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

[124호] 빛/빚에 당하다

 

 

 

 빛 / 빚에 당하다

 

 

이 소 연(문학평론가)

   

 

      자크 라캉은 불안, 그것은 속이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불안만큼 우리의 본래적 상태에 가까운 감정도 없을 것이다. 불안은 대체로 모호한 원인으로부터 비롯되며 또 다른 형태의 불안으로 대체될 뿐, 좀처럼 소멸되는 법이 없다. 불안은 대개 막연하나마 모종의 위기가 임박했음을 경고하는 신호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불안은 어쩌면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인 우리가 감내할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기분일 뿐, 그 자체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일지 모른다. 하이데거는 오히려 불안이 인간을 전면적으로 뒤흔들어 본래적 자신을 대면하는 상태로 이끈다고 두둔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불안이 불러일으키는 불쾌한 감각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선택하는 도착적인 방식일지도 모른다. 해결 불가능한 상황과 결핍된 자아를 무리하게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히려 신경증적 도착을 낳기 마련이므로. 따라서 정말 심각하게 물어야할 질문은 불안 그 자체보다 우리가 불안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것이 아닐까? ‘불안에 대한 불안이 문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은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연인에게 보낸 엽서에 쓴 농담 한 마디 때문에 파멸에 이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억압적인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통제하는 첫 번째 장치, 그것은 자신의 병든 상태를 끌어안고 아파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조직화된 무감각이다. 역사와 개인의 운명에 대한 대책 없는 긍정은 봉착한 위기를 제대로 파악하는 일을 가로막는 훼방꾼과 같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긍정적인 정서, 명랑하고 건전한 태도와 잘 맞는 한 쌍의 짝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니겠는가. 한밤중에도 꺼지지 않는 도시의 네온사인과 대형 상가의 화려한 조명이 열심히 어둠을 몰아내는 동안, 알아차리지 못하는 형태로 강요된 내면의 낙관은 불평을 잠재우고 위기를 감지하는 촉수를 위축시킨다. 이를 통해 신자유주의 시대의 기업은 성장에 대한 믿음을 유포하여 투자를 끌어들이고 상품을 소비하도록 시장을 부추기고 있다. 그 빛은, 내면의 불안마저 치유와 자기계발을 통해 개선할 수 있다고 미혹한 후, 이를 상품으로 만들어 팔아 치운다.

      대중문화는 손쉬우면서도 저렴한 방식으로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판타지를 이런저런 형태로 바꾸어 부지런히 유포한다. ‘힐링이나 재테크같은 그럴 듯한 용어들이 철마다 옷을 바꿔 입고 나타나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나 각종 매체의 프로그램을 점령하는 일은 어느새 진부한 풍경이 되어 버렸다. 이들은 모두 사회가 갖고 있는 구조적인 모순으로부터 관심을 차단하고 불안의 원인을 자기개인 내부에서 찾도록 한다는 점에서 유사-종교적인 사기에 가깝다. 긍정적인 마음가짐과 건실한 자기 관리가 현 상태를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거짓 처방은 구조에 대한 비판 의식을 약화시킴으로써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어둠에서 온 경고

 

      그러나 눈부신 낮의 지배하는 시간도 무한정 계속될 수는 없는 법. 이윽고 천천히 찾아오는 황혼과 함께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대중매체와 대형매장을 통해 전시되는 현란한 상품들이 만들어낸 판타지에 균열을 내고 틈입하는 저 어둠의 기운, 불안은 과연 어떤 위기를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가? 으스스한 모습을 한 유령은 떠돌면서 이 시대의 급박한 위기를 야기한 균열을 보게 한다. 이 시대의 삶을 타락시킨 범죄의 세목들을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고발하는 유령 앞에서 시대의 관절이 탈구되었다(The time is out of joint).”고 독백하는 순간, 위기는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충격은 우리가 겪어내야만 할 온당한 불행이리라. 불길한 경고를 귀 기울여 듣는 일, 부정에 몸을 내맡기기, 유령을 감수하기.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의 첫 장면은 혼돈이 난무하는 밤의 시간을 견딘 자에게 해방의 미광이 비칠 것임을 넌지시 암시함으로써 시작된다. 데리다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은 주인공이 유령과 조우하는 의미심장한 순간에 관심을 기울였다. 삶과 죽음의 언저리에 들러붙어있는 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존재는 우리에게 어떤 위기를 경고하기 위해 반복해서 출몰하는가?

      우리가 그의 얼굴을 직시하는 순간, 모호한 불안감은 공포와 경악으로 바뀌고 만다. 우리는 자본이라는 주인기표에게 이 시대의 전권을 내어준 대가를 오랫동안, 남김없이 치러야한 한다. 건강, 직업, 사랑에 대한 자율권을 빼앗기고, ‘누구든지 하루아침에 망할 수 있다는 막연한 공포에 휩쓸려 스스로 다시 자본의 굴레 아래 걸어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이들의 사지를 얽어매 이러한 악순환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덫, 그것이 바로 이다. 이를 통해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일상을 속속들이 금융 시스템에 복속시키고 개인을 그 부속품으로 만드는 일을 진행시키고 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마우리치오 라자라토는 부채인간(2011, 메디치)에서 신자유주의가 부채에 기반을 둔 시스템이라고 진단한다. 자연스럽게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개인의 주체 형상은 채무인간(L'homme endetté)’의 모습으로 육화된다. 자본의 대부분이 금융을 통해 매개되는 시스템은 모든 관계를 채권-채무 메커니즘으로 바꿔버리고 만다. 우리는 누구나 지갑 속에 한 두 장쯤은 들어있는 신용카드를 통해 채무경제 시스템의 일원으로 등록되며 동시에 신용평가기관에 의해 살 자격이 있는존재임을 심사받도록 내맡겨진다. 그 뿐만이 아니다. 어느새 보험, 국민연금을 비롯한 각종 공공채무가 우리의 사회적 삶을 그물처럼 얽어맨다. 등록금 대출로 인해 마이너스 얼마부터 성년의 삶을 시작하는 새내기 대학생부터 내 집 마련, 창업 등 인생의 관문을 통과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빚은 이미 주어진조건처럼 부과되어 삶을 조종하기 시작한다.

