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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8호] 세계없는 세계의 폭력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교수)

근대의 생명권력이 전체화시키면서 또한 개별화시키는 권력이라고 말했을 때, 푸코는 자신이 얼마나 헤겔과 닮은 생각을 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전체화시키면서 개별화시키는 권력으로서 근대 권력을 해부하는 것이야말로 헤겔의 가장 독특한 업적이기 때문이다. 아마 몇 가지 유예조건을 달고 적절하게 손을 본다면 우리는 푸코가 후기에 전개했던 생명권력 분석이 법치국가를 분석한 법철학에서의 헤겔과 얼마나 흡사한지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주권적이고 사법적인 권력의 모델을 집요하게 비판한 푸코는 실은 그와 똑같은 노선을 따라 나아갔던 헤겔(알다시피 헤겔은 홉스와 루소로 대표되는 주권적인 권력을 집요하게 비판하지 않았던가)과 일치하지 않는가, 무엇보다 주체화되지 않은 채 존재하는 개인은 불가능하다는 푸코의 집요한 주장은 가족-시민사회-국가의 변증법을 통해 자신을 개인으로서 동일화하면서 동시에 탈동일화하는 과정이 근대 사회의 특징이라는 헤겔의 청사진과 겹쳐지지 않는가, 등등. 아마 둘이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점을 찾는다면 푸코에게 있는 ‘자기의 윤리적 실천’이 헤겔에게는 없고, 헤겔에게는 있는 인륜성(Sittlichkeit)이 푸코에게는 없다는 점일 것이다.

전연 양립할 수 없는 자리에 놓인 두 철학자가 동일한 질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 그리 큰일은 아닐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반대의 방향으로 치닫는, 영원히 조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철학자를 관류하는 물음일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 주체(화)란 쟁점이다. 그러나 이 질문과 상대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이제 거의 바닥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헤겔과 푸코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다.

폭동의 이유 없음 그리고 사회(적인 것)의 소멸

이를테면 최근 영국의 런던에서 점화되어 번져간 폭동을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폭동은 발전한 서유럽의 한 국가에서 벌어졌다는 점을 빼고도 그것의 이유 없음이라는 점으로 인해 많은 이들을 당혹스럽게 하였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거의 연중무휴로 벌어지는 폭동과 시위, 테러 소식을 접하고 있다. 그래서 어지간한 집단적인 분규는 뉴스감도 되지 않는 듯이 심드렁하게 대한다. 아랍 어느 도시에서의 유혈 폭동에 뒤이어 남미 어느 도시에서의 대규모 시위 소식으로 이어지는 화면을 바라보며, 우리는 세계의 시간표 속에 폭동과 변란이 항시 일과처럼 포함되어 있다는 사악한 착각에 빠질 지경이 되었다. 그런 터에 런던을 비롯한 영국 여러 도시에서 벌어진 폭동은 흔하디흔한 것이 되어버린 소동 가운데 하나쯤으로 여겨도 무방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폭동이 별난 관심을 끈 이유는 단연 그것이 보여준 어떤 특색 때문이었다. 알다시피 그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폭동이었다는 점에 있다. 폭동이 계속된 며칠 간 그 폭동은 마치 이 몸짓은 과연 무엇을 겨냥한 것인지 알아 맞혀 보시오라는 블랙유머가 뒤섞인 퀴즈처럼 여겨졌다. 폭동에 참가한 청소년들은 으리으리한 보석상이나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명품을 파는 고급 상점은 제쳐두고 동네의 만만한 가게들에 진열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물건 나부랭이들을 털었다. 하층 계급들 사이에서 공적(公敵)으로 취급되었을 법한 이들은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않은 채, 기껏해야 몇 푼 더 벌거나 아니면 동네의 돈 잘 버는 이웃쯤이었을 이들의 재산을 약탈했다. 이런 탓에 그 폭동은 우스개 같은 “약탈적 쇼핑 폭동”이라는 이름을 얻을 지경이 되었다. 물론 폭동을 일으킨 자들이 모르는 이유를 그것을 관전하는 이들이 시끄러우리만치 열심히   떠드는 일은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사회학적인 풍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들이 제시하는 그 모든 설명을 유효하게 만들어줄 ‘사회(적인 것)’란 것이 사실상 사라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19세기 후반 이후 사회과학이란 것이 생겨나서 열심히 했던 일 가운데 하나는 자기 나름의 과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집단적인 행위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집단적인 행위는 더 이상 다른 세상을 만들겠다는 정치적 열정이 아니라 잡다한 사회적 문제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인종문제, 세대문제, 빈곤문제, 여성문제 운운으로 이어지는 숱한 사회문제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영국에서의 ‘약탈자들의 쇼핑 폭동’은 무슨 문제일까. 당연히 사람들은 이를 사회문제라는 감광판 위에 놓고 이를 인화하려 할 것이다. 사회적인 것에 관한 과학적 지식의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초상을 판독하면서 각자 원인이라 할 만한 것을 결정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무망한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서 말했듯이 그런 분석을 쓸모 있게 만들어 줄 조건 자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인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시야에서 스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이런 전환을 가리키는 이름이 신자유주의이고, 신자유주의를 선구하였던 저 유명한 영국 수상, 대처의 유명한 발언 가운데 하나가 “사회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음을 상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인륜성의 정치, 동일화와 탈동일화 사이에 놓인 갈등을 해결하는 실천

