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

[129호]소크라테스의 지혜로운 복수




소크라테스의 지혜로운 복수

조흥만_전북대학교 철학과 강의전담교수


고대 희랍의 전통적입 정의관과 소크라테스의 복수금지 논변

희랍어에는‘새로움’을 뜻하는 낱말이 둘이다. 과거부터 존재했지만 아직 실현되지 못한 것을 가리키는‘카이노스’(kainos) 그리고 과거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지만 미래 시점에 존재하거나 발생하게 될 사물 또는 사건을 나타내는‘네오스’(neos)가 그것이다. 상기설을 통해 진리의 방법론을 현시했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플라톤에게 철학은 망각의 우물에 침잠해 있는 진리들을 기억의 영역으로 호명하는 사유 작용이라는 점에서‘카이노스’를 닮았다.「복수의 도덕적 수용 가능성에 관한 고찰 - 탈리오의 정의와 소크라테스적 행복주의」는 이런 맥락 안에 닻을 내리고 있다. 사적 복수의 영역에서 고대 희랍의 전통적인 정의관과 소크라테스의 복수금지논변 및 그 정당화 근거들을 조망하는 이 졸저는, 복수에 대한 성찰의 결핍이 현재 진행형인 한국 사회에서 악을 악으로 응징하려는 강렬한 복수욕을 갈음함과 동시에 소크라테스의 지혜로운 복수를 기억하게 하려는 글이다. 복수 자체가 공적 정의와 사적 정의, 이성과 감정에 걸쳐 있는 탓에 진동과 자장이 복합적일 뿐만 아니라 복수를 견인하고 보복적 고통을 가하려는 욕망인 분노의 쾌감 때문에라도 성찰적 복수가 변방의 지대로 밀려나기 일쑤였던 이유 때문이다.

짧은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한 이 연구는 다음의 맹아적 질문에서 출발한다:‘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을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인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어떻게 복수하는가?’그의『변론』을 훑어보면, 아테네 법정에서 소크라테스가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를 자신에 대한 정식 고발의 원인 제공자이자 최초의 비공식적인 고발자라고 실명으로 지목하는 것을 보게 된다. 아리스토파네스야말로 자신에 대한 오랜 중상, 비방 그리고 강한 적대감의 일차 원인이었다는 그의 증언뿐만 아니라 결국 그가 감옥에서 독배를 들었다는 역사적 비운까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단계에 이르면,『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와 소크라테스 간 모종의 경쟁 관계나 최소한의 어떤 긴장감이라도 감지하게 되리라는 우리의 기대는 매우 그럼직해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대략 26편의 플라톤의 저작 중에서『향연』만이 아리스토파네스가 등장하는 유일한 대화편임을 감안할 때, 플라톤이 이 대화편에서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스승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지 않았겠냐는 추론이 가능하겠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복수는 타인이 가한 신체적․물질적․정신적 피해에 대해 피해자 또는 그 친족이 가해자나 그 연고자에게 앙갚음을 하는 보복 행위이다. 이 의미규정의 골자를 추린 간명한 공식이 바로 3800여 년 전 바빌로니아의 왕 함무라비의‘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의 정의(the justice of the talio), 즉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이다. 이 유구한 복수 원리는 공적인 법이 허용하는 최대한도로 자신의 적(敵)에 대한 위해(爲害)가 용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것이 영화로운 행위로까지 여겨졌던 고대 희랍 사회에서도 예외 없이 유효했다. 이런 복수 개념이 희랍 사회 전반에 통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빌린 돈을 되갚는 것처럼 당한 해를 되갚는다는 빚의 변제 개념과 즉각적인 유사성을 띠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탈리오의 정의’가 한쪽 눈에는 양쪽 눈이 아니라 오롯이 한쪽 눈이라는 합리적 등가성을 근거로 정당성을 확보한다고 해도, 실제로 우리는 배상(賠償)에 대한 관심을 떠나 복수욕에 눈이 먼 복수 행위 자체에서 더 큰 만족을 얻으려 하지는 않는가? 나아가서 복수에 대한 무정부주의적 맹목으로 인해 자신이 당한 위해(危害)와 동등하기는커녕 이를 훨씬 웃도는 과잉 피해를 기꺼이 입히려고 하지는 않는가?

