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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대학원 신문사
[172호] 늘 재구성을 기다리는 민주주의 본문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원용진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진단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트럼프의 미국, 오르반의 헝가리, 멜로니의 이탈리아, 르펜의 프랑스, 그리고 최근 독일 AfD의 득세, 한국 정치에 이르기까지. 극단적 우익의 부상과 정치적 권위주의의 재등장은 과연 민주주의가 지속 가능한 체제인지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정치적 타자를 악마화하고, 제도적 견제 장치를 무력화한다. 그리고 ‘진정한 국민’이라는 허구적 주체를 호명함으로써, 오랜 전통의 민주주의 질서의 토대를 뒤흔들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How Democracies Die』에서 설득력 있는 진단을 제시한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제도와 규범의 파괴”로 진단한다.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오작동을 하거나 심지어 멈추면서 위기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쿠테타나 폭력 혁명에 기댄 결과는 아니다. 선출된 지도자가 민주적 절차를 이용해 권력을 공고화하고, 야당과 언론을 탄압한다. 그 결과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 약화된다. 그 같은 점진적 변화에 시민들도 익숙해지면서 민주주의 붕괴를 방관하거나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처럼 오늘날 민주주의는 내부에서부터, 선거를 통해 당선된 정당과 지도자들에 의해 서서히 침식된다.
위기를 진단한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상호 관용’, ‘제도적 절제’, ‘정당의 자율적 견제’라는 자유주의적 처방을 내민다. 당연히 한계를 가진 ‘제도 중심’의 처방이다. 그들의 처방은 특정 시기의 미국이나 서유럽에서 작동했던 중산층 중심의 자유주의 질서에 근거하고 있다. 그 바깥의 불평등, 인종차별, 제국주의를 외면한 진단과 처방이다. 새롭게 정치 영역으로 유입된 인구나 정체성의 주체들을 감안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정치의 과잉’으로 간주하는 순진함을 노출하고 있다, 과잉을 줄이는 ‘정치의 억제’를 해법으로 제시함으로써 그들은 민주주의를 재구성할 수 있는 급진적 가능성을 차단한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단지 ‘제도의 약화’로 환원하는 시선은, 오히려 정치의 진정한 작동 원리를 비가시화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민주주의 위기의 진보적 진단
위의 두 사람과는 달리 민주주의 위기를 진단하는 측을 챙겨보자. 정치철학자 어네스트 라클라우(Ernesto Laclau)는 민주주의를 본래부터 안정된 제도나 규범의 산물이 아니라고 파악한다. 대신 끊임없이 구성되는 ‘인민’이라는 정치적 주체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헤게모니 투쟁의 장으로 규정한다. 즉, 민주주의를 절차, 제도의 문제로 국한시켜 사고하지 않고 정치적 경계와 적대를 구성하는 담론 경쟁의 문제로 파악한다. 그 구성의 노력은 완결의 순간을 누리지 못한다. 늘 미완성이어서 끊임없이 이뤄져야 한다. 늘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는 갈등과 불안정성을 내포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 안에는 불가피하게 ‘위기’가 내장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민주주의의 위기는 정치적 재구성이 이뤄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오늘날 극우 포퓰리즘이 전에 없이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고 있는 현상은 단지 제도적 규범의 훼손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극우가 담론 경쟁에서 과거에 비해 좀 더 나은 실력을 보이고 있는 탓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쪽에서 더 이상 대중의 불만과 욕망을 수렴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봐야 한다, 즉 ‘인민’을 효과적으로 호명하지 못한 진보 정치의 실패가 민주주의의 위기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사회와 정치를 언어학적 논리를 통해 사유하는 라클라우는 다양한 사회적 불만들이 ‘빈 기표(empty signifier)’ 아래 등가사슬로 결합되는 순간에 주목한다. 트럼프의 MAGA(Make Great America Again)는 밑도 끝도 없는 슬로건이며 빈 기표다. 하지만 그 기표는 미국 의회 의사당에서 의원들로 하여금 ‘USA, USA’를 연호케한다. 그리고 일시적으로나마 미국의 경제, 정치,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그 안으로 구겨넣어 해결된 것처럼 포장한다. 그 슬로건으로 미국이 다시 설 수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준다. 그럼으로써 다시 트럼프적 시민 주체가 탄생하고 미국 민주주의는 퇴행적이지만 새로운 길로 접어든다. 진보 진영에선 민주주의의 후퇴라고 하지만 트럼프 측에선 새로운 민주주의 시작점이고, 과거 영화롭던 미국 민주주의로 접근한다고 믿는다. 그와 경쟁하고 저항하는 쪽에서 그에 필적할 만한 새로운 기표, 그리고 그에 접속할 담론을 창출하지 않는 한 미국의 민주주의는 퇴행의 진창에 갇힌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라클라우의 논의를 정신분석학적으로 확장한다. 오늘날 진보적으로 민주주의를 이끌지 못한 이유를 욕망의 조직 실패로 설명한다. 민주주의는 더 이상 대중의 욕망을 해방적으로 구조화하지 못해 왔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사람들의 ‘느낌’을 정치의 언어로 조직하는 일을 게을리 했거나 그 기회를 극단적 우익에 뺏겼다. 분노, 좌절, 희망, 상실을 표현할 수 있는 공공적 형식을 제공하는 민주주의를 상상하지도 마련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극우적 정치 세력이 분노, 상실, 두려움과 같은 정서를 수렴하는 상징 구조를 독점해버렸다. 지젝은 그 상징 구조를 라캉의 개념인 “quilting point(정체성의 고정점)”로 설명한다. 유동하는 의미의 장 속에서 ‘위대한 국가,’ ‘민족,’ ‘자유,’ ‘공정’ 등과 같은 추상적인 기표를 내걸고 거기에 대중의 정체성과 욕망을 붙들어맨다. 민주주의 질서에 해당하는 상징계를 흔들어놓고 상상계 안에 가두어 유아적 정치 놀음을 하는 주체에 머물게 하는 셈이다.
