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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110호] 경제인류학, 과연 필요한 학문인가?

우석훈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신자유주의의 위세는 전과 달라질 수 있을까. 마르셀 모스와 칼 폴라니가 이 시점에서 재독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이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은무엇인가. 이들이 말하는 세계가 지금의 세계와 어떻게 다른지, 우리는 그 세계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들어보자.

좋든 싫든, 우리는 경제의 시대를 살고 있다. OECD로 분류되는 나라들 중에서도 한국이 특히 경제의 시대를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매우 특이한 경제적 흐름은 자본주의라는 말로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는 그런 보편적인 양상과는 좀 다르다. 대체적으로 1990년 동구의 붕괴 이후로 더 이상 자본주의 외부의 힘으로 자본주의를 제어할 수 없는 양상이 오면서, 자본주의 내부의 힘으로 자본주의의 모순들 혹은 문제점을 제어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인데, 이러한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그 결과 세계화, 금융화 등 몇 가지 흐름들이 결합되면서, 1990년대 중후반의 신자유주의라는 흐름이 오게 되었다. 이 흐름은 한국에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모스와 폴라니, 신자유주의적 흐름의 방어선

신자유주의, 경제 근본주의, 경제 중심주의, 화폐 배금주의 등 몇 가지 약간씩 뉘앙스를 달리하는 몇 가지 용어들이 있다. 이러한 용어들은 대체적으로 경제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실물경제든 금융경제든 경제 자체를 그 사회가 수용하거나 이해하는 방식, 즉 이데올로기라는 측면에서 포착된 용어들이다. 그런 점에서 경제적이며 동시에 경제학 외적인 영역에 자리 잡고 있는 용어인 셈이다. 만약 세상의 모든 것이 시장이며, 그 시장의 작동 방식으로 사회 혹은 그 외각의 존재가 포착된다면, 어쩌면 세상에는 경제학이라는 단 하나의 학문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장 하이에크나 혹은 한국에서의 하이에크의 추종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그들은 한국에서 시장은 덜 성숙했거나 왜곡되어 있으므로, 시장의 가치를 추구하고 한국을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이를 뒤집으면, 최소한 한국은 시장과 시장이 아닌 것 혹은 경제와 경제가 아닌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세상이 시장이 전부라면, 굳이 시장을 지키거나 시장경제를 공고히 하자고 말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런 측면에서 경제적인 것과 경제적이지 않은 것의 관계, 이 두 가지의 상관관계를 분석의 대상으로 놓았던 사람이 ‘증여론’의 저자인 마셀 모스(M. Mauss)라는 사람이다. 증여라는, 아주 오랫동안 인류의 경제생활을 작동하게 만들어온 방식을 분석하면서 모스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어떻게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경제적 삶이 등장하게 되고, 흔히 경제적 인간(homo oeconomicus)이라고 부르는 역사적 산물인 특수 존재가 등장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모스가 경제인류학이라는 이름으로 역사 속에서 다시 복권된 것은 1980년대 후반의 일이다. 사회과학에서의 반 효용주의 운동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MAUSS(Mouvement Anti-Utilitarism en Science Sociaele) 학회는 모스의 이름을 따라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내에서 역시 오랫동안 묻혀있던 저자인 칼 폴라니(K. Polany)가 호명되었고, ‘거대한 전환’으로 대표되는 폴라니의 지적들이 다시 역사 속에서 돌아왔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 진행되었던 모스와 폴라니에 대한 복권 노력은 1980년의 영국 대처주의와 미국의 레이건주의와 함께 등장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라는 흐름에 대한 방어선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돈으로 모든 것을 환원시키는 이에서력한 경제 근본주의가 자본주의에도 위협이 되며, 반사회적이고, 반인간적이며, 심지어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이지 않음은 물론 지속가능하지도 않다는 지적들이 90년대 초반, 모스와 폴라니와 함께 일정의 방어선 기능을 했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흐름이 늘상 경제학에 대해서 반대 입장에 서 있던 사회학과나 인류학과 내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경제학과 내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인류학의 지적을 받아들이고, 인류학적 상상력을 가지고 경제학 내에서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흐름 내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경제와 경제 아닌 것의 구분, 그 현재적 교훈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다시 역사 속에서 현실로 돌아온 모스와 폴라니가 새로운 전환점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10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9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다국적 기업들을 뛰어넘는 다국적 금융자본에게 역사의 주도권이 넘어가게 되었고, 금융화라는 흐름이 더욱 강해졌고, 마치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흐름처럼 도도해지게 되었다. 국제적으로, 특히 현대로 올수록 10년이란 시간은 긴 시간이다. 그 동안에 9.11 테러가 있었고, 아프가니스탄을 정점으로 큰 전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영원할 것 같던 신자유주의라는 경제 시스템은 최소한 3년 전부터 이제는 클라이맥스에 도달한 것처럼 내부에서 파열음을 내기 시작하였고, 급기여 2008년 9월 리만브라더스의 파산으로 그야말로 ‘제국의 심장’에서부터 그 문제점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함께 국제적으로 모스와 폴라니가 보여주었던 경제적인 것 그리고 경제적이지 않은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한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은 전후 세계경제의 재건 과정에서 만들어낸 브레튼우즈 체계와 이를 뒷받침하는 달러 본위제가 영원한 국제적 교환 시스템이 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또 국경 없이 실물 생산 자체도 소외시키면서 맹위를 떨치는 국제 금융거래가 더 이상은 스스로 서 있기도 어려울 만큼 대단히 취약한 시스템이라는 사실이다. 왜 미국의 부동산 정책의 작은 요소에 불과한 서브프라임 사태 때문에 우리 경제가 이렇게 어려워야 하고, 왜 전 세계 경제가 어려워야 하느냐고 물어보아도 소용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국제 금융자본을 제어하거나 보완하는 새로운 체계가 등장하기 전까지, 리만 브러더스와 같은 위기는 또 등장하고 또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형식적 접근과 실체적 접근으로 경제에 대한 두 가지 이해를 구분하고, 배태성(embeddeness)이라는 개념으로 폴라니가 제시한 시장 자체가 사회와 맺게 되는 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도 첨예한 관심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20세기 내내 주류 경제학자들은 국가인가, 시장인가라는 두 가지 질문만으로 문만으로부딪히는 수많은 경제적 문제들을 구분하고 설명할 수 있으며 자신들만의 처방전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경제적인 것들 그리고 국가로 단순히 환원시키기 어려운 사회의 영역 혹은 시민의 영역을 어떻게 고민할 것인가가, 금융자본을 새로운 제어의 틀에 집어넣자는 논의가 시작되는 지금, 대단히 중요하게 등장할 수밖에 없다.

