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12.18 13:37

생명 텍스트와 생명 언어를 위한 시론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_ 이지환

 

 

확실히 언어가 문제다.

지금 내가 기생(공생?)하고 있는 지도교수님의 연구실에는 두 나무가 있다. 나는 그 나무들의 이름도 모르지만, 내가 여기에 온 순간 두 나무는 나의 책임이 되었다. 이 나무들은 너무 잘 커서, 물을 많이 주지 못한다. 그 나무 옆에는 안락한 의자가 있다. 그 의자에 앉아서 나무로 만든 책을 읽어왔다. 나는 이 나무한테 사람 이름을 붙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적인 윤리의 사고방식을 깔고 나무를 보지도 않는다. 나무는 나무다. 이 나무들은 나와 살기 위해서 자신의 성장이 억제된다. 그리고 나는 이 나무들과 잘 살기 위하여 커피 찌꺼기와 물을 주고 있다. 이 뭔가 모자란 최소한의 생태에 많은 것들이 도움을 준다. 거기에는 산지 1년이 넘은 커피머신이 도움을 주고 있으며, 물이 나오고, 채광이 좋은 연구실(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공부하지 못하겠다.)의 환경이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오랫동안 기생하게 만드는 국문과 대학원의 과제들이 또한 큰 도움이 된다. 그렇게 나무 옆에서 2년을 보냈는데, 나는 나무의 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나무는 정말로 인사도 하지 않으며, 나에게 위로를 건네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환경을 나름대로 사랑하는 언어, 다시 말해 녹색 언어를 만들자고 하거나, 나무와 대화하자고 하는 이들을 믿지 못하겠다.

생명이 가지고 있는 텍스트성과 내적 대화는 인간이 직접 이해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나는 의인화를 버리지 않고 녹색 언어를 말하는 자들을 믿지 않는다. 생명 윤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언어 따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자기모순이다. 왜냐하면 그 말은 정말로 생명윤리 그자체로 말하고 있기 보다는 생명윤리에 대해 말하고 있는 자기의 말을 들으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언어가 문제다.

한 생명과 대화한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인정한다. 그러나 한 생명과 대화하기 위해서 고민하고, 치열하게 그 언어를 탐색하는 것은 인간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거기서 더 나아간 사람은 지금 자신이 가진 의인화의 틀을 의심한다. 일단 의심했으므로, 답을 찾지 않으면 잠도 잘 수 없다. 일어나자마자 도서관에 간다. 다시 한 번 그 나무에 관한 모든 것을 읽는다. 그 나무에게 가서 보고 느낀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기반으로 나무가 무엇을 느끼고 있을지 생각한다.

 

생명은 시적 원리로 구성된다.

안드레아스 베버는 모든 것은 느낀다에서 세포와 생명을 생존의 기계로 간주하지 않으며, 생명은 의미를 감정으로 체험할 수 있는 실체라고 말했다. 의미를 감정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어떤 생명이 체험한 감정이 어떻게든 해석될 수 있다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예스페르 호프마이어는 생태기호학을 주창했는데, 그의 생태기호학에서는 생태 속에서 수많은 기호들이 전달되고, 해석되는 과정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린 마굴리스의 세포 내 공생설에 의하면, 우리는 수많은 층위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관계들에 의하여 존속된다. 야콥 폰 윅스킬은 유기체를 기계적 인과율에서 벗어나는 주체라고 주장했다. 이런 저런 이론들이야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생명의 특성들이 인간중심적인 이해와 언어에 의하여 정말로 의미들의 작용 속으로 포섭되고 있었는지에 관한 것이다.

