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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30호] '동일하지만 다른' 죽음

 

동일하지만 다른죽음

 

이용범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교수

 

 

죽음이 발생했을 때 죽음을 어떻게 수용하고 처리하는가?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죽음의례에 의존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도 여러 죽음의례가 존재한다.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죽음의례로 자리잡은 유교 상장례를 비롯해서 49재와 같은 불교의 천도재가 있으며, 근대 이후에는 그리스도교나 신종교에 의해 거행되는 죽음의례도 나타난다.

이와 함께 빠트릴 수 없는 것이 무속 죽음의례이다. 무속 죽음의례는 오랜 시간 한국사회에서 유교와 불교 등 타종교의 죽음의례와 함께 죽음의례 가운데 하나로 기능해왔다. 이런 점에서, 무속은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죽음의례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한국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무속 죽음의례가 어떻게 하나의 죽음의례로서 그 존재와 역할을 지속해 올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긴 세월 한국인의 삶과 함께 해 온 만큼 한국무속의 죽음의례에는 자연스럽게 한국인의 전통적인 죽음의 모습이 담겨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전통성이 그것을 존속시킨 힘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전통성만으로는 역시 전통적인 유교, 불교의 죽음의례와의 관계 속에서 무속 죽음의례가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이나 이유를 확인하긴 어렵다.

이 글은 무속 죽음의례가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죽음이해를 공유하면서도 그 나름의 독자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까닭으로 음사, 미신으로 폄하되면서도 죽음의례의 하나로 기능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이 글은 무속 죽음의례와 거기에 담긴 죽음이해를 통해 이를 확인하고자 한다.

 

무속 죽음의례의 유형과 의례과정의 특징

한국무속에서 행해지는 무속 죽음의례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죽음의례의 유형만을 본다면, 무속 죽음의례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포괄적인 죽음의례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유형의 죽음이나 어떤 성격의 죽음도 감당할 수 있는 다양한 죽음의례를 갖추고 있다.

한국무속에서는 동일한 죽음이라도 죽음 발생 이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느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이는 무속 죽음의례의 유형을 통해서 확인된다. 죽음 발생 이후 경과된 시간에 따라 죽음의례의 절차가 달라진다. 예컨대, 서울지역의 경우, 갓 죽은 사람을 위한 진진오기굿과 죽음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죽은 자를 위한 ‘(마른) 진오기굿이 구분된다. 당연히 굿 절차에도 차이가 있다. 이는 다른 지역 무속 죽음의례도 마찬가지이다.

죽음 발생 이후 시간에 따라 이른바 굿과 마른굿이 구분되는 것은, 한국무속에 죽음 발생 이후 시간에 따라 죽음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관념이 존재함을 말해준다. 죽음의 성격이 달라지는 것으로 판단되는 시점은 대체로 사후 49일이나 100, 또는 3년 등으로, 넓은 의미의 탈상(脫喪)’이 기준이 된다.

무속 죽음의례가 49, 100, 3년 등의 시간의 경과에 따라 진 굿과 마른 굿으로 나뉘는 것은 한국의 전통 상장례에서 설정하는 과도기 개념과 연결된다. 전통 상장례에서 죽은 자는 숨이 끊기는 생물학적 죽음과 함께 곧바로 기존 조상의 반열에 들지 못한다. 과도기를 통과해서 탈상을 거쳐야만 비로소 조상의 세계에 들어간다. 과도기를 거쳤는가의 여부에 따라, 똑같이 죽은 자이지만 서로 다른 존재로 파악되는 것이다. 무속 죽음의례 역시 이처럼 동일하지만 다른죽음의 개념을 전제한다.