경제 근본주의를 비껴가는 새로운 사유가 빚어져야

사실 우리는 시장과 시장 아닌 것 혹은 보다 넓은 의미의 경제적인 것과 경제적이 아닌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못했다. 우리가 지금 운용하는 경제 시스템을 ‘한국 자본주의’라고 이름을 붙인다면, 이것이야말로 외국으로부터 가지고 온 것이라서, 도대체 어떻게 선진국들이 자본주의를 만들어내게 되었는가 혹은 이 치명적이면서도 비인간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경제적 장치를 그래도 어떠한 사회 내부적 요소로 제어하며 폭발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인가를 제대로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다. 간단한 예로, 미국 자본주의가 독과점의 폐해로 전환되며 대기업들만이 이익을 보는 그런 이상한 경제로 전환하지 않게 막아주고 있는 장치로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대법원의 역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세계 최대의 석유회사였던 스탠더드 사나 역시 세계 최대의 전화 회사인 AT&T를 독과점으로 분할하라고 결정을 내린 것은 미국의 대법원이었다. 만약 이러한 사법적 장치의 견제가 없었다면 미국 경제는 우리가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비효율적이며 비인간적인 그런 경제가 되어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우리는 그런 사법 장치가 없다. 삼성을 옹호하며, 그것이 국민경제를 위한 길이라고, 경제학자보다 더 경제학적인 사유를 하는 법관들과 검사들이 있을 뿐 아닌가? 

경제위기를 맞아, 경제가 과연 무엇이고, 경제에 대해서 어떤 이해를 가질 것인가, 지난 10년 동안의 경제 근본주의를 우리도 다시 생각해봐야 할 순간이 온 셈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국민경제는 신자유주의에 한국 특유의 토건주의까지 합쳐져서 정말 황당하면서도 기형적인 시스템으로 계속해서 전환되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모스와 폴라니라는 오래된 학자들은, 사유의 시작이지 종착역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비경제적인 것들에 대한 고민을 이론적으로 복권시켜주는 폴라니는 자유이다. 그들이 종착역이 아니기 때문에, 교조적 독해나 베껴 쓰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열었던 지금은 아주 앙상한 길일뿐인 사유의 방식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다. 경제 근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폴라니를 고민하는 것이 지금의 문제들을 다시 처음부터 사유하게 되는 시작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경제 근본주의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던 사람들에게 경제인류학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