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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포스트모던의 영토들

 

지금 세계를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포스트모더니즘내지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것은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도 다가와선 집요하게 달라붙어 따라다니는 말이 되었고, 알든 모르든 어느새 우리가 사는 세계를 지칭하는 명칭 중 하나로 자리 잡은 듯하다. 그리고 원래 그 의미가 무엇이었던 간에, 그 단어는 근대’(modern)라고 불리던 시대를 이미 지나간 것, 혹은 적어도 어떤 식으로든 지나가야 할 무엇으로 만들어버린 듯하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근대를 넘어선다는 것이, 상품과 미디어의 복제능력에 의해 혁명적 꿈과는 먼 어떤 니힐리즘과 동일시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은 거대한 상품과 미디어의 공세 앞에서 넋을 잃은 니힐리즘과 달리, 새로운 삶의 가능지대를 표시하는 희망의 표지일 수도 있지 않을까?”

 

Q. 선생님께서는 동료들과 함께 현대문화에 대해 저술한 <문화정치학의 영토들>에서 포스트모던을 희망의 표지로 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A. 우선 모더니즘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겠네요. 모더니즘은 영역마다 성격이 다르게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미술에서의 모더니즘은 매체적인 특성을 회화의 평면성으로 간주하고 순수 모더니즘을 추구하면서 미술 이외의 것들을 쫓아내려 했지요. 미술에서 초현실주의는 내러티브가 중요한데, ‘그게 문학이지 무슨 미술이야이러면서 쫓아내고, 퍼포먼스적인 것들은 그게 연극이지 무슨 미술이야이러면서 몰아내다보니 남는 것은 환영 효과가 사라진 평면성을 추구한 미술만 남게 되었죠. 이질적인 것들을 다 몰아내고 동질화하려는 것이 미술에서의 모더니즘 특징이었습니다. 건축에서는 달랐을까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은 원래 건축에서 나온 말인데요. 서양 고전 형태의 건축물들을 가시화하려다보니 직선화되고 육면체 박스 같은 건축물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해 획일화된 건축물들이 출현하게 되었죠. 직선과 직각, 가시성, 지역별로 조닝-상업지대, 주택지대 등의 형태로 동질화하려는 것-하는 것도 모더니즘의 특징입니다. 동질화되고 획일화된 세계를 강조하는 이념들이 더는 설득력을 잃게 됐다는 점, 그러면서 다양성을 강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Q.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그것을 정확히 분리한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모더니즘에서 추구했던 진리를 향한 거대서사로부터 탈주하려는 움직임을 포스트모던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모더니즘 시대와 구분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으로 어떤 이야기를 해주실지 궁금합니다.

 

A. 우선 지금이 정확히 포스트모던한 시대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시대에 포스트모더니즘 논의를 적용하는 것은 거리가 있어 보여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역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규범적인 것들이 설득력을 잃으면서 나타난 현상이 포스트모던이라는 거죠. 사회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보자면 근대라는 것은 노동의 시대잖아요. 그것이 좋은 의미에서든, 그렇지 않든 노동의 시대를 지나 지금은 노동을 하고 싶어도 하기 힘든 시대라는 겁니다. 전체 노동자의 반이 비정규직이고, 실업자도 통계를 내보면 나날이 높아지고요. 이건 노동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 간다는 거죠. 노동의 시대라는 것은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아라라는 규범이 있던 시대인데 이제는 자본주의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 규범은 이제 무의미해졌어요. 그런 의미에서 노동이 모든 것을 대표하는 시대는 끝나고, 더 이상은 이대로 지속되기는 힘들겠다는 문제의식이 생겨난거죠. 이제는 네그리 같은 학자가 이야기했듯 과거와 달리 노동이 전부 탈물질화 되어 비물질적 노동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 그 예 중 하나입니다. 그런 변화들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경계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19세기의 정치적 혁명들 속에서 만들어진 평등의 이념은 자본주의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소비의 영역에서 누구나가 다 규격화된 상품을 선택하고 구매할 수 있는 형식 민주주의적 평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상품은, 그가 지불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계급과 성별, 사회적 지위나 학력, 국적 등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불평등과 산업화가 진행될수록 깊어지는 빈부의 차이, 착취와 전쟁은 상품의 풍부함과 소비의 평등 속에서 은폐될 수밖에 없었다.”

