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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24호] 불안한 영혼과 두려움의 지배

 

 

 불안한 영혼과 두려움의 지배

 

 

서 용 순(영남대)

 

 

모든 것이 흔들린다. 적어도 외양은 그렇다. 우리에게 드러나는 세계는 그 자체로 동요하고 있고, 그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존재 역시 흔들리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세계에 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주 심각한 동요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는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어쩌면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모종의 불안이며, 그 불안이 구체화되는 순간 우리는 두려움의 지배를 받는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것에 대한 불안은 가까운 미래에 두려움으로 바뀔 것이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무슨 이야기냐고? 결코 복잡하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불안으로 드리워진 세계고, 그 이면에는 무시무시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만 말해도 될 것이다. 그것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한 사람들은 거의 없을 테니까.

 

불안에 시달리는 영혼, 대학원생

우리는 이미 대학에 일반화되어 있는 어떤 분위기에 익숙하다. 대학교에 갓 입학한 학부생들부터 박사과정의 대학원생들까지, 대학의 구성원 전반은 어떤 불안감에 시달린다. 대학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거의 모든 학생들은 취업의 고민에 시달린다. 이른바 명문대 또는 상위권 대학의 구성원들이라도 이러한 불안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런 와중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문의 세계에 발을 들인 사람들은 정말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특히 미래에 대한 아무런 보장이 없는 인문사회과학, 순수 자연과학 계통의 대학원에 진학한 정신 나간(!) 예비 연구자들의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자못 궁금해질 정도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선택을 끝까지 후회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대학원 과정 내내, 주변의 걱정과 비아냥거림을 감내해야 하고, 그런 와중에 엄청난 피로감과 자괴감을 느끼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자신이 생각했던 학문과 대학원에서 접하는 제도적 학문 사이의 괴리 역시 그들을 실망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하다.

그런 것은 그래도 참아낼 수 있다. 그런대로 제도적 학문의 풍토에 적응하거나, 자신의 학문을 추구하기 위한 고된 과정임을 받아들이면 된다. 견디기 힘든 것은 그들이 자신의 앞길을 전혀 그려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다른 직종과 달리 공부를 업으로 삼는 길은 어떤 구체적인 전망도 보여주지 않는다. 선택의 폭은 좁을 수밖에 없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논문을 쓰고, 자신의 학문을 갈고 닦으면 된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구체적인 전망이 결여된 허울 좋은 원칙론일 뿐이다. 공부를 업으로 삼아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려면, 공부만 잘해서 될 일이 아니다. 전임교수로 취직하기 위해서는 학문 그 자체보다도 학문 외적인 요소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강사 자리 하나라도 얻으려면 신경 써야 하는 일은 무수히 많다. 권력자들의 비위를 거스르면 안 되고, 심하게 튀어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해도 앞날이 보장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미 박사 학위 소지자는 포화상태다. 게다가 최근에 개정된 강사법은 학문 후속 세대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다. 이전에는 박사 수료 상태에서 시간 강사로 강의를 맡을 수 있었지만, 일단 강사법이 전면적으로 시행되면 그 가능성은 상당히 줄어든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거기서 오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오늘날의 모든 대학원생들은 모두 불안에 시달리는 영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저 불안한 가운데, 그 불안과 친구가 되어 사는 길밖에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 이 불안이라는 친구는 나의 등에 칼을 꽂을지도 모른다. 특징적인 것은 지금 이 불안이 결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래서 이런 불안은 곧바로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오늘의 대학원생들, 이름만 거창한 학문 후속 세대는 모두 두려움의 지배를 받는 영혼들이다. 그것은 정확히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가 던지는 두려움과 동일한 선상에 놓여 있다. 이 세계를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바로 그 두려움의 지배 속에서 살고 있다. 노동의 파편화와 사회 안전장치의 해체, 경제 민주화의 후퇴와 자본의 일방통행은 무차별적 경쟁만을 인간의 미덕으로 남겨 놓았다. 세계는 황폐화되고 있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혼은 자본과 화폐의 위력 앞에 무기력하게 스러져 간다. 이제 모두는 치열하게 경쟁한다. 오로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지극히 일차원적인 당위만이 이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다. 이 세계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두려움을 벗어나지 못한다. 설령 내가 지금 잘나가더라도, 내일의 내 모습이 어떻게 변해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몰락에 대한 공포, 그 끔찍한 가난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공포야말로 지금의 세계를 움직이는 지극히 부정적인 힘이다. 두려움의 실례들은 도처에 깔려있다. 신문을 펼치고, 포털 사이트를 클릭할 때마다, 생활고와 연결된 범죄를 발견하고, 삶의 구석구석에서 불안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 존재들을 목격한다. 누구도 떨쳐낼 수 없는 그 두려움은 점점 더 세계를 조여 온다. 학문의 세계에 대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불안은 삶을 잠식한다.

