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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6년, 언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유지연 기자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인근 노래방 화장실에서 일면식도 없는 남성에게 한 여성이 살해당했다. 많은 시민들이 강남역

10번 출구에 추모공간을 만들어 국화꽃과 포스트잇을 놓으며 함께 분노했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언론은 사건 발생의 개요와 변화 국면, 추모 열기를 보도하는 것까지 일제히 관련 보도를 쏟아냈다. 그 과정에서 ‘묻지마 범죄’라는 프레임을 씌워 ‘원인도 이유도 알 수 없는 범죄’라 결론을 내게 했으며, ‘조현병 환자의 소행’이라는 점을 강조해 ‘갑자기 발생한 문제적 개인의 이상 행동’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모 일간지는 살해당한 여성에게 ‘노래방 살인녀’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 후로 6년 뒤인 2022년 9월 14일 신당역에서 또 다른 여성이 살해당했다. 피해자는 전 직장동료인 가해자로부터 불법 촬영과 협박, 스토킹을 당하다 여자 화장실에서 살해당했다. 이번에도 언론은 피해 상황을 자극적으로 부각하거나 범죄의 원인을 가해자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등 범죄의 심각성을 축소하는 행태를 재현하고 있다.


언론은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을 보도하면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설명할 때 ‘원한 관계’, ‘보복 범죄’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KBS와 MBC 등 지상파 방송을 비롯해, 네이버와 다음 등 주요 포털에서도 ‘원한 관계’ ‘보복살인’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기사가 줄줄이 검색된다. 과연 맞는 표현일까?


‘원한관계’의 사전적 의미는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하여 응어리진 마음’이다. ‘억울’이라는 단어 또한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거나 하여 분하고 답답함. 또는 그럼 심정’을 뜻한다. 결국 ‘원한관계’라는 단어에는 ‘아무 잘못 없이 벌을 받았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2년 동안 스토킹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판판을 받는 과정에서 결국 살인이라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명백하게 가해자가 잘못한 행위에 대해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했다는 의미의 ‘원한관계’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잘못됐다. 서혜경 민주언론시민연합 미디어 감시팀 활동가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다툼내지는 나쁜 사이로 표현하는 듯한 ‘원한 관계’는 잘못된 표현이다. 불법촬영에 스토킹까지 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원한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온당치 않으며, 범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잘못된 보도다.”라고 지적했다. '보복범죄’ 또한 잘못된 표현이다. ‘보복’의 사전적 의미는 ‘남이 저에게 해를 준 대로 저도 그에게 해를 줌’이다. 이런 표현은 피해자에게도 책임을 지우며 범죄행위의 심각성을 가릴 우려가 크다. 박지수 한국여성민우회 성평등미디어팀 활동가는  “보복범죄라는 표현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불법 촬영과 스토킹으로 고소했고, 합의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다는 가해자의 관점이다. 가해자 관점의 표현은 스토킹의 심각성을 희석하고 피해자에게 범죄의 원인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고 꼬집었다. 

 

일부 매체는 잘못된 표현을 사용하지 않겠다며 자정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겨레는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 화장실 범죄를 보도하며 ‘스토킹 범죄’라는 표현을 쓰기로 했다”며 “보복의 사전적 의미는 ‘남에게 당한 만큼 그대로 갚아준다’는 것이어서, 피해자에게도 책임을 지우는 한편 강력범죄 전조가 되는 스토킹 행위의 심각성을 가린다는 지적이 있었다”고 밝혔다법무부 디지털 성범죄 등 전문위원회는 지난해 「폭력·성희롱 간행물 제작 가이드라인 마련」 권고안을 통해 성폭력처벌법에 규정된 카메라 등 이용 촬영 범죄를 유희적 의미를 내포한 ‘몰카’로 약칭하거나, 성범죄나 가해자를 ‘몹쓸 짓’, ‘늑대’, ‘짐승’으로 표현하는 등 범죄의 위법성을 희석하거나 범죄 의식을 약화시키는 용어 사용을 지적한 바 있다. 그 목적은 성범죄 관련 보도에 정확한 개념과 올바른 용어를 사용·표기해 성범죄 피해자의 2차 피해를 유발하거나 확산시키는 것을 예방하기 위함이다.


