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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37호] 행복의 그림자: 자유와 폭력의 경계에서

행복의 그림자: 자유와 폭력의 경계에서

 

 

박구용 _ 전남대 철학과 교수

 

 

행복과 불행의 경계에서

과잉의 시대, 초과의 시대다. 너무 많이 생산하고 소비할 뿐만 아니라 너무 과하게 모든 일이 벌어진다. 어둠을 경험할 수 없을 만큼 지나치게 많은 빛을 발산하는 대도시 사람들의 마음에는 한 점 빛도 없이 삭막하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황제보다 더 풍족한 삶을 살아가는 만큼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과잉억압에 노출되어 있다. 마르쿠제(H.Marcuse)가 진단한 것처럼 과잉억압은 타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심장으로 파고든다. 더 나은 삶이 아니라 지금과는 다른 삶을 생각하는 이유다. 더 나아지는 만큼 더 힘들어지는 삶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면서 대안적 삶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다. 대안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딘가에 있을 더 푸른 초원을 찾아 떠도는 유목민이 아니다. 대안은 다른 곳(장소, 공간)에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대안은 같은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서 새로운 판을 짜는 것이다. 노름판과 싸움판을 놀이판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판을
바꾸려면 과잉과 초과를 부추기는 핵심 담론을 흔들어야 한다. 이 글이 행복 담론을 물고 늘어지는 까닭이다. 폭력을 키우거나 혹은 은폐하는 수단만이 발전하는 세계에서 행복과 불행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고대 철학자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폭력적인 사회에서 개인의 행복은 불가능하다. 그의 말처럼 안정, 화목, 평정, 평화가 없는 곳에 는 쾌락도 행복도 없는 것일까? 나아가 절제, 용기, 도덕, 정의, 지혜가 없는 사람은 진정한 쾌락과 행복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폭력적인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은 대부분 거짓된 것이다. 현대사회는 무자비한 폭력이 은폐된 곳에서 자행되고, 모든 것을 파괴 할 수 있는 폭력수단이 세계 곳곳에 은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체계를 바로 인식한 사람에게 행복은 불가능하다. 그가 인식한 세계에는 안정과 평화가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감춰진 폭력과 폭력 수단을 제대로 의식할 만큼의 지혜가 없는 사람, 알아도 체념과 무기력에 빠져 저항할 용기조차 없는 사람, 나아가 도덕과 정의에 대한 감각 자체가 무뎌진 사람은 작위적으로 행복을 향유할 수 있다 해도 이는 불감증 환자의 사이비 감정에 불과하다. 많은 현대인들은 이상화된 쾌락과 행복을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에서 실현하려고 든다. 이상과 현실의 간격이 커질수록 그만큼 가상 세계는 매력적인 화해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헤겔(G. W. F. Hegel)에 따르면 아무런 매개 없이 허구적으로 이상과 현실을 통일시킴으로써 불감증으로 도피하는 것은 불행한 의식을 키울 뿐이다. 가상 세계에서의 행복은 현실 세계에서의 불행이다. 현실적 분열과 가상
적 통일이 이쪽저쪽을 들락거리며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우왕좌왕은 멈추지 않는다. 몸은 이편에 마음은 저편에 두고 왔다갔다 헤매는 불행한 의식은 행복을 느끼려고 몸부림치지만 현실의 배반 앞에서 매번 좌절하고 만다. 불행한 의식의 출구는 어쩌면 행복과 불행을 나누는 기준을 찾으려는 시도를 멈추는 곳에 있다. 행복과 불행을 나누는 기준은 수없이 제안될 수 있지만 기준이 많아지는 만큼 행복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로 측정되고 평가될 뿐이다.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의 이분법은 다른 모든 이분법처럼 자유가 아니라 폭력을 키우게 될 가능성이 높다. 양자택일 을 요구하는 이분법 앞에서 행복이 아닌 불행을 선택할 사람은 없다. 진위, 선악, 미추의 이분법처럼 행복과 불행의 이분법에는 한쪽의 독단론이 숨겨져 있을 뿐이다. 이분법의 폭력에서 벗어나려면 선택하지 않고 사유해야한다. 이분법의 강요에 못 이겨 행복을 선택하면 곧바로 불행한 의식이 몰려올 뿐이다. 결과로서 행복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으로서 행복을 사유할 때 의식은 비로소‘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족쇄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유는 실존적 개인의 고독한 사색이나 반지성적 통념이 아니다. 자유로운 사유는 이분법을 통해 독단적 동일성을 강요하는 현실의 지배 체계에 저항하는 과정이다. 불행속에 깃든 빛을 찾아내고 행복이 강요하는 그림자에 대해 소통하는 사유만이 과정 속에서 자유로운 행복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자유로운 사유가 만들어가는 행복은 개인의 의식과 무관한 객관적 사실도 아니지만 사회적 현실에서 독립된 주관적 관념도 아니다. 행복은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만남과 소통, 그리고 연대를 통해 형성되는 담론이다.

