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4 18:37

『추방과 탈주』의 저자 고병권을 만나다

『추방과 탈주』의 저자 고병권을 만나 현 한국 사회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길 위에서 함께 배움을 청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탈주에 대한 구체적 실천 지점을 함께 사유해 보고자 한다.


이 책은 어떤 계기로 쓰게 되셨나요? 제목이 많은 말을 하는 것 같은데요.

사실 이 제목은 2006년 가을쯤에 결정된 제목이니까 책으로는 2년 반 만에 나오게 되었네요. 원고는 매번 필요할 때마다 쓴 것이라서 사실 2년 반 동안 연구했다는 것은 거짓말이고요.(웃음) 책 앞에 썼지만 2006년 초반에 우리사회에 있었던 새만금 문제, 대출이 미군기지 건설, 노대통령의 한미 FTA선언 등을 보고 뭔가를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그래서 그냥 걷자는 제안을 했는데,기왕 걸을 거면 좀 멀리 걷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근데 걸어보자는 이야기를 할 때 어떤 뉘앙스가 있었냐하면 한편에서는 참을 수 없으니까 뛰쳐나가는 측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 자신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알고는 있는 건가에 대한 생각이 들어서기도 해요. 한 2주 정도 걸으면서 지역 사람들과 매일토론회나 세미나를 열고 다시 걷고, 동네에 도착하면 세미나하고 걷고 하면서 매일 세미나를 열었어요. 그 와중에 이 책에 있는 첫 번째 원고, 국가의 추방하고 대중의 탈주를 떠올린 거예요. 2006년 4월에.

안산에서 만났던 이주 노동자들, 개화도에서 만난 어민들, 산에서 만난 농민들, 미군기지가 들어설 대추리에서 만난 주민들, 미군폭격지가 있는 매향리에서 만난 사람들.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있어요. 정치라는 것이 일종의 언어문제이기도 하거든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동물로서의 목소리(음향)가 언어(로고스)로 변해가는 것이 폴리스인데, 이 사람들은 정말 목소리로 존재하는구나 이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른바 여론을 매개하거나 정치적 의사를 매개하거나 운동을 매개하는 모든 기구들이 작동하지 않거나 혹은 이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있었던 거죠. 자기목소리를 전달할 통로가 없을 때, 초대 받지도 않고 자격도 없는 사람이 말하려고 끼어드는 게 난입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첫 번째 글엔 그런 뉘앙스로‘탈주’를 썼는데, 솔직히 이때 탈주의 의미는 뭔가 약간 좀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어요. 매개가 작동하지 않을 때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는, 어떻게 보면 불가피하게 강제되는 부분인 거지요.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느낌도 들었거든요.‘탈주’라는 것의 다른 가능성이랄까? 우리의 삶이 돈이나 권리로 환원되기 이전의, 일종의 백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질서로 다시 구축될 수 있을까.


추방됨과 탈주함의 복합적 작동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지금은 삶이 이루어지는 어떤 관계망이 붕괴되어 버렸어요. 개화도에서 바다를 막으면서 붕괴된 것은 사실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거든요. 이젠 돈이랑 매개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도시나 농촌이나 마찬가지죠. 어떤 의미에서 관계망의 붕괴는 한 개인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 불안을 조성하거든요. 모든 책임에 개인에게 귀속되고 개인은 극도로 고립화 되지요. 어부 한분이 저한테 지나가면서 슬쩍 말했어요. 왜 농사를 짓는지 물었더니 우리는 악착같이 살아야한다고, 그때 얼핏하는 말이 농부가 돼서라도 어부가 돼야 한다고. 그 말이 저한텐 굉장히 세게 와 닿았어요. 삶을 계속 확장시키려는, 다시 구축해 나가려고 하는 노력이 있잖아요. 어부가 어부이려면 농부라도 돼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야 하니까 악착같이 버텨야한다고. 그런 가능성 속에서 새로운 삶의 구축이라고 그럴까요? 극히 어렵고 낮은 가능성이지만 그런 힘들을 봤거든요. 탈주가 갖는 굉장히 중요한 가능성이라는 느낌, 복원 돼야할 것이 뭐고 창조 돼야할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됐지요.

두 종류의 탈주가 있어요. 하나는 불가피한 형식. 작년인가? 홍세화 선생이 어떤 칼럼에서 우린 어떤 아노미를 강요받고 있다고 썼어요. 그런데 정말 맞아요. 어떤 적대적 실천으로써가 아니라 불가피한 실천으로써의 탈주들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긍정적 형식의 탈주가 있어요. 이렇게 내쳐진 김에 오히려 뭔가 새로운 실험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추방, 그것은 지난 십여 년간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일을 말해준다. 탈주,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의 전조이다. 길 위의 무수한 대중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느가' 에 대한 증언이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에 대한 예언이다. 아직은 웅성거림이고 아직은 머뭇거림이지만, 소삭임의 말들은 급속히 처져나가고 있다. 그러나 여러 말들이 갑자기 하나의 언어로 짜이는 순간이 올지 모른다. 그때 대중은 더이상 속삭이지 않고 명확한 언어로 말할 것이다. 이제 때가 되었다고"


현재의 정치체제에서 어떤 방식의 탈주가 가능한가요?

저는 이제 최장집과 백낙청 선생의 문제틀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고 생각 합니다. 우리가 좀 더 성숙한 민주주의를 가져야 할 문제인가 아니면 이제 다른 민주주의가 필요한 것인가에서 전 약간 후자 쪽으로 기울어 있어요. 어떤 참된 민주주의 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80년대의민주주의가 있었고 이젠 다른 민주주의가 필요한 게 아닌가하는 거죠. 기존 민주주의의 심화∙확장∙발전 이라는 틀이 아니라요. 가령 이주노동자에 대한 예를 봐도 알 수있어요. 최장집 선생은 민주주의를 정당이 다수의 이해에 호응하려고 노력하고 서로 정책 경쟁을 하는 체제라고 정의하시는데, 그 속에서 배재되는 소수자들은요? 공론장이라는 영역은 상식과 통념이 지배하는 영역이에요. 그런데 거기서 배재를 경험하는 사람, 즉 대의 과정에서 대의라는 형식 자체가 배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가령 여기서 삶을 살아가는 이주노동자는 이 삶에 대한 결정권을 가질 수 없거든요. 시민권을 안 갖고 있어서요. 다시 말해 민주화 과정이 다른 한편으로 배재가 공고화되는 과정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투표권주고 대표를 뽑으라고 하면 풀 수 있는 문제인가에 대해선 회의적이에요. 이주노동자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전혀 상반되는 질문을 던지는 거지요. 기존의 민주주의를 확대 심화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다른 민주주의를 상상할 수 없는가하는 문제 말이에요.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뭔가라는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질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대표적인 두 분을 상정하고 말했지만 좀 더 넓게 보면 80년대 민주화 운동이 이제는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되어
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지점이 있나요?


탈주를 정의하는 맥락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간에 낯설어 지는 것이 필요해요. 국가에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을 불안해하는 대중이 있고 그 대중을 불안해하는 권력이 있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굉장히 낯설어지고 있죠. 그런데 권력은 그 낯설음을 깨서 투명하게 만들려고 하는 대낮에 대한 열망이 있다고 할까요? 환하게 봐야겠다. 복면 같은걸 벗겨서 어떤 놈인지 봐야겠다고 하는 욕망이 있죠. 그러나 역설적으로 대중은 더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어요. 추방되고 배재되니까 자기를 설명할 틀과 언어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웅성거림 속으로 계속 밀려나는데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만약에 탈주의 어떤 실천적인 지점을 상상할 수 있다면 이러한 상황을 더 가속시킬 필요가 있다는 거죠. 익명성을 더 강화해야 된다는 겁니다. 서구철학에서는 익명성을 자꾸 어디 숨는 거나 감추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대중에 휩쓸리는 건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고, 개인의 얼굴이야말로 진정한 얼굴이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대중이란 존재가 있다면 그의 얼굴은 참 익명적일 거라고 생각해요. 익명성은 감춤의 양식이 아니라 드러남의 양식이거든요. 뭔가드러나는 거. 그래서 대중이 하나의 힘으로 작동할 때, 가령 미네르바가 대중의 얼굴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복면을 벗겨보니까 전문대 졸업생이니 뭐니 하면서 변변치 못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복면을 벗김으로써 밝혀낸 건 실체가 아니라 대중의 힘을 잃은 한 사람의 얼굴에 불과하거든요.


익명의 얼굴이 어떤 정치적 효과를 가질 수 있나요?

저는 대중들이 더 노골적으로 복면을 써야하고 더 익명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국가나 기업에 확실히 파악되지 않는 말이나 삶의 여지가 더 있어야한다는 거죠. 은밀한 네트워크, 더 은밀해지고 밖으로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곧바로 간파되지 않는 것 말이죠. 예전에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왜 미군이 베트남전에서 패배했을까. 베트남 사람들이 너무 은밀했다는 겁니다. 저 꼬마아이가 베트콩에 미군들 위치를 알려주러 가는지 그냥 어린애인지 알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실제로 아이들 중에 그런 아이들이 있었거든요. 구부정하게 걸어가는 노인네가 스파이인지 아닌지 모르잖아요. 그런 경우에 권력은 굉장한 불안을 느끼는데 가장 두려워한 건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죠. 여기서는 하나의 정책밖에 없어요. 몰살. 그래서 미군들은 인민을 다 몰살해 버렸다는거예요. 모르겠으면 죽여 버리면 확실하니까. 그런데 그것이 결국 미군이 승리할 수 없었던 이유에요. 은밀하게된 대중을 이겨낼 수 없다는 거지요. 힘이 없는 사람이 자기를 말해야할 때 전 얼굴을 가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해요. 칸트의 예를 들면, 친구가 집에 숨었을 때 경찰이 친구가 집에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진실을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말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가하는 겁니다. 민주주의는 말하지 않을 권리, 거짓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감출 권리,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 내가 내 신체 부위를 가릴 권리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민주주의 아닌가요. 대중들은 더 은밀해져야하고 삶의 다른 여지들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은밀하다는 게 꼭 반체제적이라는 게 아니라 국가권력이나 자본에 투명하게 노출되지 않는것이거든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봐요.


오히려 법은 익명성을 금지하는 방향으로 제정되고 있잖아요.

