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3.11.21 01:10

 

새로운 인간적인 것을 위하여

- 권력이 빚어내는 자기계발 기술의 원리들

 

 

 

자신 몸을 묶는 방식으로 사이렌으로부터 벗어난 오디세우스, 생존을 위한 자기희생의 신화 속 모델이다.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이해수

 

 

자기 다스림의 기술

 

자기를 다스림이란 것은 그저 단순히 살아있는 것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갖고자 하는 인간 고유의 활동이다. (어떤 생명체가 인간의 형체를 갖고 단순히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인간적인 것이란 범주 또한 인간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것 중 하나다. 그것이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과 같은 프랑스 혁명의 유산으로서 표현되든, 예절, 겸손과 같은 도덕적인 덕목으로 표현되든, 공동체에는 인간을 인간으로서 규정하게 하는 어떤 인간적인 것이 존재한다.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이러한 요소를 학습하고 일정한 삶의 방식을 통해 인간적인 것을 구현하게 된다. 하지만 이 인간적인 것은 선조들의 혁명과업이나 덕목에서 물려받아 그저 보존하고 지키기만 하면 되는 주어진 유산이 아니다. 동시대적인 맥락 속에서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질문을 던져야 하는 정치적인 문제이다. 인간적인 것은 어느 정도 주어진 것으로 공동체 속에서 학습된다. 그러나 일정한 삶의 방식을 형성하고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인간적인 것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그것을 구성하며 변화시키는 과정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자기를 다스린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도, 이데올로기적 교리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인간되게 하는 공동체의 제반 조건들과 특정한 관계를 맺게 하는 일종의 기술(技術)이며, 동시에 자기 자신의 삶과 그 삶을 다스리는 기술을 어떤 방식으로 연결시킬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가진 자기주체화의 기술이기도 한 것이다.

 

자기계발 기술의 원리생존원칙자기희생

 

필자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자기를 다스리는 기술이 자기계발이라는 형태로 점차 구체화되어 지배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위의 내용을 기초로 하여 자기계발이 일종의 자기를 다스리는 기술로서 어떠한 원칙과 방식 하에 순환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구체적으로, 자기계발의 기술이 공동체와 어떤 관계를 지니는지, 그리고 이 기술이 각 주체들과 어떠한 모습으로 관계 맺고 있는지를 주목하고자 한다.우선, 공동체와 자기계발 기술의 관계에서는, 철저하게 생존원칙이 그 관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살아남기가 사회의 원칙이 되는 경쟁사회에서 자기계발의 기술은 생존을 위한 기술로 구성된다. 시장화 된 공동체는 개개인들의 생애주기를 핵심적인 사회원리로 간주한다. 개인들의 전 생애에서 각 시기별로 삶의 기술들이 구체적으로 구성되고, 사회의 가치들과 제도들은 이 주기에 따라 재편되는 것이다. 이 과정이 보다 총체화 되면 마치 사회가 하나의 유기체화 되어 생애주기를 갖고, 개인들은 사회의 인구로서 파악된다. 사회는 그 인구를 관리하고 제반환경을 통제하는 기술을 구성한다. 다음으로, 각 주체들과 자기계발 기술의 관계는 주체들의 자기희생이 필연적으로 전제된다. 돈을 벌기위해 자신을 경제적으로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가치전도현상은 지금의 자기계발기술의 핵심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모든 가치가 시장가치로 환원되는 사회에서 각 주체들도 이러한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목적과 수단의 전치과정, 개인의 물화(소외)과정은 필연적으로 자기희생을 전제하게 된다. 개인들은 자기계발을 하면 할수록 자신을 모든 가치로부터 탈 가치화 시킨다. 동시에 획일화된 경제적 가치로 자신을 재 가치화시키는 거듭된 변신과정 속에서 자신의 불안한 미래에 자신의 현재를 투자하는 식으로 자기희생을 반복하게 된다. ,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인간적인 것’, ‘인간의 인간됨의 판단 기준은 철저히 한 사회 내에서 어떤 개인이 구현할 수 있는 경제적 힘으로 평가되고 구성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직업서열이 대표적인 예시다. 서열결정에 가장 큰 척도가 되는 경제적 힘이란, 단순히 개인이 버는 돈의 크기가 아니다. 해당 직업이 사회 내 자본흐름을 얼마나 쉽고 용이하며 광범위하게 통제, 관리할 수 있는가를 의미한다. 본래 직업(노동)이란, 서구사회에서 오래전 일종의 소명’, 즉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신에게서 주어진, 자신의 존재를 구성하는데 포함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직업이 노동의 성격과 밀접한 관련을 갖기는커녕, 안정적인 생활 확보, 공동체 내에서 발휘할 수 있는 경제적 힘 따위를 내용으로 하여, 한 개인의 인간됨을 판단하는 지표가 되고 있다.

 

자기계발 기술의 원리와 군부정권기의 연속성

 

이 문제는 단지 자기계발담론이 젊은 세대들을 대상으로 급속하게 확산된 요 근래 상황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조금만 뒤돌아보면, 군부정권시기 또한 생존을 위한 자기희생이 핵심 사회 원리였다. 60,70년대는 경제성장을 통한 생존이 핵심적인 사회동력이자 국가의 성장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전제하였던 시기, 현재의 희생을 통해 미래의 행복을 이루려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시기였다. 국가는 공동체와 국가구성원들의 관계를 주체가 자기를 다스리는 기술 모델로서 구체화함으로써 손쉽게 살아있는 사람을 그 성장 동력으로서 취할 수 있었다. 이 당시의 기술 모델은 국가가 없으면 개인도 없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생존을 위한 국가경제성장을 최우선의 목표로 설정했다. 자기 계발을 공동체 발전과 연결함과 동시에, 개인들과의 관계에서는 자기희생, 성실, 근면 등의 요소들로서 국가가 원하는 국민성을 자발적으로 구성하도록 내면화시켰다. 여기서 개인들의 혈연관계는 그들의 희생이 그들 자식세대들의 혜택으로서 돌아올 것이라는 선전을 통해 기술 모델에 훌륭한 방패막이이자 촉진제로서 활용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자식교육에 대해 부모들이 보이는 이상할 정도의 광기는 바로 부모세대들의 자기희생에 대한 반작용의 일면으로도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 군부정권시기 이후에 급속한 경제성장의 혜택을 등에 업고 등장한 세대들의 잘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그들 자신의 고민에 대한 대답은, ‘경쟁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경제적 가치를 가지는 것이었다. 먹고사는 문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후 그런 폭력적인 생존투쟁과는 다른 인간다운 삶을 고민하였다. 하지만 내용만 바뀌었을 뿐 핵심원리는 동일한 방식을 반복하고 있다. 또한 되려 부모세대들은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 팽배한 자기계발의 원리를 비판하고 문제시 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식세대들에게 그것을 강요하고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문구로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들이 젊은 세대들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근본적인 원리가 바로 무엇이겠는가? 이는 바로 그들의 삶의 방식을 구성하고 있는 핵심 원리가 자기계발의 원리와 친화력을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새로운 관계형성을 위하여

 

삶의 방식이 여전히 희생의 원칙과 생존의 법칙이라는 원시적 원칙을 따르고 있는 사회가 과연 진보한 사회, 문명화된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삶을 다스리면 다스릴수록 자신을 이런 폭력적 운명 속으로 가두어 버리게 되는 사회에서 다른 어떤 인간적인 것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어떤 이상적인 상을 제시하는 대신, 우리의 상황을 한 번 더 심각하게 되짚어 보도록 하자. 우리가 새로운 차원의 자기를 다스리는 기술에 대해 고민을 시작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사회적 조건, 그리고 끊임없이 전승되어 내려오는 희생의 원칙과 생존의 법칙에서 그저 도망치듯 눈을 돌린 채 자기기만적으로 이상화된 어떤 것으로 구성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를 다스린다는 것은 자신의 공동체의 제반 조건들과 관계 맺기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주체화하는 삶의 방식, 기술이기에 사회적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고 자유로워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생존의 법칙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작동하고 있는 폭력적인 공동체삶의 기술주체의 관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라고 해서, 이 관계가 단지 먹고 사는 문제인 생존의 차원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고 가볍게 생각할 문제도 아니다. , 이 관계를 생존의 법칙 같은 원초적인 법칙이 아니라 좀 더 고상한 인간적인 가치로 바꾸는 것을 고민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의 쉬운 접근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생존의 문제가 폭력적 관계에 붙들려 있다고 하는 것은, 지금 우리의 상황이 죽고 사는 문제조차도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사회에 포획되어 관리·통제되는 위급한 상황임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이 폭력적인 관계의 시급한 해소와 더불어 새로운 관계 형성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 관계가 어떠한 방식과 어떠한 모습으로 해체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방식을 생존의 차원이라는 단계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의 유무가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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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27 18:40

이 * 이 글은 2011108일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에서 지젝이 했던 연설을 번역한 것이다. 새로 번역하기보다는 다수의 국내 번역본을 참고해서 오역을 바로 잡고 글을 매끄럽게 하는 데 치중했음을 밝힌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그들은 우리가 모두 패배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패배자들은 저 곳 월스트리트에 있습니다. 우리가 낸 돈으로 수십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받은 것은 그들 아닙니까? 그들은 우리가 사회주의자라고 말하지만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는 언제나 존재해 왔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사유재산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밤낮으로 몇 주 동안 사유재산을 파괴한다 해도, 2008년 금융위기로 파괴된 사유재산의 양에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피땀 흘려 이룬 그 사유재산 말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몽상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작 몽상가는 지금과 같은 방식이 무한히 계속될 수 있으리라 믿는 그들 자신입니다. 우리는 꿈을 꾸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악몽으로 변해가는 꿈을 깨우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파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스템이 스스로 파괴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는 목격자일 뿐입니다. 마치 만화에 흔히 나오는 장면과 흡사합니다. 고양이가 낭떠러지를 향해 다가갑니다. 끝을 지나서 디딜 땅이 없어졌는데도, 고양이는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계속 걷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그런 사실을 깨달았을 때, 고양이는 이미 추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한 일을 하는 중입니다. 우리는 월스트리트 사람에게 “아래를 보라고!”라며 말하는 중입니다.

2011년 4월 중순에 중국 정부는 대안(alternate) 현실이나 시간여행을 포함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영화, 소설 등을 모두 금지시켰습니다. 이런 조치가 중국에게는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여전히 대안을 꿈꾸고 있으므로 이런 꿈꾸기를 금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곳의 우리에게는 그런 금지조치가 필요 없습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시스템은 우리가 꿈꿀 여지조차 주지 않고 우리를 옥죄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는 영화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이 종말로 향하는 스토리는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소행성이 지구에 부딪쳐 모든 생물이 멸종하게 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러나 여러분들은 자본주의의 종말만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여기서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공산주의 시절에 나돌던 구닥다리지만 매력적인 농담이 하나 있습니다. 한 동독 인민이 시베리아에 파견되어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보내는 우편물이 검열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두었습니다. “암호를 정해 두세나. 만일 내가 파란색 잉크로 편지를 써 보낸다면, 그건 내가 쓴 내용이 사실
이라는 뜻일세. 만일 빨간색 잉크로 씌어 있다면, 편지 내용은 거짓일세.” 그가 떠난 지 한 달 뒤, 그의 친구는 시베리아에서 온 첫 편지를 받았습니다. 파란색으로만 쓰인 편지였습니다. 편지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굉장하다네. 상점은 질 좋은 음식으로 가득 차 있고, 극장에서는 서방에서 만든 유명한 영화가 상영되지. 아파트는 널찍하고 고급스럽다네. 여기서 구할 수 없는 것이라고는 빨간색 잉크뿐이라네.”

바로 이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자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빨간 잉크가 없습니다. 우리가 갖지 못한 자유를 드러내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갖도록 교육 받습니다. 이를테면 테러와의 전쟁에서 강조되는 자유라든가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자유의 개념을 왜곡시킨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빨간색 잉크를 만들어 내는 것. 이 자리에서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은 바로 그것입니다.

