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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25호] 21세기 음악연구, '음악학'의 경계를 넘어

 

 

 

음악, 현대인의 필수품

 

지하철이나 도서관, 일상의 곳곳에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모습은 오늘날 전혀 낯선 풍경이 아니다. 에디슨이 축음기를 처음 발명했을 때, 소리를 저장하여 재생한다는 그 새로운 발상이 다음 세기 어떤 변화를 낳을지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라모폰과 레코드는 그저 스러져갈 운명인 소리를, 순간의 예술인 음악을, 시간성으로부터, 그것이 존재하는 장소성으로부터 해방시켰다. LPCD로 음악은 하나의 상품이 되었고, 워크맨의 시대를 지나 mp3의 등장은 무형의 음악파일로 변환된 음악을 전 세계 어디서나 손쉽게 다운받아 들을 수 있게 했다. 아이팟의 재생방식에 익숙한 세대에게는 클래식, , 힙합, 월드뮤직 등 음반 시대에 존재했던 음악 장르의 장벽도 사라진다. 헤비메탈과 중세 그레고리오 성가, 인도 라가와 모차르트의 음악을 손가락 움직임 하나로 가볍게 넘나들게 된 것이다.

음악만큼 사람들의 일상에 깊이 스며든 예술이 있을까? 음악만큼 사람들의 마음에 직접적인 감응을 일으키는 예술이 또 있을까? 음악의 정서적 힘은 플라톤의 국가론이나 중국 사서오경의 하나인예기에서도 이미 다뤄졌으며, 음악에 대한 학문적, 이론적 관심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래전부터 계속되어왔다. 서양의 중세시대 음악은 산술, 기하, 천문과 함께 자유학예 4과의 하나였고, 조선시대 편찬된 악학궤범은 한국 최초의 악서로 남아있지 않던가.

음악은 왜 우리를 사로잡는가? 왜 같은 노래가 가수마다 다르게 느껴지는가? 음악은 어떻게 시대를 담아내는가? 음악적 취향은 계급적인가? 음악은 대체 우리의 마음과 정신에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 것인가? 음악과 관련된 온갖 종류의 질문들이 학문적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음악학이란 바로 그러한 질문들에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학문 분과로서의 음악학’, 그 담론의 변화

 

음악학이 하나의 독립적인 학문 분과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빈에서였다. 1885년 귀도 아들러는 음악학의 범위, 방법, 목표라는 논문을 통해 음악학의 이론적 정초를 마련하고, 음악학 학술지를 발간하며, 1898년 빈 대학에 최초로 음악학과를 설립한다. 아들러가 구상한 음악학은 역사음악학과 체계음악학으로 나뉘는데, 19세기 후반 독일어권의 학문경향을 반영하듯, 음악의 역사가 큰 비중을 차지했고, 체계음악학에서도 음악이론미학이 주로 다뤄졌다. 20세기 초 광범위한 비서구음악의 등장으로 민족(종족)음악학이 또 하나의 하위 분야로 자리 잡게 되었으나, 음악학은 악보와 작곡가 연구에 주력하며, 화성론과 형식론 같은 음악이론을 정립해간다. 20세기 초 나온 수많은 음악이론들은 주로 18-19세기의 고전낭만시대 음악을 대상으로 한 것들이었다.

점차 음악학은 여러 학문들과 결합하여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갔다. 소리가 생겨나서 전달되는 음향현상의 물리적 토대를 다루는 음향학, 음악이 인간의 신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는 음악생리학, 인간이 음악을 어떻게 지각하고 인지하는가를 살펴보는 음악심리학, 비서구 음악이나 서구 민속음악을 문화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접근하는 음악인류학, 음악 현상의 사회적 기능과 의미 등을 다양한 사회학적 방법론을 적용하여 연구하는 음악사회학 등이 그것이다.

20세기 후반에는 구조주의, 문화연구,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매체이론 등 인문사회과학의 담론 변화에 따라 음악학에서도 전통적인 방법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는 연구 경향들이 등장했다. 거기에는 무엇보다 기존의 음악학이 지나치게 악보 중심이고 작곡가 편향이었다는 비판적 인식이 전제되어 있었다. 음악이란 악보가 아닌 실제 행해질 때 의미를 갖는 것이라는 점에서 연주와 해석의 측면이 새롭게 부각되었다. 공연예술학에서의 수행적 전환(performative turn)”처럼, 연주는 단지 작품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된 실체와 효과를 낳는 사건이자 행위로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변화 속에서 퍼포먼스가 핵심인 대중음악이나 악보 없이 구전으로 전해져 온 수많은 비서구 음악 역시 새롭게 조명될 수 있게 되었다. 사회학이나 문화연구에서나 다뤄졌던 대중음악이 음악학의 담론 속으로 들어오고, 민족음악학의 문제의식이 음악학 전반에 반향을 일으켰다. 어떤 음악도 해당 문화의 틀 내에서 이해되고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시각에서 보자면 그간 음악학 내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점해 온 서양 클래식음악 또한 비서구 음악이나 대중음악과 마찬가지로 서양 근대문화가 만들어낸 하나의 음악 현상일 뿐이었던 것이다.