최근에 한국 민주주의가 법치주의로 흡수되는 느낌이 있어요. 법 안 지키는 사람들은 민주주의 사회에 살 자격이 없다는 거지요. 마치 민주주의가 법치주의인 양. 그래서 지금 민주주의가 법과 제도의 형식인지 아니면 삶의 양식인지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은 거예요. 어떤 문제가 법으로 제정되지 않았으면 막 싸울 수 있는데, 일단 국회에서 통과가 되면 백분토론 같은 데서도 법은 지켜야 되지 않느냐고 말하잖아요. 그럼 할 말이 없어요. 저는 우리가 이 두 가지 차원을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법대로 사는 것과 사는 법을 배우는 것. 이 둘은 완전히 다르거든요. 법대로 사는 것은 다만 초월적인 명령, 규칙들을 따르는 것에 다름 아니지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차원이 달라요. 삶을 구축하는 면에 있어서 조금 배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법대로 살기 이전에 사는 법이라는 차원에 대한 환기가 필요하고요. 가령 교사라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학생들과 다른 방식의 소통을 할 필요가 있고, 주민이라면 등산모임을 만들거나 다른 지역주민들하고 다른 뭔가를 함께 할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이게 퍼져나가면 이 정도로 우리가 불안해하지는 않을 거란 말이에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차원이에요. 만약에 탈주에 관한 긍정적 가능성을 말할 수 있다면 살아가는 법이나 우리식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이 얘기를 책에 쓰면 좀 허망해질까봐 문제를 제기하는 선에서 끝냈지만 속마음은 진짜 탈주라고 하는 것이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 게 아니라 자기 삶으로 돌아가는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거든요. 자기가 좋은 삶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국가에 살기 좋게 해달라고 빌잖아요?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탈주'를 시작해야하나요?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작은 실험국가로 존재해야 돼요. 니체가 철학한다는 거에 재밌는 정의를 내린 적이 있어요. 얼음밖에 없는 산에 혼자 살고 있는데 배가 너무 고픈 거예요. 그런데 저기 생전 처음 보는 동물이 쪼르르 기어가요. 그러면 어떡해야 할까요? 당장 잡아야죠. 징그럽다고 쳐다만 볼 수는 없잖아요. 만약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버섯이 있다면 그냥 지나가야할까요 먹어야할까요. 물론 그걸 한 번에 다 먹으면 죽을 거예요. 정말 모 아니면 도죠. 그럴 때 어떻게 하냐면 쪼금 떼어가지고 먹어보는거예요. 배가 아파서 미칠 것 같으면 그만둬야겠지만 바로 포기해야할까요? 아니요. 바로 포기하긴 너무 일러요. 한번 삶아 봐야죠. 그리고 또 조금 먹어야 돼요. 무슨 말이냐하면 탈주하는 것은 없는 것에서 부터가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에서부터 점진적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거예요.

아직도 국가는 중요해요. 국가가 담당하는 부분이 있고 시장이 작동하는 부분도 있어요. 그런데 그게 타도한다고 없어질까요? 필요가 존재하는데요? 저는 국가가 거추장스러워지면 그때 파괴될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당장 국가가 없어지는 건 불가능 하거든요. 탈주도 마찬가지인데, 탈주라고 하는 게 떠나게 되는 걸 전제하거든요. 하지만 그냥 신경질적으로 뛰쳐나가면 탈주가 아니라 자살이고 도피에요. 탈주는 도망칠 때조차도 뒤쪽에서 쫓아오는 적들과 싸우고 있어야 해요. 그리고 나아가면서 길을 개척해야 하고요. 그래서 탈주를 한다는 것, 다른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지금과는 다른 삶에 대해 뭔가를 실험하는 것이지 밑도 끝도 없는 신념에 기반하는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른 삶, 다른 민주주의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게 뭘까 실험해봐야 한다는 거예요. 지금-여기서 조금이라도 그런 삶을 시도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 실험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여러 이유 때문에 탈주를 할 수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묻거든요. 저는 그 말 때문에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배후에 절망감을 둔 단호함도, 배후에 소심함을 둔 소박함도, 좋은 선택지가 아니다. 승패를 확정하려는 열망은, 우리가 지금‘과정’중에 있으며, 앞으로도‘과정 중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태도, 더 정확히 말하자면‘과정을 빨리 끝내고 싶은 ’피로감의 산물이다.”


촛불에 대한 국면적 분석이 새로웠습니다. 특히 사제의 개입에 대한 지적은 굉장히 날카롭던데요.사제의 개입은 촛불의 의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 마지막에 가서 사제들에게 호소했다는 것 그리고 사제들이 그 임무를 자처했다는 것, 그 과정에서 구호들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가 돌연 승리가 선언됐다는 것. 그건저한테는 좀 심하게 말하면 낡은 것이 돌아왔고 우리에게 너무 익숙했던 것 우리가 넘어서려고 했던 것들이 다시 돌아와 버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 자리에서 필요했던 건 우리를 대신해서 말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다시 말해, 우리를 보호해 줄 방패가 아니라 그 국면을 돌파해줄 창이 필요했던 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경험을 했거든요. 촛불 집회 중에 한 대여섯 명쯤의 학생들이 전경들쪽으로 돌멩인가 뭔가를 던졌나 그랬어요. 뭘 던지니까 전경들이 그 대학생들 주변을 완전히 둘러싸버린 거예요.굉장히 위험한 순간이었는데, 그때 교수들 몇 명이 전경들을 뚫었어요. 교수들이 학생들 몇 명 데리고 전경들 사이를 뚫었던 거예요. 전경들도 막 당황하더라고요. 자기의 제자들이라고 말하면서 애들을 내보내는 거예요.

저는 그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아 누가 뚤어줄 수 있는구나.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이 누구를 대편해주는게 아니라 아니라 뚫어줄 수도 있구나. 사제의 개입 지점도 어쩌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위험한 상황으로부터 지켜주고 대신 말해줌으로써 상황을 종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막힌 국면을 돌파함으로써 상황을 새롭게 전개할 수는 없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비폭력 직접행동, 직접적인 폭력을쓴다는 게 아니라 폭력에 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개입 할 수 있는 구체적 지점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해요.


연구자 대중이란 무엇을 의미하나요?

연구자가 대중이랑 다를 게 없다는 거예요. 농민 대중,노동자 대중처럼 연구자 대중이 있다는 거지요. 연구자가 뭘 가르치나요? 우린 서로가 서로를 배우게 한다고 생각해요. 가령 농민의 어떤 삶이 노동자에게 생태적 배움을 줄 수도 있어요. 노동자의 생산 활동이 예술가에게 영감을 줄 수도 있고요. 예술가가 만든 어떤 영화나 작품이 연구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기도해요. 가르친다는 말을 너무싫어해요. 계몽 개념에서 나온 거잖아요. 누구의 삶을 대신 살아보고 가르쳐줄 수가 없어요. 다만 우리의 어떤 활동이 다른 사람들을 배우게, 깨닫게 할 뿐이지요. 그래서 위대한 교사란 배우게 하는 자라고 생각해요. 가르치는자가 아니라 새로이 배우게 하는 자가 아닐까요?


이 책에는, 비록 내 짧은 지식과 둔감한 신체 탓에 제한되기는 했지만, 앎의 장소, 앎의 신체가 있다. 문장들 속에서 나는‘거기’와‘그들’을 떠올릴 수 있다. 문장들 속에서 나는‘여기’와‘우리’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인터뷰 및 정리 박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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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4 18:15


















다윈 200주년 -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 기념
취재기자 안진선

진화론의 진화-생물학을 넘어 사회학으로 가다

진화론은 과학의 영역을 넘어 문화, 예술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윈은 이를“진화론과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사례”라고 언급했으며 유전학자 도브잔스키는 진화의 개념을 통하지 않고 생물학의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고까지 말했다. 생물학의 영역을 넘어 진화론은 사회를 해석하는 사회 생물학, 인간의 심리를 해석하는 진화심리학, 그리고 경제를 설명하는 진화경제학으로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사회생물학

고래는 부상당한 동료를 함께 수면으로 밀어 올리고, 코끼리는 넘어진 동료를 함께 일으켜 세워준다. 매를 처음 발견한 지빠귀는 경고음을 냄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키지만 다른 새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적자생존을 주요 개념으로 하는 진화론에서‘이타적’행동은 납득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이러한 사회적 행동을 진화과정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바로 사회생물학이다. 사회생물학은 미국의 생태학자 윌슨이 저서‘사회생물학의 새로운 종합’을 발표하며 처음 제기했다.

사회생물학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전제를 사용한다. 첫째, 생물은 종의 번식보다 종족의 번식을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즉, 개체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희생하더라도 유전적으로 가까운 다른 개체의 번식 성공률을 충분히 높일 수 있을 경우 이타적 행동을 지배하는 유전자가확장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전제는 개체의 행동이 집단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집단에서 공통된 행동을 하게 되면 침입자가 발생하더라도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특성은‘종’이 보다 안정된 삶을 구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회생물학은 생물 집단을 총망라하여 어떻게 이들 사이에 집단이 형성되고, 제도가 생겨나며, 이타적 행동이 발현되는지를 연구한다.

개체보다 종을 우선시하는 유전적 특성은 사회적 행동,즉, 동물 사이의 결혼과 육아, 계급, 경쟁과 협력 등과 결합하여 진화한다. 사회생물학은 인간 행동의 유전적 기초를 파악함으로써 제도의 발생과 진화를 설명하고자 하는것이다. 문화의 계승에 있어 유전자가 어떻게 작용하는가는 앞으로 남은 주요한 연구 과제 중 하나이다.

진화심리학

고대부터 철학자들은 인간의 심리를 신념과 욕구를 통해 설명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윗슨과 스키너는‘신념이나 욕구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의 산물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외부의 자극에 의한 행동만으로 인간의 정신적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는 이른바 행동심리학을 주창했다. 하지만 60년대 이후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행동을 설명할 때 신념과 욕구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인지심리학을 주창한다. 진화심리학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심리를 이해하려는 학문으로 신경계를 가지고 있는 동물 모두에 적용할 수 있지만 주로 인간의 심리를 연구한다. 인지심리학은 인간에게는‘마음’의 영역이 존재하고,그 마음은 컴퓨터와 같이 매우 복잡한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이 때‘마음’을 설명하는 요소로 진화생물학을 차용한 것이 바로 진화심리학인 것이다. 진화심리학은 마음이 매우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으나 이는 계획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임의의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일어났다고 본다. 언어습득, 시각 등 매우 복잡한 매커니즘을 가진 일종의‘모듈’이 중앙처리장치 없이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한다는 것이다. 이를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된 심리학적 적응(Evolved Psychological Mechanisms, EPMs)이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EPMs로는 시각, 청각,기억, 운동 제어가 있다. 이러한 각각의 영역에서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바로 진화심리학의 연구주제라고 할 수 있다.

