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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23호] 정치와 유머라는 언어미학

정치와 유머라는 언어미학

                          

 한승헌(변호사, 전북대 석좌교수)

 

감동, 친화력, 인기, 동락(同樂) - 유머 또는 해학의 이런 효험은 인간의 삶을 훈훈하고 아름답게 감싸주는 묘약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다름 아닌 정치의 요체와도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치 내지 정치권에서 유머는 성인교육이라도 받아야 눈이 뜰 수 있는 소외 종목이 되고 말았다. 정치의 장(場)과 정치인의 입에서는 직설, 막말, 야유 또는 비속어가 난무한다. 정치의 수준이자 인격의 수준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직구와 와일드피칭만 가지고는 야구의 재미도 없고 관중도 권태롭고 경기에서도 이기기가 힘들다. 언어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서양 사람들은 유머로 스피치를 윤택하게 하는데 동양 사람은 통속적 어휘로 스피치를 꺼칠하게 만든다.  미국 클린턴 정부의 노동장관 라이슈는 체구가 작은 사람이었다. 그는 보도진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Contrary to your impression, I am standing." (여러분에게는 그렇게 안 보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지금 서 있습니다.) 나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 정치에 입문하려는 친구가 사무실을 마련하고 집들이를 할 때였다. 그는 키가 매우 아담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축사를 했다. “김 위원장은 다른 사람과 달리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도 여러분을 계속 우러러 볼 것입니다.”

한 나라 정상들의 유머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끈다. 백악관을 방문한 후진타오 주석에게 한 기자가  중국의 인권문제에 관한 질문을 했다. 그러나 후 주석은 시종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다음 차례의 기자가 왜 함구하고 있느냐고 묻자 후 주석은 이렇게 받아넘겼다. “나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질문하는 줄 알았다.” 기자회견장은 폭소로 넘쳐났다.

프랑스가 사회당의 미테랑 대통령과 보수파인 시라크 수상의 공동정부에 의해 통치되고 있을 때의 이야기. 미테랑이 “프랑스에서 출산율이 높아진 것은 사회당 정책의 성공 덕분이다.”라고 하자 시라크 수상이 이 말을 받아쳤다. “출산율이 높아진 것은 프랑스 국민 개개인의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대통령도 부인치 못할 것이다.” 은근한 표현 같으면서도 날카로운 반론이 번쩍이지 않는가? 링컨이나 처칠의 유머는 널리 알려진 고전이 되어서 여기서는 재탕을 피하기로 한다.
한국 정치인 중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해학을 내세울만하다. 그 분은 황당한 ‘내란음모사건’으로 복역하던 중 추방반 망명반으로 미국으로 간 지 2년 만에 전두환의 저지를 무릅쓰고 귀국을 강행했다. 같은 비행기에 몇 나라의 정치인, 외교관, 언론인, 학자 들이 동승하고 입국한 사실을 들어 정부측에서 ‘사대주의’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대해서 디제이는 “내가 그들의 뒤를 따라다녔다면 몰라도 그들이 나를 따라왔는데 왜 내가 사대주의란 말인가?”
멋진 일격이었다.

근엄한 자리에서 긴장을 푸는 유머는 그것대로 소중하다. 국가원수의 근무공간인 청와대에서 내가 살짝 유머를 날린 경험이 있다. 청와대에서 지난날 민주화운동으로 고난을 겪은 인사들을 초청하였다. 오찬이 끝난 뒤 좌중이 돌아가며 한 말씀 씩 했는데, 한 분이 ‘청와대는 감옥과 같은 곳’이라고 했다. 외부와 단절되어 있고, 부자유스럽기도 하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달리 볼 수도 있기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다. 감옥은 들어갈 때에는 기분 나쁘고 나올 때는 기분이 좋은 곳인데, 청와대는 이와 반대로 들어갈 때에는 기분이 좋은데, 나올 때는 기분이 별로 안 좋은 곳이다.”

정치인은 유머를 구사해야 할 주체이지만 오히려 그 객체 또는 대상으로 동원(?)되기도 한다. 전에 어떤 최고위직 인물이 ‘석두’라는 별명으로 회자된 시절이 있었다. 덩달아 그런 호칭을 입에 담다가 붙들려 간 사람이 처벌을 받았는데, 죄명이 명예훼손이 아니라 국가기밀누설죄였다는 이야기. 함께 끌려갔던 친구는 겁이 나서 ‘석두’라는 말 대신 ‘위대한 지도자’라고 했더니, 무죄 석방은커녕 ‘너는 허위사실유포죄다.’라며 잡아가두더라는 것.

