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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25호] 철학은 의학에 얼마나 필요한가?

 

   근대이후 우리나라는 의사면허 정도만 국가에서 관리하고, 진료의 내용이나 의사 집단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1977년 의료보험이 시작되면서 국가는 의사 집단을 통제하게 되었다. 국가 권력과 의사 집단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조성되었고, 의사들은 비로소 진료의 자율성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어서 2000의약분업과 의료제도 개혁을 둘러싸고 6개월간 지속되었던 의료파업 사태는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당시 거의 모든 개원의사와 전공의들이 파업에 동참하면서, 진료는 주로 대학병원과 종합 병원에서 응급 환자와 중증(重症) 환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의사들은 의약분업이나 의료제도 개혁의 부당성을 주장하였으나 사회는 이를 집단이기주의 정도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자신들이 국민 건강을 책임지는 전문가라고 믿었던 의사들은 공감을 얻지 못하자, 그동안 사회와 소통을 소홀히 하고 사회적 책무를 등한시하였음을 통감하였다. 의료대란을 통해 의학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결론지은 의료계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의학을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의철학, 환자의 신뢰를 얻고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의료윤리학 및 의료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서양에 비해 약 30년 정도 늦게 나타난 현상이지만, 아주 짧은 기간에 의과대학을 포함한 의료계에 널리 수용되었다. 이 글에서는 특히 의철학의 모습을 서양에 나타난 의학과 철학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과학적 의학을 넘어서려는 시도, 서구사회에서의 의철학 등장

 

  서양에서 의학과 철학의 관계는 멀리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자연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자연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 의사들은 질병을 자연현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질병의 원인을 자연에서 찾으려는 노력의 결과 철학적 의학이 출현하게 되었다. 철학적 의학이란 자연철학의 방법론이나 성과를 의학에 적용시키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널리 알려져 있는 사체액설(四體液說)과 그에 대응하는 질병관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가 속해있던 코스 학파의 인물들은 사변적 추론을 거부하고 임상 사례에 대한 관찰과 경험에 근거한 추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히포크라테스 의학을 계승한 갈레노스는 이전의 해부경험을 받아들여 자신의 의학체계를 구축하였다. 근대의학이 등장하기 전까지 1600~1700년간 서양의학은 갈레노스 의학의 시기였다.

  근대성의 등장, 정확히 말하자면 근대 과학정신의 등장은 경험과 실증 정신을 의학에 주입하였다. 의학의 방법론이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접근에서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방식으로 바뀌면서, 의학과 철학의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18세기에 모습을 드러낸 근대 의학은 과학 방법론과 성과를 도입하면서 치료술(healing art)이 아닌, 과학으로서의 의학을 지향하였다. 그 결과 근대의학은 발병 기전(mechanism) 같은 객관적인 현상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환자의 정서나 가치관 같은 주관적인 것은 무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20세기를 전후하여 쏟아진 엄청난 의학적 발견 덕분에, 근대의학의 단점은 별로 인식되지 않은 채 수면아래 잠겨 있었다. 과학적 의학이 번성할수록, 유럽에서 철학은 의학에서 멀어졌다. 철학은 질병 실체와 질병 분류 같은 존재론의 문제, 그리고 진단 논리와 건강과 질병 이론, 그리고 원인과 결과 관계 같은 인식론의 문제만 다루게 되었다. , 철학은 의학 지식의 형성에 관여할 기회를 잃는 대신, 의학에 대한 메타 활동(meta-activity)으로 태어나 의학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이런 변화는 철학의 쇠퇴처럼 보이지만, 반성의 대상이 근대의학의 기본 전제와 관련된 문제인 만큼 그렇게 보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기본 전제에 대한 철학적 반성은 의학의 본질적인 문제를 철학이 다루고 있음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과학적 의학이 성공가도를 달리던 1920년대부터 이미 유럽의 의철학에는 인간학 전통이 유행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 의철학은 몸을 기계로 대상화하는 과학적 의학에 반대하여 환자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과학적 이론이 진단과 치료에는 유용하지만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하므로, 의학을 과학이 아니라 치료술(healing art)로 재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의료 행위의 초점을 질병이 아니라 아픈 사람에게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환자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의학적 인간학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였다. 이들은 데카르트의 심신 이원론을 거부하고, 의학을 인간 과학(science of human person)으로 규정하면서, 생물학적인 질병 이해를 뛰어 넘는 전인적인 질병 이해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한참 잘 나가고 있는 의료계의 귀에 이런 충고가 들어오겠는가? 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1960년대 까지, 근대의학은 발전을 엄청나게 이루었다. 의료기술의 비약적인 발달로 모든 전염병의 퇴치가 가능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임상에는 질병에서 환자의 소외라는 그림자기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이런 문제들은 공해로 인한 환경 파괴와 핵 위험의 증가로 나타난 과학 비관론과 맞물려, 의학에 대한 신뢰를 추락시켰다. 과학의 가치를 부정하는 반문화 운동이나 시민의 권리를 강조하는 인권 운동 역시 그동안 당연시하던 의사의 가부장적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 의료 기술의 발전과 병원의 대형화 추세로 의료의 비인간화윤리와 관련된 문제들이 부작용으로 나타났다. 1980년대 관리 의료(managed care)와 기업 의료(corporate medicine)가 활발해 지면서 의료 전문직의 자율성 역시 위협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의학의 위기는 의학에 대하여 철학적 반성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의학의 본질과 역할 그리고 의학 방법론을 성찰하는 의철학(philosophy of medicine)이 미국에서 태어났다.

