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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호] 대도시의 놀이법: 게이클럽에서 나타난 놀이의 의례적 힘과 경계 작용 본문

기획

[177호] 대도시의 놀이법: 게이클럽에서 나타난 놀이의 의례적 힘과 경계 작용

dreaming marionette 2026. 6. 15. 09:00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류학 박사과정 이현화

 

노는 건 분명히 힘든 일입니다. 그중에서도 눈이 시리게 번쩍거리고 귀가 아프게 쿵쿵대는 클럽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춤추며 노는 건 정말이지 소모적이지요. 어두웠던 클럽에 영업이 끝났다는 의미의 주광색 조명이 켜지면 놀던 이들은 해가 떠올라 밝아진 바깥으로 나갑니다. 놀이는 끝나고 이제 현실이 돌아옵니다. 피로와 숙취로 다음 날 하루가 통째로 날아가는 건 물론이거니와, 지갑 사정에 대한 걱정, 전날 밤 정신 나간 채로 했던 행동에 대한 후회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서 뒤엉킵니다. 눈부시고 따뜻한 햇빛이 이렇게나 기분 나쁘게 느껴질 때가 있을까요. 어리석게도 후회는 한두 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또다시 자정이 넘은 시각에 친구 무리와 함께 클럽으로 가는 택시를 잡아타 놀러 가고 있겠지요. 아침 햇살과 함께 ‘현타’가 찾아올 것을 알면서도요.

클럽 입장 시에 받을 수 있는 팔찌와 도장 사진과 함께, 이태원의 지난밤이 얼마나 화려하고 힘들었는지를 보여주는 글. 출처= X(구 트위터), 연구 참여자 제공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길래 이렇게 힘든 클럽에 다시 또다시 찾아와서 노는 걸까요. 나라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인 음악에 자유롭게 몸을 맡기는 것? 처음 만난 마음에 드는 사람과 눈빛을 주고받고 이리저리 몸을 부딪쳐 보는 것? 전부 맞긴 합니다만, 이태원에 밀집한 게이클럽에서는 여기에 더해 조금 독특한 모습이 보입니다. 반복되는 강렬한 비트에 보컬이 거의 없는 전자 음악을 트는 이성애자 클럽과 달리, 이태원 게이클럽에서는 놀랍게도 어딜 가나 케이팝이 들립니다. 디제이는 케이팝 중에서도 유행하는 여자 아이돌 노래를 주로 트는데, 저만의 스타일로 치장한 수많은 게이 남성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여돌 노래의 안무를 따라 추면서 놀고 있습니다.

 

깔끔하고 세련되게 차려입은 남자가 걸치고 있던 트렌치코트를 벗어 던지고 과감히 단상에 올라 골반을 흔들며 브레이브걸스 <롤린>의 의자춤을 춘다거나, 짧은 스포츠머리에 수염까지 기른 남자가 상큼함을 뽐내며 IVE <After LIKE>의 안무를 따라 춘다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심지어는 안무를 익혀 온 많은 이들이 다 함께 같은 동작으로 몸을 들썩이며 클럽 전체가 흔들거리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데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이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겠지만, 문득 앞서 하던 생각이 눈 앞에 펼쳐진 장면에 겹칩니다.

 

지금 고작 이런 걸 하려고 클럽에 모여 밤까지 새우고 있는 건가?

 

사실 제 연구의 배경에는 이 황당한 질문이 있었고, 그에 대한 저의 대답은 ‘정말 그렇다’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만드는 놀이의 의례적 힘

모두 모여 함께 케이팝 여돌 춤을 추는 것은 이태원 게이클럽의 재미난 놀이법 중 하납니다. 클럽 플로어에서는 일행이나 주변 사람과 함께 노래마다 정해진 케이팝 안무를 따라 추는 공연을 서로 주고받으며 놉니다. 한편에서 노래와 춤에 심취해 마치 스스로 여자 아이돌이 된 듯한 나의 모습을 뽐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만, 다른 한편에서 이러한 놀이를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 있다는 감각 또한 놀이에서 중요합니다. 이태원에서 잔뼈 굵은 한 연구 참여자는, 케이팝 놀이의 재미 포인트가 다 같이 떼창을 하거나 같이 춤을 추면서 “신남을 공유”하고 “친한 사람끼리 교감”하는 데에 있다고 말합니다.

