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4.10 20:42

 

 

 

겸멸(謙蔑)

다른공부를 위한 방법

 

조효원(문학평론가, 서울대 독문과 박사과정 수료)

 

   두 개의 감정. 지루함과 압박감. 이 두 가지 근본감정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사회와 상아탑의 어중간 지대에서 방향도 목적도 의미도 모른 채 서성대고 있는 우리 모두를. 선생과 선배는 무언가를 이룬 듯 보이지만 실상 한줌의 성취 위에서 망연자실 무기력한 모습으로 지루한 듯 제자리걸음만을 반복할 뿐이고, (미래의) 제자와 후배들은 많은 시간과 밝은 미래를 가진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부와 학문의 가치 따위 전혀 안중에도 없이 (취업과 생존의) 압박감을 이기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부를 소명(혹은 알리바이?) 삼아 하루하루를 태워가는 우리는 어떠한가? 한줌도 안 되는 실적을 발판으로 위태롭게 어딘가를 향해서 나아가려 애를 쓰지만, 우리가 이루게 될 모든 성취 역시 머잖아 미래 세대의 비웃음만을 살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사태는 이렇다. 지루함 속에서도 우리는 압박감을 느낀다. 거꾸로 압박감 아래에서조차 우리는 지루함을 즐긴다. 지루한 시간은 생각보다 꽤 매력적인 것이다. 아무도 읽지 않을 논문, 내가 썼지만 내가 저자일 수 없는 논문을 위한 공부에 쏟아 붓는 징그러운 시간에 견주자면 말이다. 세상에 논문보다 더한 악마가 있을까.

 

악몽을 지나 현기증으로

 

   당신은 한밤에 긴 터널을 걸어 통과한 경험이 있는가? 터널 밖은 온통 까만 어둠이고 터널 안은 듬성듬성 뿌연 어둠인 시간에. 팔을 뻗으면 건드릴 수 있는 거리에서 번들거리는 자동차들은 친절한 네비게이션의 지시에 따라 가늠할 수 없는 속도로 달려지나가고, 걸어온 거리도 걸어갈 거리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지점에서, 문득, 지친 걸음을 멈추었을 때, 그 순간 , 이토록 초라하고 가난한 익명의 , 파도처럼 슬픔처럼 엄습하는 잔인한 세계감(世界感), 당신은 느껴본 적이 있는가? 슬프게도 삶 속에는 이토록 기이하고 끔찍한 순간들 역시 엄연히 존재한다. 두 번 다시 지나고 싶지 않은, 단 한 번이라도 더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 공부라는 짐을 어깨 위에 짊어진 여러분 모두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논문이 바로 그런 시간이라고. 세상에 논문보다 더 떠올리기 싫은 악몽이 있을까.

   도시라는 밭에는 나무 대신 아파트가 자란다. 나와 여러분은 대개 이 아파트 나무에 매달려 허공을 살아간다. 혹시 이렇듯 매달린 삶이 무섭다고 느낀 적은 없는가? 그런데 이제 캠퍼스의 밭에도 아파트 못지않은 첨단 연구동들이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러분은 마치 원숭이처럼 아파트 나무에서 연구동 나무로 휙휙 건너뛰며 곡예를 펼친다. 아파트에 매달려 피로에 지친 채로 (눈치)밥을 먹고 (새우)잠을 자다가 연구동 나무로 건너와서는 피곤한 줄 모른(척 한) 채 책을 보고 눈치를 본다. 이것이 나와 여러분 모두의 삶이다. 현기증나는 높이의 삶, 무섭도록 아찔한 고공생(高空生)은 타워크레인에 올라간 파업 노동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젊음과 지성과 젊은 지성을 모두 바쳐 만들어낸/낼 논문이 어처구니없는 우연에 의해 간단히 폐기처분될 수도 있음을 깨닫는 순간, 고공에서의 가없는 삶은 마음에서의 한없는 추락으로 이어진다. 세상에 논문보다 더 어지러운 롤러코스터는 없을 것이다.

 

기어이 살아남을 논문 기계?

 

   모두가 알다시피 사회는 무너지고 있고 상아탑은 그보다 더 빨리 붕괴하고 있다. 사회의 어느 영역, 어떤 지대도 더는 지속가능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게 되었거니와, 마치 이를 환영하는 듯 상아탑은 모든 학문 영역의 구분 자체를 폐기하면서 공부하는 자들을 성과의 위계질서에 따라 재배치하고 있는 까닭이다. (물론 이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분명 득의의 미소를 머금게 할 만한 일일 것이다. 건물이 무너지는데 건축업자들이 어찌 아니 기쁘겠는가!) 실로 사정이 이러하다는 것은 여러분 모두에게 전혀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뻔히 알지만 발을 뺄 수 없게 만드는 것, 그것 역시 저 악랄한 논문이다. 논문은 말하자면 도무지 떼어낼 수 없는 악마 같은 그림자인 셈이다.