 

Q. 현대 사회의 특징으로 소비를 들지 않을 수 없는데요. 소비사회도 포스트모던의 산물로 볼 수 있을까요?

 

A. 소비사회를 모더니티나 포스트모더니티의 산물로 보기 보다는 시대적으로 봐야할 것 같네요. 시기적으로 보면 소비사회라는 것은 2차 대전 이후에 출현했다는 면에서 소비사회가 모더니티보다는 포스트모더니티에 상응한다고 볼 수는 있겠네요. 19세기 자본주의는 절약을 강조한 금욕주의를 주창했고, 소비는 미덕이 아니라 악덕으로 간주되었죠. 그런 시대가 위기에 봉착한 것이 20년대 말이에요. 29년 대공황이라고 하죠. 20년대 말에는 포드주의, 생산라인(assembly line)이 도입되면서 대량생산이 본격화된 시대인데 계속 금욕주의가 강조되다보면 만든 물건들이 팔리지를 않게 되고 창고에 쌓이게 되겠죠. 그러다보니 금욕과 절약으로는 자본주의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다는 의견이 늘면서 이제 거꾸로 소비하라는 명령이 중요해집니다. 그 소비를 창출하기 위해 케인즈는 유효수요의 원칙을 중심에 두고 새로운 경제학을 만들어냈고, 뉴딜(New Deal)정책으로 공공사업을 벌여 돈을 뿌려 수요를 창출하게 된거죠. 이제 소비가 의무가 된 사회가 된 겁니다.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대표적 인물로 간주되는 보드리야르 같은 경우 소비사회를 자본주의와 포스트모던에 연결했던 연구 등을 보았을 때 소비사회는 포스트모던에 가깝게 위치하지 않았나 생각 합니다.

 

Q. 한국에서의 포스트모던 현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A. 1987년 이후가 아닐까요. 87년 이전에 제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학교에서 저축 포스터를 그리라고 했지요. 자동차도 검정색이 아니면 허용되지 않았죠. 87년 민주화운동을 거치고 난 후 노동조합들이 대거 만들어졌잖아요. 그러면서 임금도 오르고, 노동자들의 대중적인 구매력도 증가했지요. 그렇게 내수시장 활성화 전략으로 그동안 수출에만 의존하던 것에서 내수에도 집중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어요. 내수시장 형성이 중요했던 건 국민들의 소비를 확대하는 것이니까 그때부터는 더 이상 국민들에게 절약을 강조하지 않았죠. 이런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여성지(womens magazine)의 변화 같아요. 예전에는 커피가 묻으면 어떻게 물을 빼고, 어떻게 하면 절약할 수 있을까를 가르치는 것에서 알뜰주부가 이상적인 모습이었음이 나타나죠. <주부생활>이라는 잡지 제목이 이런 현상을 잘 나타내준다고 말 할 수 있어요. 그런데 87년 이후부터는 굉장히 화려한 이름을 가진 잡지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죠. 이런 여성지의 특징이 광고와 글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글에서도 트렌드를 강조하면서 이런 의상, 이런 구두가 유행하고 있다고 가르치는데, 이건 광고회사랑 다를 바가 없죠. 이런 현상과 맞물려 소비사회로 넘어간 게 아닌가 싶어요.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 혹은 유명인사의 외양과 그들의 생활방식 등을 개성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모방한다. 혹은 TV나 잡지 등을 통해 제공되는 계급 표시적인 주택과 인테리어, 자동차, 의류 등이 하나의 모델로 모방된다. 이런 모방을 통해 대중들은 개성화하고자 하며, 스스로를 타자로부터 구별짓고자 한다. 이런 관점에서 유행역시 이해될 수 있다. 차이화와 유행은 얼핏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비사회에서 이 둘은 좋은 커플이다. 짐멜에 의하면, 유행은 한편으로 그것이 모방이라는 점에서 사회에 대한 의존 욕구를 충족시킨다. 다른 한편 유행은 차별화 욕구를 만족시킨다.”