 

춤과 노래는 과거 인류학이 주로 연구해 온 부족사회의 의례에서 참가자의 감각을 고양하고 서로를 연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습니다. 의례 참가자는 세속으로부터 분리된 의례의 붕 뜬 시공간 속에서 언어보다는 춤과 노래와 같은 비언어적 상호작용을 통해 정서를 공유함으로써 동지 의식과 유대를 느끼고 서로를 하나의 집단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의례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인류학자 빅터 터너는 ‘커뮤니티’와는 구분되는 ‘커뮤니타스(communitas)’라는 개념을 통해 의례에서 나타나는 특유한 관계를 설명합니다. 이들은 사회에서 부여한 역할이 적힌 이름표를 잠시 떼어 버린 채, 동등한 개인으로써 함께 춤추고 노래 부릅니다. 이곳, 이 순간에는 내 옆에서 함께 춤추는 사람이 바깥에서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에 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있어야 더욱 재미있고 신날 수 있기까지 하죠.

 

재미가 끝은 아닙니다. 커뮤니타스는 의례의 종료와 함께 흩어지지만, 커뮤니타스의 사회문화적 효과는 의례가 끝나도 지속됩니다. 참가자는 자신과 동류로 여겨지는 게이 남성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술과 조명과 군중 속의 왁자지껄한 감각 속에서, 자기가 잘 알고 좋아하는 케이팝 여자 아이돌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곳에서 ‘우리’를 경험합니다. 이 공동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케이팝 커뮤니타스가 만들어내는 놀이, 성적 지향, 장소 사이의 결합이 한국 게이 남성의 놀이 문화에서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태원은 케이팝 놀이를 매개로 형성된 게이 집단의 공동성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창구가 되어 수많은 게이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현대 사회의 놀이와 부족사회의 의례가 모든 부분에서 서로 완전히 같을 수는 없지만, 이태원 게이클럽에서 확인할 수 있듯 놀이에는 분명히 공동체와 집단 문화를 만드는 의례적 힘이 있습니다.

모모랜드 <뿜뿜>의 포인트 안무를 따라 다 같이 엄지를 세우고 팔을 위로 치켜드는 모습. 출처=연구자 직접 촬영

 