   그러니까 결국 문제는 논문이다. 여러분과 나를 온전히 사로잡고 있는, 아니 (으스러지도록) 움켜쥐고 있는 주인은 논문이다. 논문의 양(과 질과 수준)이 우리의 꿈을 결정한다. 악몽: 당신은 논문 실적이 부족하군요! 본 논문에는 학문적 자질이 결여되어 있음! 다음 학기에 쓰는 게 어떻겠나? 백일몽: 축하합니다! 당신의 논문은 통과되었습니다. 알려드립니다. 당신의 논문은 게재 확정되었습니다. 물론 악몽과 백일몽은 현실 속에서 거의 완벽한 비대칭을 이루고 있다. 우리 삶의 행로는 논문 악몽과 논문 백일몽이 만들어낸 급경사의 비탈길로 치닫는다. 점점 더 많이 쓰여지고, 쌓이고, 버려진다. 마치 쓰레기처럼. 그러나 계속해서 연구비와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서는 잠시도 멈출 수 없다. 멈춰서는 아니 된다. 우리는 모두 논문 기계가 되어야 한다. 한 편이라도 더 써야 하고, 한 장이라도 더 늘려야 한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코, 기대하지 말 것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그저 살아남는 게 싫어서, 무언가 생존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공부를 택한 여러분의 앞길을 다시금 살아남아라의 정언명법Imperativ이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흐리고 궂은 날씨로도 모자라 이제 천둥·번개까지 몰아치기 시작한다. 석사 학위를 받고 박사 학위를 받고 박사 후 과정까지 끝내고 나더라도 논문 기계의 생존 궤도를 빠져나갈 길은 더 이상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전과는 달리 오늘날의 교수·학자는 쉼 없이 논문을 생산해 내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까, 선생과 선배가 무기력해 보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상상해 보라. 언젠가는 우리도 무기력한 선생의 표정을 짓고 왜소한 선배의 모습을 입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제 다음과 같은 자명한 결론을 낼 수 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 그러나 실로 세상에서 가장 하지 않기 힘든 게 있다면, 그게 바로 기대다. 연인에게 카톡을 보내면 늦어도 10분 안에는 답장이 오길 기대하고, 지하철을 환승하면서는 내가 갈아탈 지하철이 곧바로 오기를, 더 나아가 내가 앉을 자리가 적어도 하나쯤은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대는 생존을 위해서 거의 자동적으로 작동(해야)하는 메커니즘에 가깝다. 그러나 기대라는 정서-행위는 이와 같은 저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3년쯤 뒤에는 논문을 써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5년 뒤 10년 뒤에는 논문을 심사하고 학위를 수여하는 자리에 우뚝 서 있기를, 우리는 기대하는 것이다. 물리적 생의 차원에서 숨을 쉬듯 우리는 정신적 삶의 차원에서 기대를 한다. 그러니 기대하지 말라는 부정적 정언명법은 거의 질식사를 종용하는 듯한 잔인한 목소리로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겸멸의 방법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 다른공부를 위한 방법이 개입해야 하는 곳이다. 어떤 방법인가? ‘겸멸(謙蔑)’의 방법이다. 겸손하게 경멸하라는 뜻이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일러두자면, 이 지침을 구성하는 요소에 윤리적 지향이라곤 단 한 방울도 섞여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이것은 철저하게 실용적인 지침이다.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존중 받거나 존경 받을 만한 이유를 전혀(또는 기껏해야 거의)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또한 세상의 모든 사물과 인물 들을 경멸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특히 거대하고 웅장한 것 또는 화려하고 압도적인 것일수록 더더욱 경멸해야 한다. 우리의 생물()·사회()적 감각을 사로잡는 이 세상의 모든 공적과 성과는 우리를 고주망태로 취하게 하는 지독한 싸구려 알코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알코올이 그러하듯이 세상의 유혹 역시 결국에는 극심한 숙취와 지나온 시간에 대한 끔찍한 회한으로 귀착될 뿐이다.

   보통의 경우 경멸은 부정적인 맥락에서 사용되는데, 이것은 물론 경멸의 주체가 대상보다 높거나 앞선 자리에 스스로를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제경멸하는 주체는 경멸 받는 대상보다 우월하다를 소거시키고 보면 경멸은 아주 탁월한 세상살이의 방법이 된다. 다시 말해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와 삶 자체를 가장 먼저 경멸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겸멸은 우리로 하여금 기대를 갖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은 파괴적 성격이라는 주목할 만한 글에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문장을 새겨놓았다. “파괴적 성격은 인생이 살 가치가 있다는 감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살이 굳이 수고를 들일 만한 일이 아니라는 감정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겸멸의 핵심 테제이다. ‘겸멸하는 자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최근 출간된『피로사회』라는 책에서도 겸멸의 유효성을 뒷받침하는 논변을 찾을 수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세 문장은 논문-성과의 메커니즘 속에서 압사 직전의 상태에 처한 우리 모두에게 마치 조종(弔鐘)처럼 울린다.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절대로 죽일 수 없다는 점에서 주권사회의 호모 사케르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특징을 지닌다. 이들의 생명은 완전히 죽지 않은 자들Untote의 생명과 비슷하다. 그들은 죽을 수 있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수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는 것이다.” 여러분 모두에게『피로사회』의 일독을 권한다.

 

 

한병철 지음,『피로사회』,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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