독일의 사상가 아도르노만큼 음악을 인문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 현대 사회와 음악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깊이 통찰한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가 남긴 수많은 음악 관련 저작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곱씹어봐야 할 중요한 문제들을 담고 있다.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미래학자인 자크 아탈리는 1977년 발간된 노이즈: 음악의 정치경제학에서 음악이 지닌 예언자적 성격을 지적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음악의 양식과 경제적 조직화는 사회의 여타 부분을 앞질러 간다는 것이다. 한편, 캐나다 작곡가 머레이 쉐이퍼는 1960년대 말 사운드 스케이프라는 개념을 창안하며 전통적인 음악관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사유하도록 촉발했다. 악보 중심의 음악이 아닌 주변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에 귀 기울이는 청각문화의 복원을 주장하며, 만드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던 음악 활동에서 듣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이제 음악 담론은 청취의 문제까지를 아우르며, 소리 환경과 생태학으로까지 확장되기에 이른다.

   

21세기 음악연구의 지형 변화

 

바흐에서 백남준까지, 가믈란음악에서 힙합문화까지, 피타고라스 이론에서 알고리즘 작곡까지 모든 것이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는 시대에, 방법론 면에서도 음악연구는 음악학이라는 학제를 넘어 뇌과학, 진화생물학, 인지과학, 뉴미디어 이론 등 새로운 학문들과 접속하고 있다. 올리버 색스의 뮤지코필리아, 대니얼 래비틴의 뇌의 왈츠호모 무지쿠스, 스티븐 미슨의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등은 최근 급성장한 뇌과학이 음악과 흥미롭게 접목되는 사례들을 보여주며, 음악적 창조력이 인간의 진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진화심리학의 문제의식을 풀어놓는다. 뇌과학과 인지심리학은 그간의 음악 연구에서 간과되었던 문제들, 가령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음악적 경험의 오묘한 순간들을 해명하는데 어떤 실마리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음악의 존재방식은 악보나 연주자의 매개 없이도 가능해지고, 간단한 장비만으로도 쉽게 음악을 만들 수 있게 되어 전문가와 애호가의 경계도 점차 모호해져 간다. 수많은 사운드들이 범람하는 21세기에 과연 음악의 경계는 어디쯤 설정될 수 있는 것일까? 최근 대두되고 있는 사운드 연구(Sound Studies)”는 음악을 넘어서 광범위한 소리 현상과 청각문화를 인문학적 담론은 물론이고, 자연과학, 의학, 공학과 연계하여 광범위하게 다루는 대규모 학제간 프로젝트이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우리의 음악 행위도 엄청나게 다변화되고 있다. 인터넷과 사이버 세상이 아무리 발달한다 해도, 음악회장에 가서 조용하고 진지하게 음악을 즐기거나, 수만의 관중과 함께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의 음악에 열광하는 일이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바흐와 말러, 산조와 판소리에 평생을 바치는 연구자가 왜 필요 없겠는가. 그렇다고 해도 음악학이 당대의 음악 현상들에 지나치게 무감하고 과거의 음악, 그것도 지극히 협소한 지역과 시대의 음악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한국의 음악학 상황이 그렇다. 학술지들에는 실적을 위해 외국 문헌을 이리저리 짜깁기한 논문들로 넘쳐나고, 자신의 문제의식을 발전시켜가며 연구 활동을 하는 학자들은 귀하기만 하다. 하지만 음악연구가 비단 학자들만의 소유물은 아닐 것이다. 예전처럼 자료가 전문가들에게만 독점되는 상황도 아니고, 음악에 미친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가. 대학이 더 이상 학문의 전당이 되지 못하는 오늘날, 생생한 음악 연구의 장은 아카데미즘의 외부에서 생성될 수도 있으리라. 음악에 꽂힌 수많은 사람들이 네트워킹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토론하며 함께 만들어가는 음악 연구의 플랫폼을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