진화경제학

경제적 현상을 바라볼때 경제주체로서 인간의 특성을 고려하는 것을 진화경제학이라 한다. 진화경제학에 대한 정의는 현재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논의의 시작은 리처드 넬슨과 시드니 윈터의‘경제 변화의 진화이론’을 통해 처음으로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진화경제학은 고전경제학과 달리 경제주체의 선택에는 효율성 외에도 다른 조건들이 작용할 수 있다고 볼 뿐만 아니라 경제주체의 합리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즉 경제는 역동적인 환경과 함께 변화하면서 균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진화경제학의 핵심은 경제라는 것이 근대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단순히 수요와 공급곡선에 따라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진화경제학이 생물학 지식을 받아들이긴 하지만 생물학의 개념들을 그대로 차용하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진화경제학에서는 현재 생물학에서 오류라고 판단하고 있는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개념을 주요하게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는 인간의 주체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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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4 18:06

 


 


다윈 200주년 -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 기념
취재기자 안진선


인간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고갱의 미술 작품 제목이기도 한‘인간 근원에 대한 탐구’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모든 사람의 화두였던 동시에 미지의 영역이었다. 생물의 생성문제를 논하려는 시도는 고대부터 있었다. 그리스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흙, 물, 공기, 불이 결합하고 분리하면서 생물을 만든다고 믿었고, 아낙사고라스는 물고기에서 유래됐다고 믿었다. 철학자 데카르트,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도 인간의 근원에 대해연구했으나 관념적인 수준에 그쳤을 뿐 과학적인 증거를 제안하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종교만이 이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항해술이 발달하고 탐험이 늘어나면서 그 동안 알지 못했던 많은 생물들이 발견되자 사람들은 점차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기존의 분류체계인‘존재의 큰 사슬’분류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종과 종사이엔 명확한 구분이 있을까?

다윈, 신의 세계에 의문을 품다

스웨덴의 식물 분류학자 린네는 종들 사이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음을 보고 종이 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며, 프랑스의 철학자 뷔퐁은 종들이 현재는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유래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18세기 말 영국의 E. 다윈은 생물에 내재된 욕구가 생물을 진화시키고 대를 이어 진보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는데, 진화론을 확립한 찰스 다윈이 바로 E. 다윈의 손자이다.

다윈은 갈라파고스 섬에서 5년간 머무르면서 핀치새을 연구했다. 핀치새는 동일종이라도 섬에 따라 약간씩 다른부리 모양을 가지고 있었다. 다윈은 격리된 환경에서 변화의 속도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관찰한 결과 환경에 대한‘적응’이 이루어진다고 추정했다. 다윈은 자연의 선택을 설명하기 위해 맬서스의 인구론을 차용한다. 즉, “인간사회의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이기고 환경에 잘 견디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라는 맬서스의 이론과같이, 자연에서도‘경쟁’을 통해 환경에 잘 적응하는 성질을 가진 개체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다윈은 맬서스의「인구론」에서‘생존경쟁’뿐만 아니라 법칙적이고, 양적이며, 연역적인 연구 방법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진화론에 따르면 모든 생물은 근소한 변이를 하고 있다. 같은 종 내의 개체들도‘완벽하게’같지는 않는데, 이러한 변이는 또한 유전될 수 있다. 적자생존의 결과에 따라 종은 다양하게 진화 혹은 퇴화되고, 변이가 누적되어 변종이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이 쌓이면 드디어‘종’의 단계에 이른다. 이러한 진화론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특별한 존재’라는 지위를 박탈하는 엄청난 내용이었기 때문에 과학계와 종교계가 크게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00년 후인 1968년, 알칸소 주에서 열린 재판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의 지위는 전복된다. 진화론자들은 과학시간에 창조론을 가르치는 것이 부당하다며 이의를 제기했고, 이 재판에서 승소하여 진화론을 가르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대의 진화론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보편적 학설로 인정받게 되었다.

지적설계론자들의 반격

과학교과서에서 성서를 다룬 것이 결정적 패인이라고 판단한 창조론자들은 의도적으로 종교적 단어를 제외하기 시작한다. 바로‘지적설계’이론의 등장이다. 지적설계란 다양한 형태의 생명이 지성적인 동인을 통해 완전한 모습으로 한 순간에 존재하게 됐다는 이론이다. 이들은 지적설계 이론이 신학이 아닌 과학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진화론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지적설계 이론은 캘리포니아 대학의 저명한 법논리학교수 존슨에 의해 주목받는다. 1991년 존슨 교수는 저서 ‘심판대 위의 다윈’에서 진화론에 사용된 과학방법론을 비판하면서, 생물이 경쟁을 통해 진화한다면 공작의 꼬리 깃털처럼 적의 눈에 잘 띄게 하는 하등의 쓸모없는 요소가 어떻게 발전하겠냐고 반문한다. 또, 눈과 같은 경우에도, 눈이 완벽하게 기능하기 전에는 쓸모없는 부속물에 불과해 진화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한다. 즉, 눈이 2% 생겨나더라도 2% 밖에 안 만들어진 눈은 생활에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4%, 6%로 점점 진화한다는 것이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존슨 교수는 진화론이 진화했다는 사실만 주장할 뿐, 그 방법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창조론과 다를 것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창조론과 진화론의 단점을 수정∙보완하는 이론이 바로‘지적설계론’이라고설명한다.

존슨 교수의 주장은 지적설계론을 진화론과 동일한 수준의 과학이론으로 승격시켰을 뿐 아니라 기존의 창조론 교육에 동의할 수 없었던 교육수준이 높은 보수 기독교인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도 충분했다. 1996년에는 리하이대학에서 생화학을 전공한 교수 마이클 비히가 진화론 비판의 바톤을 이어받았다. 비히는 존슨이 법학을 전공해 과학의 논리를 잘 모른다는 이유로 호응하지 않았던 기존 과학자들의 관심까지 이끌어냈다. 이후 수학과 철학, 신학을 전공한 윌리엄 뎀스키는 저서‘설계추론’을 통해 비히의 이론에서 취약했던 부분을 보완하고, 지적설계론를 강화한다. 더 나아가 지적설계론자들은 창조과학을 위한 디스커버리 연구소를 창설하고, 보다 조직적이고 학술적으로 지적설계론를 정착시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쐐기’전략이다.


누가 쐐기를 박을 것인가

쐐기 전략이란 1999년 1월 시애틀의 우편물 수발실에서 발견된 문서에서 유래했다.‘쐐기’라고 적힌 문서의 표지에는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 창조, 즉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최고 기밀’,‘배포금지’등의 도장이 찍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지적설계론 운동의 장기 전략이었던 것이다. 통나무의 갈라진 틈으로 쐐기의 날카로운 끝을 박아 넣으면, 시간이 흘러 쐐기가 깊이 파고들면서 통나무를 쪼개는 것처럼, 아직 과학적으로 모두 규명되지 않은 다윈주의를 공격함으로써 현대 유물주의 세계관 자체를 전복시키겠다는 뜻이다.

쐐기 전략은 5년 단위로 나뉜다. 먼저 1단계에서는 과학적 연구와 저술 및 출판이 시작된다. 2단계에서는 선전과 여론 형성이, 3단계에는 문화적 대결과 재건이 이뤄진다. 이러한 쐐기 전략의 궁극적 목표는 현대 문화의 지배적 철학인 자연주의를 지적설계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단순히 사회 일각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소동인 것만은 아니다. 놀랍게도 부시 전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존 메케인 등 영향력 있는 보수 정치가들이 지적 설계를 지지한다. 물론 이는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많은 표를 목표로 하는 정치인이고, 70% 이상이 기독교이며 창조론을 믿는 미국인의 경우 과학적 사실보다는 종교적 이유로 지지를 설득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용기를 얻은 지적설계론자들은 지적설계론을 교과서에 포함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2004년 도버에서 재대결을 신청했다. 지적설계론 진영에서는 지적설계론이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과학이론이기 때문에 이를 과학 시간에 함께 다룸으로써 다윈의 진화론을 보완하고 교육의 수준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진화론 진영의 포리스트는‘지적설계’라는 용어의 정의가‘창조’의 정의와 같고, 결국 지적설계론은 창조론의 위장술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이 재판을 담당한 존스 판사는 진화론의 손을 들어주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존스 판사가 바로 지적설계론을 지지하는 부시 전 대통령이 임명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 동안 진화론 진영에서는 지적설계론이 과학이 아니라 상대조차 하지 않아 왔다. 그러나 창조론이 지적설계론으로 부활하려는 조짐이 계속되자 결국 무시전략을 재고한다. 2006년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핑거, 제리 코인 등 현대 사회의 내로라하는 저명한 석학들이 모여 책을 출간했다. 생물학 뿐 아니라 심리학, 철학, 인류학 등의 분야에서 16명이 참가해 저술한‘지적사고’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사실 과학계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의‘논쟁’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말한다. 창조론자들이 멋대로 진화론을 왜곡하고 오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초월적 힘을 가진 존재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창조론자들의 주장이 과학이 아니라 도그마에 불과하며, 지적설계론자들이 주장하는 과학적 근거들 역시 대부분 과학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비록 진화론이 생명탄생과 진화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앞으로 과학이 풀어내야 할 숙제이지, 신을 인정함으로써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저서 ‘만들어진 신’을 통해“신은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망상일 뿐”이라고 단언하고 본격적인 무신론 운동을 개진한다. 진짜 논쟁을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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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4 17:57


엄정식(철학과 명예교수)

소크라테스에게 길을 묻다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입장과 고대 아테네의 역사적 상황 사이에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시민들에게“너 자신을 알라!”라고 외치던 그 절박한 상황이 우리의 입장과 놀라울 정도의 유사점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들과 우리들 사이에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엄청난 거리가 가로놓여 있고, 또 급속한 과학 문명의 발달로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양자 사이의 유사점에 주목하고 이것을 문제 삼는 이유가 무엇일까. 말할 필요도 없이 이것이 더 본질적인 요소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유사점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아테네를 통해 한국을 보다