고대 희랍 사회에서‘친구들을 이롭게 하고 적들은 해롭게 하는 것이 정의’라는 도덕규범과 관련된 많은 구체적인 사례 중 하나가 배반과 자식살해의 비극성을 이야기하는 에우리피데스의『메데이아』이다. 남편 이아손이 코린토스 왕 크레온의 딸과 결혼할 것이라는 비보를 접한 메데이아는 모욕과 배신으로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복수의 정의를 실행하려 한다. 그녀는 적들에게 가혹하고 친구들에게 관대한 것이 가장 영예로운 이들의 삶이고, 적을 응징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자신이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며 거듭해서 자신의 결기를 다잡다. 그렇지만 그녀“내가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르려 하는지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격정(thymos)이 나의 숙고(熟考)보다 더 강력하니, 격정이야말로 인간들에게 가장 큰 재앙의 원인이로다!” 는 대단히 유명한 독백도 덧붙이고 있다. 이 고백에서 우리가‘탈리오의 정의’에 내재한 간과할 수 없는 결함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복수가 원리상 정의롭다는‘탈리오의 정의’를 수용한다고 해도, 실은‘달래기 힘든’격정적 심리 상태에 놓인 그녀가 자신이 당한 배신이나 모욕과 동등한 복수를 실행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탈리오의 정의’가 주요한 복수 원리로 위용을 과시하는 특정 시․공간 안에서 양육된다면, 적에게 해를 끼치는 것에 관한 깊은 반성이나 억제를 자신에게 부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라면 법의 허용 범위 안에서 적을 기만하고, 적의 재산을 침탈하고, 갖가지 중상모략으로 적의 평판을 폄훼하는 것이 자랑거리로 찬미 되고 나아가 장려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정의관은 고대 희랍의 정의관과 천양지차이다. 정의로운 사람은 상대가 친구이든 심지어 적이어도 해를 입히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가장 강력하고 독창적인 논증을 다름 아닌 그가 천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는 것은 희생자인 그들을 좀 더 불의하게 만들 것이고,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불의하게 만드는 극악무도한 행위는 정의로운 행위가 아니다.


Giambettino Cignaroli,The Death of Socrates


『크리톤』에서 밝히는 소크라테스는 지혜로운 복수

자신의 정의관을 본격적으로 논증하는『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지혜로운 복수를 역설한다. 특히, 그의 독특한 입장은 탈옥을 권고하는 크리톤의 옥중 대화에서 극명하게 밝혀진다.‘친구를 이롭게 하고 적을 해롭게 하는 것이 정의’라는 고대 희랍의 전통적인 정의관을 대변하고 있는 크리톤은, 친구보다 돈을 우선시하여 소크라테스를 구하지 못했다는‘부끄러운 평판’에 대한 우려를 다수의 권위에 기대어 토로한다. 그에게‘친구보다 돈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대중의 평판은 부끄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적들을 이롭게 한다는 결과론적 측면에서도 전통적 정의관을 유린하는 매우 위험천만한 행위인 것이다. 왜냐하면 수인(囚人) 소크라테스의 경우만 봐도, 정의에 대한 사회적 가치관이 고스란히 응축된 대중들의 악성 비방이야말로 단순한 사회적 비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칫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는 중차대한 사안으로 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시에 크리톤의 탈옥 논변은 상당한 압박 수단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크리톤과 대중은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소크라테스의 탈옥이 정의롭다고 고집하는 것일까? 고대 희랍의 전통적 정의관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그들이 탈옥의 정당성을 소크라테스에 대한 부당한 판결에서 찾고 있다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더욱이 소크라테스 자신도 재판의 부당성을 알고 있었고, 이런 전반적인 상황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아테네의 법에 의해 소크라테스에게 가해진 부당한 판결을 회복하는 방법이 그들로서는 당연히 탈옥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다수의 평판에 떠밀린 탈옥 행위에 대해 소크라테스 본인은 단호하게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대중적 정의관을 지지하는 크리톤의 탈옥 권유 논변이 정당성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 먼저 짚고 넘어가자고 제안한다. 이 검토 작업은‘언제나 추론해 보고서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판단되는 원칙만을 따르는 것’이 소크라테스 자신의 행위 원칙이라는 데서 힘을 얻는다. 다시 말해서, 그의 원칙은 자신의 생사 문제를 논증을 통해 꼼꼼하게 따져 보겠다는 것이다.‘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는 삶’이라고 선언했던 소크라테스의 최우선 과제는 탈옥 행위가 과연 따를 만한 정의로운 행위인지에 대한 검증이다.

