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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23호] 정치유머의 흐름과 형태

정치유머의 흐름과 형태
                                             
김재화(유머작가/ 언론학박사)

 

전통적으로 풍자와 해학을 아는 우리 민족은 웃음의 유산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정치혼란과 1948년 제헌을 겪으면서 우리의 상상력과 풍자의 정신은 급격히 둔화되고 말았다. 이승만 시절의 살벌했던 민간인 학살과 부역자 처벌이 지배한 시대에는 유머를 쉽게 드러낸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정치가 퇴화하면 사람들의 여유와 그 여유가 주는 유머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한 시기라 할 수 있다.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이승만의 정적 조봉임. 그의 자연스러운 정치행위가 적과 내통한 것으로 몰려 사형을 당해야 했던 현실은 그 자체가 비극을 담은 희극이자 희극을 담은 비극이라는 복잡한 현실이었다. 경제발전을 최우선으로 정치를 폈던 박정희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개성 없는 출생의 의미를 부여 받은 국민들은 정치(인)유머의 부존재 시대를 살며 사회적 웃음을 잃어갔다. 제3공화국 시절 ‘스마일 운동’이라는 관주도의 우민화 이벤트가 있긴 했으나, 그 또한 문명국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정신유린책에 지니지 않았다. 군사정권의 쌍생아로 태어난 전두환 시대에 시작한 대통령을 등장시키는 유머는 불법이었지만 구전으로나마 많은 종류가 전래되었고, 정체성이 모호했던 노태우 시절에는 특징 없는 유머가 노점상 상품처럼 간간이 등장했다. 문민의 기수 김영삼 시대에 이러서야 정치유머가 합법화되어 전해졌다. 적당한 참가와 표현방식을 찾지 못한 채 표류하던 유머는 인권 대통령 김대중과 참여정치를 표방한 노무현 시대에 이르러서야 다수 대중에 의해 생산되고 소비되기 시작했다.

 

한국 정치유머의 역사

 

8.15 광복으로 모처럼 국민들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 웃음이 가시기도 전에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했고, 나흘 뒤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이 때 명진과 박응수라는 코미디언은 미국인들과 비슷한 하이컬러 양복을 입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미국 놈 믿지 말고, 소련 놈에게 속지 마라. 일본은 일어나니 조선아, 조심하라!’ 이 개그는 국민들의 분노를 반일감정으로 승화시켰다. 이후 일본인들을 골탕 먹이는 코미디는 반세기가 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복진통일을 외쳤던 이승만 대통령은 민족 최대 비극인 6·25 전쟁은 막지 못했지만, 당시 그가 외쳤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문장은 코미디언 지망생들의 성대모사 예문이 되었다.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부패는 극에 달했다. ‘빽’과 ‘돈’은 그때나 지금이나 서민들의 불만을 자극했다고 하겠다. 전방에서 총에 맞은 병사들이 ‘빽’ 하는 비명을 지르고 죽는다는 자조 섞인 우스개가 그 시절의 시대상을 대변한다. 한편 이승만은 ‘사사오입’이라는 전대미문의 억지 산술을 유행시켰다. 제적의원 202명 중 3분의 2는 135명인데, 이는 사사오입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담꾼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무대 위에서 적극 활용했다.

“이봐 친구, 꿔간 돈 갚아야지.”
“여기 있네.”
“아니, 60환뿐이잖은가? 난 100환을 빌려줬는데.”
“이 사람, 사사오입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구먼. 60을 반올림하면 100이 되지 않는가?”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가 훔쳐 가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밤잠을 제대로 못 잔 소심함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사람에게서 유머를 기대한다는 것이 애초부터 무리였다. 선거 때마다 ‘이번 이승만 대통령 선거에 누가 출마한대요?’라는 식의 가치 의식이 실종된 말들이 유행했다. 1인 독주에 혐오를 느낀 이들은 입담꾼들의 혀를 빌려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풍자를 해봤지만, 기득권층은 어용 코미디언을 동원해 ‘갈아봤자 별 수 없다!’라고 받아쳤다. 기운을 잃은 사람들은 ‘구관이 명관’이라고 했으며, 당시 이런 한국의 정치유머를 본 영국의 더 타임스지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길 바라는 것”이라고 조롱했다.