우선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결 구도가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분단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한다. 아테네는 오늘날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였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했던 반면, 스파르타는 북한과 마찬가지로 공산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사회적 평등과 국가적 일체감을 강조하였다. 사실 그러한상황에서 싹튼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오늘날 조국의 분단을 초래하고 남북한의 대결을 첨예화했다고 볼 수도 있는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분단의 구조가 한민족의 발전을 저해하고 여러 가지 부정적 요소들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아테네와 남한 사이에는 경제적으로 급성장하여 상업주의가 정착되고, 이에 따른 개인주의적 민주화 과정이 급속하게 진전되었다는 유사점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재산을 축적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이 가치의 창조에 관여하게되며, 따라서 극도의 개인주의와 상대주의 혹은 가치의 다원화 현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상을 정치적으로 반영한 것이 자유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민주화는 경제적 상업화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상업주의가 팽배해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마다 걷잡을 수 없이 욕구가 분출하고 이해가 서로 충돌해서 투쟁과 분규가 끊길 날이 없고, 허술한 통치 체제를 틈타서 각종 부정과 부패, 퇴폐와 향락 등의 현상이 나타나기 마련이다.그리고 바로 이것이 아테네와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세번째 유사점인 것이다. 아마 이 밖에도 고대 아테네와 현대의 우리나라 사이에는 여러 가지로 비슷한 점이 많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분단의 대결 구조 및 퇴폐와 향락을 조장하는 상업주의 그리고 민주화란 미명 하에 혼란만을 가중시키는 정치 풍토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채 표류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 던져진 소크라테스의 질문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소크라테스의“너 자신을 알라”라는 외침은 지금 분단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시민들을 향해서도 울려 퍼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진정한 민주 시민으로서의 자의식을 일깨우고 자율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하여 우선 자신의 무지를 자각한 다음 자기의 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라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적 무지의 자각에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그의 행적과 죽음에 임하는 태도로부터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 성숙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덕목들을 놀랍게도 많이 추적할 수 있다. 그것을 우리는 개방적이고 비판적이며 반성적 생활 태도 그리고 자율성, 합리성 및 도덕성을 강조한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점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소크라테스는 인류의 가장 위대한 스승 중 한 사람이면서 다른 성현들과 달리 제자를 거느리거나 사람들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질문을 계속 던짐으로써 지식이나 지혜를 과시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도록 도와주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어떠한 선입견이나 전제를 갖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누구와도 기꺼이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에서 개방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어떠한 종류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논증을 통해서 검토한 후 그 결과만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비판적 합리성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 정치적이든, 지적이든 혹은 종교적이든 무조건적 권위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비판적인 태도는 그것을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게까지 겨냥함으로써 절정에 달하였고, 이것은 곧 삶 전반에 대한 반성적 태도로 이어졌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그는 결국 아테네 시민들의 분노를 자초했고 당시의 정권으로부터 외면당했지만 오늘날 민주사회에서 그것은 성숙한 시민의 바람직한 인간상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믿으며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지향할 뿐만 아니라 각자가 대등한 입장에서 인권의 신장을 요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갈등 구조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접근 방식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크라테스의 가장 위대한 면모는 역시 그의 이른바 ‘철학적 순교’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결국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 집행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지인들의 배려로 탈옥의 기회가 있었는데, 여기서 그는 조국에 대한 사랑, 준법정신, 신과의 약속 이행 등으로 그들의 권유를 거절하고 독배를 마신다.물론 이러한 그의 입장에 대해서 우리는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 가령 국가관이나 종교관 혹은 법리적 해석에서 그와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기 전에 고려한 세 가지 사항, 즉 자율성, 합리성, 공평성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민주 사회의 토대 : 자율성, 합리성, 공평성

소크라테스가 생사의 기로에서 맞이한‘도덕적 상황’에서 우선 염두에 둔 것은 개인의 자율성이었다. 무슨 결정에 도달하든 그는 독자적으로 결단을 내리고 그것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가 친지의 충고나 관습 혹은 주위의 억압이나 위협 같은 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을 능동적으로 판단하여 자율적으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 그는 합리적 사고를 중시하였다. 여기서 그가염두에 둔 것은 감정에 치우치거나 충동에 의해 행동하지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합리적 사고나 이성적 판단의 한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최고의 특전이며 최선의 기능이라는 것을 그는 확신하였다. 특히 상황이 절박하고 위태로울수록 더욱 냉철한 이성적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결과가 지닌 공정성을 문제 삼았다. 그것이 자신에게 이로운지 혹은 해로운지가 아니라 과연 옳은 것인지 혹은 그른 것인지만 고려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판단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비록 자신에게 해롭다고 하더라도 옳은 것이라고 판단하면 그것을 선택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도덕성의 기초이자 정의의 원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무지의 자각으로부터 도출한 덕목은 이 밖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언급한 그의 사고방식이나 생활태도는 민주사회의 성숙한 시민의 자질을 갖추는 데 특히 중요한 사항들이라고 판단된다. 이러한 자세를 견지할 수 있다면 사회적 혼란을 줄이고 질서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지적인 자만심을 제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전횡과 부패, 종교적 권위와독단에도 숙고와 반성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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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신애 2014.03.14 00:58  Addr  Edit/Del  Reply

      관리자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댓글입니다

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3 23:46


구본우(중앙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2000년대 거대한 변환과 칼 폴라니

만약 리스크의 정확한 계산이 실제로 가능했다면, 신자유주의의 신봉자들이 말해왔던 것처럼, 인류에게 가장 효율적이고도 안전한 유토피아의 세계가 열렸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현재의 경제위기는 리스크를 정확하게 계산하고, 사회 전체를 이 리스크 계산의 바탕 위에 움직이도록 만든다는 것이 바벨탑을 쌓는 일에 불과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사회 전체가 자본시장이 됐을 때, 사회는자본시장의 논리를 감당할 수 없고 자본시장의 운동 방식은 사회의 변화무쌍함을 감당할 수 없다는 단순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어제까지의 지구 경제는 자유로운 시장 거래, 지구적 자본시장 통합, 치솟는 주가와 부동산 가격의 모습이었지만, 오늘은 사람들이 금융보호주의, 보호무역주의, 금융기관의 국유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실로 거대한 변환을 예감케 하는 순간이다. 이러한 전환의 시대, 19세기 자유주의가 현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해가고, 세계대전, 파시즘의 등장, 대공황 등 일련의 폭력적 사태를 거치면서 맞이했던 거대한 변환의 시기를 살았던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저서『거대한 변환』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배와 유토피아

‘사회에서 경제가 어떤 위치를 차지해야 할 것인가’하는 질문에 답변하는 것은 폴라니에게 있어 평생의 과제였다. 이때, 경제의‘실체(substantive)’의미와‘형식적(formal)’의미를 구분하는 것은 이 과제를 수행하는데 매우 중요한 출발점일 수 있다. 폴라니에 따르면, 실체적 경제란 인간과 환경이 끊임없이 제도를 매개로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는 과정 자체를 의미한다. 반면 형식적 경제는‘어떤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논리적 추론으로 구성되어 있다.실체적 경제가‘사실’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형식적 경제는 목적 수단 관계의‘논리’에서 시작한다. 문제는 이 두 가지 이질적인 경제의 의미를‘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순간 발생한다.

첫째, 논리적 형식이 복잡한 실재를 통제하고 지배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형식적 경제 이론은 비록‘자연’,‘보편’의 옷을 입고 있다할지라도 결국에는 세계에 대한 특수하고 인위적인 해석의 결과물이자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유토피아적 상상에 불과하다. 그런데 형식적 경제와 실체적 경제가 동일한 것이라는 인식, 다시 말해 형식적경제의 논리들이 곧 실재하는 사실들의 반영이라는 인식이 사회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 거대한 전도가 발생한다. 사실상 일체를 이루고 있어서 떼어내고 구별하기 어려운 세계의 요소들을‘노동’,‘토지’,‘화폐’라는 허구적 상품형식의 이름을 붙여 서로 분리해내는 것, 희소성 상태와 합리적 인간이라는 공리로부터 도출된 형식논리에‘시장’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 시장의 논리에 따라 상품형식들이 이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그것이다. 이 사유습관이 실재의 세계를 대표하는 것이 되었을 때, 세계의 모든 사실들은 시장이 파놓은 수로를 따라 일정한 패턴을 만들어내며 움직여 간다.

두 번째 문제는 아무리 강력한 형식적 경제이론도 실체의 경제를 완전히 포섭할 수는 없으며, 세계를 영구히 지배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실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변동은 형식적 경제이론이 구성한 유토피아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이율배반을 산출하며, 어느 시점에 이르면 사회는 이 유토피아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이렇게 사용연한이 끝난 유토피아를 계속 유지하려 하면 할수록, 현실과 유토피아 사이의 거리는 멀어져가고 굉장히 폭력적이고 파국적인‘형식’(form)의‘변환(transformation)’,즉 거대한 변환이 야기된다.

신자유주의라는 유토피아

신자유주의는 리스크 계산이라는 또 다른 유토피아에 기초해 있다. 금융공학의 힘을 빌려 리스크를‘객관적으로’측정할 수 있다는 신화는 세계 대전 이후 주춤하고 있었던 자기조정적 시장이라는 자유주의의 강령이 급속하게 확산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교과서에서 말하듯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 가격은 미래효용 혹은 미래수익에 기초해서 결정된다. 그런데 미래의 수익이 예측 불가능한 것이라면 이 상품을 둘러싼 가격 흥정도 어려운 것이 되고, 가격체계가 안정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면 시장, 특히 온갖 신용관계가 확산되어 있는 시장은 한 순간에 기능 정지 상태에 빠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시장은 국가나 공동체 같은 전통적 리스크 관리자와 불편하게 동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1980년대를 전후하여 시장의 행위자 스스로가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다는 신념이 형성되었으며 이를 실현시킬 규칙들이 만들어졌다. 사실상 리스크 평가 모델에 기초하고 있는 시가 회계가 새로운 회계기준이 됐다. BIS 비율, 순영업자본 비율, 지급여력 비율 같은 각종 금융기관에 대해 리스크 계산에 기초한 금융 규제가 시행됐다. 각각의시장 행위자들이 계산된 리스크를 반영하여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가격과 현금수익을 투명하게 공시하고, 리스크에 대한 안전대책을 스스로 확보한다. 그리고 다른 시장행위자들은 이 공시된 가격과 계산된 리스크 수준에 기초하여 투자 및 거래 여부를 결정한다. 리스크 계산과 투명한 공개라는 규칙 외에는 다른 어떤 시장 규제도 필요치 않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국가, 기업, 은행, 가계와 같은 집단들의 위상과 행위를 변화시켰다. 국가는 국공채 금리 조절과 재정 회계를 따라 움직이는 또 다른 시장 참여자가 됐으며,공공정책, 사회복지정책은 시장 변동과 사회적∙산업적∙사회적 살림살이 사이의 완충망이 아니라 시장 변동의 충격을 살림살이에 고스란히 전달하는 전동장치가 됐다. 기업은 시장의 변동에 따라 자산을 매매하고 비용을 조정하는 —대표적인 비용 조정 대상은 노동 비용이다— 자본시장 투자자가 됐으며, 은행은 산업적 자금 배분을 수행하는 집단에서 계산된 리스크와 수익성을 따라 움직이는 투자자로 변화했다. 가계 역시 보험, 연금, 주식투자, 부동산 투자로유지되는 투자 단위가 됐다. 기후, 범죄, 은퇴 후의 삶, 사람의 몸과 같이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수많은 요소들이 금융투자 상품으로 변모했고, 사회 전체는 시장, 특히자산이 거래되는 자본시장의 움직임에 종속되기 시작했다.

