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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24호] 불안에 대한 감성적 전략 : 발터 벤야민의 경우

 

 불안에 대한 감성적 전략 : 발터 벤야민의 경우

 

 

 

김 남 시(이화여대 조형예술학부 교수)

 

 

동불안 automatische Angst/automatic anxiety : 트라우마적 상황에 처해있을 때, 다시 말해 내부 또는 외부에서 오는, 주체가 감당할 수 없는 과도한 자극의 상태에 노출되었을 때 주체의 반응. 불안 시그널과 대립관계에 있다.

불안 시그널 Angstsignal/signal of anxiety : 프로이드가 자신의 불안 이론을 수정하며 도입한 개념으로, 위험상황에 직면, 과잉자극을 통해 압도당하는 걸 막기 위해 자아에 의해 투입되는 준비를 지칭한다. 불안 시그널은 약화된 형태로 최초 트라우마적 상황에서 체험한 불안반응을 재생산하며 이것이 방어기제를 촉발시킨다.

경악 Schreck/fright : 주체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저항하거나 그를 지배할 수 없는 상태에서 맞게 되는 위험상황 또는 매우 강한 외적자극에 대한 반응.

J. Laplache, <Das Vokabular der Psychoanlyse>

 

 

 

       경악과 두려움 그리고 불안

        프로이드는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경악 Schreck, 두려움 Furcht, 불안 Angst을 엄밀하게 구분하기를 제안한다.

 

경악, 두려움, 불안은 부당하게도 거의 동의어적 표현으로 사용되고는 있지만, 이들은 위험에 대한 관계에 따라 서로 구분될 수 있다. 불안 Angst은 그 위험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 상황에서 어떤 위험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대비하고 있는 상태를 지칭한다. 두려움 Furcht은 두려워하는 특정한 대상을 요구한다. 반면 경악 Schreck은 위험에 대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위험에 빠질 때의 상태를 말하며, 그렇기에 놀라움의 계기를 강조한다. 나는 불안이 트라우마적 노이로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불안에는 경악으로부터, 따라서 경악 노이로제 Schreckneurose 로부터 보호하는 무엇인가가 있다.”1)

 

      경악은 주체가 위험에 대비해 아무 심리적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위험이나 과잉자극을 맞이할 때 생겨나는 반응이다. 과도한 자극이나 위험은 주체에게 트라우마를 일으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프로이드는 1차 대전 중 겪은 과도한 자극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은 노이로제 환자들을 연구한 바 있다. 우리 현대인들은 꽤 오래전부터 이러한 경악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심리적 방어기제를 발전시켜왔는데, 그것이 불안 혹은 불안 시그널2)이다. 불안은 자아가 아무 준비없이 위험상황에 직면, 과잉자극을 통해 압도당하는 걸 막기 위해불확정적인 위험이나 자극에 맞서 미리 마련되는 심리적 준비태세다. 우리가 사는 삶의 조건이 우리를 경악에 빠뜨리게 될 예기치 못한 위험과 자극들을 점점 더 많이 만들어낼 수록, ‘그 위험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대비하는불안도 그에 따라 복잡하고 다양하게 발전되어왔다. 현대를 불안의 시대라 부르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경악에 빠지게 할 만한 위험과 자극들이 풍부하게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잠재적 위험과 자극들에 맞서 대비하는 불안은 그만큼 더 확장되고 불확정적이 된다.

 

 

      ‘경험의 상실충격의 경험

      그런데, 이 불안이 촉발시키는 방어기제는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둔화시킨다는 것이다. 아직 무엇일지 모를 위험과 자극에 대한 심리적 준비 태세인 불안은 우리로 하여금, 잠재적으로 위험스러워 보이는 모든 자극들에 대해 의식, 무의식적으로 경계하며 거리를 취하게 한다. 1903년 발표한 <대도시와 정신적 삶>에서 게오르그 짐멜은 대도시인들의 삶의 태도를 감정적이기보다는 지적이고, 외적 자극에 대해 둔감 Blasiertheit’하며, 타인들을 대할 때에 거리를 취하면서 회피하는 속내 감추기 Reserviertheit’로 특징지었는데, 이는 대도시의 수많은 자극과 충격, 위험들에 대한 전형적인 방어 기제의 소산물이다.