학문의 세계에서 그러한 불안과 두려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이들은 바로 배움의 와중에 있는 대학원생들이라는 사실을 우선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학문이 세계의 지배적 논리에 점차 종속되고 있는 이 와중에, 그러한 두려움의 지배를 가장 많이 받는 것은 역시 가장 힘없는 존재들이다. 물론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구축한 전임교수들이라고 해서 이러한 불안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학문적인 활동보다는 주변적인 업무들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시간강사들의 상황은 아주 열악하다. 강사법이 그대로 실행될 경우 상당수의 시간강사들은 실업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위협은 아주 현실적이다. 그러나 역시 그런 변화에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을 이들은 가장 젊은 연구자들인 대학원생이 될 수밖에 없다. 불안은 영혼만을 잠식하는 것이 아니다. 그 불안과 그것에 따라오는 두려움은 실제 삶을 잠식한다. 당연히 번민이 따라온다. 비참한 가난에 시달리는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이제라도 공부를 포기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번민들. 실제로 높은 뜻을 품고 학문의 길을 선택했다가, 채 석사도 마치기 전에 공부를 접는 대학원생들도 많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은 그런 결과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한국의 대다수 비인기 학과 대학원생들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이다. 정치권과 제도권 아카데미에서 아무리 학문 후속세대와 비정규직 강사에 대한 처우 개선을 이야기해도 그것은 그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지만, 해결책은 요원하다 못해 전무하다. 이러한 문제가 지속된다면, 대학의 학문 후속 세대 대부분은 기껏해야 비정규직 강사가 되거나, 잘못하면 그저 박사를 취득함과 동시에 실업자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대학원은 유명무실해질 것이고, 대학원 진학은 그저 학벌 세탁을 위한 매매행위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 그래도 대학은 걱정이 없다. 박사학위 소지자는 지천에 깔렸다. 여의치 않으면 정년퇴직한 교수들을 비정규직 강사로 채우면 되고(실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들이 세상을 뜨고 나면 인문학 등의 비인기 학과를 없애면 그만이다. 그 정원을 인기 학과로 돌리면 학교 장사는 더 번창할 것이다. 대학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학문을 수요공급의 법칙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이미 대학원 지원자가 3명이 넘지 않는 학과의 당 학기 대학원 정원을 몰수하는 대학도 있다. 마치 팔리지 않는 상품을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 것처럼……

 

 

자기 자신으로 남을 수 있는 용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확실한 답은 없다. 누군가 이러저러한 방법을 쓰면 당신의 불안은 해소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거짓말이다. 너무나 부끄럽고 죄스럽게도 이 상황을 일거에 해결하는 묘방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단 한 가지 이야기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두려움에 맞서는 용기가 없이는 무엇도 할 수 없다는 말. 이미 불안과 두려움이 일반화된 오늘날, 그 불안과 두려움을 피할 수 있는 장소는 어디에도 없다. 공부를 그만두고 취업 전선에 뛰어든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또 다른 불안과 더불어 같은 두려움이 달려든다. 세계의 흐름에 따라 나를 바꾸려는 노력이 만나게 되는 것은 어느 것도 바뀌지 않는 허탈한 현실일 뿐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바디우(Alain Badiou)는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두려움에 맞서는 용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용기는 순간적인 영웅적 행위와는 거리가 멀다. 그 용기는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용기, 어떤 순간에도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으려는 용기다. 당연히 이러한 용기는 지속을 요구한다. 오늘날 풍요로운 삶과는 거리가 먼 학문을 하는 것은 바로 그 용기를 시험대에 올리는 과정이다. 어떠한 현실의 어려움도 이겨 나갈 수 있으리라는 용기 없이 학문을 시작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시험대에 오른 용기는 쉽게 무뎌진다. 시작의 기억은 점점 흐릿해지고, 어리고 철모르던 젊음의 객기였다는 자조 속으로 사라지기 일쑤다. 그렇게, 우리는 시작의 용기를 지워버린다. 그 용기를 기억해내야 한다. 다시 한 번, 불안과 두려움이 아무 문제도 아니었던 그 순간의 기억을 되찾는 것. 오늘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용기에 대한 기억이다. 그 용기는 나의 삶을 다른 이의 삶이 아닌 나의 삶으로 유지하게 하는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 남을 수 있는 용기. 그것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