놀이의 경계와 사회문화적 여과 작용

여자 아이돌 노래와 춤이 게이 놀이 문화의 재료가 된 것은 자못 흥미롭습니다. 놀이의 의례적 힘이 케이팝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특성과 공명함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2010년 전후로 한국의 아이돌 팝은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고 상품으로 팔리기 위해 쉽게 따라 부르고 따라 출 수 있는 형태를 갖춰 나갑니다. 코러스 부분에 똑같은 가사를 반복적으로 배치하여 ‘후크송’을 만들거나, 눈에 잘 띄고 따라 추기 쉬운 ‘포인트 안무’를 집어넣어 왔지요. 사람들이 클럽에서 따라 부르고 춤추는 것도 바로 이 부분입니다. 디제이는 많은 이들이 잘 아는 노래를 선곡하고, 한 곡 안에서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부분을 끊어지지 않게 믹싱해 즐거운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 애씁니다. 다른 한편, 게이 남성이 여자 아이돌 노래를 놀이 재료로 선택한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지면상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젠더 비규범적인 모습을 띠는 기존의 게이 놀이 문화와 케이팝이 역사적·문화적으로 접합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게이이기만 하면 무조건 이 놀이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까닭은 마찬가지로 놀이의 핵심에 케이팝 여자 아이돌 노래와 안무가 있기 때문이지요. 평소에 케이팝 여돌 노래를 잘 듣지 않는다면, 유행하는 여돌 노래와 안무를 잘 모른다면, 여자 춤을 추는 남자인 자신을 껄끄럽게 여긴다면, 절대 이 놀이를 즐길 수 없습니다. 이태원의 한 게이클럽에서 2023년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애프터파티가 열렸습니다. 이곳은 테크노 장르의 격렬한 음악을 선곡하던 곳으로, 원래는 케이팝을 잘 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퀴어문화축제라는 성소수자 운동의 맥락에서 디제이가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돌발적으로 선곡했고, 이태원의 케이팝 놀이에 익숙한 이들은 의미 있는 노래의 등장에 흥분하며 큰 소리로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곳을 찾은 적지 않은 수의 외국인이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인 클럽에서처럼 각자 알아서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노래를 따라 부르고 다 같은 안무를 추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놀이는 언제나 경계를 만듭니다. 놀이에는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놀이의 바깥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그 놀이만의 규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친한 친구가 갑자기 나의 팔을 주먹으로 한 대 때렸습니다. 당황한 나는 이 친구가 지금 나에게 적대감을 진지하게 표현하기 위해 나를 때린 것인지 아니면 같이 놀자고 때린 것인지 구분하고 싶을 것입니다. 놀이의 외부에서는 때리는 행위가 단순히 공격을 의미하겠지만, 놀이의 내부에서는 이 행위가 공격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규칙이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이의 규칙이 무엇인지, 그 규칙이 언제 통하고 또 언제 통하지 않는지를 잘 알아야 놀이에 동참할 수 있겠지요. 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놀이가 놀이 내부에서 참가자가 서로 주고받는 커뮤니케이션과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놀이의 내부와 외부를 구별하기 위한 메타커뮤니케이션을 동반한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놀 줄 아는 사람만이 놀이의 내외부를 가르는 경계를 능숙하게 넘나들며 놀이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태원에서 잘 놀기 위해 원래는 듣지 않던 여자 아이돌 노래를 찾아 들으며 익히기도 하고, 안무를 따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내 연습실을 빌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곳에서 놀기를 포기하게 되지요.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사회문화적 위치에 놓여있는지에 따라 놀이에 헌신하는 정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놀이는 그 경계에서 부지불식간에 참여자의 사회적 구분을 경유하며 여과 작용을 일으킵니다. 위에서 보인 <다만세>에 당황한 외국인의 경우처럼 국적이나 종족을 따라 놀이의 경계가 형성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놀이는 ‘이것은 진지하지 않다’는 전제하에 성립되지만, 동시에 내외부에 진지한 효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원래 이태원이라는 글로벌한 도시적 맥락 속에서 게이클럽은 국적에 불문하고 함께 춤출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만, 새롭게 자리 잡은 케이팝 놀이가 이태원에서 외국인을 밀어내는 아이러니를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놀아본 놈’들의 이야기를 기다리며

다시 묻습니다. 노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왜 어떤 이들은 놀기 위해 영혼을 갈아 넣는 걸까요? 소모적일 것으로만 생각했던 놀이가 사실 무언가를 만들고 또 남기는 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답을 찾기 위해, 혹은 정말 그냥 놀아보기 위해, 제가 연구한 케이팝이 흘러나오는 이태원 게이클럽에 직접 가보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젊은 게이 남성이 아니라면 입장이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놀이는 언제나 경계를 만든다는 것이 거칠지만 여기에서도 드러나네요.

 

그렇다면 각자 하고 있는 자신의 놀이에 대해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요. 그러나 놀이의 바깥에서 팔짱 낀 채 놀이의 의미를 쉬이 비평해 보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한편으로 놀이의 정치적 가능성을 낭만화할 수 있고, 그 반대로 놀이의 비정치적 외양에 대해 부당한 비판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놀이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직접 놀아본 사람만이 느끼는 감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감각은 놀이 내부에 쏙 들어가 느끼는 즐거움과 해방감일 수도 있고, 놀이의 규칙에 적응하지 못하고 바깥으로 밀려나는 감각일 수도 있겠지요.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놀이 참여자가 직접 느끼는 그 감각에 기반한 논의만이 놀이에 대한 온당한 시각을 견지하게 해줄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