비극적인 사건에 ‘단독’ ‘속보’ ‘특종’의 딱지를 다는 것도 언론의 고질적 문제다. 비극적인 사건에 시간 차를 기준으로 ‘단독’ ‘속보’라는 딱지를 붙을 붙이는 것은, 언론이 이를 이용해 클릭 수를 올리려는 ‘클릭장사’를 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를 두고 영국 출신의 아파엘 라시드 기자는 15일 트위터에서 “한국 언론은 [단독]이라는 타이틀을 차지하려고 서로 하이에나 마냥 몰려든다”며 “비극적인 사건을 두고도, 이 엄청난 사건을 내가 먼저 보도했어!와 같이 얼마나 자기가 잘난 기자인지
뽐내고 싶어 한다”고 지적했다.

 

2020년 3월 25일 성 착취물을 텔레그램에 유포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은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주셔서 정말말감사하다.”고 말했다. 수백 명의 기자와 수백 대 카메라가 그를 찍고 있었다. 가수 김윤아는 자신의 SNS를 통해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마십시오. 범죄자에게 마이크를 쥐여주지 마십시오”라는 글을 올렸다. 조주빈이 스스로를 악마로 지칭하고, 일부 언론에서 조주빈의 과거 일화 등을 무분별하게 보도하는 것에 대한 지적으로, 비판의 종착점은 조주빈이 아닌
언론에 향해있다. 언론은 범죄자에게 공적 발화의 기회를 허락해도 되는걸까? 가해자의 진술을 전면에 드러내는 것의 윤리적 문제는 없을까?


성범죄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언론은 가해자의 개인적인 사연을 취재해 알리고, 가해자의 개인 병력, 성장배경을 언급하며범죄에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번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도 다르지 않았다. 언론은 가해자가 어떻게 범행을계획하고 실행했는지 구체적으로 보도했고, 가해자가 피해자의 옛 주거지를 배회하는 CCTV를 공개했다. 또한 가해자 신상 공개 이후에는 가해자의 직업, 나이, 학력, 전과를 밝히고 가해자의 대학 동기를 인터뷰하는 등 가해자의 과거 행적을 보도했다. 언론이 애써 가해자에게 서사(敍事)를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법무부 디지털 성범죄 등 전문위원회는 가해자에게 지나친 서사(敍事)를 부여하는 보도에 대해 “언론이 소수의 특정 가해자에게 이목을 집중시켜 지나치게 악마화하거나 가해자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경우 나머지 가해자들은 ‘잊혀짐 효과’를 누리고, 궁극적으로 사건의 본질인 성범죄의 근본적인 원인을 진단하고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언론은 가해자에 대한 과거 사실을 보도하면서 “평범한 사람”, “의외라는 반응” 등의 묘사를 사용하며 가해자가 어쩌다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닌 실수를 저지른 사람으로 간주하도록 한다. 가해자의 범죄행위가 “악마”, “몹쓸 짓” 등으로 묘사되면서 범죄의 심각성은 가려지고, 가벼운 행위로 인식하게 하고 있다. 반면 피해자에 대한 서사(敍事)는 “상처”, “짓밟힌” 등의단어로 묘사되면서, 피해자는 “피해자다움”을 강요받고 있다. 범죄에서 피해자의 실명이나 직위, 직업 등이 보도되어 특정되기도 하며, 사건과 피해자의 이름이 결합하면서 2차 가해도 일어나고 있다.


지난달 더불어민주당 소속 이상훈 서울시의원은 시의회 시정 질문에서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에 대해 “좋아하는데 안 받아주니 여러가지 폭력적인 대응을 남자 직원이 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또 가해자에 대해 “31살의 청년이고 서울시민이다. 서울교통공사 들어가려면 나름 열심히 사회생활과 취업 준비를 했었을 서울시민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누가 가해자의 범죄를 정당화해줄 수 있나? 그 어떤 개인사나 정황도 범죄를 정당화하지 못한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거나해친 사건에 있어서는 어떤 명분도 합리화될 수 없다. 언론은 이제 보도하지 않아야 할 것은 보도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을 써야 할지만큼, ‘어떻게’ 써야 할지를 고민하는 자세를 갖춰야 최소한 언론이 2차 가해를 부추긴다는 오명을 벗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