 

 

수단에 의한 목적의 전복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게 행복은 좋은 삶의 문제이면서 삶의 목적과 관계한다. 그에게 행복을 다른 어떤 것의 수단이 될 수 없는 목적, 곧 삶의 최종 목적이다. 행복은 자기 목적적이라는 의미에서 모든 행동과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그만큼 자족적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그에게 행복은 순간순간 느끼는 즐거움이나 쾌락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그에게 행복은 삶의 궁극적이고 자족적인 목적인 까닭에 인간의 순간적인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삶 전체를 통해서 이루어야 할 객관적 지향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행복이 객관적이라면 그만큼 사회적 조건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는 행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친구나 재산만이 아니라 출신성분, 가족환경, 외모나 용모에서 좋은 조건들을 구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최소 수혜자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우며 반대로 최대 수혜자들에게는 비교적 어렵잖게 도달 가능한 복, 곧 행운에 의존한다. 이처럼 행운을 최소 수혜자들이 도달할 수 없는 행복의 이상적 조건으로 제시하게 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주의도 불행한 의식에 사로잡힐 위험이 커진다. 물론 행운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해서 불운한 사람이 반드시 불행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운한 사람에게 행복의 조건을 구비해주는 것이 정치의 몫으로 자리 잡는다. 그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의 조건은 개인에게 불운을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덕을 요구하는 이유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으로는 정치에 고통과 비참을 안겨주는 폭력적이고 불운한 상황을 극복하도록 요구하는 비판의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객관주의적 행복론이 행운론으로 빠지거나 불행한 의식으로 침몰하지 않으려면 정치 비판의 기준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가 사회의 최소 수혜자에게도 행복이 가능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할 때, 그 조건을 기준으로 현실 정치를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행운론이 아니라 행복권으로 재구성하는 일이 필요하다. 행복이 좋은 삶을 위한 최종 목적이라면 이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모든 사람에게 기본권으로서 보장되어 야 한다. 이 경우에만 행복은 역할 중심의 윤리학을 벗어나정의와 연대의 긴장 위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행복을 보편적 권리로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행복을 좋은 삶의 궁극적 목적으로 확정해서는 안 된다. 궁극적 목적으로서 좋은 삶과 행복은 역할 중심의 목적론적 윤리 안에서 자신이 수행해야만 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사는 그 자체로만 정당화될 수는 없다. 왜곡되고 부조리한 폭력적 사회에서 맡은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은 나쁜 사회를 인준하는 나쁜 삶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누구나 자신이 수행해야만 하는 역할에 따른 요구와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으로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못된 요구와 명령을 거부할 힘이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생사를 걸고 거부해야만 한다. 이를 위한 힘은 덕의 윤리보다는 정의를 지향하는 도덕에서 가져와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 이유와 삶의 목적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없는 불행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이유에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면서 어떤 목적도 정해지지 않은 삶을 살아가 야 하는 고통을 견뎌야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나의 목적을 다른 사람이 정해준다면 나는 목적을 정한 사람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의 목적을 정하는 순간 나는 그 사람을 수단이나 도구로 간주하는 것이다.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것을 최소한의 도덕
으로 강조했던 칸트(I. Kant)의 말처럼, 타인의 목적을 지정하려는 사람은 그를 수단으로 간주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부도덕한 사람이 아니라 최소한의 도덕도 없는 사람이 된다. 내 삶의 목적은 오로지 나 스스로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아마도 어떤 것도 자명한 것이 없는 사회에서 스스로 목적을 정해야만 한다면 누구나 다른 사람에 의해서 대체될 수 없고, 동일화될 수 없는, 따라서 물건처럼 교환될 수 없는 어떤 것을 자신의 목적으로 정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일반화시켜 말할 수 없다. 다만 목적을 찾아가는 삶의 과정이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목적이 구체적이고 명시적이지 않은 경우 수단은 언제나 목적을 전복하기 때문이다. 삶의 목적과 존재 이유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대부분의 말이나 행동에서 목적을 설정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목적은 다시 다른 것의 수단이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면 삶 자체가 어떤 내용도 없이 텅 빈 목적을 위해 수단이 되고 만다. 삶이 행복이라는 목적에 합목적적으로 구성되어야만 한다면 인간은 사회 체계의 수단이 되고 마는 것이다. 목적을 찾아가는 삶의 과정이 이미 설정된 행복이라는 목적의 수단으로 전복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바깥으로 나아가는 행복론