 

Q. 유행도 포스트모던의 특징으로 볼 수 있을까요?

 

A. 유행은 시대를 불문하고 언제나 있었죠. 프랑스 혁명 이전 귀족시대에도 유행은 있었어요. 그런데 유행이라는 것은 소비자들이 자신의 감각에 의해 만들어 내야 되는 건데 이게 생산하는 사람들에 의해 유행이라는 것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소비사회 들어서 변화라고 볼 수 있죠. 지인 중에 의류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유행색협회라는 곳이 있다더군요. 올 봄에는 무슨 색이 유행한다는 것을 유행색협회에서 정하면 디자이너들이 그 색으로 디자인해서 옷이 나오면 소비자들은 그 옷을 입어야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거예요. 소비자들의 감각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유행이 아닌 옷을 팔기 위해 생산자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라는 얘기죠. 만드는 이유야 분명하죠. 빨리빨리 유행이 바뀌어야 또 옷을 사지 않겠어요? ‘패셔너블이라는 단어로 가진 것을 새 것으로 빨리 바꾸게 하는 것을 포스트 포드주의라고도 부릅니다. 휴대폰이나 자동차 같은 고가품도 마찬가지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형태인 소비주의도 이제 자본주의에서의 변화 뿐 아니라 문화현상 전반에 확산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의 감각을 바꿔 새로운 것들을 자꾸 소비하게 하려는 의도겠지요.

 

오늘날의 육체는 광고, 모드, 대중문화 등 모든 곳에서 범람하고 있다. 육체를 둘러싼 위생관념 및 영양 그리고 의료의 숭배, 젊음, 우아함, 남자다움, 아름다움 등에 대한 강박관념, 미용, 날씬해지기 위한 식이요법, 그리고 육체에 따라다니는 쾌락의 신화. 이것들은 모두 오늘날의 육체가 가장 강력한 소비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품으로서의 육체는 의도적으로 투자되는 동시에 물신숭배 되고 있는 것이다.”

 

Q. 책의 본문에서 육체 소비라는 말이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 왔습니다.

 

A. 기본적으로 신체는 보여주기 위함은 아니잖아요. 소비 시대로 바뀌게 되면서 육체는 관리되고 검열되는 과정을 통해 소비되죠. 이건 성욕에 대한 관점의 변화로 설명할 수 있어요. 이전에 금욕이 강조되던 시기에 성욕은 억제하고 감추어야 하는 것이었죠. 그런데 소비사회가 되면서 성욕을 자극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지게 됩니다. 상품광고에서 성적인 이미지를 쓰는 건 지금 너무나 일반적이죠. 섹시함을 강조하는 것, 즉 여성들에게 섹시할 것을 요구하고, 남성들은 성욕을 자극해 끌어들이는 식의 체제가 만들어졌어요. 욕망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신체를 욕망의 가시적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해지죠. 그러다보니 신체는 보여주기 위한 것이 되고, 신체적인 것들이 다른 어떤 것보다 시선의 대상으로 바뀌게 된거죠. 그러다보니 당연히 건강미가 중요해지게 되었고요. 이상한 현상도 나타납니다. 음식이 포화하니 많이 먹고, 돈을 들여 살을 빼는 거예요. 돈 들여 먹고 돈 들여 빼는 시대죠.