발제적 인지과학을 주창한 프란시스코 바렐라가 말했듯이, 유기적 생명체의 본질은 자기 창조성과 자기 동일성이다. 나는 과감하게 로만 야콥슨을 끌어와서 다음과 같이 말하려고 한다. 생명체는 질적으로 전환된 물리적 구성물이며, 그 물리적 구성물은 통시적으로 자기 자신의 공시성을 투사하기를 지향하는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유기체는 시적인 존재다. 모든 유기체들은 시간 속에서 다양한 환경에 배치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끊임없이 획득한다. 그것이 생태이다. 따라서 유기체의 삶은 다양한 세포와 미생물들의 시적 표현이다. 자연의 모습들은 시적인 생명의 표현이다. 여기에 대해 순진하고 낭만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에 대하여 상당히 순박한 생각(참 아름답고, 건전하며, 잘 짜인 것으로)을 품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유전적 약호를 넘어서 모든 생명의 원칙들과, 육화된 언어들은 선택되고 결합된다. 유기체 속에 공생하는 것들이 어떤 것을 선택하고, 그것들이 자연의 시간 속에서 세포의 궤적에 통합될 때,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생태기호학적인 메시지로 볼 수 있다. 그것들은 다시 세포, 미생물과 공생하는 유기체, 뉴런 세포들이 상호작용하는 유기체, 유기체들의 관계, 생태 등으로 확장되면서 다양한 층위를 갖는다. 이때 유기체는 자기 자신을 강조하면서 다른 것들과 유사성, 인접성의 관계를 맺는 메시지다. 메시지의 자기 강조를 통해서, 생태 속에서 미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생태기호학적 관점에서 유기체는 소리, 형태, 의미들로 이루어진 생태기호들의 텍스트이다. 탄소, 질소, 무기질, , 기체들이 생명의 자기 생산 체계를 거쳐 결합될 때에, 유기체는 선택하고, 가치를 부여하며, 자기 자신을 강조한다. 즉 시적 기능의 위계를 강하게 가지게 된다.

복잡하게 말했으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생명의 궤적과 그 표현들을 하나의 의사소통이자, 로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을 보고 노래하는 것은 생태기호적 텍스트를 인간의 언어 텍스트로 옮기는 것이다. 생명의 시학, 서사학, 수사학의 가능성이 새롭게 열린다. 새로운 생명 언어는 자연이 자신을 어떻게 표현해내는가, 생명이 자신을 어떻게 메시지와 텍스트로 만들어나가는가, 생명이 어떤 의사소통 기능을 강조하고 있는가, 생명의 발생과, 성장과, 변화와, 커뮤니케이션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러한 고민은 우선 식물의 정신세계같이 지나친 인간 및 동물과 식물의 동일화를 시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지나친 동일화는 의인화로 도약한다.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공유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식물에 대한 주장을 과도하게 뛰어 넘는다. 동물이나 식물과 대화할 생명언어를 탐색한다면서, 다른 인간과의 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모순적이라 할 것이다.

 

어떤 대화이든 인간은 의심하고 노력할 수 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개나 고양이 정도의 동물과는 무언가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식물에 대한 논의를 좀 더 소개하고자 한다. 대니얼 샤모비츠(식물은 알고 있다)는 온건한 중도적 입장인데, 그는 식물이 생각한다는 표현은 피하려 한다. 다만 식물 속의 글루탐산 수용체가 뉴런의 의사소통 방식과 유사하게 기능한다거나, 식물지능을 다중지능의 한 양상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이러한 주장은 상당히 교묘하게, 기존의 생물학적 관점을 옹호한다. 그의 주장은 식물이 아무것도 감각하지 못하는 기계에서, 몇 가지는 감각하는 기계라고 보강하는 정도의 주장이다. 스테파노 만쿠소(매혹하는 식물의 뇌)는 좀 더 강한 주장을 하는데, 식물이 명확히 지능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식물은 몸의 특정 지점에 그 시스템이 몰려있지 않다. 온 몸에 독립적인 모듈이 있다. 대개 식물은 빛, 휘발성분자화합물, 무기염류의 농도기울기, 접촉과 압력, 진동의 파악, 수분측정능력, 중력과 전자기장 등의 감지 능력 등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식물들은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비슷한 정보들을 처리하면서, 생태의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한다. 그들은 다양한 채널과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된다. 식물의 다양한 부위들 끼리도 커뮤니케이션한다. 가령 관다발계를 통한 전기신호시스템, 기공을 통한 화학, 호르몬 신호시스템, 액체 유출 경고시스템 등이 각자의 신호를 처리한다.

식물은 다른 생명들과 화학분자, 접촉, 위치선정, 제스처 등을 통해 몸으로 소통한다.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층위에서 수많은 화학적 신호들이 다양한 생명들의 움직임을 이끌어 낸다. 인간만의 의사소통과는 구별되지만, 굳이 인간의 의사소통이어야할 필요가 있는가? 우리가 뭐라하든 그들은 이미 넓은 의미에서 소통하고 있다.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생태는 사실 많은 존재들이 생태적 기호를 나누고 있는 대화의 장이다.

