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4. 6. 18. 17:23

요시모토 바나나의 상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사유

『죽음 보다 깊은 잠(白河夜船)』


김용안_한양여자대학교 일본어과 교수


요시모토 바나나는 시인이자 평론가인 아버지 요시모토 타카아키(吉本隆明)와 만화가인 언니 하루노 요이코(ハルノ宵子)를 둔,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문필가 집안 태생이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 시대의 흐름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재능, 감동을 받아도 순간적으로 분석의 시선을 가질 수 있는 힘 등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고 밝히고 있으며 1988년과 1989년 사이에 쓴 5개의 소설이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는 진기록을 세우며 이른바 <바나나현상>・<바나나신드롬>을 일으켰다. 인기의 배경에는 당시 젊은 여성 독자들에게 만연된 고독과 방황, 위무 받고 싶은 소망에 바나나 소설이 복음의 문학으로 어필했던 것이다. 집필하던 당시에는 작가 자신도 실연과 어머니의 입원이 겹쳐 인생이 고통 그 자체였지만 "의식 밖으로 고통을 밀어내는데 집중하자"는 일념으로 이겨냈으며 이런 용기와 건강함은 바나나문학의 일관된 주제로 정착되면서 독자에게는 치유의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소설 『죽음보다 깊은 잠(白河夜船)』에는 주인공인 테라코(寺子)와 그녀의 애인 이와나가(岩永)가 등장하며 이와나가에게는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인 채로 누워있는 부인이 있다. 그리고 테라코의 절친한 친구인 시오리는 곁잠으로 상대방 마음속의 혼돈을 빨아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그녀는 악몽의 중압감으로 자살하고 만다. 둘도 없는 친한 친구의 죽음으로 악전고투하던 테라코는 이와나가의 부인과 같은 죽음보다 깊은 잠에 수시로 빠지곤 한다. 어느 날 꿈속에서 고교생 소녀가 나타나 빨리 수족을 움직일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하도록 간절한 제안을 하는데 결국 제안대로 온갖 고통을 무릅쓰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몸과 마음이 회복되고 꿈에 나타난 소녀가 이와나가 부인의 환영이었음을 직감한다.




「백하야선(白河夜船)」

「백하야선(白河夜船)」이란 제목이 앞뒤 분간하지 못할 만큼의 <죽음보다 깊은 잠>이란 의미의 일본식 4자 성어이긴 하지만 글자 그대로 직역하면 <흰 강 위에 떠있는 밤 배>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구체적인 실상이면서 동시에 몽환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그곳에는 시간의 진행만이 느껴질 뿐 그 어떤 지향도 느낄 수가 없다. 그것은 바로 미래가 종적을 감춘 채, 현재시제만 존재하는 주인공 테라고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생물학자 폴 마틴(Paul Martin)은 "인간의 삶의 1/3이 잠으로 채워지는 것에 비해 인간의 저술 대부분에는 잠에 대해 별로 언급이 없을뿐더러 문학에서도 불면증이나 악몽만이 크게 부각되는 것만 보아도 인간이 얼마나 잠을 무시하는지 알 수 있다"고 했지만 이 작품은 그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으며 인간의 잠을 성찰하고 거기서 얻어진 다양한 결을 작품 속에 상감하고 있다

하라 마스미(原マスミ)는 "이 지상에서 빛으로 넘치는 오후라는 시간대도 우주라는 광대한 밤하늘 속에서는 너무나 국지적인 사상(事象)이고 우리들이 멋대로 「낮」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고 있는 「볕이 잘 드는 밤」인 것이지만 그런 광활한 우주공간에서조차 개인의 영혼의 존재를 엄연하고 단단한 점(点)이라는 사실에 천착하여 존재=고독이라는 의미를 명료하게 조각해내고 있다"고 이 작품을 평가하고 있다.


잠의 효용성과 무용성

이 소설에서는 테라코의 이별의 슬픔으로 가장 견디기 어려운 순간에 그녀를 데리고 홀연히 사라져준 잠의 효용성에 대한 감사의 묘사가 있는가 하면 "굴욕과 비슷한 묵직한 후회 속에 나는 오싹해진다. 언제부터 잠에 몸을 내팽개친 것인가?"라는 테라코의 푸념에서는 잠의 무용성에 대한 탄식이 읽혀진다. 하긴 잠만큼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없다. 좀 전까지 그토록 치열하고, 정열적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 잠깐 동안의 유예기간을 거쳐 죽은 듯이 누워있거나 유치한 잠꼬대를 하면서 몇 시간을 날리는 것이 잠이라는 사건이니 말이다. 아무튼 감수성의 과잉과 의지의 박약함으로 수렴되는 주인공의 극단적인 불균형상태는 잠에 대한 인식도 찬가이든 환멸이든 극단을 치달을 수밖에 없다.