진보적이며 대안적 민주주의를 구축하려 한 쪽은 그 같은 기표를 창출하고, 그에다 대중의 주체를 얽어매는 노력을 게을리 하였다. 그럼으로써 ‘공정’은 더 이상 진보가 말하는 단어가 아니다. 오히려 이준석처럼 공정 담론이 이대남의 불안, 분노를 결합시켜 나간다. 윤석열 정부의 ‘자유’는 개인의 해방이 아니라 국가주의와 결합되거나 사유재산처분, 시장과 연결된다. 그 같은 고정점을 기반으로 한 담론 구성체에 균열을 내야 할 쪽에서는 그를 윤리적 잣대로 공격하거나 비판하는 것에 머물고 만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키는 쪽에선 오랫동안 인간의 얼굴을 한 공정, 깔끔한 윤리의 언어에 갇혀 지내왔다. 그럼으로써 정치적 상상력과 감정, 욕망을 조직하는 순간으로부터 멀어졌다. 정동의 조직화를 주요 문제로 삼는데 실패했다. 시민의 감정에 맞추지 못할 뿐 아니라 새롭게 등장할 민주주의를 상상하는 일 등에서 손을 놓아 왔다. 정작 알고리즘에 의한 극우 유튜브에 노출되는 것에 대한 걱정은 컸지만 그를 통한 새로운 민주주의를 상상하는 일엔 한정적이었다.
민주주의 진보적 재구성을 위하여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정말로 끝난 것인가? 혹은 아직 유효하다면, 어떻게 ‘고쳐 써야’ 하는가? 답은 민주주의를 단지 복원할 수 있는 체제로 보지 않고, 다시 구성해야 할 과정으로 이해하는 데 있다. 민주주의가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것은 ‘어떤 민주주의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제도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담론적인 면 그리고 다양한 주체의 욕망 문제까지 동시에 챙겨내는 노력이 강구될 필요가 있다. 진보적 재구성을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첫째, 정치를 욕망의 층위에서 다시 상상해야 한다. 정치란 정책과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둘러싼 상징투쟁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정치를 다시 감각과 정동의 공간으로 회복해야 한다. 대중들의 느낌을 정치적 언어로 조직화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시민’(the people)이라는 주체를 다시 구성해야 한다. 기존 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국민’은 전 시민을 아우르지 못했다. 늘 경계를 가졌고 누락되는 명칭의 주체 또한 존재했다. 새로운 민주주의는 성별, 계급, 인종, 지역, 젠더 정체성의 경계를 넘는 교차적인 시민 개념을 구성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이대남’과 같은 개념을 배제와 저주의 영역이 아닌 새롭게 고려하고 절합한 범주로 수정 접수해야 한다.
셋째, 제도는 정치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구조적 장치다. 그러나 민주주의 제도는 중립적이거나 자동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가치와 감정, 어떤 언어와 세계관이 그 제도를 통해 살아가는지가 중요하다. ‘냉정한’ 제도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살아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제도와 감정의 이중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제도의 안정성과 정동의 역동성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 제도를 지키되, 그것이 대중의 분노와 좌절을 수렴할 수 있는 정서적 공간과 연결되어야 한다. 공공성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감정의 실천이 되어야 한다.
넷째, 민주주의의 핵심은 ‘기존의 틀 안에서 운영되는 정치’가 아니라, ‘다른 삶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집단적 상상력이다. 이 상상력은 예술, 미디어, 교육, 디지털 플랫폼, 그리고 공동체 실천을 통해 확장될 수 있다. 그 속에서 시민은 정치의 소비자가 아니라 창조자로 다시 태어난다.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민주주의 자체의 종말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위기는 특정한 민주주의 모델—즉 자유주의적 중도주의의 위기다. 이로부터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사유해나가야 한다. 아마 그를 ‘민주주의를 다시 쓰는 일’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회복이 아니다. 제도와 담론, 그리고 정동과 상상력을 결합한 새로운 민주주의의 기획이다. 그 기획이 가능하고 실천으로 이어갈 수 있다면, 민주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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