도처에서 행복론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여전히 삶에 대한 만족과 긍정, 그리고 주관적 안녕의 지평에서 행복을 논의하고 평가하는 것이 대세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삶의 기초로서 사회적 질(social quality)이나 사회적 웰빙(social wellbeing)을 기준으로 객관적이고 공적인 지평에서 행복 지표를 재구성하려는 웰빙 지향 행복론도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수량화하려는 대부분의 시도는 사회적 지평을 개인적 지평으로 환원할 위험이 크다. 현대사회에서 참된 삶과 옳은 삶의 문제로 특화된 공적 담론이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의 문제로 전환된 사적담론 모두 경제 논리, 즉 도구적 이성의 논리에 의해 식민
화되는 순간 급진적 저항의 성격을 상실한다. 이런 상황에 서 사회적 지평을 개인적 지평으로 환원하는 웰빙 지향 행복론은 경제 논리에 의한 획일화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획일화를 조작할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문화산업에 의해서 전도되는 웰빙 지향 행복론은 생각 없는 개인들을 빨아들이는 강력한 유혹의 메시지다. 웰빙 지향 행복론은 행복을 사회적 지평에서 개인적 지평으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웰빙으로 기호화된 성공 신화의 내면화를 요구하며, 내면화에 성공하지 못하면 이방인, 즉‘우리 안의 타자’가 될 것이라고 끝없이 위협한다. 따라서 웰빙 지향 행복론은 성공한 사람들이 성공할 수 없는 사
람들을 지배하는 성공 이데올로기의 변주곡이라는 비판을 극복해야만 한다. 행복의 사회적 지평을 개인적 지평으로 환원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불행의 원인 중에 개인의 심리 부분을 사회 제도의 문제로 단순화시켜서도 안 된다. ‘평균연봉’, ‘평균석차’와 같이 개량화가 판치는 사회에서 개인적인 것은 항상 사회적으로 평가된다. 이 경우 평균화되지 않는 만족은 단순히 무의미하거나 무용한 것이 아니라 유해한 것이다. 이
런 방식으로 사회는 부정적인 것을 부정할 수 있는 힘을 개인으로부터 탈취한다. 이런 논리에서 벗어나려면 행복과 불행의 개인적 지평 역시 독자적인 논의 구조를 가져야 한다. 러셀(B. Russell)은 자신의 행복론(The Conquest of Happiness)에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불행한 군중들을 “자기에 대한 침잠과 전념이 너무 심한 사람들”로 진단하고 있다. 이들은 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sinner),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narssist), 과대망상에 걸린 사람(megalomani) 으로, 그릇된 세계관, 비뚤어진 윤리, 옳지 않은 습관 등으
로 인해 행복의 근본요소인 온갖 사업에 대한 열정과 욕망이 파괴되어 불행에 빠진 사람들이다. 러셀은 자기침잠과 전념, 자기연민이 너무나 강해 다른 방법으로는 고칠 길이 없는 불행한 사람에게는 자아 속에 갇혀있지 말고 바깥으로 나오는 외적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이고 공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것만이 자기만을 긍정하는 나르시스와 자기조차 부정하는 에코의 비극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자아는 한편에서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을 불안해하거나 다른 한편에서 바깥세계에 맞서 완강하게 자기의식을 고집하면 자유로울 수 없다. 헤겔의 말처럼 정신의 힘이란 오히려 바깥으로 나아가는 가운데서도 자기를 잃지 않는 주체, 곧 내적인 자기와 외적인 자기를 모두 떠안는 데 있다. 바깥으로 나아가는 주체만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면서 형성하는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자유를 최대로 키울 수 있는 길은 자기침잠이나 연민에서 빠져나와 타자성을 가진 타자와의 만남과 소통, 연대뿐이다. 바깥으로 나아가는 연습만이 외부적 환경에 매달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행복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고독과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이고 유일한 길은 바깥으로 나아가 접속하고 결합하는 것이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접속하기보다는 소유하려 든다. 소유하면 접속에서 오는 고통과 아픔을 잊고 행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깥을 소유하려는 모든 시도는 폭력을 키울 뿐이다. 폭력을 최소화하려면 바깥으로 나아가 만나고 소통하며 연대하는 경험을 축적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경험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다. 경험의 상실은 대체 불가능하고 교환 불가능한 삶의 구성이 불가능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바깥으로 나아가 나를 형성하고 그 과정에서 행복을 구성할 수 있는 삶을 위해 필요한 경험을 되찾아야 한다. 거기서 행복 담론이 넘쳐나는 과잉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삶이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