계속되는 논의 과정에서 우리는‘타자에게 의도적으로 불의를 행하는 것은 참된 도덕적 선이 아니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도덕적 직관과 마주하게 된다. 그가‘어떤 경우라도 불의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위해금지원칙’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불의한 행위 자체가 좋지도 훌륭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불의한 행위를 저지르는 자에게도 전적으로 나쁘고 부끄러운 것이라는 논의도 부가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위해금지원칙’이 불의한 일을 당한 경우와 같은 특수 상황에서도 똑같이 유효한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복수에 관한 고대 희랍의 전통적인 정의관과 소크라테스의 독창적인 정의의 원칙 간의 첨예한 대립을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는 심급에 비로소 들어서게 된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가 남을 해치는 것이 결국 불의한 짓을 저지르는 것과 같다면서‘복수금지원칙’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원칙은 도덕규범을 단지 해석할 뿐 그것을 변혁시킬 생각은 하지 못했던 당시 동시대 희랍인들에게 논란의 핵이자 가장 심원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왜 우리가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실로 소크라테스의‘위해금지원칙’과‘복수금지원칙’은 희랍 사회에 똬리를 틀고 있던 기성도덕과의 단호한 결별 선언이다.‘복수금지원칙’은, 어떤 상황에서도 불의하게 행동하는 것에 대한 거부 그리고 심지어 이전에 자신을 부당하게 대우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의도적인 손해나 손상을 가하는 것에 대한 철저한 거부를 선언하는‘위해금지원칙’의 논리적 귀결이다. 그렇다면 이‘위해금지원칙’의 원형적 논증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크리톤』의 소크라테스적 도덕 혁명 논의는 준(準) 역사적인 문서인『변론』에서도 추적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청년 타락 혐의’의 무혐의를 입증해 보이려고 소크라테스가 행하는 멜레토스에 대한 반대 신문 장면에서, 그는‘만일 피할 수 있다면 자신의 이웃에게 해를 끼치기를 원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논증을 개진한다. 왜냐하면, 누구라도 해를 입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란 것이다. 만일 자기 주변인들을 타락시켜서 그 결과 그들이 못된 시민들이 된다면, 그들을 타락시킨 자는 그 타락한 주변 사람들에 의해 해코지를 당할(mochthēron) 위험에 노출되지 않겠느냐는 논변이다. 제정신이라면 도대체 어느 누가 해코지당하기를 바라겠는가?

그렇다면‘복수금지원칙’이 논리적으로 추론되는‘위해금지원칙’은 어떤 근거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일까? 이것을 논급하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의 윤리이론, 특히 덕(aretē)과 행복(eudaimonia)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덕과 모든 합리적 행동의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의 관계 논의는,‘왜 우리가 도덕적이어야 하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규명된다. 왜냐하면, 좋고 나쁜 것에 대한 앎이 덕이라는 사실을 숙고할 때, 앞의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도덕적 덕에 따른 행위가 행복에 대한 최상의 전망을 제공한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복수는 복수 대상의 정의는 물론이고 복수를 감행하는 사람의 정의까지 손상하는 행위로서, 누군가에게 해를 가하는 행위는 해를 당하는 사람과 해를 가하는 사람 모두의 고유한 덕, 즉 그들의 도덕적 덕을 나쁘게 타락시키는 것과 매한가지이다. 소크라테스에게‘훌륭하게 산다는 것’은‘아름답고 정의롭게’사는 것과 같은데, 타자에 대한 위해(爲害)가 아름답고 정의로우며 훌륭하게 사는 것이겠는가?

『향연』에서 플라톤은 아리스토파네스에게 다음과 같이 복수한다: 당시 아테네인들의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그리고 보란 듯이 우리의 예상을 깨고, 두 사람은 기탄없이 농담을 주고받고, 향연의 파장 무렵에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잠들기 전까지 소크라테스와 술잔을 기울이는 등 원한이나 복수는 그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되레 플라톤은 르네상스에서 프로이트나 융까지의 해석의 역사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 찬미 연설이‘플라톤적인 사랑’과 동의어로 간주하는 영광을 누리도록 그 품격을 고양시켜 주었다. 누가 됐든 누구에게라도 불의한 행동은 나쁜 짓이고 나쁜 짓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위해금지원칙’이 플라톤의 삶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