조심해야 할 점도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과 사랑에 빠지지 마십시오. 우리는 여기서 신나는 시간을 보내는 중입니다. 그러나 축제란 원래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축제가 끝난 다음 날입니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일상의 삶으로 돌아간 뒤가 문제입니다. 그 때 어떤 변화가 생기겠습니까? 시간이 지난 뒤 당신은 오늘을 이렇게 기억할지도 모릅니다. “아, 우리는 젊었었고, 시위는 대단했지.” 나는 여러분이 지금 이 순간을 그런 식으로 기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핵심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대안을 생각할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 아닙니까? 이런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사회는 여전히 실현 가능한 최선의 사회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긴 여정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맞서야 할 문제들은 진정으로 어려운 것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회 체계가 자본주의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지도자를 따라야 하는 겁니까?

기억하십시오.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닙니다. 문제는 시스템입니다. 당신을 부패하게 만드는 것은 시스템입니다. 또 적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에 물을 타려는 가짜 친구들에 대해서도 주의하십시오. 이들은 이 시위가 아무런 해가 없는 도덕적 항의에 그치도록 만들기 위해 애쓸 것입니다. 마치 카페인 없는 커피, 무알콜 맥주, 무지방 아이스크림처럼. 그들의 노력은 커피에서 카페인을 빼내려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모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깡통을 재활용하는 일, 자선 사업에 푼돈을 기부하는 일, 스타벅스에서 카푸치노를 사면서 그 돈의 1%가 제3세계 기아 아동을 돕는 데 쓰이도록 하는 일 등을 하면서 도덕적 만족감을 느끼기에는 이 세상의 문제가 너무 크다는 점을 인식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노동과 포로에 대한 고문마저 외부에 위탁하는 세상입니다. 결혼알선업체들은 우리의 사랑마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정치에 참여하는 것 또한 남에게 맡겨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를 되찾고 싶은 것입니다.

만일 공산주의란 말이 1990년에 무너진 시스템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당시의 공산주의자들이 오늘날 가장 효율적이고도 무자비한 자본주의자가 되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오늘날 중국의 자본주의는 미국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지만, 민주주의를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이게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당신이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 이를 반(反)민주주의적이라고 매도하는 협박에 굴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혼은 끝났습니다. 변화는 실현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실현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미디어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기술적인 면과 성적인 면에서 모든 게 가능해 보입니다. 달로 여행할 수도 있게 됐고 유전자 공학 덕분에 영생을 누릴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동물을 비롯한 그 무엇과도 섹스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나 경제 분야를 보십시오. 이 분야에서는 거의 모든 일이 불가능한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부자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을 약간 올리고 싶다고 해 봅시다. 그들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경쟁력을 잃는다고도 주장 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의료 체제를 갖추기 위해 돈이 좀 더 필요하다고 해 봅시다. 그들은 “전체주의 국가가 되자는 말이냐. 불가능하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영생의 삶을 곧 누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면서도 당장의 의료혜택을 위해서는 약간의 추가 지출도 허용되지 않는 세상. 이런 세상은 무언가 잘못된 곳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높은 수준’의 생활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더 나은’ 수준의 생활을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공산주의자라고 한다면, 그 말이 맞는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공동의 것(the commons)을 고민한다는 점입니다. 자연에 대한 공동의 것. 지적 재산에 의해 사유화된 공동의 것. 유전공학에 대한 공동의 것. 우리는 이를 위하여, 그리고 오로지 이것만을 위하여 싸워야 합니다.

공산주의는 분명히 실패했지만, 공동의 것에 대한 문제는 남습니다. 그들은 여기 모인 우리가 미국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을 진정한 미국인이라고 주장하는 보수 근본주의자들이 깨달아야 할 게 하나 있습니다. 기독교란 무엇입니까? 성령(the holy spirit)입니다. 성령이란 무엇입니까? 자유와 책임을 가진 신자들이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된 평등한 공동체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성령이 임한 곳은 바로 지금 이 곳입니다. 저 건너편 월스트리트에는 신성을 모독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이 있을 따름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심뿐입니다. 제가 염려하는 유일한 점은, 우리가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간 뒤, 1년에 한 번씩 만나서 맥주잔을 기울이며 “그 때 우리 정말 대단했지.” 하고 추억에 젖어 회상이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겠다고 여러분 자신에게 약속하십시오. 사람들은 종종 무언가를 욕망하면서도 실제로 그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욕망하는 것을 실제로 추구하기를 두려워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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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16 21:37


글 곽성우 기자


교정 곳곳 대자보란에 군데군데 붙어 있는 포스터들을 보며 올해 초 한 대학생의 선언을 상기한다. ‘김예슬 선언’이라 지칭되는 이 선언은 한국 대학의 부조리를 지적하고 우리 사회의 치부를 건드리는 돌팔매질이었다. 그런데 주목할 만 한 점은 이 거부의 몸짓이 최초엔 바로 대자보라는 다소 낡은 매체형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물론 김예슬 선언이 여러 매체들을 통해 급속도로 전파되고 대중들의 이목을 끌며 사회적인 공감을 얻어낼 수 있었던 동력이 무엇보다도 선언의 행간을 채우고 있는 고민의 흔적, 즉 그 ‘내용’이었다는 점은 부정될 수 없다. 따라서 단순 시발점에 불과할 수 있는 대자보라는 형식에 집중해보자는 것, 요컨대 내용적 측면이 아닌 ‘형식적 측면’에서 김예슬 선언을 논해보자는 것은 다소 사변적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김예슬 선언이 과연 처음부터 인터넷을 통해 언표 되었다면 그와 같은 파급력과 공감대를 이끌어 낼 수 있었을까. 오히려 인터넷이라는 ‘뉴 미디어’와 구분되는 대자보의 ‘올드 미디어’적 특성이야말로 선언의 내용과 공명하며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필수불가결한 형식적 조건은 아니었을까.

한 매체가 낡은 것인지 새로운 것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시대에 따라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적 관점에서 특정매체가 올드 미디어인지 뉴 미디어인지 판가름되는 주된 기준은 그 매체가 ‘일방향적 매체’인가 아니면 ‘쌍방향적 매체’인가에 달려있다. 예컨대 책이나 신문의 경우 특정 주체가 다른 주체에게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올드 미디어라면 인터넷은 주체 간에 상호적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뉴 미디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방향성과 쌍방향성이라는 대당적 특성은 곧장 또 다른 대당적 특성, 즉 ‘강제성’ 및 ‘자율성’과 환유적으로 연계되곤 한다. 즉 올드 미디어가 일방향적이기에 정보를 받는 수신자에게 어떤 강제성을 부여한다면, 뉴 미디어는 쌍방향적이기에 상대적으로 자율성이 보장된다는 식이다. 이러한 환유의 결과는 자율이 강제보다 낫다는 일반적인 통념에 따라 뉴 미디어는 올드 미디어 보다 ‘좋은 것’이라는 연역체계의 구축이다. 이처럼 일방향성·쌍방향성과 강제성·자율성이라는 개념적 대립쌍은 뉴 미디어에 대한 찬양들의 근저에 놓인 핵심 논리구조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의문에 부쳐봐야 하는 것은 과연 강제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고 자율을 그 자체로 좋은 것인가 하는 점이다. 때때로 강제는 개인의 변혁과 사회적 연대를 추동하는 반면 오히려 자율은 개인의 방종과 사회의 파편화를 초래하지 않는가. 다시 말해 강제와 자율에 대한 통념적 판단이전에 어떤 강제이고 어떤 자율인가를 먼저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의문은 소위 일방향적이어서 강제적인 올드 미디어와 쌍뱡향적이어서 자율적인 뉴 미디어 간의 위상을 재고하도록 이끈다. 예컨대 쌍방향적이고 자율적인 소통을 기술적으로 가능케 하는 뉴 미디어가 어떠한 현실적 변혁도 이끌어 내지 못한다면, (물론 전제적이거나 억압적인 체계로 귀결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일방향적이고 강제적이긴 하지만 아주 작은 변혁이라도 이끌어내는 올드 미디어 보다 낫은 점이 무엇이겠는가.  

다시 김예슬 선언을 보자. 이 선언의 내용을 담아내는 대자보라는 매체형식은 기술적 차원에서 따져봤을 때 다분히 일방향적이며 강제적이다. 하지만 앞서의 논의를 바탕으로 일방향성과 강제성에 대한 가치판단을 유보한 체 김예슬 선언과 대자보의 관계를 톺아보면, 일방향성과 강제성은 김예슬 선언을 제약하는 요소 혹은 부차적인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그 내용과 공명하는 필수적인 요소임이 드러난다. 그 내용이란 것이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질주에 허덕여온 한 개인의 실존적 결단을 일방적으로 현시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결단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동참을 강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는 한편으로 김예슬 선언의 또 다른 형식적 특징, 즉 ‘선언’이라는 발화형식과도 맞닿는다. 선언은 언제나 현실의 불의를 부정하며 미래의 변화를 일갈하는 당위적 외침이었다. 즉 그것은 참여나 공유로의 초대가 아니라 계몽과 각성의 촉구였다. 
  
물론 모든 소통이 오직 사회의 변혁이라는 목적에 묶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모두가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는 이 사회의 몇몇 부조리들은 부단히 소통될 필요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변혁되기 위해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방식으로 소통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소통을 뜻하는 영어단어(Communication)의 라틴어 어원(Communicare)을 뜯어보면 소통이란 공동체 문제의 돌봄, 즉 너와 나로 구성된 우리 communi- 의 ‘돌봄’ -care을 의미한다. 물론 이때의 돌봄이 현실안주나 자기보전으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 ‘자기 배려 Epimeleia Heautou’ 라는 개념을 통해 자기를 돌본다는 것의 역사적 변용을 천작한 푸코의 논의는 돌봄의 의미에 실천적인 비틀림을 선사한다. 푸코가 얘기하는 자기 배려 혹은 자기 돌봄은 현실태로서의 자기를 부단히 깨어나가며 새로운 자기를 변형·생산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결국 소통이란 우리를 돌보는 것, 즉 현재의 우리를 부단히 창조·변형해나가는 작업인 셈이다.

매체를 바라보는 관점 또한 마찬가지이다. 다시 한 번 대자보란을 본다. 스펙에 도움이 된다는 각종 자격증 학원 광고와 공모전 포스터가 세련된 외양을 뽐낸다. 김예슬의 선언의 그것처럼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노출 앞에서 뉴 미디어에 대한 비판이 곧 올드 미디어에 대한 희구로 귀착되어서는 안 됨을 확인한다. 니체가 말했듯 시대에 대립되는 ‘반시대적 사유’는 역시나 ‘시대적 사유’의 이면일 뿐이다. 현재를 넘어서기 위해선 ‘비시대적 사유’가, 현재 속에서 미래를 ‘생성’해내는 일이 필요하다. 낡았는지 새로운지, 일방적인지 쌍방적인지, 강제적인지 자율적인지를 애써 구분하기보다는 그 매체가 나와 너, 그리고 우리 사회를 부단히 변혁시키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매체를 사유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고민거리가 아닐까. 매체에 대한 ‘비시대적 사유’가 열릴 때, 올드 미디어나 뉴 미디어라는 시대적이고 기술적 구분을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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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15 21:55

정부가 ‘일로영일’(一勞永逸)을 내세운 호랑이 해의 봄도 어느 덧 한 달이 지났다. 하지만 오랜 안락을 향한 대한민국의 국책 사업은 땅을 파고 산을 깎는 반(反)녹색 성장을 지향하며 전국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토건주의를 일선에서 비판하고 있는 필자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홍성태 (상지대학교 문화컨텐츠학과 교수)

한국이 토건국가의 덫에 걸려 고통 받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민주화와 고성장에 성공하고 ‘진정한 선진화’의 문턱에 이르렀으나, 토건국가의 덫에 걸려 위기에 처하고 만 것이다. 토건국가란 무엇인가? 그것은 막대한 혈세를 탕진해 소중한 국토를 파괴하는 기형적인 국가, 투기와 부패의 만연을 초래하는 개발 국가를 말한다. 이러한 토건국가를 개혁하지 않는 한 ‘선진화’는 불가능하다. 토건국가는 토건족과 투기꾼의 배를 불리며 ‘토건망국’을 향해 질주할 뿐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토건국가는 ‘정관재언학’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토건복합체’에 의해 작동한다. ‘정관재언학’의 연합이란 정계, 관료, 재계, 언론, 학계의 연합을 뜻한다. 이 연합에서 핵심은 ‘정관재’이지만 민주화 이후 언론과 학계의 역할도 대단히 커졌다. 합법적 절차와 과학적 외양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토건사업을 옹호하는 언론과 학계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김이태 연구원의 충격적인 양심선언에서 잘 드러났듯이, 토건국가는 거짓을 과학으로 포장해 제시하고 선전하여 국민들을 세뇌한다. 따라서 토건국가의 개혁은 이러한 토건국가의 현실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토건정치와 토건경제의 역학관계

한국에서 토건국가는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통해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토의 대대적인 파괴라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파괴를 좋은 것으로 여기는 잘못된 인식의 확산과 파괴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취하는 세력의 형성이다. 이에 대한 극적인 사례가 곧 개발주의이다. 토건국가의 형성과정은 개발을 발전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개발주의의 확립과 맥을 같이 한다. 즉 개발주의에 근거한 막대한 혈세의 배분은 개발세력을 양산하였고, 이들 개발세력은 다시 개발주의의 확산과 토건국가의 강화를 강력히 추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오늘날 한국의 정치는 토건정치를 기본으로 삼게 되었다. 

