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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3호] 욕망과 금기의 경계에서 번민하는 사랑



우리 사회엔 자신의 열애를 위해 경계를 넘나드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숨고 도망치고 변신한다. 그리고 괴로워한다. 열외하지 않고서는 열애를 할 수 없는 딜레마에서 그들은 진실과 거짓,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경계를 만들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몰래 그어 놓은 선을 밟고 있을 뿐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을 화두로 성적 소수자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들어보도록 하자.


송혜림(영화감독)


우리의 경계를, 이탈한 그들

푸른 새벽, 광활한 록키산맥을 배경으로 한 대의 트럭이 지나간다. 트럭은 어느 컨테이너 앞에 도착해 한 남자 (애니스)를 내려놓고 다시 길을 떠난다. 이제 막 소년티를 벗은 듯한 남자는 작은 보따리를 든 채 컨테이너 앞을 서성이고 잠시 후 좀 더 매끈하게 생긴 또 다른 남자(잭)가 도착한다. 두 사내는 한참동안 말 한마디 나누지 않지만 은근히 서로를 의식한다. 적극적인 시선을 보내는 쪽은 나중에 도착한 잭이고 어색한 듯 눈길을 피하는 쪽은 먼저 도착한 애니스다. 첫 만남에서 두 남자가 주고받은 그 시선의 방향은 이후 20년 동안 그들이 나누는 사랑의 방향과도 꼭 닮았다.

이안 감독의 2005년 작 <브로크백 마운틴>은 두 남자의 짧은 만남과 긴 그리움에 관한 영화다. 영화 속의 두 남자가 비밀스러운 관계를 20년 동안이나 유지하면서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일 년에 단 며칠, 오직 브로크백 산 속에서 뿐이다. 열애하면서도 철저히 열외 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비극에는 과연 정당한 경계가 존재할까. 영화는 그 경계를, 제도권과 그 밖의 상황들로 차분히 정리한다. 특히 애니스는 동성을 사랑하지만 스스로 정체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 또한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놓지 못하며, 죄의식에 시달리고 주변의 시선을 두려워한다. 이러한 그의모습은 동성애가 진정으로 이해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대다수의 동성애자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삶의 모습이기도하다. 그 비애는 정당하지 않을지언정 어떤 현실 안에선 필연적인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초점은 동성애의 본질적 탐구가 아니라 두 연인의 힘겨운 사랑과 좌절이란 멜로드라마에 맞춰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단순하게 (남녀 간의 사랑과 마찬가지로)‘보편적 사랑’이란 틀에서 이해하는 게 곤란한 이유는, 동성애란 특수성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보편적 휴머니즘의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얼핏 관대해 보이지만 사실 너무나 단순하고 추상적인 발상 아닌가. 동성애는 취향이 아니라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바로 그 특수함, 대다수의 이성애와 ‘차이’를 인정받으면서 존재해야지, 추상적 휴머니즘으로 타자의 영역 안에 억지로 포함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에서 동성애의 이해는 (호의적이라 할 경우에도) 이처럼 어설프고 불분명하다.

흥미와 슬픔 사이의 외줄타기

2010년 한국의 상황은 영화의 배경인 1960~70년대 미국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동성애에 대한 인식은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했고 대체로 무관심하거나 부정적이며, 혐오와 경멸의 태도는 노골적이기까지 하다. 사회적 약자를 조롱하는 것이 비난 받는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성 정체성에 대한 반응은 너무도 자유분방하다. 세상이 변한만큼 동성애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많아졌지만 그런 태도에도 얼마간의 호사가적 호기심이나 인격적 자기만족을 느끼려는 의식이 깔려있는 게 사실이다. 사람들에게 동성애란 여전히 불편한 문제고 그저 자기 일이 아니라면 은폐하거나 외면하고 싶은 무언가일 뿐이다. 이런 현실에서 동성애자들은 대다수의 이성애자들에게 동화된 척 하거나 아님 스스로 배척당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지금도 종교계를 비롯한 여러 집단과 세력이 동성애를 이런저런 이유로 반대하고 부정한다. 하지만 동성애의 정당성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명백한 건 그것이 언제나 존재했고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공론의 장에서의 제대로 된 논의도 없이 언제까지나 주변인들의 문제로만 방치할 순 없는 이유다.

그나마 최근 들어 동성애를 소재로 삼은 드라마와 영화 등이 심심찮게 등장하면서 공개적인 주목을 받는 경우가 많아졌다. 방송국 시청자 게시판이 동성애에 대한 찬반 공방으로 뜨겁게 달궈지고 있고 일부 종교 단체에선 우려와 유감의 뜻을 담은 글을 발표하곤 한다. 사회는 여전히 분열된 양상을 보이지만 어쨌거나 공론의 장으로 진입한 것만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만 이러한 미디어에도 우려할만한 점은 잔재한다. 이제까지의 매체들은 동성애를 직시하기보다 단순한 흥미, 혹은 유행코드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동성애의 이미지를 왜곡하고 판타지를 양산하여 편견을 조장하는데 일선에 있었다. 실제로 다수의 일반인들은 미디어를 통해 동성애 혹은 동성애자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그러나 모든 동성애자가 <섹스 앤 더 시티>의 뉴요커처럼 세련되고 감각적이며 부유하진 않다. 또한 제목도 없는 포르노의 주인공처럼 변태적이지도 않다. 적어도 미디어를 통해 머릿속에 각인된 이미지와 정확히 반대 지점에 서 있는 동성애자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그만큼 사회의 이면을 드러내려는 미디어의 시도는 진정성 있는 성찰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다수의 너저분한 흥미들은 소수의 슬픔으로 남겨지게 될 뿐이다.

진실에 대한 아주 사소한 배려

소수자에 대한 이해심은 그 사회 인권의 척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성애를 반대하는 정권이 등장한 마당에, 성적 소수자의 인권이 신장될 기미는 크지 않다. 더욱이 동성애에 대한 정당성 역시, 이성애자들 사이에서 판단하려는 작당도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이다. 우선은 찬성이니 반대니 혹은 그 정당성을 판단하겠다는 태도가 문제다. 고작 그들이 판단한 범위는 생물학적 환원주의에 (생식의 본능) 매몰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정작 자신들이 생식 이외의 성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에 대해선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오로지 이 문제가 기호의 차이라면 정당성을 판단하는 행동에 오류가 생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믿고 있는 생물학은 이제 던져버려야 할 것이다. 그들은 현재 믿고 있는 것과 믿고 싶지 않은 것 사이에서 자가당착을 반복하는 중이다.

성에 대한 관념은 역사처럼 겹겹이 싸여진 벽 높은 문화에 속한다. 그만큼 변화하기가 쉽지 않다. 필연적으로 인내심이 요구된다. 하지만 망연히 세월을 기다리기엔 소수자들의 열애는 잔인한 열외를 지속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포용과 배척 사이에서 어떤 태도를 향해 가야한다. 다만 관용이라는 미명하에 성적 소수자들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여긴다면 열외의 대상을 더욱 고착화 시키는 행위에 머물게 된다. 그들의 하염없는 주장도, 우리의 거짓말 같은 이해도 우리와 그들의 차이를 인정하는 아주 사소한 배려 이후에 필요한 것이다. 혹시 이정도의 배려도 가당치 않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사랑을 위해 산속으로 떠날 용기도 없는, 열애에서 열외 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