의도적이었건 아니었건, 박정희는 코미디언을 정권의 홍보 수단으로 철저히 이용했다. 어쩌면 5공 정권은 박정희의 수법을 대물림했는지 모른다. 온 국민이 바보로 전락했던 그 시절, 1등공신은 단연 코미디였고, 전 국민의 우민화 작전 총 사령관은 배삼룡이었다. 연세대 최정호 교수는 배삼룡에 대해 “한국 현대화의 전위적인 ‘지진아’ 배삼룡은 그의 얼간이 짓으로 우리로 하여금 변화하는 시대를 충격 없이 받아들이게 해주었다”며 “그에게 위안을 받지 않은 근대화의 기수들이 어디 있을까”라고 표현했다. ‘합죽이’ 김희갑 역시 박정희를 도운 희극인이었는데 정권 홍보로 치자면 그 역시 배삼룡 못지않은 수훈갑이다. 그는 누군가 현 사회 행태를 따지거나 각종 규범의 독소조항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에이 모르는 소리!”라는 핀잔을 주었다. 이와 같은 말은 당시 중앙정보부 취조실에서나 들을 수 있는 추상같은 호령 이상의 효과를 발휘했다. 김희갑은 ‘팔도강산 시리즈’로 지방 각 도시의 눈부신 발전을 보여주는 공보담당 역도 완벽하게 수행했다. 구봉서 역시 1963년 6월부터 라디오에서 “이거 되겠습니까? 이거 안 됩니다!”라고 날마다 외쳤다. 산업화로 가는 길에 재를 뿌리는 반정부 인사에 대한 무언의 충고였다. 그러나 정권홍보의 선발대로 거론한 배삼룡, 김희갑은 국민의 편에 선 때도 많았다. 좌충우돌 방식으로 서민들이 감히 저지르지 못하는 미필적 고의사고를 내는 것이다. 파출소에서 경찰에게 대든다거나, 돈 많은 부자들을 골려 주는 코미디를 한 것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서민들은 그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대리만족을 느꼈다.


닭 모가지를 비틀었지만 새벽은 왔다. 긴급조치 시대가 끝나고 ‘서울의 봄’을 지나 5공화국이 탄생하면서 전두환과 이주일은 황제로 등극했다. 전두환이 헛기침이라도 하면 이 사회가 온통 뒤집어지곤 했으니, 정치의 연금술사였고, 이주일의 말은 온 인구에 회자됐으니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우상이었다. 5공 정권은 이주일의 머리카락을 빗댄 코미디나 저질 오리궁둥이 춤이 현직 국가원수를 모독하고 건건한 국민정서에 역행하며, 어린이들에게도 위해하다는 이유를 들어 방송출연 정지령을 내렸다. 비슷한 시기 배추머리 김병조 역시 지적 언어구사로 하이 코미디의 전형을 보여주었지만, 그런 그도 변절하고 말았다. 민정당(민주정의당)을 ‘정을 주는 당’, 통민당(통일민주당)을 ‘고통을 주는 당’이라고 말했다가 노도와도 같은 국민들의 힘에 한동안 방송을 떠나야만 했다. 그의 용비어천가는 실로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36%의 지지를 얻고 당선된 대통령 노태우는 늘 불안했다. 보통사람의 수수함을 보여주며 인기를 끌어올리려 했지만, 대통령 선거 이듬해부터 곤욕을 치렀다. 민심은 13대 총선에서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었다. 노태우의 ‘믿어주세요’는 성대모사의 달인 최병서의 입에서 딴죽이 걸리곤 했다. 노태우는 “나를 코미디 소재로 삼아도 좋다”고 말한 유일한 대통령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럴 코미디 소재로 삼은 경우는 많지 않았다.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이윤박최돌물깡…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지는 우리 통치권자 계보에 노태우를 ‘물’로 묘사했다. 훗날 그의 천문학적인 비자금이 탄로났을 때 코미디언들은 노태우의 ‘물’을 ‘식은 숭늉’이 아닌 ‘펄펄 끓는 물’로 고쳐 불렀다.