 

정상적 죽음과 비정상적 죽음

무속 죽음의례는 이른바 정상적인 죽음과 비정상적인 죽음인가의 여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무속에서 정상적인 죽음과 비정상적인 죽음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은 죽은 자의 인격이나 업적, 사회에 대한 기여 등 생전의 삶이 아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거쳐야하는 통과의례를 통과했는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등 넓은 의미의 죽음의 방식이 죽음의 성격을 결정한다. 당연히 두 죽음에 대한 무속 죽음의례는 다르다. 이처럼 무속 죽음의례가 자연스런 정상적인 죽음과 비정상적인 죽음을 구분하는 것은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관념과 다르지 않다.

무속의례의 기본 특징의 하나는 무당의 신내림을 매개로 신, 죽은 자, 인간이 직접적인 만남과 소통을 갖는다는 점이다. 반면 유교나 불교의례에서는 신이나 죽은 자의 구체적인 현현(顯現)을 통한 인간과의 직접적인 소통이 나타나지 않고, 간접적이고 상징적인 만남이 나타난다. 이러한 무속의례의 특징은 무속 죽음의례에도 잘 나타난다. 특히 무속 죽음의례에서는 죽은 자와의 직접적인 대화가 두드러진다. 이는 전국적인 현상으로, 죽은 자의 이야기를 듣는 의례과정은 한국무속 죽음의례의 구조적 요소의 하나이다.

한 사람이 죽었을 때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어떤 죽음도, 아무리 밝고 행복한 죽음일지라도,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직접적인 의사소통의 바램을 해소하진 못한다. 안타깝고 아쉽지 않은 죽음은 없다는 점에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직접적인 의사소통의 욕구는 자연스럽고 일반적이다. 무속 죽음의례에 나타나는, 무당을 통한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는 이런 자연스런 욕구를 충족시키는 의례 메카니즘이다.

무속 죽음의례에 나타나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직접적인 만남과 대화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먼저 그것은 죽은 자의 존재 변화를 수용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죽음이 발생했을 때 죽은 자나 산 자 모두 죽음을 당연한 현실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죽은 자를 현실로 불러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는 의례과정은 죽음으로 인한 심리적 상처와 불안을 치유하고, 죽음을 정리하며, 결과적으로 죽음을 현실로 수용토록 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는 불교나 유교의 상징적이고 형식화된 의례행위보다 무속의 죽은 자와의 산자의 직접적인 만남과 대화가 더 효과적이다. 이런 점에서 무속은 대화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직접적인 만남과 대화가 갖는 또 다른 의미는 바로 죽음의 개별성과 특수성의 확인이다. 죽은 자의 자기 이야기,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를 통해 죽은 자가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았으며, 그의 죽음은 어떤 죽음인가가 말해진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한 개인이 맞이한 죽음의 개별성과 특수성이 확인된다.

무속에서 인간의 죽음은 동질적이지 않다.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지만, 어떤 죽음도 동일하지 않다. 성격이 다른 복수의 죽음이 존재할 뿐이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점에선 동일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 유일한 존재로서 나름의 개성을 갖듯, 어떤 죽음도 나름의 개별성과 특수성을 갖는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는 개개 죽음의 개별성과 특수성을 드러내는 의례적 구조를 보여준다.

반면에 유교, 불교 죽음의례에서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누구의 죽음이든 어떤 죽음이든 일반적인 죽음의례 절차의 표준화된 체계를 통해 양식화됨으로써 죽음의 개별성이 사라진다. 표준화와 양식화를 통해 개개 죽음의 개별성과 특수성이 사라진다.

죽음의 개별성과 특수성의 확인은, 자연스럽게 죽은 자의 삶과 존재의 개별성, 고유성의 인정과 확인으로 연결된다. 인간이면 누구나 자기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한다. 이러한 보편적 전재 확인의 욕구 또한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로 충족된다.