사회의 복원

현재 신자유주의 체제는 기나긴 변환의 초입으로 들어선 것으로 보이지만, 그 변환의 기간이 얼마나 될지, 변화의 방향이 어떤 것일지, 그 깊이는 얼마나 될지는 쉽게 예측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중장기적인 변환의 큰 방향에 있어서 인간이 능동적으로 창조해 나가야 할 질서에 대해 폴라니의 기획은 어떤 혜안을 던져줄 수 있을까? 폴라니에 따르면, 가치 평가는 초역사적이고 자연적인 원천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사회가 지향하는 특수한 목적에 종속되어 있다. 특정한 사회적 자원이나 인간 행위는 해당 사회의 목적에 얼마나 기여하느냐에 따라 가치 평가될 수밖에 없으며, 사회는 사회의 목적에 맞는 가치의 할당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는 방법과 체계를 고안하기 마련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 평가 또한 이윤 혹은 자산의 증식이라는 목적에 기초하여 평가되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이러한‘역사성-사회성’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 평가가 무목적성, 자연성이라는 환상은 오직 시장과 같은 특수한 제도가 특권화되고 자연화된 결과의 소산일 뿐이다.

그렇다면 시장이냐 국가냐의 이분법은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기 위한 적합한 틀이 아니다. 폴라니가 보기에 사회는 언제나‘전체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는 특수한 동기나 특수한 기능들로 환원될 수 없다. 시장과 국가를 대립시켜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특수한 기능을 표현하고 있는 특정한 제도들을 특권화하는 시도일 뿐이다. 시장 경제의 모델은 소비자로서의 인간의 삶의 측면들을 제도적으로 특권화한 것이고, 국가중심의 명령경제의 모델은 생산자로서의 인간 삶을 제도적으로 특권화한 것일 뿐이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발견되는 사회의 통합 형태는 단일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진화과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 중 어느 하나의 제도 형식을 중심으로 전체적 인간 삶을‘조직’하고자 한다면 그 결과는 인간과 사회 전체의 황폐화를 초래할 뿐이다. 폴라니의 기획은 언제나 사회 자체를 최대한 온전하게 드러내고, 전체로서의 사회를 복원시키는 것에 있었다. 제도나 절차는 사회의 목적과 인간에 대한 상상에 종속되어야 하며, 언제나‘사회란 무엇이고 인간의 살림살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열려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러한 논의를 촉발시킬 수 있도록 고안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변환의 시기,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해법은 언제나 폴라니를 포함하여 과거 어느 시대 사람의 몫도 아니요, 미래 후손의 몫도 아니다. 우리시대의 몫이다. 수많은 수학적 가치평가와 금융공학이 만들어내는 엄청난 환상 속에서 한참을 헤매고 난 지금, 사회가 무엇이고 인간의 살림살이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몫이어야 한다는 폴라니의 한마디는 꽤 주의깊게 들어야할 목소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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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3 23:37

이정민(KAIST 인문사회과학부 대우교수)


근대과학의 이념

1245년 파리 대학. 얼마 전 자기 스승을 따라 옮겨왔다는 한 학생. 스물이나 되었을까? 선생처럼 머리를 짧게 깎고 흰 옷 위에 검은 망토를 걸친 모습에서 교단에 몸담은 수사임을 알 수 있다. 강의 주제는 최근에 이 대학에 들어 온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 난해한 개념과 미묘한구분이 난무하는 가운데에서도 경청한다.“자연을 탐구 할 때에는 창조주 신이 자유 의지에 따라 창조한 모습이 로 무너지기까지 자연에 대한 기본 탐구 방식이었다. 이렇게 자연에 대한 탐구에서도 실험이나 관찰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가 중시되었다는 점에서 중세 대학은 근대 대학과 같은 연구 기관이 아니라 기독교 세계에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을 흡수하고 이를 전파하기 위해 세워진 기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에서 진정한 지식을 아닌, 자연 안에 내재한 원인에 따른 운동 그 자체를 탐구 해야 합니다.”순간 빛이 스쳐 지나간다. 자기가 몸 바칠 일생일대의 기획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이 학생, 밤이면 노안의 선생을 위해 서기로 일하며 자기 학문을 이룰 날을 꿈꾸던 이 청년이 이후 수백 년간 유럽 대학과 가톨릭 교회 모두에서 권위로 군림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Aquinas, 1225-1274)이다.

시간과 장소를 바꾸어 1664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강의가 한창이다. 한 학생, 강의는 딴전이고 노트에 무엇인가를 끌쩍거린다.

Amicus Plato amicus Aristoteles
magis amica veritas
플라톤은 (내) 친구, 아리스토텔레스도 내 친구,
하지만 내 진정한 친구는 진리



 

『어떤 철학적 의문들』(Quaestiones quaedam philosophicae)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노트 전반부는 이 학생이 수업에서 배웠을 법한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과 윤리학 그리스어 필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만의 당당한 선언대로 위 표어 이후 고대의 저자들은 다시 등장하지 않고, 대신 자연현상에 대한 자신만의 자유로운 사고와 실험에 대한 구상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이 노트의 주인공이 훗날『프린키피아』와『광학』을 저술하고 근대 물리과학을 정초한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이다. 13세기 무렵부터 유럽 이곳저곳에 세워지기 시작한 대학은 처음에는 상인이나 장인들의 길드와 같은 학생과 교사의 조합(universitas, 영어로 corporation)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이러한 대학들이 교과 과정의 중심으로 내세웠던 것이 12세기부터 아랍 세계에서 수입되어 번역되기 시작한 아리스토텔레스 저작들이었다. 그리고 아퀴나스와 그의 스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처럼 이들 저작과 기독교 성서, 교부 저작을 해석하고 주석을 다는 학문 탐구 방식을 보통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저작 대부분을 포괄하며 특히 자연에 대한 탐구(곧 지금 우리 과학이 담당하는 영역)인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이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연 철학은 전통 신학과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1210년과 1277년 두 번의 금지령) 아퀴나스와 같은 이들의 노력으로 유럽 대학에 확고히 자리 잡았으며 이것이 근대 초기 과학 혁명을 뜻하는‘과학’(scientia)은 자연에 대한 새로운 사실과 원리들을 발견하는 활동이 아닌, 일반 원리에서 이미 알려진 사실들을 끌어내고 하나의 체계로 만드는 활동을 뜻했다.

이러한 연역에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원인 개념으로 이러한 원인은 우리가 아는 사실이 왜 그래야만 하는가에 대한 답을 준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원인 개념에 충실하지 않은 탐구 형태, 예를 들면 원자론이나 수학이 들어간 과학(mixed sciences, 곧 잡학)은 과소평가되어 학문의 주변부로 밀려났고, 반면 신은 자체원인 또는 제일 원인으로 불리며 형이상학의 중심 주제로 들어섰다.

그런데 근대과학, 특히 경험주의에 중심이 되는 한 경향은 위와 같이 원인 개념으로 자연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원인(anti-cause)은 물론 원인에 대한 탐구 전체를 배제하지는 않지만, 어떤 결정적인 지점에서 설명과 체계의 완결성만을 위해 원인을 꾸며내는 것에 반대하는 개념이다.‘결정적인 지점’이란 뉴턴이 말하는바,“실험으로 보일 수 있는 이상”을 뜻하며 이렇게“현상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원인에 대한 진술을뉴턴은 가설이라고 불렀다.“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 (hypotheses non fingo)는 뉴턴의 선언은 바로 이러한 학문 탐구 방식의 거대한 전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반원인이 중세 자연철학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대변하는 표어인 반면 근대과학의 이념을 긍정적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말로 기계론(mechanism)과 실험철학(experimental philosophy)을 들 수 있다. 기계론은 보일의 비유대로 자연을 시계와 같이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로 파악하려는 생각이다. 곧 자연 과정은 시계 톱니바퀴처럼 입자 알갱이들이 서로 맞물려 운동하는 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기계론은 색깔, 냄새, 소리와 같은 눈에 보이는 감각 성질을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 성질과 운동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려는 강한 환원주의(reductionism)의 성격을 띠며, 이러한 환원주의는 비단 17세기 역학뿐만 아니라 19세기 통계물리학, 최근의 분자생물학에 이르기까지 과학의 성공 사례 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철학적 입장이 되었다. 여기서 환원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마치 근대과학과는 조화될 수 없는 신념으로 보는 태도 또한 생겨나게 되었다.