김영상 정권에서는 그의 사투리가 저절로 개그가 되었다.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던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을 무식한 사람으로 표현하는 코미디를 아주 싫어했다. 그런 YS의 심복 박종웅은 유머를 빌어 그의 주군을 변호했다. “YS가 당시 그린벨틀를 잘못 이해한 것은 사실이지요. 그러나 그는 우리나라 최고 지성인을 배출한 S대학 출신 아닙니까? 그의 머리를 의심해선 안 되죠.” 젊은 말재주꾼 엄용수, 심형래, 김형곤은 ‘밀실개그’를 통해 감히 김영삼의 머리에 자꾸 시비를 걸었다. 김영삼 대통령을 소재로 한 우스갯소리 모음집도 불티나게 팔렸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코미디는 르네상스 시대를 맞았다. 김대중 후보는 선거전에서 부드러운 유머를 구사하면서 냉철하고 이지적으로 보이는 이회창 후보와 차별화 전략을 펼쳤다. DJ는 다변가에 달변가다. 그는 우리나라 대통령 중 코미디언을 가장 많이 만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영국에서 돌아와 정계에 복귀한 뒤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총재로 있을 때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이경규가 간다’ 코너에 깜짝 출연해 코미디언 이경규와 장시간 이야기를 나눈 일화는 유명하다. 초기 김대중을 소재로 한 코미디는 주로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걷는 장면을 연출하는데 그쳤다. 이후 엄용수와 심현섭, 배칠수 등은 DJ 성대모사로 인기를 얻었다. 이런 코미디는 정치인 김대중이 대중 곁으로 다가서는 데 보이지 않는 도움을 주었다고 본다.


‘문전박대(文戰朴大)’를 넘어서


 지금 이 나라에서는 문전박대가 장난이 아니다. 문전박대(門前薄待)가 아니다. 문전박대(文戰朴大)이다. 문재인과 박근혜가 대통령을 하기 위해 싸우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서로를 향해 주고받는 말 속에는 차가운 겨울 칼바람이 불지만 간혹 유머가 싹트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얼마 전 박근혜 후보는 대학생들과 하는 토론회에서 이런 개그를 했다. “심장의 무게가 얼마인지 아세요? 정답은 ‘두근두근’ 네 근이에요. 여러분을 만나러 오면서 제 마음이 바로 그랬습니다.” 이 대목에서 상당한 갈채를 받았다. 한편 문재인 후보는 전국상공인과의 대화에서 애교 있는 푸념을 했다. “오랫동안 등산을 못했다.” 사람들이 의아해하자 “내년부터 북악산(청와대 뒷산)으로 등산을 다닐 수 있게 도와 달라”며 지지를 부탁했다. 안철수 전 후보는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중학교 때 성적이 반에서 중간쯤이었다. 수·우·미·양·가 중에서 수는 딱 한 군데 안철수라는 이름 속에만 있었다.”는 수준 높은 개그를 선보였다.


오늘날의 우리들 역시 거대한 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유머라는 작은 비틀음으로 사회를 비판할 수 있다. 정치유머는 어떤 사안에 대해 여론을 형성하고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관심을 도모하며 갈등의 해법을 구할 수 있도록 만드는 유용한 도구다. 정치유머의 생산자인 국민이나 웃음 산업 종사자, 그리고 유머를 구사하는 정치인은 정책 제언이나 일상적 발언에서 유머라는 활력제를 주입하는 데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