 

 

       ‘불안에 대한 불안그 이후

 

      정말 두려운 것은 이 부채가 내면화되어 인간의 실존을 규정하기 시작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잠재된 힘의 실현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으로 맞이해야할 미래가 연체된 빚과 불어나는 이자의 형태로 규정되는 삶에 대한 절망감이다. 이를 통해 사회는 청년들을 죄책감, 양심의 가책, 책임감에 찌든 채무자라는 이 주체적 형상으로 길들여온 것이 아닌가? 이들은 미래를 빼앗겼기에 안정된 시간 감각도, 어느 곳에도 안주할 수 없기에 안정적인 공간감각도 가질 수 없다. 안정된 시공간을 점유할 수 없는 상태로 세상에 던져져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긍정과 낙관론이라는 신복음주의에 그토록 빈번하게 노출되는 사람들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만성화된 좌절감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상태가 한 사람의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오히려 중층적으로 얽혀있는 두 현상 간에 벌어져 있는 극단적인 간극이 주체를 더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아닐까. 한편으로는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는) 외부의 강한 빛에 노출됨으로써, 또 한 편으로는 (부지불식간에 내 것이 되어 버린) 빚의 무게에 치인 채. 이렇게 이 시대의 가여운 주체들은 알게 모르게 두 번 다치고 당하는 사이 자신이 누구인지 일찌감치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불안에 대한 불안의 다음 단계는 어쩌면 멘붕일 것이다.

      조심. 아직 더 기분 나쁜 경고가 하나 더 남았다. 그것은 이 두려운 상황을 피하거나 벗어나는 일이 영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새벽부터 밤까지, 학교와 학원을 뱅뱅 돌며 스펙을 쌓기 위한 경쟁에 몰두하다 알바까지 마치고 귀가하는 일상의 끝엔 무엇이 있는가? 만성이 된 피로와 신경증, 그 다음엔? 뛰어넘을 수 없는 계급의 장벽 아래 머무른 채 단기 노동으로 삶을 영위하는 프리카리아트(precariat)’들의 팍팍한 일상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위태로운, 불안정한(precario)’프롤레타리아트(proletriat)' 두 단어가 합쳐져 만들어진 프리카리아트는 비정규직 노동자, 실업자, 위험노동 종사자로 이루어진 새로운 무산 계급을 가리키는 용어다. 문제는 이들이 자신의 계급에서 빠져나올 가능성이 점차 굳게 봉쇄되어 간다는 점이다. 마치 카프카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이들은 출구 없는 미로 속에 갇혀있다. 공감능력도 없고 사고 능력도 바닥나고 피로와 근심이 쩔어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청년층은 이 시대의 몫 없는 자들(part of no part)로 전락해 버린 것이 아닌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라자라토의 대답은 단 한 푼도 상환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새로운 도덕의 계보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채무인간들에게는 언젠가 빚을 갚을 수 있다는, 가망 없는 노예의 도덕이 아니라 부채자체를 없애기 위한 투쟁이 더 가까운 해결책이 아니겠는가? 라자라토는 유서 깊은 희년(禧年, Jubilee)의 원리를 들어 빚진 자들 특유의 죄책감을 떨쳐버리고 부당한 채무를 탕감하지 않고서는 지배-착취-위기축적-주체성의 말살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길이 없다고 주장한다.

어둠의 핵심으로 직하하여 정확히 불안의 원인을 파악하고 발본적으로 대처해야 하기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먼저 대안은 없다(TINA: There Is No Alternative.)'고 하는 거짓말을 떨쳐내고 다른해방의 잠재력을 상상하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까. 전지구적인 빛과 싸워 희망의 미광(微光)을 발하는 반딧불처럼 끈덕지게 살아남는 존재들은 동족들을 새벽 여명으로 함께 이끄는 유령적 주체로 다시 태어난다. 그는 이 시대의 지배적인 메커니즘에 구멍을 내는 목소리요, 채무자의 연대라는 새로운 관계망을 통해 기존의 좌표계를 일그러뜨리는 존재다. 그들과 함께 우리는 빛에 놀라지 말고, 빚에 눌리지 말고, 오로지 잔존해야 한다. 우리는 저들에게 빚진돈을 고분고분하게 상환하지 않고 질기게 버티면서 얼마나 저항할 수 있을까. 새로운 정치는 어쩌면 불안의 빵을 씹으면서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저 미약한 주체들과 함께 탄생할지도 모른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도덕률을 거절하면서 스스로 결백한 마음을 지켜낸 채 해방을 꿈꾸는 존재들. 작은 불씨들은 불안한 대기의 기운을 타고 다니며 잘 마른 들판 사이를 횡행하고 있다. 지독한 어둠 속에서 내면의 약한 빛을 꺼뜨리지 않고 남아있는 존재 자체가 예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