 

몸과 넋을 가진 존재에서 넋과 혼의 존재로

무속의 죽음의례를 통해 무속의 죽음이해의 여러 측면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무속은 인간의 죽음을 동일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는 무속에 여러 유형의 죽음의례가 존재함을 통해 확인된다. 인간의 죽음이 동일하다면 죽음에 따라 여러 유형의 죽음의례가 존재할 수 없다. 무속에 여러 유형의 죽음의례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의 죽음은 단일하거나 동질적인 것이 아니고 성격이 서로 다른 여러 죽음이 존재함을 전제한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인간의 죽음은 동질적이다. 이처럼 인간의 죽음에 차별성을 부여하는 것은, 무속이 인간의 죽음을 생물학적 견지에서 바라보지 않음을 말해준다. 이런 점에서 무속은 동일하지만 다른 죽음이란 죽음이해를 갖고 있다.

또한 한국무속에서 죽음이란 한 사람의 존재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가 변화하는 것이다. 무속에서 죽음이란 이승의 존재에서 저승의 존재로 변화하는 것이다. 무속 죽음의례에는 죽음이란 존재가 변화하여 저승의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보여주고 확인하거나, 죽은 자의 존재변화를 가능케 해 죽음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의례 절차가 두드러진다.

죽은 자의 존재변화를 확인하는 의례 절차의 예로, 말미 후 세발 심지 태워 흔적보기(서울 진오기굿), 오구가루 보기(전라도 씻김굿), 영가루치기(제주도 무혼굿), 넋일굼(동해안 오구굿), 넋올리기(전라도 씻김굿), 맑은 혼 모시기(황해도 진오기굿) 등이 있다.

말미 후 세발 심지 태워 흔적보기, 오구가루 보기는 바리공주 신화를 구송하고 나서 죽은 사람이 어떤 존재로 환생했는가를 확인하는 절차이다. 영가루치기 역시 굿이 다 끝난 후에 쌀가루 위에 남은 흔적으로 죽은 사람의 환생을 확인하는 것이다. 넋일굼이나 넋올리기는 죽은 자를 상징하는 신체에서 넋만을 분리해 들어 올림으로써 죽은 자가 몸과 넋을 가진 존재에서 ‘(몸이 없는) 넋을 가진 존재로 변화되었음을 확인한다. 맑은 혼 모시기 역시 대내림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다 말한 죽은 자가 맑은 혼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존재, 즉 저승의 존재로 바뀌어서 자기 가족들과 다시 대면하는 절차이다. 이런 굿 절차들은 죽은 자가 몸과 넋을 가진 이승의 존재에서 넋의 존재, 혼의 존재로 변화되었음을 알리고 확인하는 의미를 갖는다.

 

 

 

 서울 진오기굿, 세발 심지 태워 흔적보기 (출처: 김수남기념사업회)         

 

  전라도 씻김굿(출처: 김수남기념사업회)

 

 제주도 무혼굿 (출처: 김수남기념사업회)

 

 

 

이승의 흔적을 씻어내다

무속 죽음의례에는 단지 죽은 자의 존재변화를 확인하는데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죽은 자의 존재를 변화시키는 기능을 하는 의례 절차도 있다. 예컨대 전라도 씻김굿의 고풀이와 씻김의 절차는 얽히고설킨 이승의 삶에 대한 미련과 한을 풀어내고 이승의 흔적을 씻어냄으로써, 죽은 자를 이승의 존재와는 다른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킨다.

한국무속의 죽음의례에서 죽은 자를 이승의 존재에서 저승의 존재로 변화시키는 핵심적인 절차는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이다. 죽은 자의 존재변화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죽은 자가 자신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 들여야만 한다. 죽음이 발생했을 때 죽은 자나 살아있는 가족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는 죽음을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특히 죽은 자는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며, 저승의 세계로 떠나는 것을 주저한다. 이때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이다. 대화는 무당의 신내림 또는 대내림 같은 의례적 장치를 통해 죽은 자가 자신의 심정을 말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죽은 자의 존재변화를 확인하고 죽은 자를 산 자의 세계인 이승에서 죽은 자의 세계인 저승으로 전이(轉移)시키는 것이 죽음의례의 일반적 과정이라고 할 때, 무속의 죽음의례는 바로 죽은 자와 산 자의 직접적인 만남과 대화라는 의례장치를 중심으로 죽은 자의 존재변화를 확인한다. 한편 죽은 자가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게 되는 산 자와의 대화에서, 죽은 자의 대화 상대는 그의 가족이다. 이는 죽은 자의 존재변화에서 가족의 중요성을 확인시켜준다.