토건국가의 토건정치를 실제로 작동시키는 일은 국토해양부를 비롯한 개발부서와 수자원공사를 비롯한 개발공사가 주도하고 있다. 토건국가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첫째, 정계에서 주도적으로 토건사업을 결정하고, 그것을 개발부서와 개발공사가 실행한다. 둘째, 개발부서와 개발공사에서 토건사업을 제안하고, 정계에서 그것을 수용하고, 그것을 개발부서와 개발공사가 실행한다. 어느 경우에나 결국 개발부서와 개발공사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게 된다. 따라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토건사업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개발부서와 개발공사의 폐지는 토건국가의 개혁을 위한 핵심적인 과제이다. 다시 말해 토건국가의 개혁은 무엇보다 토건 중심의 정부조직과 재정구조의 개혁을 뜻한다. 

한편으로 이러한 토건정치를 떠받치는 것이 토건경제다. 물론 사회의 존속을 위해 토건경제는 일정부분 필요하다. 하부구조의 개발이 긴요한 경제성장의 초기단계에서 토건경제가 일시적으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토건경제가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 전체 경제가 크게 왜곡되기 십상이기에 경제성장에 따라 토건경제는 크게 감축되어야 한다. 그래야 자원의 배분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져서 사회의 발전이 올바로 추구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토건경제는 국내총생산의 20%에 이르며 이는 OECD 국가들 단연 1위를 기록하는 수치이다. 

실제로 토건경제는 경제효과나 고용효과의 면에서 저열하다. 2009년 상반기에 토건경제에 31조원의 추가비용이 투자된 반면 일자리는 오히려 8만개나 줄었다. 토건경제는 약간의 ‘삽자루’를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며, 토건경제로 고용증대를 이루겠다는 발상은 잘못됐다. 토건경제에 치중하는 한 복지경제와 문화경제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은 열릴 수가 없기에, 병적으로 과잉상태라는 평을 받고 있는 토건경제의 비중을 하루빨리 크게 줄어야 한다. 대신 복지경제와 문화경제 등 선진경제를 추구해야 한다.

민주세력의 패착과 토건사업의 과잉

한국의 민주화는 세계적으로 놀라운 사례이다. 한국은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기에 고성장도 이룰 수 있었다. 한국이 민주화에 실패했더라면 남미나 필리핀처럼 고성장을 이루는 데 실패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성장이 민주화의 동력이라면서 독재를 적극 옹호했던 근대화론은 분명히 틀렸다. 그런데 민주세력은 독재세력이 남긴 구조적 유산인 토건국가의 문제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 포로가 되고 말았다. 민주세력은 토건국가 정책을 강행해서 지지를 확대하고자 했고, 그 결과 오히려 독재세력의 기반을 강화해주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에 민주화 이후에도 토건국가적 문제가 더욱 악화되었고, 그 결과 국민들은 차라리 원조 토건세력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처럼 토건국가는 민주화의 성과를 크게 약화시키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토건국가를 하루빨리 개혁하지 않는 한, 이 나라에 밝은 미래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토건국가의 문제를 지적한다고 토건업의 가치를 전적으로 평가절하 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자연 속에서 자연을 이용함으로써 존재하고, 토건은 자연을 이용하는 1차적 방법이다. 사회를 존속시키는 토건업의 근원적 역할을 부정할 수는 없는 셈이다. 문제는 토건업이 과잉상태에 이르게 되면 혈세를 탕진하고 국토를 파괴하고 부패를 만연시킨다는 점에 있다. 토건국가는 불필요한 토건사업을 나쁜 방식으로 강행해 토건업을 더욱 더 과잉상태로 만들뿐만 아니라 토건업에 대한 불신과 우려를 확산시킨다. 
 
토건국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필요한 때

토건국가의 문제를 보여주는 사례들은 아주 많다. 전국의 모든 도시에서 늘 볼 수 있는 보도블럭 교체사업이 아마도 가장 흔한 예일 것이다. 자전거도로처럼 환경을 내세우고 추진되는 예도 적지 않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시화호 개발사업, 새만금 개발사업, 한탄강댐 건설사업, 경인운하 건설사업, 한강운하 건설사업, 그리고 ‘4대강 살리기’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4대강 살리기’로부터 야기될 수 있는 문제는 너무나 심각하다. 그 실체는 ‘4대강 죽이기’이자 ‘대운하 살리기’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명박 대통령이 운하가 아니라고 했으니 믿어야 한다거나, 훌륭한 계획을 세워서 법에 따라 잘 진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실제와는 동떨어진 강변일 뿐이다. 실제로는 ‘4대강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고 풍요로운 강들을 대대적으로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토건국가는 우리의 현재를 넘어 미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다. ‘4대강 살리기’는 더욱 더 그렇다. 전국에서 수많은 전문가들과 성직자들이 ‘4대강 살리기’의 중단을 촉구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만약 이 참담한 파괴사업에 퍼붓는 막대한 혈세를 교육에 쓴다면, 한나라당이 약속했던 반값 등록금은 당장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끔찍한 파괴사업으로 말미암아 현재의 이익을 박탈당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피해를 가장 크게 입을 주체가 현재의 대학생일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대학생들이 ‘4대강 살리기’의 문제를 올바로 인식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결국, 토건국가는 생태적인 차원과 경제적인 차원의 양 면에서 극단적인 ‘위험사회’로 귀결될 수 있다. 따라서 ‘4대강 살리기’와 같은 극단적인 토건사업마저 강행하는 현재의 토건국가를 개혁해야만, 우리는 ‘진정한 선진화’를 이루는 ‘생태복지국가’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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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11 22:49

 

한보희 (연세대 비교문학 강사)


티모시 트래드웰이라는 남자가 있었다. 곰을 너무나 사랑했던 이 남자는 매년 여름 알래스카 국립공원 내 회색곰 서식지에 무단으로 들어가 몇 달씩 곰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친구’이고 ‘이웃’이었던 여우와 곰들에게 이름을 붙여 말도 걸고 함께 놀기도 하면서 태초의 인간인 아담을 흉내 냈다. 한때 배우를 꿈꿨던 트래드웰은 곰들과의 생활을 셀프카메라로 찍어 사람들 앞에 내놓았고, 이내 유명인사가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야단스러운 자기현시, 일종의 쇼였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처음 시작될 때는 그런 기미가 보인다. 그러나 이 괴짜 환경보호운동가의 ‘곰들과 함께 춤을’이 13년 만에 끔찍한 비극으로 막을 내렸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쇼일 수가 없었다. 2003년 가을, 트래드웰은 여자친구와 함께 다시 알래스카를 찾았고, 자신의 낙원에서 곰의 습격을 받았다. 공원관리인은 텐트 주위에서 두 사람의 찢겨진 신체 일부를 찾아냈고, 사살된 곰의 뱃속에서는 티모시의 손목시계가 나왔다.

뉴저먼 시네마의 명장(明匠) 베르너 헤어조크(Werner Herzog)가 이 특이한 사건에 사로잡힌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트래드웰이 남긴 수백개의 비디오테이프와 주변인물 인터뷰를 교차 편집해 완성한 헤어조크의 <그리즐리 맨 Grizzly Man>(2005) 포스터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자연에는, 경계가 있다. 한 남자가 그 경계를 가로지르는 데 13년의 생애를 바친다.”

헤어조크는 넘지 말아야 할 경계, 또는 한계상황에 빠져들어 자멸해가는 자들을 다뤄왔다. 대표작 <아귀레, 신의 분노>(1972)는 16세기 스페인의 정복자 아귀레가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리며 안데스산맥을 넘고 아마존 강을 거슬러, 마침내 밀림 속으로 소멸해가는 이야기다. 아귀레는 복귀를 명하는 상관을 죽이고 부하와 원주민들을 무의미하게 희생시키며, 마치 불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죽음을 향해 돌진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귀레는 원숭이 떼로 뒤덮인 뗏목에 홀로 남아 광기어린 눈빛을 번뜩이며 이렇게 외친다. “나는 신의 분노다!”

아귀레의 분노는, 동일한 모티브를 가진 조셉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e'에 나오는 정복자 쿠르츠의 마지막 대사 “무섭다, 무섭다horror, horror…”와 함께 읽어야 한다. 요컨대, 분노의 이면은 공포이며, 원숭이와 신 ‘사이’에 놓인 인간 아귀레는 ‘신의 분노’이자 ‘원숭이의 공포’이다. 카메라―신의 응시(gaze)―가 패닝(panning)기법으로 뗏목 주위를 조롱하듯 빙글빙글 돌 때, 아귀레는 갑옷과 투구를 걸친 ‘특이한 원숭이’처럼 보이며 ‘자연’이라는 육체와 ‘신’이라는 영혼으로 갈라진 세계의 간극을 형상화하는 아귀레(클라우스 킨스키)의 광기어린 눈빛은, 갈라진 두 힘 의 긴장을 소용돌이치게 하는 중심에 자리한다. 이런 맥락에서, 곰(자연)과 인간(문명)의 경계에 자신의 생을 풀어놓았던 트레드웰은 또 다른 아귀레였다.

사람들은 트래드웰이 안전수칙을 무시한 대가를 치렀으며, ‘죽으려고 환장했던’ 트래드웰의 삶은 그에 어울리는 죽음을 갖게 됐을 뿐이라고 쉽게 결론짓는다. ‘곰과 사람 사이에는 경계가 있다. 그 경계를 함부로 침범하면 안 된다. 그건 곰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곰의 본성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트래드웰은 동물사랑이나 자연보호를 빙자해 곰의 세계에 침입한 불청객이었다. 그가 곰에게 쏟은 사랑도 실은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실패자의 뒤틀린 자기애였을지 모른다. 그보다는 곁에 있다 애꿎은 죽음을 당한 여자친구가 동정의 대상이 될 만하다. 저나 죽을 것이지 여자친구까지 사지로 끌어들인 트래드웰의 무모함은 도덕적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맞는 얘기다. 헤어조크는 트래드웰에 대한 세상의 비난을 반박하지 않으며 그의 감상적 동물애호에 동조하지 않는다. 함께 동물보호운동을 했던 동료들조차 점점 종교적 신비주의에 빠져드는 그를 걱정했었다. 그의 비극적 죽음은 ‘올 것이 오고야만’ 것이었고 그가 남긴 마지막 비디오들을 보면 누구보다 자신이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곰은 곰, 사람은 사람’이 트래드웰 사건이 남긴 교훈의 전부일까? ‘곰의 것은 곰에게, 사람의 것은 사람에게!’라는 이 안전한 경계가 마지막 진리일까?