정치인과 돈의 관계는 여러 부조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국회의원과 강도 중에서 누구를 만나겠느냐?’는 물음에 대한 정답은 ‘강도’라고 한다. 강도는 한 번 털리면 끝나지만, 국회의원은 두고두고 손을 내밀기 때문이라고 한다.

 

드물기는 하지만 우리 정치인 중에서도 수준급 유머를 남긴 이들이 있다. 장관 후보자의 국회 청문회를 앞두고 청와대 비서실장이 야당 수뇌부를 찾아왔다. 정부로서는 최선을 다한 인선이니 허물이 있더라도 너그러히 덮어달라는 것이었다. 듣고 있던 야당 대표가 말했다. “그 많은 허물을 다 덮자면 아주 넓은 담요가 필요하겠는데요.” 여당의 한 간부는 정치 철새에게 공천장을 준 것을 비난하면서 “사람을 공천해야지, 왜 새를 공천하느냐?”고 비꼬았다.
핏대를 올리며 험구를 늘어놓는 것보다는 훨씬 운치가 있어서 좋다.

유머는 먼저 상대에게 어떤 예단이나 의문 또는 궁금증을 갖게 하고, 막판에 비약, 의외성으로 역전을 시키는 수순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노동자가 어렵게 사장을 면담한 자리에서 ‘밀린 월급을 주십사’고 간청을 했다. 뜻밖에도 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자네를 내 자식, 우리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네.” 이 말에 감격한 그 젊은이는 ‘더구나 그렇다면 밀린 월급을 주셔야 하지 않느냐’고 호소한다. 그러자 사장 왈, “아 이 사람아, 가족끼리 일 해주었다고 돈을 내라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의외성과 역전의 한 보기다.

 

선거를 앞두고 두 여자가 주고받는 말. “난 후보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투표하러 갈 생각이 없어!” 다른 여성은 이렇게 말한다. “난 후보자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투표할 마음이 없다” 참 시니컬한 말이 아닌가? 언론의 황당한 정치기사를 꼬집는 이런 유머도 재미있다. 워싱턴의 한 밤중에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자다가 일어난 꼬마가 국회의원인 아버지를 깨웠다. 그리고 왜 이렇게 천둥이 치냐고 물었다. “누군가가 엄청난 거짓말을 하니까 하늘이 진노해서 벼락을 치는 거란다.” 아버지의 이런 대답에 꼬마는 다시 묻는다. “모든 사람이 다 잠들어 있는 이 한밤중에 누가 거짓말을 해요?” 아버지의 대답은 이러했다. “바로 지금 위싱턴 포스트의 윤전기가 돌아가고 있는 참이거든.”


집권세력은 흔히 전 정권에 책임을 떠넘긴다. 요즘의 대선에서도 그런 억지가 유행이다. 미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역대 대통령 중 전임자 탓을 하지 않은 사람은 조지 워싱턴 한 사람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초대(初代)였으니까. 유머에는 이런 묘미가 있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유머는 모르면서도 유머 이상으로 ‘그야말로 웃기는’ 언동을 들어내기도 한다. 연평도가 북의 포격을 당한 뒤 군복을 입고 현지에 나타난 여당 대표라는 사람이 보온병 두 개를 들고 카메라 앞에서 “이 게 바로 북에서 쏜 포탄입니다. 포탄!”이라고 외쳐서 큰 화제가 되였다. 그도 모자랐는지 그는 젊은 여성 연예인들 앞에서 지속적으로 히트를 쳤다. ‘룸에 가면 (성형수술을 하지 않은) 자연산을 더 좋아한다.’고.


이런 식의 저질 개그는 어쩌면 이 나라 정치인 내지 정치의 수준을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거치른 정치풍토의 개선을 위해서도 정치인의 언어 구사에 좀 더 격조와 품격이 배어나야 하고, 부드러운 유머로 친화력과 공감을 높일 수 있어야 한다. 날카로운 비판도 점잖은 비유와 상징 언어로 표현할 줄 아는 교양과 여유를 갖는다면 살벌한 정치현장의 소음이 조금은 줄어들 것이다.  어찌 정치인뿐이겠는가?  각계의 국민 모두가 넉넉하고 교양 있는 언어생활을 통하여 평화와 운치를 누릴 줄 알아야 세상이 좀 업그레이드 될 것이다. 그런 삶의 내면이 유머 또는 해학이란 언어의 미학으로 가꾸어진다면 정치를 비롯한 공동체사회 전반이 훨씬 평화롭고 화목해지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도 유머나 해학은 이제 선택 아닌 필수과목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