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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42호] 꽃처럼 나답게 피어나는 것 (손은정)

예술이란 시간과 공간속에서 자신의 존재로 살아가는 행위 그 자체

- 꽃처럼 나답게 피어나는 것.


손은정_ 플라워 아티스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공대를 나왔고,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굳이 꽃을 배우러 가고. 그러한 과정은 어쩌면 남들에게는 너무 생뚱맞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내겐 공학을 하든, 글을 쓰든 ,예술을 하든, 이 모든 것들이 시간을 걸쳐가는 좌표점을 찍어가는 방식과 프로세스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좌표를 좋아한다. 내가 서 있는 공간과 시간에 ‘존재’를 표현하는 것. 우리는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라는 존재가 태어나서 무엇인가, 어떠한 존재로 존재한다는 것 그것을 인간은 끊임없이 증명해내고자 한다. 비록 한 점일지라도 나라는 존재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을 관계속에서든 시간 속에서든 밝혀내고자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이유인지도 모른다.

 딱 작년 이맘때 세운상가에서  ‘꽃, 시간의 강을 건너 시간과 만나다’ 라는 전시를 했다. 세운상가라는 우리나라 건축, 산업적으로 의미가 있는 ‘공간’ 에서 그 ‘시간’을 꽃으로 표현해내는 작품이었다. 세운상가는 1968년에 완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이다. 당시의 타워팰리스였던 그 세운 상가는 전후의 빈민촌을 밀어버린 한국의 토지개발과 건축의 상징이라 할만큼 의미있는 곳이다. 산업적으로 보자면 세운상가는 우리나라의 IT와 기술 산업의 메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이 곳에서 전시를 한다는 것은 ‘시간’ 을 고스란히 작품에 담는 것이다. 5층 중정에 장소를 잡았다. 햇빛이 들어오는 세운상가 5층 중정에 8층부터 5층까지 낚시줄을 이어 꽃들을 엮어 드리우고 시간의 흔적으로 탑을 만들었다. 세탁기, 텔레비전, 카세트 오디오 등의 80년대의 상징이던 가전들을 맨 아래에 버팀 삼아 그 위에 90년대 등장한 데스크 탑들과 뚱뚱이 모니터들 그리고 다이어트를 한 듯한 LCD 모니터들. 그리고는 그 위에는 나의 자랑이었던 1세대 아이팟, 폴더 폰, 시스코의 IP Phone 및 무선 Access Point 와 같은 2000년대 이후의 IT 장비들이 마치 탑처럼, 성처럼 그리고 무덤처럼 쌓여있고 그 군데군데, 부분부분을 각종  꽃으로 장식했다.  사실 그 꽃들을 통해 표현하고 싶은 것은 역시 ‘시간’ 이었다. 이제는 쓰지도 않을 그러한 기술의 흔적들은 그렇게 남는다 할지라도 ‘생명’ 과 사람의 흔적인 시간은 각기 다른 속도로 지고, 피고, 시들고를 반복하는 것을 전시 기간 1주일 동안 보여주고자 했다. 결국 시간의 한 시점에서 본다면 ‘기술’ 이란 것은 결국 정지해 있는 죽은 것이지만 생명은 매 순간 단 한번의 쉼도 없이 끊임없이 ‘살아 있는 것’ 이라는 의미에서 인간의 삶이란 것이 지극히 보잘것없고 무미해 보일지라도 얼마나 위대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또한, 꽃을 보이지 않는 낚싯줄로 꿰어 공중에 달아 늘어뜨린 것은 또 다른 기술로 인한 ‘공간’의 도래를 의미한다. 가상화와 클라우드를 통해 사이버 공간은 이제 또 다른 하나의 ‘공간’ 으로서 각자의 인격과 삶을 가진 공간이 되어버렸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를 통해 개인은 각각의 얼굴을 가지고 서로 공중에서 연결된 듯 연결되지 않은 듯 ‘소통’ 하고 있다.

사진1 | 세운상가에 전시된 작품 ‘Cross Time with Flowers (2016)’


 즉 꽃을 통해 기술과 사람, 사람과 기술이 뒤얶혀 있음을 표현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아우리는 ‘시간’ 이라는 것을 ‘세운 상가’ 라는 공간 자체가 무대가 되어 자연스럽게 녹여내고자 했다. 그러나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내가 전혀 계산에 넣지 않았던 그 공간의 ‘사람들’ 그들이  작품안으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세운상가는 우리같은 외부인들에게는 ‘특별한’  공간일지 모르지만,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고 생계를 이어오는 기술자분들, 상인분들에게는 ‘생활’의 공간이다. 그곳에 외부인들이 들어와서 어떤 행위를 하는 일들이 반복되면 그들은 피로감과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다. 막상 작품 하단의 기계들을 설치하는 동안에는 시큰둥하던 상가분들 그리고 기술자분들이 꽃이 등장하자마자 무언가 달라졌다. 사람들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향기를 맡으며 다가와서 말을 걸기 시작했다. ‘사람’ 이 작품속으로 걸어들어오는 순간이었다. 