헤어조크는 이 괴짜가 남긴 촬영물들이 직업적 자연다큐 작가들이 찍은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을 알아본다. 그것은 훨씬 더 생생하고(곰들이 싸우며 똥을 지리는 장면), 훨씬 더 아름다우며(여우와 곰과 트래드웰이 함께 노니는 풀밭 장면) 한층 더 슬프다(숫컷 곰들이 잡아먹은 새끼곰의 뼈를 발견한 트래드웰이 새끼곰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하는 장면). 왜 그럴까?

어느 해 여름 가뭄이 들어 강의 수위가 낮아지자 연어 떼가 곰 서식지까지 올라오질 않았다. 연어는 곰의 주식 중 하나다. 트래드웰은 라디오에서 비가 올 확률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난생 처음 신께 기도를 드린다. 비가 오지 않아 사랑하는 곰들이 죽어가고 있으니 제발 비를 좀 내려달라고. 애원으로 시작한 기도는 협박으로 바뀌었다가 분통을 터트리며 발광을 하는 몸부림으로 이어진다. 다음날 새벽, 놀랍게도, 기상예보에 없던 폭우가 오직 그 지역에만 쏟아진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아니면 기적적 은총이었을까? 헤어조크는 단정 짓지 않지만, 거기서 트래드웰의 영상이 지닌 독특한 아름다움과 생동감의 비밀 한 자락이 살짝 드러난다.

직업 작가들이 찍은 영상에서 자연과 동물들은 타재적(他在的) 대상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카메라와 피사체의 경계는 확고부동하다. 그러나 트래드웰의 카메라는 그의 삶과, 또한 그가 속한 세계와 일체가 되어 돌아간다. 그 세계는 주관적 욕망의 투사(投射)가 아니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허물어진, 실재하는 꿈의 자리로 화한다. 트래드웰의 ‘곰들과 함께 춤을’은 여기서 쇼에서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쇼인 채로 그의 삶이 된다. 삶이 오직 신만을 관객으로 하는 연극(‘쇼’)이라면, 신도 배우가 되는 트래드웰의 영상에서는 삶과 쇼의 경계가 사라진다. 

에로스의 에토스, 혹은 ‘더불어 삶’의 심연
  

나는 이 영화를 EBS의 국제다큐영화제에서 보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올해 이 영화제의 표제는 “지구, 더불어 사는 곳”이었다. 그리스어 에토스(ethos)는 보통 윤리(ethics)로 번역되지만 원래는 서식지(habitat, ‘사는 곳’)를 뜻했다. 곰의 서식지에 들어가 곰을 사랑하다 곰의 먹이가 된 남자의 ‘에토스’는 무엇이었을까? 사람을 잡아먹기도 하는 곰과 기꺼이 함께 살고자했던 이 사람의 ‘서식지’(ethos)는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같은 영화제에서 상영된 곤잘로 아리온 감독의 <안데스산맥 조난기Stranded: I’ve Come from a Plane That Crashed on the Mountains>(2007)에 우연찮게도 이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들어있었다. 이 다큐는 1972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안데스산맥에 조난(stranded)되었다가 극적으로 생환한 사람들의 회고담이다. 눈과 바위로 뒤덮인 고립무원의 산악지대에서 45명의 탑승객 중 16명이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그런데 그들이 구조된 직후, 자연스럽고도 난처한 질문이 제기됐다. 풀 한 포기 없는 혹한의 오지에서 어떻게 70일 넘게 살아있을 수가 있었는가? 도대체 뭘 먹고 살아남았나? 영화는 당시의 기자회견 장면을 보여준다. 한 생존자가, 모두가 예상했지만 누구도 감히 직접 듣기를 원할 수 없었던 바로 그 답을 일러주었다. 인육! 사람이 (비록 시체였다고는 하지만) 사람을 뜯어먹고 살아남았던 것이다. ‘생존의 윤리냐, 윤리의 생존이냐?’, ‘야만이냐, 문명이냐?’ 대혼란의 심연에 기자회견장이 삼켜져버릴 듯한 위기의 순간에, 마치 이런 때를 위해 존재해왔다는 듯, 성자 예수가 나타나 그들 모두를 구원했다. 생존자는 인육을 먹었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최후의 만찬’을 묘사한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 “받아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것을 다 마시라,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리하여 생존자들은 사람고기를 뜯어먹고 생명을 부지한 ‘괴물들’이 아니라, 친구들이 전해준 마지막 선물(살과 피)로 자신의 생을 이어간 ‘인간들’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같은 사태를 그럴싸한 미문으로 다르게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최후의 만찬이란 그저 말의 성찬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트래드웰이 곰의 ‘특별한 저녁식사’에 자기 육신을 공양했을 때, 곰은 ‘최후의 만찬’에 참석했던 예수의 제자들이 그랬듯이, 그의 메시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헤어조크는 그렇게 믿는다. 트래드웰은 웬일인지 죽기 며칠 전부터, 자신을 잡아먹게 될 늙은 회색곰을 집요하게 카메라에 담았는데 헤어조크는 화면에 잡힌 곰의 무심한 눈동자―그 황갈색 심연(!)―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저 눈에서 그저 먹이를 바라보는 권태로움밖에 볼 수 없는데, 티모시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트래드웰이 그 눈동자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눈이 영혼을 들여다보는 창일뿐만 아니라 영혼을 비춰보는 거울이기도 하다면, 트래드웰이 곰의 눈에서 보았던 것이 권태롭게 반복되는 생존의 먹이사슬, 무심한 필연의 왕국만은 아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가 남긴 최후의 기록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곰의 습격 당시 우연히 캠코더가 작동 중이어서, 비록 영상은 없었지만, 처절한 상황이 담긴 녹음기록이 남았다. 이 녹음에는 트래드웰에 대한 손쉬운 평가와 비난을 무색케 만드는 어떤 것이 있다.

곰이 물어뜯는 동안에도 트래드웰은 특별한 저항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그는 생전에 ‘곰이 나를 잡아먹더라도 그 곰을 절대 죽여선 안 된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여자친구에게는 마지막 힘을 다해, 달아나라고(그래서 너는 살라고) 비명을 질렀다. 허나 여자는 경고와 애원이 뒤엉킨 남자의 울부짖음에 아랑곳없이, 프라이팬을 휘두르며 곰에게 달려들었다. 다 큰 회색곰은 키가 3미터에, 몸무게 400kg에 육박하는 괴물이다. 여자의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동면을 앞둔 곰의 ‘특별한 저녁식사’가 되었다. 트래드웰이 곰에 미쳐 아예 곰의 일부가 되고자 했다면, 여자는 생과 사가 교차하는 끔찍하고 긴박한 순간에 꺼져가는 트래드웰의 생명 속에 자신을 던져 넣는 치명적 결정을 내렸다. 왜 그랬을까?

곰이 남자를, 남자가 여자를 삼키는 이 사슬은 이중으로 꼬인 나선(double stranded helix)이다. 그 한 가닥이 생존이라는 육체의 행렬―먹는 입의 주이상스―을 타고 내려간다면, 다른 한 가닥은 사랑이라는 언어의 행렬―말하는 입의 에로스―을 타고 올라간다. 여자는 남자를 남자는 곰을 사랑했다. 제 생명을 그것의 생명을 (비록 잠깐일지라도) 연장시킬 제물로 바칠 만큼!

조르쥬 바타이유가 말했듯이 에로스가 “죽음까지 파고드는 생”이라면, 두 사람을 삼킨 것은 곰의 입이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에로스의 심연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중성에 의해 ‘…그래서 너는 살아’라는 트래드웰의 외침도 두 개의 방향을 갖는다. 그 메시지는 곰에게는 그의 육신을 통해 (저항 없는 순한 몸짓으로) 전해졌고, 여자에게는 그의 격렬한 말을 통해 전해졌다. 곰과 여자는 그 전언에 꼭 맞게 반응했다. 육신으로 전한 메시지는 다른 육신(곰)의 주이상스가 되었으며, 그 육체의 행렬에서 트래드웰의 몸은 곰의 몸으로 이어졌다(연속). 그러면 말로 전한 메시지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의 말은 여자에게서, 마치 나르시스의 언어가 에코에게서 그러했듯이, 반복되었고 그녀는 자신의 내면에서 반복된 그 말―“달아나, 그래서 너는 살아”―의 울림에 따라 행동했다. 곰과 싸우려는 그녀의 무모한 행동은 “그래서 너는 살아”라는 말이 육화된 몸짓이었다. 에로스 속에서, 그녀는 신화 속의 에코처럼 그의 언어로 변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의 말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니라(그의 말과 지시하는 바와 반대로 움직인 것도 아니라) 그의 말이 ‘되어’ 움직였다. 곰을 공격해 그를 구하려는 그녀의 무모한 행위는 “달아나, 그래서 너는 살아”라는 말의 신체적 번역이었던 셈이다. 그녀의 몸은 그렇게 그의 말을 모방(미메시스)함으로써 그가 지시했던 바와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그러나 본질상 동일한 내용을 반복했다. 똑같은 몸짓이 외견상 정반대쪽으로 이뤄지는 거울에서처럼 말이다.

최후의 순간에 곰과 인간 모두를 사랑했던 트래드웰은 그 사랑의 표현으로, 곰에게 자신의 몸을 주었고 여자에게 자신의 말을 주었다. 곰은 그 사랑의 몸을 받아들여 그와 ‘한 몸’이 되었고, 여자는 그 사랑의 말을 받아들여 그와 ‘한 말’이 되었다. 하여 동물과 인간의 경계 자체가 되었던 트래드웰은 에로스의 몸짓 속에 소멸함으로써 경계도 지워버렸다. 그것이 서로 다른 서식지를 갖는 곰과 인간의 경계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는지, 우리에게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그가 최후의 순간에 몸과 말, 육체와 언어, 물질과 정신이라는 통일될 수 없는 두 행렬이 하나로 꼬여드는 자리에 스스로를 조난시켰다가 구원했다는 사실이다. ‘그리즐리 맨’은 경계가 되어, 자신과 함께 경계를 소멸시키는 자의 (마치 예수와도 같은) 운명을 보여준다. 거기서 비참하게 찢겨진 육체와 비명만을 보든, 자신의 죽음을 지복의 순간으로 승화시킨 숭고한 몸짓을 보든, 그건 각자의 몫이 될 것이다. 

최근의 다큐영화인 <세상 끝과의 조우Encounters at the End of the World>(2007)에서 헤어조크는 남극을 찾아간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 세상 끝에까지 흘러들어왔는지 찬찬히 살피며 대화를 나누던 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이 생긴 펭귄 한 마리와 조우한다. 펭귄은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먹이를 찾아 바다로 향하는 자신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극지 쪽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리로 가면 추위와 먹이부족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보다 못해 녀석을 잡아 무리 속에 돌려놓아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펭귄은 다시 무리를 벗어나 고집스레 극지로 향한다. 한 늙은 연구자가 헤어조크에게 충고한다. “지켜볼 수 있을 뿐, 돌려세울 수는 없습니다.”

