 잘 드러나는 개념 중 하나가 지속가능성이다. 축산동물과 실험동물이 삶과 죽음의 과정에서 겪는 고통의 정도를 생각해 보면 이들의 삶과 죽음이 달라지지 않는 한 지구상에서 대멸종이 일어나는 것이 낫다. 지속가능성론 역시 현재의 체제를 그대로 지속하자는 말은 아니나 그들이 추구하는 지속 가능한 사회에 동물 학대의 제거는 들어가 있지 않다. 온실가스 발생 감축이라는 목표는 축산업의 축소가 아니라 저탄소 축산물 인증제로 나타나고 있다. 동물 학대를 없애는 데 많은 힘을 쏟아야 한다는 요구를 가장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 동물권단체 케어의 개 도살장 철폐 활동이다. 7월부터 동물권단체 케어는 개 도살장 철폐를 위한 활동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개 식용에 반대하는 여론이 고양되어 있을 때 개고기 사업의 잔인성을 부각해 개 식용 금지를 입법화하기 위함이었다. 케어는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A시에서 세 개의 도살장을, B시에서 다섯 개의 도살장을 차례로 없앴다.

 

 케어의 이러한 활동은 동물학대를 방조해 온 국가와 종종 충돌한다. 최근 B 시에서는 한 동물권 운동가가 구속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동물권단체 케어의 개도살장 철폐 집중 행동은 동물보호에 소극적인 지자체 공무원들로 인해 각 지역별로 초기에는 그 과정이 지난하였다. 각 지자체 공무원들이 동물보호라는 자신들의 책무에 대해 초기에 얼마나 소극적이었는지는 케어 유튜브 라이브에 100시간이 넘는 분량으로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시민들은 지자체 공무원들의 이러한 업무 해태에 대해 거세게 항의하였다. B시 한 도살장의 경우 그 폐쇄를 위해 20214월부터 약 반년 간 무려 23번의 집회가 이미 열린 바 있다. 20214월부터 지금까지 그 도살장에서 잔인하게 죽어 간 개는 1만 마리가 훨씬 넘을 것이다. 케어가 출입을 목격한 단 한 대의 트럭에만 무려 34마리의 사체가 발견되었는데 그러한 트럭이 일주일에 세 대만 출입하였다고 해도 얼마나 많은 개가 죽었는지 체감할 수 있다. 개 살해는 잔인하고 동시에 위법한 행위이다. 이 잔인하고 위법한 행위가 공무원들의 업무 해태로 인해 무려 1만 회가 넘게 반복된 것 이다.

 

 B시장은 시민들의 항의에 대해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말한다. “여전히 이 세상과 인류에겐 수용할 수 없는 고통과 모순이 끝이 없습니다. 개만이 그렇지 않습니다.” B시장의 말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1만 회의 개 도살과 방임만큼 심각한 고통과 모순이 B시에서 끝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시장 스스로도 B시가 지옥 같고 부조리가 만연한 곳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시장의 말은 개 죽이는 문제를 방임하는 것이 별 일 아니라는 관점을 보여주는 말이다. 이런 시장의 관점에서 심각한 범죄행위를 방임하다가 시민들의 항의에 노출된 공무원들은 지난 3주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공무원인 죄로 처절하게 견딘 제 직원이다. 1만 마리 개의 잔인한 죽음과 3주간 직원이 겪은 정신적 고통을 비교하라. 1만 마리 개의 잔인한 죽음을 알고 행동하면서 많은 시민들이 겪은 고통 및 다양한 손실과 3주간 직원이 겪은 그것들을 비교하라. B 경찰서가 동물권 운동가의 구속영장 청구서에 기재한 범죄는 8개다. 그 범죄의 대부분은 공무집행방해다. 그러나 청구서에서 사실관계는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 예를 들어 경찰관이 개 사체를 빼돌린 것을 항의하기 위해 경찰서를 방문한 것을 유튜브 생방송을 하려고 하였으나 위 차량을 놓쳤다는 이유로 화가 나라고 묘사하고 있다.

 

 케어가 오기 전까지 B시는 도견장이라는 간판을 버젓이 내걸고 개 도살을 하는 곳이 여러 곳 있었다. 개 도살은 명백한 불법임에도 다 드러내놓고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데, 응당 그것을 수사하여야 할 경찰은 오랫동안 방치하였다. 케어의 신고로 한 도살장에 온 경찰의 첫 마디도 개 도살은 합법인지 불법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 고 잔인하게 죽인 증거인 개 사체를 개장 수가 싣고 현장을 떠나려는 것을 경찰은 용인하였다. 강력한 시민의 항의가 잇따르자, 경찰은 압수하겠다고 하면서 냉동고에 위탁보관하기 위해 이동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개장수에게 넘겨주려는 것이 아님을 시민들에게 확인시켜 주기 위해 시민들이 차량을 따라오게 허용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경찰은 실제로는 시민들이 따라오는 것을 방해하여 시민들은 개 사체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경찰서를 방문한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케어 유튜브 라이브에 생생히 담겨 있다. 이처럼 여전히 몇몇 수사기관들은 맥락을 심각하게 왜곡함으로써 부당한 처사를 은폐하고 있다. 다른 건들 또한 이와 같이 비슷한 경우가 매우 많다.

 

 나는 2020331일 동물해방당준비모임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 모임은 몇 달 만에 활동을 중지하였다. 그리고 나는 케어 대표가 되었다. 처음 모임을 만들 때 나는 케어와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케어 회원조차도 아니었다. 당시 나는 한국의 동물 운동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상태에서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명상하며 동물 운동을 해야겠다고 결론 짓고 세 개 동물단체의 핵심 활동가들을 규합하여 모임을 만들었다. 당시 내가 동지라고 생각했던 세 개의 동물단체. 그때 동지의 기준은 비건이었다. 비건조차도 아닌 동물단체에 대해 동지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의 기준은 다르다. 고통 받는 동물들 곁으로 가는 것이다. 인류에게 가장 많이 읽힌 책인 성경에서 예수는 부활하여 예루살렘이 아니고 갈릴레아로 갔다. 부와 권력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고통 받는 약자들이 모여 사는 갈릴레아. 학대받는 동물들이 사는 현장으로 가는 것이 동물 운동의 모든 것이 아니지만 그것은 마치 밥 먹는 것처럼 늘 반복되어야 한다. 인간은 감각적인 동물이어서 그들을 며칠만 보지 않아도 금방 잊어버린다. 그리고 자기감정 돌봄, 자기 관념 도취로 가면서 스스로 동물을 위한다고 착각하게 된다. 우린 동물 학대의 현장으로 가야 한다. 개 도살장으로 가야 한다. 갈 수 없다면 지원하여야 한다. 누군가의 사소한 이익을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가하는 현실에 분노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