 꽃! 아무짝에도 효용없고 관심도 없는 ‘꽃’ 을 시작하게 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왜 사람들은 꽃을 좋아하는가? 사람이 태어나도, 사람이 죽어도, 결혼이나 승진처럼 축하할 일이 있어도 반면 테러나 슬픈 일을 애도할때도 꽃을 준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다른 감정을 하나의 어떤 ‘것’ 이 표현할 수 있다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그것도 그러한 복합적인 의미가 한 나라, 문화권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것도 아주 먼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즉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러한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함께 전달하는 유일한 것이 꽃이라는 생각에 그 의미를 알아내고 싶었고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인간의 무의식에는 ‘꽃’ 이 어떤 식으로든 각인 되어 있고, 그것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무관심하던, 무뚝뚝하던, 오히려 조금은 성가셔하던 세운상가 입주자 혹은 각 상가/회사에서 일하시던 분들은 꽃이 들어오면서 너무나 달라졌다. 그들은 미소와, 관심과 격려를 보내기 시작했고 과자를 사먹으라며 간식으로 주시는 분, 화장실을 쓰게 해주시는 분, 꽃을 설치하는 과정을 구경하시는 분, 질문하시는 분들로 갑작스럽게 부산스러워졌다. 24시간의 설치작업은 말 그대로 꽃처럼 마음들이 피어난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더 놀라운 일은 설치가 끝나고 오픈식이 끝났는데 어느 한 70대 어르신 한 분이 한참을 내 작품 앞에 서 계시는 것이다. 감사하기도 하고 혹시 마음에 안 드시나 싶기도 해서 다가가서 말을 건넸더니 이 작품의 작가냐 물으신다. 그렇다고 대답을 드리니

 “아 여기 말이야 시간을 표현할 수 있는 더 오래된 게 하나 딱 있으면 딱 좋을 텐데. 나한테 1940년대 진공관 라디오가 있는데 말이야. 그게 여기 중간에 딱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아.”

 처음에는 이분께서 내게 진공관 라디오를 파시거나 대여하시려나 하고 오해를 했었다. 그러나 그 분은 정말 자신의 오디오가 그 자리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내게 공짜로 그 80여년된 진공관 오디오를 빌려주셨다. 작품 중앙에 아이팟과 나란히 배치를 하니 ‘화룡점정’ 이 따로 없었다.

내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하신 그 분. 그렇기에 그 자리에 IT의 시작이자 오늘날 자신을 여기 세운상가로 오게 한 진공관라디오가 ‘기술과 시간과 사람’ 을 이어주는 오브제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 이승근 오디오 기술장인. 그 분이야 말로 세운상가와 함께 한 사람 그 자체였다. 10대 시절, 진공관 라디오가 좋아서 배운 기술. 그때부터 지금까지 50여년의 세월을 함께 해온 세운상가의 기술장인 . 나의 작품은 결국 그의 ‘시간’을 만나 완성 되었다.

 나의 작품 전반을 아우르는 주제는 ‘사람과 시간과 기술’ 을 꽃으로 표현해내는 것이다. 사실은 세운상가의 ‘시간’ 의 강을 ‘기술(Technology)’이 엮어가는 과정을 꽃으로 표현하기 위해 처음에는 ‘세운상가’라는 건물의 상징성과 ‘역사성’을 중심으로 담으려 했었다. 그러나 이 살아있는 공간에서 ‘시간’은 결국 그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 들로 인해 녹아나고 그들의 직간접적인 참여로 이 작품은 완성이 되었다. 작품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오래된 가전들을 내게 보낸 이들의 사연. 그리고 세운상가의 상인들과 기술자들의 이야기 소리, 미소 그리고 심지어는 진공관 라디오까지. 그들의 이야기가 과정 중에 그대로 꽃처럼 녹아 들어갔다. 

  ‘꽃, 시간의 강을 건너 시간과 만나다’ 는 그렇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 태어나고, 사라지고,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과 기술을 담아내는 전시가 되었다. 아직도 긴 여운이 남는 이 전시는 아마 내 작품 생활에 가장 중요한 작품이 될 것임은 틀림없다. 장소의 시간성이 그대로 무대가 되고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꽃으로 표현되는 과정이 녹아 함께 설치가 된 이 작품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시간과 공간이라는 어떤 좌표 점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그것이 스스로에게이든, 사회를 향한 것이든, 자발적인 것이든 억지로 강요된 것이든 어떤 행위를 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삶이라고 정의한다면 나는 모든 ‘인간’ 은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예술이라는 것은 ‘살아가는’ 그리고 ‘살아내는’ 행위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이왕 해야 하는 것이라면 아름답게 해내고 싶다. 결국은 그것이 삶이고 , 삶은 그 하나하나가 예술 활동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한다. 언젠가 질 꽃이라면, 피는 그 순간은 내가 최고인양 피어낼 수 있는 그런 꽃처럼 여한 없이 아름답게 자기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그게 예술이지 다른 무엇을 예술이라 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