사실 그런 “지켜보기”야말로 헤어조크가 내내 해온 작업일 터이다. 그러나 헤어조크 영화의 매력은 냉정한 “지켜보기”에 있지 않다(그런 다큐감독은 헤어조크 말고도 많다). 호기심, 찬탄, 냉소, 유머, 아이러니가 뒤섞인 그의 시선은 지켜보면서 동시에 지킨다. 무엇을 지키는가? 이해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지만, 그것에 의해 사이-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이 지탱되고 지속되는 성스런 것들이다, 그의 영화는 주체를 갈라놓는 경계의 심연 속으로 뛰어들어, 그 경계와 더불어 소멸해가는 영매들(medium)을 위한 애가(哀歌)이다. 그 엘레지를 통해 우리는 저 영매들의 불가능한 에토스를 살아볼 수 있다. 당신 안의 영매가 아직 살아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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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11 21:02


<조난 프리타, 遭難 フリーター, A permanent Part-timer in distress, 이와부치 히로키, 2007 >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와부치’의 기상시간은 6시 반. 불 꺼진 방에서 밤새 명멸하던 TV 화면은 이른 시간에 켜진 형광등의 새된 빛에 그 고즈넉함을 잃는다. 식사를 하며 뉴스를 좇는 졸린 눈도, 이를 비추는 캠코더의 화면도 명징한 초점 없이 부유한다.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생경해 보이는 이 아침풍경의 주인공은 분명 그이지만 또한 그가 아니기도 하다. 마리오네트 marionette (*실로 매달아 조작하는 인형극)처럼, 그의 일상은 대부분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움직인다. (출퇴근용인 자전거조차 그의 소유가 아니라 회사의 물건이다!) 물론 완전히 타의라곤 할 수 없다. 줄을 끊는 과감함을 선택하는 대신 줄이 끊기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버텨내기로 결정한 사람은 분명 그 자신이므로.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전적으로 탓할 수도 없다. 자신의 의지로 수렴될 수 없는 모종의 체계 하에서 오롯하게 자족하기란 쉽지 않은 - 가능하기는 한가 - 일이므로. “난 누구에게 지고 있는 걸까?” 그 답은 질문하는 자의 혼란만큼이나 불투명하다.

그 누구에게로 책임을 전가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차라리 그는 웃는다. 하지만 그 웃음은 차갑다. 캠코더로 찍힌 거친 색감의 영상에는 사회에 대한 냉소가 묻어난다. 영화를 이끄는 두 가지 원동력은 전체 비정규직 비율이 30%에 육박하고 20대에 한정할 경우 50%를 넘어서는 일본의 사회구조에 대한 ‘불만’과 이러한 구조가 바뀌지 않으리라는 ‘체념’이다. 따라서 그는 젊음의 특권인 저항권을 방기하지 말라고 채근하는 어른들과 감싼 동정의 시선을 활성화하는 매스컴들을 향해 냉소한다. 당사자들의 삶을 현실적으로 개선시키지 못할 바에야 외부인들의 변죽울림은 자기충족 이상의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린 것은 외부를 향한 냉소가 아닌 내부를 겨냥하는 냉소, 뼈 속까지 파고드는 자괴감이다.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실제로 노력이나 해봤냐는 정규직 고교동창의 날 선 비난 앞에서 그는 침묵한다. 매스컴을 통해 사회의 모순에 맞서는 투사로 비춰졌지만 그의 솔직한 심정은 제대로 된 대우를 받는 직업, 즉 비정규직이 아닌 정규직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일견 모순적이지만, 사회에 대한 냉소가 자신에 대한 냉소로 전이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사회에 대한 불만의 한편엔 그런 사회로 어떻게든 편입되고 싶어 하는 체념적 욕망이 스멀거린다. 그리고 그 욕망은 냉소의 방향을 역전시킨다. 냉소가 세상을 향할 때 인간은 적어도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 세상을 향한 냉소가 마냥 긍정적이라고 할 순 없지만 나를 지킬 수 있는 최소의 방어기제임에는 확실하다. 반면 냉소가 자신을 향할 때, 더구나 그 냉소가 세상의 시선을 내면화한 냉소일 경우 인간의 자존감은 허물어진다. 그 자리엔 자신을 스스로 패배자로 규정하는 자학만이 남겨진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자신을 아직 철저히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언젠가는 잡지를 만들고 싶고 “많이많이 사랑하며 많이많이 웃고 싶다.” 무기력한 삶보다는 변화무쌍한 삶을 살고 싶고 ‘오랑우탄도 할 수 있는’ 단순 노동보다는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다. 그렇다. 그에게도 꿈과 욕망이 있다. 다만 그 꿈과 욕망이 구체적이지 않고 모호할 뿐이다. 이런 그를 사회는 공상가 내지 철부지로 단정한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그 평가를 뼈아프게 인정한다. 시골 고향을 떠나 굳이 외지에서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가 결국 도시적 삶이 주는 ‘자극’ 때문 아니냐는 어머니의 핀잔은 정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자극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을 향한 냉소를 그나마 버텨낼 수 있는 이유는 가슴을 부글거리게 하고 머리를 뜨겁게 하는 어떤 열망 때문이다. 나만이 할 수 있는,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열망은 비루한 삶을 버텨내도록 하는 원동력이자 자존감을 가진 인간으로 남아 있게 하는 버팀목이다. 비록 그 열망 또한 언젠가는 냉소에 의해 싸늘히 식어버리고 마는 것일지라도.

소위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사회에 향한 냉소와 자신을 향한 냉소 사이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오락가락하고, 해야만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그의 모습에선 어떤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는지. 일본 청년 이와부치의 삶은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가까운 미래, 어쩌면 이미 현재의 모습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영화 을 통해 던져졌던 물음은 지금-여기서 현재화 된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많은 이들은 사회를 향한 냉소를 자신을 향한 냉소로 전이시키지 말고 사회를 향한 열망으로 순치시켜야 한다고, 즉 정치적 단결을 통한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이 주장에 깔려있는 당위적 요청, 즉 정치적 투쟁에 선뜩 동참하지 못하는 ‘소시민적 망설임’들에 대한 계몽주의적 요청마저 전적으로 옳은 것일까.

투쟁을 요구하는 수사들이 풍기는 단호함은 피를 끓게 하는 화려함을 있을지언정, 88만원 세대가 갖고 있는 불안감의 정체를 면밀히 살펴보는 세심함은 결여하고 있는 듯하다. 불안은 분명 냉소와 열정 사이를 오고가는 방황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방황은 유별난을 있 아니다. 역사상 모 방젊음은 이런 종류의 방황을 통해 성장 해왔고 더구나 그것은 젊음의 특권이라 여겨져 왔다. 그러므로 방황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현재 88만원 세대가 직면하고 있는 불안의 특유함은 외려 ‘방황할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 상황, 이것과 저것 중 빨리 하 현재선택하라는 재촉에서 비롯한다. 개인들로 하여금 각자가 직면하는 불안감의 정체를 충분히 사유할 수 있는 여유를 허락지 않는, 효율성과 목적성 위주의 분위기가 문제인을 있을지언사회적 투쟁에로의 촉구그러므뜩찮은 것@결여하고 러한 식의 비쁽들이불안에 대한 각 개인들 스스로의 숙고과윕 결누락될 여지그러크기 때문이다. 과연 개인적 열망 결즉시언사회화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있 비록 개인적 열망들의 분출을 근원적으로 보장키 위한 ‘과윕’일지라도줬언사회적 열망만이 답이자 최우선이라는 주장들이 다소 폭력 자체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개인적 열망들의 이질성을 이질성으로 남겨두는 것, 그리고 그 이후에 사회적 열망을 접속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느리지만 올바른 순서가 아닐까. 비록 불안 속에 머물지라도 그 누구의 삶이 아닌 나만의 삶을 끊임없이 열망하는 이와부치‘들’의 존재가 절실하다.

곽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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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4 21:08




전국의 대학들이 공사 중이다. 낡은 건물이 리모델링되고 새 건물이 올라선다. 하지만 새롭게 늘어나는 공간들이 온전히 학문적 목적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편의시설 유치라는 이름으로 수익시설들이 하나 둘 대학 내에 자리 잡고 있다. 대학의 물리적 확장이 학문의 확장이 아니라 자본의 확장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체계 속에서 대학의 기업화는 가속화 되고 있다.

요란한 공사 터의 가장자리에 소위 시간강사, 즉 비정규 교수들이 비껴 서있다. 비정규 교수란 ‘시간강사를 비롯해 외래, 겸임, 객원, 대우, 강의 전담, 연구 교수 등 정년 보장을 받지 못하고 한 학기 혹은 일정 기간 동안 임용되어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소위 임시직 강사’를 말한다. 임시 고용직이기에 이들을 위한 대학 내 공간은 빈약하다. 한 국감자료에 따르면 ‘국공립대학 시간강사의 공동 연구실은 평균 116명당 1개, 사립대학의 공동 연구실은 평균 136명당 1개’라고 한다. 덧붙여 보통 서너 개의 대학을 오고가며 강의를 하기에 이들이 주로 머무는 장소는 대학의 강의실이 아니라 이동 중의 지하철, 고속버스, 혹은 열차이다. ‘보따리장수’라는 자조적인 표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들은 대학 공간의 주변에서, ‘길’ 위에서 서성이고 있다.

대학의 주변인, 비정규 교수

비정규 교수들의 물리적인 주변성은 그 법적 지위에서 비롯한다. 고등교육법 제14조 제2항은 “학교에 두는 교원은 제1항의 규정에 의한 총장 및 학장 외의 교수, 부교수, 조교수 및 전임강사로 구분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에 따라 시간강사들은 애초부터 교원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대학의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교원은 아닌 존재. 이처럼 비정규 교수들은 법적으로도 주변화 되어 있다. 물론 1977년까지 이들도 교원 지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유신 체제에 비판적인 젊은 지식인들을 제도권에서 몰아내거나 순응시키기 위해 박정희 유신정권이 교육법을 개정한 이후부터 이들은 교원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박탈당했다.

교원과 비(非)교원의 차이는 상당하다. 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된다. 전임교원은 개인 연구실과 정년 보장 등의 혜택을 누린다. 하지만 앞서 서술한 바대로 비정규직 교수들은 대학 내에 개인 연구 공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서관과 연구 기자재의 이용에도 제한을 받는다. 또한 보통 한 학기마다 구두로 채용이 이루어지는 관행 상 다음 학기에도 강의를 맡게 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어 고용 불안정성이 매우 크다. 기본적인 4대 보험 혜택은 먼 나라 얘기다. 덧붙여 비정규직 보호법의 보호도 받지 못한다. 2년이 지나면 정규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기간제법 제4조 제1항에 “박사 학위(외국에서 수여받은 박사 학위를 포함한다)를 소지하고 해당 분야에 종사하는 경우”가 예외조항으로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현실적인 차이는 경제적인 면에서 드러난다. 비정규직 교수들의 경우 따로 프로젝트에 참여해 학술진흥재단 등에서 연구비를 지원받거나 여타 활동을 하지 않는 한 생계는 오직 강의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서울과 수도권의 시간강사 평균 연봉(평균 4.2시간 강의×30주×3만 7,000원)은 ‘487만 5,000원’이며 전체 시간강사 연봉 추정액(주당 9시간 강의×30주×3만 7,000원)은 ‘999만 원’이다. 이는 전임강사의 평균 연봉 ‘4,123만 8,000원’에 한참 못 미치는 액수일뿐더러, 2008년 4인 가구의 연평균 최저 생계비인 ‘1,519만 176원’에도 못 미치는 액수이다. 물론 이 또한 강의가 보장됐을 때의 얘기이고 여러 대학을 오고가며 사용하는 교통비 등 여타 지출비등 까지 고려한다면 실수입은 훨씬 줄어든다. 비정규직 교수들의 주변적인(marginal) 법적 지위는 이들의 삶을 한계적(marginal)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권리 없는 의무, 대가 없는 노동

왜 비정규 교수들의 교원 지위는 인정되지 않는 것인가. 전임교원들에 비해 하는 일이 없어서? 비정규 교수들은 전체 대학 수업의 절반 이상을, 전임교원들이 꺼리는 교양수업들 같은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을 도맡아 한다. 수업 준비에서부터 강의, 그리고 학생에 대한 평가까지 수업과 관련하여 전임과 비전임 사이의 업무량의 차이는 없다. 대학이 전임교원들에게 요구하는 연구 성과 또한 비정규 교수들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되고, 외려 전임교원이 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연구 성과를 쌓아야 하는 처지를 고려한다면, 연구 의무를 기준으로 전임과 비전임을 나누는 것도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질적 차이가 있는 것인가. 실제로 ‘모대학교 교무처장’처럼 시간강사들을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라 평가절하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뿌리 깊은 편견과 계급의식의 소산이다. 연구력을 비교해 봐도 그렇고, 강의 평가에 관한 통계를 봐도 ‘교양 강의의 경우 시간강사가 좀 더 높게, 나머지 전공과 교직 강의에선 좀 낮게 평가’되고 있으며, ‘평균 하면 전임과 시간 강사에 대한 수업 평가는 비슷한 것’으로 드러나 전임과 비전임 사이의 차이는 크지 않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대학 내 의사결정 과정에 비정규직 교수들이 참여하지 못한다는, 외려 차별적 차이이다.