무속에는 죽음 이후에도 죽은 자가 여전히 살아있는 가족들과 관계를 맺으며 생전의 사회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죽은 조상이 한국 무속의례의 신()의 하나로 자리잡고, 조상을 대상으로 한 의례절차인 조상거리에서 생전의 모습으로 등장해 가족들과 커뮤니케이션을 갖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무속 죽음의례에서도 조상들은 조상거리를 통해 등장해 가족들을 위로하며, 보살핌과 도움을 약속하고, 아울러 이제 막 저승길에 오를 갓 죽은 자를 저승으로 잘 인도해주겠다고 한다.

무속에서 죽은 조상이 살아있는 가족과 커뮤니케이션을 갖는 것이 일반적 의례 절차의 하나라는 것은, 죽음 후에도 가족관계가 깨지지 않고 지속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죽음 이후에 가족관계가 지속된다는 믿음이 없다면 무속의례에서 조상을 모시는 절차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이는 가족이라는 혈연관계는 죽음에 의해 단절되지 않고 지속된다는 관념을 전제하는 것으로, 죽은 자는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생전의 가족관계의 맥락에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함을 말해준다.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무속 죽음의례에서 조상은 갓 죽은 자보다 먼저 모셔지고, 저승에 먼저 가서 살고 있는 가족으로서 이제 갓 죽어 저승길을 모르는 죽은 자에게 저승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가족관계를 중심으로 본다면, 한국무속에서 죽음은 다름 아닌 이승의 가족에서 저승의 가족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한국무속에서는 죽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가족관계는 해체되지 않고 여전히 유지된다. ‘이승의 가족저승의 가족사이에는 단절이 없다. 이승의 삶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미련을 가질 필요도 없다.

따라서 무속에서 죽음은 가족 밖의 사건이 아니라 가족 안의 사건이다. 이는 이승은 물론 저승에서도 지속되는 가족관계를 통해 죽음의 슬픔, 미련, 아쉬움을 극복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간 삶의 근본 위기였던 죽음의 문제가 가족관계를 통해서 해소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무속에서는 이승의 삶이 가족과 함께하는 삶인 것처럼, 죽음 역시 외로운 개인적인 죽음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하는 죽음이다. 이승의 삶이 가족관계에 기초하는 것처럼 죽음 후의 삶 역시 그렇다. 따라서 죽음 이후에 죽은 자의 존재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가족관계이다.

 

한국사회에서 무속 죽음의례는 한국사회의 죽음의례 중 하나로 자리잡고 전승되어 왔다. 이는 무속 죽음의례가 한국사회 일반의 전통적 죽음이해를 공유하면서도 유교, 불교 죽음의례가 제공하지 못하는 그 나름의 특수한 기능을 담당해왔기 때문이다.

무속의 죽음의례는 무당의 신내림을 매개로 죽은 자와의 직접적인 대화, 그것을 통한 죽은 자와의 화해 및 죽은 자의 존재의 개별성을 확인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죽음이 발생했을 때, 죽은 자와 다시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것은 죽음이 불러 일으키는 근원적인 욕구의 하나이다. 무속 죽음의례는 그런 욕구 충족의 통로로 기능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은 유교, 불교의 죽음의례가 제공할 수 없는 것이고, 이런 맥락에서 무속 죽음의례가 현대사회에서도 충분히 존속할 수 있는 가능성과 존재 의의를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