실험철학(experimental philosophy)은 보일이나 뉴턴이 기존 자연철학과 자기들의 자연 탐구 방식을 구분하기 위해 쓴 말이다. 이는 물론 우리가 아는 실험을 통해 자연을 탐구하는 활동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러한 실험과 결부된 여러 복합적 의미를 잊어서는 안 된다. 곧 실험에 뉴턴의 대학시절 노트. 1660년경 어떤 철학적 의문들 중에서 색에 대해 대한 강조는 현상을 원인에 대한 가설보다 중시하는 사실 존중의 태도를 함축함과 동시에, 그러한 사실 또한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필연적인 원인이 아닌, 실험 결과에 따라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모든 과학 법칙이나 진술에 남기게 된다. 곧 원인에 대한 가설이라는 것도 단지‘시험해’볼 수 있는 명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며,이렇게 우리가 무엇이 맞을지 아닐지 모르는 상황에서 시험해 본다는 뜻의‘실험적’(experimental)이 그 원래 의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근대과학은 바로 이 의미에서‘실험’과학이며 그러한 실험으로 확립된 법칙이나 이론은 어디까지나 개연적이기 때문에, 새로운 영역에서 새로운 관측이나 실험을 하게 되면 언제든 이와 모순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흔히 과학적 태도라고 알려진 사실이나 증거를 편견 없이 열린 자세로 바라보는 태도는 그 자체로 근대과학에 고유한 특징이라기보다 이러한 실험 철학이라는 뿌리 깊은 이념에서 파생된 결과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근대과학 이념에는 과학 단체나 저널과 같은 제도적 장치, 교육을 통한 이념의 보급, 신학과 조화와 대립과 같은 외부 요인을 포함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러한 요인들도 근대과학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과학 제도나 문화 형성에는 이러한 이념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힘입어 지금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자연 탐구 방식에 높은 가치를 두는 문화가 17세기에 유럽에서 형성되었고, 이것이 인류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정도로 물질세계에 대한 이해와 통제를 가능하게 했다. 따라서 근대 학문에서는 모든 인식적 가치가 과학 위에 세워지게 되었고 사회(과)학, 의학 심지어는 인문(과)학 또한 과학을 표방하는 학풍이 조성되었다. 이렇듯 근대과학 이념은 대학이라는 제도 또한 알아볼 수 없게 변화시켰고 이제 더 이상 고대 저자에 대한 언쟁과 주석이 아닌 현상에 대한 탐구와 실험이 대학을 채우고 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을 밀어낸 지금의 과학 이념 또한 새로운 이념에 의해 밀려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과학 또한 매우 거대하기는 하지만 하나의 이념이며 지금 우리로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새로운 이념이 미래에 탄생할지 모른다. 근대 과학의 이념에 대한 탐구는 이러한 길을 열어놓고 준비한다는 점에서 창조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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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3 23:19


원용진(신방과 교수)

인간의 조건과 소통

해녀의 잠수는 보물 캐기다. 숨 가쁜 잠수를 하지만 해녀는 바다 밑바닥 모든 것을 샅샅히 건져 올리진 않는다. 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도움될 만큼만 건져 올릴 뿐이다. 인간이 역사를 만드는 방식도 이 같지 않을까. 인간은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그를 자신의 삶과 연결시킨다. 과거의 삶에 담긴 보물을 캐 현재로 가져온다. 그리고 미래를 새롭게 연다. 해녀의 잠수 작업처럼 보물을 캐어 새로운 미래를 여는 인간 능력을 아우구스티누스는탄생성(natality)이라며 노래했다.

바다 속 보물을 캐는 행위는 해녀 자신 만을 위한 것은아니다. 자신의 생활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과도 연관됨을 해녀는 알고 있다. 그의 잠수는 결코 개별적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물 밖의 세상과 절연하거나 선행하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성 속 삶, 세계-내-존재가 곧 해녀의 삶이다. 바다, 보물, 바다 바깥의 타인을 인식 대상으로 삼기도 이전에 이미 해녀는 그 세계 안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 복수성을 내포하는 존재다.

해녀의 잠수 뒤에는 인간의 탄생성, 복수성이라는 존재 조건이 어른거리고 있다. 해녀의 잠수 뿐 만이랴. 인간의 어떤 행위도 그 존재조건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다. 그런데 그 존재조건이며 인간의 능력이기도 한 탄생성과 복수성이 전에 없던 새로운 조건을 맞이하고 있다. 과거로부터 보물을가져오며, 남과 더불어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인간 능력이 점차 위험한 조건 속에 처해 가고 있다. 더 가쁜 숨을 몰아쉬고 더 많은 물질을 해하는 해녀의 운명처럼 말이다.


탄생성과 복수성이란 인간 조건, 인간 능력에 대한 논의가 체계화되고, 그를 도모키 위한 노력의 경주가 요청된 이래로 그들은 오히려 더욱 질곡에 빠져들었다. 복수성을 숨막히게 하는 치열한 개인주의와 탄생성을 움쩍달싹도 못하게 만드는 이기적 공동체 주의 탓이다. 그리고개인주의와 이기적 공동체주의의 조합을 통해 사회는 경제 지상주의로 치닫고 있다. 그 조합 앞에서 모든 사회적인 것, 정치적인 것은 몸을 숙이고 있다. 화폐가 인간을말하고, 화폐가 인간을 평가하는 정치실종, 사회실종의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해서 탄생성, 복수성을 부정하는 구심력을 거슬러가며 탄생성, 복수성을 되살리자는 원심력적 호소가 여기 저기서 터져 나왔었다.

원심력적 호소가 너무 적은 탓이었던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원심력적 호소는 구심력을 이겨내지 못한 채 간간히 귓등을 스쳤을 뿐이다. 구심력에 탄력을 붙이는 국가적 관성 탓이다. 애초 사적 개별 존재인 인간에 이기적 경제지상주의가 덧 씌여질 즈음 개별 존재는 방황할 수 밖에 없었다. 개인이 가진 탄생성과 복수성이 아직 완전히 고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적 관성은 개별적 존재의 방황을 이기적 경제 지상주의 공동체 형성을 통해 끝장내려 했다. 개별적인 채로 유적(類的) 존재가 되어야 하는 인간의 갈등적 존재론을 현대 국가들은 이기적 경제지상주의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봉합하려 했다. 개인의 자기 소외까지 극복할 수 있는 공동체를 창조해 총체적 유적 존재로 인간을 이끌면서 헤겔의 상상력 까지 넘어서는 경제 지상주의 총체성에 도달한 셈이다.


탄생성과 복수성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이들은경제 지상주의 총체성에 다시 도전장을 내민다. 총체성이 다 뒤덮지 못한 틈으로부터 그 도전장의 얼굴들이 삐져나온다. 혹은 그 틈들에 도전장을 밀어 끼워 본다. 총체성과 그가 다 뒤덮지 못한 틈새를 대결시켜 보려 한다. 탄생성과 복수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도전장을 던지고, 관계의 끈을 잇고 변화를 모색한다. 어설프게 이뤄진 개별적 존재와 유적 존재 간 봉합에 균열을 꾀하려 한다. 그래서 더 많은 이질적인 틈새를 발굴하고, 그에 해석을 부여하고, 새롭게 틈새를 만들려 한다.

봉합된 듯한 총체성에 눌려 숨죽여 온 틈새 찾기, 찾아낸 틈새와 허세부리는 총체성의 관계 맺기, 틈새 간의 관계 맺기 작업을 두고 소통이라 이름 붙인다. 모험적 관계맺기, 이질적인 것과 줄 대기, 그를 통한 새로운 모색을 포괄하는 개념이라 한다. 그러므로 소통은 때론 평화적이지만 가끔씩은 전투적이기까지 하다. 바다 속을 긁어내는 거대 해녀에 맞서 그러지 말기를 요청하는 목소리도, 숨가쁘게 그를 거부하며 개별 존재를 조직해 만든 해녀 공동체의 항의 이 모든 것들이 그에 속한다.

해녀가 바다와 만나길 거부했다면 애초 해녀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질적인 것 간의 만남을 통해 해녀는 새로운 영양가를 찾아냈고, 그를 타인에게 전할 수도 있었다. 소통은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 탄생성과 복수성을 더 단단하게 한다. 이질적인 것 간의 만남으로 인한 당혹함이나 낯설음을 풀기 위해 과거를 캐고, 타인을 고려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통은 탄생성과 복수성이라는 인간 조건을 흐르게 해주는 엔진일 수밖에 없다.

탄생성과 복수성을 눌러 숨막히게 한 국가 그 엔진인 소통을 그대로 둘 리가 없다. 소통에 끼어들기 국가 프로젝트가 펼쳐진다. 정교하게 혹은 폭압적으로 이뤄지는 국가적 프로젝트 탓에 소통도 비틀거리게 된다. 같은 기표를 활용하되 다른 기의를 갖도록 강제하는 국가적 프로젝트가 여기저기서 벌어진다. 같은 생각을 갖도록 하는 홍보, 전달의 의미로 소통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습속을 만들어 낸다. 습속 만들기 국가 프로젝트 탓에 이질적인 것은 제거의 대상이 된다. 탄생성은 잊어야 할 유산으로 읽어낸다. 복수성은 거추장스러운 이념으로 처리되고 말 뿐이다.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더더욱 죽이는 전체주의적 경제 지상주의 사회로 가는 경향이 짙어지고있다.
 

거대 해녀가 바다를 헤집으며 개별 해녀를 숨막히게하고, 자원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숨막힌 해녀와 고갈되는 자원을 대하며 푼 돈을 협상하고 어쩔 수 없었다며 위로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소통했다고 자부한다. 바다와 해녀 그리고 미래 뿐 만 아니라 소통조차도 질곡의 과정에 접어든 셈이다. 그래서 오늘은 어둡고 내일은 더더욱 암흑이다. 모든 이질적인 것들이 설 수 있는 기반조차도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소통은 더 절실하고, 소통을 질곡에서 꺼낼 의지는 더더욱 요청된다. 그것만이 희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소통을 질곡에서 구해내 탄생성, 복수성을 회복하기위한 희망 프로젝트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봉합된 것처럼 보이는 총체성에서 틈새 찾기가 첫 번째일 듯하다.총체성에 포섭되지 않았던 삶, 포섭 바깥에서 벌이는 삶 그런 틈새 찾기가 소통을 구하는 첩경이다. 그런 삶은 창조해내는 일 또한 소통의 전제다. 좀 더 열린 존재되기,포용적 유적 존재되기를 위한 본보기들을 찾고 구성해내야 한다. 다시 바다 속을 뒤지듯 과거로부터 보물을 캐는 생성적 연구 작업도 그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분자적 운동은 어떨까. 자신의 정체성에 집중하여 그 고집을 놓지 않으려는 집착증이 아닌 다른 것에 모험적으로 접근해보고 즐겨보는 분열증적 분자 운동도 소통을 회복하기 위한 전제다. 그러기 위해선 견고하던 울타리를 허물어야 한다. 모든 자율적인 존재들의 연합이 그런 분열증적 분자운동이 가져올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어디에 있더라도, 그 장소에서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이접(離接)의 화신이 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코스모폴리탄 되기라고 말해버리면 지나친 단순화일까.