이러한 불균형에 일정부분 동의하면서도 국가와 대학은 재정 상태를 이유로 비정규 교수들에게 교원과 전임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 난색을 표한다. 하지만 갈수록 높아지는 등록금과 늘어나는 수익성 건물 앞에서 돈이 없다는 말은 변명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대학 전체 예산에서 시간강사들의 강의료가 차지하는 비율은 ‘2퍼센트’ 정도에 불과하다. 또한 2009년 주요 사립대학이 쌓아 놓은 적립금만 해도 약 ‘6조원’ 이라고 하는데 이는 시간강사의 연봉을 1,000 만원에서 3,000 만원으로 현실화할 때 20만 명의 신규 인원을 채용할 수 있는 액수이다. 현재 시간 강사는 ‘7만 명’ 정도이다. 이처럼 대학은 전임교원과 동일한 양질의 노동력으로 대학 강의의 절반이상을 충당하면서도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며 합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 있다. 비용효율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매우 훌륭한 경영 수완이라 할 수 있다.


침묵, 대학 내 정치적인 것의 말소

비정규직 교수 7 인의 죽음은 이러한 구조적 모순과 무관하지 않다. 신자유주의의 고용 유연성 기조는 대학의 상업화와 맞물려 비정규 교수의 처우 개선을 가로막는다. 다른 비정규직들과 마찬가지로 비정규 교수들은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려 한계 상황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언제든 대체 가능한 ‘잉여인간’으로 취급받고 있다. 故 한경선 박사가 남긴 유서의 내용처럼, 대학의 부조리와 모순은 ‘열심히 연구와 강의를 하리라는 초기의 순수한 열정’을 ‘이 사회에 대한 환멸’로 바꿔버린다.

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대학 사회의 ‘침묵’이다. 전임교원은 말할 것도 없고 비정규 교수들조차 이 사안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는 한국의 대학 사회가 여전히 수직적 계급 사회임을 드러낸다. 학문적 성과와는 별개로 ‘대인 관계 부족’이라는 전임교수의 주관적 평가와, 지연과 학연과 파벌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대학 사회 안에서 비정규 교수들은 감히 ‘찍힐까’ 두려워 나서지 못한다. 임용과 관련해 알게 모르게 거래된다는 ‘뒷돈’은 그래서 구조적 산물인 것이다. 전임교수들은 비정규 교수가 생산한 잉여를 누리며 편히 사회의 민주화를 외치지만, 정작 대학 내의 민주화에는 무관심하다. 비정규 교수들 또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쉽게 자신을 합리화 하거나 체계의 논리를 내면화 한다.

이러한 침묵 상태, 주변적인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언어를 박탈당한 상태에서 다양한 목소리들은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 목소리만 단일한 공간을 울린다. 그 과정에서 모든 가능성들은 실현될 기회를 상실하고 정치적인 모든 것은 말소된다. 비정규 교수들의 한계 상황이, 그리고 이 구조적 모순을 자양분으로 삼아 신자유주의 체계를 내면화하는 대학 사회의 모습이 이를 예증한다. 과연 벼랑 끝에서 추락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대학 사회 내부의 자성의 목소리, 그 정치적 실천이 절실하다.

글 곽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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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4 21:06



최지나 (여상힉협동과정 석사과정)


양익준 감독의 영화 『똥파리』는 보다 구체적인 방식으로 ‘가족’을 보여준다. 영화 『똥파리』 속 인물들의 가족은, 가족 개개인들이 평생에 걸쳐 지게 될 짐짝이나 다름없는 공포와 상처의 기억이다. 이는 가족이 결코 자원이 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이며, 드러낼 수 없는 금기와도 같았던 ‘핵가족 이데올로기’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적나라한 재현에서도 젠더의 프레임을 적용하면 ‘아내 폭력’이라는 또 다른 문제가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영화 『똥파리』가 저예산 독립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흥행성적을 올리고 있는 것은 ‘가족만이 희망이다, 내 가족밖에 없다’는 식의 한국사회의 가족담론에 균열을 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가족이야기를 재현하는 방식이 극 중 가족문제(가정폭력 문제)의 핵심에 서 있는 매 맞는 여성이 아니라, 부모의 폭력과 고통을 보고 자라는 ‘아이의 시선’이라는 안전하고 천진난만한 말하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아내폭력문제에서 사람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직접적으로 매 맞는 아내들의 고통을 말하는 것 보다, 그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범죄자로 성장할지 모른다는 사회적 우려와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여성폭력문제에서 여성의 고통, 혹은 남성의 가해를 우선순위로 놓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젠더 권력구조와 결혼제도, 성규범과 가부장제 등으로 겪게 되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문제의 본질은 감추어지고, 여성들 혹은 ‘남성’과 다른 젠더들은 희생된다.

가부장적 시선의 내재화

영화 『똥파리』는 가정폭력과 가난이 빚어내는 폭력의 순환 고리를 그려내며 ‘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어’ 라고 울부짖는 상훈의 갑갑한 현실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갑갑함의 더 깊은 바닥에는 아버지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고 여동생과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던 ‘리틀 가부장’이 가진 죄책감이 숨어있다. 이 점이 영화 『똥파리』가 재현하는 가족 문제가 여성의 입장에서 마냥 고개를 끄덕일 수 없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상훈이 겪는 아버지에 대한 갈등은, 죽어간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누나나 연희와 같은 다른 생존자 여성의 삶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이다. 이 부분이 바로 감독의 시선을 넘어 아내폭력을 ‘가정폭력’으로 ‘순화시켜’ 바라보려는 사회의 시선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폭력을 일삼던 상훈의 아버지는 결국 아내와 딸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아버지가 교도소에 있는 동안, 상훈은 용역깡패가 되었다. 상훈은 복역 후 돌아온 아버지를 찾아가 그를 구타하는 ‘패륜’을 저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자살기도를 한 아버지를 발견하고는, 그를 살리기 위해 병원에 데려가고, ‘할 수만 있다면 모두 뽑아내고 싶었던 자신의 피(아버지의 피)’를 수혈하여 아버지를 살린다. 또한 상훈은 자신이 아버지를 때리는 모습을 남조카 형인이 목격한 상황에 맞닥뜨려 충격을 받는데, 이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을 지켜보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림과 동시에, 어그러진 부자관계를 그대로 조카(아들)에게 노출시켰다는 ‘걱정’이기도 하다.

상징화되는 여성들

영화 속 여성들은 상훈의 시선에 따라 죽은 어머니와 여동생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로 나타난다. 그를 한결같이 따뜻한 태도로 맞아주는 이복누나는 전형적인 ‘어머니’의 모습이자, 폭력 남편을 피해 아들과 함께 도망쳐온 아내폭력의 생존자이기도 하다. 상훈은 누나에게 자신의 친구인 흥신소 사장 만식을 소개시켜주려 한다. 만약, 상훈의 바람대로 누나와 만식이 결혼하였다면, 누나는 이전과 다른 ‘평안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어쩌면 감독은 만식이 ‘고아’이기 때문에 가족 폭력의 순환고리에서 유일하게 비껴 서있는 인물로 그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만식은 타인을 폭행한 경험의 몸을 가진 사람이다. 극 전체에 나타나는 상훈의 폭력들과 만식의 사업(흥신소)이 관객에게 어느 정도 용인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깡패이기에 앞서 ‘남성’이기 때문이다. 폭력은 실천과 용인이 가능한 남성성이다. 결국, 남편을 피해 도망쳐와 상훈의 누나가 만날 수 있는 가장 괜찮은 남성이 만식과 같은 사람일 수밖에 없다면, 이야기는 다시 폭력적인 가정의 문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던 고등학생 연희 역시, ‘그냥 맞고만 있을 것 같지 않은’,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맞는 모습을 보여주고만 있을 것 같지는 않은 ‘다른 여성’이다. 그러한 연희는 아버지에게 저항하다 결국 죽었던, 그렇지 않았다면 폭력의 고리 안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여동생의 모습이기도 하다. 연희가 상훈에게도 학교에도 집안에서의 경험들을 말하지 않는 모습은 꽤 인상적인데, 이는 공적인 자리 혹은 남성 앞에선 웃는 얼굴만 보여주며 (신경을 거스르게 하지 않는) 인형 같은 존재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영화 속 진실과 현실의 잔인함 사이

이렇듯 영화 속 여성들의 불쌍한 현실 혹은 죽음에 대해 ‘그 여성들이 왜 그렇게 당해야만 하지?’ 라고 묻고자 한다면 어떤 답을 낼 수 있을까. 남편의 상습적인 폭력 속에서도 아이를 둘이나 낳고 살고 있던 - 아마도 경제적인 부담까지 지고 있었을 - 어머니, 아버지와 남동생의 일상적인 학대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여고생, 남편의 정신분열과 노점단속에 시달렸을 어머니, 남편을 피해 아들과 도망친 여성 등, 영화 『똥파리』 속 여성들은 고문 같은 일상 속에서도 열심히 ‘가정’을 지켜나간다. 가족들을 둔 채 혼자 뛰쳐나갔다면 아마도 천하의 ‘나쁜 년’이 되었을 아슬아슬한 선택의 줄타기를 하고 있는 여성들이다.

고백하자면, 영화에 나오는 남편들의 잔인한 구타장면과 식칼 쥔 손을 클로즈업한 장면들에선, 공포감보다, 영화 밖에 있을 또 다른 그들이 이젠 발각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안도감이 들었다. 그만큼 잔인하고 그만큼 슬픈 것이 아내폭력이다. 어쩌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피가 흥건하고 살이 찢겨나가는 폭력들이 매우 극단적인 사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아왔던 아내폭력 사례들 중 많은 경우의 여성들은 남편에게 당하는 폭력을 살해의 위협으로 느끼고 있었다. 구타는 물론, 칼로 위협하고 연장으로 치고 공기총을 쏘는 장면은 영화에서나 구성될 법한 장면이 아닌, 실제 아내폭력에서 충분히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다. 2009년 초, 부산의 한 남성은 아내를 강간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자 자살하고 말았다. 2006년에는 스토킹(성폭력)하던 여성이 차를 타고 도망가자 그 차에 매달려 쫓아가던 스토커 남성이 결국 차에서 떨어져 사망하고, 도망가던 여성은 살인죄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는 사건이 있었다. 여성에게 폭력을 저지르던 남성들의 한 여성에 대한 (아마도 애정 비슷한 것으로 비춰질) 집요함과 자기위안에 할 말을 잃게 된다. 법에도 호소하고 죽을 만큼 저항했지만, 정절을 지키라는 ‘은장도’의 칼날이 조금이라도 가해남성을 향해 비껴가면 더 큰 죽일 년이 된다는 것이다. 스스로 죽거나 당해야만 하며, 만약 당하더라도 죽을 만큼 저항하지 않은 것이니 ‘너도 즐긴 것’이 된다. 가정폭력의 고리보다 더욱 반복되는 고리가 바로 여성폭력의 고리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질문을 던져야 할 때

영화는 앞서 언급한 가부장제, 남성성, 결혼제도, 성별화된 몸담론 뿐만 아니라 공교육, 빈곤, 신자유주의, 노동시장의 성차별 등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갈등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모두가 피해자다’, 혹은 ‘모두가 가해자다’라는 식으로 젠더구조를 탈색시키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족에게 기대를 하고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지킬 수밖에 없는 것은 누구보다 여성이다. 기혼여성이고 어머니일 때 안정적인 사회적 위치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진짜 잔인한 현실이라는 말이다.
사적영역으로 분리되어있는 가족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은폐된 폭력들은 결코 끝내기 힘든 문제들이다. 한 사회의 젠더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아내폭력을 비롯한 모든 성폭력은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 이제는 피해여성들을 향한 원인 유발론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식의 판단들은 사라져야한다. 가정폭력을 바라보는 문제의 초점은 ‘아내폭력’이라는 구체적인 틀로 옮겨가야한다. 더불어 ‘왜 하필이면 폭력의 방식을 사용하는가’라는 가해남성들을 향한 질문도 함께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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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4 20:46

손석춘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무릇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은 가장 중요한 공론장이다. 공론장이 닫혀있을 때, 민주주의는 질식할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소통 부재’를 드러내는 상징이 바로 서울 광화문의 ‘명박산성’이다.

