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16 20:59


윤여일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탈근대적 담론과 실천이 긴급하게 요청되는 현재, 동양에서 그 요청은 이중적인 면모를 갖는다. 서양의 탈근대가 근대로부터의 벗어남이라면, 동양의 탈근대는 근대로부터의 벗어남이자 - 근대화가 곧 서양화라는 점에서 - 동시에 서양으로부터의 벗어남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텍스트를 통해 이 이중적 요청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보도록 한다.

‘서양’과 ‘동양’은 담론적 구성물이다. 하지만 두 담론적 구성물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경계 지어진 영토상의 명칭인 서양은 자기한정을 거부하고 바깥으로 뻗어나간다. 서양은 하나의 특수로서 다른 항(동양)과 대립하지만, 이 다른 항이 자신을 특수로서 인식하게 하는 보편적 준거점으로 작동한다. 동양의 자기인식은 서양과의 차이를 통해 획득된다. 서양은 ‘서양 대 동양’이라는 대립관계의 한쪽 항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대립 자체가 발생하는 본원적 장소인 셈이다. 

따라서 ‘서양 대 동양’이라는 구도에서 서양과 동양은 등질한 공간적 평면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구도에는 시각적 함축이 덧붙는다. 서양의 근대화 과정은 헤겔의 역사철학이 그러하듯 공간상의 차이를 시간상의 낙차로 전위시키는 조작 속에서 전개된다. 서양의 근대성은 근대에 선행하는 자기 안의 전근대와 대립하는 동시에 지정학적으로는 비근대, 즉 비서양과 대비된다. 지정학적 조건은 역사적 단계로 번역되며, 이러한 역사주의적 도식은 다중적인 근대성을 근대화=서구화로 환원해버린다.

이처럼 근대화가 곧 서구화인 이상, 동양의 입장에서 근대성의 극복이란 ‘서양 대 동양’이라는 그 비대칭적 관계 자체에 대한 근본적 물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에서 다케우치 요시미의 「근대란 무엇인가」(1948)는 동양의 저항을 사고하고자 할 때 거듭 곱씹어봐야 할 텍스트라 할 수 있다. 「근대란 무엇인가」는 동양이 서양에게 패배했으며, 동양의 근대화는 서양에 의한 식민화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사고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의 근대화, 그 패배적 저항

‘동양의 근대’와 ‘서양과 동양’이라는 절에서, 다케우치는 서양과 동양의 관계를 명시한다. 서양과 동양은 용어의 대등함과 달리 등질평면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서양 대 동양’의 대(對)는 힘의 비대칭성이라는 위계관계를 품고 있다. 그 위계관계에 근거하여 서양은 동양을 자기세계로 내부화하였고, 차라리 동양을 생산했다. “동양의 근대는 유럽이 강제한 결과라는 점, 혹은 그 결과에서 도출되었다는 점은 일단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반면 서양의 “근대란 유럽이 봉건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과정에서(생산의 면에서는 자유로운 자본의 발생, 인간의 면에서는 독립되고 평등한 개체로서 인격의 성립) 그 봉건적인 것에서 구별된 자기를 자기로 삼아 역사에서 바라본 자기인식이다.” 풀이하자면 동양의 근대는 강제된 산물이나 서양의 근대는 유럽의 자기인식으로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비대칭성으로 말미암아 서양에게 근대란 자기실현이나 동양의 근대는 서양화를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동양의 근대화는 서양에 대한 저항을 동반했다. “저항을 통해 동양은 자신을 근대화했다. 저항의 역사는 근대화의 역사고 저항을 거치지 않는 근대화의 길은 없었다.” 그러나 동양의 저항이 서양이라는 세계인식의 좌표로부터 완전히 이탈하는 저항이었던 것은 아니다. “동양에 대한 유럽의 침입은 동양에서 저항을 낳고 그 저항은 자연스레 유럽으로 반사되었지만, 그조차도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대상화시킬 수 있다는 철저한 합리주의의 신념을 흔들어 놓지 못했다. 저항은 계산 속에 있었고, 저항을 거쳐 동양은 점차 유럽화 할 운명이라고 예견되었다. 동양의 저항은 세계사를 보다 완전하게 만드는 요소에 불과했다.” 분명 동양은 서양화되는 동시에 서양에 저항한다. 그러나 그 저항은 서양의 근대를 보다 완전하게 만드는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이는 헤겔이 자신의 역사철학을 통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가 말해주는 바는 서양중심주의에 대한 섣부른 탄핵은 무위로 그치리라는 사실이다. 힘의 비대칭성이 근원적으로 해소되지 않는 한, 동양은 저항은 패배할 뿐이다.
 