자연적인 잠과 관습적인 잠의 사이

"잠이란 졸릴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것이 인간의 원초적인 잠"이라는 폴 마틴의 주장이 이 소설에서는, "샤워처럼 햇살이 쏟아지는 방안에서 옷을 개며 꾸벅꾸벅 졸다가 스커트를 벗고 미끄러지듯이 침대로 갔다"는 주인공의 자연적인 잠으로 실현되고 있다. 이런 잠 속에서는 완전한 사랑을 보장받을 수 있다. "왠지 그를 통해서 거대한 밤과 자고 있다는 느낌이다. 말이 없는 만큼 그 본인보다도 더욱 깊은 곳에 존재하는 그와 완전하게 포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테라코의 감성에서 자연적인 잠과 그것을 포용하는 거대한 밤과 그 깊은 곳에 보장되는 은밀함 속에서 오롯이 그를 향유하는 모습이 읽혀진다.

윌리엄 데먼트는 "지금 인류는 전 세계적으로 피곤에 절어 있으며 현대의 선진국 사람들은 1세기전보다 평균 1시간 반이나 잠을 덜자며 따라서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25~30시간 정도 누적된 수면 부족 시간을 떠안고 살아간다."고 추정한다. 결국 소설의 위 장면의 행간에는 삶의 틀에 육체를 맞추는 관습적인 잠이 아니라 삶의 틀을 육체에 맞추는 자연적인 잠이 진정한 잠이라는 작가의 소망이 배어있는 것이다.


잠의 오컬트적 변주

이 소설의 압권은 바로 이 부분에 있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바나나 류의 텍스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생활 속에서 가장 개별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역시 잠일 것이다. "깨어 있을 땐 모두가 평범한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지만, 잠을 잘 땐 각자 자기만의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라는 폴 마틴이 언설에 대해 바나나는 함께 공유하는 곁잠이라는 형태 제시로 이 언설을 단박에 뒤집는다. 테라코의 둘도 없는 친구인 시오리가 손님과 함께 자는 기묘한 아르바이트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흔한 섹스관계가 아니라 그 손님들 곁에서 그냥 자기만 하면 되는 그런 일이다.

곁잠을 자는 동안 옆에 잠든 사람을 스캔하듯 그 사람의 혼돈을 원형 그대로 흡입한다는 작가의 발상은 곧 바나나 문학다운 새로운 잠의 발견이며 미답의 영토로 향하는 돌파구이다. 이런 바나나 문학의 독특한 선율의 원천은 바로 오컬티즘이고 이것은 작가의 공상 세계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작가는 소설가가 된 동기가 "어릴 적부터 왕성했던 공상의 세계에서의 리얼리티"고 밝히고 있으며 일상속의 비일상에서도 진실성을 느꼈다고 증언하고 있다.

영매(靈媒)로 비가시적인 세계에서의 신비한 체험을 통해 인간과 영혼세계가 교통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뉴에이저의 생각을 마치 대변하는듯한 테라코에게서 잠과 꿈은 비가시적인 세계와 교통하는 환경이자 매개체이다.

"몸이 편찮으십니까?"귓전에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옆에 앉아서 나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청바지를 입은 고교생인 듯한 여자아이였다. 상당히 먼 곳에 시선을 던지고 있는 듯한, 수정같은 매우 크고 신비에 싸인 눈동자였다. (중략) 그 여자에게는 주위와 어울리지 않는 위화감 같은 이상한 분위기가 있었다. 긴 머리를 어깨에 살랑살랑 늘어뜨린 굉장히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새벽녘에 빈 공원에서 잠든 테라코에게 환영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지금 사랑하고 있는 남자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현재 식물인간 형태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결국은 잠이라는 회로를 통해서 남편의 부인이 테라코에 접근하여 그녀를 지배・소통하게 된다. 남편의 부인은 환영에서 아르바이트를 권유하고 실제로 테라코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며 그것을 통해 소생을 얻는다. 바나나문학의 오컬트의 세계이며 뉴에이지적인 발상인 것이다.

내 속에는 어느 사이엔가 건강한 마음이 재생되어 오는 것처럼 느꼈다. (중략)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잠이 공평하고 평안하기를―

친구의 죽음과 자포자기에 빠진 주인공의 절망이라는 무거운 소재가 긍정과 희망과 환희로 결실을 맺는 작품 결말의 이면에는 「죽음보다 깊은 잠」이 작용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본 소설은 현대라는 시대가 무시하거나 가치를 소홀히 해온 잠의 가능성과 꿈과 환영의 유용성에 대해 작가가 갖고 있는 기존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복음 문학 작품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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