중심을 찾고, 그에 기대는 집착하는 것은 버릴 일이다.중심을 뺀 (n-1) 운동이야말로 진정한 운동일지 모른다. 중심을 자처했던 모든 것들은 탄생성과 복수성 그리고 소통을 배신했다. 중심은 틈새를 남기지 않을 총체성을 향해 달려야 하는 존재론적 운명이기 때문이다. 반동적 총체성을 부수기 위해 찾은 저항적 총체성은 필연적으로 저항마저도 배신하게 됨을 역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지켜보아온 터이다.


해녀가 사라지고 있음은 탄생성, 복수성 그리고 그의 엔진인 소통이 질곡에 처하고 있음의 알레고리다. 하지만 아직 물질을 하는 해녀가 남아 있음을 희망의 메시지다. 국가적 봉합 프로젝트가 아직은 허술함을 보이고, 그에 도전장을 내밀 순간이 있다는 징후다. 인간이 살아가야 할 만큼의 긴 시간 동안 바다도 살아야 하고, 그 안의 보물도 살아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한다면 알레고리에,메시지에, 징후에 눈길을 주어야 함은 당연함을 넘어서 의무적인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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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3 23:05



우찬제 (국어국문학과 교수)


말의‘홍수’와 소통의 위험

『홍수』에서 르 클레지오는 안개와 폐허의 장벽 뒤에서“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낙원”을 응시한다. 조화롭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미묘하고도 아련한 희열을 주던장소였다. 그런데 인간은 결정적이고 급속하게 그 낙원을 상실했다. 실낙원의 증후는 다채롭지만, 그 중“소리들은 소란으로 변”했다는 대목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말[言語]들은 그 광란의 무용을 다시 시작했다. 말들은 서로 얽히고 덧붙여지고, 분할되고 하는 것이다.”말의 광란은 매우 심각한 지경이다. 말은 인간의 정신을 넘어서고, 정신은 말을 따라가지 못한다. 소란한 소리로부터 인간의 소외 양상은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말들은“계속 이어지고 거대해지는데, 정신은 그만 십분의 일초가 부족하여 정신이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이윽고 그 말은 수많은 불균형이 폭발한 후에 무(無)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가, 광란(狂亂)과 밤과, 소리가 울려퍼지는 야수 같은 선풍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하여“한층 더 은밀하고 더 굉장한 말들”은 존재의 리듬을 파열하기에 이른다.“행복과 고통의 전언”도 균열을 벗어나지 못한다. 소리의 소란과 언어학대로 인해 르 클레지오의 주인공은 마침내 실어증에 걸린다. 현대 문명과 인간 삶에 대한 비판과 부정 의지가 남달랐던 작가다운 성찰이다.

소리가 존재의 숨결 혹은 존재의 리듬에서 일탈한 채 소란한 광란으로 치닫는 상황에 대한 절망과 비판이 비단 르 클레지오만의 몫일 수는 없다. 한국의 젊은 작가 한유주 또한 말의 대홍수 시대에 절망한 경우다. 그녀가 보기에 우리는 지금 말의 대홍수 시대를 살고있다. 소란스러운 말, 거친 말, 폭력적인 말,“어떠한 반성도 회의도 추억도 갖지 못”(「그리고 음악」)한 말들이 횡행하는 부정적인 수사학의 시대를, 한유주는 야만적인 삶이고 문화에 불과하다고 진단한다. 반성적 영혼의 숨결이 거세되었기에, 존재든 말이든 그 고유의 자리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한유주는 생각한다.“경험은 초라했고, 그래서 가진 것이 없었다.”(「지옥은 어디일까」). 세상에“슬프고 광포한 일들”은 무수히 일어나지만,“슬픈 일들은 어떤 사람들의 기억하지 못하는 꿈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꿈들을 환영처럼 드리우고 세계의 뒷면으로 숨어들어”(「달로」)가는 형국을 지긋하게 응시한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범어 어원에서 숨결을 뜻하는 리듬, 그 생명의 원천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된다. 리듬이 거세된 현실에 대한 도저한 인식이 한유주로 하여금 종종‘음악’의 세계로 이끌리게 한다.「그리고 음악」,「암송」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소리의 소란이나 그 때문에 형성된 증오는, 진정한 인간적 리듬을 함축하는 음악에의 동경을 통해서만 겨우 넘어 설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소통을 위한 리믹스

『펭귄뉴스』,『악기들의 도서관』의 김중혁 또한 소통을위한 예민한 귀를 지닌 작가다. 그의「자동피아노」는“어째서 소리가 모이면 음악이 되는 것일까, 소리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일까 아니면 창조하는 것일까, 왜 어떤 것은 소리이고 어떤 것은 음악일까.”라는 문제를 고민하는 두 피아니스트의 대화를 주조로 하는 소설이다. 비토는“음악은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소멸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 어디에나 있는 음을 피아니스트가 자신의 몸으로 육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음, 소리가 선재한다. 피아니스트가 음을 만들어내서도 만들어낸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다만 투명한 마음으로“자신의 몸을 통째로 예술에게 빌려줘야 한다고”비토는 강조한다. 실제로 비토는 개별의 소리들이 제값을 잃지 않으면서도 음악으로 통합되고, 그 음악이 속한 음악 장(場)에 허심탄회하게 조화를 이루며, 그런가 하면 다시 독립적인 소리로 생명을 지닌 채 세계로 되돌아가는, 그런 리듬의 세계에 자신의 몸을 빌려주고자 한 예술가로 이야기된다. 가령 비토가 연주하는 소리를 전화기를 통해 주인공이 듣는 장면에서는, 독립적인 소리/음이 음악으로 수렴되고 음악을 통해 다시 소리/음들이 확산되는, 수렴과 확산의 원환적 반복과 순환을 통해서 소리와 존재의 숨결을 탐문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나눌 수 있다. 이때 개별 소리와 전체로서의 음악은‘따로-함께’공존한다. 나누어지는 듯 어우러지며 공존한다. 연주자와 음악, 수용자의 관계도 그와 흡사하게 행복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근대 이후 인간과 예술을 괴롭히며 숨결의 리듬을 방해하던, 주체와 객체의 험악한 분열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까 연주가 이루어지는 현재시간의 연주 행위는 독주일 수 없다. 소리/음, 음악, 연주자, 수용자가 서로 스미고 짜이며 진정한 소통을 위한 생명의 리듬을 합주한다. 작가 김중혁이 꿈꾸는 음악적 황홀경은 이런 리듬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한 어떤 경지다.

이런 맥락에서 김중혁의「엇박자 D」의 세계 역시 흥미롭다. 음치에 가까워 박자를 제대로 맞출 수 없었던 ‘엇박자 D’는 학창 시절 합창 공연을 망쳐놓은 상처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무성영화 전문가로 성장한 그는 공연 기획자인‘나’와 함께 무성영화와 음악을 리믹스한 공연을 한다. 공연의 끝에 그는 회심의 리믹스 작품을 관객들에게, 특히 학창 시절 합창을 같이 했던 옛 친구들에게,선사한다.“22명의 음치들이 부르는 20년 전 바로 그 노래”라고‘엇박자 D’가 말하고 있거니와, 한 사람의 소리가 둘, 셋, 넷, 다섯 사람의 소리로 바뀌면서 합창이 되는데, 합창이라고 하기에는 서로 음도 박자도 맞지 않지만 잘못 부르고 있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 그런 노래였다. ‘나’는 그 노래가 매우 아름답고 절묘하게 어우러졌다고 느낀다.“아마도 엇박자 D의 리믹스 덕분일 것이다. 22명의 노랫소리를 절묘하게 배치했다. 목소리가 겹치지만 절대 서로의 소리를 해치지 않았다. 노래를 망치지 않았다.”각각의 소리가 어느 한 곳으로 귀속되거나 구속되지 도 않고, 그렇다고 다른 소리를 해쳐 어설픈 혼돈의 도가니를 만들지도 않은 절묘한 상태가 아닐 수 없다. 각각의 소리가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가 되어 서로 호응하는 상호주관성의 지평에서 상호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전체의 생명을 얻는 장관이다. 합창이면서 독창이고, 독창이면서 합창인, 이 세계는 불가능한 듯 보이는 개인과 집단의 조화 가능성을 예술적으로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조화의 리듬을 통해 생명력 있는 리듬의 형성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그 같은 인류의 오래된 과제는 새삼 환기된다. 특히 합창/집단의 세계에서‘엇박자 D’는 타자화된 소수자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던 현실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작가가 탐문한 바‘엇박자 D’에 의한 절묘한 리듬의 세계는 매우 웅숭깊은 것이 아닐 수 없겠다.


리듬과 숨결의 소통을 위하여

소란스런 소리로부터 진정한 숨결을 지닌 리듬, 그 역동적이고 발견적인 가치를 모색할 수 있는 음악의 세계로 향한다는 것은, 넓게 보아 문학적 정의의 추구에 동참하는 것이나 한 가지다. 여기서 음악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것을, 혹은 리듬을 추구한다는 것을, 단지 좁은 의미에서의 음악적 리듬의 구성, 그러니까 선율과 화성의 요소에 국한해서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음악에서의 리듬도“음 길이와 그 강세만을 가지고 결정하기 어려운 복잡성” (서우석,『시와 리듬』)을 지니고 있거니와, 문학에서도“단지 언어의 객관적 사실들 속에서 작업하기 위해서, 즉 측정되고 객체화된 선조적 시간 속에 잔류하면서 창조적시간화의 행위를 무시할 때 리듬의 본질을 놓치고”(김성도,『기호, 리듬, 우주』)말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리듬은 변화무상하고 역동적인 불안정성 속에서 존재의 숨결과 기미들을 길어 올린다. 리듬은“흐름이자 동시에 과정”(김성도)이다. 현재 속에서 주체가 대상과의 구체적인 교섭과 대화 과정을 통해 역동적 의미를 창조적으로 생산해내는 게 리듬, 곧 존재의 숨결이다.