물론, 대한민국 한 복판의 네거리를 가로막아 섰던 명박산성은 촛불항쟁이 수그러든 뒤 사라졌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서울 용산 철거민들의 참사 앞에, 화물노동자들의 절규 앞에,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행렬 앞에 명박산성은 견고하게 서있다. 더구나 ‘공권력’이 그들을 ‘로마병정’처럼 지키고 있다.    

문제는 권력과 민중의 소통 공간이어야 할 언론이 되레 명박산성을 옹호하는 데 있다. 아니, 공권력을 부추기며 명박산성을 함께 지키는 데 있다. 청와대와 국회를 장악한 한나라당과 여론시장을 장악한 언론권력이 손잡고 아래로부터의 민중 요구를 철저히 억압하고 있는 게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다. 

당장 언론권력이 정치경제 현상을 다루는 보도를 짚어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누가 보더라도 여론시장을 독과점하고 있는 <조선일보><동아일보><중앙일보>는 한나라당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심지어 보수적 언론학자들이 탄핵방송에 대해 ‘편파방송’이라며 참으로 편파적으로 분석한 보고서에서도 세 신문과 한나라당의 연관성을 적시하고 있을 정도다. 한국언론학회가 낸 ‘대통령 탄핵 관련 TV 방송 내용분석 보고서’(2004)가 그것이다. 보고서는 “언론 매체들은 그들이 대리하는 권력과의 공조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정파적 성향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며 “이른바 빅3으로 불리는 조선, 중앙, 동아일보는 한나라당의 후원자”라고 서술했다.

한나라당의 계보학


그렇다면 왜 한나라당과 세 신문은 ‘동맹관계’를 맺었을까. 한국 민주주의 전개과정과 깊은 연관이 있다. 알다시피 한나라당은 1997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 중심의 신한국당을 이회창 후보 중심으로 이름을 바꿔 ‘신장개업’한 정당이다. 신한국당의 뿌리는 깊숙이 뻗어 있다. 김영삼 정권의 실정과 부패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그 이름으로는 대선에 나서기 어려웠던 게 당명을 바꾼 가장 큰 이유다. 신한국당의 전신인 민자당은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 기존의 민정당을 김영삼의 민주당, 김종필의 자민당과 합당해 만든 정당이다. 본류가 민정당에 있음은 말할 나위 없다. 그렇다면 민정당은 어떤 정당인가. 1980년 쿠데타와 오월학살로 집권한 전두환이 만든 당이다. 민정당이 민주정의당의 줄임말이라는 사실에 이르면 ‘정치언어’의 기만성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물론, 민정당 또한 갑자기 나타난 정당은 아니다. 그 모태는 박정희가 만든 공화당이다.  더 거슬러 가면 공화당은 이승만의 자유당과 잇닿아있다. 결국 당명이 그 시대 권력자에 맞춰 계속 재구성되어 왔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승만의 자유당, 박정희의 공화당, 전두환의 민정당, 노태우의 민자당, 김영삼의 신한국당이 그것이다.

그런데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은 후보시절부터 당명을 바꾸는 ‘수고’를 했는데도 김대중 에게 패배했다. 한나라당이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단 한 번도 야당 경험을 해보지 못한 정당이어서 곧 공중분해 될 정당이라는 전망까지 거침없이 나오기도 했다. 집권자를 중심으로 ‘양지’를 찾던 무리가 야당에 계속 몸담을 가능성이 적을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한나라당과 언론권력의 밀월관계

하지만 한나라당의 해체 전망은 성급한 진단임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한국 정치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변수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무엇일까? 바로 언론이다. 1997년 12월 대선에서 김대중 정권의 등장은 비록 김종필과의 연합(DJP)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헌정 사상 첫 평화적 정권 교체였다. 

그래서다. 김대중 정권의 등장은 정당성 없는 권력 주변에 들꾀던 정상배들에게는 정치적 위기였다. 권력과 오랜 세월에 걸쳐 ‘밀월 관계’로 온갖 특혜를 받으며 성장해온 언론들로서도 위기였다. 언론이 정치인 김대중에 대해 집요하게 ‘지역감정’ 조장은 물론 ‘색깔’을 덧칠해왔기에 더 그랬다. 이미 언론 개혁의 사회적 요구도 언론계 안팎에서 거세게 일고 있었다. 바로 그렇기에 한나라당과 언론권력이 손잡는 것은 필연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이해관계가 같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살아나는 과정에서 언론권력은 튼튼한 동반자였다. 동시에 언론개혁의 사회적 압력에 몰리고 있던 언론사에게도 정치권의 한나라당은 기댈 ‘언덕’이었다. 게다가 한나라당과 언론권력 모두 정치활동과 언론활동을 통해 영남에 거주하는 국민들의 지역정서를 교묘하게 부추기며 ‘악용’해갔다. 

언론사 세무조사로 신문사 사주들의 천문학적 탈세 규모가 드러나 대법원 판결까지 났으면서도 그 신문들이 ‘건재’할 수 있었던 까닭도 탈세라는 엄연한 불법 범죄행위를 생뚱맞게 ‘언론 탄압’의 문제로 몰아간 한나라당과의 연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기실 언론권력은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에 신문사 진입장벽으로 인한 광고 독과점, 차관 특혜, 세제 혜택, 세무조사 성역과 같은 온갖 특혜를 받으며 대기업으로 성장해왔다. 언론권력은 박정희의 3선 개헌과 유신체제를 적극 찬양하고 나섰으며, 전두환 일당의 오월학살극마저 비호하고 전두환을 ‘구국의 영웅’으로 추어올렸다. 다시 대통령 직선제로 바뀌었을 때 도 노태우 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했다. 
 
그들에게 김대중 정권의 등장이 얼마나 불편했을까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김대중 정권 말기에 불거진 아들들의 비리에 한나라당과 언론권력이 ‘환호’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언론 개혁에 대해 발언한 노무현 후보가 인터넷의 도움을 받아 당선됐다. 더 큰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언론권력과 한나라당은 노무현 정권 내내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다. 그 과정에서 언론은 철저하게 정파 대변기관으로 전락해갔다. 여론시장을 독과점한 언론권력의 도움으로 한나라당은 마침내 2007년 12월 대선과 2008년 4월 총선을 통해 청와대와 국회를 모두 장악했다.

언론독재 체제에 저항할 주권혁명의 필요성

문제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한나라당이 국회까지 장악했는데도 언론권력의 정파성이 전혀 달라지지 않은 데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해관계가 같기 때문이다. 세계적 경제 위기로 부익부빈익빈이 가속화되는 나라에서 이명박 정권이 극소수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정책을 무람없이 펴나가는 데는 바로 그 소수의 이익을 ‘국민 이익’으로 포장하고 있는 신문권력이 자리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KBS에 이어 MBC까지 장악하려고 온갖 무리수를 두는 이유도, 신문권력과 재벌에 지상파 방송진출을 허용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이 손잡고 대다수 민중의 이익을 배제해나가는 한국의 정치현실은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한낱 투표로 이뤄지는 게 아님을 여실히 입증해준다. 기실 언론권력과 갈등을 빚던 김대중-노무현 정권조차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글로벌 스탠더드’라며 추진한 사실에 주목하면, 그들 또한 언론권력이 설정해놓은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명박 정권은 김대중-노무현이 걸어간 신자유주의 틀이 세계적으로 파산선고를 받았음에도 되레 더 노골적이고 폭력적으로 추진하고 있어 자칫 국가적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이명박 정권과 언론권력은 지난 10년 동안 진전되어 온 남북관계마저 파탄을 내는 데도 손잡았다. 

민주주의가 말 그대로 ‘민중의 자기 통치’라면, 단언하거니와 한국 민주주의가 성숙해가는 데 최대 걸림돌은 공론장을 뒤틀고 있는 언론권력이다. 언론권력이 공권력 사용을 독촉하며 이명박 정권을 사실상 ‘통제’해가는 오늘의 현실을 ‘언론독재 체제’로 개념화할 수 있다. 기득권 세력이 언론권력을 중심으로 ‘집결’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해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언론독재 체제에 맞서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 나오는 민주공화국’을 구현하려면 주권자인 국민이 자신의 권리를 찾는 데 직접 나서야 옳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촛불항쟁에서 확인한 ‘직접 정치’와 주권혁명의 고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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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2.02.04 19:54

김명석 (이화여대 철학과 강사)


벚꽃이 펄펄 내렸다. 네 눈동자는 부풀어 올랐다. 네 손을 잡을까 말까 고민했다. 힐긋 본 네 볼은 몹시도 미끄럽고 뽀얗다. 해가 진 저녁 벤치에 앉아 짤랑거리는 미루나무와 몽환 같은 구름을 바라보았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다. 너는 시선을 나에게 돌렸다. 유난히 두툼하고 빨간 입술. 소리는 날아가고 너의 색깔과 움직임만이 그 공간에서 잔치를 이루었다. 사랑하고 싶어. 사랑해. 나에게 일어났던 그 느낌을 굳이 사랑이라 불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너 역시 날 사랑하기 시작할 때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았다. 어느 장소에 있더라도 너는 내 생각이 났다고 고백했다. 무슨 음악을 들어도 나와 함께 듣고 싶어 음악을 멈추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열량의 총량은 제한되어 있다. 모든 뜨거움은 식는다. 모든 격정은 잔잔해진다. 그것들은 동역학과 열역학의 지배를 받으며 시간적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노란은행이 폭풍처럼 휘날리던 날 너는 사랑이 식었다고 말했다. 식었던 것이 너의 충동이라고 말하지 않고 왜 사랑이라고 말해야 했을까? 사랑은 가변적 현상이며 일시적 현상이다. 그것은 순간적 현상이다. 그것은 삶의 극히 부분적 현상이다. 사랑이 변했다. 사랑이 끝났다.

사랑이란 원래 몹시 모호한 현상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성찰하지 않은 채 사랑을 시작하고 가열하고 끝내고 다시 시작한다. 상처 입은 자들은 사랑의 본질을 파악한 양 사랑에 대해 단호하게 말하기 시작한다. 사랑은 소유욕이다. 사랑은 집착이다. 사랑은 환상이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 사랑은 나쁘다. 사랑은 없다. 사랑을 막 시작한 이들은 사랑에 대해 온갖 찬사를 늘어놓는다. 사랑은 운명이다. 사랑은 두근거림이다. 사랑은 체험이다. 그들이 시작하려는 것, 가열하고 있는 것, 끝내려는 것, 잃었던 것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나는 너의 두툼하고 빨간 입술, 확장된 동공, 뽀얀 피부에 끌렸다. 네 입술이 유난히 발그스름해지고 두툼해지는 때가 배란기 직전이었다는 것을 안 것은 최근이다. 그때 네 피부는 뽀얗게 변하고 동공은 확장되었다. 둘 중에 하나가 진실이다. 두툼하고 빨간 입술, 확장된 동공, 뽀얀 피부를 내가 매력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너는 배란기 직전에 그렇게 변했다. 아니면 너의 그런 모습이 네가 지금 배란기 직전이라는 징표이기 때문에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에 끌리게 되었다. 둘 사이의 인과관계는 보다 원시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

배란기 직전의 네 모습을 내가 아름답게 여기는 것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만일 내가 여성에게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내 유전자를 퍼트리는 데 불리할 것이다. 또한 배란기를 앞두고 내가 아름답게 여기는 모습으로 네가 바뀌는 것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만일 네가 남자들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변모하지 않는다면 네 유전자를 퍼트리는 데 지장이 올 것이다. 배란기 직전에 실제로 너의 성욕은 증가한다. 배란기에 고백한 사랑, 그때 시작된 사랑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배란기를 조심하라.