그렇다면 영국에서 터져 나온, 그리고 많은 이들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이 수신자 불명의 폭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마 에티엔 발리바르라는 프랑스 철학자의 생각을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될 듯싶다. 그는 근대 정치를 구성하는, 환원 불가능한 세 가지의 정치 형태를 분석하며, (정치의 자율성에 해당하는 ‘해방’의 정치, 정치의 타율성에 해당하는 ‘변혁’의 정치에 더해) 정치의 타율성의 타율성으로서 잔혹에 대응하는 인륜성의 정치란 것을 꼽는다. 그가 우리에게 익숙한 자유와 평등의 정치에 더해 인륜성의 정치를 추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인륜성의 정치란 것이 동일화와 탈동일화 사이에 놓인 갈등을 해결하는 실천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동일화와 탈동일화란, 이미 주어진 세계 안에서의 정치를 다루는 해방과 변혁의 정치와는 달리 세계 자체의 가능성을 다루는 정치를 말하는 것이리라. ‘어떤 무엇’이지 않은 세계란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또 그런 세계란 것이 바로 그 세계를 인지하고 체험하는 주체 없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그러므로 이러한 세계/주체의 발생이란 다른 말로 하자면 사회의 (불)가능성과 관련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대가 동일화/탈동일화의 정치, 즉 인륜성의 정치를 효과적으로 통과하지 못할 때, 우리는 세계/주체의 발생이 저지되고 억류되는 과정에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아마 발리바르가 동일성으로 전환되지 못한 채 폭발하는 적대의 힘을 표현하기 위해, 적잖이 느닷없고 또 어색한 잔혹성(cruelty)이란 개념을 통해 가리키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가 섬뜩하게 묘사하는 ‘초주관적인 폭력.’ 마치 빙의(憑依)에 걸린 듯이 어떤 알 수 없는 자신 안의 사물(the thing)이 자신을 휘두른다는 느낌 속에서 나타나는, 다시 말해 자신의 주관적인 반성과 의식을 초과하며 분출하는 폭력. 그리고 어떤 객관적인 효용도 만족도 기대할 수 없으며 심지어 그에 반하면서 발생하는 또 그것을 초래한 어떤 객관적인 원인을 고정시킬 수 없는, ‘초객관적인 폭력.’ 이 두 가지 폭력 모두는 사회적인 것을 가능케 하는 구성적인 조건이라 할 적대란 것이, 동일화/탈동일화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함으로서 초래하는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거의 매일 목격한다. 언젠가부터 우리말에서도 체념적으로 정착하게 된 저 악명 높은 “묻지 마” 운운과 결부된 폭력.

어쨌든 세계 없는 세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다면 이 폭력을 어떻게 동일화/탈동일화의 과정을 통해 전환할 것인가. 물론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가 무엇인가를 감지하고 표상할 수 있게 하는 가상을 생산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잘하고 있을까?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도록 만들었던 금융위기 이후, 우리가 처한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실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그래서 정작 올 것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무한히 연기된 뒤틀린 종말, 즉 재탄생을 위한 순간을 갖지 않은 채 지속되는 영구적인 종말이라는 체념의 세계 아닐까. 어디에서나 유혈낭자하고 잔인한 폭력이 벌어지고 또 그것이 착취를 위한 형태로도 저항을 위한 형태로도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공통의 세계를 구축하지 못할 때, 그리고 정치적 주체의 동일성으로 전환되지 못할 때, 얼굴 없고 한계 없는 폭력이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대중매체에서 사흘이 멀다고 지겹게 마주하는 농담 같은 자유주의적인 흥분, 이를테면 학교에서의 체벌이나 군대에서의 폭력 비판에 속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또 알려지지도 않는 채권추심원의 폭력, 주가와 평판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될 만한 일이라면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 기업의 폭력 등에 비추면 폭력의 축에도 못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참담한 일은 그런 일은 폭력 축에도 끼지 못한 채, 인간의 사악한 본성에서 말미암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법과 믿음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완벽하게 도구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그 잔혹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