 

Q. ‘육체 소비논의의 연장선으로 개인의 육체가 부를 생산하는 사회적 자본이라는 의미의 육체 자본’, 특히 성형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성형은 여성들의 예뻐지고자 하는 욕망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사회생활을 잘 하기 위한 하나의 자기계발로 여겨지고 있는 듯 합니다. 많은 자기계발서나 대중강연에서는 이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으로 자존감이나 자신감을 강조하는 걸 많이 봐왔는데요. 이것만이 이 시대에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일까요?

 

A. 최근에 <삶을 위한 철학수업>이라는 책을 새로 냈는데, 거기에 자존심과 자긍심에 대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자존심이란 일종의 방어기제로, 남이 나에게 보내는 시선이나 건네는 말들을 공격으로 받아들여 그로부터 나를 방어하기 위해 쳐내는 것이죠. 그래서 자존심이 센 사람의 경우 신경질적이고 히스테리컬 하지요. 사실 이건 약함의 징표예요. 자신의 약점을 카무플라주하기 위한 방어기제로서 성형수술을 하는 것이라면, 이는 자존심을 지키려는 행위와 일치하겠네요. 그런데 자긍심은 강자들이 자신을 긍정할 때 나타나죠. 내가 진짜 좋아서 하는 일이 있다면 사람들이 오해를 해도 설명할 필요를 굳이 못 느끼겠죠. 자긍심이 있으면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 못해도 별 상관없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자긍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자신을 치장한다는 것이 크게 의미 있는 작업은 아닐 거예요. 성형수술도 마찬가지겠지요. 자기가 정말 좋아하고 자기 인생을 걸 만한 일을 하는 것, 나의 인생 계획을 실천하며 살 수 있을 때 진짜 자긍심이 생기겠죠. 그런 사람에게 성형수술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겁니다.

 

“<권력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누굴 만나서 무엇을 하든지, 당신 몸에 부착된 전자장치는 당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포착할 수 있다. 이것이 단지 할리우드의 스릴러적 상상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거리에 설치된 무수한 CCTV, 당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는 핸드폰의 GPS, 정부와 기업의 데이터베이스에 입력된 당신의 신상정보는 단지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기 위해서 사용되기만 할까?”

 

Q. 전자감시 시대입니다. ‘구글링으로 신상털기는 흔한 일이 되어 버렸고, “당신의 앞마당 역시 불특정 다수에게 언제든지 노출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본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구글 어스’(Google Earth)는 개인의 사생활 뿐 아니라 국가의 안보마저 위협하고 있는데요. 이런 시대에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이제 그런 것들은 이미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 같아요. 없앤다 해도 또 많은 피해나 불편을 감수해야 하고요. 그런 것들에 대한 방어 방법을 찾기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겠죠. 카운터 감시(반감시, 대안감시)의 방법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최근에 위키리크스도 중요한 역할을 했고, CIA에 있다가 에콰도르에 망명을 신청한 스노든 사건을 통해서도 그런 사례를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정보기관에 대한 카운터 감시인거죠. 촛불 시위를 할 때 폭력을 쓰는 경찰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뭐겠어요? 시민의 카메라죠. 경찰의 무리한 진압에 쇠파이프로 맞서는게 아니라 카메라를 들이대는 거예요. 반폭력 감시의 장치로 카메라나 이런 것들이 사용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식의 카운터 감시, 대안 감시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좀 더 적극적인 대응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공동체주의란 많은 경우 그 외부의 이질적 요소들에 대해 배타적이고 적대적이다. 이질적 요소의 유입을 차단하여 동질성을 유지하려 하고, 외부자를 배제하여 친숙하고 친밀한 자기들만의 천국을 만들고 싶어 한다. 코뮨주의는 이런 점에서 공동제나 공동체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른 관계, 다른 삶의 방식을 추구하며, 그런 만큼 다른 원리를 작동시킨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인 결사체며, 보호되고 보존되어야 할 어떤 정체성/동일성에 스스로 고정되지 않으며, 외부적 요소에 대해 항상 열려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외부적 요소를 통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갱신하고 변이시켜 가는 연합과 연대의 집합체다. ”

 

Q. 선생님 책에서 국가로 통합된 공동체라는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국가라는 개념이 근대의 산물이라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이르러 국가의 경계는 더욱 모호해지고 점점 초국적인 사회가 될 텐데요. 지금도 이미 글로벌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현상이 많이 진행되었지만요. 근대의 우리들이 국민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 왔다면 앞으로 우리는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까요?