요즘 학문장에서 융합이나 통섭의 담론이 흔히 강조된다. 예의 담론이 지향하는바 역시 진정한 소통을 통해 존재의 리듬 내지 존재의 숨결을 회복하려는 방향에 맞추어져 있어야 하지 않을까. 리듬이 훼절된 존재 상태는 위험하다.위험 상태는 진정한 소통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부정적 소통을 촉진한다. 그러면 존재의 리듬은 더욱더 헝클어지고 악화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진실의 소통이 필요하다.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탐문하는 것이 바로 진실의 자리다. 그런데 그것이 파편적 진실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융합되고 통섭된 진실이라야 온전한 소통의 지평을 낳을 수 있고, 존재의 리듬, 존재의 숨결을 회복하는데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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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3 22:52


 

 


 

 





 

 













 

김경만(사회학과 교수)


학문에서의 소통이란 무엇이며 또 기능은 무엇인가? 대학원 신문사에서 소통에 관한 글을 부탁받았을 때 주저 없이 응낙한 이유는 내가 이 질문에 대해서 오랫동안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소통이란 그 사전적 의미가“막히지 않고 잘 통함”인데, 학문에서 막히지 않고 잘 통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보통 우리는 어떤사람이 꽉 막힌 사람이라고 할 때 이 사람과“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 철학과 사회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 주제였으며, 지금도 그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합리성 개념과도 소통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즉, 어떤 사람이 합리적(rational 혹은 resonable)인 사람인가라고 물어볼 때 우리는 소통이 되는 사람, 즉대화가 되는 사람을 말한다. 예를 들어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 아들과 아버지가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해보자. 아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아버지는 두 가지의 반응을보일 수 있다. 첫째는 아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 긍정적, 혹은 부정적 태도를 취하든, 그런 답에 대한 근거를댐으로서 자신의 답을 정당화하는 아버지들이 있고, 둘째는 아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 답할 가치가 없다고 하며 무시하는 아버지들이 있을 것이다. 바로 첫째 타입의아버지가 합리적이고 소통이 잘되는 아버지일 것이다.좀 더 현학적으로 표현하면 첫 번째 타입의 아버지는 계몽주의를 대변하는 비판적 합리성을 가진 아버지라고 표현할 수 있다. 즉,“대화”를 통해서, 혹은 더 나가서“논쟁”을 통해서 무엇이 합리적이고 정당화될 수 있는가를찾아내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합의에 이르는 것이“소통적 합리성”(communicative rationality)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판과 평가, 그리고 논쟁의 부재

짧은 글에서 더 복잡하고 현학적인 얘기를 하는 것보다 곧바로 이런 소통적 합리성이 국내의 사회과학, 인문과학계에 존재하는가를 얘기해보자. 학문에서 소통의 정도는 위에서 언급한 소통적 합리성이 학문에 참여하는 사람들, 즉“사회과학자들”사이에서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가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소통이누구와 누구사이에서 이루어지는가이다. 서구의 사회과학과 우리 사회과학만을 놓고 비교해 봤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사회과학자들, 즉 전문가(professional)들 간의소통이 서구에 비해서 매우 떨어지는 반면, 대중과의 소통은 매우 활발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 점은 금방 이해될 수 있다. 서구에 비해서 우리나라에서는텔레비전과 대중 매체, 예를 들면 신문, 혹은 일반 잡지-신동아 등-에 글을 기고하는 사회과학자들을 너무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들은 사회과학의 사명, 사회적 책임, 혹은 지식인의 사회적 기여라는 이름 아래 대중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때로는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강연하지만, 이런 형태의 소통은 위에서 언급한 합리적소통-즉, 대화 당사자 간의 소통-이라 할 수 없다. 왜냐면 이런 방식의 소통은 사회과학자가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대중에게 전해주는 것이기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소통은 대중이 사회과학자들의 일방적 지식전달에 대해서 반대나 이견을 표출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는 의미에서“쌍방적이며 합리적 소통”이라 할 수 없다.

이에 더해서 한국 사회과학이 안고 있는 소통의 문제는 한국의 사회과학자들은 정작 자신들이 속한 사회과학 장“내”에서의 소통은 등한시 한다는 데서 찾아 볼 수있다. 사회과학 장내에서의 소통이 원활한가를 측정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지표는 물론 학술지 안에서의 소통이다. 학술지에 내는 소위 학술적 가치가 있는 글들은 사회과학 장내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들끼리 만의“소통의 장”(communicative field)안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논문들을 학술지에기고만 할 뿐 이들 글들에 대한 상호 비판과 감시, 그리고 그에 따른 논쟁이 국내 사회과학계에는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국내 학술지에 서로에 대한 비판과 논쟁적 글이 실리지 않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로도 확인되지만, 여러 가지의 다른 방법으로도 입증될 수 있다.


관료주의화된 등재제도

우선 학술진흥재단의 등재지, 등재 후보지를 선정하는 제도를 보면, 과연 우리나라에 사회과학의 장 (field)-즉 전문가들만이 상호 작용하는 공간-이 존재하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왜 학술진흥재단에서 등재지 제도를 만들었을까? 나는 사회과학자들, 인문과학자들 중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의아해하거나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민주화를 부르짖는 민교협도, 또 개별 학회도 이에 대해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왜 등재지 제도가 만들어졌는가? 서구의 학술지가 어떻게 운영되는가를 살펴보면 답은 간단하게 나온다. 예를 들어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나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등 미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술지들이 SSCI(Social Science Citation Index)에 등재됐기 때문에 유명한가라는 질문은 정말 우스운 질문이다. 이들 학술지들은 Thomson사에서 SSCI를 만들기 오래 전에 이미 학자들 사이의 소통과 경쟁을 통해서 그 집단에서 가장 뛰어나고 창의력 있는 글이라고 평가 받은 글들만을 게재함으로써 그 권위와 명성을 쌓아온 학술지들이다. 즉, 서로의 연구에 대한 치밀한 비판과 논쟁을 통한 소통을 통해서 어느 학술지가 권위 있는 학술지인가가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술진흥재단에서 등재지를 선정하는 심사에 참여해본 사람들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에서 저명 학술지로 선정되는 것은 심사를 몇 명이 하느냐, 얼마나자주 출간되느냐, 게재 거부율이 얼마나 되느냐, 학술지를 발행하는 학회의 회원 수가 얼마나 되느냐 등의 소통의 본질적 의미와는 하등 관계없는 피상적 항목에 매겨지는 점수로 환산되는 지표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여기서 밝힐 수는 없지만 몇 년 전에 한국의 유수한 학회에서 초청받아서 강연했더니 자기 학회에 가입하라는 신청서를 주면서 꼭 가입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학회 회원수를 늘려야 자신들의 학회지가 등재지가 되는데 도움이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관료주의적 발상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데는 누구도 이견이 없겠지만, 그 책임이 바로한국의 사회과학, 인문과학자 자신들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는 거의모든 학회지가 등재지가“되어가고”있고, 현재 아닌 것들도 등재지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이제 그 원래의취지와는 반대로 등재지 제도는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왜냐면 모든 학술지가 등재지가 되어가고, 따라서 어느 학술지가 권위 있는 학술지인가를 구분해내려는 애초의 취지는 무색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인문, 사회과학을 막론하고 국내에서는 전문가들끼리 소통-지적 산물에 대한 상호 비판과 논쟁, 평가-이 부재한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그리고 이는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질적 저하를 불러오는 가장 큰 원인임에 틀림없다.


표절과 중복게재, 소통의 부재가 야기한
한국 사회과학의 질적 현실

사회과학자 상호 간의 소통의 부재를 여지없이 나타내는 또 하나의 슬픈 얘기를 덧붙이면서 이 글을 끝내고자 한다. 우리나라처럼 사회과학자들이 정치권에 흡수되어서 정치가로 변신하는 나라도 흔치 않다. 내가 얘기하려는 것은 사회과학자들이 정치하지 말아야한다 뭐그런 식상한 얘기가 아니라 소위 훌륭한 사회과학자라고 해서 학계에서 이름이 알려지고, 대중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 정치권에 발탁되어서 소위“인사청문회”에 회부됐을 때 거의 예외 없이 제기되는 표절, 중복게재 의혹이다. 연일 텔레비전 토론회와 신문, 잡지 등에 등장해서 사회, 문화, 정치, 경제에 대해서 마치 깊은 지식을 가진 것 같이 떠드는 사람들이 대부분 정치권에 발탁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거의 모두가 표절과 중복게재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정말 개탄해야 할 것은 이들이 표절하고, 중복 게재를 했음에도 이를 알아 채지조차 못한, 혹은-만일 사실이라면 더 슬픈-알았더라도 감히 폭로하지 못해온, 학자들 간의 소통이 부재하는 한국 사회과학의 현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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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3 22:35

을 허하라!

서강에는 대학원 신문이 없다. 신문이 없다는 것은 각 단과대학의 소식을 간추려 전할 매체가 없음을, 연구동향과 성과를 알릴 수 있는 소통(疏通)의 장(場)이 없음을 말한다. 소통의 부재는 필연적으로 단절을 낳고, 이러한 단절은 분과 학문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학문적 요구에 장애로 작동한다. 대학원의 목적이 지식인의 양성이라면, 그리고 이 지식인이 결코 고립된 영역에 한정된 기능인이 아니라면, 소통의 단절을 극복하고 틀지어진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모두에게 요구되는 소임이 아닐까. 때문에 신문을 만드는 것은 단지 하나의 매체를 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말 그대로 서로를 통(通)하게 하는 길이며, 동시에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작지만 견고한 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신문이 소통을 저절로 담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많은 경우 신문을 둘러싼 권력 다툼과 소통의 부재를 목도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이 그러할수록 더 치열하게 소통의 장을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소통이야말로 공감을 가능하게 하고 너와 나를 조우하게 하는 최소한의 그리고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해서 서강 대학원 신문은 ‘소통을 허하라’라는 기획 의도를 가지고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올 수 있는 마당을 펼쳐보이고자 한다. 가르치는 자의 목소리와 배우는 자의 목소리가 한데 엉겨서 밤하늘의 별 마냥 성좌를 이루어갈 때, 바로 그 곳에 꿈이 있으리라 믿는다.  

서강 안에 무수히 많은 얼굴을 담는다.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이질적인 얼굴들이 교차되고 중첩되어 흐릿하지만 얼핏 형상을 이룬다. 말없는 목소리들이 부활하고 얼굴 없는 면(面)들이 의미를 얻는다. 하지만 결코 하나는 아니리라. 때문에 하나로 응축되어 있는 지층의 한 허리를 버혀내어 그 속에 켜켜이 담긴 목소리들을 끄집어내는 작업은 다자들의 말을 복원시키는 정치적 울림을 얻는다. 그것은 말을 통하게 하는 ‘소통의 정치학’이자 잊혔던 존재를 상기시키는 ‘기억의 정치학’이다.

거창한 의도로 신문을 발간한다. 봄날의 노곤함과 존재의 피로함이 작업을 더디게 만들고 열악한 환경이 손끝을 무디게 만들지만 첫 술에 배 부르려는 욕심을 떨쳐버리고 여기 재창간호를 발간한다.  

편집장 박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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