두툼하고 빨간 입술이 그 자체로 아름답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매력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었다. 신경회로가, 그 회로를 설계한 유전자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여태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우리 신경회로에 그리고 우리 유전자에서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다. 그 속에서 지금 무엇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우리가 감지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것들이 우리 판단을 좌우하고 있다. 이것은 지배이면서 동시에 기만이다. 우리는 각자의 유전자에게 기만당하고 있으며 지배받고 있는 중이다. 이것이 내가 느낀 매력, 네가 가진 매력의 진실이었다. 너에 대한 나의 이러한 끌림이 내 사랑의 본질이었다고 결론내리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나에게 시작된 그 느낌은 사랑이 아니라 유전자 엔진의 가동이었다.

내가 너에게 사랑에 빠진 것은 네가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세부를 그렇게 따뜻하게 이야기했기 때문도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 사라방드를 그렇게 쓸쓸하게 이야기했기 때문도 네 얼굴의 기하학적 조형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내 후각신경이 너의 코퓰린 페로몬에 반응했기 때문이다. 너의 코퓰린 분비가 왕성해지는 날 나의 테스토스테론은 증가하고 나는 너를 만지고 싶어 안달했다. 이 역시 지배이자 기만이다. 그리고 너는 나의 안드로스테논 페로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페로몬을 감지하는 우리 능력은 순전히 생리학적 본능이다. 우리는 그 능력을 키우기 위해 애쓴 적이 없다. 우리에게 그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했다. 페로몬에 대한 우리 반응을 우리는 지금까지 사랑이라고 불렀다.

나는 네게서 나는 솔잎 냄새를 무척 좋아했다. 노을로 붉게 타는 서해 해송에서 나는 그 냄새. 네 품에 얼굴을 묻었다. 너는 내게서 푸른 보리 풀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네가 나의 체취를 좋아하는 것은 내가 너와 유전적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유전적 다양성은 유전적 적응 능력을 높이기 때문에 우리 몸 속에는 유전적 다양성을 확대하려는 메커니즘이 장착되어 있다. 유전적 차이를 감지하는 우리 능력은 유전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유전적 본능이다. 우리는 이것을 학습한 적도 의식한 적도 없다.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가 경험하는 이끌림의 본질을 구성한다. 이것을 우리는 지금까지 사랑이라고 불렀다. 너의 사랑은 너의 의지가 아니었다. 나는 자동기계처럼 너를 사랑했다. 우리가 과연 사랑했을까?


우리가 과연 사랑했을까, 하는 물음은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의존한다. 사랑은 모종의 욕구이자 욕망이다. 그것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이다. 이것은 하나의 지향적 행위이며 따라서 심적 사건의 범주에 속한다. 사랑에 대한 많은 담론들이 이 분명한 사실을 무시하곤 한다. 의도적 행위와 기계적 근육운동 사이에는 제거할 수 없는 개념적 간격이 존재한다. 눈에 먼지가 들어와 반사적으로 눈이 깜빡이는 것과 추파를 던지기 위해 윙크하는 것은 모두 눈두덩 근육을 사용한 신체 운동이다. 그러나 둘은 동일한 범주의 움직임이 아니다. 하나는 기계적 행동이고 다른 하나는 의도적 행위이다. 윙크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이 없다면 의도적 윙크와 반사적 깜빡임 사이엔 아무런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호르몬이다, 사랑은 유전적 본능이다, 등의 이야기는 사랑의 본성을 전혀 해명해주지 못한다. 사랑에 대한 너의 관념은 너의 연애 경험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 내가 사랑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했을 때 너는 나의 성찰을 추상적이라고 불평했다. 그것은 연애를 많이 해보지 못한 사람의 사변이라고 놀렸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연애를 많이 해본 너의 특권이다. 그러나 사랑이 의도적 행위라는 것을 너도 인정한다. 너 또한 분명 사랑이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신경생리학적 사건이라고는 믿지 않을 테니까. 네가 나를 사랑할 때 너는 지향성, 의지, 의도,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추상성을 배제하고 현실을 반영하고 경험을 받아들인다는 명분으로, 또 다시 사랑을 순전히 육체적 사건이며 물리적 사건이라고 후퇴하지 말기를 바란다. 아 잠깐, 물론 너는 그렇게 후퇴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너는 철저한 유물론자가 되면 되니까. 이 세계에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이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오직 물리적 사건뿐이라고 전제해도 좋다. 사랑이든 희망이든 모든 심적 사건은 이름에 불과하다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네가 철저한 유물론자가 아니라면, 그래서 자유로운 심적 사건들의 존재를, 지향적이고 의도적인 사건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리고 사랑이 그러한 범주의 사건에 속한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네 사랑에서 신체 내부의 신경생리학적 과정 그 이상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심적 사건은 물리적 시공간에서 벌어진다. 그래서 심적 속성은 항상 물리적 속성을 통해 실현된다. 의도적 행위는 신경생리학적 과정과 근육의 움직임을 동반한다. 사랑 또한 우리 신체 속에서 벌어지고 신체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 확실하다. 유전자와 호르몬과 신경회로가 작동하지 않고서도 사랑할 수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말은 사랑을 신경생리학적 과정과 동일시하거나 그런 과정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심적 사건이 물성에 의해 실현된다고 해서 심적 사건이 곧 물리적 사건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하려는 나의 의도는 물리적 속성으로 환원할 수 없다. 만일 사랑이 모종의 의도적 행위라면 우리는 사랑이 단순히 유전자의 명령이라거나 호르몬 분비의 결과라고 말하는 데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내 속에서 벌어지는 자극작용과 신경세포와 화학적 프로세스를 감지하지 못한다. 만일 페로몬이 너에 대한 내 사랑을 야기했다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생각은 페로몬의 기만이다. 만일 유전자가 내 사랑을 야기했다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생각은 유전자의 기만이다. 나를 움직이는 것이 오직 이것들뿐이라면 나는 페르몬과 유전자의 매트릭스에 갇혀 사랑하고 기뻐하고 그리워하고 쓸쓸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일어나는 심적 사건을 나는 감지할 수 있다. 나의 쓸쓸함, 나의 그리움, 나의 두려움, 나의 슬픔, 나의 분노를. 내가 이것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나의 신경회로와 호르몬과 유전자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심적 사건은 단순히 전자기파, 음파, 분자, 압력 등 수많은 자극들,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각적 수용기들, 전기화학적 신호 전달, 그것을 전송하고 처리하는 실타래처럼 얽힌 신경세포들, 이 모든 것들이 복잡하게 서로 작용하는 프로세스의 복합이 아니다.


모든 욕구와 행위는 기본적으로 쾌락, 즐거움, 기쁨, 행복을 증대하려는 간접적 또는 직접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 사랑이 모종의 행위라면 사랑 역시 행복을 증대하려는 욕구에서 출발한다. 누구의 행복이며 누구의 쾌락인가? 오직 나의 쾌락만을 추구한다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를 이용해서 나의 쾌락을 증대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받는 이의 쾌락에도 관심을 가진다.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가 누리는 쾌락의 합이 일정할 때 사랑받는 이가 누리는 쾌락의 총량이 크면 클수록 사랑하는 이의 사랑이 크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사랑하는 이의 쾌락은 없고 오히려 고통이 증가될 때 너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경우 사랑받는 이가 받고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분명 쾌락의 공정한 분배이다.

네 생각이 옳은지 모른다. 그러나 사랑에서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사랑이 어떤 행복의 증대, 어떤 쾌락의 증대를 의도하는가 하는 것이다. 너는 사랑에서 필수적인 것이 성적 쾌락의 증대라고 말했다. 분명 성적 쾌락은 즐거움과 행복의 모든 것이 아니다. 서로의 성적 쾌락을 증대한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쾌락이 감소한다면, 삶의 다른 영역에서 불쾌감이 증폭된다면, 아무리 성적 쾌락이 크다 하다라도 너는 나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나아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항상 서로의 성적 쾌락을 증대하려고 의도하는 것도 아니다. 성적 쾌락은 사랑에서 항상 필요한 것도 항상 충분한 것도 아니다. 사랑은 서로 좋은 것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분명하지만 그 좋은 것이 반드시 언제나 성적 쾌락일 필요는 없다.
나는 너에게 가장 드라이하고 가장 쿨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다. 한 자세, 한 욕구, 한 행위가 사랑이 되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필요조건을, 개별 사랑의 특수성이 아니라 모든 사랑들이 공유하고 있는 어떤 것을, 이성애 동성애 우정 모성애 부성애 형제애 자매애 사제의 정 동료애 인류애 동정 자기애 등 사랑의 가능한 모든 자세들이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을. 이것이 결여되면 사랑이 되지 않는 것, 이것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강한 사랑이 되는 것, 나는 그것을 가지고 너를 사랑하고 싶다. 나는 너에게 그런 사랑을 받고 싶다. 식지도, 변하지도, 사라지지도, 끝나지도 않는 그런 사랑을.


나는 한갓 영혼 없는 자동기계로 태어나 생각하는 자아에 이를 때까지 성장해 나간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누군가 나를 축하했다. 그녀는 내가 자기와 같은 시공간에 거주하게 되었다는 점을, 같은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점을 축하했다. 그녀는 내가 세계의 진정한 거주자가 되기를, 공동체의 진정한 일원을 되기를 희망했다. 내가 세계 내에 있는 사물들을 지각할 수 있기를, 내가 타자를 인식할 수 있기를, 가치들을 지향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내가 참된 믿음을 가지기를, ‘참되다’라는 개념을 가지기를, 그리하여 그 개념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내가 ‘좋다’라는 개념을 가지기를, 내가 ‘아름답다’라는 개념을 가지기를 희망했다. 그것은 그녀가 나에게 베푼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사랑이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네가 나와 함께 사물과 가치와 목적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너를 이 세계의 공동 거주자로서 너를 수용한다. 사랑은 자연세계와 공동체를 공유한다고 믿거나, 공유하기를 의도하고 공유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열정이다. 사랑은 점령과 점유와 독점과 복속의 야욕이 아니다. 사랑은 국경선을 초월한다. 사랑은 월경한다. 사랑은 공동의 시공간과 가치를 만들기 위해 손을 마주 잡는다. 동행하고 동역하고 약속하고 합심한다.

나는 네가 잘못에 빠질 때 결코 기뻐하지 않는다. 네가 좋은 것을 행하고 아름다운 것을 만들 때 너보다 더 크게 기뻐한다. 네가 표현하는 것, 네가 재현하는 것, 네가 만드는 것, 네가 행하는 것, 네가 말하는 것, 네가 믿는 것이 이 자연세계와 잘 어울리기를, 마음들의 공동체에 잘 어울리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참됨과 선함과 아름다움의 추구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사랑은 세계를 참되게, 좋게, 예쁘게, 표현하고 표상하고 재현하고 구현하기 위해 너와 협력하는 것이다. 사랑은 너를 위해, 너를 통해, 너와 함께 코스모스를 발견하고 코뮌을 만들려는 욕구이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받는 이를 사물이 공유되는 자연세계와 서로의 가치가 공유되는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 여기고 실제로 그렇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사랑은 인간 육체에 정신이 깃들게 하는 원초적 힘이다. 이 사랑은 그저 그런 물리적 사건들에 불과한, 육체들 속에 일어나는 신경생리학적 과정들과 저기 바깥의 열역학적 소란들을 결집하여 하나의 심적 사건을 만들어내는 중력이다. 이 중력이 약할 때 유전자와 호르몬과 페로몬의 매트릭스 속에서 끊임없이 기만하고 기만당하고 상처주고 상처받는다. 사랑의 중력은 물리적 사건을 넘어선 어떤 것이 출현하는 곳으로서 세계를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은 세계를, 그 속에 있는 자신을, 타자를, 영혼들을, 사물들을, 이념들을 더 깊게, 더 넓게, 새롭게 인식한다. 이 차가운 사랑이 가장 뜨겁게 달아오를 것이다. 붉은 입술의 고운, 너를 향한 불멸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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