이러한 충격방어 기제가 현대인의 지각구조를 변화시키고 있다고 생각한 발터 벤야민은 그로부터 경험의 상실이라는 테제를 이끌어낸다. 그에 따르면 개별적인 인상들에서 충격의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면 클수록, 그래서 의식이 자극 방어를 위해 더 쉴 새 없이 준비하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를 통해 의식이 그를 처리하는 데 더 성공하면 할수록 그 개별 인상들은 그만큼 더 적게 경험 Erfahrung 속으로 흘러들어가며, 더 많이 체험 Erlebnis의 개념을 채우게 된다.”3)

 

 

      우리가 우리 자신을 늘 다가오는 인상들에 대한 경계와 불안으로 채우고 있는 한, 도심지 거리를 이동할 때 마주치는 풍경이나 사람이든, 타인이 들려주는 기쁨과 고통의 이야기이든, 일상의 물건들에 침윤되어 있을 과거의 꿈이든, 이 모든 것들은 우리 내면에 침투해 우리의 경험이 되지 못한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겪는 것들은, 조심스럽게 피해가야 할 장애물이자, 내 삶의 안정을 위협할 외적 자극, 아니면 기껏해야 우리의 짧은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사라지는 정보가 된다. 이들은 우리의 견고한 의식의 층위에만 머무르며, 깊은 심연의 기억에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체험들이 될 뿐이다.

      작가나 예술가의 입장에서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소멸하고, 그 자리를 놀이공원의 바이킹이나 자이로 드롭처럼 의식적이고 기계적인 충격에 의한 짜릿한 체험들이 차지하게 되는 상황은, 시적, 예술적 감성의 위기에 다름 아니다. 이런 위기가 시작된 모더니티의 초입을 살았던 작가 보들레르는, 발터 벤야민의 탁월한 해석에 의하면, 그를 극복하기 위해 독특한 시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건 자극이나 위험을 기대하고 그에 대비하는 충격방어 기제를 작동시키지 않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건과 인상들을 불안을 통해 체험으로 만들어버리는 대신, 그를 충격의 경험으로, 프로이드의 용어를 따르자면, ‘경악으로 맞이한다.

 

정신 병리학에 의하면 트라우마 애호증 타입 traumatophile Typen이라는 것이 있다. 보들레르는 충격을 그것이 어디서 오든지 간에,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인격으로 맞이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이러한 정황을 보들레르는 하나의 끔찍한 이미지 속에서 포착하였다. 그는 어떤 결투 장면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예술가는 패하기 직전 경악 Schrecken에 질려 소리 지른다. 이 결투는 창작과정 그 자체이다. 보들레르는 충격의 경험을 자신의 예술작업의 중심에 두었다....몇 몇 동시대인들의 발언이 이것을 입증해 준다. 경악에 자신을 내맡긴 채 스스로 경악 Schrecken을 불러내는 것, 이것은 보들레르에게 낯선 일이 아니었다.”4)

 

      당연한 말이겠지만, 시인 보들레르가 선택한 방식, 곧 불안을 통해 충격과 위험에 대비하는 대신 경악에 자신을 내맡긴 채 스스로 경악을 불러내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위험과 자극들, 점점 더 불확정적이고, 점점 더 확장되어가는 잠재적 위험들 앞에서 위축되지 않는 어떤 용기를 필요로 한다. 아직 닥쳐오지 않은 위험들에 대한 불안을 키우는 대신, 그를 아직 맛보지 못한 새로운 인상으로 맞이하려는, 일종의 수동적 능동성이 요구된다.

 

 

      벤야민의 질문을 현재화하기

         <유동하는 공포>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에 의하면, 오늘날 삶의 조건이 만들어내는 불확실성은, 보들레르의 시대보다 훨씬 크고 강고해졌다. 근대화에 수반된 삶의 불확실성과 위험들을 기술적, 제도적으로 통제하려던 모든 시도들은, 역설적으로 더 심각한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한 위험을 양산해내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을 전 지구적으로 확장시켜 버린 세계화로 인해 이제 그 어느 곳에서도 좀처럼 안전한 쉼터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20세기 초 발터 벤야민이 던졌던 질문을 오늘의 조건 속에서 다시 제기해보아야 한다. 현재의 삶의 조건 속에서 생겨나는 불안은 20세기 초의 불안과는 어떻게 다를까. 이것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 방식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발터 벤야민이 당대의 불안에 맞서 내세운 미적/감성적 전략은, 충격과 자극에 자신을 내어맡기고, ‘경험의 빈곤을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긍정적 야만의 계기로 삼으며, 고립된 개인의 어두운 성채에 숨는 대신, 자신의 삶을 기꺼이 투명하고 개방된 유리로 된 방으로 공공화시키는 느슨한 자아의 전략이었다. 글로벌하고 유동적이 된 오늘날의 불안에 대해서도 이 전략이 여전히 유효할까. 아니면 이는 오늘날의 조건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유예된 가능성일까.

 

 

 

각주

1)  Sigmund Freud, Gesammelte Werke, XIII,10.

2)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등장하는 경악불안의 개념은 프로이드가 자동불안불안 시그널의 대립으로 말하려 했던 것과 동일하다.

      J. Laplanche, Das Vokabular der Psychoanalyse, 457.

3)  Walter Benjamin, Charles Baudelaire, 111.

4)  Walter Benjamin, Charles Baudelaire, 112. 이 구절에 대한 국역본 번역 ( <벤야민 선집> 4, 193)은 여러 가지 점에서 오해의 여지가 많으므

     로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