 

  의학의 철학적 성찰, 의철학의 탄생

 

  근대이후 철학과 헤어진 의학은 스스로 본질이나 가치를 반성할 능력을 상실한 만큼, 의학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하기 위해서는 의철학의 탄생이 필요하였다. 현대 의철학의 선구자인 펠레그리노(Edmund D. Pellegrino)는 근대 의학에 위기가 나타난 이유는 의학의 본질과 역할을 제대로 설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보고, 이 문제에 대한 반성을 의철학의 핵심으로 삼았다. 의료 윤리학이나 의료 인문학이 관심을 끌게 된 시기도 역시 이 무렵이다. 이들 학문 역시 과학적 의학을 추구하면서 상실하게 된 의학의 인간적인 면 즉, 환자의 자율성이나 정서 그리고 가치관에 관심을 두고 있다. 펠레그리노는 1998년 출간된 자신의 책에서 의학과 철학의 관계를 다음 네 가지로 나누었다. 첫째는 의학과 철학’(medicine and philosophy)으로, 의학과 철학이 공통된 주제에 대하여 독립적인, 개별 학문의 방법론에 근거하여 설명하는 방식이다. '삶과 죽음', '고통' 그리고 '혹은 몸과 마음'의 문제 등이 주제가 된다. 둘째는 의학에서의 철학’(philosophy in medicine)으로, 의학 문제를 철학의 방법으로 해명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질병에 대한 존재론이나 인식론, 관찰의 한계, 의료 윤리의 문제 등이 해당된다. 셋째는 의철학’(philosophy of medicine)으로, 환자와 의사 사이의 만남이나 의료 윤리의 철학적 근거처럼 의료의 본질적 의미 등을 주로 다룬다. 마지막은 의료철학’(medical philosophy)으로, 임상 의사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의학을 비판하는 작업, 즉 임상과 관련된 개인적 반성과 이에 근거한 임상적 지혜 추구를 뜻한다. 또한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유사철학적 개념(quasiphilosophical notion)에 근거한 사변적 의학 이론, 즉 스탈의 생기론과 하네만의 동종요법 등도 여기에 속한다.

1960년대 이후 의료 현장에서 윤리적 문제들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신학자, 의사, 법률가 그리고 철학자들이 모여 학제간 접근으로 윤리적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미국에서 나타났다. 이런 시도는 전통적인 의료 윤리학과 합쳐지면서 생명의료 윤리학(biomedical ethics)이란 학문으로 태어났다. 생명의료 윤리학이란 규범 의료 윤리학처럼 의사의 태도나 자세 및 가치관을 다루는 전통적인 의료 윤리학과, 갈등을 빚는 임상 상황에서 의사가 취해야 할 길을 제시하는 비판적 의료 윤리학이 합쳐진 것이다. 따라서 생명의료 윤리학은 문제 중심의 실천 윤리학 혹은 응용 윤리학의 한 분야로서 임신과 유산, 임종과 안락사, 장기이식 등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논쟁을 주로 다룬다. 생명의료 윤리학이 활발해지면서 의철학의 활동은 상대적으로 많이 위축되었다. 의철학의 한 분야인 생명의료 윤리학이 이제 연구논문의 양적인 측면에서 의철학을 능가할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이원화된 의료 체계 : 서양의학과 한의학 비교의 필요성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에서 특별히 발전시켜야 할 의철학적 주제가 있다면, 이는 동서 의학사상의 비교 분야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제도권 의학은 서양의학과 한의학으로 이원화된, 세계적으로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전혀 다른 세계관 위에 구축된 이질적인 이론 체계가 동일한 신체와 증상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서양의학과 한의학 사이의 갈등을 촉발시켰고, 한의학이 근대화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근대화하기 위해서는 한의학이 과학화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한의학의 동양철학적 이론 기반을 더욱 세련되게 다듬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서, 의철학은 한의학의 이론 체계를 반성하는 것이 된다.

  근대 이전의 한의학에서 의()와 철()을 엄밀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한의학은 의학이자 동시에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 이전의 한의학에서 의()와 철()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명청(明淸) 시대 한의학과 서양 의학의 만남과 충돌로 한의학의 전통적인 ()’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으며, 이는 음양오행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의학의 철학적 기반이 음양오행에 있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이런 논의는 중국에서는 1920년대, 한국에서는 1930년대에 한의학의 과학화 논쟁으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한의철학혹은 한의학의 철학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며, 주로 음양오행과 연관된 내용을 다루었다.

  이처럼 의철학은 의학에만 존재하는 특유한 내용, 방법, 개념 그리고 전제 같은 주제를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질병과 관련된 존재론과 인식론의 문제뿐만 아니라, 의학의 전제 및 본질이나 윤리 규범을 비판적으로 다루게 된다. 지금은 의철학에서 의료 윤리학의 비중이 가장 크지만, 의철학의 기본은 의학에 대한 비판적 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우리나라는 서양의학과 한의학으로 이원화된 독특한 의료 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동서 의학사상의 비교는 훌륭한 의철학적 주제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에 갇혀 출구를 찾지 못하는 시대에, 이런 작업은 새로운 의학과 철학, 그리고 문화를 창조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