 

A. 인구, 영토, 주권을 세 가지 기본요소로 하는 국가 개념은 19세기 이후에 만들어졌죠. 전에는 사실 봉건 영주들이 다스리거나 도시국가들이 대부분이었죠. 그런데 나폴레옹 전쟁 이후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국민국가 체제가 만들어진 것이니까 국가의 역사는 정말 얼마 안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도시들을 통합해 이탈리아라는 국가가 만들어졌을 때 마시모 다젤리오가 우리는 이탈리아를 만들었다. 이제 이탈리아인을 만들 차례다.”라고 말을 했다지요. 같은 국민이라는 의식이 없으면 국가가 유지되기 힘들기 때문이에요. 국민을 만들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초등학교 입니다. 국민으로서 정체성을 갖게 하려고 언어와 역사를 가르치죠. 지금은 국가라는 개념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EU 같은 국가연합체가 생겨나고 있어요. 국가연합체는 국가의 수준을 이미 넘어선 것이지요. 생산이나 유통도 이미 국가 단위를 넘어섰고요. 국가의 위상이 굉장히 약화된 거라 볼 수 있어요. 또 중요하게 봐야할 건 노동력의 이동입니다. 우리나라 같이 단일민족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나라도 이주노동자의 수가 엄청나잖아요. 그런 시대에 국가나 민족정체성이라는 걸 계속 주장하는 것은 굉장히 시대착오적인 거라 볼 수 있어요. 정체성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하자면, 이는 본래 사람들의 다양성을 제한하고 동일화 시키고 너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로 통제하려 하죠. 사람들의 다양성을 존중하고서는 국가가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하다보니 일단 동일화하려 하는 근대적인 감수성의 체제라고 볼 수 있지요. 이제 필요한 건 서로 다른 민족을 횡단할 수 있는 트렌스 네이션한 사고예요.

 

Q. 대학이 기업의 인력양성소로 변화하고, 대학의 연구기능은 기업의 R&D센터로 느껴질 정도로 대학의 기업화라는 말은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느껴집니다. 선생님께서 활동하시는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연구자들의 코뮨을 자처한다는 소개글을 보았는데요. 대학의 기업화에 대한 대안으로 선생님의 수유너머활동을 들 수 있을까요?

 

A. 저도 공부를 하고 싶어서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제가 보기에 대학원이라는 곳이 별로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더라고요. 프로젝트 옆에서 보조하다가 논문 써서 졸업해 대학에 취직하는 직장인이나 다름없어 보였어요. 저는 공부의 즐거움을 찾고자 대학원을 찾은 건데 이렇게 되어 버리면 커다란 즐거움 하나를 잃게 되잖아요. 그러고 싶지 않아서 학교에서 안 된다면 밖에서 하자 이런 생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 수유너머입니다. 또 학교와 상관없이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고요. 우리들은 이런 상황에서 다행히도 공부의 즐거움을 발견한 사람들, 적게 벌더라도 하고 싶은 공부를 계속 하겠다 결심한 사람들이 주로 모여서 만든 공동체, 코뮌이죠. 예술가도 있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함께 하지만 세미나나 강연을 하는 등 공부와는 어떤 식으로든 연결이 되어 있지요. 당번을 두고 음식도 함께 만들어 먹으면서 타인들을 배려하는 삶을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종류의 삶의 방식들, 윤리, 살아가는 지혜를 계속 찾아가는 것을 코뮌주의라 명명하는데, ‘수유너머는 그것을 위한 시도, 실험, 운동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