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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5호] 유재하, 주류와 언더 사이에 움튼 위로의 목소리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2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요절가수 고 유재하. 생전의 그는 엄청난 대중적 파급력을 담보했던 인기가수도 자체 후광이 눈을 멀게 하는 미남도 아니었다. 솔직히 단 한 번도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직접 목도한 대중 또한 거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잘 알지도 본적도 없고 더구나 세상을 떠난 지 23년이나 된 가수의 노래가 왜 지금도 많은 영화 속에 삽입되며 존재가치가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일까?  

23년 전 세상을 떠난 유재하를 지금 우리가 다시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재하는 데뷔음반이 곧 유작앨범이 된 대중가요 사상 유례가 없는 비운의 가수다. 그는 세월이 흐를수록 생존의 아쉬움을 더하는 독특한 가수다. 당시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직접 작사, 작곡, 연주,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에다 편곡까지 능수능란했던 탁월한 음악적 재능과 그가 제시한 기념비적인 음악업적 때문이다. 그가 사망했던 1987년 당시, 가수가 노래 뿐 아니라 작사·작곡 그리고 연주와 편곡까지 혼자 해내는 멀티 플레이어 재능은 모든 음악가들이 꿈꿨던 희망사항이었다. 그럼 점에서 유재하는 모든 음악제작 과정이 분업화되어 있던 당대 대중음악계의 구조적 시스템에 변화를 몰고 온 선구자다.

창작은 고사하고 표절사태로 얼룩져 분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현재의 한국대중음악계에 그의 이 같은 음악적 업적은 왜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지에 대한 명징한 해답일 것이다. 실제로 단 한 장의 음반을 통해 평단과 대중 모두로부터 “생소한 변조와 독특한 코드 진행으로 대중음악 수준을 외국의 팝 이상으로 몇 단계 끌어 올렸다.”는 극찬을 이끌어낸 국내 뮤지션은 전례가 없다. “유재하의 죽음은 한국 발라드가 음악적으로 10년은 후퇴했음을 의미한다.”고 말한 뮤지션 김동률과 "유재하는 나의 등대"라고 고백한 유희열, "한국 가요계에 축복 같은 존재"라고 의미를 전한 빅마마의 말처럼 그의 요절은 한국 대중음악계의 크나 큰 손실이었다.

최루찬 속 순수한 사랑의 속삭임

유재하가 데뷔한 1987년의 한국은 정치사회적으로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던 격동의 시기다. 가왕 조용필의 일인독재가 시작된 80년대 대중음악은 몇 가지 흥미로운 기록을 잉태시켰다. 주류와 언더의 공존이다. 당시는 조동진사단과 록밴드 들국화로 대변되는 언더가수들의 약진과 더불어 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로 대변되는 민중가요도 주류 대중음악계에 지분을 획득했을 정도로 80년대는 음악적 다양성이 담보되었던 한국대중음악 최대의 활황기였다. 특히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토해낸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사계’, ‘마른 잎 다시 살아나’ 같은 민중가요들은 격동기의 시대적 아픔을 담아냈고 당대의 민주화 운동 진영과 일반 대중의 정서적 교감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는 시대적 소임을 다한 명곡으로 각광받았다.

그런 점에서 유재하의 노래들은 완벽하게 이질적이다. 격동의 시대적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지극히 소소한 개인적 감성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재하의 모든 음악은 서울음대를 다녔던 여자 친구와 첫 만남부터 몇 번의 헤어짐 그리고 재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솔직하게 담은 연애일기 즉 사랑노래다. ‘사랑’이라는 소재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각광받는 대중가요의 화두다. 그렇담 단순히 사랑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그가 시간 초월적 뮤지션으로 기억되는 걸까? 절대로 아니다. 비록 대중적 공감대가 큰 사랑을 화두로 삼긴 했지만 그의 노래는 우선 가요의 히트 기반인 통속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그가 제시한 가사쓰기는 천편일률적이고 상투적인 사랑타령에서 빗겨나 개인의 내밀한 감성을 시적인 분위기로 표현한 차별적이고 독보적인 작업이었다. 적어도 유재하 등장 이전까지 사랑노래를 이처럼 순수하고 품격 있게 제시했던 뮤지션은 없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엄청난 반응을 이끌었지만 이제는 장르자체가 희미해진 민중가요와 살아생전엔 아무런 조명을 받지 못하다가 사후에 대중적 각광을 받으며 더욱 더 기억되고 추앙받는 유재하의 극열한 존재감이다. 무엇 때문일까? 표면적으로 ‘남녀상열지사’라는 흔한 소재를 차용했지만 고품격의 서정적 멜로디와 담백한 감성으로 덧칠된 그의 노래는 용광로처럼 타올랐던 당대 대중의 격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치유의 연금술을 발휘했다. 또한 혁명적 구호에 뭍혀 잠시 망각했던 평화로운 일상을 자각시키는 놀라운 마법을 구현했다. 23년 전에 제시된 유재하식 애틋한 사랑의 정서는 이제는 가치가 희석된 사랑의 근원적 의미까지 되묻고 있다.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인스턴트 식으로 수없이 되풀이하는 지금 세상에 그가 노래한 지고지순한 순백의 정서는 돌아가고 싶은 순수의 시대에 대한 대중적 로망으로 작용하고 있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넘쳐나기에 조금은 모자란 듯 착해 보이는 캐릭터가 더욱 더 대중적 호감을 이끌어내고 있는 세상이 아니던가!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의 접점에서