패배에 대한 지속적 자각과 패배에 내재하는 저항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다케우치는 다른 방식의 저항, ‘이차적 저항’을 말한다. 다소 긴 인용이 되겠다.패배는 저항의 결과다. 저항에 의거하지 않는 패배란 없다. 따라서 저항의 지속은 패배감의 지속이다. 유럽은 한 걸음씩 전진하고 동양은 한 걸음씩 후퇴했다. 후퇴는 저항을 수반한 후퇴였다. 이 전진과 후퇴가 유럽에게는 세계사의 진보와 이성의 승리로 인식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지속되는 패배감 속에서 저항을 매개로 하여 동양에 작용했던 때 패배는 결정적이 되었다. 결국 패배는 패배감에서 자각되었다.

패배가 패배감에서 자각되기까지는 어떤 과정이 있었다. 저항의 지속이 그 조건이다. 저항이 없는 곳에서 패배는 일어나지 않으며, 저항은 있되 지속이 없다면 패배감은 자각되지 않는다. 패배는 한 번 뿐이다. 패배라는 한 번뿐인 사실과 자신이 패배한 상태라는 자각은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패배는 패배라는 사실을 잊는 방향으로 자신을 이끌며, … 그 경우 패배감은 당연히 자각되지 않는다. 패배감에 대한 자각은 자신에게 패배한다는 이차적인 패배를 거부하는 이차적인 저항을 통해 일어난다. 여기서 저항은 이중이 된다. 저항은 패배에 대한 저항임과 아울러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것 혹은 패배를 망각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다.

앞서 말했듯이 동양의 근대는 서양에게는 자기인식의 산물이다. 동양은 서양 속에 포함되어 있다. 동양은 서양을 자기 바깥의 상대로 인식하지만, 서양에게 동양은 자기인식의 일부일 따름이다. 따라서 ‘동양 대 서양’이라는 구도는 동양 측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동양의 세계(표상)는 늘 서양의 세계보다 작다. 그렇다면 상대를 대상화될 수 없을 때, 혹은 자신이 상대에게 속해 있는데도 상대에게 저항해야 할 때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제 인용구로 돌아간다면, ‘일차적 저항’은 동양의 의식 상에 존재하는 ‘동양 대 서양’이라는 이분법으로부터 발생하는 저항이다. 그것은 지체를 만회하기 위해 근대화를 꾀하는 저항이며, 서양에게 반사되는 저항이며, 서양에게 승인을 요청하는 저항이며, 서양에게 보이는 저항이다. 그러나 ‘이차적 저항’은 자신이 패배하고 있음을 망각하지 않는 것, 철저하게 패배자, 약자, 노예의 입장을 견지하고 그 한계조건 하에서 시도하는 저항이다. 자신의 한계조건에서 벗어나려는 저항이 아니라 한계조건을 자기 안으로 내재화하는 저항인 것이다. 따라서 동양의 ‘이차적 저항’은 서양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나아가 이 ‘이차적 저항’은 헤겔 변증법의 반(反)이라는 항이 되지도 않는다. 부정이 부정된 항에 대립하여 주체가 정립된다는 의미라면, 이차적 저항은 부정이 아니다. 이차적 저항은 상대와 더불어 자신도 와해시키고자 한다. 즉 이는 서양과 서양을 통해 반사된 자기이미지 사이의 표상관계를 착란에 빠뜨리고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비판하여 얻어지는 자기 동일성마저 거부하고자 하는 저항인 것이다.
 
탈근대를 언명하기 위한 참조점으로서의 다케우치 요시미

그러나 다케우치는 이차적 저항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러한 무기력감을 우리에게 단서로 내어준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저항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저항의 의미를 파고들지 못한다. 나는 철학적 사색에 익숙하지 않다. 그런 것은 저항도 뭣도 아니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하는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단지 거기에서 무언가를 느낄 뿐, 그것을 뽑아내서 논리적으로 조립하지 못한다. … 그리고 그때 루쉰과 만났다. 내가 느끼고 있는 그 공포에 루쉰이 몸을 던져 견디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니, 루쉰의 저항에서 나는 내 마음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얻었다. 내가 저항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저항이란 무엇인가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루쉰에게 있는 그러한 것이라고 답하는 수밖에 없다.”

다케우치는 루쉰을 전근대적 면모를 지닌 채로 근대적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 루쉰을 재차 탈근대적으로 읽어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때의  근대는 근대 이후에 오는 연대기적 시간이 아니다. 서양의 근대는 동양을 전근대로 대상화하여 출발하였고, 동양의 근대는 서양에 패배하며 시작되었다. 패배와 저항으로 출현한 동양의 근대에 탈근대는 늘 감돌고 있었다. 바로 그 탈근대를 언명하는 방법이 여전히 모호한 현재, 「근대란 무엇인가」에서 다케우치가 펼쳐 놓은 사유를 이어받아 구체화시키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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