우리 또한 식물과 의사소통한다. 식물을 보고 감흥이 일고, 식물을 만지고, 때로는 식물에게 말하고, 물을 주고, 냄새를 맡고 마음이 안정된다. 가지를 쳐주고, 시를 쓰고, 노래하고, 소설을 쓴다. 열매를 먹고, 비료를 주고, 그 자라남에 기뻐한다. 시듦과 죽음에 애통해하고, 다시 살아날 때 희망을 얻는다. 식물은 우리의 빛과 색을 감지하고, 화학물질을 맡고, 압력과 진동을 감지하고, 물을 느끼고 흡수하고, 자기장을 인식하고, 생명의 주체성을 발휘한다. 피고, 지고, 유인하고, 내쫒는다. 우리의 언어기호는 식물에게 단순히 진동의 주파수로 파악되고, 우리는 식물의 화학기호와 생명의 표현을 모르거나, 무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오해, 무지와 식물의 무능력에 좌절할 필요가 없다. 모든 생태계의 유기체와, 특히 우리 인간 모두는 각자가 할 수 있는 만큼 의사소통한다. 그런데 우리는 더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식물을 단순한 기계나 무정물로 보지 않으며, 식물을 의인화하는 오해와 편견을 줄이고, 언어적인 분리를 좁힐 수 있다. 우리는 새로운 매체를 만들 수 있으며, 그것으로 식물에게 유효한 언어를 우리가 말할 수 있도록, 식물의 언어를 우리가 알 수 있도록 나아간다.

 

감정이입에서 감정공명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흥분하는 나무가 아니라, 세상을 둘러싼 진동들과 자기장에 교감하는 나무를 본다. 묵묵부답의 나무,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아니라, 나름의 생명의 언어를 외치는 나무를, 하나를 주는 대신 다른 것을 얻어가는 나무를 안다. 나무는 자신의 몸 곳곳에 지성과 감정을 가진다. 나무는 인간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나무는 자기 방식대로 생명의 가능성을 실현한다. 나무는 온 몸으로 생각한다. 나무는 온 몸으로 더 확장되어 나아갈 자신을 다시 기획한다. 나무는 온몸으로 느끼고, 그 느낌을 다른 나무와 나눈다. 동물의 삶이 긴 시에 가깝다면, 나무는 무수한 미시서사들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근단들은 각자의 주체성을 펼쳐나가지만, 그것들은 네트워크를 이루며 나무라는 하나의 군집으로 모인다. 가지와 잎들은 뻗어나가지만, 나무에 공기와 햇빛으로 만들어진 영양분을 전달한다. 수많은 생태기호들은 나무의 온 몸에서 기호작용을 펼친다. 각각의 기호작용은 하이퍼링크되고, 새로운 기호들을 생성해낸다. 그렇게 나무는 옆으로 하늘로, 자신을 확장시켜 나간다. 나무가 만들어낸 수많은 생태 기호들이 다른 기호시스템으로 전달된다. 나무는 온 몸으로 뻗어나가면서 생태기호체계를 유지한다. 나무의 발신이 없다면, 생태는 기호작용의 소멸을 맞는다. 생태는 침묵하게 될 것이다.

생명들이 계속해서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하고 있다는 것, 자신의 몸으로 시를 쓰고 있다는 것, 그 언어와 시에 가까이 가는 길은 감정이입이 아니라 감정을 공명하는 것이다. 생명 언어는 생명을 보고, 우리의 언어로 재단하고 끼워 맞춘 후에 자기만족하고, 정지하는 언어가 아니다. 생명 언어는 다시 나의 언어가 감정 공명과 함께 가는 언어인지, ‘생명 언어라 할 수 있을지 의심하는 과정 속에서 생겨난다. 함께 가는지 의심하면서, 우리는 다시 생명에게 되돌아가서 함께 하려 한다. 정말 맞는지 의심하면서, 우리는 다시 그 언어를 재해석하고, 수정하고, 배우고, 느끼고, 다시 말을 조심스레 꺼내기 시작한다. 대상 자체의 내적 활동의 양식이 따로 있음을 알고, 대상 자체가 느끼고 움직이고 기호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내적 활동에 가치적 우월을 부여하지 않고, 각자의 울림을 치열하고, 절실하게 공명하려 한다. 다양한 속도로, 다양한 질적 차이와 양적 차이를 가지고 울림들이 상대에게 가서 공명하고, 다시 나의 울림으로 회귀한다. 이때 우리는 우리를 재생성하기 보다는, 새로운 차이와 사유를 생성한다. 생태적 사유와 소통의 과정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우리와 환경은 분리되지 않는 복합체가 된다. 거기서 우리는 의인화에 안주한 상태에서 생명 언어를 말하려는 감정 공명 상태로 간다. 그리하여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황지우, 1985)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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