순수함과 더불어 뜨거웠던 그의 음악 열정과 실험정신도 우리 시대가 기억해야 될 미덕이다. 그의 음악적 화두는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크로스오버한 고품격의 팝 발라드였다. 격을 달리했던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 허물기로 새로운 장르를 창조한 그의 선구적 도전정신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좋은 본보기가 될 수밖에 없다. 당시 그의 곡이 기존의 가요와 차별된 외국의 팝송을 능가하는 고급스런 사운드로 들렸던 것은 바이올린, 첼로 등의 현악기와 클라리넷, 플롯, 오보에 관악기까지 다채로운 클래식 악기들을 대중음악에 접목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양대 음대 작곡과를 전공, 클래식의 화성학을 터득하고 갖가지 악기들의 음색을 관할하는 비범한 재능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는 대학 재학 시절에 이미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이 참여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주자로 활약했다. 그는 피아노는 기본이고 바이올린·첼로·기타 등 무수한 악기를 마스터한 멀티 플레이어였다. 순수음악도가 대중가수로 변신한 것은 당시로서는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이 또한 투잡, 쓰리잡으로 각광받는 현재의 멀티 플레이어 시대에 부합되는 선구적 모습이다.

그의 독자적 음악세계와 천재성은 기존 대중가요와 멀찍한 간극을 둔 다양하고 까다로운 화성 구사와 놀라운 음악적 아이디어들이 담긴 노래들에서 쉽게 발견된다. 멜로디는 이전의 방식과 차원을 달리했다. 사실 처음 듣는 유재하의 선율 패턴은 당대 음악 관계자들마저도 “가수의 노래가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였을 만큼 생경한 사운드였다. 하지만 그 것은 국내 대중음악의 새로운 시작이자 도약이었다. 데뷔음반이자 유작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는 발표 당시 일부 음악 마니아들의 호평이 있긴 했지만 반년이 지나면서 사장될 운명의 음반이었다. 앨범이 나온 지 반년의 시간이 지난 운명의 11월 1일,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그는 대중음악의 전설로 비상했다. 비로소 그의 존재를 알게 된 대중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멜로디와 모양새의 대중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 그의 천재적 음악성을 기리기 위해 뜻있는 음악인들이 ‘유재하 가요제’를 만들어 대학생 창작자들을 인큐베이션하기 시작했다.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가장 권위 있는 신인 창작자들의 등용문으로 자리 잡은 ‘유재하 음악경연대회’가 그것이다.  1989년 1회 대회 금상수상자인 조규찬을 비롯해 유희열, 고찬용, 오소영, 정혜선, 임주연, 스윗소로우, 노리플라이등은 모두 이곳을 통해 배출된 탁월한 아티스트들이다. 유재하의 음악은 사후에 더욱 주목받으며 시대 초월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가 후배가수들에게 얼마나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뮤지션인가는 발라드의 황제 신승훈이 자신의 데뷔 20주년 앨범을 유재하의 기일인 11월 1일에 발매한 사실에서 입증된다.

음악적 자주성의 실현

유재하의 음악은 지금도 끊임없이 대중문화 각 장르의 중요 소재로 각광받고 있다. 11월이 되면 하루 종일 그의 음악이 라디오를 통해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막 개봉한 영화 <맛있는 인생>에 삽입된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과 더불어 각종 TV프로그램과 언론의 기사를 통해 그의 가치는 확장되고 있다. 지금도 그의 창작 작업이 재조명되는 이유는 창작이 실종된 카피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가 지금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노래는 범람하지만 위로의 기능을 발휘하는 따뜻하고 서정적인 노래가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늘 외롭다. 체질화된 사회적 경쟁 시스템은 우리를 쉬 지치게 만든다. 급속도로 디지털화된 세상은 편리함을 안겨주긴 했지만 사람들을 오히려 더욱 바쁘게 만들었고 여유로운 삶을 강탈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중독적인 후크와 자극적인 댄스 그리고 섹시 비주얼이 강조된 노래가 판치는 요즘 한국대중가요계의 트렌드는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바쁘고 경쟁에 지친 지금의 대중에겐 휴식과 위로를 안겨줄 유재하와 같은 감성적이고 서정적 노래가 절실하다.

국내 대중음악 사상 처음으로 음악적 자주의 실현이라는 혁명적 분기점을 제시하며 후대 뮤지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유재하의 유일한 정규앨범은 80년대 최고의 명반으로 추앙받고 있다. 유재하는 선구적인 실험정신과 깊은 울림을 유지하는 고품격의 창작음악을 우리에게 선물한 위대한 뮤지션이다. 그가 왜 지금도 우리에게 기억되는지에 대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